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 연극 〈유원〉

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연극 <유원>

엄현희(연극평론가)

<유원>(원작_백온유, 각색_신재훈, 연출_전윤환)이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공연되었다. 연극은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유원』을 각색했다. 이 작품은 극단 앤드씨어터가 상주단체로 있는 인천서구문화회관의 지원을 받아 함께 만든 청소년 이야기 극으로, 지역 예술 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단체에서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며 콘텐츠를 확장한 것이다. 앤드씨어터는 이전에도 소설 『아몬드』(원작_손원평)를 낭독공연으로 만들어 2018, 2019년에 공연했다.

연극 <유원>,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2021.10.8.~10.10.
주최주관: 앤드씨어터, 인천서구문화재단 ⓒ앤드씨어터

연극 <유원>은 청소년을 주요 관객으로 하는 청소년극이란 명칭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작품 자체도 청소년극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왕따 문제, 성적 스트레스, 연애 상담, 학교 폭력 등의 학교생활이 주가 아니다. 그보다 <유원>은 주인공 열여덟 유원의 심리를 따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과 마주하며 소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소녀는 자라난다. 소녀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 원작은 유려한 각색을 따라 편안하게 무대로 안착한다.

연극을 관람하며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주황빛 노을로 다가왔다. 작품은 특히 저 너머 주황색 조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소녀와 그녀의 친구가 옥상에서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소녀들 혹은 주인공 유원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저 아래, 사람들의 느릿하며 평온한 몸짓일까? 그러나 유원에게 그 색은 그렇게 간단한 색이 아닐 수도 있다. 유원에게 선명한 주황색은 붉은색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유원 언니를 죽게 하고 유원을 살린, 다시 태어나게 만든 불길한 화재 불꽃과 닮은 색 말이다. 실제로 작품은 유원이 화재를 떠올릴 때마다 극장 뒷벽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 역시 반복해서 보여준다. 유원은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불우한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불안하게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 삶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앤드씨어터

<유원>은 자신이 의도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소녀 이야기다. 창작진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재난을 상기시키며,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라 말한다(공연 소개 참조). 조용히 숨죽인 채 혹은 외면하거나 상처를 인정하며 함께 나아가는 갖가지 모습의 삶들. 경험은 도려내거나 떼어낼 수 없다. 다만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뿐. 따라서 연극은 유원과 유원 주변 그들 모두 삶 혹은 선택에 대해 섣부른 판단 대신에 잠자코 자리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것 같다. 주인공 유원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입체적으로 살아 있는 점이 이 작품 미덕이다. 소설 원작도 다양한 군소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도 유리한 장점으로 드러난다. 서로 간의 호흡이 잘 맞는 배우들이 무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앤드씨어터

작품이 공연된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은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꽤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배우들은 핀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작품이 동선이나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소극장 공간 운영을 떠올리게 할 때마다 초반에 다소 두드러져 보였다. 작은 공간에서 핀 마이크를 쓰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다양한 층의 높이를 활용하거나, 비교적 넓게 공간을 사용하거나 장면이 겹쳐지며 연출되는 식으로 시간이 흐르며 핀 마이크는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앞서 언급한 옥상 장면처럼 연극은 시야를 확장하며 공간을 넓게 쓰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작은 방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갑자기 확장되는 공간 미장센은 몇 개의 계단과 기다란 커튼 외 별다른 세트가 없었음에도 안정감 있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지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작진은 대극장 공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작품을 관람하며 청소년 이야기 극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점이 읽혔다.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그 시기를 관통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원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과거의 자아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특히 삶의 어느 면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인공 유원의 눈을 따라 만나게 되는 모습은 무엇일까.

ⓒ앤드씨어터

주인공 유원이 인간이란 각양각색 미로를 만나 헤매면서 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연극 <유원>은 점점 파고들수록 의미가 달라지며 색깔이 달라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한발씩 길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원은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과 부딪침 속에서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은인이지만 증오했던 아저씨와의 만남도 아저씨의 아이들을 통해 유원에게 구원으로 가는 길로 뒤바뀌며, 스스로를 희생하며 동생을 살린 언니의 그림자에 힘겨워하던 마음도 생명과 삶에 대한 기쁨으로 변화한다. 연극의 마지막 <유원> 무대를 감싸는 주황빛 석양이 처음과 다르게 여지없이 따뜻하게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연극은 절망과 파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 수수께끼 같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여전히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안녕이라고 묻는 듯하다.

엄현희(嚴鉉熙, Um Hyun Hee)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과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 함도윤의 〈Never Give Up〉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함도윤의 <Never Give Up>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젊은이는 내일을 밝히는 존재다. 인천 무용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신진 안무가가 등장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대정신을 함양한 개성 있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발레 창작에 지평을 넓히고 있는 데다가 관객의 호응과 감흥을 이끌 대중적인 감각까지 함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지켜봐야 할 젊은 발레 안무가로서 함도윤을 조명해 본다.

최근 심상치 않은 인천 무용계의 젊은 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접근성이나 영향력 등에 있어서 무용 문화가 활발하게 조성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오래도록 그렇지 못했다. 국내 무용계의 질적, 양적 주도를 지닌 서울과 인접한 지역으로 이에 관련된 혜택보다는 피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의 주요한 공연들을 1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도달하여 감상할 수 있는 관계로 굳이 인천에서 유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얕은 인적 자산, 열악한 제작 환경, 시민의 관심 부족 등이 더해져 인천 무용계의 활로를 막았다. 대학 무용과나 예고 무용과가 거의 없는 현실 또한 신진 발굴 및 양성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의 독립 무용가들은 외로이 분투하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곤 하며 차세대 무용가들은 인천에서 기반을 잡기보다는 서울로 진학 및 진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인천 무용계는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조짐을 보인다. 젊은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인천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맑으나 궂으나 묵묵하게 인천 무용계를 지원해온 인천문화재단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인천문화재단의 무용 관련 지원사업에는 서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실력자들이 상당수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력을 보이고 가운데, 함도윤 같은 전도유망한 젊은 창작자가 기대 이상의 성과로 주목을 받았다.

