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신가요?
하나만프로젝트 연극 <대안 가정 생태 보고서>


지난 4월 16일, 학산 소극장에서 하나만프로젝트가 <대안 가정 생태 보고서(박서혜 작, 연출)>를 상연했다. 대산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고 두산 아트랩 쇼케이스 공연으로 선정되어 낭독극으로 상연된 바 있는 작품은 이번에는 ‘보고서’의 형식을 취했다. 가정의 형태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여러 가정의 형태를 차례대로 소개하는 방식의 극중극으로 진행되었다. 가정을 주제로 ‘가부장제’, ‘N포 세대’, ‘1인 가구’, ‘반려견’ 등 최근 우리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른 주제들을 폭넓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대안, 해결안이 아니라 ‘대신’ 해 보는 안
작품은 총 4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된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으로 각 에피소드는 ‘6, 3, 2, 1’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각 장의 제목은 등장하는 인물 수를 가리키며, 이는 각 장에 등장하는 가정의 구성원 수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섯 명이며, 가정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딸, 그리고 기러기 아빠로 얹혀 지내는 고모부로 이루어진다. 이는 3대가 한 집에 함께 사는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인데, ‘대안 가정’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은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가 이상적이지 않음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6’장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아침 식사 풍경을 보여준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 밥을 먹지만 한 사람만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한다.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A이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번번이 말을 꺼내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A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만 한다. 각자의 말은 A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명령하는 말로, A는 아침 내내 식구들의 시중을 든다. ‘6’장의 말미에서 A는 드디어 하려던 말을 꺼낸다. 이혼하겠다는 폭탄선언과 함께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낸다. A의 반격은 가부장적인 가정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에 공감하던 관객들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며 뒤이어 등장할 ‘대안 가정’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등장한 ‘대안 가정’은 세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3’장은 아빠와 딸, 새엄마로 구성되는 재혼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2’장은 생계 보조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가짜로 혼인신고를 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1’장은 홀로 살지만 반려견과 함께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3’장과 ‘2’장은 모두 ‘대안 가정’이 구성되는 첫날의 모습을 보여준다. 혈연이나 사랑으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잘 살아보자’고 말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 인물들의 모습은 불완전한 가정의 형태여도 ‘6’장의 완전한 형태의 가정보다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이어서 등장한 ‘1’장은 반려견의 죽음으로 또 다시 혼자가 되어 절망하고 결국 자살을 택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담는다.

결국 ‘대안 가정’의 모습은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를 대신해서 한번 살아보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일 뿐 모든 문제가 해소된 행복한 가정은 아니다. 작품을 집필하고 연출한 박서혜 연출은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안 가정은 어떤 해결점이나 해소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카타르시스를 추구한다기 보다 우리 주변의 현상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또는 축소하여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너진 가부장, 살아있는 가부장제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모두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다. ‘6’장에서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출판사에 다니는 아버지는 똑똑한 딸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시어머니로부터 아내를 감싸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물이다. 세전 700의 수입을 자랑하는 고모부 역시 말로만 떵떵거릴 뿐, 아내와 딸을 해외에 보낸 기러기 아빠로 처가에 얹혀 사는 인물이다. 남성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가정 안에는 가부장제는 유지된다. 할머니가 권위적인 가부장의 역할을 맡아 대신 며느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느리가 떠나고 난 뒤 할머니는 가부장의 수발을 드는 여성의 위치로 또 다시 전락한다. 며느리가 하던 집안일을 모두 떠맡게 된 것이다.

‘3’장에 등장하는 아빠 역시 눈치 없고 철없기만 한 모습으로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엄마가 떠난 빈 자리를 채워 음식을 차리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아빠가 아닌 딸이며, 딸의 학업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것 역시 아빠가 아닌 새엄마가 맡는다. 가정의 형태가 바뀌더라도 가부장제의 틀은 그대로 유지된다. ‘대안 가정’은 전통적인 가정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였던 가부장제를 전복하지 못하며, 가부장제 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탈출한 피해자를 대신할 또 다른 피해자를 찾는 모습으로 가부장제를 답습한다.

‘1’장에 등장하는 아빠는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외롭고 불행한 생활을 감내한다. 그에게 걸려오는 전화라고는 용돈이 필요한 딸의 전화뿐이다. 유일한 가족인 반려견만이 그에게 위로가 된다. 반려견마저 죽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뒤 자살을 결심한 아빠는 연탄불을 피우지만 또 다시 걸려오는 딸의 전화로 인해 죽음을 선택할 자유마저 빼앗긴다. 가부장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가부장제의 단면을 보여주며, 제목이 ‘대안’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것 역시 가부장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구성된 ‘대안 가정’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2’장의 가정만이 유일하게 가부장제와 거리가 먼 구성원들로 채워져 있지만, 이들 역시 취업난과 경제난으로 인해 전통적인 가정의 구성을 포기한 것일 뿐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은 아니라는 한계를 보인다.


