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가득 신비한 “네네네” 숲으로의 초대: 넌버벌 퍼포먼스 <네네네>

상상가득 신비한 “네네네” 숲으로의 초대넌버벌 퍼포먼스 <네네네> 연출.안무/김민정. 출연/ 조도경. 홍성욱. 이소연.

송용일 (극단 십년후 상임 연출)

2022년 4월 29일 저녁 7시 30분에 연수아트홀에서 <네네네>공연을 관람했다. 연수문화재단에서 기획한 플레잉연수 금요예술무대는 어린이날 100주년 특별시리즈 “동심에 풍덩”이라는 슬로건으로 마련되었다. <네네네>라는 작품은 한국과 스웨덴 수교 60주년을 계기로 문화공작소 상상마루와 스웨덴의 유수의 아동예술단체 지브라댄스(ZebraDans)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공동 제작한 작품이라 소개가 되어 있었다.

연수구청 지하에 마련된 연수아트홀은 약 400석 정도의 규모로 코로나 좌석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었다. 어린이극으로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입장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코로나로부터 해방인가 하는 반가움이 들었다. 무료 공연이긴 했으나 코로나에 지친 지역주민들을 위한 연수문화재단의 기획에 박수를 보낸다. 새삼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크라이나 전쟁뉴스가 연일 보도되면서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의 희생에 가슴이 아팠는데…

공연장에 들어서자 무대는 설치미술을 한 듯한 나무 조형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들여 만든 조각품 같았고, 보기 드문 무대장치였다. 시각적인 것부터 정성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공연이 기대가 되었다. 공연은 넌버벌 퍼포먼스 형태였다. 대사가 없이 진행되는 공연으로 주로 몸짓과 소리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인데 아이들이 공연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음악과 함께 공연은 시작되고 무대는 ‘네네네’라는 이름을 가진 신비로운 숲으로 표현되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은 3명으로 춤과 마임 등 숙련된 배우들이다. 아침이슬에 깨어난 숲속 동물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로 시작된다. 대사는 네네네 뿐이다. 네네네 만으로 표현했을 뿐인데도 객석 아이들은 그 놀이를 잘 알고 있는 듯 모두 즐거워한다. 술래가 돌아보면 멈추고, 도망가고, 잡히고. 또 다른 배우가 술래가 되고… 스웨덴과의 합작 공연이라 했는데… 왜 이 놀이를 넣었을까?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된 “오징어게임”을 아이들도 본 것 일까, 외국아이들도 이 놀이를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연은 배우들의 몸짓과 나무에 달려있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합치고 풀어지고 하면서 원숭이, 기린, 등 숲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표현하였다. 소리와 몸짓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치 문제풀이 소리치며 즐거워한다. 전반부는 특별한 사건이 없이 신비로운 숲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네네> 공연 모습
(제공 : 연수문화재단)

숲속의 시간은 오후로 넘어가면서부터 조금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넓은 바다로 인도하는 애벌레 모습. 바다 속에서 사는 여러 가지 물고기가 뛰어 노는 모습, 놋쇠그릇을 치며 소리로 소통하는 모습. 배를 타고 가는 모습, 등 배우들의 움직임은 쉴 틈 없이 여러 내용들을 표현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좀 어려웠을까? 객석은 조용해지고 하나 둘 조는 모습도 보인다. 너무 빠른 전개. 반복되는 음악. 아이들 눈높이에서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좀 벅찬 느낌이다. 사물을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다른 형태로 보여 지고, 생각을 바꾸면 다른 의미로 보여 진다는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이 공연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작품이다, 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네네네> 공연 제목이 처음에는 <노노노>란 “안 돼”라는 부정의미를 긍정의미인 <네네네>로 바뀌었다는데 왜 그랬을까? 아름다운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대사 없이 진행되는 공연이라 내용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연출도 객석의 반응을 아는 듯 대사로 약간의 설명이 필요 했으리라 짐작된다. 배우들의 대사가 들어오면서 객석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약 40분 남짓한 공연은 막을 내리면서 끝난 듯 보였는데… 마이크를 잡은 배우가 다시 등장하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 되었다. 공연에서 보여주었던 움직임들에 대한 모습들을 물었다, 이 모양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요? 아이들은 저마다 생각한 것들을 말했다. 그리고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여 느끼게 해주고자 하는 것이 본 공연의 의도 같았다. 배우가 표현한 움직임을 따라 함께 해보면서 객석 분위기는 고조가 되었고 그렇게 막을 내렸다.

<네네네> 공연 모습
(제공 : 연수문화재단)

<네네네>는 연출과 안무를 맡은 김민정의 고뇌가 엿보이는 공연이었다. 시각적 미학을 추구한 무대와 의상이 인상적이었고 배우 3명만으로 무대를 채운 노련한 움직임은 오랜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공연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공연을 전체적으로 다시 연상해보았다. 연극의 기본요소인 갈등이라는 소재를 넣어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글/사진 송용일(宋鏞日. SONG YONGIL / 연출 겸 무대미술가)

극단 십년후 상임연출 

뮤지컬/김구-가다보면. 성냥공장아가씨 등

연극/ 소문. 아름다운축제. 애관등 다수

경기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활동 연혁>

* 2000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연극전공)
“무대미술의 한국적 양식화”- 창극 춘향전을 중심으로 논문발표.
* 2001년 일본 일본대학교 연극영화과 객원연구원 수료.

* 1997–2003년 대경대학. 중앙대학. 청주대 연극과 무대미술 출강(7년)
* 2003–2007년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부 연극과 겸임교수(4년)
* 2007–2008년 중국 연변대학 연극과 초빙교수(1년)
* 2009—2012년 인천대학교 출강.(4년)
* 현 극단“십년후” 대표및 상임연출.

* 제 3회 대한민국연극제 : 신포동 장미마을 은상수상 (2018년)
* 제 1회 대한민국연극제 “ 배우우배” 은상수상(2016년)
* 제24회 전국연극제 “사슴아 사슴아” 대통령상. 연출상 수상(2004년)
* 인천 연극제 연출상 및 대상 수상 (5회)




해질녘이면 더 선명해지는 오렌지 빛 아트큐브: 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 <주말엔 숲으로>

해질녘이면 더 선명해지는 오렌지 빛 아트큐브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 <주말엔 숲으로>

송수연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서구 정서진에는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문화 공간이 있다. 아라뱃길 한 자락에 위치한 정서진아트큐브(인천 서구 정서진1로 41)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해질녘이면 더 선명해지는 오렌지 빛 아트큐브는 주변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소박함으로 문화 예술 공간의 문턱을 낮춰 구민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 2019년 5월 개관한 이래로 구민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 미술 전시와 연계 교육,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 <주말엔 숲으로 Weekend in the Forest>는 2022년 정서진아트큐브의 첫 번째 전시다. 서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의 박유리 주임은 어떻게든 도시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주말만 되면 교통 체증을 비롯한 각종 불편함을 무릎 쓰고 들과 산, 숲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했다.