개성 있는 젊은 발레 안무가, 함도윤

발레 안무가 함도윤 ⓒGRACE

1988년생으로 서른세 살인 함도윤은 안무가로서는 아직 신진이다. 무용수들의 경우는 20대 초중반부터 데뷔하여 빠르게 주목받는 데 비해 안무가들은 안무와 연출뿐 아니라 기획, 행정, 홍보마케팅 등 다방면에서 역량과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다음에 데뷔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서 자란 함도윤은 어려서 발레를 배웠던 여동생의 영향으로 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 현대무용을 보고 ‘저런 춤도 있구나, 저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예술적 충동이 들었으며 그 계기로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 당시에는 현대무용을 배우고 싶었으나 근처의 무용학원에서는 발레를 가르쳐서 우선 발레로 인천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막상 예고를 다니면서 발레를 제대로 배우다 보니 그 고유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인 발레리노(남자발레무용수)는 아닌 새로운 창작에 대한 열정을 내면에 품은 미래의 안무가로서다.
2007년 한성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재홍 교수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폭넓은 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개인 조교를 하면서 발레 훈련과 창작뿐 아니라 예술가의 자질, 작품 제작 과정, 회의를 이끄는 방식, 문서 작성 및 정리, 강의 노하우 등을 습득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학교 발표회를 통해 이것저것 작품을 만들다가 스물여섯 살에 《K-Ballet 월드》에서 <사라지는 것들>로 안무가로 정식 데뷔하였다. 《K-Ballet 월드》는 우리나라 최대 발레협회인 한국발레협회에서 주관하는 축제로서 국내 3대 발레 축제의 하나다. 신진 안무가로서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무용 작품을 만든다는 게 안무가에게는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재정 면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6년부터 3~4년간 돈을 벌기 위해 주로 뮤지컬에 출연하였다. 100회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춤을 추는 때도 있었는데 커튼콜에서 박수 세례를 받으면서도 어느 날 문뜩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일 매진에 커튼콜과 박수 세례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발레로 대중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발레계로 돌아온 함도윤은 2019년 <붉은 대지>, 2020년 <청년실신>과 <피터팬>, 그리고 올해 <Never Give Up>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개성 있는 신진 안무가로 빠르게 주목받고 있다.

<청년실신>, 성수아트홀 ⓒ어글리아트컴퍼니(허웅)

굴복하지 않은 젊음, <Never Give Up>
7월 16~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 오른 <Never Give Up>은 인천문화재단의 예술표현활동 지원을 받아 전작 <청년실신>을 70분짜리로 재창작한 것이다. “높은 거보다 돈이 더 무서운 거죠.”라는 고층 빌딩 청소부의 말에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청년실신 시대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영혼들의 치열한 삶을 발레로 표현하였다. 이 시대 청년을 대변하는 용어가 청년실업, 위험수당, 야근수당, 학자금대출, 생활고, 카드대출, 비트코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대단히 현실적이면서도 시기적절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Never Give Up>에서는 이 시대 청년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홉 명의 남자무용수들은 실업, 경쟁, 스펙, 빚, 파산, 사고, 자살 등 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이라는 미로에서 헤매는 것 같다. 벼랑 끝에 놓은 듯한 엣지 있는 춤으로써 이러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다. 직설적인 춤적 표현이 만연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특히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등 국내 최정상급 무용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무용수들이 여럿 있는바 주제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감각적인 춤적 실현이 인상적이다.
발레지만 그 정형성에 한정되지 않은 동작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현대무용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발레를 기본으로 하여 현대무용, 비보잉, 아크로바틱 그리고 연기적 제스처까지 폭넓게 넘나들면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움직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안무와 실연뿐 아니라 음악, 조명, 장치와 소품 등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폭넓은 짜임새가 두드러진다.
젊은이들이 느끼는 처절한 삶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해 뜰 날을 기원하는 모두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마무리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 안에서 함도윤의 굴복하지 않은 젊은 열정과 패기마저 느낄 수 있다.

<Never Give Up>,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GRACE

함도윤의 안무 특징 살펴보기
함도윤이 본격적으로 안무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스타일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발레계의 다른 신진들에 비해 자기 색깔이 뚜렷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안무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시대정신을 진지하게 반영한 주제 의식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국내 발레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이 시대의 사회상을 예리하고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함도윤 스타일로 각인되고 있다.
또한, 남성 춤에 있어서 강점을 지닌다. 직설적이고 역동적인 춤은 강한 에너지마저 담고 있는데, 이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공유한 잘 훈련된 남자무용수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뮤지컬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 의식도 엿보인다. 발레에 메인 정형적인 표현방식에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하고 감각적인 창작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함도윤 같이 춤 예술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중력을 갖춘 젊은 무용가들의 등장은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게 비춘다. 실제로 인천 무용계가 오랜 침체를 딛고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젊은 무용가들의 활약에서 기인하다. 그리고 인천문화재단의 꾸준한 지원이 인천 무용계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한 바탕임은 자명하다.

심정민

무용평론가이자 비평사학자. 한국춤평론가회 회장과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현재 <춤>과 <댄스포럼>에 고정지면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국립극장 등에서 심의·평가·자문 등을 맡아왔다. 저서로는 『무용비평과 감상』(2020)과 『새로 읽는 뉴욕에서 무용가로 살아남기』(2016)외 다수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최기현(인천문화재단)

달리기는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달렸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족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는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많은 사람이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잘 안다. 체중 감량 외에도 심폐기능과 혈관 건강을 향상시키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 장점이 있다.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달리지 않는 사람이 많고, 많은 사람이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산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는 제목 그대로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살아가며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 그리고 주인공 ‘서바람’처럼 인생에서 달리기 한 가지만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는 주말 아침이 한 주간의 밀린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라면, 그녀에게 주말 아침은 달리기 위한 시간이다. 서바람의 20년 지기 친구 한태수는 사내 연애를 하다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한태수는 실연을 잊기 위해 헤어진 다음 날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다.

돌배,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장거리 달리기에 도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체육시간 이후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과체중의 남자 한태수는 1㎞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달리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못하겠다.”는 한태수의 고백은 일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는 우리의 푸념과 이상하리만큼 닮았다.

제목에 있는 ‘헤어지다’는 동사는 누군가에게 글자 그대로 실연을 의미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뜻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좋지 않은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그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만, 대처는 모두 다르다. 학생이라면 공부가 잘되지 않고, 공부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담당하던 업무가 잘 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고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활동이 왠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하거나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슬럼프’라고 부른다.

