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감각을 잃은 우리, 변화를 위한 시작은 무엇일까: 임시공간 기획전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울림의 감각을 잃은 우리, 변화를 위한 시작은 무엇일까임시공간 기획전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이정은(시각예술연구자)

인천 신포동의 시각예술문화 공간인 ‘임시공간’에서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보고 왔다. 시적인 전시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획의 글에 의하면, 이 전시는 생태계의 다양한 종들을 주체로 다루며, 이들 주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에너지의 울림과 공명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이 겨냥하는 것은 이 행성에서 인간 자신만을 보편적 주체로 상정해 온 인간의 독단적 여정이다. 지구의 수많은 생물종들이 형태적, 생태적, 유전적으로 다른 형질적 특성을 지니고 각기 다른 감각계와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인간은 고도로 발달된 두뇌와 자기중심적 사고로 다른 종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이다. 이 전시는 싱글채널 비디오 3점과 영화 3편을 상영하는 스크리닝 전시로 기획되었다. 이 6편의 작업은 호모 사피엔스(생물학에서 인간 종을 가리키는 학명)의 관점으로 구축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다른 종들(더 나아가 사물까지)을 새롭게 인식하고 서로의 에너지와 울림을 느낄 것을 제안한다.

《( )는 모든 것의 고유한 울림을》, 임시공간, 2021.9.1.~9.18. (출처: 임시공간)

엘사 크렘저와 레빈 페터(Elsa Kremser, Levin Peter)의 영화 <스페이스 독(Space Dogs)>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소련과 미국 간 우주를 향한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기, 소련이 쏘아 올린 최초의 우주 개 라이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 사회의 과열된 경쟁은 한 마리 개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카메라는 도시의 거리에서 만난 개들을 따라가면서 길거리의 떠돌이 개였던 라이카의 영혼을 쫓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지금의 길거리에서 만난 개들의 일상을 지루하게 쫓는 이 영상은 라이카에 대한 애도를 쉽사리 끝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영상은 내가 오래전에 보았던 스웨덴 영화 <개 같은 내 인생(My Life As A Dog)>을 떠올리게 했다. 소년 주인공이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의 처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좀 다른 맥락이지만 소년이 비교했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판단과 그에 의해 구축된 질서는 개뿐만 아니라 때로는 인간에게도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독>, 다큐멘터리_91분, 2019 (출처: EIDF)

라두 치오르니치우크(Radu Ciorniciuc)의 영화 <아카사, 마이홈(Acasa, My Home)>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사회 제도와 체계에 맞추는 것이 때로는 위협적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도시 한 켠 야생의 자연이 남아 있는 미개발지 움막에 살고 있었던 한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일대가 생태공원 조성지로 지정되면서 이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환경은 당국에 의해 관리 대상이 된다. 움막은 헐어야 하고 불을 피우고 돼지를 잡는 가족의 일상은 이제 허가가 필요한 사항이 되었다. 이 공원의 나무 식재는 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물놀이를 하던 호수는 보호되어야 할 구역이 될 것이다. 이들 가족은 사회복지 제도의 방침에 따라 도시의 공동주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학습을 하고 자연의 놀이터 대신 이제 운동장에서 스포츠의 룰을 배워간다. 도시에서의 적응과정에서 가족 간에는 불화와 갈등이 붉어지고, 이들에게 도시의 질서와 체제는 다소 버거워 보인다. 한편으로 그 체계가 관할하는 일상에 이미 익숙해진 화면 밖 우리를 보면서 그러한 일상의 그물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아카사, 마이 홈>, 다큐멘터리_86분, 2020 (출처: EIDF)

지구상의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사고는 생물학이라는 학문분과로 체계화되었다. 생물학에서 각각 종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보는 방식은 식물과 동물의 외형과 기관의 형태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계통분류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동물이 어떻게 주변을 지각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생물학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희현의 작업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1장>은 새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영상은 야생조류가 투명유리창에 충돌하는 사고의 발생 원인과 해결 방안을 제시하면서 새의 감각 기관과 보는 방식을 참조한다. 즉 새의 눈이 머리 양옆에 위치해 전방 거리 감각이 떨어진다는 점과, 인간과 달리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새의 시각 체계를 고려한 충돌 방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은 영상 후반부에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병치시킨다는 점이다. 작가는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새를 보면서 인간이 최초의 영화를 보면서 가상과 현실을 감각적으로 구분하지 못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성찰적 환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던 인간의 경험으로 소급해 돌아가 동등한 처지를 환기하는 방식에서 타 존재에 대한 도덕주의적 감정 이입을 넘어서는 윤리적 태도를 볼 수 있었다.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 1장>, 필름_7분 40초, 2020 (출처: 최희현)

우리가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김새와 행동을 통해 유추해 보고 교감하기 위한 노력이 의미 없지 않다는 것을 또 다른 작업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에서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도시생활에 지친 한 인간이 대서양 바다로 들어가 문어와 함께 교감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문어 곁에 다가가고 문어가 자신을 인지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1년의 시간 동안 문어가 무엇을 먹는지, 물속 생태계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관찰한다. 그가 근본적 변화를 위해 대서양에 뛰어들어 야생의 환경에서 감각을 깨우고 뇌를 활성화시키면서 문어와 교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한 <아카사, 마이홈>과 교차되면서, 도시 시스템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야생의 감각을 상실케 하고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세계와 마주할 용기를 내는 것은 전시에서 말하는 공존과 공명을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 90분, 2020 (출처: 넷플릭스)

이번 전시는 인간과 자연이 맺은 관계의 서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전시였다. 그리고 이 서사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성찰과 변화의 시작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기획의 글에서 ‘그가 뱉은 숨을 내가 들이마시듯’이라고 종들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서로의 호흡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처절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이번 전시에서 내게 가장 먼저 전달된 메시지는 다른 생물종과의 울림과 공명의 기억과 감각을 되찾기 위한 시도는 보다 깊고 낮은 위치에서, 보다 가깝고 동등한 처지에 있음을 뾰족하게 느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정은(李定恩, Lee, Jeongeun)

시각예술연구자 및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달빛심포지엄》(2017), 《아워 피크닉_레퍼런스》(2019) 등의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현재 2021 아트플러그 연수 입주작가이다.