“숲에는 도시가 주지 못하는 평온함과 휴식이 있어요. 캠핑과 차박에 열광하는 이유도 비슷하겠죠. 숲세권, 공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세태를 봐도 그렇고요. 도시의 과밀집과 무한 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쉼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숲을 찾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서 현대 도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양식을 돌아보고,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 가까이서 쉼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전시는 총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고 마지막 섹션은 전시 공간이자 체험공간이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김재경 작가의 ‘산책’이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산책을 하며 만난 사람들, 새, 강아지, 고양이부터 날개 달린 사람까지 현실과 상상을 아우르는 다양한 조형물을 아크릴 커팅으로 만들었다. 사방이 트인 바닷가라는 공간의 특성을 살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햇살을 다양하게 반사하는 아크릴 조형물이 관람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첫 번째 섹션 김재경 작가의 <산책>은 전시장 입구와 기둥, 모퉁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정신이 피곤하고 나태해 졌을 때, 공원에 들어가 한가한 걸음걸이로 소요하고 꽃향기를 맡으면 가슴이 맑아지고 심신은 상쾌하여 고달픈 모습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서유견문』의 구절도, 이를 받아 안은 작가의 말(산책은 넓은 곳의 기운을 몸과 마음에 유입시키는 행위이다.“)도 인상적이다.

<김재경 <산책>(아크릴커팅 가변, 2016)
(사진 제공: 송수연)

<김재경 <산책>(가변 나무합판에 오일스틱, 2018)
(사진 제공: 인천서구문화재단)

두 번째 섹션은 김민주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어있다. 몽유도원도 같은 동양화 속 자연을 이상향으로 하되,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수묵을 베이스로 한 한국화 기법에 다양한 색채를 입힌 작품들은 현실공간이 아닌 자문자답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문답공간이다. 이러한 문답 과정은 도시의 삶에 치어 망각하고 있던 자아를 발견하고, 사색하는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김민주 <산책>
(장지에 먹과 채색, 72x91cm, 2021)

김민주
(장지에 먹과 채색, 41×31.5cm, 2021)

(제공 :인천서구문화재단)

세 번째 섹션은 이상원 작가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 도시에서 어쩌면 가장 기묘한 공간인 공원 속 군중을 담았다. 공원은 현대 도시에서 나이와 인종, 성별의 차이를 아우르는 유일한 공간이다. 현대 공간의 배타성을 생각할 때 공원의 개방성은 놀랍다. 이상원 작가는 이런 공원 속 군중을 부감 시점과 파노라마 시점을 사용,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그의 작품 속 군중은 대중이지만 개성이 있고, 섞여있지만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속에 같은 모양과 색깔의 돗자리와 텐트는 하나도 없고, 같은 얼굴을 한 사람도 없다.

이상원
(캔버스에 아크릴, 200x350cm, 2015)

이상원
(캔버스에 유채, 200x200cm, 2019)

이상원 <광장>
(캔버스에 유채, 200x200cm, 2020)

(제공 :인천서구문화재단)

네 번째 섹션은 작품 자체가 하나의 체험이 되는 공간이다. 노현지 작가의 ‘그날의 맛’은 밝은 색부터 어두운 색까지, 소프트한 재료부터 단단하고 거친 재료까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했다. 전시장을 돌고 나서 그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 3가지를 담아 자신만의 감정 파이를 만든 후, 가볍게 숲으로 피크닉을 떠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혼합재료, 가변, 2018)
관객들이 만든 감정파이(제공: 인천서구문화재단)

전시장에서 큐레이팅을 겸하고 있는 박유리 주임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른이 만드는 감정 파이와 달리 아이들이 만드는 감정 파이는 온통 말랑말랑하고 가볍고 환한 재료들뿐 이라고.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검고 거칠고 단단한 재료들로 거무죽죽한 감정 파이를 만들게 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단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나는 밝고 말랑한 재료로 그날 나의 감정을 한껏 밝게 표현해보았다. 어쩐 일인지 전시장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덩달아 가벼워졌다.

바다가 주는 장쾌함과 호방함도 좋지만 숲과 나무가 주는 안정감과 위로는 지친 현대인을 가만히 위무한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산에 오르거나 인천대공원을 걸어보면 어떨까? 만약 이도저도 내키지 않다면 정서진으로 가보는 것도 좋다. 상주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고, 내 마음속 숲과 나무를 만나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전시의 마지막에 최대한 예쁘고 환한 재료로 나만의 감정 파이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잊지 마시기를. 이번 주말에는 정서진아트큐브로 훌쩍 떠나보자.

전시개요: <주말엔 숲으로 Weekend in the Forest>

일 시: 2022. 3. 30(수) ~ 5. 29(일)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관

장 소: 정서진아트큐브(인천광역시 서구 정서진1로 41)

참여작가: 김민주, 김재경, 노현지, 이상원

연계프로그램: 바삭바삭 파이 피크닉 즐기기

관 람 료: 무료

상세안내: https://www.iscf.kr/new/html/event/schedule

글/사진 송수연(宋受娟 Song Soo-yeon)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2014년 계간 『창비어린이』 평론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등단




사건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한국 근대추리소설 특별전 – 한국의 탐정들>

사건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한국 근대추리소설 특별전 – 한국의 탐정들>

박보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 합니다.”

여기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에 모노클을 낀 한 남자가 있다.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채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풀어낸 명탐정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셜록 홈즈도, 에르큘 포와로도 아니다. 그의 이름은 유불란(劉不亂), 죽일 유(劉)자를 성씨로 가진 사람답게 심상찮은 살인사건들을 해결해내는 한국 근대의 명탐정이다.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팽이 탄생하고 인기를 끌던 시절, 놀랍게도 한국에서도 명탐정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한국근대문학관에서 한국의 근대추리소설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근대추리소설 특별전 – 한국의 탐정들>(2021.11.5.~2022년 상반기)이다. 이 전시는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탐정들을 중심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역사를 조망한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각 작품의 살인사건에 몰입해 범인의 정체를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탐정들 포스터 (인천문화재단 제공)

전시는 총 6개의 섹션과 하나의 특별 코너로 나뉘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섹션 ‘정탐의 출현’에서는 한국 탐정소설의 시작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탐정소설은 이해조의 『쌍옥적』(1908)이다. 이 시기 한국에 처음 등장한 추리소설과 탐정은 ‘정탐소설’과 ‘정탐’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썼을 법한 시체 초검 보고서와 법의학서, 범인의 행로를 기록한 지도를 보고 있자면 CSI 못지않은 한국 근대 시기 탐정들의 활약상이 눈앞에 그려진다.

두 번째 섹션은 ‘소년탐정’이다.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덕분인지 소년탐정이라는 단어는 우리들에게도 익숙하다. 1920년대 중반에 소년탐정이 한국 근대추리소설의 역사에 등장한다. 이 시기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어린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어린이관이 형성되던 시점이다. 전시장에는 방정환이 어린이들을 위해 창작한 『동생을 찾으러』(1925)가 도트 게임으로 구현되어있다. 게임 속에서 직접 소년탐정이 되어 납치당한 동생을 구하러 떠나보자.

『마인』 신문 연재 삽화 모음

국보와 괴적』 컨셉 아트

기획전시실의 2층으로 올라가면 세 번째 섹션 ‘탐정의 탄생, 프로탐정의 출현’을 만날 수 있다.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의 독자들이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과 같은 외국 추리소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의 창작 추리소설 속에서도 민간 탐정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시장에서는 민간 탐정이 최초로 등장하는 소설 『혈가사』(1920)를 애니메이션으로 감상할 수 있다.

