“원산, 닫힌 도시를 열다” – 인천시립박물관 이동영 연구원

원산, 닫힌 도시를 열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을 시작으로 원산, 인천 등 세 항구가 차례로 개항하였다. 개항 후 세 도시는 각각의 특성을 유지한 채 근대도시로 발전해 갔고, 원산은 러시아 및 일본과 연결되는 지리적 특성으로 동해안의 상업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분단을 맞이하면서 원산은 우리에게 닫힌 도시가 되었다.

개항 이전

함경도 남부,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원산은 한반도 동북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함흥평야의 곡물과 강원도의 광물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으며, 자연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항만으로서 풍부한 수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입지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러시아는 원산을 포함한 영흥만 일대를 Port Lazaref라고 불렀으며 영국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원산을 선점해야 했으며, 일본 군부에서는 원산의 개항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동여지도 중 원산의 위치 /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원산의 개항

1876년 체결한 강화도조약에는 부산을 제외하고 구체적인 개항지를 명시하지 않았다. 처음에 일본은 함경도 문천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 일대가 조선 왕조의 발원지이며 정숙왕후(태조의 증조모)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1878년 4월 일본은 동해안의 개항장 후보지를 조사하고자 군함을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으나 일본 군함장 마쓰무라 야스타네[松村安種]는 강화도조약을 근거로 측량을 이어갔다. 일본은 측량을 통해 원산 입지의 중요성을 상세히 파악하였고 덕원부 원산포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문천의 전례를 들어 원산의 개항을 반대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능침과 가깝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출생지라는 이유에서,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원산을 개항하여 기반을 만들고 러시아가 북쪽에서 호응한다면 함경도가 앞뒤로 공격받게 되는 모양새였다. 조선 정부는 대안으로 함경도 북청(北靑)을 개항장으로 제시하면서 북청이 좋은 땅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아니니 개항하기 편리할 것이라고 일본을 설득했다.
하지만 1878년 9월 29일 일본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는 조선이 처음에 덕원의 개항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 점을 들어 계속해서 원산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능침이 근접한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일본에서 그 소재지를 명확히 구획하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한 데 따라 1879년 7월 4일 원산 개항에 동의하였다.

원산사진엽서(원산전경) / 출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나라 안의 나라, 조계

일본은 원산 개항과 동시에 일본 조계를 설정했고 1880년 5월 20일, 일본 영사관원과 상인 200여 명이 원산에 도착하였다. 개항 초기의 원산은 인가만이 드문드문 있었던 지역으로 처음부터 새로 개발해야 했다. 조계지 안에 있는 23호의 가옥은 일본 영사관이 매수하여 철거하였고 습한 땅이었기 때문에 도랑을 파서 배수가 되도록 했다. 시가지의 구분은 약 1,200평을 1구(區)로, 각 구의 사이에는 폭 4칸의 길을 냈고 부두에서 조계지까지 폭 6칸의 큰 도로를 만들었다. 1880년 7월 3일부터 부두 공사를 착수하는 동시에 영사관과 관사, 병원, 은행 등 관공서와 생활필수시설을 건설했다. 1880년대 원산에는 일본 제일은행 출장소를 비롯하여 미쯔비시 등 20개 회사가 들어왔다.
개항 초기 원산에 조계를 설정하고 관공서와 주택을 짓고 있던 일본인에 대해 조선 사람들의 반감은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감정은 때때로 투석과 욕설의 형태로 나타났다. 심할 경우 야간을 틈타 그들의 가옥과 상가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탓에 일본 상인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새롭게 개항한 인천과 외국인의 상업행위가 허용되었던 서울 양화진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원산에서 일본 상인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다른 개항장과 마찬가지로 원산으로 유입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갔으며 도시의 규모도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갔다. 관공서, 학교 등 공공시설과 은행, 회사 등의 업무시설 및 상업시설이 꾸준히 들어서며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원산사진엽서(원산중정통) / 출처 : 인천시립박물관

근대기의 원산은 한반도 동해안의 중요한 항구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쟁취하고 주권을 되찾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원산은 닫힌 도시가 되어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140년 전 문을 열었고 75년 간 닫혀있던 도시 원산의 모습을 12월 15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다시 보려 한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연구원 이동영(李東映, Lee Dong-young)




“이발소의 탄생과 신문 속 이발소 이야기” – 인천시립박물관 김성이 학예연구사

이발소의 탄생과 신문 속 이발소 이야기

어느 동네나 미용실은 많이 있다. 이렇게 미용실이 한 골목에 여럿 생겨난 건 이제는 남자들도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자들은 으레 이발소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발소를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이발소 삼색등은 번화가가 아닌 오래된 골목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달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더딘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발소에는 나이 지긋한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고 있다. 낡은 이발도구와 삐그덕 소리를 내는 의자는 이발소의 시간을 말해준다.

일상 속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일상이 아닌 역사의 뒤안길을 걷고 있는 ‘이발소’는 100여 년 전 단발령과 함께 등장한 공간이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왕이 솔선하여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수 천 년 동안 지켜온 장발의 풍습은 위생과 편익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상투를 깎아버리게 했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은 민심을 들끓게 했다. 유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즉, ’사람의 신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체두관(剃頭官)이라는 임시벼슬까지 만들어 백성들의 상투를 마구 잘랐다고 하니 그들의 자존심과 위엄은 짓밟혔고 선비와 유생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들까지 크게 반발했다.