예술가들의 어떤 ‘모순적’인 이야기: 『아티스트』(마영신, 송송책방)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술가들의 어떤 ‘모순적’인 이야기『아티스트』(마영신, 송송책방)

최기현(인천문화재단)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이 인기다. 삶의 막다른 지경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456억 원의 상금을 받기 위해 게임에 도전한다.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에 반드시 상금을 차지하여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하는 83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흥행 중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한다. 동료와 끝까지 함께 할 것만 같은 ‘정의로운’ 주인공들도 자신이 탈락할 위기에 처하자 동료를 속이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오징어게임의 주최자도 ‘정의롭고 공정한 기회’를 표방하지만, 참여자의 편법에 눈을 감거나 참여자가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기회를 박탈한다. 참여자나 주최자 할 것 없이 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 사람은 원래부터 모순적인 존재였을까, 아니면 상황이 사람을 모순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마영신, 『아티스트』 총 2권(송송책방, 2019)

만화 『아티스트』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음악가 천종섭, 화가 곽경수, 소설가 신득녕은 무명의 가난한 예술가이다.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자신들의 상황을 한탄한다.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예전에는 나보다 못했던 놈’이라고 폄하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은 뮤지션은 어설픈 실력으로 유세 떤다고 판단하거나, 대중적으로 성공한 예술은 그 예술적 세계가 깊지 않다고 단정한다. “우리 셋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다짐하지만 셋 중에 누군가가 잘되면 배가 아프고 그 성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유치하면서도 모순적이다.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와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음악가 종섭은 득녕의 도움으로 우연한 기회에 스타작가가 되지만 득녕에게 도움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잘 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가 경수는 꼰대 기질에다가 ‘내로남불’형의 인물이다. 대학교 시간강사인 그는 권력에 아부하고 질투심과 명예욕 끝판왕이다. 득녕은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문학상 후보가 된 후에는 ‘문학상을 거부’하겠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그냥 하는 소리’였다고 말을 바꾸는 캐릭터다. 세 인물 모두 마음속으로는 예술을 통해 명예를 얻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예술적 성취도 이루고 싶은데 아닌 척 포장한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남 탓이나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티스트』 중 한 장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로 구분했다. ‘이드’는 인간의 본성이나 리비도, 충동 등이다. 인간의 욕구는 이드에서 비롯된다. ‘초자아’는 양심과 이상적 열망, 도덕적 교훈과 사회적 금기 등이다. 일종의 마음속 재판관이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드나 초자아 어느 한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밀고 당기기를 한다.

이드와 초자아의 대립은 원래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 맘 같아서는 명예와 권력, 돈을 전부 가지고 싶은데, 사회적 금기나 도덕적 교훈 등 이상을 지향하는 초자아 때문에 내 맘대로 갖지 못한다. 내면에서 이드와 초자아의 치열한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드에 휩싸이면 욕망이 밖으로 발현된다. 그 형태는 잠재되어 있지만 오징어게임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모순적인 행동이 나온다.

마영신 작가는 예술가들의 모순적인 면모를 볼 때마다 틈틈이 메모한 것을 토대로 『아티스트』를 그렸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종섭, 경수, 득녕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예술가로서의 초자아 판타지를 꿈꾸면서 동시에 이드에 따라 행동한다. 우연한 기회에 명예나 권력이 주어졌을 때는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이들이 특이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독자는『아티스트』를 읽으면서 어쩌면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티스트』의 후속편으로, 찌질한 곽경수를 재조명한 『아티스트, 곽경수의 길』(송송책방, 2020)도 볼 만하다. 특히 주인공 곽경수가 만화에서 개최한 개인전은 만화 출간과 함께 <곽경수 개인전>(파주 아트스페이스휴, 2020.5.22.~6.25.)으로 현실에서 개최된 바 있다. 곽경수가 만화 속에서 작업한 그림 10점 등이 전시되었고, 뮤지션 김오키의 공연, 소설가 박민규의 소개글도 현실에서 재현되었다. 만화 속 전시회가 현실에서 구현된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유치하고도 모순적인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마영신 작가의 『아티스트』를 한번 읽어보시길.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한상정(인천대학교 교수)

작년에 이어 경인일보가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2021.07.23.~08.10.) 전시를 주최했다. 40명의 작가에 200여 작품. 숫자도 화려하지만 작가와 작품도 호화롭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정현웅, 림군홍, 이쾌대, 김주경 등 미술사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 있지만, 실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근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에서 동시대 조선화가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엄청난 폭염에 구원자처럼 보이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출입문을 열었다. 대전시실로 다가가는 동안 멀리 전시회 제목이 적혀있는 가벽이 보이기 시작했다(사진 1). 보라색과 흰색, 휴전선 경계를 중심으로 공간을 두 개로 분할하고, 그 위에 상대의 색을 지닌 글씨로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모든 글씨가 잘 드러난다. 상대의 성격을 활용한 각자의 드러냄이 인상적이다.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 이번 전시 개최의 철학일까.

사진 1. 전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처음’ 전해주는 가벽 사진 2. 해금된 작가들의 이름들이 한쪽 벽에 적혀있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진한 꽃분홍, 진달래색 가벽에 전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옆에 70명의 월북 화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벽이 보인다.(사진 2) 1988년에 해금되기 전까지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했던 작가들이다. 오랫동안 매장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치 묘비의 표식처럼도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은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작가의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곳 같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역시 진달래색으로 “나는 우리 조국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스며있는 조선의 정신과 기백을 화폭으로 형상한다.”는 조선화의 핵심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리석호의 글이 있다. 1965년에 리석호가 했던 발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북한 특유의 ‘조선화’의 관점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3. 리석호, <수련>, 98×30.5cm, 조선화,1959년

본격적인 전시공간에 다가가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섹션은 ‘조선화의 거장 3인 특별전’이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의 작품들은 연이어 감탄이 튀어나온다. 강하게 휘몰아치다가 한없이 애틋하고 섬세하고 여리게 붓과 먹, 색으로 꽃과 풀과 나무와 물고기를 재현한다. 리석호의 발언이 작품에서 드러날까 궁금해서 <수련>을 보았다(사진 3). 그 어떤 윤곽선도 없이 붓과 먹의 번짐만으로 수련과 수면의 움직임과 잠자리까지. 조선의 정신과 기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과함 없는 간결함과 단정함은, 실로 아름답다. 한글로 작가 이름을 적는 것도 멋지다. 우리 동양화는 주로 한자였는데. 아주 깔끔한 거대한 벽 하나에 이 작품 하나만, 액자를 제대로 하고 조명을 맞춰서 걸어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이런 욕심을 부리게 만드는 작품이 너무 많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두 번째는 ‘낯선, 낯설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월북한 18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도 보인다. 조선화만이 아니라 스케치, 판화나 유화 등 형식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전쟁. 이 몇 단어로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잡한 이유들로 어떤 이들은 월북을, 다른 이들은 월남을 했을 것이다. 남북의 대립이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었을 때, 월북한 작가들도 그 작품들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해금되었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미 작고했겠지만, 그 작품들은 7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세월을 견딘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있을까.