마침내 네 번째 섹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탐정-유불란(劉不亂)’이 등장한다. 이 섹션에서는 모리스 르블랑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유불란이 다양한 살인사건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추리소설에서 탐정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팜 파탈로 등장하는 여성들이다. 한국형 추리소설에서 이 팜 파탈들은 탐정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마인』(1939)에서 유불란은 팜 파탈로 인해 진범을 놓치게 된다. 이에 그는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한다는 말과 함께 탐정을 폐업한다. 유불란이 놓친 진범이 누구였는지는 전시장에서 직접 추리해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섹션인 ‘변질된 탐정들’에서는 『태풍』(1942)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온 유불란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유불란이 아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이 이어지던 상황 속에서 유불란을 비롯한 탐정들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스파이를 색출하는 방첩활동을 벌인다. 이처럼 변질된 탐정의 모습은 해방 이후 새로운 탐정의 등장을 통해 해소된다. 여섯 번째 섹션 ‘해방기 탐정, 애국 탐정 – 장비호’에서는 유불란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탐정 장비호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예술과 격투기에 능한 잘생긴 로맨티스트이며 경찰들도 풀지 못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내는 명탐정이다. 도난당한 신라 금관을 찾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종횡무진 하는(『국보와 괴적』(1948)) 장비호의 행보를 전시를 통해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주요 인물들의 컨셉 아트를 모아둔 조형물

<한국의 탐정들>은 최초의 한국근대추리소설 전시로서 희귀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흥미진진한 전시다. 관람객은 작품 속 장면을 구현해놓은 포토존, 피 묻은 증거품들, 직접 해독해볼 수 있는 암호를 통해 소설을 오감으로 체험해볼 수 있다. 전시를 따라가다가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진다면 특별 코너로 향하면 된다. 20세기 초 번역, 번안 추리소설들을 소개하고 있는 특별 코너에는 다양한 추리소설들이 함께 비치되어 있어 원하는 작품을 직접 읽어볼 수도 있다.

셜록 홈즈는 알지만 유불란은 모른다면, 혹은 그냥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한국의 탐정들>을 관람하러 가보자. 전시는 무료이고 방문이 어려우면 홈페이지에서 VR로도 관람이 가능하다. 하지만 넉넉히 시간을 잡고 직접 찾아가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온라인으로는 체험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치를 통해 미스터리한 사건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작품도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만다. 그럼 범인들의 실마리를 찾으러 지금 떠나보자.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 온라인전시

글/사진 박보연(朴保姸, Park, Bo Yeon)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오래된 시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최초 호텔에 울려 퍼지는 특별한 피아노 선율: 대불호텔 피아노의 방

우리나라 최초 호텔에 울려 퍼지는 특별한 피아노 선율 대불호텔 피아노의 방

손민환(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최근, 중구 대불호텔 전시관 3층에 <대불호텔 피아노의 방>이 꾸며졌다. 이번 전시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고(故) 이문영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명예교수가 아내 김석중 여사에게 선물한 피아노를 메인으로, 인천에 유입된 서양 악기와 근대 음악사를 함께 보여준다. 지난해 중구에 이 피아노가 기증된 것을 계기로, 기증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개최한 전시다.

모든 전시가 마찬가지겠지만, 기획 의도와 유물에 담긴 스토리를 알면 더욱 재미있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하나의 메인 유물을 가지고 전시를 풀어낸 이번 전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이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대불호텔전시관에 대한 공간 이해가 선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본다.

전시실 전경 

이번 전시가 진행된 대불호텔 전시관은 개항도시 인천에서 특별한 공간이다. 1884년 경, 일본인 무역상 출신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일본식으로 목조 2층 건물을 짓고, 자신의 별명인 대불(大佛)에서 이름을 따서 ‘Hotel DAIBUTSU’라 부른 것이 대불호텔의 기원이다. 1885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의 비망록에도 이 호텔에 머물렀던 기록이 확인된다. 호리 히사타로는 원래 호텔의 옆 부지에 서양식 벽돌조 3층 건물을 세워 1888년부터 본격적인 호텔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호리 히사타로의 아들인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가 이어 받아 운영하였다. 1918년 경 호텔을 매입한 중국인에 의하여 ‘중화루’라는 중화 요릿집이 되었다가 1970년 초 문을 닫고, 1978년 철거되어 주차장으로 사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불호텔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2018년 대불호텔을 재현하고 전시관으로 사용하면서부터다. 수년간 지속해 온 ‘개발’과 ‘보존’, 그리고 ‘복원’과 ‘재현’ 논란 끝에 재현된 대불호텔을 전시관으로 이용하면서, 다시금 대불호텔이 주목 받게 되었다. 명확한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현이 아니라 복원해야 했다는 쓴 소리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 시민과 인천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문화 거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번에 김석중 여사의 피아노가 전시되면서 대불호텔 전시관에 의미가 한층 더해졌다. 이 피아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령 피아노’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2011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배재학당 피아노(1911년 제작)보다 20여 년 앞서 제작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은 대중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충분했다.

이 피아노는 뉴욕의 소머 앤 컴퍼니(Sohmer & Co.)에서 제작한 것으로, 제작 시기는 1888년경으로 추정(필자 추정)된다. 관람객들은 볼 수 없으나 피아노 상판을 열면 ‘PAT.’와 일련번호가 기입되어 있다. PAT.는 기술 특허를 의미하는 Patent의 약자로, 이 피아노에는 6개의 특허 승인 일자가 각인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 특허 승인 날짜는 1887년 3월 8일로, 특허 내용은 음색을 풍부하게 만드는 기술(Aliquot String)이다. 언론에서는 이 일자를 근거로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일제히 보도하였다.

일련번호 또한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피아노의 일련번호는 ‘15262#5’로, 소머 사는 1885년 12200, 1890년 17200, 1895년 22500, 1900년 27800 등의 일련번호를 순차적으로 부여하였다. 산술적으로 1년에 약 1000번 정도의 일련번호가 부여된 것으로, 15000번 대는 1888년경에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PAT.와 일련번호를 토대로 볼 때, 이 피아노는 1887년 최신 특허 기술을 도입하여 1888년경에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허 승인 일자

일련 번호

사람들이 이 피아노에 관심을 주목했던 부분은 최고령 피아노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피아노에 관한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사실, 최고령 피아노라는 보도 자료가 무색하게 이보다 더 오래된 피아노가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 비록 최고령은 아니지만 이 피아노가 간직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가족사진(ⓒ차녀 이선아 박사)

1959년, 미국 유학을 마친 고(故) 이문영 교수는 중고 피아노를 구입하여 인천항을 통해 입국했다. 한국에 남아서 자신의 유학을 뒷바라지했던 아내 김석중을 위한 선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며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군사 정권 하에 3・1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에 목소리를 낸 이 교수가 해임과 옥고를 거듭하는 동안, 아내 김석중은 자녀들과 피아노를 치며 그 시간을 인내했다고 전한다.