….경무사(警務使) 허진(許璡)은 순검들과 함께 가위를 들고 길을 막고 있다가 사람만 만나면 달려들어 머리를 깎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인가를 침범하여 남자만 보면 마구 머리를 깎아 버리므로 깊이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머리를 깎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은 문밖을 나섰다가 상투를 잘리면 모두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 나갔다. 머리를 깎인 사람들은 모두 깨끗이 깎이지 않았는데, 단 상투를 잘린 사람은 긴 머리가 드리워져 그 모습이 장발승(長髮僧)과 같았다. 오직 부녀자들과 아이들만 머리를 깎이지 않았다. 이때 학부대신 이도재는 연호개정과 단발령(斷髮令)에 관한 상소를 한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매천야록』 제2권 고종 32년

단발령이 내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단발령은 흐지부지되며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순종황제가 즉위하며 또 다시 단발령이 내려졌다. 첫 번째 단발령처럼 강제하지 않았으며 종묘에 나아가 단발고유제(斷髮告由祭)를 드리며 조심스럽게 단발령이 내려졌다. 처음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와는 달리 단발이 위생과 편익이 있음을 백성들 스스로 몸소 느끼고 있었다. 자발적인 이발의 시대로 변하고 있었다. 또 이 시기부터 고종과 순종의 초상사진에 관를 벗고 이발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순종 즉위 직후 황제의 이발을 위해 내각회의에서 궁중에 이발소 설치를 건의하였고 이발소가 설치되었다. ‘홍경희’라는 사람은 21년 동안 융희황제의 이발사로 일을 했었다는 신문기록이이 확인되기도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7.8.18. 대한매일신보 1907.8.22. 매일신보 1926.5.9.

경성과 인천의 거리 곳곳에 이발소가 하나둘 생겨났다. 비싼 이발요금 탓에 관리나 신지식인들만이 드나드는 문턱이 높았던 곳이지만 이발은 서서히 일상이 되어갔다. 머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조선 사람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개화가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당시 머리를 깎은 사람만 보면 개화당 이라고 손가락질하였고 이발소는 개화당을 만드는 곳 ‘개화당제조소’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발소를 신문이나 TV에서 광고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초기 이발소는 손님을 끌기 위해 이발소 광고를 신문에 자주 실었다.

매일신보 1930.5.2. 황성신문 1905.10.24. 대한매일신보 1908.10.28.

이발소 신문광고에는 ‘첨군자’라 하여 ‘여러 점잖은 사람’이라는 손님을 높이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도 당시 이발소를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신지식인들이나 관료와 같은 지체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발소에 오는 손님을 높이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보인다. 신문에는 이발소 광고만큼 이발기계 판매 광고가 자주 등장했다. ‘가정용 최고급 이발기계’라는 광고카피 문구는 이발을 하는 남자라면 눈길이 가는 광고가 아니었을까 . 이발과 관련한 신문광고는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독기계신설‘,’이발졸업생 고빙‘이라는 글귀는 당시 이발소에서 소독이 중요한 일이었음을 시사하며 이발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

이발소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1911년 「이발영업취체규칙(理髮營業取締規則)」이라는 이발영업을 위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발영업을 전발(剪髮)과 결발(結髮)로 규정하였다. 초기 이발소는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상투를 틀어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발소는 ’이발(理髮)‘이라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용모를 단정히 하는 곳으로서 머리를 자르는 것 뿐 만 아니라 정돈된 상투를 틀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이발영업취체규칙」에는 특히 위생과 청결에 관한 내용으로 소독방법, 백의(白衣) 착용, 수건과 비누의 사용, 짧은 손톱 등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1923년 「이발영업취체규칙」에는 이발사 시험제도가 등장한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게 된다. 어깨너머로 배우던 이발 기술이 이때부터 시험을 통해 이발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시험과목은 해부, 생리, 위생 및 전염병 대의 소독방법 이발영업에 관한 법령이었다. 신체의 일부인 얼굴과 머리카락을 다루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마치 의학교재와 같은 인상을 준다. 당시 이발수험교재를 집필한 사람은 경기도경찰국 소속 위생과장 주방정계(周防正季)라는 의학박사라고 하니 어느 정도 의학교재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발사 시험을 위한 『이발위생독본』이라는 교재는 ’이발관마다 필비할 양서, 이발수험자의 지침‘이라는 광고문구로 판매되었다.

『이발위생독본』 광고, 1937년
(ⓒ 인천시립박물관)
『이발위생독본』
(ⓒ 서울남산도서관)
매일신보 1930.5.2.

전국을 시끌벅적하게 했던 단발령으로 인해 이발소가 생겼으며 이발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다. 초기 이발소에서는 상투를 튼 이발사가 이발을 해주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고 이발소라는 곳에 와서 상투를 깎고 엉엉 울고 가는 이들, 상투를 깎다 아버지가 좇아와서 반만 자르고 붙들려 가는 모습들이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할 초창기 이발소의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단발령의 충격은 잊어버리고 차츰 단발에 익숙해지며 스스로 이발소를 찾는 이발의 시대를 열었다.

김성이(金成怡, Kim Seong-yi),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앨범속 지폐에 남겨진 시대의 기록

앨범 속 지폐에 남겨진 시대의 기록

인천시립박물관에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약 1년간 인천에 근무했던 미군 병사 사무엘 로씨(Samuel. P. Rossi)의 가족이 기증한 그의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유품들은 정장과 약장, 배지와 사진, 잡지, 군복 등으로 대부분 부대 근무 시절의 것으로 보인다. 유품 중에서는 인천에서 근무하며 촬영한 사진과 자료를 모아놓은 앨범이 눈길을 끈다. 앨범에는 부대 마크와 달력, 인천의 지도를 비롯하여 광복 직후의 인천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붙어 있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지폐와 미군이 쓰던 군표도 남아 있다.

앨범에 한 장 한 장 붙여져 있는 지폐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무엘 로씨가 앨범 속에 남겨놓은 지폐에서 광복 전후로 변화하는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진 1」군복을 입은 사무엘 로씨의 사진(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2」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첫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3」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두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4」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세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군국주의의 잔재

「사진 5」일본정부 발행 50전(센) 지폐 「사진 6」일본정부 발행 10전(센) 지폐 「사진 7」일본정부 발행 5전(센) 지폐

앨범에 부착된 지폐는 총 13장으로 3면에 걸쳐 붙여져 있는데, 이 중 일본 지폐는 3장이다. 지폐 모두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하였으며, 물자의 부족으로 동전을 만들기 어려워지자 만들어진 소액 지폐들이다.

첫 번째 면 오른쪽 아래에 붙여진 것은 50전(센) 지폐로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주요 도안으로 하였다. 오른쪽 위에 등장하는 새는 ‘금치(金鵄)’로 일본을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진무 천황이 정벌을 나갔을 때, 금색 빛을 발하면서 나타나 적군의 눈을 멀게 하여 승리를 도왔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금치는 주로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일본제국 시기 동안 훈장과 우표 등에 도안으로 쓰였다.

