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을’로 살아남기- 연극 ‘머리를 내어놓아라’

지난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신포동에 위치한 다락 소극장에서 극단 작은방의 <머리를 내어놓아라>(신재훈 작, 연출)가 상연되었다. <머리를 내어놓아라>는 지난 달 대학로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의 봄 페스티벌 [심시티] 연작의 하나로 인천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게 되었다. 연작 [심시티]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삶의 비용, 즉 개인의 피로나 고통, 소요되는 시간,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자괴감 등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머리를 내어놓아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숨겨야만 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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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갑과 넥타이
작은 소극장 무대를 연못 하나가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안에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손바닥이 빨간 목장갑을 낀 채로 연못 안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연못 관리인 이 씨가 보이고, 젊은 김 대리가 양복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앉아있다. 이 씨는 휴일에도 불러내 일을 시키는 김 대리가 못마땅하다. 이 씨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하지만, ‘빨간 손 주제에 감 놔라, 배추 놔라 하냐’는 김 대리의 말에 이내 감정을 누르고 허허 웃으며 일을 한다.
연못 청소를 하던 이 씨는 바위를 발견하고, 그 바위가 거북이로 환생한 죽은 문지기 백 씨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백 씨는 신장병 때문에 신장 투석을 받으며 문지기 일을 하던 사람으로, 한 달 전 김 대리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하느라 신장 투석 시간을 놓쳐 목숨을 잃었다. 이 씨와 식당 아주머니는 ‘나는 화장실을 안 가도 돼서 이렇게 문지기를 하는 거예요. 허허허’ 속없이 웃던 백씨를 회상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등딱지 속에 머리를 숨기고 살아가는 거북이는 곧 살아남기 위해 웃는 얼굴 뒤에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을’들의 모습이다.
김 대리는 어서 거북이를 연못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말하고, 살아있는 걸 어떻게 던지냐는 이 씨에게 김 대리는 어차피 흙으로 묻으면 다 죽는다며 윽박지른다. 넥타이를 맨 채로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빨간 손’이라 비하하며 마구 부리고, 거북이의 목숨도 하찮게 여기는 김 대리의 모습에서 ‘을’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그저 소모품 정도로만 여기는 관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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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딱지는 단단하다.
‘머리를 내어놓아라’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가요 ‘구지가’의 제의 형식을 빌려온 이 작품은 작품 전체가 도시에서 억압당하며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용역 깡패를 동원해 연못을 흙으로 덮고 거북이를 죽이려는 김 대리. 그런 그를 막아서던 이 씨와 식당 아주머니는 별안간 거북이로 변한다. ‘나는 목이 쑥 나온다.’ ‘내 등딱지는 단단하다.’고 중얼거리며 거북이의 주변을 맴도는 그들의 모습은 배경 음악과 어우러져 전통 제의마저 떠올리게 한다. 거북이를 향한 추모제는 곧 ‘을’이라 일컬어지는 도시 노동자에 대한 추모제다. 거북이에게 ‘머리를 내어놓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고만 살아왔던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살아가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거북이의 주위를 맴돌며 거북이를 보호하는 이 씨와 아주머니는 김 대리에게 복종하며 일하던 이전과는 달리 꿋꿋하게 소신을 말하며 공격성도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연대를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들을 보호한다. ‘갑’을 향한 ‘을’들의 반란으로 연대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릉에서 발견한 거북이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더 이상 조선왕조 일에 개입하지 말아요. 우리는 그냥 우리 눈앞의 일에만 신경씁시다” 라고 말하는 이 씨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눈앞에 닥친 현실에 치여 연대에 실패하고 소시민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을’들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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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것, 그 치사하고도 달콤한 유혹.
연못에 남아 거북이를 지키게 된 이 씨와 아주머니. 포클레인의 위협에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도다리 쑥국이 먹고 싶다고 말하던 아주머니는 돌연 거북이를 가리켜 진짜 거북이가 아니라 바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거북이가 맞다 하더라도 백 씨 아저씨는 아닐 거라고 말하는 아주머니와 거북이도, 백 씨도 맞다고 말하는 이 씨는 갈등에 휩싸인다. 아주머니는 이내 자신은 거북이를 보았던 게 아니라 이 씨가 얄미웠던 김 대리를 향해 복수하는 모습이 속 시원해서 동조했던 것이라 자백한다. 마음이 돌아선 아주머니는 맛있는 음식들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손자 이야기를 하며 화풀이는 이만하면 됐다고 이 씨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생태찌개를 들고 나타난 김 대리의 유혹에 아주머니는 넘어가버리고, 손자를 들먹이는 협박에 이 씨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 우리는 그것을 평범한 생활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평범한 삶이란, 돈이나 명예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유혹이다. 결국 그들은 달콤한 삶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만다. 연못과 거북이는 흙에 덮여버리고, 또 다시 등장한 거북이를 이 씨는 바위라고 말하며 외면한다. 이 씨와 아주머니, 김 대리는 거북이를 외면한 채 막걸리를 마시며 아리랑을 부르고, 그렇게 공연은 막을 내린다.