네 가지 에피소드의 나열은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 속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처한 각기 다른 문제점을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너무나도 일상적이기에,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각자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을 사회적 문제로 연결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함께 고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기성세대가 구성한 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고민한 젊은 극단 하나만 프로젝트가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가지고 등장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글/ 김진아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사진 / 하나만프로젝트 제공




1960년대 인천 삶의 흔적 사진전 – 화교역사관

흔적, 되새김하다
‘1960년대 인천 삶의 흔적 사진전’이 지난 3월 8일부터 30일 까지 중구 북성동 화교역사관에서 열렸다, 문화기획자 유지우 씨가 소장한 인천의 ‘희귀’ 사진 20여점이 전시되어 뜨거운 관심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번 전시장에 내건 작품은 오래전에 미국 혹은 지인을 통해 입수한 미공개 원판 사진들이다. 고(故) 최성연 선생이 소장했다가 화도진도서관에 기증한 사진들과 비슷한 듯 다르다.

당시 촬영의 기회가 쉽지 않았을 항공사진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1960년대 초의 항동, 신포동, 신흥동 등 중구 일대는 물론 사진 끄트머리에 걸친 송현동, 화수동, 만석동 그리고 주안 일대는 인천의 ‘그때 그 시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재의 중부경찰서 상공 부근에서 조감(鳥瞰)한 사진에는 사라진 오례당 가옥, 무덕관, 대불호텔, 답동성당 언덕 길 등이 선명하다.

이 사진전의 특징은 ‘감상’이라기보다 ‘되새김질’이었다. 생면부지 관람객들 끼리 사진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흔적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가며 정담(때론 격론)을 나누기도 했다. 사라진 자신의 집이 담긴 흑백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이 사진들은 단지 향수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를 진(짠)하게 오늘 앞에 불러오면서 두 시간대를 충돌 시켰다.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이 저마다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기억은 과거의 일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했다.

항공사진 못지않게 눈길을 끈 사진은 ‘인천사람’이 담긴 사진들이다. 60년대 인천역 광장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한 장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시외버스 노선이 하인천-부평-소사-영등포-서울역임을 한 눈에 보여준다. 기차를 탈까 버스를 탈까. 경유 노선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승객은 잠시 고민했을 것이다. 승객의 짐이나 화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지게꾼과 구루마꾼 그리고 쭈그려 앉은 노점상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을 뚜렷이 보여준다. 지금도 건재한 역 광장의 두 그루 나무만이 지난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1962년 6월 10일 ‘환’이 ‘원’으로 변경되는 화폐 개혁이 단행되었다. 당시 경동의 조흥은행 인천지점에서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려는 시민들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양산을 바쳐 들거나 애기를 들쳐 업은 채 길게 늘어선 줄이 배다리 까지 이어졌는지 끝이 안 보인다. 10환은 1원이 되었지만 바꿀 돈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들의 표정은 느긋한 편이다. 차량은 한 대도 잡히지 않았고 구경 나온 듯 자전거 탄 모습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1966년 6월 1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천항 제 2도크 축조 기공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부석 연단에 있기 때문에 어른들은 긴장한 듯 부동자세다. 뭣 모르고 부모님을 따라 온 아이들은 행사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몇몇 아이들이 몸을 꼬다가 카메라와 눈이 맞았다. 행사장에 ‘더 일하는 해’ ‘증산 수출 건설’의 선전탑이 당시 국가 정책 모토를 한 눈에 보여준다.

이밖에 수인선 협궤열차 시절이던 수인곡물시장, 기와지붕을 한 북성선린동사무소 개소식, 답동성당 언덕 아래 도로에서 열린 재일동포 추방반대 총궐기 대회,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한 한국스카우트연맹 단원 선서식, 공설운동장 담장 쪽에 있던 대동사 아이스크림 가게(공장)의 모습도 눈길을 오래 잡았다.

지금, 사진 속 많은 것이 사라졌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했거나 사람 손을 타서 없어졌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시간은 장소에 흔적을 남긴다. 사진 속 남은 것들이 떠난 것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글 /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제공 / 유지우 문화기획자




소설로 읽는 ‘지금 여기’의 인천

개항도시 인천은 300만이라는 인구에 비해 오늘날 ‘지금 여기’의 인천을 다룬 소설은 희한하게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다음으로 소설 속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 곳이 인천입니다. 인천은 항구가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나는 곳이었고, 바다와 섬이 있어 지친 심신은 달래주는 곳이었으며, 항구와 공장이 있어 생계를 위한 일터이기도 한 이른바 ‘기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희노애락이 리얼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곳이었고, 또한 지금도 이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 작품집은 인천에 사는 여섯 명의 여성 작가들이 직접 인천에서 부딪치며 쓴 인천이야기입니다. 여섯 명의 작가가 쓴 모두 아홉 편의 짧은 소설 속에는, 인천의 항구와 부두, 신포동, 송도 신도시, 강화, 십정동 등 인천과 인천 사람들의 삶이 정겹고 발랄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홉 편의 작품은 모두 독립된 단편이지만, 이들은 모두 인천에 대한 애정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네 삶의 공간인 인천과 그 속에서 복닥대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소중하고 신통한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 함태영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연구사




(잠자는) 범진용 되기

어디선가로부터 와서는 서서히 팽창해 나가다 이내 의식을 덮어버리는 움직임 때문에 자면서 꾸는 꿈을 어떤 신호라고 여긴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내게 지속적으로 보내오는 신호 말이다. 《조용한 방》(대안공간 듬, 2017. 04. 01. – 04. 29.)에 전시된 범진용의 회화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상상적으로 감지했던 것은, 꼭 작가 자신이 아니어도 좋을 가상의 수신자, 송신된 감각들을 온전히 체험하리라고 상정된 환상 속에 실재(real)하는 누군가의 자리였다. 그의 그림들 앞에 서면 우리는 짧게 나마 그 수신인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와 함께 꿈 신호의 윤곽을 따라 그릴 수 있게 된다. 