사진 4. 길진섭, <어머니의 초상>, 27×38cm, 스케치, 1974년 사진 5. 정현웅, <꿈>, 34.5×25cm, 유화, 1967년
사진 6. 출품 작가들의 인물화 모음

길진섭(1907~1975년)의 <어머니의 초상>(사진 4)은 타계하기 1년 전의 연필스케치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의 모서리도 닳아있고 접혀있던 흔적도 역력하다. 이미 작고하신지 오래된, 흐릿해가는 모친의 사진을 보며 오래오래 그렸던 것일까. 그 아릿한 마음에 울컥하게 된다. 정현웅(1910년~1976년)은 1966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의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7년부터 평회원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그린 것은, 누구의 꿈일까(사진 5). 월북했던 화가들은 그 이후, 어떤 작품들을 어떤 철학으로 해나갔을까.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함께 녹아있을까.(사진 6) 여전히 우리에겐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세 번째 섹션은 ‘From Korea To Korea’로 동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풍경화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는 확실히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예컨대 최창호의 <5월의 백두산>(사진 7)은 분명히 리석호가 말했던 ‘조선의 기백’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북한의’ 미술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작품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김승희의 <봉산탈춤>(사진 8)이야말로 이런 전시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인물들 아래 ‘황해도 봉산탈춤, 해주강령 서흥탈춤 경기도의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 동해서해남해탈춤(중략)’이라고 호명하는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해도 은율탈춤은 없다. 북한에서는 사라졌을지도 또는 인천에 은율탈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서로 많은 것을 알아가야만 한다. 전시 기간 중 모 국회의원이 만수대창작사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인가, 전에 갔을 때보다 관람객이 더 많아 보였다. 이제는 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엔 제재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술가와 그 작품조차 접하고 연구할 수 없었던 시대로 회귀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예술의 영역마저 제한을 가한다면, 어떻게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사진 7. 최창호, <5월의 백두산>, 134×75cm, 조선화, 2008년
사진 8. 김승희, <봉산탈춤>, 151×101cm, 조선화, 2007

첫해에 공훈예술가 황영준의 개인전을, 올해 조선화와 월북 화가들 작품을 선보였다면, 내년은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조선화가 아카이브’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 다양한 조선화들을, 아니면 조선화의 내용적 형식적 변천을 좀 더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시가 될까. 아니면 조선화의 범주를 벗어나서 또 다른 유형의 북한 작품들을 보게 될까. 여하간,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에서 다른 북한미술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품사진: 정형렬 제공
전시사진: 필자 제공

한상정(韓尙整, Han, Sang-Jung)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문화대학원/인문문화예술기획 연계전공 교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이병국(문학평론가)

강화길의 소설은 어떤 폭발을 예비하는 것처럼 읽힌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엄청난 사건이 인물들을 휘감을 것만 같은데 그 긴장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서사는 부지불식간에 독자의 영역에 슬며시 옮겨져 있다. 이를 당혹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는 소설이 구축해 놓은 공간에 우리가 깊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소라 생각했던 그곳이 섬뜩하고 낯선 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강화길이 재현한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세계가 얼마나 위협적이며 폭력적인지를 알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세계를 만들고 굳건히 유지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최근작 『대불호텔의 유령』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이전 소설과는 달리 닫힌 구조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가 자신이 과거에 쓴 단편소설 「니꼴라 유치원」을 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소설가 소설의 형식을 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재하지 않는 장소의 실재하는 유령에 관한 소설 쓰기는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 변주되며 분명한 결말로 나아간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3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전체 스토리는 소설가인 ‘나’가 몇 년 전 발표한 단편 「니꼴라 유치원」을 쓸 때 경험했던 일과 그 와중에 새롭게 알게 된 ‘대불호텔’과 관련된 사람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소설에서 1부와 3부의 화자는 작가인 ‘나’다. 1부에서 ‘나’는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마다”(19쪽) ‘증오, 원한 미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의 기원이랄 수 있는 여섯 살 무렵의 경험(문용 옹주를 자처하는 이문용의 집과 관련된)과 그 소리를 잠시나마 잊게 한 대불호텔의 과거를 전해줄 박지운과의 만남이 여기에 담긴다.

2부는 박지운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69쪽)은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인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워 진행되며 3부는 2부에서 재현된 박지운의 이야기와는 다른 제3자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액자 내부 사건의 공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다. 1884년경 2층의 목조가옥으로 숙박업을 시작해 1888년 3층 벽돌 건물로 탈바꿈하여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1950년 중반으로 전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불호텔은 쇠락하여 ‘중화루’라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으며 호텔은 3층에서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97쪽)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고연주’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이 호텔에 『힐 하우스의 유령』의 저자 셜리 잭슨이 묵게 되면서 사건이 진행된다.

1950년대 중화루 (사진: 인천광역시 중구청) 대불호텔 터에 복원한 대불호텔 전시관

이 소설의 중요 키워드는 장소에서 비롯된, 그러면서 인물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 즉 위태로운 삶을 초래한 세계의 불합리한 억압에 기반을 둔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없는 전후 1950년대의 상황과 화교로 맥락화된 소수자의 안정적 삶이 허락되지 않는 정황 등이 맞물리면서 대불호텔은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장소로 의미화된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강한 생활력이며 ‘유령’으로 상징된 악의인 셈이다. 이는 이 소설의 초점화자인 작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어린 ‘나’가 이문용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이문용이 문용 옹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 비록 그녀가 ‘가짜’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주는 존재가 부재한 상태가 ‘지나간 미래’로서 ‘나’의 거울쌍이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악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악의’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귀신 들린 여자’ 고연주,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인정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는 셜리 잭슨,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을 자신의 존재 상태로 채택한 지영현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박지운에게 ‘악의’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용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그녀(들)은 악의에 기반을 둔 존재 내부의 충동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를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그녀(들)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구체적 장소를 점유하면서도 기묘하게 미끄러지면서 불편한 지위로 밀려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되는 그녀(들)은 대불호텔 내부와 조우하지 못한 채 외부에 의해 상상된 방식으로만 추상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악의에 가득 찬 타자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욕망의 잔영,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는 어쩌면 전체 서사의 중심이 되는 2부가 박지운의 불확실한 기억, 아니 악의적 각색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들) 삶의 구체성은 다른 이에 의해 구성될 뿐, 그 자신은 이미 죽은 존재로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박지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과거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화자와 서술 주체에 의해 이중으로 구성된 존재로 그녀(들) 모두 타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 속 구성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 낙차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자 하는 충동이며 악의가 전부이길 바라는 세계의 의지가 추동한 결과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 여성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서발턴의 발화에는 그 권리를 둘러싼 허용과 배제의 권력이 개입되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담화의 장이 이미 폭력적으로 중층 결정된 공간 속에서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기주체성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는 이 유령의 모습은 소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물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세계로부터 제한되지 않으려는 수행성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1955년 대불호텔에서 죽은 여자는 스스로 주체화될 수 없는, 일종의 서발턴의 상징적 죽음임과 동시에 폭력적 세계 속에 그들을 가둬두려는 욕망의 실패담에 가깝다. “악의? 그까짓 것들.”(295쪽) 그렇다. 악의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에게 악의에 기대도록 만든 세계가 문제일 따름이다. 폭발 직전의 순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192쪽, 195쪽) 즉 언제든 무너질지 모르는 순간을 포착하는 강화길 작가에게 악의는 세계로부터 배제된 소수자의 생존 수단이었다. 믿을 수 없는 타자와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주어진 자기주체성이 그것인 셈이다. 그러니 세계 따위 언제든 무너져도 괜찮은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대불호텔의 유령』이 담고 있는 역사적 현실과 복합적인 사유를 풀어내기는 어렵기만 하다. 다만, “모든 것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 우리는 늘 그런 위협 속에 산다”(277쪽)는 사실, 그 절망적인 매혹을 수용케 한 것은 장화와 홍련 그리고 그들로 인해 죽게 된 다른 수령들의 마음을 들어준 수령의 마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303쪽) 여성이라서, 되놈이라서 이 땅에 속할 수 없다고, 떠나라고 하는 패악을 감당해야 했던 그들에게 대불호텔 안에서나마 잠시라도 평화로운 순간을 제공하여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148쪽)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환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병국(李秉國, Lee Byungkook)