갑각류는 딱딱한 껍질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가지만, 그 안의 몸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한 번 겉껍질을 다치게 되면 회복할 겨를이 없이 그냥 죽게 된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꾸만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점점 단단해지는 껍질과는 다르게 점점 연약해져 밖으로 내밀 수 없는 머리. 우리는 언제쯤 껍질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글/시민기자 김진아, 사진제공/극단 작은방




교동도 부군당굿, 20년 만에 부활하다. – 강화군 교동도 부군당굿 현장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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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부군당(府君堂)은 한국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그의 부인 신씨(愼氏)를 신체로 모시고 있습니다. 부군당제는 조선시대 각 관아(官衙)에서 신당(神堂)을 두고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하급 관리들이 마을 주민과 함께 지낸 제사로, 조선 후기 한강변의 상업 발달과 함께 이를 관리하던 여러 관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인천 도서지역 가운데 유일한 교동도의 부군당은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높고,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난 5월 15일(일)에 진행된 부군당굿은 큰 의미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한편, 교동도 부군당의 명칭은 한국 내 여타 지역과 달리 ‘부근당(扶芹堂)’이라고 적습니다. 즉, 도울 부(扶), 미나리 근(芹), 집 당(堂)자를 쓰는 것인데, “정성을 다하여 남에게 선물이나 의견을 올리는 마음”을 나타내는 사자성어 헌근지성(獻芹之誠)에도 미나리가 보이듯, 교동도의 부군당은 연산군에게 정성을 다해 제물이나 마을을 올린 당집이라고 여겨집니다.