“소질이 있어야 달려? 소질이 없으면 달리면 안 되는 거야?”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한태수의 푸념에 서바람의 답변은 독자에게 신선함을 준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 슬럼프를 겪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달리기를 하는데 꼭 소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소질이 없다고 달리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버티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헤어진 다음 날, 달리는 행위는 글자 그대로 달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그 사건 때문에 자신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견디면서 일상을 꾸준히 살아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중 한 장면

슬럼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슬럼프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을 인내할 때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찾아온다고 한다. 슬럼프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상의 러너스 하이는 분명히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벌써 11월이다. 2021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돌아보니 체중이 조금 늘었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몸도 마음도 조금은 게을러졌다. 신기하게도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를 달리고 싶게 만드는 만화다. 등장인물들처럼 달리기의 매력을 흠뻑 느끼고 싶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공원을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억제하면서 만화를 끝까지 읽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동네 공원 한 바퀴라도 뛰어야겠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집에서 집으로: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집에서 집으로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차한비(영화웹진 리버스 기자)

재복(이봉하)에게는 집이 둘이다. 20년 동안 일한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받은 후, 재복은 동료와 함께 거리에 집을 지었다. 천막 앞에는 “부당해고 철회하라”라는 현수막과 농성 기간을 알려주는 날짜 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늘로 1882일째,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재복은 천막생활에 익숙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전단을 건네고, 가위로 양파를 툭툭 잘라 넣어 찌개를 끓인다. 능숙하게 요리하는 재복 옆에서 만용(황정용)은 구멍 난 천막에 청테이프를 잘라 붙인다. 재복은 만용에게 뭘 그리 애쓰냐며 구시렁대다가 입을 다문다. 언젠가는 그만둘 투쟁이고, 이대로 천막에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다만 언제쯤 떠날 수 있을지, 그 시점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마음은 무거워져만 간다.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러닝타임 81분, 개봉 2021.10.21.)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고, 여전히 하고 있다. 1인 시위, 집회, 문화제, 고공농성, 연대 행사, 그리고 소송. 헛되이 쓴 날은 하루도 없다. 온갖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운 달력이 야속해 보이는 이유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서다. 희망을 걸었던 재판에서 패소한 후 천막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애초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니었나 하는 불안과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원망이 뒤엉키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홧김에 천막을 나온 재복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결국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한다. 그날 밤, 만용과 영석(서광택)은 휴가를 결정한다.

“우리라고 휴가 못 가나?” 만용은 덤덤히 묻는다. 노동자에게 휴가가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면, 이들에게 휴가란 일상이 된 싸움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다. 노동자라는 신분을 되찾으려는 길고 막막한 투쟁, 거기서 잠시 빠져나온 재복은 또 다른 집을 찾아간다. 현희(김정연)와 현빈(이승주), 두 딸은 재복을 반기지 않는다. 재복이 천막에서 먹고 자는 동안, 현희와 현빈은 양육자 없이 살아가는 데에 적응해야 했다. 아빠가 집을 떠날 때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들은 이제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과 중학생이 되었다. 울어도 달래주는 부모가 없어서,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돈을 벌어 사야 해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렸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현희와 현빈은 재복을 피한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입 밖으로 원망을 쏟아낼까 봐, 그간 참아왔던 마음이 무너질까 봐 꾸역꾸역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봄이 모자란 흔적은 집안에도 가득하다. 재복은 막힌 싱크대를 뚫고 말없이 냉장고를 닦는다. 재복이 차려주는 밥상을 마다한 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현희가 수시 합격 소식을 전한다. 목소리에는 기쁨 대신 걱정과 의심이 묻어난다. 다음 주까지 대학교에 등록 예치금 30만 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말에 재복은 큰소리를 치지만, 이제 서울에 가지 말라는 현희의 요구에는 말끝을 흐린다.

일, 그것은 재복에게 무슨 의미일까. 일할 때 재복은 정직한 노동자였고, 떳떳한 아버지였다. 유능한 기술자였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리가 분명한 시민이었다. 정리해고는 그토록 선명하고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휴가>는 재복이 투쟁을 결심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현재 그가 상실하고 또 감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일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고자 분투하는 동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는 서서히 금이 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투쟁해봤자 누가 알아주기나 하느냐며 농담 섞인 핀잔을 내뱉는다. 투쟁을 지속하는 이유와 투쟁을 관두어야 할 이유는 그렇게나 맞닿아서 재복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운다.

하지만 서럽고 막막할지언정 5년이라는 시간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아서, 재복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 재복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과 달리, 재복에게 휴가란 잠시 일을 재개하는 기간이다. 현희에게 예치금을 마련해주고 현빈이 입을 겨울 점퍼를 사기 위해 재복은 동창 우진(신운섭)이 운영하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때 재복은 강제 추방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그곳에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노동자를 만난다. 목수로 일하는 청년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봐 산업재해 신청을 두려워하고, 한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은 전공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터를 배정받는다. 재복은 어느 날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두 노동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이처럼 <휴가>는 노동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연결하며, 일과 일하는 사람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배우이자 감독인 이란희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 세 사람이 직접 출연하여 본인을 연기했던 단편 <천막>(2016)을 확장한 작품이다. 전작이 천막에서 농성을 이어가는 세 인물을 통해 일상으로 자리 잡은 투쟁의 풍경을 담았다면, <휴가>는 천막을 벗어난 재복을 중심으로 일상과 투쟁의 경계를 묻는다.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재복에게 천막은 또 하나의 집이다.

재복은 두 딸의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고, 두 동료가 먹을 도시락을 싼 다음에 문을 나선다. 집을 떠나고 집을 거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이러한 짤막한 여정에 동행하며, 싸우는 사람이 끝내 도착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묵직한 필치로 그려낸다.