이문영 교수 부부가 작고한 이후, 이 피아노는 이 교수와 인연이 있었던 이영근 한국사법교육원 이사장에게 전해져 한국사법교육원 내 휘란 작은 도서관에서 전시되었다. 그러다가 생전에 “백범 김구를 존경한다.”는 이문영 교수의 발언에 따라 이영근 이사장이 이문영 교수의 자녀들과 상의하여 지난해 인천 중구에 피아노를 기증하였고, 인천중구문화재단에서 기증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이번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아내에게 바친 선물로 민주화 운동의 대부의 집에서 자리 잡았던 이 피아노는, 이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던 대불호텔 전시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전시와 더불어 토크콘서트와 작은 음악회를 수시로 개최할 계획이라고 하니, 눈으로만 보는 유물이 아니라 귀로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글/사진 손민환(孫珉煥, Son Min Hwan)

인천 지역사 연구와 전시 기획을 주로 하고 있다. 인하대학교박물관,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인천개항장연구소를 거쳐 부평역사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역주 강도지,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인천의 문화사적과 역사터, 도쿄제강 사택에 담긴 부평의 시간 등의 집필에 참여했고, <열우물연가: 부평 마지막 달동네>, <해방공장: 1945년 군수기지 부평의 기억> 등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인천 노래, 꽃으로 피어나라!

인천 노래, 꽃으로 피어나라!

장유정(단국대학교 자유교양대학 교수)

최근 인천을 기반으로 한 소중한 음반들이 여러 장 나왔다. 인천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인천을 소재로 한다든지, 인천 출신 음악인이 참여한다든지, 인천에 주관 단체가 있다든지 등의 의미를 모두 포괄한다.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음반이 최근에 이렇게 활발하게 나온 적이 있었나 싶다. 그러므로 일단 긍정적인 마음을 전제로 몇 개의 음반을 무작위로 들어 그 성과와 한계를 보려 한다.

먼저, 《리:애스컴(RE:ASCOM)》 음반이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문화도시 부평 사업의 일환으로 발매한 이 음반은 미8군 무대가 있었던 부평 애스컴(ASCOM) 출신 원로 음악가들에 대한 오마주로 제작된 음반이다. 김면지(예술숲 대표) 총괄 감독의 기획력이 돋보인 이 음반은 신구의 조화와 조합이 특히 아름다운 음반이다. 인순이가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을, 이혁이 신중현의 <미인>을, 고영열이 배호의 <배신자>를 불렀는데, 편곡과 보컬이 친숙함과 낯섦을 오가며 멋진 사운드를 연출했다. 이 작업에 참여한 분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강력한 내공의 음악가들이다. 부평음악도시 뮤즈컴 1기로 선발된 지역 음악가들의 노래도 신선하다. 김홍탁의 창작곡 <하얀사랑>을 더하면서 단순한 부활이 아닌 새 생명마저 부여받았으니 나무랄 데 없는 음반이다.

다음으로 《뮤즈컴(MUSCOM)》 음반은 공모 사업을 통해 선발된 음악인들이 참여한 음반이다. ‘뮤즈컴(MUSCOM)’은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대중음악(Music)의 무대(Stage)가 되고 새로운 창작을 지원(Support)하는 사령부(Command)의 기능’을 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다. 위에 제시한 영어 단어의 대표 철자를 합쳐 만든 ‘뮤즈컴’은 실제로 다양한 장르의 멋진 음악을 담고 있다. 참여한 음악가들은 오헬렌, 정예원, 보쏘, 네이키드소울, 진해인데, 이들 중 그 누구도 비슷하지 않고 독특해서 골라 듣는 맛이 있다. 장르는 물론이고 양악에서 국악까지 악기와 창법 등에서도 다양함을 추구한 음반이다. 좋은 음악인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때 그 결과물이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리:애스컴(RE:ASCOM)》 음반

《뮤즈컴(MUSCOM)》 음반

ⓒ부평구문화재단

세 번째 음반은 《인천 시티 팝》이다. 인천광역시에서 주최한 ‘제1회 인천시민창작가요축제’에서 선정된 대표곡 6곡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 최근 불어닥친 이른바 ‘시티 팝’의 인기에 부응하는 음반인지라 특히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한다. ‘시티 팝’을 장르로 볼 수 있는가의 논쟁이 있기는 하나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시티 팝이라 칭할 수 있는 노래들이 등장했다. 윤수일의 <아름다워>, 모노의 <넌 언제나>,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 등이 새롭게 한국 시티 팝의 원조로 발굴되는 한편, 본격 시티팝의 모습을 보여준 김현철의 음악이 한국의 원조 시티 팝으로 호명되었다. 정작 김현철 자신은 자신의 음악을 애초에 시티 팝이라 칭하지 않았으나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시티 팝은 김현철의 음악과도 연결된다.

일본에서는 이미 시티 팝이 오래전부터 인기를 얻었으나 시티 팝의 유행을 굳이 일본의 영향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시티 팝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으면서도 멋진 시티 팝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현철 등의 음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티 팝의 핵심은 ‘도시’ 또는 ‘도시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라 할 수 있다. 대표 시각적 클리셰는 ‘자동차를 타고 네온사인이나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밤에 도시의 강변이나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다. 기계음 등이 가미된 청량한 느낌의 연주는 시티 팝을 시티 팝이라 부르는 데 일조한다. 인천광역시에서 발매한 《인천 시티 팝》 음반에 수록된 <BREAK TIME>, <Moonlight>, <I’m Alright>, <너만 있으면>, <불밤>, <West City>에서도 청량감 가득한 시티 팝 특유의 정서를 만날 수 있다.

제1회 인천시민창작가요축제 포스터

《인천 시티 팝》 음반

ⓒRUBY RECORDS

이 밖에도 ‘제7회 인천 평화 창작 가요제’ 수상곡을 담고 있는 《2021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음반도 ‘평화’를 화두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음반으로써의 의미를 지닌다. 인천 콘서트 챔버에서 제작한 《인천 용동 권번 예인 이화자 다시 부르기》 음반은 인천 용동 권번 예인 ‘이화자’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시도는 좋았으나 민요 창법을 주로 사용했던 이화자의 노래를 벨칸토 창법으로 부르면서 노랫말이 선명하게 안 들렸다. 멋지지만 난해한 연주는 이화자의 노래를 국적 불명의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발굴했다는 <월미도>도 노랫말 없이 연주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쉬웠다. 의아했던 것은 이화자의 생몰연대를 언급한 부분이다. 이화자가 1950년 서울 자택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옛 기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도, 음반 곳곳에서 그를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여성으로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재조명해서 음반을 낼 때는 기초 자료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한 음반이 양적으로 풍부하게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양이 질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무엇을 어떻게 왜 복원해서 다시 부르고, 무엇으로 인천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는 음악가들이 계속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닌가 한다. 한동안 인천 노래에 빠져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중 어떤 인천 노래가 대중의 선택과 사랑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나올 인천 노래의 싹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음반 속 인천 노래들은 소중하다. 지금 나오는 많은 노래들이 씨앗 되어 언젠가 인천 노래가 꽃으로 활짝 피어나길 바라본다.

장유정(張攸汀, Eujeong Zhang)

단국대학교 자유교양대학 교수. 음악사학자. 한국대중음악학회 회장. 2009년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문화비평상(음악 부문)을 수상하였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한국대중음악사 개론』(서병기 공저) 등 27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발매한 음반으로는 《장유정이 부르는 모던 조선: 1930년대 재즈송》(2013)과 《경성야행》(2020) 등이 있다. 