두 번째 면 왼쪽 위에 붙여진 지폐는 10전(센) 지폐로 주요 도안은 팔굉일우탑(八紘一宇塔)이다. 탑은 진무 천황이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일본 황기(皇紀)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40년에 미야자키시에 만들어졌다. ‘팔굉일우’는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내세운 주요 슬로건 중 하나였다. 현재도 탑은 남아 있으며, 평화의 탑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팔굉일우라는 글자는 그대로 남아있다.

두 번째 면 왼쪽 가운데 지폐는 5전(센) 지폐로 주요 도안은 도쿄에 세워져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동상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천황과 조정이 둘로 분열되었던 14세기 일본 남북조시대의 무장으로 당시의 무신정권인 아시카가(足利) 막부 측이 내세운 천황(북조)에 대항하여 남조의 천황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일본제국 시기에는 충신의 표상과 일본인의 귀감으로서 교육되었다.

「사진 8」중국 중앙저비은행 발행 지폐

세 번째 면에는 중국의 지폐 3장(5위안, 10위안, 100위안권)이 붙여져 있는데, 정확히는 중일전쟁 중이었던 1940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지폐이다. 일본은 중국의 점령지에서 표면적으로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며, 중화민국의 주요 정치인이었던 왕징웨이(王精衛)를 내세운 괴뢰 정부를 세웠다. 지폐 역시 중국의 중앙은행과는 별도로 중앙저비은행(저비는 비축, 저장을 뜻함)을 설립하고 중국의 국부로 평가받는 쑨원을 도안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전쟁 중인 일본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중국의 경제를 장악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미군의 주둔

「사진 9」미군 발행 A호 100원(엔) 군표 「사진 10」미군 발행 1달러 군표(시리즈 461)

두 번째 면에 부착된 왼쪽 가장 아래와 오른쪽 전체 총 4장의 지폐는 미군이 발행한 군표(軍票)이다. 군표는 주로 해외에 주둔하는 군대가 필요한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할 때 주둔군의 본국 화폐 대신 발행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하는 특수한 화폐이다. 50전(센), 1원(엔), 100원(엔) 군표(A호 군표)는 미군이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면서 1945년 9월 발행한 것이며, 군표에 알파벳 A를 표시하여 사용지역을 구별하였다. 이외에 B로 표시하여 발행한 군표도 있는데, B호 군표는 역시 미군이 주둔한 오키나와에서 별도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A호 군표는 1946년 7월 군정법령 제95호에 의해 시중에서의 유통이 정지되어 실제 한국에서의 통용 기간은 짧았다. 이에 대해 1947년 3월 13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전, 군표를 준비해가지고 왔었으나 조선은행권의 재고가 예상외로 충분하여 조선은행권을 계속 유통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광복 직후 한국의 경제는 무리한 전시체제의 후유증으로 경제는 피폐해져 있었고, 물러가던 일본인이 철수 자금 마련 등을 위해 조선은행권을 마구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통용권을 유통시키는 것은 미군정으로서는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두 번째 면 오른쪽 상단의 군표는 A호 군표가 시중에서 유통이 정지된 후, 1946년 9월에 미군에서 처음으로 시리즈 번호(461번)를 붙여 발행한 1달러 군표이다. 이 군표는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당시 미군이 주둔하던 전 지역에 공통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새로 발행한 군표는 A호 군표와 달리 미군과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사람(군속)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1946년 10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일반시민은 군표를 가지거나 쓰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음을 공보부에서 경고하는 기사가 남아있다. 이후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까지 군표를 발행하였는데, 현지에서는 군표를 미국 달러와 동등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암암리에 유통되기도 하여, 미군은 수시로 시리즈 번호를 바꾸어 발행하고 기존 군표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말 없는 시대의 기록

「사진 11」조선은행 발행 1원 지폐(개권) 「사진 12」조선은행 발행 5원 지폐(갑권)
「사진 13」조선은행 발행 100원 지폐(병권) 「사진 14」조선은행 발행 100원 지폐(정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첫 번째 면에서 앞서 말한 50전 지폐를 제외한 나머지 지폐들이 바로 조선은행권이다. 조선은행권은 편의상 발행한 순서에 따라 금권(金券), 개권(改券), 그리고 갑, 을, 병, 정, 무권까지 구별하는데 1원(개권)과 5원(갑권)은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지폐이고 100원(병권)은 광복 이후인 1945년 12월부터 발행한 지폐이다. 지폐의 주요 도안으로는 특정 인물이 아닌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수노인상(壽老人像)이 사용되었다.

100원 지폐는 일제강점기 때 발행한 지폐와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100원 지폐가 일본에서 제조되어 반입된 것과 연관이 있다. 우측 상단에는 조선총독부의 문양으로 쓰였고 지금도 일본 정부의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는 오동 문양이 도안되었으며, 하단에는 ‘대일본제국인쇄국제조’라고 인쇄처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1946년 7월 발행한 100원(정권)에는 인쇄처를 조선서적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문양은 무궁화로 바꾸게 된다.

사무엘 로씨는 광복 직후 약 1년 가까이 인천에 근무하면서 접하게 된 다양한 화폐들을 고스란히 앨범에 붙여 놓았다. 앨범에 붙여진 지폐들은 조선은행권을 비롯하여 군국주의의 상징이 담겨 있는 일본 지폐, 영어로 표기된 낯선 미국 군표 등 여러 종류의 지폐들이 뒤섞여 사용되었던 광복 직후의 어수선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사무엘 로씨가 직접 남긴 기록은 없지만, 지폐는 앨범 한 켠에서 그가 보고 겪었던 변화하는 한 시대의 기록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송완식(宋完植, Song Wan-shik)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학예연구사




보일랑 말랑 옛 신문 속 인천의 목욕탕

보일랑 말랑 옛 신문 속 인천의 목욕탕

찜질방에서 땀을 빼고 때를 미는 일은 한국을 방문하면 꼭 해보아야 할 체험 중 하나로 여겨진다. 목욕탕이 새로운 한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의 목욕탕이 등장한 건 불과 150여 년도 되지 않았다. 근대 이전 한국에서는 물이 있고 내 몸을 담그기만 하면 어디서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개항 이후 위생 관념이 중요해지면서 돈을 내고 목욕을 하는 독립된 공간, 즉 목욕탕이 등장하였다. 은밀한 공간인 만큼 옛 목욕탕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야말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신문 속에 나타난 인천의 목욕탕을 조금이나마 추적해보고자 한다.