2013년 <동아일보>로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2019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최기현(인천문화재단)

2021년 5월 24일 BTS가 빌보드 뮤직 어워드 4관왕을 달성했다. SNS 영향력을 보여주는 ‘톱 소셜 아티스트’는 2017년부터 5년 연속으로 차지했고 특히 ‘톱 송 세일즈 아티스트’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 위켄드 등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수상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이 미국 주류 음악시장에서 기록한 쾌거였다.

“BTS가 공연할 때마다 중계방송을 했고, 티켓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동시에 트래픽이 몰리면서 1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팬들의 꽃다발로 온통 무대가 묻힐 지경이었지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끔 혈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때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서이레, 나몬, <정년이> (출처: 네이버웹툰)

가상의 인터뷰이긴 하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배우였던 김진진의 인터뷰1)를 2021년에 맞게 각색했다. ‘BTS’를 ‘여성국극단’으로 ‘티켓 예매 오픈’을 ‘매표소 줄 서는 것’으로,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왕자를 맡았던 배우’로 바꾸면 실제 신문 기사 그대로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지금의 BTS만큼이나 대단했다.

여성국극(女性國劇)은 195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한국식 종합 뮤지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노래,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 ‘2020 문화체육관광부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수상한 웹툰 <정년이>는 목포 출신 시골소녀 윤정년이 매란국극단에 입단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소리 하나는 타고난 주인공 윤정년은 가난한 가정형편이 지긋지긋하다. 국극 배우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매란국극단에 입단한다. 국극단에 입단한다고 모두 공연에 서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도 대사는커녕 무대에 병풍처럼 서는 연구생이 한둘이 아니다. 마치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소속사에서 노력하는 연습생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연구생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차지하려는 정년의 등장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연 정년은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국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정년이>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웹툰)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국극은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와 닮았다. 2021년 메인 트렌드로 떠오른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단어로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뜻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모습,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에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 MMORPG를 즐기는 것 모두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현실의 자신이 곧 가상 속 인물이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지금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과 의미가 통한다. 『메타버스』(플랜비디자인, 2020)의 저자 김상균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메타버스의 모습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여성국극의 작품은 대부분 역사 속 특정되지 않은,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하거나 또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다. 요즘 웹툰에서 유행하는 일종의 로판2)인 셈이다. 6.25 전쟁 후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로 삶을 치유하며 현실을 극복해갔다. 메타버스에서 디지털을 제하면 현실을 초월한 가상세계는 <정년이>에서 재현하는 시공간과 맞닿아있다.

주인공 윤정년은 자신이 연기하는 방자가 되기 위해, 이름 없는 군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공연 속에 등장하는 방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름 없는 군졸이 어떤 심정으로 대사를 외쳤을지 가슴 절절하게 느끼며 등장인물에 몰입한다. 윤정년의 라이벌 허영서는 단연 매란국극단의 에이스다. 유명한 음악가인 부모님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국극 공연에 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이다. 완벽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단순히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배역을 끊임없이 ‘나답게’ 해석하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혼연일체가 된다. 비단 허영서 만이 아니다. 국극을 공연하는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공연 속 <자명고>의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되고, <바보와 공주>의 평강공주와 온달이 된다. 현실의 자신이 곧 공연 속 가상 인물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세계관이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 TV와 영화 등 대중 매체의 발달, 체계적인 배우 교육의 부재 등의 요인으로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서정적인 작품세계는 산업화 이후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년이>의 배경은 여성국극의 절정기인 1956년이다. 우리나라 첫 TV 방송이 1956년임을 감안한다면 <정년이>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여성국극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극을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열정과 대비되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이 글을 읽고 여성국극에 관심이 생겼다면, 주인공 윤정년의 좌충우돌 국극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참고>

  • 1) 「여성국극의 맥」, 경향신문 (1984.11.21.)
  • 2) 로맨스판타지의 줄임말. 로맨스와 판타지가 합쳐진 말로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낯익지만 낯선 도시의 기록: 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낯익지만 낯선 도시의 기록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임종은(독립 큐레이터)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고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뉴딜정책’이 전국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인천 연수구에서는 “장소가 아닌 마음에 남는 공공미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성과로 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2021. 7.28.~8.10.)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를 준비할 때는 연수갤러리(연수구의회 1층)에서 관람객들을 직접 만나는 오프라인 행사로 기획되었지만, 방역과 안전을 위해 온라인 전시로 전환되었고, 연수문화재단 네이버TV, 유튜브 등의 채널에 게시된다. 인천 연수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온 작가들과 단체인 카툰캠퍼스, 인천창조미술협회, 청학동2030, 그린웨이브, 연수구서예협회 등은 공모를 통해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성과와 과정을 온/오프 전시장에 모았다.