전시명과 동명의 작품인 <조용한 방>을 포함한 범진용의 많은 회화 작업들이 큰 사이즈의 캔버스 위에 그려지기 때문에 화면 가까이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무대 배경과 같은 그림 속 공간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눈앞에 놓인 대상에 의해 직접 촉발된 감각을 인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꿈꾸고 있는 주체의 기억에 모호하게 남아 떠도는,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감각을 메타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그의 그림을 봄으로써 우리는 순간이나마 그 불투명한 꿈의 얼개를 체험할 수 있으며 마치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인 지위가 감상을 매개로 변화하는 듯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자신이 직접 꿈을 꾸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눈 앞에 놓인 꿈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성취하고 있다는 그런 감각 덕분에 이번 전시를 <존 말코비치 되기> 의 수면 버전, 즉 ‘(잠자는) 범진용 되기’라고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정보 없이 이번에 전시된 네 작품들만 보았을 때 그것들이 꿈에 관한 작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조용한 방》이 대안공간 듬의 2017년 기획 시리즈 <꿈, 판>의 일환으로 열리는 전시라는 점, 범진용이 <꿈 일기 드로잉>(2012) 등과 같이 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전부터 해왔다는 점, 그리고 작가 스스로 그 작업들이 꿈에 관한 것임을 표명했다는 점 이외에 전시된 작품에서 ‘작가 자신의 꿈’이라는 어떤 상태를 명시적이거나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적인 요소를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이미지를 의식적인 상태에서 목격되거나 상상되고 조합된 여타의 이미지들부터 구분하도록 해주는 어떤 본질적인 요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초에 꿈과 현실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기실, 현실에서 인식한 것들은 종종 변형된 맥락으로 꿈속에 등장하기도 하며 꿈에서 겪은 경험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현실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잠에서 깬 우리가 꿈에서 본 것들을 기억에서 소환해 내는 과정 중에 참고하게 되는 것 또한 현실에 실제(actual)하는 대상들이다.

한편, 꿈을 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각을 일정 정도 차단해야 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 속 인물 형상들은 대체로 눈, 코, 입과 같은 신체 기관이 없거나 흐려져 있어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꿈속에 있는 작가 자신의 감각의 대상이거나 현시이다. 예를 들어 <run>(2014)의 화면 한 가운데에 있는 ‘기어가면서 달리는 듯한’ 인물 형상은 두 팔과 다리 일부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흘러내리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일 뿐인데, 이는 꿈을 꾸고 있었던 작가 자신의 감각과 심적 상태를 표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업실>(2013)에 등장하는 유일한 한 사람은 목과 얼굴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방>(2014)에서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얼굴은 없으며, 대신 잘린 혀나 잇몸과 치아, 엿보는 듯한 눈알이 검고 작은 동그라미 안에 각각 분리되어 화면 위를 떠다닌다. 이렇게 불명확하거나 분절된 방식으로 신체 기관이 묘사되는 까닭은, 먼저 꿈의 광경들이 주로 꿈을 꾸는 이의 1인칭 시점으로 수렴되고 경험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여타의 도구 없이는 누구라도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꿈속에서는 작가 자신의 얼굴이나 스스로 행한 행위들을 굳이 구체적이거나 통합된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꿈에 등장하는 사건 속에서 어떤 인물이 특별한 개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지 못한 경우 사건의 전개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세부 묘사는 종종 생략되곤 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들 속에서 인체 형상들이 단순화되는 것과는 달리 공간의 구성, 형태와 질감의 표현 방식은 한 작업 안에서도 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회화 작업인 <작업실>을 보자. 천장과 벽을 구분하는 선의 위치가 같고 석고 조각상이 두 캔버스의 중앙에 절반씩 걸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두 화면 속 공간들이 서로 이어져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천장 가까이에 있는 흰 벽은 캔버스들 간의 물리적 경계면을 기준으로 끝이 나 있으며 바닥 타일의 크기나 빛이 떨어지는 방향도 두 캔버스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표현방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대여섯 가지 묽고 옅은 색의 물감으로 층을 만들어 한 필 한 필 촘촘히 그려 나간 벽면과 묘사된 장면 전체가 허물어 지는 듯 흘러내리는 물감,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거친 붓질의 그림 속 그림이 하나의 작품 안에 모두 들어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run>에서는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의 원리를 따르며 그려진 한 손과 얼굴, 그리고 인상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반짝이는 수면이 함께 한 화면 위에 있다. 형상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용한 방> 속 말과 인간의 이종결합된 형태에 주목해볼 만하다. 여러 차원이 서로 엉켜서 뒤틀려 있으며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혼종된 방식으로 자기 주변의 세계가 현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이렇듯 우리가 꿈의 문턱을 넘는 순간 만나게 되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은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 안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run>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의 경계 주위로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물감이 조금 번져 있다. 전시 공간의 네 벽면을 하나씩 점유하고 있는 각각의 작업 속 인물형상들은 캔버스 경계를 가로 질러 한 방향으로 서로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이 전시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크며 가장 긴 기간 동안 제작된 <조용한 방>을 살펴보자. 이 작업의 대략 위에서 사분의 일 지점에 지평선이 놓여있고 왼편엔 불, 오른편엔 전투경찰의 행렬이 교차하는 사선 구도로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림 중앙에 소실점이 있는 풍경처럼 시각적 중심이 가운데로 모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찬찬히 보다 보면 전투경찰들의 움직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추락직전에 놓인 배, 또 그 배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솟아오른 말의 두상, 그 옆으로 잠시 낮아지다 다시 높아지는 기울기의 구름 등을 통해 이 그림 속에 참으로 역동적인 시각적 흐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견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와 서사들의 비약적 연결도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 움직임의 감각에 한몫을 한다.