개항장의 일본인 생활시설, 목욕탕

[사진 1] 「조선신문」 1910년 1월 1일 자 기사 [사진 2] 「조선신문」 1911년 1월 1일 자 기사

목욕탕은 개항장의 일본인 생활시설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만들어진 목욕탕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거류민 영업 주의사항, 경범죄 항목 등에 목욕탕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대 초 한국의 개항장에 이미 목욕탕이 있었으며, 1886년이 되어서는 ‘목욕탕단속규칙’을 제정해야 할 만큼 그 수가 제법 늘어났다. 한국 최초로 ‘목욕탕단속규칙’이 만들어진 인천에는 1897년 7개의 목욕탕이 운영되었다. 일본거류지, 각국 거류지, 청국거류지 등의 개항장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모여 살던 지역에도 목욕탕이 있었으며 운영자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인천의 목욕탕들은 힘을 합하여 「조선신문」에 새해를 축하하는 광고를 내보냈는데 1910년에는 11곳, 1911년에는 12곳의 점포가 참여하였다. 재밌는 사실은 2년 연속 참여한 점포가 5곳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목욕탕은 소재지 관할 경찰서에 의해 관리되어 개업과 폐업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인천에서 최소 12곳 이상의 목욕탕이 운영되었다.

목욕탕인가 모욕탕인가옷을 벗고 목욕탕 욕조 안에 들어가면 빈부, 신분의 고저, 민족 간 차이는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 된다. 한국인도 점차 새로운 근대 시설인 목욕탕에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목욕탕 입구를 지나 욕조 속 평등에 가까워지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같은 돈을 내도 일본인이 씻은 이후 더러운 물에서야 간신히 씻을 수 있었으며 돈조차 받지 않고 쫓아내는 일도 많았다. 차별이 얼마나 심했던지 목욕탕을 ‘모욕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 모욕을 면하려면 우리 손으로 목욕집을 만들어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일본인 경영 목욕탕은 가지 말아야 한다”(「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 자 기사)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목욕탕은 일개 개인이 짓기에 초기비용이 많이 필요하였고, 간신히 짓는다고 하더라도 경찰서의 갖은 핑계로 인하여 영업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사진 3] 「동아일보」 1923년 11월 12일 자 기사

1923년까지도 인천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목욕탕이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우영(李祐榮)이라는 한국인이 지은 목욕탕이 「동아일보」에 소개될 정도로 한국인의 목욕탕 운영은 이례적 사건이었다. 「동아일보」 1923년 11월 12일 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외리 188번지, 지금의 경동 일대에 ‘서탕(曙湯)’이라는 목욕탕을 만들었다. 조선인 순사의 봉급이 약 29원이던 시절, 약 만 원의 돈을 투자하여 약탕까지 설치한 목욕탕이었다. 이 목욕탕의 시설은 일본인 목욕탕에도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국에서 입욕료가 가장 비싼 인천1920년대 중반 인천의 목욕탕 입욕료는 대인 7전, 소인 4전이었다. 입욕료는 서울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비쌌는데 주 2회 목욕이 권장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제법 부담이 되는 돈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1930년 4월 자문기관인 인천부 협의회에서 목욕탕의 수도세를 일정 비율 낮춰주고 입욕료도 낮추자고 경찰서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목욕탕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계속 이어지자, 조선총독부는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사설목욕탕보다 저렴한 금액으로 운영되는 공설목욕탕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목욕탕을 짓는 일은 큰돈이 필요하였다.

[사진 4] 「부산일보」 1932년 10월 8일 자 기사 [사진 5] 「동아일보」 1934년 3월 28일 자 기사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1935년에 발간한 보고서에는 공설목욕탕을 짓는 방법 세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 이미 개인이 만들어 영업하던 목욕탕을 기부받는 법, 둘째 가옥을 사서 건립비를 낮추고 이를 개조하여 목욕탕으로 바꾸는 법, 셋째 기부금을 받아 만드는 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세 번째 방법의 하나로 목욕탕 인근 주민에게 기부금이라며 돈을 강제로 걷어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천에는 다행스럽게도(?) 노구치(野口)라는 일본인이 낸 기부금 만원 중 6천 500원을 활용해 월미도조탕 보다 약간 좁지만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는 50평의 공설목욕탕이 만들어졌다. (「부산일보」 1932년 10월 8일 자 기사)

인천 공설목욕탕은 1933년 1월 19일 개장하여 이틀 동안 무료 공개한 후 대인 3전, 소인 1전의 입욕료를 받는 것으로 운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개업한 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수도료 인상을 이유로 입욕료를 4전으로 올리는 문제를 놓고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였다. (「동아일보」 1934년 3월 28일 자 기사) 인천 공설목욕탕을 위탁 관리하던 박영섭이 “이렇게 인상한다면 공설목욕탕으로써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꼬집은 것처럼,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목욕탕의 벽은 높았고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동네목욕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김유나(金柔娜, Kim Yu-na),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연구원




“내선일체”는 허구, “내선차별”이 실제(김락기)

내선일체(內鮮一體)는 허구이고 내선차별(內鮮差別)이 실제이다

김락기(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1942년 7월 25일 오후 두 시 무렵 스물다섯 남짓한 청춘남녀가 인천부 서공원(西公園), 즉 현재의 자유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휴일을 앞둔 여유로움이 두 사람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일본식 이름을 신촌 대(新村大)라고 하는 조선사람 전치봉(全治鳳)이고, 여자는 정목귀례(正木貴禮)였는데, ‘귀례’라는 이름이 일본인에게는 흔치 않아 창씨(創氏)한 조선사람으로 생각된다.

이 둘은 인근 송현국민학교의 교사였다. 전치봉이 1942년 4월에 송현국민학교에 임시교사로 부임한 후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므로, 요즘 말로 소위 ‘썸’타는 사이로 보인다. 이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두 사람의 산책은 즐겁게 끝나지 않았다.