도래할, 미-래의 아름다움: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도래할, 미-래의 아름다움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허경(철학학교 혜윰 교장)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은 2021년 10월에 개관한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APY | ArtPlug YEONSU artist residency)’에 입주하여 5개월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마친 작가들의 ‘결과 보고전’이다. 참여한 작가는 창작분야 6명(김민, 김민석, 윤미류, 이현우, 전장연, 정기훈), 프로젝트 분야 2팀(이정은, ‘랜-딩 페이지’)이다.

프랑스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나는 우연한 계기로 창작분야 작가 6명 모두와 ‘철학과 작가노트’ 개념의 글쓰기, 현대미학 수업, ‘이론가 매칭’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6명의 작가들과 대략 4회 정도의 모임을 하며, 작업과 작가노트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 글은 APY 레지던시 작가들과 함께한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전시에 대한 짧은 소개와 비평이다.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아트플러그 연수, 2022.1.27.~2.27. 

1. 김민 – 불안의 아름다움

김민의 작업은 얼핏 보면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들이 ‘잘 그렸다’고 말하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그림이다. 김민의 ‘덜 그린 것 같은’ 작업은 세계의 불안함, 불완전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용옥이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이른바 우리 고유의 사유에 대해 말했듯이,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다(imperfection is a higher value than perfection). 오늘, 아름다움은 현상 그 자체의 불완전함, 그리고 그것을 지각하는 작가의 불안에서만 온다. 오늘의 예술가가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 할 때, 김민의 작업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불안과 불안정을 유지하는 능력, 건강한 불편함을 유지하는 능력이야말로 오늘의 현대미술이 (자기기만을 피하고자 한다면)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무제(#1234)>, 캔버스에 아크릴, 193.9×130.3cm, 2022 <무제(#흐물흐물, #우직한)>, 캔버스에 아크릴, 65.1x53cm,  2022 <무제(#생각보다, #가까워)>, 65.1x53cm, 2022

2. 김민석 – 예술/일상의 철학적 퍼포먼스.

나는 마르셀 뒤샹이나 존 케이지가 살아 있다면 분명 김민석과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민석은 2022년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과 분투, 즐거움과 가벼움을, 유쾌하고도 부조리하게 당신 앞에 (안) 펼쳐 보인다. 이번 작업은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처럼, 벽에 뚫린 슬릿과 핀홀을 통해서 들여다보이는 내부의 설치작업이 있고, 작가가 때때로, 무작위적으로, 나타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전시를 보러 갔는데 봤거나/못 봤거나’의 복불복(福不福), 즐거운 게임이 된다! 참고로, 나는 이 퍼포먼스를 보지 못했다. 과연,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說乎)?

* 뱀발. 때로, 김민석의 작업이 당신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나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당신이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김민석의 작업이 늘 이해되지는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남의 ‘흉내내기’가 아닌) 진짜 오늘-여기-나(우리)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앙스러운 것들>, 퍼포먼스, 2022

3. 윤미류 – 빛나는 사물들의 세계

윤미류의 세계는 사소한 것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세계, (사람들을 포함한) 빛나는 사물들의 세계이다(shining of things). 윤미류의 그림에는, 지구상 곳곳, 때로는 모자가 때로는 외투가, 때로는 한국인이 때로는 아일랜드인이, 때로는 어른이 때로는 아이가, 때로는 남자가 때로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윤미류는 그냥 이런저런 사물들, 이런저런 사람들을, 애정과 관심으로, 게으르지도 부지런하지도 않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러니까 때로는 과하고 때로는 모자라게, 그러나 늘 자신만의 자리,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려낸다. 이는 마치 동네 아이 또는 어르신 들을 아주 잘 찍은 인물 스냅사진에서처럼, 그들과 함께,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이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게 된, 어떤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만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다. 이제, 윤미류는 아무도 굳이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 일상의 평범한 장면에 눈길과 손길을 주고, 다정한 무관심(indifférence tendre)으로 살피며, 그들의 뒷모습, 누운 모습, 일하는 모습, 그들 자신은 결코 본 적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되돌려준다. 

<Double Ripples>, 캔버스에 유채, 91×73cm(×2 pieces), 2021

4. 이현우 – 침묵, 빛 속에 잠긴 오후의

이현우가 우리 앞에 던져 놓는 세계는, 거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같이, 말없이 조용한 세계, 때로는 물, 때로는 바닥, 때로는 창문, 때로는 벽면이 보이는 세계, 그러나 늘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현우의 작업은 실상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는 시도이다. 이 그림들이 그려내려는 것은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세계, 곧 심미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인 동시에 종교적인 ‘말할 수 없는’ 세계,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이자, 실은 누구나가 – 일상에서 또는 일생에서 때로 한번은 느끼는 세계, 침묵과 빛이 어우러진 세계, 더 정확히는 이러한 것들이 빚어내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Stimmung, atmosphere)의 세계이다. 이현우의 그림 앞에 선 이는 실로 바라봄이 체험임을 알게 된다. 일본어 체험(體驗)의 원어 ‘experience’는 라틴어로 ‘지금으로부터 빠져나간다(ex+peritus)’와 ‘이제까지와 달라진다’라는 의미이다. 곧, 체험은 실험(實驗)이자, 말하자면, 탈-험(脫驗)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볼 때, 나와 그것이 모두 바뀐다. 이현우의 그림은, 안쪽의 내가 바깥의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는 나와 보이는 그것 사이에서 생겨나는 어떤 체험, 가히 ‘현상학적 체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체험을 체험하게 만든다. 나는 이현우가 바라본 풍경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체험한다. 거의 신비적인 그러나 결코 신비주의적이지 않은, 그런 체험을.

<face>, 캔버스에 유채, 80x80cm, 2022

5. 전장연 – 도달할 수 없는, 안정감

도달할 수 없는, 위태로운, 안정감, 균형.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 작가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남편이자 아버지인 작가에 대해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만큼이나, 반대로,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모든 섬세함을 여성주의적 실천으로만 환원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앉아서, 서서,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지 않는 이들은 사이사이 보이는 아이들의 작은 장난감과 머리핀, 고무줄, 구슬, 동전을 결코 볼 수 없다. 전장연의 작품은 예술과 일상이, 설치와 회화가, 윤리와 정치와 예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당신은 몇 개의 보는 장소(地點), 보는 관점(觀點), 서 있는 자리(立場) 을 갖고 있는가?). 이것들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일은, 추구되어야 할 일일 뿐, 결코 도달 불가능한 일이다. 전장연의 작업은 지금 나의 답이, 지금 너의 답일 수도, 나중 나의 답일 수도 없음을, 모든 균형이란 오직 찰나적인 위태로운 균형일 수밖에 없음을, 시각적이자 촉각적으로, 시간적이자 공간적으로, 윤리적이자 정치적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심미적으로 웅변한다.