이토록 격동적인 움직임 속에 있는 침몰 직전의 배, 번지는 불, 불 가까이 모인 사람들, 불 옆의 물, 일군의 전투경찰이라는 기표와 2014년이라는 제작연도를 통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사건은 너무도 분명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는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관을 지키면서 꾼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설명할 때 이 일화를 언급하며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 (꿈속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논지를 따르자면 <조용한 방>은 잠재된 진실을 촉발하려는 것, 곧 외상적 실재를 드러내려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 진실과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잠자는) 범진용 되기’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기술은 바로, 꿈속에 내재된 이 반동적인 신호들을 기꺼이 수신하고도 재빨리 (안전하고 조용한) 현실로 도망치지 않는 것, 그리고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 속에서도 미묘하게 진행중인 이행의 방향을 예민하게 살피고 읽어내는 것이다.

(run, 45.5x53cm, oil on canvas, 2014)
(run, 91x117cm, oil on canvas, 2014)
(작업실, workroom, 117×182, oil on canvas, 2013)
(조용한 방, room of silence, 163x390cm, oil on canva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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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말코비치 되기>는 1999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우연히 캐비닛을 옮기다 존 말코비치의 뇌로 가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 크레이그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통로를 따라 가면 사람들은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면서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을 15분 동안 느낄 수 있다.
[2]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2007, 89-91쪽

글/ 손송이 비술비평, 인천아트플랫폼 8기 입주 연구자, 1인출판사 ‘뜬구름’ 운영
사진/ 대안공간 듬 제공




미디어퍼포먼스뮤지컬 – 타이거 헌터

 

<타이거 헌터>의 재공연을 기다리며

지난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6년 전통예술 지역브랜드 신규 상설공연 공모에서 ‘전통예술 지역브랜드 상설공연’으로 선정된 한울소리의 미디어 퍼포먼스 뮤지컬 <타이거 헌터>가 공연되었다.

한국 전통 타악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재해석하여 현대적 감성을 접목시킨 다양한 창작 작품으로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한울소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타이거 헌터>에 대해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 관람 후 이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타이거 헌터>는 2014년 9월 발간된 소설가 손상익의 「총의 울음」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이다. 우리에게는 신미양요로 알려진 1871년 인천 강화에서 실제 벌어졌던 광성보 전투에 참가해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군-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차출된 범 포수들, 그들이 바로 타이거 헌터이다.

공연은 한국 전쟁 영상을 배경으로 군가를 부르며 등장하는 군인들과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미군 장교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타이거 헌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평화롭고 정겨운 범 포수 마을 사람들의 흥겨운 노래와 춤 그리고 인천 앞바다에 정박 해 있던 미국 함대를 상대로 용맹하게 맞선 범 포수들의 가슴 아픈 최후의 항쟁. 마지막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미국 참전용사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창작 공연의 경우 역사적인 사실이나 실제 발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관객들에게 좀 더 쉽게 어필할 수 있다. <타이거 헌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에 흥미를 갖도록 하였다. 완성도 높은 음악,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 구성력 있는 안무는 <타이거 헌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무대 세트 대신 영상을 사용하여 극 중 장소나 상황의 변화를 표현하였으나 배우들의 동선, 움직임, 소품 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세트의 부재로 인한 무대 위의 공간이 비어있음을 느낄 수 없었다. 배우들을 객석에서 등장하도록 하는 연출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들로 하여금 공연 <타이거 헌터>에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아쉬운 점들이 없지 않았으나 이번이 초연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체적으로 공들여 준비한 공연임을 알 수 있었다.

개관 23년만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처음 공개된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의 객석은 만석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을 향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한울소리의 <타이거 헌터>는 ‘지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소재로 완성도 높은 공연예술 창작 콘텐츠를 발굴·지원함으로써 지역민의 문화 향유 기회 확대 및 지역문화예술 활성화’라는 사업 목적에 그야말로 부합하는 공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80석 남짓한 공연장에서 3일 5회 공연만으로는 <타이거 헌터>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서서히 설레임으로 바뀌고 있다. 초연 때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 반드시, 곧 재공연 될 <타이거 헌터>를 기다려본다.