산책 중에 전치봉은 ‘최근 고급 생과자는 일본인에게는 잘 돌아가지만 조선인에게는 배급되지 않는다. 또 도시락통과 목탄(木炭) 등도 일본인에게만 돌아가고 우리 같은 조선인에게는 돌아가지 않으니 당국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 운운하지만 이처럼 불공평하다. 내선차별(內鮮差別)의 좋은 예도 있다. 국어(일본어) 사용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일본어로 대화하지만 친분이 있는 가까운 사람과는 조선어가 아니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조선어는 세계에서도 우수한 언어이고 조선인 전체가 일본어를 상용하는 것은 먼 미래일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1942년은 일본제국주의가 진주만 기습으로 일으킨 소위 ‘태평양전쟁’의 초반 기세가 주춤해지면서 조선에서도 징병제가 실시되는 등 가용 가능한 모든 인적ㆍ물적 자원을 끌어모으던 시점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는 등 식민통치의 양상도 더욱 폭압적으로 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전치봉의 말은 바로 총독정치에 대한 불온한 언동(言動)으로 간주되었다. 10월 20일 시점에는 이미 경찰 조사를 받았고,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이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라는 문서를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검사에게 보냈으므로 7월 25일 산책으로부터 아주 멀지 않은 시점에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경찰서장이 보낸 문서에는 전치봉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재했는데, 내용 전반은 이 사람이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데 치중한 느낌이다. 자신들의 기소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전치봉이 가졌다는 민족의식의 배경이란 게 당시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근거로 든 것은 전치봉이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그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휴교(同盟休校) 사건과 학생 소요사건, 공산주의 그룹사건에 자극을 받아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사건에 참여한 것도 아닌 사람을 ‘그랬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자의적 추측에 불과하다.

또 전치봉이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해 하숙을 하며 당시 46세 정도의 박추영(朴秋英)이란 여성과 교유하며 민족주의 사상을 지도받았다고 했는데, 박추영 이 어떤 인물인지 일제 경찰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전치봉은 1943년 2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당일 출소했다. 산책 중의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것 치고는 매우 무거운 처벌이지만, 거꾸로 전치봉을 매우 불순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엮으려고 했던 일제 경찰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둘 사이에 나눈 대화는 어떻게 경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폭압적인 일제 통치에 두려움을 느낀 정목귀례가 신고했을까? 아니면 뭐라도 엮어서 조선인을 억누르려는 분위기에서 평소 주목하던 전치봉을 목표로 삼아 일제 경찰이 주변을 샅샅이 털어 알게 되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차별적 현실에 대한 조선사람의 작은 불만조차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일제 식민통치의 폭압성과 패망으로 가는 과정의 초조함만은 분명하다.

[이글은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에서 발행하는 《인천역사통신》2020년 가을호(2020년 9월 1일 발간예정)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김탁봉(金沰鳳)’으로 등록되어있으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의 “보안법위반피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42년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에는 전치봉(全治鳳)이라 쓰여있고, 아버지도 전창일(全昌一)이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성을 ‘김(金)’이라 했는데, 카드 작성 당시의 부주의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탁(沰)’은 흘려쓴 ‘치(治)’를 잘못 읽은 것이다.

전치봉[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보안법위반피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42년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의 전치봉 인적사항



인천의 스타, 사이다

인천의 스타,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1960~70년대 故 서영춘 선생이 자주 불렀던 유행가의 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바다 중에 왜 하필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을까. 인천과 사이다는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부터 사이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이다는 사과로 만든 독주(毒酒)를 의미하는 라틴어 ‘시케라(sicera)’에서 유래하였다. 사과로 만든 이 술은 프랑스로 전래되어 ‘시드로(cidre)’라고 불렸고,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이다(cider)’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포도 대신 사과가 더 흔했기 때문에 사과주인 사이다를 즐겨 마셨다.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에서 사이다를 주문하면 투명한 탄산음료가 아닌 2~13%의 알코올을 함유한 다양한 종류의 사과주가 나온다.

사이다가 사과주가 아닌 탄산음료를 가리키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영향이 컸다. 1868년 영국인이었던 존 노스와 레이가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에 ‘노스 앤 레이’ 상회를 설립하였다. 이 상회에서는 레모네이드와 같은 탄산음료를 팔았는데, 특히 사과와 파인애플의 향이 나는 복합향료가 첨가된 탄산음료 ‘샴페인사이다’를 판매하였고, 이를 처음 마신 사람들은 그 맛과 향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샴페인사이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탄산음료를 ‘사이다’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해 사이다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궁궐에 납품하거나,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관에게 판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사이다는 점점 대중화되면서 수입 사이다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05년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는 인천 화정(현재 신흥동)에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설립하였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미국식 제조기를 사용하여 50마력의 전동기로 제조’하는 사이다 공장이었다.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는 성인표(星印標) 사이다와 일생표 사이다를 생산하였는데, 성인표 사이다는 별 모양의 상표로 인해 ‘별표 사이다’라 불렀다. 별표 사이다는 여름철 음료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당시 광고 매체가 몇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인선 열차 전면 광고를 게시하기도 하였다. ‘별표 사이다’의 인기에 힘입어 1910년 나카야마 우노키치(中山宇之吉)가 ‘라무네제조소’를 설립하였다. 라무네제조소에서는 ‘라이온 헬스표 사이다’를 생산하였는데, 라임향 등이 첨가된 레몬에이드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이다는 더욱 인기가 많아졌다. 사이다는 각종 운동회 후원품 목록에 항상 들어가 있었으며, 종교 단체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구호품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30년대에는 전국의 사이다 공장의 수가 50개소가 넘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이렇듯 사이다 공장은 늘어났지만, 규모는 작아서 생산한 음료를 보관할 시설도 부족했다. 게다가 한여름에는 많은 수요를 충족하지 못해 일본에서 수입해서 팔기도 했다. 이렇듯 소규모 생산의 한계를 드러내자 1937년 서울 6곳, 인천 2곳의 사이다 공장을 합쳐 경인합동음료(주)를 설립하였다. 경인합동음료(주)의 주력 상품은 ‘스타사이다’였다. 스타사이다는 ‘별표 사이다’의 상표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사이다의 원조임을 강조하였다. 스타사이다의 인기와 영향으로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광복 이후 경인합동음료(주)는 적산기업으로 분류되었고, 손욱래가 이를 불하받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사이다 공장이 난립해 있었지만,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그대로였다. 1946년과 1947년 신문에는 “하절기를 당면하여 수요가 격증함을 기회로 협잡배가 자사 상표를 도용해가지고 위조 스타사이다를 제조하여 공연히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는 내용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러던 1950년 동방청량음료가 ‘칠성사이다’를 출시하면서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시들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1960년대 초 새로운 맛을 가미한 ‘뉴스타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이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사이다 공장 간의 극심한 판매 경쟁과 ‘코카콜라’, ‘펩시콜라’가 국내시장에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면서 위기는 계속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수의 사이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1975년 경인합동음료(주) 또한 진로에 인수되면서 70년간 이어오던 인천 사이다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 생산된 사이다에 ‘별표’라는 이름이 붙고 별 모양의 로고가 사용되면서 ‘별’은 사이다를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대구의 ‘삼성사이다’, 부산의 ‘월성사이다’, 전주의 ‘오성사이다’ 등 각지에서 생산되는 사이다에는 별을 뜻하는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동방청량음료의 칠성사이다는 롯데제과에 인수된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이다가 되었고, 지금까지 별과 사이다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소풍이나 외식 등 사람들은 많은 순간 사이다를 찾지만 특히 속이 더부룩할 때 소화제 대신 사이다를 마시곤 한다. 사실 사이다가 소화에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뻥 뚫리는 느낌 때문에 사이다를 마셨다. 이러한 사이다의 청량감 때문에 사람들은 드라마나 연재소설에서 답답한 상황이 해소되는 순간 ‘사이다 같다’라는 표현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사이다 같다’라는 표현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실생활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하여 시원한 감정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번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7월 21일 작은전시 <인천의 스타, 사이다>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와 함께해온 사이다와 관련된 내용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들의 지친 일상에서 ‘사이다 같은 사이다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연구원
최병훈(崔炳勳, Choi Byeong hune)