3~5년마다 3~5일이 걸려 진행되는 큰 굿이었던 교동도 부군당굿은 1996년을 마지막으로 그 명맥이 끊겼습니다. 읍내리 부군당에서 열린 굿을 주관하는 무당 주정자는 4대째(정씨 할머니, 2대 독고개만신 1885~1981, 3대 숯고개만신 1919~1988) 교동도에서 무업을 하면서 1996년 부군당굿을 마지막으로 주관했으며, 그 이전에도 3차례 부군당굿을 한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강화교동굿보존회 회장이기도 한 주정자 무당은 현재 교동도 내 무속인의 고령화로 무업이 중단된 상태에서 유일한 전통 계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굿거리마다의 방대하고 토속적인 내용과 교동도 지역주민을 어우를 수 있는 공수, 춤과 몸짓 등은 그녀가 교동도 4대에 걸친 무속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교동 읍내리에는 부군당 외에도 사신당(使臣堂)이 있습니다. 사신당은 고려 때 송나라 사신들의 안전한 바닷길 왕래를 위해 모신 당집인데, 현재는 임경업 장군 탱화가 걸려있고, 어민들이 풍어의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읍내리에서는 과거 부군당을 ‘큰집’, 사신당을 ‘작은집’으로 여기고 각 집마다 추렴하여 함께 굿을 거행했는데, 이번 부군당굿도 마찬가지로 오전에는 부군당에서, 오후에는 사신당에서 굿이 거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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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당굿은 지난 5월 1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교동도 읍내리 부군당과 사신당(남산포 위치)에서 열렸습니다. 당주 무당은 교동도 무업을 4대째 잇고 있는 무속인 주정자(54)씨가, 조무는 강화도 박수무당 전광재(74) 씨가, 악사로는 주순덕(장구), 유광수(장구), 조순례(징), 임기택(피리), 박설(피리) 씨 등이 참여했습니다. 20년 만에 재연되는 부군당굿 소식을 듣고 읍내리를 비롯한 교동 일대 마을주민들은 물론 언론과 학계 전문가들도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이날 부군당굿은 오전 10시, 무당 주정자 씨가 부군당의 연산군에게 먼저 예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 교동향교와 화개산으로 가는 동서남북 장승을 맞는 ‘장승거리’거리로 진행됐습니다. 이후 모든 부정을 물리는 거리인 ‘벌부정’, 맑을 정기를 가진 산천의 신신을 모시는 ‘산천거리’, 부군당의 부군대감, 부군할아버지를 모시는 ‘부군대감거리’가 펼쳐졌습니다. 한 거리가 마칠 때마다 무당은 마을 주민들에게 공수를 주었고, 사이 사이 흥을 돋기 위해 막걸리를 동네 어른들께 따라주기도 했습니다. 교동굿은 굿거리와 공수의 사설이 길어 영감한 무당이 아니라면 굿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인데, 무당 주정자 씨의 사설과 기예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전 1시, 부군당과 200m 떨어진 남산포구 인근 산기슭의 사신당에서 마을태평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 이어졌습니다. 사신당에서는 사신대감을 위한 ‘사신대감거리’를 하였는데, 이때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마을 선주 대부분이 참여해 결국 바다에 조업에 나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신당에서 굿거리를 마치고, 남산포구에서 무당이 마을 주민들에게 공수를 내린 후 흥겹게 노는 ‘신장대감거리’와 여러 잡귀잡신을 대접해 보내는 거리인 ‘마당거리’가 펼쳐졌고, 마당거리는 강화도에서 공수를 제일 잘한다는 박수무당 전광재 씨가 담당했습니다. 오후부터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굿판과 어우러진 마을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로 흥에 겨웠으며, 교동도에서 수 십 년을 살아온 주민들도 오랜만에 부군·사신당굿을 본다는 기쁨을 마음껏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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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동도 부군당굿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1996년 단절된 부군당굿을 20년 만에 재연한 것 그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닙니다. 현재 한강변의 상업 발달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인천 도서지역 중 유일한 교동도 부군당굿은 역사, 문화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둘째,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교동도 부군당굿은 이번 행사로 문화계, 학계, 언론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교동도 주민들도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굿을 참관한 모든 이들이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교동도 부군당굿은 재단의 사업 취지와 부합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인천의 지역문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됩니다.다만 행사를 5월에 진행하다보니 굿을 참관하느라 주민들 생업(농사와 어업)에 지장을 주었다는 점이 아쉽고, 추후에는 2~3월에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됩니다.

넷째, 교동도 부군당굿이 가진 사설의 내용과 춤, 동작 등은 추후 종교적 의례의 차원을 벗어나 창작문화예술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바 후속 조치가 필요합니다.

※ 강화 교동도 부군당굿은 2016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의 예술표현활동지원 전통 분야에 선정되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연학 학예연구관이 현장을 다녀와 남긴 생생한 보고서를 공유합니다. 앞으로도 인천문화통신 3.0에서 인천 지역의 문화예술현장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정연학(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