인천문화재단 이혜진




단숨에 읽는 한국 근대문학사


한국근대문학관 지음 / 한겨레출판/ 2016. 01.
한국근대문학관 함태영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

1890~1948년의 문학을 근대문학이라고 합니다. 이광수, 현진건, 정지용, 백  석, 서정주, 윤동주 등이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입니다. 두 세대 전, 과거의 문학이지만, 한국 근대문학은 오늘날 현대문학의 밑바탕이 된 문학이자, 현대 한국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한국 근대문학을 평범한 일반인의 시각으로 쉽게 설명한 책이 그 동안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에서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도 쉽고 재미있게 우리 근대문학사를 이해할 수 있는 도록 겸 문학사를 편찬․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우리 근대문학의 역사를 지루한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큼직큼직한 사진과 그림으로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입니다. 처음 근대문학이 시작된 조선 말기부터 해방의 감격에 이르는 기간에 진행된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가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매우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현재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은 물론 앞으로 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 중고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우리 근대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훌륭한 한국 근대문학 입문서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시대를 고민하면서 창작에 전력을 다한 근대 문인들의 고투와 우리 문학의 역사를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천에 대한 어떤 기록 -『확장도시 인천』(김윤환 외 지음, 도서출판 마티 2016)

신경섭, Incheon Project, 2016, 확장도시 인천 (1)
인천은 확장이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 도시다. 비슷한 말로 확대, 팽창이라는 단어도 있다. 인천이 가진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그 어느 도시보다 넓은 매립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땅을 확보한 주로 외연의 성장을 의미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인천은 부평구와 계양구를 제외한 구, 군의 해안이나 내륙에 매립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중 매립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은 동아매립지가 조성된 인천 서구 지역이고 행정 면적 대비 매립 면적 비율이 높은 곳은 송도신도시가 조성된 연수구이다. 매립으로 넓어진 땅은 인천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하며 이 넓은 면적은 인천이 외부에 내세우는 자랑거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새로운 땅의 탄생은 상대적으로 잃어버린 것도 많다는 것, 기존의 생활 터전과 문화의 망실도 포함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신경섭, Incheon Project, 2016, 확장도시 인천 (2)
그래서 ‘문화 연구자, 도시계획 연구자, 부동산 연구자, 건축가,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등이 진행한 도시 문화 리서치 프로젝트의 결과물’인『확장도시 인천』에서 확장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궁금해졌다. ‘20세기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팽창해온 인천의 내 ․조망하면서 산업화와 개발의 흐름에 따라 신시가지를 터전으로 삼아 등장한 중산층 문화의 다양한 형태들을 분석하기 위해 시작’됐다는 것이 기획 의도다.

앞면책은 기획 의도를 충실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경인선 : 혼잡 연대기>는 1899년에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단순히 인천과 여타 도시들과의 물리적 이동만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그 혼잡의 연대기만큼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경인선은 인천 발전과 성장의 초점이 되었고 현재 도시 재생 논의의 중요한 초점에도 경인선이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앞으로 철도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져야할 필요성까지 부여하고 있다.

인천은 전국 그 어느 도시보다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 모인 곳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새로운 환경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정착하고 살았다는 것은 인천의 매력이다. <인천, 노동자들의 도시 1968-1986>에서는 이러한 인천의 특성이 형성된 배경의 일부를 보여준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의 개통과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동일방직, 부평공단, 대우자동차공장 등으로 모여든 외지인들의 삶을 피상적이 아니라 개인의 육성을 통해 생생하게 전개하고 있다.

뒷면<확장하는 외지인의 도시 1·2>에서는 산업화와 개발의 흐름에 따라 신시가지를 터전으로 삼아 등장한 중산층 문화의 다양한 형태들을 분석하고 있다. ‘부평과 연수동 그리고 송도’ 세 지역을 인천 주거 문화와 중산층 형성과정에서 명확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선정했다. 그 외에도 <어떤 ‘인천살이’의 즐거움, 1997-2015 : 맛집, 백화점, CGV, ‘센팍’> <사라진 아이들> <어쩌면 서울, 아마도 인천> <1999, 인천-홍대앞 왕복 4시간> <송도신도시 : New City for None Place on the New Place> 등의 소 주제를 통해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서울에 가지 않아도 먹고 보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정작 본인을 인천 사람이라 부르기가 어색하다는 개인의 경험담, 인천은 언제까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야하는지와 같은 인천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이 펼쳐진다.

한 도시의 확장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도시의 규모가 바뀜에 따라 생활 패턴이 달라지고 그 구성원들이 체험하는 경험이 쌓이는 과정이 결국은 다시 그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이다.『확장도시 인천』이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 이것이 아닐까? 인천은 규모와 인구 등 외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왔고 그만큼 내적 발전도 이뤄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래서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한 기록은, 이야기는 그래서 바로 당신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기 인천에 살고 있는 우리의 기록은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함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공감할 것이다.