202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작은전시 <인천의 스타, 사이다> 전시 포스터
스타사이다 병(출처: 신연수)
경인사이다 상표(출처: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일본제국신민 궁본진정(宮本眞政)과 조선사람 이상렬(李相烈)

일본제국신민 궁본진정(宮本眞政)과 조선사람 이상렬(李相烈)

김락기(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1941년 5월 19일 오후 4시 무렵, 현재의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부근에 있었던 인천부립도서관 앞 풀밭에서 한 학생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이날은 월요일이었으니,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은 셈이다. 이 학생의 이름은 궁본진정(宮本眞政)으로 1923년 10월 25일에 태어나 본적지인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에서 온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에 경성의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에 입학했다. 선린상업에 입학하고 경성부에서 하숙을 했는데, 1941년 4월에 인천부 화수정(花水町) 229번지에 있는 형 궁본무정(宮本武政)의 집으로 옮겨 통학했다고 한다.

일제 재판기록에는 “문학에 취미를 가져 늘 소설과 시집 등을 탐독하고 학업은 등한시하며 특히 ‘학교의 조회에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맹세를 외우는 것은 공염불이며 [일본 ’천황(天皇)‘과 ’황후(皇后)‘의] 사진봉안소에 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멋대로 판단하여 여러 번 학교를 결석하였는데”라고 하여 조선인으로서 상당한 정도의 정체성을 가졌고, 일본 식민통치의 허상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에 기록된 이름은 궁본진정이었으나 이상렬(李相烈)이라고 해야 비로소 이 학생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이유다.

평소처럼 그저 도서관 풀밭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났을 상황이 이날은 한 사람의 출현과 대화로 급변한다. 어떤 청년이 책을 읽고 있는 이상렬 곁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왜 월요일인데 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라고 물었고 “학교에 가면 매일 등교와 하교 때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사진봉안소에 절을 하여야 하는데 이는 우상숭배이므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림 1] 일제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 전경(화도진도서관 향토ㆍ개항문화자료관 갈무리)

다가온 청년을 믿고, 있는 그대로 말한 대가는 컸다. 1941년 9월 18일에 불경죄(不敬罪)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 혼란스런 점이 있다. 이상렬에게 다가가 잡담을 나누고, 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를 물었으며, 불경죄 사건의 증인이 되어 이상렬의 말을 재판장에게 전한 이가 다름 아닌 인천부 용운정(龍雲町)에 사는 26세 청년 오쾌근(吳快根)이었기 때문이다.

오쾌근이 누구인가? 1941년 3월 초부터 경정(京町) 196번지에 있는 찻집 ‘파로네’의 조선인 여종업원이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쓰는 것에 분개해 불쾌하다며 화를 냈다가 8월 27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다음 날인 8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942년 2월 28일 출소한 사람이다. 《인천역사통신》올 봄 호에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오쾌근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경찰 조사가 진행된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이상렬을 만나 바로 신고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별 생각없이 넘긴 일이었는데, 나중에 자기 행동으로 조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죄를 감면받고자 이상렬을 고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상렬의 재판에서 오쾌근이 증언한 것은 분명하므로, 이상렬의 처벌에는 오쾌근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상렬은 그냥 ‘몸이 썩 좋지 않아 경성까지 통학하기 어려워 학교에 이야기하고 쉬는 도중에 바람 쐴 겸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려 읽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을까? 오쾌근은 재판정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슨 불경스런 언사는 없었고, 그저 학교가 멀어 다니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다’는 정도로 둘러댈 수는 없었을까? 조선사람 사이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한 일제의 술수가 끼어들어 순진한 청년들을 얽어맨 것인지도 모른다.

18세로 소설과 시를 즐겨 읽던 문학청년 이상렬은 이렇게 궁본진정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을 받았다. 항소 등 다른 기록이 없어 실제 징역 1년을 살았는지, 감형이 되었는지 조차 불투명하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일제 식민통치는 조선사람의 이름은 바꿀 수 있었지만 조선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조선사람 스스로 이름은 내어주고, 마음은 지키는 방법으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것인지 모른다. 궁본진정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황국신민의 맹세 낭송과 일본 ‘천황’과 ‘황후’의 사진에 절하기를 거부한 이상렬이 그 증거다.