차한비(CHA Hanbi)

영화웹진 『REVERSE』 기자이며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발간 연구 저널 『ACT!』 편집위원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을 지내고, 독립영화 매거진 『Motion』의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울림의 감각을 잃은 우리, 변화를 위한 시작은 무엇일까: 임시공간 기획전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울림의 감각을 잃은 우리, 변화를 위한 시작은 무엇일까임시공간 기획전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이정은(시각예술연구자)

인천 신포동의 시각예술문화 공간인 ‘임시공간’에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보고 왔다. 시적인 전시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획의 글에 의하면, 이 전시는 생태계의 다양한 종들을 주체로 다루며, 이들 주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에너지의 울림과 공명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이 겨냥하는 것은 이 행성에서 인간 자신만을 보편적 주체로 상정해 온 인간의 독단적 여정이다. 지구의 수많은 생물종들이 형태적, 생태적, 유전적으로 다른 형질적 특성을 지니고 각기 다른 감각계와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인간은 고도로 발달된 두뇌와 자기중심적 사고로 다른 종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이다. 이 전시는 싱글채널 비디오 3점과 영화 3편을 상영하는 스크리닝 전시로 기획되었다. 이 6편의 작업은 호모 사피엔스(생물학에서 인간 종을 가리키는 학명)의 관점으로 구축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다른 종들(더 나아가 사물까지)을 새롭게 인식하고 서로의 에너지와 울림을 느낄 것을 제안한다.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임시공간, 2021.9.1.~9.18. (출처: 임시공간)

엘사 크렘저와 레빈 페터(Elsa Kremser, Levin Peter)의 영화 <스페이스 독(Space Dogs)>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소련과 미국 간 우주를 향한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기, 소련이 쏘아 올린 최초의 우주 개 라이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 사회의 과열된 경쟁은 한 마리 개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카메라는 도시의 거리에서 만난 개들을 따라가면서 길거리의 떠돌이 개였던 라이카의 영혼을 쫓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지금의 길거리에서 만난 개들의 일상을 지루하게 쫓는 이 영상은 라이카에 대한 애도를 쉽사리 끝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영상은 내가 오래전에 보았던 스웨덴 영화 <개 같은 내 인생(My Life As A Dog)>을 떠올리게 했다. 소년 주인공이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의 처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좀 다른 맥락이지만 소년이 비교했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판단과 그에 의해 구축된 질서는 개뿐만 아니라 때로는 인간에게도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독>, 다큐멘터리_91분, 2019 (출처: EIDF)

라두 치오르니치우크(Radu Ciorniciuc)의 영화 <아카사, 마이홈(Acasa, My Home)>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사회 제도와 체계에 맞추는 것이 때로는 위협적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도시 한 켠 야생의 자연이 남아 있는 미개발지 움막에 살고 있었던 한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일대가 생태공원 조성지로 지정되면서 이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환경은 당국에 의해 관리 대상이 된다. 움막은 헐어야 하고 불을 피우고 돼지를 잡는 가족의 일상은 이제 허가가 필요한 사항이 되었다. 이 공원의 나무 식재는 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물놀이를 하던 호수는 보호되어야 할 구역이 될 것이다. 이들 가족은 사회복지 제도의 방침에 따라 도시의 공동주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학습을 하고 자연의 놀이터 대신 이제 운동장에서 스포츠의 룰을 배워간다. 도시에서의 적응과정에서 가족 간에는 불화와 갈등이 붉어지고, 이들에게 도시의 질서와 체제는 다소 버거워 보인다. 한편으로 그 체계가 관할하는 일상에 이미 익숙해진 화면 밖 우리를 보면서 그러한 일상의 그물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아카사, 마이 홈>, 다큐멘터리_86분, 2020 (출처: EIDF)

지구상의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사고는 생물학이라는 학문분과로 체계화되었다. 생물학에서 각각 종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보는 방식은 식물과 동물의 외형과 기관의 형태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계통분류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동물이 어떻게 주변을 지각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생물학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희현의 작업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1장>은 새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영상은 야생조류가 투명유리창에 충돌하는 사고의 발생 원인과 해결 방안을 제시하면서 새의 감각 기관과 보는 방식을 참조한다. 즉 새의 눈이 머리 양옆에 위치해 전방 거리 감각이 떨어진다는 점과, 인간과 달리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새의 시각 체계를 고려한 충돌 방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은 영상 후반부에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병치시킨다는 점이다. 작가는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새를 보면서 인간이 최초의 영화를 보면서 가상과 현실을 감각적으로 구분하지 못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성찰적 환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던 인간의 경험으로 소급해 돌아가 동등한 처지를 환기하는 방식에서 타 존재에 대한 도덕주의적 감정 이입을 넘어서는 윤리적 태도를 볼 수 있었다.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 1장>, 필름_7분 40초, 2020 (출처: 최희현)

우리가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김새와 행동을 통해 유추해 보고 교감하기 위한 노력이 의미 없지 않다는 것을 또 다른 작업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에서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도시생활에 지친 한 인간이 대서양 바다로 들어가 문어와 함께 교감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문어 곁에 다가가고 문어가 자신을 인지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1년의 시간 동안 문어가 무엇을 먹는지, 물속 생태계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관찰한다. 그가 근본적 변화를 위해 대서양에 뛰어들어 야생의 환경에서 감각을 깨우고 뇌를 활성화시키면서 문어와 교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한 <아카사, 마이홈>과 교차되면서, 도시 시스템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야생의 감각을 상실케 하고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세계와 마주할 용기를 내는 것은 전시에서 말하는 공존과 공명을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 90분, 2020 (출처: 넷플릭스)

이번 전시는 인간과 자연이 맺은 관계의 서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전시였다. 그리고 이 서사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성찰과 변화의 시작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기획의 글에서 ‘그가 뱉은 숨을 내가 들이마시듯’이라고 종들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서로의 호흡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처절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이번 전시에서 내게 가장 먼저 전달된 메시지는 다른 생물종과의 울림과 공명의 기억과 감각을 되찾기 위한 시도는 보다 깊고 낮은 위치에서, 보다 가깝고 동등한 처지에 있음을 뾰족하게 느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정은(李定恩, Lee, Jeongeun)

시각예술연구자 및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달빛심포지엄》(2017), 《아워 피크닉_레퍼런스》(2019) 등의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현재 2021 아트플러그 연수 입주작가이다.