신경섭, Incheon Project, 2016, 확장도시 인천 (3)

신은미/한국이민사박물관장




새롭게 만나는 교과서 속 근대 문학- 앤드씨어터 <한국근대문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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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4일(수)부터 18일(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 <한국근대문학극장(예술감독 고홍진, 연출 조영, 신아리, 권근영, 이효진)>이 열렸다. 앤드씨어터가 2014년 ‘플랫폼 초이스’로 선정되면서 처음 선보인 <한국근대문학극장>은 올해로 3회째 진행되며 큰 반응을 얻고 있다. 중,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자주 접하며 익숙해진 한국 근대 소설을 앤드씨어터만의 젊고 참신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2015 유네스코 지정 세계 책의 수도 인천’ 기념행사와 인천 시내 다수의 고등학교에 초청되어 상연되기도 했다.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를 포함하는 근대에 탄생한 문학작품은 개항으로 인해 서양 문물이 도입되며 크게 변화한 사회상과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집약되어 있다. <한국근대문학극장>은 제도 교육 안에서 자주 읽히며 틀에 박힌 시각으로 분석되었던 근대 문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발견하려는 시도다. 근대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다는 포맷은 유지하고 있지만 매회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1인극으로만 구성했던 1회, ‘봄봄’, ‘날개’ 등 대표적인 근대 소설 8편을 각색했던 2회와 다르게 이번에는 소설가 이효석의 작품 4편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권근영 연출의 ‘도시와 유령’은 도시화로 인해 소외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1927년에 쓰인 소설에 드러난 문제 의식이 현대의 사회상과 여전히 일맥상통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물들이 클럽에서 춤을 추는 등 현대적인 분위기를 통해 시대성을 감추고 도시의 소외된 것들에 대한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소설 원작이 여자와 아이를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소외계층인 노동자, 유기견 등의 이미지를 안무와 노래, 음향을 통해 시각, 청각적으로 표현해냈다.

신아리 연출의 ‘장미, 병들다’ 또한 부당한 사회에 대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약자의 모습을 그렸다. 갈등을 겪으며 대립하는 등장인물을 강자와 약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 모두를 약자로 보고, 대항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나 권력, 검열 등을 강자로 보았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전체를 1인극으로 이끌어냈던 김광호 배우의 열연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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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유령’, ‘장미, 병들다’ 두 작품이 시대에 상관없이 유효한 보편적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시대성을 감추는 방법을 택했다면 조영 연출의 ‘메밀꽃 필 무렵’은 근대의 시대성과 이미지를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작품 자체의 사건과 갈등에 집중하면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왼손잡이, 나귀 등의 상징에 초점을 둔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옷감이라는 소재에 담긴 상징을 발견하여 작품을 재구성했다. 옷감은 어머니의 사랑과 선에 대한 긍정을 상징하며 허생원이 아들 동이를 알아보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천으로 만든 소품들을 활용하여 옷감의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이효진 연출은 작품 이전에 소설가 이효석이라는 인물 자체에 주목했다. ‘하얼빈’과 ‘낙엽을 태우면서’ 두 작품을 작가가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어 서술한 사소설(私小說)로 보고, 그 안에 드러난 작가로서의 내적인 갈등을 포착했다. ‘하얼빈’이 이상향을 향해 도피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낙엽을 태우면서’는 현실과 생활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효진 연출은 두 작품을 하나로 엮음으로써 예술가로서 겪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그리고 갈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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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교과서에 등장하는 근대 문학작품은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상징적인 소재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선생님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적고, 시대를 드러내는 소재에는 동그라미를 치며 읽어야 했다. 하지만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근대 문학이 계속해서 읽히고 회자되는 것은 달라진 사회상을 반영하여 새로운 해석과 끊임없는 재발견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상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보편적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 교육의 주입으로 작품을 주체적으로 만나는 것이 낯설다면 <한국근대문학극장>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가보면 좋겠다. 선생님이 알려준 곳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한 새로운 곳에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김진아(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사진 / 앤드씨어터 제공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나를 발견하는 예술활동- 2016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 협력사업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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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중학교 교과 과정에 도입된 ‘자유학기제’가 올해 전국 3,214개 중학교에서 전면적으로 시행됐다.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과정 중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꿈과 끼’를 찾을 수 있도록 토론, 실습 등 학생 참여형으로 수업을 개선하고, 진로탐색 활동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이 가능하도록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제도다. 자유학기의 가장 큰 특징은 중간·기말고사 등의 필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과정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유학기제는 참여 및 협력 정도, 열성, 특별한 활동 내역 등을 평가하고,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꿈과 끼’와 관련된 활동 내역을 기록한다.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 역시 이 추세에 맞춰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라는 지원사업을 6월부터 추진했다. 그 결과 남인천여자중·부광중·상인천여자중학교·상인천중·선학중·선화여자중·용유중·재능중·화도진중학교 총 9개교가 선정되었다. 중도 포기한 용유중학교를 제외하고 8개 학교에서 시각, 음악, 연극, 무용 총 4개 분야 22개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학교에서 신청한 각 분야별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음악분야의 프로그램이 총 8개(뮤지컬 2개, 랩 2개, 보컬 1개, 노래만들기 1개, 기타 1개, 우쿨렐레 1개)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시각분야 6개(디자인 4개, 사진영상 2개), 연극과 무용은 각각 4개였다.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은 첫째,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활용한 학교문화예술교육 확대. 둘째, 자유학기제에 적합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개발. 셋째, 학교와 예술교육자 간의 협력을 통한 프로그램 운영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재단은 사전에 교사와 강사가 참여하는 기획워크숍을 개최, 교사와 함께 세부 프로그램을 협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쳤다. 기존에 운영되고 있는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의 차별화를 시도하는데 중점을 두기 위해서였다.