<5 개의 꼭지점(5 pointed star)> 메탈봉, 스프링, 손잡이 스폰지 타투 스티커, 80x120x110cm, 2021)

<circle bonding>, 철근, 머리방울, 80x130x80cm, 2022

6. 정기훈 – 현대와 미술을 넘어

정기훈의 작업은 서양ㆍ현대ㆍ미술 3가지를 모두 의문에 붙인다. 정기훈은 서양을 넘어 인류학으로, (근)현대를 넘어 전-(근)현대와 선사시대로, 미술을 넘어 기술과 예술, 장인과 예술가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로 나아간다. 작업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늘 유머를 잃지 않으며, 결코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정기훈의 작업은 예술과 관련된 기존의 모든 범주들 사이에 설정된 경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때로는 허무하게 보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보이며, 때로는 우리를 헛웃음 짓게 만드는, 이 작업은 얼핏 과거를 다시 재현하는 작업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철저한 오해이다. 인간은 결코 과거를 살거나 다시 살 수 없으며, 설령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당사자의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직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정기훈은 결코 과거를 오늘 재현하지 않는다/못한다. 정기훈은 오늘, 오직 오늘의 방식으로 과거를 다시 재구성해볼 뿐이다. 정기훈의 작업은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고, 정기훈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가 보편적이며 따라서 변경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중 어떤 것이 참으로 변경 불가능한 필연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연마술>(Grinder), , 가죽, FHD VIDEO 00:10:00, 2022
동영상은 작가가 우시장에서 구한 소의 머리뼈를 갈아 직접 바늘을 만들고 가죽을 자르고 실로 꿰어 현대의 옷 한 벌을 만드는 과정을 담았다.

7. 이정은 – 라지 파크와 빅아트

이정은의 작업은 ‘간척된 땅 위에 조성된 송도 센트럴 파크의 지형, 토양, 풀과 나무, 한옥과 정자, 다리, 공공미술 등이 어떻게 설계ㆍ계획ㆍ관리되고 있는지’에 관한 리서치 작업으로, 추후 <결과 자료집>의 형태로 발간될 예정이다.

8. 랜-딩 페이지 – 땅 위로 내려앉는 블라인드/베일?

‘랜-딩 페이지’는 이현인, 조근하, 타케마사 토모코, 오타 하루카가 함께하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실제와 가상, 또는 현실과 실재, 현재와 과거, 여기와 저기 사이의 차이와 동일성의 놀이를 수행한다. 말하자면, 현실 위로 내려오는 또는 올라가는 블라인드는, 그리스의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말하는 베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위키피디어에서 찾을 수 있는 교과서적 해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이러한 해석이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베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미 이 해석의 해석 아님을 가정하는 오류, 곧 베일 뒤편에 ‘있는 그대로의, 진짜 현실’이 있다는 황당무계한 19세기적 과학관으로 우리를 되돌리지 않는가? 차라리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베일, 블라인드는 우리가 믿는 현실이 하나의 구성된 허구이고, 허구는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틀일 뿐, 모든 허구가 반드시 거짓이나 날조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허구, 그러니까, 예술적 장치가 아닐까? 이제 우리는 마그리트를 따라, 최근의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푸조 자동차 회사를 예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듯이,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 곧 예술적 상상력은 차라리,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없게 하는 능력에 관계된 어떤 것, 우리로 하여금 드디어 ‘땅 위로 내려앉게 해주는 첫 장면’(land-ing page),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조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랜-딩 페이지’ 전시 설치전경

나가면서,

당신의 행운을 빌어요.

i wish you good luck.

허경 Huh Kyoung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철학박사, (전)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현)철학학교 혜윰 교장, 팔복예술대학 학장. 지은 책으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읽기』(세창),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공저ㆍ문지), 『푸코의 미술』(근간) 등이, 옮긴 책으로 푸코의 『상당한 위험』(그린비), 『담론의 질서』(세창), 들뢰즈의 『푸코』(그린비) 등이 있다. rendezvous00@naver.com

사진제공: 연수문화재단(촬영: 조영하)




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 연극 〈유원〉

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연극 <유원>

엄현희(연극평론가)

<유원>(원작_백온유, 각색_신재훈, 연출_전윤환)이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공연되었다. 연극은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유원』을 각색했다. 이 작품은 극단 앤드씨어터가 상주단체로 있는 인천서구문화회관의 지원을 받아 함께 만든 청소년 이야기 극으로, 지역 예술 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단체에서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며 콘텐츠를 확장한 것이다. 앤드씨어터는 이전에도 소설 『아몬드』(원작_손원평)를 낭독공연으로 만들어 2018, 2019년에 공연했다.

연극 <유원>,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2021.10.8.~10.10.
주최주관: 앤드씨어터, 인천서구문화재단 ⓒ앤드씨어터

연극 <유원>은 청소년을 주요 관객으로 하는 청소년극이란 명칭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작품 자체도 청소년극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왕따 문제, 성적 스트레스, 연애 상담, 학교 폭력 등의 학교생활이 주가 아니다. 그보다 <유원>은 주인공 열여덟 유원의 심리를 따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과 마주하며 소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소녀는 자라난다. 소녀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 원작은 유려한 각색을 따라 편안하게 무대로 안착한다.

연극을 관람하며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주황빛 노을로 다가왔다. 작품은 특히 저 너머 주황색 조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소녀와 그녀의 친구가 옥상에서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소녀들 혹은 주인공 유원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저 아래, 사람들의 느릿하며 평온한 몸짓일까? 그러나 유원에게 그 색은 그렇게 간단한 색이 아닐 수도 있다. 유원에게 선명한 주황색은 붉은색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유원 언니를 죽게 하고 유원을 살린, 다시 태어나게 만든 불길한 화재 불꽃과 닮은 색 말이다. 실제로 작품은 유원이 화재를 떠올릴 때마다 극장 뒷벽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 역시 반복해서 보여준다. 유원은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불우한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불안하게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 삶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앤드씨어터

<유원>은 자신이 의도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소녀 이야기다. 창작진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재난을 상기시키며,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라 말한다(공연 소개 참조). 조용히 숨죽인 채 혹은 외면하거나 상처를 인정하며 함께 나아가는 갖가지 모습의 삶들. 경험은 도려내거나 떼어낼 수 없다. 다만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뿐. 따라서 연극은 유원과 유원 주변 그들 모두 삶 혹은 선택에 대해 섣부른 판단 대신에 잠자코 자리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것 같다. 주인공 유원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입체적으로 살아 있는 점이 이 작품 미덕이다. 소설 원작도 다양한 군소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도 유리한 장점으로 드러난다. 서로 간의 호흡이 잘 맞는 배우들이 무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앤드씨어터

작품이 공연된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은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꽤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배우들은 핀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작품이 동선이나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소극장 공간 운영을 떠올리게 할 때마다 초반에 다소 두드러져 보였다. 작은 공간에서 핀 마이크를 쓰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다양한 층의 높이를 활용하거나, 비교적 넓게 공간을 사용하거나 장면이 겹쳐지며 연출되는 식으로 시간이 흐르며 핀 마이크는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앞서 언급한 옥상 장면처럼 연극은 시야를 확장하며 공간을 넓게 쓰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작은 방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갑자기 확장되는 공간 미장센은 몇 개의 계단과 기다란 커튼 외 별다른 세트가 없었음에도 안정감 있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지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작진은 대극장 공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작품을 관람하며 청소년 이야기 극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점이 읽혔다.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그 시기를 관통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원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과거의 자아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특히 삶의 어느 면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인공 유원의 눈을 따라 만나게 되는 모습은 무엇일까.