예술가들의 어떤 ‘모순적’인 이야기: 『아티스트』(마영신, 송송책방)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술가들의 어떤 ‘모순적’인 이야기『아티스트』(마영신, 송송책방)

최기현(인천문화재단)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이 인기다. 삶의 막다른 지경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456억 원의 상금을 받기 위해 게임에 도전한다.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에 반드시 상금을 차지하여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하는 83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흥행 중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한다. 동료와 끝까지 함께 할 것만 같은 ‘정의로운’ 주인공들도 자신이 탈락할 위기에 처하자 동료를 속이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오징어게임의 주최자도 ‘정의롭고 공정한 기회’를 표방하지만, 참여자의 편법에 눈을 감거나 참여자가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기회를 박탈한다. 참여자나 주최자 할 것 없이 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 사람은 원래부터 모순적인 존재였을까, 아니면 상황이 사람을 모순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마영신, 『아티스트』 총 2권(송송책방, 2019)

만화 『아티스트』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음악가 천종섭, 화가 곽경수, 소설가 신득녕은 무명의 가난한 예술가이다.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자신들의 상황을 한탄한다.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예전에는 나보다 못했던 놈’이라고 폄하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은 뮤지션은 어설픈 실력으로 유세 떤다고 판단하거나, 대중적으로 성공한 예술은 그 예술적 세계가 깊지 않다고 단정한다. “우리 셋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다짐하지만 셋 중에 누군가가 잘되면 배가 아프고 그 성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유치하면서도 모순적이다.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와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음악가 종섭은 득녕의 도움으로 우연한 기회에 스타작가가 되지만 득녕에게 도움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잘 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가 경수는 꼰대 기질에다가 ‘내로남불’형의 인물이다. 대학교 시간강사인 그는 권력에 아부하고 질투심과 명예욕 끝판왕이다. 득녕은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문학상 후보가 된 후에는 ‘문학상을 거부’하겠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그냥 하는 소리’였다고 말을 바꾸는 캐릭터다. 세 인물 모두 마음속으로는 예술을 통해 명예를 얻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예술적 성취도 이루고 싶은데 아닌 척 포장한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남 탓이나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티스트』 중 한 장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로 구분했다. ‘이드’는 인간의 본성이나 리비도, 충동 등이다. 인간의 욕구는 이드에서 비롯된다. ‘초자아’는 양심과 이상적 열망, 도덕적 교훈과 사회적 금기 등이다. 일종의 마음속 재판관이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드나 초자아 어느 한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밀고 당기기를 한다.

이드와 초자아의 대립은 원래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 맘 같아서는 명예와 권력, 돈을 전부 가지고 싶은데, 사회적 금기나 도덕적 교훈 등 이상을 지향하는 초자아 때문에 내 맘대로 갖지 못한다. 내면에서 이드와 초자아의 치열한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드에 휩싸이면 욕망이 밖으로 발현된다. 그 형태는 잠재되어 있지만 오징어게임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모순적인 행동이 나온다.

마영신 작가는 예술가들의 모순적인 면모를 볼 때마다 틈틈이 메모한 것을 토대로 『아티스트』를 그렸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종섭, 경수, 득녕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예술가로서의 초자아 판타지를 꿈꾸면서 동시에 이드에 따라 행동한다. 우연한 기회에 명예나 권력이 주어졌을 때는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이들이 특이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독자는『아티스트』를 읽으면서 어쩌면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티스트』의 후속편으로, 찌질한 곽경수를 재조명한 『아티스트, 곽경수의 길』(송송책방, 2020)도 볼 만하다. 특히 주인공 곽경수가 만화에서 개최한 개인전은 만화 출간과 함께 <곽경수 개인전>(파주 아트스페이스휴, 2020.5.22.~6.25.)으로 현실에서 개최된 바 있다. 곽경수가 만화 속에서 작업한 그림 10점 등이 전시되었고, 뮤지션 김오키의 공연, 소설가 박민규의 소개글도 현실에서 재현되었다. 만화 속 전시회가 현실에서 구현된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유치하고도 모순적인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마영신 작가의 『아티스트』를 한번 읽어보시길.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한상정(인천대학교 교수)

작년에 이어 경인일보가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2021.07.23.~08.10.) 전시를 주최했다. 40명의 작가에 200여 작품. 숫자도 화려하지만 작가와 작품도 호화롭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정현웅, 림군홍, 이쾌대, 김주경 등 미술사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 있지만, 실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근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에서 동시대 조선화가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엄청난 폭염에 구원자처럼 보이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출입문을 열었다. 대전시실로 다가가는 동안 멀리 전시회 제목이 적혀있는 가벽이 보이기 시작했다(사진 1). 보라색과 흰색, 휴전선 경계를 중심으로 공간을 두 개로 분할하고, 그 위에 상대의 색을 지닌 글씨로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모든 글씨가 잘 드러난다. 상대의 성격을 활용한 각자의 드러냄이 인상적이다.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 이번 전시 개최의 철학일까.

사진 1. 전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처음’ 전해주는 가벽 사진 2. 해금된 작가들의 이름들이 한쪽 벽에 적혀있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진한 꽃분홍, 진달래색 가벽에 전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옆에 70명의 월북 화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벽이 보인다.(사진 2) 1988년에 해금되기 전까지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했던 작가들이다. 오랫동안 매장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치 묘비의 표식처럼도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은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작가의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곳 같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역시 진달래색으로 “나는 우리 조국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스며있는 조선의 정신과 기백을 화폭으로 형상한다.”는 조선화의 핵심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리석호의 글이 있다. 1965년에 리석호가 했던 발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북한 특유의 ‘조선화’의 관점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3. 리석호, <수련>, 98×30.5cm, 조선화,1959년

본격적인 전시공간에 다가가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섹션은 ‘조선화의 거장 3인 특별전’이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의 작품들은 연이어 감탄이 튀어나온다. 강하게 휘몰아치다가 한없이 애틋하고 섬세하고 여리게 붓과 먹, 색으로 꽃과 풀과 나무와 물고기를 재현한다. 리석호의 발언이 작품에서 드러날까 궁금해서 <수련>을 보았다(사진 3). 그 어떤 윤곽선도 없이 붓과 먹의 번짐만으로 수련과 수면의 움직임과 잠자리까지. 조선의 정신과 기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과함 없는 간결함과 단정함은, 실로 아름답다. 한글로 작가 이름을 적는 것도 멋지다. 우리 동양화는 주로 한자였는데. 아주 깔끔한 거대한 벽 하나에 이 작품 하나만, 액자를 제대로 하고 조명을 맞춰서 걸어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이런 욕심을 부리게 만드는 작품이 너무 많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두 번째는 ‘낯선, 낯설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월북한 18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도 보인다. 조선화만이 아니라 스케치, 판화나 유화 등 형식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전쟁. 이 몇 단어로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잡한 이유들로 어떤 이들은 월북을, 다른 이들은 월남을 했을 것이다. 남북의 대립이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었을 때, 월북한 작가들도 그 작품들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해금되었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미 작고했겠지만, 그 작품들은 7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세월을 견딘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있을까.