자유학기제의 추진 목적 중 하나가 ‘자신의 적성과 미래에 대해 탐색하고 설계하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꿈과 끼를 찾고, 지속적인 자기성찰 및 발전 계기를 제공’하는 것인데, 재단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를 발견하는 예술활동’이라는 주제를 전제로 프로그램을 계획 및 구성하도록 안내했다. 분야별로 선발된 17명의 전문 강사는 본의 아니게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의 첨병(尖兵)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즉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들은 자유학기제에 적합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하는 것은 물론 교육 등 사업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했다. 8월 중순부터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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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재단에서는 별도의 모니터링단을 구성하여 모든 학교를 현장 방문하도록 했다. 총 7명(시각 2, 무용1, 음악2, 연극 2)으로 구성된 모니터링단은 수업 참관 이외에도 교사, 강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여 다양한 현장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특히 처음으로 시행되는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이기 때문에 기존 예술강사 지원사업처럼 평가를 위한 현장점검이 아니라 향후 이 사업의 발전 방향을 도출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현장을 점검했다.

필자의 경우 상인천중학교를 방문하여 음악(보컬) 분야와 시각(사진영상) 분야의 프로그램을 참관했는데 그결과 우선 교육 장소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열악했다. 그리고 참여 학생 수는 음악(보컬)이 26명, 시각(사진영상)은 30명으로 강사 1명이 담당하는 학생 수도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와 호응도는 높아보였다. 몇몇 학생과 인터뷰를 해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수업에 참여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인천중학교 담당 교사 역시 음악(보컬), 시각(사진영상), 무용 까지 학교에서 진행된 3개 프로그램 모두 만족감을 표시했다. 특히 ‘나를 표현하는 예술활동’이라는 주제를 강사 분들이 중학교 1학년에 수준에 적합하게 잘 풀어낸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교육 장소로 음악실, 미술실, 강당 등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모든 학년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장소이다 보니 적합한 교육 장소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교실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학교의 상황을 아쉬워했다.

필자 이외에 다른 모니터링단이 현장점검을 하면서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니 필자와 대부분 비슷했다.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와 호응도는 높은 편이었고, 학교의 담당 교사와 강사 간 소통도 전반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교육 환경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것으로 조사되었고, 특히 강사 1명이 담당하고 있는 학생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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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 초기부터 함께 고민하고 또 직접 강사로도 참여한 추진단 회의가 모니터링단의 현장점검 이후 마련됐다. 추진단 회의에서는 보다 다양한 현장의 이야기와 향후 본 사업의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의견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기존의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의 변별성, 둘째, 교사와 강사의 협력수업(Coteaching), 셋째, 본 사업의 운영방식의 개선방안이다. 종합해보면 자유학기제라는 교과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 것인가? 변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까? 정도가 주요 논점이었고, 나머지 내용은 사실 오랫동안 학교문화예술교육의 발전방향을 위해 논의된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학교 예술 강사 지원사업에서 교사와 강사의 협업방식, 교육 기자재, 교육환경 등 늘 개선사항으로 언급되었던 문제점들이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의 개선사항으로 추진단 회의에서도 논의되었다.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은 자유학기제가 전면 시행된 올해 재단에서 처음으로 자유학기제와 연계한 문화예술교육 지원 사업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계획과 실행까지 이루어낸 부분은 높게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재단에서 일방적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들과 강사들이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풀어내기 위한 과정을 통해 함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후 현장의 이야기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자 한 태도는 ‘자유학기제 예술날개 달기’ 지원 사업이 보다 발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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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업이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풀어야할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기존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의 차별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자유학기제는 초등학교(진로 인식), 중학교(진로 탐색), 고등학교(진로 준비 및 설계)로 이어지는 진로교육 연계·활성화를 목적으로 ‘진로탐색활동’, ‘주제선택활동’, ‘예술·체육활동’, ‘동아리활동’ 등 학생의 희망을 반영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꿈과 끼를 탐색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지필식 총괄평가는 실시하지 않지만 과정 중심의 평가는 실시된다. 따라서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의 경우 4가지 활동 중 어느 활동에 중점을 둘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필요해 보인다. 사업 과정에서도 학교마다 다른 활동에 배치됨으로써 강사들이 사전에 준비한 커리큘럼을 수정 하는 등 혼선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 평가 부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과정 중심의 평가 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고민 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할 경우 그에 대한 평가를 실시해야 되는 학교와 교사 입장에서는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와 강사가 사전에 프로그램을 기획, 조정,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와 강사의 협력은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에 있어 양질의 프로그램 개발과 확산체계 확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자유학기제가 시행되면서 학교 내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만큼 기존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던 예술교육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강사 지원 방안, 교사와 강사 협업 방안, 학교와 지역사회의 협력 방안 등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자유학기제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끝으로 올 한 해 ‘자유학기 예술날개 달기’ 사업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글 / 전승용(인하대학교 문화예술교육원 주임교수)