ⓒ앤드씨어터

주인공 유원이 인간이란 각양각색 미로를 만나 헤매면서 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연극 <유원>은 점점 파고들수록 의미가 달라지며 색깔이 달라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한발씩 길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원은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과 부딪침 속에서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은인이지만 증오했던 아저씨와의 만남도 아저씨의 아이들을 통해 유원에게 구원으로 가는 길로 뒤바뀌며, 스스로를 희생하며 동생을 살린 언니의 그림자에 힘겨워하던 마음도 생명과 삶에 대한 기쁨으로 변화한다. 연극의 마지막 <유원> 무대를 감싸는 주황빛 석양이 처음과 다르게 여지없이 따뜻하게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연극은 절망과 파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 수수께끼 같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여전히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안녕이라고 묻는 듯하다.

엄현희(嚴鉉熙, Um Hyun Hee)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과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 함도윤의 〈Never Give Up〉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함도윤의 <Never Give Up>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젊은이는 내일을 밝히는 존재다. 인천 무용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신진 안무가가 등장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대정신을 함양한 개성 있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발레 창작에 지평을 넓히고 있는 데다가 관객의 호응과 감흥을 이끌 대중적인 감각까지 함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지켜봐야 할 젊은 발레 안무가로서 함도윤을 조명해 본다.

최근 심상치 않은 인천 무용계의 젊은 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접근성이나 영향력 등에 있어서 무용 문화가 활발하게 조성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오래도록 그렇지 못했다. 국내 무용계의 질적, 양적 주도를 지닌 서울과 인접한 지역으로 이에 관련된 혜택보다는 피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의 주요한 공연들을 1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도달하여 감상할 수 있는 관계로 굳이 인천에서 유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얕은 인적 자산, 열악한 제작 환경, 시민의 관심 부족 등이 더해져 인천 무용계의 활로를 막았다. 대학 무용과나 예고 무용과가 거의 없는 현실 또한 신진 발굴 및 양성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의 독립 무용가들은 외로이 분투하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곤 하며 차세대 무용가들은 인천에서 기반을 잡기보다는 서울로 진학 및 진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인천 무용계는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조짐을 보인다. 젊은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인천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맑으나 궂으나 묵묵하게 인천 무용계를 지원해온 인천문화재단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인천문화재단의 무용 관련 지원사업에는 서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실력자들이 상당수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력을 보이고 가운데, 함도윤 같은 전도유망한 젊은 창작자가 기대 이상의 성과로 주목을 받았다.

개성 있는 젊은 발레 안무가, 함도윤

발레 안무가 함도윤 ⓒGRACE

1988년생으로 서른세 살인 함도윤은 안무가로서는 아직 신진이다. 무용수들의 경우는 20대 초중반부터 데뷔하여 빠르게 주목받는 데 비해 안무가들은 안무와 연출뿐 아니라 기획, 행정, 홍보마케팅 등 다방면에서 역량과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다음에 데뷔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서 자란 함도윤은 어려서 발레를 배웠던 여동생의 영향으로 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 현대무용을 보고 ‘저런 춤도 있구나, 저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예술적 충동이 들었으며 그 계기로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 당시에는 현대무용을 배우고 싶었으나 근처의 무용학원에서는 발레를 가르쳐서 우선 발레로 인천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막상 예고를 다니면서 발레를 제대로 배우다 보니 그 고유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인 발레리노(남자발레무용수)는 아닌 새로운 창작에 대한 열정을 내면에 품은 미래의 안무가로서다.
2007년 한성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재홍 교수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폭넓은 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개인 조교를 하면서 발레 훈련과 창작뿐 아니라 예술가의 자질, 작품 제작 과정, 회의를 이끄는 방식, 문서 작성 및 정리, 강의 노하우 등을 습득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학교 발표회를 통해 이것저것 작품을 만들다가 스물여섯 살에 《K-Ballet 월드》에서 <사라지는 것들>로 안무가로 정식 데뷔하였다. 《K-Ballet 월드》는 우리나라 최대 발레협회인 한국발레협회에서 주관하는 축제로서 국내 3대 발레 축제의 하나다. 신진 안무가로서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무용 작품을 만든다는 게 안무가에게는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재정 면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6년부터 3~4년간 돈을 벌기 위해 주로 뮤지컬에 출연하였다. 100회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춤을 추는 때도 있었는데 커튼콜에서 박수 세례를 받으면서도 어느 날 문뜩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일 매진에 커튼콜과 박수 세례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발레로 대중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발레계로 돌아온 함도윤은 2019년 <붉은 대지>, 2020년 <청년실신>과 <피터팬>, 그리고 올해 <Never Give Up>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개성 있는 신진 안무가로 빠르게 주목받고 있다.

<청년실신>, 성수아트홀 ⓒ어글리아트컴퍼니(허웅)

굴복하지 않은 젊음, <Never Give Up>
7월 16~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 오른 <Never Give Up>은 인천문화재단의 예술표현활동 지원을 받아 전작 <청년실신>을 70분짜리로 재창작한 것이다. “높은 거보다 돈이 더 무서운 거죠.”라는 고층 빌딩 청소부의 말에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청년실신 시대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영혼들의 치열한 삶을 발레로 표현하였다. 이 시대 청년을 대변하는 용어가 청년실업, 위험수당, 야근수당, 학자금대출, 생활고, 카드대출, 비트코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대단히 현실적이면서도 시기적절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Never Give Up>에서는 이 시대 청년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홉 명의 남자무용수들은 실업, 경쟁, 스펙, 빚, 파산, 사고, 자살 등 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이라는 미로에서 헤매는 것 같다. 벼랑 끝에 놓은 듯한 엣지 있는 춤으로써 이러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다. 직설적인 춤적 표현이 만연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특히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등 국내 최정상급 무용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무용수들이 여럿 있는바 주제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감각적인 춤적 실현이 인상적이다.
발레지만 그 정형성에 한정되지 않은 동작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현대무용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발레를 기본으로 하여 현대무용, 비보잉, 아크로바틱 그리고 연기적 제스처까지 폭넓게 넘나들면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움직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안무와 실연뿐 아니라 음악, 조명, 장치와 소품 등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폭넓은 짜임새가 두드러진다.
젊은이들이 느끼는 처절한 삶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해 뜰 날을 기원하는 모두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마무리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 안에서 함도윤의 굴복하지 않은 젊은 열정과 패기마저 느낄 수 있다.

<Never Give Up>,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GRACE

함도윤의 안무 특징 살펴보기
함도윤이 본격적으로 안무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스타일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발레계의 다른 신진들에 비해 자기 색깔이 뚜렷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안무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시대정신을 진지하게 반영한 주제 의식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국내 발레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이 시대의 사회상을 예리하고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함도윤 스타일로 각인되고 있다.
또한, 남성 춤에 있어서 강점을 지닌다. 직설적이고 역동적인 춤은 강한 에너지마저 담고 있는데, 이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공유한 잘 훈련된 남자무용수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뮤지컬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 의식도 엿보인다. 발레에 메인 정형적인 표현방식에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하고 감각적인 창작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함도윤 같이 춤 예술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중력을 갖춘 젊은 무용가들의 등장은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게 비춘다. 실제로 인천 무용계가 오랜 침체를 딛고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젊은 무용가들의 활약에서 기인하다. 그리고 인천문화재단의 꾸준한 지원이 인천 무용계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한 바탕임은 자명하다.