[그림 2] 이상렬(궁본진정) 재판기록(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갈무리)



평범한 사람의 당연한 생각이 불러온 보안법 위반! 징역 6개월!!!

평범한 사람의 당연한 생각이 불러온 보안법 위반! 징역 6개월!!!

김락기(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차장)

1941년 시점에 현재의 중구 용동(龍洞)에 살던 오쾌근(吳快根)이란 사람이 있었다. 1916년 1월 10일생으로 1931년에 경성에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학업을 마친 후 10대 중반부터 경성 의 제20사단 장교 숙소, 신의주 수비대, 평안북도 창성군 수비대 등 조선 주둔 일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했으며 조선증권거래소에서도 인부로 일했다고 한다.

20대 중반이 된 1940년 가을에 건강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부모가 계시는 인천 용운정(龍雲町)으로 와 쉬면서 여동생까지 4인이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일이 생긴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현재의 중구 경동(京洞)인 경정(京町) 196번지의 찻집 ‘파로네’였다. 1941년 3월 2일부터 이 찻집에서 일하게 된 오노 히로코(小野弘子), 아오야마 케이코(靑山桂子)란 가명을 쓰는 두 명의 조선 여성이 있었다. 이들이 조선인이지만 일본어가 능숙해서 일본어로 손님을 응대하는 것을 오쾌근이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3월 5일이나 6일 오후 6시에 파로네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계속 일본어를 쓰는 종업원과 손님 여러 명 앞에서 ‘오늘날 조선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않는가! 조선인으로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건방진 일이고 일본어를 쓰는 것은 유쾌하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일본어를 절대로 쓰지 마라’는 취지로 소리쳤다고 한다. 한번이 아니라 4월 상순에도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또 3월 14일 정오경에 인근 경정 168번에 있는 아사히 이발소[朝日理髮店]에 가서 그곳 종업원인 마쓰하라(松原)와 쯔키모토(月本)에게 ‘파로네 종업원은 조선사람인데도 일본어를 쓰니 불쾌하다. 오늘날과 같은 조선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않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니 하는 약간은 추상적 구호에서 1940년 2월에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는 실질적 조치까지 도입하는 등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압통치가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이니 어쩌면 해프닝일 수도 있는 오쾌근의 이런 언사를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찻집 파로네나 아사히 이발소 종업원, 또는 찻집 손님 중 누군가가 신고했을 것이다.

1941년 8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 결과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하며 치안을 방해한 자”라는 규정 속에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2년 2월 28일까지 꼬박 6개월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냈다.

오쾌근은 특정한 사상과 입장에 기반한 항일의지를 가진 투사라기보다는, 또 많은 공부를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키워 온 지식인이라기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평범한 청년이라 보는 게 옳다. 그런 평범한 청년의 입에서 조선사람에게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제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 나온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고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만주의 항일독립군은 소규모로 분산해 생존을 도모하는 게 우선이었다. 국내의 항일투사들은 지하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항일투사들에 대한 일제의 회유도 한층 고도화되어서 ‘시국대응 전조선 사상보국연맹’과 같은 전향자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쾌근과 같은 평범한 사람 입에서 왜 조선사람이 조선어를 못쓰는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이 나온 것이다.

도저히 활발하게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없었던 1940년 초에 이런 작지만 의미있는 행동들이 은근한 조선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처해진 오쾌근은 일제가 갖는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한 인물이 아닐까 한다.

<이 글은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의 『인천역사통신』2020년 봄호(2020.03)에 실렸던 것을 옮긴 것입니다>

그림 1.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의 오쾌근 앞면
그림 2.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의 오쾌근 뒷면
그림 3. 오쾌근 재판기록(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애경사 철거 3년, 무엇이 달라졌는가

애경사 철거 3년, 무엇이 달라졌는가

배 성 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2017년 6월 2일 오전, 지은 지 얼추 80년 가까이 된 애경사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었다. 1911년 일본인 사업가 오오타 슌타[太田駿太]가 송월동 철로 변에 설립한 애경사는 일제강점기 양초와 비누 생산으로 유명했던 공장이었다. 광복 후 적산기업이 되어 한국인 이득우가 잠시 관리를 맡았다가,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채몽인이 인수하여 애경유지공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년대 초 애경유지 채몽인 사장은 비누 생산시설을 서울 구로동으로 이전하면서 송월동 공장을 매각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1930년대 지어진 붉은 벽돌 공장 건물은 외형을 유지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애경사 철거가 인천 지역사회에 미친 반향은 작지 않았다. 철거를 단행한 주체가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관할 구청이었고, 철거 목적이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 조성 때문이라는 점에서 시민단체와 학계는 크게 반발했고, 언론은 연일 이 내용을 보도했다. 그제서야 인천시는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활용 방안 논의를 위해 민관전문가협의회를 구성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인천시가 구성하겠다던 민관전문가협의회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성되지 않은 상황이다. 또, 그와는 별도로 2015년 제정된 「인천광역시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조례」에 근거하여 근대 건축자산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하고, 2018년 5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총 2억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기초조사를 실시했다. 인천연구원과 인하대 산학협력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모두 492개의 건축물이 건축 자산으로 선정되었고, 인천시는 앞으로 492개 건축 자산에 대한 세부조사를 실시하고 보존 및 활용 대책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인천시의 이러한 계획은 장소성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인천 근현대 건축 자산의 실태를 파악하고 향후 무분별한 철거를 막아 보자는 의도에서 수립된 것이다. 그럼에도 애경사 철거 이후 지난 3년 동안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 철거는 거듭되어 왔다. 2018년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답동 카톨릭 회관 철거를 시작으로 목선의 배 못을 만들던 만석동 신일철공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상징이던 부평동 미쯔비씨 공장 사택 등 역사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던 건축물이 해마다 무너져 내렸다. 최근에는 송림동, 신흥동 지역에서 원도심 도시정비 사업을 명목으로 근현대 인천 사람의 생활 터전이었던 공간 자체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청천동과 율목동 등에서도 재개발 사업이 예정되어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이 이어질 전망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근현대 건축자산 전수조사’가 마무리된 작년 11월 이후에도 역사성을 갖는 근현대 건축물이 계속해서 철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 근현대 인천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신흥동 정미공장 건물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오쿠다 정미소 건물이 철거되었다. 근현대 건축자산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민간 소유의 건물이라 철거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인천시의 입장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노숙자들의 갱생시설로 지어진 내동의 직업소개소 및 공동숙박소도 지난 4월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근현대 건축자산 전수조사’에서 아예 누락된 것이었다. 철거 소식이 민간에 의해 전해졌고, 관할 구청은 철거 이후에야 상황을 인지할 정도로 관심 밖에 있었다. 결국 애경사 철거가 근대유산 보존에 대해 지역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왔고 인천시를 비롯한 각 지자체에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2년 가까이 추진된 근현대 건축자산 전수조사는 인천시가 애경사 철거와 같은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수립한 대책이다. 그럼에도 민간 소유 또는 재개발 사업지구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막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억 원 가까이 되는 예산을 들여 추진한 건축자산 전수조사가 근현대 건축물 철거에 아무런 보호 장치도 되지 못할 뿐더러 조사 자체도 부실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반복되는 근현대 건축물 철거에 견주어 볼 때 인천시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긴 했으나, 제대로 고치지 못해 계속해서 소를 잃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라도 원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낡고 불편한 건물을 헐고, 번듯하고 멋진 새 건물을 짓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낡은 건물이 새로 지은 건물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인천시가 2년간 공들여 추진한 전수조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전수조사에 이은 심층조사도 계속 되어야 할 것이며, 근현대 건축물을 소유하고 있는 시민이 헐고 새로 짓는 것보다 고쳐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시늉만 하다 다시 소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철거 전 애경사 건물 ⓒ유동현
2017년 6월 철거되고 있는 애경사 ⓒ민운기
2020년 4월 신흥동 오쿠다정미소 철거 현장 ⓒ조오다