명창과 귀명창의 신명나는 만남-대명창과 이수자가 어우러지는 판소리 다섯마당 ‘청어람’ 2016.11.1. 19:30, 부평아트센터 달누리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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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감상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춘 사람을 ‘귀명창(名唱)’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즐겨 듣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 판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지식을 바탕으로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 1일 인천 부평아트센터 ‘달누리극장’에서 열린 판소리 다섯 마당 ‘청어람(靑於藍)’ 공연에 인천 곳곳에 숨은 귀명창들이 모두 모였다. 이들은 ‘얼씨구, 좋다, 잘한다, 어이’ 등의 추임새를 소리꾼이 판소리를 잠시 쉬어가는 ‘숨구멍’ 사이사이 맛깔스럽게 꽂아 넣으며 흥을 돋웠다. 판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새내기 청중조차 이에 용기를 얻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추임새를 날릴 수 있었다. 한국 판소리를 대표하는 7명의 명창은 소리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아는 인천의 청중들 앞에서 마음껏 자신의 소리 보따리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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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이라는 공연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날 공연은 판소리 명창과 이들의 대를 이어가는 후배 차세대 명창들이 꾸민 무대로, 좀처럼 인천에서 만나기 힘든 화려한 진용으로 짜여졌다. 서편제 춘향가, 서편제 심청가, 동편제 춘향가, 동편제 적벽가, 동초제 심청가, 동편제 수궁가, 동편제 흥부가 등 한국 판소리의 계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TV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로 너무나 유명한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춘향가) 보유자인 신영희 선생과 한국판소리보존회 고문인 인천의 박계향 명창이 선배 명창으로 나섰고, 올해 열린 ’24회 임방울국악제’ 대통령상을 거머쥔 김경아 한국판소리보존회 인천지부장, 제20회 임방울국악제 최우수상의 이정원, 제15회 명창 박록주기념 전국국악대전 종합 최우수상을 받은 지선화, 제20회 동아국악콩쿠르 금상 경력의 국악방송 진행자 김봉영, 제19회 임방울국악제 대통령상 수상자인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이 선배들의 뒤를 받쳤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귀향’의 영화감독 조정래 씨가 사회를 맡았다. 조정래 감독은 김경아 명창의 차례에서는 고수로 나와 호흡을 맞춰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들 소리꾼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300석 규모에 불과한 작은 소극장에 마련된 무대였다. 이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청중들은 최고의 집중력과 호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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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각 명창들이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10분 남짓한 길이의 ‘하이라이트’만을 뽑아 차례로 선보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인천 판소리계의 어른인 박계향 선생이 심청가 중 ‘타루비 대목’을 이어 김경아 명창이 춘향가 중 방자가 춘향의 편지를 들고 상경하는 부분을 선보였다. 이정원 명창은 엄청난 성량을 뽐내며 적벽가 중 조자룡이 활을 쏘는 대목을 들려줬고, 지선화 명창은 심청가 중 심 봉사가 황성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김봉영 명창은 특유의 유머러스한 재담을 곁들여 토끼가 세상에 나오는 수궁가의 한 대목을 내놨다. 채수정 명창은 흥부가 중 박타는 대목을 들려줬고, 마지막 신영희 명창이 춘향가 중 ‘왔구나! 내 사위 왔네!’ 대목으로 마무리했다.

공연이 계속될수록 관객들은 진지하면서도 즐겁게 명창들의 무대에 집중했고, 내공 깊은 청중 앞에 서는 것이 긴장된다며 엄살을 부리던 명창들도 이런 긴장이 오히려 즐거운 듯 최고의 소리를 선보이며 청중과 호흡을 같이 했다.
이번 공연은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에 할 말을 잃은 시민들의 꽉 막힌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무대이기도 했다. 최근 열린 임방울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스타가 된 김경아 명창이 “‘최순실 상’을 받았다”며 인사를 올려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신영희 선생은 “정부가 전통 음악에 대한 지원을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그 많은 돈이 어디로 다 흘러갔을지 모르겠다”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요즘 돈이 어디로 다 흘러가는지 열불이 난다”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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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연은 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예산으로 준비됐는데도, 티켓 가격은 2만원에 불과했다.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휴식 시간도 없이 객석의 청중과 무대 위 명창들이 한호흡으로 즐긴 질 높은 공연의 가격이라고는 믿기 힘든 수준이어서 더 놀라웠다. 앞으로 다양한 계보의 판소리 공연들을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국악 초보인 기자마저 ‘얼씨구, 좋다~’를 연발하게 했던 인천의 수준 높은 ‘귀명창’들을 위해서라도.

김성호 / 경인일보 인천본사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