심정민

무용평론가이자 비평사학자. 한국춤평론가회 회장과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현재 <춤>과 <댄스포럼>에 고정지면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국립극장 등에서 심의·평가·자문 등을 맡아왔다. 저서로는 『무용비평과 감상』(2020)과 『새로 읽는 뉴욕에서 무용가로 살아남기』(2016)외 다수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최기현(인천문화재단)

달리기는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달렸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족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는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많은 사람이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잘 안다. 체중 감량 외에도 심폐기능과 혈관 건강을 향상시키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 장점이 있다.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달리지 않는 사람이 많고, 많은 사람이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산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는 제목 그대로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살아가며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 그리고 주인공 ‘서바람’처럼 인생에서 달리기 한 가지만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는 주말 아침이 한 주간의 밀린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라면, 그녀에게 주말 아침은 달리기 위한 시간이다. 서바람의 20년 지기 친구 한태수는 사내 연애를 하다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한태수는 실연을 잊기 위해 헤어진 다음 날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다.

돌배,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장거리 달리기에 도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체육시간 이후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과체중의 남자 한태수는 1㎞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달리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못하겠다.”는 한태수의 고백은 일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는 우리의 푸념과 이상하리만큼 닮았다.

제목에 있는 ‘헤어지다’는 동사는 누군가에게 글자 그대로 실연을 의미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뜻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좋지 않은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그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만, 대처는 모두 다르다. 학생이라면 공부가 잘되지 않고, 공부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담당하던 업무가 잘 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고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활동이 왠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하거나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슬럼프’라고 부른다.

“소질이 있어야 달려? 소질이 없으면 달리면 안 되는 거야?”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한태수의 푸념에 서바람의 답변은 독자에게 신선함을 준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 슬럼프를 겪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달리기를 하는데 꼭 소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소질이 없다고 달리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버티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헤어진 다음 날, 달리는 행위는 글자 그대로 달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그 사건 때문에 자신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견디면서 일상을 꾸준히 살아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중 한 장면

슬럼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슬럼프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을 인내할 때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찾아온다고 한다. 슬럼프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상의 러너스 하이는 분명히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벌써 11월이다. 2021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돌아보니 체중이 조금 늘었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몸도 마음도 조금은 게을러졌다. 신기하게도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를 달리고 싶게 만드는 만화다. 등장인물들처럼 달리기의 매력을 흠뻑 느끼고 싶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공원을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억제하면서 만화를 끝까지 읽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동네 공원 한 바퀴라도 뛰어야겠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집에서 집으로: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집에서 집으로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차한비(영화웹진 리버스 기자)

재복(이봉하)에게는 집이 둘이다. 20년 동안 일한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받은 후, 재복은 동료와 함께 거리에 집을 지었다. 천막 앞에는 “부당해고 철회하라”라는 현수막과 농성 기간을 알려주는 날짜 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늘로 1882일째,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재복은 천막생활에 익숙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전단을 건네고, 가위로 양파를 툭툭 잘라 넣어 찌개를 끓인다. 능숙하게 요리하는 재복 옆에서 만용(황정용)은 구멍 난 천막에 청테이프를 잘라 붙인다. 재복은 만용에게 뭘 그리 애쓰냐며 구시렁대다가 입을 다문다. 언젠가는 그만둘 투쟁이고, 이대로 천막에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다만 언제쯤 떠날 수 있을지, 그 시점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마음은 무거워져만 간다.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러닝타임 81분, 개봉 2021.10.21.)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고, 여전히 하고 있다. 1인 시위, 집회, 문화제, 고공농성, 연대 행사, 그리고 소송. 헛되이 쓴 날은 하루도 없다. 온갖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운 달력이 야속해 보이는 이유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서다. 희망을 걸었던 재판에서 패소한 후 천막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애초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니었나 하는 불안과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원망이 뒤엉키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홧김에 천막을 나온 재복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결국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한다. 그날 밤, 만용과 영석(서광택)은 휴가를 결정한다.

“우리라고 휴가 못 가나?” 만용은 덤덤히 묻는다. 노동자에게 휴가가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면, 이들에게 휴가란 일상이 된 싸움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다. 노동자라는 신분을 되찾으려는 길고 막막한 투쟁, 거기서 잠시 빠져나온 재복은 또 다른 집을 찾아간다. 현희(김정연)와 현빈(이승주), 두 딸은 재복을 반기지 않는다. 재복이 천막에서 먹고 자는 동안, 현희와 현빈은 양육자 없이 살아가는 데에 적응해야 했다. 아빠가 집을 떠날 때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들은 이제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과 중학생이 되었다. 울어도 달래주는 부모가 없어서,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돈을 벌어 사야 해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렸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현희와 현빈은 재복을 피한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입 밖으로 원망을 쏟아낼까 봐, 그간 참아왔던 마음이 무너질까 봐 꾸역꾸역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봄이 모자란 흔적은 집안에도 가득하다. 재복은 막힌 싱크대를 뚫고 말없이 냉장고를 닦는다. 재복이 차려주는 밥상을 마다한 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현희가 수시 합격 소식을 전한다. 목소리에는 기쁨 대신 걱정과 의심이 묻어난다. 다음 주까지 대학교에 등록 예치금 30만 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말에 재복은 큰소리를 치지만, 이제 서울에 가지 말라는 현희의 요구에는 말끝을 흐린다.

일, 그것은 재복에게 무슨 의미일까. 일할 때 재복은 정직한 노동자였고, 떳떳한 아버지였다. 유능한 기술자였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리가 분명한 시민이었다. 정리해고는 그토록 선명하고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휴가>는 재복이 투쟁을 결심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현재 그가 상실하고 또 감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일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고자 분투하는 동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는 서서히 금이 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투쟁해봤자 누가 알아주기나 하느냐며 농담 섞인 핀잔을 내뱉는다. 투쟁을 지속하는 이유와 투쟁을 관두어야 할 이유는 그렇게나 맞닿아서 재복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운다.

하지만 서럽고 막막할지언정 5년이라는 시간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아서, 재복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 재복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과 달리, 재복에게 휴가란 잠시 일을 재개하는 기간이다. 현희에게 예치금을 마련해주고 현빈이 입을 겨울 점퍼를 사기 위해 재복은 동창 우진(신운섭)이 운영하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때 재복은 강제 추방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그곳에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노동자를 만난다. 목수로 일하는 청년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봐 산업재해 신청을 두려워하고, 한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은 전공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터를 배정받는다. 재복은 어느 날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두 노동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이처럼 <휴가>는 노동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연결하며, 일과 일하는 사람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배우이자 감독인 이란희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 세 사람이 직접 출연하여 본인을 연기했던 단편 <천막>(2016)을 확장한 작품이다. 전작이 천막에서 농성을 이어가는 세 인물을 통해 일상으로 자리 잡은 투쟁의 풍경을 담았다면, <휴가>는 천막을 벗어난 재복을 중심으로 일상과 투쟁의 경계를 묻는다.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재복에게 천막은 또 하나의 집이다.

재복은 두 딸의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고, 두 동료가 먹을 도시락을 싼 다음에 문을 나선다. 집을 떠나고 집을 거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이러한 짤막한 여정에 동행하며, 싸우는 사람이 끝내 도착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묵직한 필치로 그려낸다.

차한비(CHA Hanbi)

영화웹진 『REVERSE』 기자이며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발간 연구 저널 『ACT!』 편집위원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을 지내고, 독립영화 매거진 『Motion』의 필진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