2021 연수문화재단 기획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 (연수갤러리, 2021. 7.28.~8.10.) 인천창조미술협회, <인천의 작은 역사 송도어촌계를 아시나요> 프로젝트 전경

코로나 대유행의 여파로 우리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예술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창작과 생존이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탄생했던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사실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와 우려가 제기되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중요한 상황에 공공장소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장 활동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에 아쉬움과 미숙함이 있었지만, 작가들의 예술적 대응은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이제 일상에서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번 프로젝트를 관행적으로 수행하고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유의미한 경험과 시도를 발굴하고, 기록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전시 《낯낯곳곳: 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펴본다면, 연수구의 참여 작가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장소를 연구하고 개입하면서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을 현장에 전시하거나 온라인을 통해 공유하고, 책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코로나 방역상황을 의식한 결과물을 도출했다. 더 나아가 물리적인 공간이나 사회적 거리두기에 구애받지 않는 방법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들도 선보였다. 이것은 참여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 영역인 서예, 수채화, 유화, 한국화, 조각, 설치, 디자인, 미디어아트, 디지털콘텐츠, 일러스트, 문화교육, 기획 등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서 출발하여 서예 전시, 그림책과 만화 제작,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수행, 설치미술과 공간 및 시설 디자인으로 환경개선 등 시민들에게 친숙한 형태로 장소에 스며들고, 다가가려고 했던 시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 형태와 예술적 방법론을 확장하고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카툰캠퍼스, <멀고도 가까운 먼우금 사람들> 프로젝트 전경 그린웨이브, <빛, 파도 그리고 바람> 프로젝트 전경

참여 작가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로 자신들의 장소인 연수구를 되돌아보고 연구하면서, 시간과 급속한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지워져 가는 것들을 찾아보고 기록했다. 지역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품은 지역의 역사, 장소에 얽힌 서사, 주변의 이웃들이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온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장소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채워간다. 도시 개발과 간척 사업으로 점차 희미해져 가는 어촌계를 소재로 작업한 ‘카툰캠퍼스’와 ‘인천창조미술협회’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숨겨졌던 것들을 기록하고 ‘청학동2030’은 사라져가는 협궤열차와 60년을 함께 한 송도 역전시장의 환경개선 사업으로 지역에 활기를 주었다. ‘연수구서예협회’는 개인의 수양과 창작을 넘어 청학동 이야기를 마을 주민과 함께 만든 작품을 공공 공간에 설치하였다. ‘그린웨이브’는 디지털 기반의 콘텐츠를 개발하여 송도동 솔찬공원의 지역·생태적 특징으로 장소를 소개하고 그 가치를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낯낯곳곳_낯익지만 낯선 연수구의 곳곳》을 통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인 익숙한 장소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모아서 전시 형식으로 펼쳐 보였다. 전시 제목에 언급된 ‘낯익지만 낯선’은 다시 말해, 급속히 변해가는 자신의 터전이자 일상 장소에서 개발과 자본에 가려진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전시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결과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제공하여 사업의 성과를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장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과정과 프로젝트의 콘셉트를 시각화한 자료들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참여자들의 숨은 노고와 재발견된 지역의 문화적 유산이 함께 드러나는 순간이다.

연수구서예협회, <꿈이 나는 동네, 청학> 프로젝트 전경 청학동2030, <송도역 전시장> 프로젝트 전경

전시의 구성은 공공미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속에서 프로젝트의 완성도의 결정하는 요소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생성된 리서치와 아카이브는 공공미술의 핵심 재료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대개 현장에서 이것들로 만든 결과만을 보게 된다. 전시는 이러한 아쉬움을 담아 기록하고 홍보하려고 했고, 전시장에서 프로젝트의 여정과 수집된 아카이브 를 전시와 작품으로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업별로 공간을 차별성 있게 구획하거나, 외부에서 전시하기 힘든 서예작품을 전시장에 알맞게 설치하면서도 현장감을 확보하려고 했다. 환경개선 디자인 작업을 위해 진행한 인터뷰와 시장에서 수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설치작품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작가들이 그린 책의 원화를 전시함으로써, 전시장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공간적인 차별점과 장점을 살리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전시가 아니라 축적과 공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지속적인 지역 연구를 위해 이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 * *

덧붙여, 널리 공유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과정과 성과가 온라인으로 소통의 장을 옮겼기 때문에 시민들의 접근성에 대한 확보는 향후 과제가 될 것 같다. 전시장에서 강조한 것처럼, 공공미술은 만드는 과정도 중요하고, 현장에서 시민들이 향유하며 생기게 되는 반응과 의견 등의 수렴 역시 작품의 일부이며, 결과이다. 장소와 작품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하는 아카이브와 온/오프라인 전시를 계기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더 풍부한 완성도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길 기대해 본다.

임종은(林鍾恩, Lim, Jongeun)

세계화 속에서 아시아 현대미술을 재정의 하는 데 관심이 많은 독립 큐레이터다. 2019년 제1회 《상하이 국제 종이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대안공간 루프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등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이론을 가르치며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네트워크와 작가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2021년 《Korean Pavilion for Biennale Jogja_Art Exhibit 2021 of KONNECT ASEAN》에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




만화학(漫畫學)의 독립선언: 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만화학(漫畫學)의 독립선언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김현, 오규원, 김창남, 이재현…. 이 글을 읽는 분이라면 이들의 이름을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을 묻는다면 다소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김현은 『문학과 지성』을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문학평론가, 오규원은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교육자이자 시인, 김창남은 문화연구 1세대 연구자이자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했고, 이재현은 노동문학과 민중문학 논쟁을 이끌었던 전위적인 문학평론가였다.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만화’다. 이들은 만화를 읽었고,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그들의 본업은 아닐지라도 만화비평을 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문학평론가 김현과 시인 오규원이 ‘대중문화’로서의 만화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김현은 「만화도 예술인가」에서 만화도 예술이기에 평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만화 또한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진 상징체계로서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글’과 합쳐진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기호론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는 문학작품에서 비유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주장은 예술로서의 만화를 긍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서 만화라는 예술이 처한 허약한 지위와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발표된 권구현의 「신문삽화 만평」을 만화비평의 효시로 꼽지만, 실제로 만화가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 들어 만화는 대중이 즐기는 예술이자 문화, 무엇보다 대중문화산업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만화의 역사, 문화, 산업 등을 다룬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비평의 양적 팽창과 질적 상승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만화평론가협회와 한국만화학회가 결성되는 등 전문만화비평 집단이 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여전히 예술로서 그 입지가 약한 편이다. 그 이유는 만화의 특성과 고유성에 입각한 독자적인 만화비평이론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1대학에서 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인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만화연구자이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상정은 『만화학의 재구성』을 통해 이른바 ‘만화학’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제1장 「만화연구의 시작점」을 비롯해 제12장 「만화읽기의 특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1장에서 제5장 「만화의 탄생」에서 만화라는 표현형식의 역사적 개념과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제6장 「만화의 특성」부터 제12장까지는 만화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만화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읽어낼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만화(漫畫)’라는 개념과 용어가 지닌 혼란스러움에 대해 지적한다. “만화는 일본어 ‘망가(漫画, まんが)’의 한국식 표현”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망가라는 용어가 ‘카툰, 코믹스, 애니메이션’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만큼 망가를 근원으로 삼은 한국과 중국의 만화도 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화에 조응하는 영어 단어 ‘카툰’의 사용법도 마찬가지다.