사진 4. 길진섭, <어머니의 초상>, 27×38cm, 스케치, 1974년 사진 5. 정현웅, <꿈>, 34.5×25cm, 유화, 1967년
사진 6. 출품 작가들의 인물화 모음

길진섭(1907~1975년)의 <어머니의 초상>(사진 4)은 타계하기 1년 전의 연필스케치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의 모서리도 닳아있고 접혀있던 흔적도 역력하다. 이미 작고하신지 오래된, 흐릿해가는 모친의 사진을 보며 오래오래 그렸던 것일까. 그 아릿한 마음에 울컥하게 된다. 정현웅(1910년~1976년)은 1966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의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7년부터 평회원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그린 것은, 누구의 꿈일까(사진 5). 월북했던 화가들은 그 이후, 어떤 작품들을 어떤 철학으로 해나갔을까.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함께 녹아있을까.(사진 6) 여전히 우리에겐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세 번째 섹션은 ‘From Korea To Korea’로 동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풍경화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는 확실히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예컨대 최창호의 <5월의 백두산>(사진 7)은 분명히 리석호가 말했던 ‘조선의 기백’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북한의’ 미술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작품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김승희의 <봉산탈춤>(사진 8)이야말로 이런 전시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인물들 아래 ‘황해도 봉산탈춤, 해주강령 서흥탈춤 경기도의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 동해서해남해탈춤(중략)’이라고 호명하는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해도 은율탈춤은 없다. 북한에서는 사라졌을지도 또는 인천에 은율탈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서로 많은 것을 알아가야만 한다. 전시 기간 중 모 국회의원이 만수대창작사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인가, 전에 갔을 때보다 관람객이 더 많아 보였다. 이제는 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엔 제재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술가와 그 작품조차 접하고 연구할 수 없었던 시대로 회귀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예술의 영역마저 제한을 가한다면, 어떻게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사진 7. 최창호, <5월의 백두산>, 134×75cm, 조선화, 2008년
사진 8. 김승희, <봉산탈춤>, 151×101cm, 조선화, 2007

첫해에 공훈예술가 황영준의 개인전을, 올해 조선화와 월북 화가들 작품을 선보였다면, 내년은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조선화가 아카이브’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 다양한 조선화들을, 아니면 조선화의 내용적 형식적 변천을 좀 더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시가 될까. 아니면 조선화의 범주를 벗어나서 또 다른 유형의 북한 작품들을 보게 될까. 여하간,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에서 다른 북한미술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품사진: 정형렬 제공
전시사진: 필자 제공

한상정(韓尙整, Han, Sang-Jung)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문화대학원/인문문화예술기획 연계전공 교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이병국(문학평론가)

강화길의 소설은 어떤 폭발을 예비하는 것처럼 읽힌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엄청난 사건이 인물들을 휘감을 것만 같은데 그 긴장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서사는 부지불식간에 독자의 영역에 슬며시 옮겨져 있다. 이를 당혹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는 소설이 구축해 놓은 공간에 우리가 깊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소라 생각했던 그곳이 섬뜩하고 낯선 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강화길이 재현한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세계가 얼마나 위협적이며 폭력적인지를 알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세계를 만들고 굳건히 유지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최근작 『대불호텔의 유령』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이전 소설과는 달리 닫힌 구조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가 자신이 과거에 쓴 단편소설 「니꼴라 유치원」을 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소설가 소설의 형식을 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재하지 않는 장소의 실재하는 유령에 관한 소설 쓰기는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 변주되며 분명한 결말로 나아간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3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전체 스토리는 소설가인 ‘나’가 몇 년 전 발표한 단편 「니꼴라 유치원」을 쓸 때 경험했던 일과 그 와중에 새롭게 알게 된 ‘대불호텔’과 관련된 사람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소설에서 1부와 3부의 화자는 작가인 ‘나’다. 1부에서 ‘나’는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마다”(19쪽) ‘증오, 원한 미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의 기원이랄 수 있는 여섯 살 무렵의 경험(문용 옹주를 자처하는 이문용의 집과 관련된)과 그 소리를 잠시나마 잊게 한 대불호텔의 과거를 전해줄 박지운과의 만남이 여기에 담긴다.

2부는 박지운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69쪽)은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인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워 진행되며 3부는 2부에서 재현된 박지운의 이야기와는 다른 제3자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액자 내부 사건의 공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다. 1884년경 2층의 목조가옥으로 숙박업을 시작해 1888년 3층 벽돌 건물로 탈바꿈하여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1950년 중반으로 전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불호텔은 쇠락하여 ‘중화루’라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으며 호텔은 3층에서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97쪽)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고연주’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이 호텔에 『힐 하우스의 유령』의 저자 셜리 잭슨이 묵게 되면서 사건이 진행된다.