인천둘레길과 종주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인천둘레길과 종주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인천광역시, 2019) 소개- ②

안홍민(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를 읽다 보면 둘레길 곳곳 역사와 문화의 현장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 책에서 소개된,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에서 만날 수 있는 인천의 다양하고 매력적인 모습들 중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인천의 오랜 역사와의 조우(본서 1장, 6장)

먼저 인천의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코스는 어디일까요? 바로 계양산을 지나는 둘레길 1코스와 종주길 1코스, 문학산을 지나는 둘레길 8코스와 종주길 8코스를 들 수 있겠습니다.

계양산은 과거 계양·부평도호부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인천과는 구별되는 부평문화권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죠, 종주길 1코스를 따라 계양산에 오르면 만날 수 있는 계양산성을 만납니다. 계양산성은 삼국시대로 그 역사적 연원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5년 발굴조사에서는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목간(木簡) 출토되기도 하였죠. 또 계양산에서는 이규보의 숨결도 느낄 수 있습니다. 둘레길 1코스를 걸으며 계양산을 내려와 장미원을 지나면 이규보 시비(詩碑)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시호(詩豪)라고 불리는 이규보는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문학산은 인천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레길 8코스와 종주길 8코스가 바로 문학산을 지납니다. 문학산성이 위치한 문학산은 먼 옛날 비류(沸流)가 정착했던 이른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죠. 이후 문학산 근방은 전통시대 인천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가 원인천이라고 부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인 인천도호부 관아도 문학산 근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넝쿨만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문학산성 성벽 앞에 서서 인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묘한 감정에 빠져듭니다.

근현대의 격동·낭만·추억을 느끼는 길(본서 8장)

인천의 근현대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남긴 시기입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근대문물도입의 전면에 서게 됩니다. 그 리고 인천은 근대도시로 변화하였습니다. 개항, 신문물의 도입, 외세의 침탈, 전쟁, 산업화, 민주화 등 격동의 시기를 가장 처절하게 겪은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의 여러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인천둘레길 11~14코스입니다.

지금은 구도심 또는 원도심이라 불리는 중·동구 지역을 지나는 11~14코스에는 근대도시, 산업도시로 성장한 인천의 다양한 면면이 담겨 있습니다. 도시의 성장기,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함 속에서 희망을 일구어나갔던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달동네 골목길(11코스), 개항의 낭만과 외세 침탈의 아픔이 공존하는 공간이자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된 근대 개항장 거리(12코스), 끔찍했던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인천시민의 여가, 휴식,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월미도(13코스), 바다와 함께 한 인천 사람들의 치열하면서도 정겨운 삶의 터전이었던 옛 부두들(14코스)까지……

평소에는 무심하게 지나쳤을 수도 있던 그곳들이 바로 오늘날 인천을 만든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동네, 그 거리에서 인천의 격동·낭만·추억을 만나고 싶다면 인천둘레길 11~14코스를 걸어보세요.

강화도, 그곳에서 만나는 또 다른 인천(본서 9장)

1995년 인천광역시 출범과 함께 인천에 편입된 강화도. 강화도는 한국역사의 모든 시기를 담고 있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천이 가진 역사의 보물 창고가 바로 강화도일 것입니다. 그곳 강화도에도 인천둘레길이 이어지고 그곳에서는 도심과는 또 다른 인천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천둘레길 15코스는 강화도로 들어갑니다. 강화도의 마니산이 인천둘레길이 지나는 곳입니다. 인천의 산 중 가장 높은 마니산(해발 472.1m)은 우리나라에서 기가 가장 센 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기를 받기 위해 일부러 마니산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죠. 둘레길로 산을 오르다 보면 기 받는 계단을 만납니다. 이름은 기 받는 계단이기는 한데 경사가 가팔라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계단을 오르면 이것이 기를 받는 것인지, 기를 빼앗기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내어 정상에 오르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섬과 바다의 모습에서 맹자(孟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 곳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니산의 정상에서는 참성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 단군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곳이죠. 실제 단군이 이곳까지 올라 제사를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개천절에는 개천대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국체전 때는 참성단에서 칠선녀가 성화를 채화하기도 하죠. 참성단에서는 옛 사람들의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둘레길 15코스를 걸으며 마니산에서 호연지기도 기르고 인천의 또 다른 모습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천둘레길과 종주길을 걷다보면 인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가 그 만남의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