만화학의 정립과 연구에서 개념 정의의 필요성과 의미는 무엇일까?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거나, 희곡을 연극으로 제작하거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등 형질전환(transformation)이 이루어질 때 그 명칭도 함께 변화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정지된 무동(無動)의 형식인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을 때조차 이를 그냥 망가, 만화로 호명하는 방식의 혼란스러움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에게도 『만화의 이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acCloud)의 정의, 만화는 “수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미학적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이란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재현의 일반화에 있어서 만화의 특수성을 분리해낼 수 없다. 한 근대적 매체를 몇 천 년 전통의 시각적 표현과 혼동”시킨다는 티에리 그로에스틴(Thierry Groensteen)의 비판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정의는 만화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포괄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경계의 불명확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근대’ 만화를 정의한다.

필자는 앞에서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탄생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이것을 모두 갖춰야 만화에 대한 역사적 정의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연쇄적 칸의 상호의존성을 지닐 것, 문자를 활용하는 이미지 서사일 것, 대중적 전파와 확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간지 규모의 인쇄물에 실릴 것, 말풍선을 가질 것,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근대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표현형식으로서의 만화다. 이는,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태어날 때까지의 오랜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방식이 정착될 때까지라는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107쪽)

영화가 벤야민을 비롯한 동시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고, 적극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달리 어째서 같은 시기에 탄생한 근대 만화는 동시대 지식인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까? 한상정은 영화가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완전히 새로운 도구들, 움직임의 재현이라는 문화적 충격”을 준 것과 달리 만화는 “칸, 글, 그림, 말풍선, 종이 인쇄의 산물인 만화는 하등 새로운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해보면 만화가 지식인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일상 영역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으며, 어떤 기술 변화에도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표현형식이기 때문이다.

한상정은 “문학작품은 의미만이 아니라 문체도 중요하게 다루고, 영화작품도 이야기와 이야기가 전달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이나 배우의 연기를 다루는데, 만화작품도 만화 고유의 특성들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만화학의 정립과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과거와 단호한 결별을 시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학의 재구성』은 만화연구·만화비평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그간 만화비평, 만화연구에서 일종의 ‘클리셰’처럼 반복되던 서술 —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이자 만화평론가이기도 한 프랑시스 라카생이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 불렀다는 것과 같은 동어반복, 만화의 기원을 라스코 동굴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던지 하는 등 — 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런 인식과 적극적 대결을 벌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만화읽기(비평이나 분석)’가 “만화를 그림과 동일시하거나 만화분석을 스토리 분석과 동일시”하는 오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 『만화학의 재구성』이 달성한 성취와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다만, 만화학의 독립선언이 앞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개의 고비를 넘겨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이른바 ‘비평의 죽음’이다. 비평이 살기 위해선 우선 읽어낼 만한 작품이 생산되어야 하고, 그 비평을 진지하게 읽어줄 독자가 필요하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까닭은 단순히 독자적인 만화비평이론이 부족하거나 부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는 일찌감치 대중예술이자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었지만, 비평은 외면되었다. 물론, 오늘날 비평의 죽음은 문학, 건축, 연극 등 전통적인 예술 분야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근대에 탄생하여 애초부터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사진, 만화 등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다.

두 번째는 ‘근대(modern)’와 만화를 접목시켜 정의하려는 시도가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지닌 장점들, 장르적 포괄성과 유연성을 도리어 학문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다. “사진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표현형식은 어느 날 ‘뚝’하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많은 다양한 시도 속에서 탄생은 우연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만화 역시 “탄생 이후 한편으로는 기존 예술의 재현형식을 빌려 쓰고, 다른 한편으로 서서히 자신만의 고유성을 확보”해 나갔다. 만화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고스란히 인정하더라도 ‘이미지를 통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의 역사라는 장대한 인류 서사의 한 축에서 라스코 동굴 벽화, 이집트 벽화, 중세 교회의 십자가의 길(14처) 성화, 불교의 사찰벽화 십우도(十牛圖), 역사를 담은 태피스트리 등 “몇 천 년의 전통을 지닌 그림과 문자의 공존을 통한 표현형식”은 만화의 역사에서 제외할 수 없는 근원적 뿌리이기도 하다. 만화가 지닌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글쓰기와 더불어 창작과 소통의 진입장벽이 가장 낮은 분야라는 점에 있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만화라는 “존재조차 희미했던 이 표현형식”이 “탄생 125주년을 맞은 2021년에도 여전히 건재”하며, “지구적 환란이라는 코로나 시대에도 그 조용하고 끈질긴 존재감”을 드러내며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앞으로도 만화가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다면 그 이유 또한 같을 것이다.

전성원(全盛源, Jeon Sung Won)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주요저서로 『길 위의 독서』,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등이 있다.




‘자리’를 찾는 여행: 김소희, 『자리』(만만한책방, 2020)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리’를 찾는 여행김소희, 『자리』(만만한책방, 2020)

최기현(인천문화재단)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된 지 8개월이 지났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잦은 실업과 고용불안정으로 지속적인 창작활동이 어려운 예술인을 위해 2020년 12월 10일부터 실시되었다. 적용대상은 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을 체결한 예술인이다. 일이 없는 기간에는 최대 270일 동안 실업급여를, 출산했을 때는 90일간 출산전후급여를 받을 수 있다. 예술인이 하나의 예술 활동을 마치고 다음 활동을 하기 전까지 예술인 고용보험은 최소한의 생활을 지원한다.

예술인들은 대체로 예술인 고용보험의 시행을 환영한다. 반면 계약한 예술인의 소득과 보험료를 일일이 계산해서 신고하는 것에 번거로움을 토로하는 단체 대표자도 있다. 일부 예술인은 기존에 떼던 사업소득, 기타소득 외에 추가로 납부하는 고용보험료를 불필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을 위한 제도임에도 이해당사자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김소희, 『자리』 (만만한책방, 2020)

김소희 작가의 만화 『자리』는 미대를 졸업한 두 명의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정이다. 송이와 순이는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위해 함께 지낼 집을 구하러 다닌다. 처음 이사한 집은 예전에 목욕탕으로 사용한 지하 공간이다. 햇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고 겨울에는 한기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 계속 살다가는 심각한 병에 걸릴 것 같아 이사를 결심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집은 일반 주택의 다락방이다. 지붕 아래에 불필요한 공간이 있긴 하지만 목욕탕 집과는 달리 햇빛도 잘 들어온다. 두 사람은 가성비 좋은 집을 구했다고 만족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렴한 이유가 있다. 바닥이 뚫려있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다. 다시 새로운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7년간 10번의 이사를 하며 그들의 ‘자리’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류머티즘에서 면역질환까지 크고 작은 병을 얻는다.