1950년대 중화루 (사진: 인천광역시 중구청) 대불호텔 터에 복원한 대불호텔 전시관

이 소설의 중요 키워드는 장소에서 비롯된, 그러면서 인물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 즉 위태로운 삶을 초래한 세계의 불합리한 억압에 기반을 둔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없는 전후 1950년대의 상황과 화교로 맥락화된 소수자의 안정적 삶이 허락되지 않는 정황 등이 맞물리면서 대불호텔은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장소로 의미화된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강한 생활력이며 ‘유령’으로 상징된 악의인 셈이다. 이는 이 소설의 초점화자인 작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어린 ‘나’가 이문용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이문용이 문용 옹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 비록 그녀가 ‘가짜’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주는 존재가 부재한 상태가 ‘지나간 미래’로서 ‘나’의 거울쌍이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악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악의’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귀신 들린 여자’ 고연주,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인정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는 셜리 잭슨,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을 자신의 존재 상태로 채택한 지영현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박지운에게 ‘악의’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용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그녀(들)은 악의에 기반을 둔 존재 내부의 충동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를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그녀(들)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구체적 장소를 점유하면서도 기묘하게 미끄러지면서 불편한 지위로 밀려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되는 그녀(들)은 대불호텔 내부와 조우하지 못한 채 외부에 의해 상상된 방식으로만 추상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악의에 가득 찬 타자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욕망의 잔영,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는 어쩌면 전체 서사의 중심이 되는 2부가 박지운의 불확실한 기억, 아니 악의적 각색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들) 삶의 구체성은 다른 이에 의해 구성될 뿐, 그 자신은 이미 죽은 존재로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박지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과거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화자와 서술 주체에 의해 이중으로 구성된 존재로 그녀(들) 모두 타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 속 구성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 낙차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자 하는 충동이며 악의가 전부이길 바라는 세계의 의지가 추동한 결과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 여성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서발턴의 발화에는 그 권리를 둘러싼 허용과 배제의 권력이 개입되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담화의 장이 이미 폭력적으로 중층 결정된 공간 속에서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기주체성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는 이 유령의 모습은 소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물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세계로부터 제한되지 않으려는 수행성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1955년 대불호텔에서 죽은 여자는 스스로 주체화될 수 없는, 일종의 서발턴의 상징적 죽음임과 동시에 폭력적 세계 속에 그들을 가둬두려는 욕망의 실패담에 가깝다. “악의? 그까짓 것들.”(295쪽) 그렇다. 악의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에게 악의에 기대도록 만든 세계가 문제일 따름이다. 폭발 직전의 순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192쪽, 195쪽) 즉 언제든 무너질지 모르는 순간을 포착하는 강화길 작가에게 악의는 세계로부터 배제된 소수자의 생존 수단이었다. 믿을 수 없는 타자와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주어진 자기주체성이 그것인 셈이다. 그러니 세계 따위 언제든 무너져도 괜찮은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대불호텔의 유령』이 담고 있는 역사적 현실과 복합적인 사유를 풀어내기는 어렵기만 하다. 다만, “모든 것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 우리는 늘 그런 위협 속에 산다”(277쪽)는 사실, 그 절망적인 매혹을 수용케 한 것은 장화와 홍련 그리고 그들로 인해 죽게 된 다른 수령들의 마음을 들어준 수령의 마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303쪽) 여성이라서, 되놈이라서 이 땅에 속할 수 없다고, 떠나라고 하는 패악을 감당해야 했던 그들에게 대불호텔 안에서나마 잠시라도 평화로운 순간을 제공하여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148쪽)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환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병국(李秉國, Lee Byungkook)

2013년 <동아일보>로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2019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최기현(인천문화재단)

2021년 5월 24일 BTS가 빌보드 뮤직 어워드 4관왕을 달성했다. SNS 영향력을 보여주는 ‘톱 소셜 아티스트’는 2017년부터 5년 연속으로 차지했고 특히 ‘톱 송 세일즈 아티스트’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 위켄드 등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수상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이 미국 주류 음악시장에서 기록한 쾌거였다.

“BTS가 공연할 때마다 중계방송을 했고, 티켓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동시에 트래픽이 몰리면서 1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팬들의 꽃다발로 온통 무대가 묻힐 지경이었지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끔 혈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때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서이레, 나몬, <정년이> (출처: 네이버웹툰)

가상의 인터뷰이긴 하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배우였던 김진진의 인터뷰1)를 2021년에 맞게 각색했다. ‘BTS’를 ‘여성국극단’으로 ‘티켓 예매 오픈’을 ‘매표소 줄 서는 것’으로,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왕자를 맡았던 배우’로 바꾸면 실제 신문 기사 그대로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지금의 BTS만큼이나 대단했다.

여성국극(女性國劇)은 195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한국식 종합 뮤지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노래,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 ‘2020 문화체육관광부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수상한 웹툰 <정년이>는 목포 출신 시골소녀 윤정년이 매란국극단에 입단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소리 하나는 타고난 주인공 윤정년은 가난한 가정형편이 지긋지긋하다. 국극 배우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매란국극단에 입단한다. 국극단에 입단한다고 모두 공연에 서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도 대사는커녕 무대에 병풍처럼 서는 연구생이 한둘이 아니다. 마치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소속사에서 노력하는 연습생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연구생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차지하려는 정년의 등장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연 정년은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국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정년이>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웹툰)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국극은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와 닮았다. 2021년 메인 트렌드로 떠오른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단어로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뜻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모습,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에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 MMORPG를 즐기는 것 모두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현실의 자신이 곧 가상 속 인물이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지금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과 의미가 통한다. 『메타버스』(플랜비디자인, 2020)의 저자 김상균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메타버스의 모습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여성국극의 작품은 대부분 역사 속 특정되지 않은,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하거나 또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다. 요즘 웹툰에서 유행하는 일종의 로판2)인 셈이다. 6.25 전쟁 후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로 삶을 치유하며 현실을 극복해갔다. 메타버스에서 디지털을 제하면 현실을 초월한 가상세계는 <정년이>에서 재현하는 시공간과 맞닿아있다.

주인공 윤정년은 자신이 연기하는 방자가 되기 위해, 이름 없는 군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공연 속에 등장하는 방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름 없는 군졸이 어떤 심정으로 대사를 외쳤을지 가슴 절절하게 느끼며 등장인물에 몰입한다. 윤정년의 라이벌 허영서는 단연 매란국극단의 에이스다. 유명한 음악가인 부모님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국극 공연에 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이다. 완벽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단순히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배역을 끊임없이 ‘나답게’ 해석하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혼연일체가 된다. 비단 허영서 만이 아니다. 국극을 공연하는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공연 속 <자명고>의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되고, <바보와 공주>의 평강공주와 온달이 된다. 현실의 자신이 곧 공연 속 가상 인물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세계관이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 TV와 영화 등 대중 매체의 발달, 체계적인 배우 교육의 부재 등의 요인으로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서정적인 작품세계는 산업화 이후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년이>의 배경은 여성국극의 절정기인 1956년이다. 우리나라 첫 TV 방송이 1956년임을 감안한다면 <정년이>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여성국극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극을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열정과 대비되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이 글을 읽고 여성국극에 관심이 생겼다면, 주인공 윤정년의 좌충우돌 국극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참고>