자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먼저 물리적 자리와 사회적 자리를 뜻한다. 물리적 자리는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 햇빛이 들어와야 한다. 여름과 겨울에 너무 덥거나 춥지 않아야 한다. 개인 프라이버시도 보호되어야 한다. 방음이 잘되고 교통도 편리한 곳이면 더 좋다. 한마디로 생활의 안정성이 필수적인 요소다.

『자리』의 한 장면 (만만한책방, 2020)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지하나 반지하처럼 햇빛을 보기 어렵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집으로만 이사한다. 이들이 가려고 한 집 중에는 화장실이 방 한가운데 버젓이 있는 집도 있었다. 두 사람은 왜 햇빛이 잘 들면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을 구하지 않았을까? 자리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돈이다. 돈의 유무가 물리적인 자리를 결정한다. 돈이 충분하지 않은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지하나 반지하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 추운 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들은 작가 지망생이다. 사회적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고 수입은 안정적이지 않다. 작가로 데뷔해서 웹툰을 연재하거나 그림을 팔아야 일정한 수입이 생기지만 아직은 아니다. 사회적 자리에 도달하지 못해 발생하는 돈의 결핍은 물리적 자리에 영향을 미친다. 물리적 자리가 불편하면 그만큼 사회적인 자리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작가가 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김소희 작가는 전작 『반달』에서 어두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동심의 눈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바 있다. 안정적이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듯 이번 작품 『자리』에서도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어두운 편이다. 어둡지만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노란색이나 주황색, 하늘색 등 작은 포인트가 만화 곳곳에 담겨있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마치 두 사람의 주인공이 자리를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욕심은 무한하고 재화는 한정적이다. 경제학에 나오는 희소성의 원칙이다. 안정적인 자리는 한정되어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자리는 존재할까? 아쉽지만 답은 ‘아니오’다. 누군가는 원치 않는 결핍에 처할 수도 있다. 모두가 만족하는 안정적인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예술인 긴급 생계지원’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일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코로나19 이후 다른 형태의 재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하나의 예술 활동이 성공하지 않아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는 최소한의 시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위한 버팀목으로 예술인 고용보험이 예술 현장에 안착하길 기대한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




시공(時空)을 넘어 한판으로 어우러지다: 〈판소리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시공(時空)을 넘어 한판으로 어우러지다<판소리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이한수(인성여자고등학교 교사)

6월 4일부터 한 달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학산소극장에서 <판소리 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공연이 진행되었다. 판소리 완창(完唱)은 전통 국악 분야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고 경지가 높은 연희 갈래라 소리꾼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작업이다. 소리꾼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판소리 완청(完聽)은 사설의 이해도 만만치 않고 공연 시간이 장장 6시간에 달해 참 고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춘향가 완청’은 청중들이 보다 수월하게 완창 공연을 듣고 즐길 수 있도록 전문가 해설을 덧붙여 4회에 걸쳐 진행함으로써 소리 듣는 이들이 귀명창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판소리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매주 금요일 총4회 공연, 인천학산소극장, 2021.6.4.~6.25. ⓒ사단법인 우리소리

사설이 어려워 깊이 빠져들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판소리는 미학적으로 다양한 미적 범주를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오페라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폭넓은 음정을 구사하여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흡입력을 갖고 있다. 막힘 없는 너털웃음과 함께 부조리를 꼬집어주는 풍자미, 비극적 긴장에 빠지게 하는 비장미, 위대한 정신에 고개 숙이게 하는 숭고미 등 다양한 아름다움이 극적으로 구성되며, 한(恨)이 서린 슬픔으로 애간장이 녹는 계면조(界面調)와 장엄한 풍모에 고개가 수그러드는 우조(羽調)의 음정에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이 어우러져 소리꾼과 청중이 하나가 되는 우리 전통 문화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었다. 특히 김경아 명창의 상성(고음)은 가늘지 않고 두툼하며 하성(저음) 또한 기묘하여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다. 서양 성악은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로 음역을 나누어 각기 전공 영역을 나눠 맡는데 판소리 소리꾼은 이 모든 음역을 혼자 다 감당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춘향가’를 해설해 주는 유영대 교수 (사진: 류재형)

판소리는 한민족 구비문학의 유산으로서 우리 전통문화의 위대한 가치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극예술은 고대 희랍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바탕으로 ‘제4의 벽’ 개념이 정립되어 무대와 객석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근대에까지 이어지다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 독일의 시인·극작가)의 서사극 이론에 의해 혁파되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판소리 마당은 소리꾼과 청중이 한데 어우러지는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서양의 전통 극예술은 작가가 극적 결정력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우리 판소리는 예로부터 1청중, 2고수, 3명창의 전통이 있어 쌍방향 소통이 가능했으며 청중을 ‘좌상객(座上客)’이라 칭했듯이 객석의 추임새가 소리꾼의 더늠(소리꾼의 독창적 창법)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명창과 좌상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판소리 한마당 전통은 일개인의 창작물이 바탕이 되는 서구의 극예술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리제 전통이다. 김경아 명창의 춘향가는 ‘김세종제’를 이어받았고 심청가는 ‘강산제’를 이어받았다. 김세종제는 동편제 유파이고 강산제는 서편제 유파인데 어떻게 같이 물려받게 되었을까. 강산제는 박유전의 고향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서편제의 시조이다. 서편제는 애절하고 슬픈 음조인 계면조를 특징으로 하는데 시조 박유전에 의해 계보가 탄생했으며 잘 알려진 조상현, 성우향은 이 계보에 속한다. 김경아 명창의 심청가는 강산제 유파를 계승한 것으로 서편제의 미학을 잘 살려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경아 명창과 홍성복 고수, 2021년 6월 25일 공연, 계면조 대목 (사진: 류재형)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갈래이다. 김세종은 신재효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고 신재효는 동편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서편제가 슬픈 계면조가 특징이라면 동편제는 통성으로 내는 우조가 뛰어나다. 특히 정응민의 춘향가는 음악적 감성이 탁월한 귀명창들이 매료될 만큼 극히 어려운 소리라 어전소리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한양 궁궐에서 공연할 만큼 양반층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사설도 고사성어나 한시 구절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양반 계층 선비들이 많이 즐겼다고 한다. 김경아 명창은 정응민의 제자 성우향에게 소리를 배워 보성소리의 계통을 이었으며 스승의 소리 사설을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어려운 한문투성이의 사설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김세종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문맥에 맞지 않는 대목은 일일이 수정하여 창본의 완성도를 높였고 주석을 세밀하게 달아 『김세종제 판소리 춘향가』, 『강산제 심청가, 유관순 열사가』 창본을 출판해서 후학들의 공부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김경아 명창과 고정훈 고수, 2021년 6월 18일 공연, 우조 대목 (사진: 류재형)