  • 1) 「여성국극의 맥」, 경향신문 (1984.11.21.)
  • 2) 로맨스판타지의 줄임말. 로맨스와 판타지가 합쳐진 말로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낯익지만 낯선 도시의 기록: 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낯익지만 낯선 도시의 기록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임종은(독립 큐레이터)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고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뉴딜정책’이 전국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인천 연수구에서는 “장소가 아닌 마음에 남는 공공미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성과로 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2021. 7.28.~8.10.)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를 준비할 때는 연수갤러리(연수구의회 1층)에서 관람객들을 직접 만나는 오프라인 행사로 기획되었지만, 방역과 안전을 위해 온라인 전시로 전환되었고, 연수문화재단 네이버TV, 유튜브 등의 채널에 게시된다. 인천 연수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온 작가들과 단체인 카툰캠퍼스, 인천창조미술협회, 청학동2030, 그린웨이브, 연수구서예협회 등은 공모를 통해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성과와 과정을 온/오프 전시장에 모았다.

2021 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연수갤러리, 2021. 7.28.~8.10.) 인천창조미술협회, <인천의 작은 역사 송도어촌계를 아시나요> 프로젝트 전경

코로나 대유행의 여파로 우리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예술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창작과 생존이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탄생했던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사실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와 우려가 제기되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중요한 상황에 공공장소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장 활동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에 아쉬움과 미숙함이 있었지만, 작가들의 예술적 대응은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이제 일상에서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번 프로젝트를 관행적으로 수행하고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유의미한 경험과 시도를 발굴하고, 기록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펴본다면, 연수구의 참여 작가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장소를 연구하고 개입하면서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을 현장에 전시하거나 온라인을 통해 공유하고, 책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코로나 방역상황을 의식한 결과물을 도출했다. 더 나아가 물리적인 공간이나 사회적 거리두기에 구애받지 않는 방법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들도 선보였다. 이것은 참여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 영역인 서예, 수채화, 유화, 한국화, 조각, 설치, 디자인, 미디어아트, 디지털콘텐츠, 일러스트, 문화교육, 기획 등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서 출발하여 서예 전시, 그림책과 만화 제작,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수행, 설치미술과 공간 및 시설 디자인으로 환경개선 등 시민들에게 친숙한 형태로 장소에 스며들고, 다가가려고 했던 시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 형태와 예술적 방법론을 확장하고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카툰캠퍼스, <멀고도 가까운 먼우금 사람들> 프로젝트 전경 그린웨이브, <빛, 파도 그리고 바람> 프로젝트 전경

참여 작가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로 자신들의 장소인 연수구를 되돌아보고 연구하면서, 시간과 급속한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지워져 가는 것들을 찾아보고 기록했다. 지역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품은 지역의 역사, 장소에 얽힌 서사, 주변의 이웃들이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온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장소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채워간다. 도시 개발과 간척 사업으로 점차 희미해져 가는 어촌계를 소재로 작업한 ‘카툰캠퍼스’와 ‘인천창조미술협회’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숨겨졌던 것들을 기록하고 ‘청학동2030’은 사라져가는 협궤열차와 60년을 함께 한 송도 역전시장의 환경개선 사업으로 지역에 활기를 주었다. ‘연수구서예협회’는 개인의 수양과 창작을 넘어 청학동 이야기를 마을 주민과 함께 만든 작품을 공공 공간에 설치하였다. ‘그린웨이브’는 디지털 기반의 콘텐츠를 개발하여 송도동 솔찬공원의 지역·생태적 특징으로 장소를 소개하고 그 가치를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낯낯곳곳_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을 통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인 익숙한 장소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모아서 전시 형식으로 펼쳐 보였다. 전시 제목에 언급된 ‘낯익지만 낯선’은 다시 말해, 급속히 변해가는 자신의 터전이자 일상 장소에서 개발과 자본에 가려진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전시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결과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제공하여 사업의 성과를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장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과정과 프로젝트의 콘셉트를 시각화한 자료들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참여자들의 숨은 노고와 재발견된 지역의 문화적 유산이 함께 드러나는 순간이다.

연수구서예협회, <꿈이 나는 동네, 청학> 프로젝트 전경 청학동2030, <송도역 전시장> 프로젝트 전경

전시의 구성은 공공미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속에서 프로젝트의 완성도의 결정하는 요소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생성된 리서치와 아카이브는 공공미술의 핵심 재료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대개 현장에서 이것들로 만든 결과만을 보게 된다. 전시는 이러한 아쉬움을 담아 기록하고 홍보하려고 했고, 전시장에서 프로젝트의 여정과 수집된 아카이브 를 전시와 작품으로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업별로 공간을 차별성 있게 구획하거나, 외부에서 전시하기 힘든 서예작품을 전시장에 알맞게 설치하면서도 현장감을 확보하려고 했다. 환경개선 디자인 작업을 위해 진행한 인터뷰와 시장에서 수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설치작품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작가들이 그린 책의 원화를 전시함으로써, 전시장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공간적인 차별점과 장점을 살리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전시가 아니라 축적과 공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지속적인 지역 연구를 위해 이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 * *

덧붙여, 널리 공유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과정과 성과가 온라인으로 소통의 장을 옮겼기 때문에 시민들의 접근성에 대한 확보는 향후 과제가 될 것 같다. 전시장에서 강조한 것처럼, 공공미술은 만드는 과정도 중요하고, 현장에서 시민들이 향유하며 생기게 되는 반응과 의견 등의 수렴 역시 작품의 일부이며, 결과이다. 장소와 작품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하는 아카이브와 온/오프라인 전시를 계기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더 풍부한 완성도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길 기대해 본다.

임종은(林鍾恩, Lim, Jongeun)

세계화 속에서 아시아 현대미술을 재정의 하는 데 관심이 많은 독립 큐레이터다. 2019년 제1회 《상하이 국제 종이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대안공간 루프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등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이론을 가르치며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네트워크와 작가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2021년 《Korean Pavilion for Biennale Jogja_Art Exhibit 2021 of KONNECT ASEAN》에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