김경아 명창의 스승인 성우향 선생은 김세종제 계보의 김찬업, 정응민 명창의 소리를 계승한 제자이다. 정응민 명창은 서편제와 동편제를 아우른 보성소리의 창시자로 큰아버지 정재근에게 박유전제(서편제)의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배웠고 김찬업에게 김세종제(동편제)의 춘향가를 배웠다. 따라서 김경아 명창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보성소리의 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완청 공연을 감상하면서 김경아 명창의 사설에 난해한 한자어가 많아 이해가 어려워 다른 소리제 창본을 비교 감상해 보면서 우리 판소리의 유구한 전통에 대해 다시금 깊이 감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김경아 명창의 이별가 대목에서는 춘향이 이별의 아픔을 토로할 때조차 한자어를 써서 감정을 절제하지만 이화중선의 같은 대목에서는 목매달아 죽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통곡을 한다. 이 대목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우리 소리의 더늠과 소리제의 다양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두각(馬頭角) 허거든 오시랴오? 오두백(烏頭白) 허거든 오시랴오? 운종용(雲從龍) 풍종호(風從虎)라. 용 가는 디는 구름가고, 범이 가는 디는 바람이 가니, 금일송군(今日送君) 임 가신 곳 백년소첩(百年小妾) 나도 가지.” (김경아, 『김세종제 춘향가』 창본)

“도련님은 올라가면 나는 남원 땅으 뚝 떨어져서 뉘를 믿고 사잔 말이오? 저 건네 늘어진 양류(楊柳) 깁수건을 풀어내야 한 끝은 나무 끝끝터리 매고 또 한 끝은 내 목으 짬매야 디령디령 뚝 떨어져 나를 쥑이고 가시면 갔지 살려두고는 못 가리다.” (이화중선, 『춘향가』 창본)

이번 완청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위대한 미학에 절감하게 해 준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한다.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매회 객석을 가득 메운 귀명창들의 열정은 완청(完聽) 공연 취지에 걸맞았고 어려운 옛말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설 어려운 대목이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해설해 준 유영대 교수님, 명창의 소리에 잘 어울리는 장단으로 귀명창의 기운을 돋워준 홍석복, 고정훈 고수님들께 큰 은혜를 입었다. 신명 나는 추임새로 소리판을 완성시킨, 우리 소리의 전통을 이어줄 후학들께서 우리 소리판의 진미(眞美)임을 거듭 되새기게 된다.

이한수(李漢壽, Lee hansu)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인천 인성여자고등학교 교사
교재 『최소한의 동양고전』, 시집 『경계의 미학』 출판
(사)우리소리 이사, (사)인천교육연구소 이사
참고: 이한수의 공감 스토리텔링 블로그 https://blog.daum.net/2hansu




곁에 있다는 것, 곁을 만들어 간다는 것: 김중미,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곁에 있다는 것, 곁을 만들어 간다는 것김중미,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강수환(문학평론가)

김중미,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젠가 대학의 한 강의에서 ‘학벌주의’를 주제로 학생들 간의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다. 초반에는 제법 열띤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말이 모두 소진되자 학벌주의 반대를 표방했던 학생들의 말은 점차 줄기 시작했고 토론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급히 기울었다. 보아하니 토론의 구색을 갖추려고 형식상의 반대 의견을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 자리의 학생 다수는 수능성적을 필두로 대학을 서열화하고 그에 따라 기회나 사회적 자원을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일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험을 잘 봤으니까, 그만큼 노력한 거니까. 교육 기회의 불평등부터 채용 시의 차별 문제까지, 사안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여러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학벌주의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시험 이외에 ‘공정’을 담보하는 방안들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없을 뿐이었다. 마침 그 학생들은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이어진 촛불의 현장에 청소년으로서 참여한 경험을 공유했다. 김중미의 『곁에 있다는 것』의 주인공 지우, 강, 여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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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곁에 있다는 것』은 인천 ‘은강동’에서 자란 세 명의 청소년 지우, 강, 여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은강은 작가의 전작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했던 동인천과 만석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가상의 지명으로, 그 명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으로부터 빌린 것이다. 두 작품 사이에는 무려 40여 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나 작가는 은강이라는 지명을 통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충분히 받아안지 못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은강에 관해 그리고 그 안에서의 삶과 죽음에 관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고3이 된 지우, 강, 여울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배꼽 친구’로 그들의 처지는 조금씩 다르다. 지우의 꿈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은강방직 해고 노동자로 일생을 투쟁해 온 이모할머니와 시민운동가인 부모 곁에서 자란 지우는, 자신이 보고 들은 ‘가난의 생태계’를 틈틈이 기록했다.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226쪽)라는 지우의 말처럼 은강에는 이미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새로운 얼굴을 한 가난들이 날마다 흘러들었다. 독거노인, 발달장애인, 국제가정, 이주노동자, 보호 종료 아동 등등, 이들은 모두 지우의 빌라에 거주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조명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목소리와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서, 지우는 소설을 쓴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강이는 쉴새 없이 일한다. 왕래조차 없는 외삼촌의 존재를 이유로 기초 생활 수급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치킨을 튀기지만 강이의 속은 늘 헛헛하다. 강이의 마음에는 깊게 팬 자리가 하나 있다. ‘조손 가정’이니 ‘결손 가정’이니, 어려서부터 오래도록 강이의 마음 안팎을 괴롭혀 온 결핍과 상실의 깊이만큼, 딱 그만큼의 우물이 하나 있다. 하나 도무지 메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강이의 마음의 우물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이는 강이가 “나보다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던 어머니의 “소박한 꿈”(174쪽)을 잇겠다는 꿈을 새롭게 꾸면서부터다.

여울이의 꿈은 겉보기에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평범한 사람, 딱 중간쯤으로 사는 게 목표다.”(231쪽) 은강동을 벗어나 평범하게 살기 위해 여울이는 끊임없이 공부한다. 하지만 겨우 한 차례 전교 1등에서 2등으로 내려앉았을 뿐인데 여울이보다 주위에서 더 난리인 것을 보면 여울이가 기울이는 노력은 결코 평범하지도, 딱 중간쯤도 아니다. 도대체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은 일면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강이네처럼 서류를 통해 충분히 증명하지 못한 가난은 가난으로 인정조차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난은 낮은 데로 고이므로, 자신이 바라보는 곳과 서 있는 곳 사이의 낙차만큼 우리는 가난을 느낀다. 여울이가 자신의 아파트 이름을 가난의 징표로 여기고 부끄러워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강이라는 가난의 토양만으로는 그들의 연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강이네조차 보육원에서 자란 정민의 눈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가정집 애”(125쪽)에 불과했듯이, 가난은 오히려 서로를 상대화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지 공통의 조건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공동의 목표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이야기’다. 이들은 은강동 주민들의 가난한 삶을 ‘관광 자원화’하겠다는 구청의 행정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을 허물고 파괴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생태계’를 무너뜨렸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삶을 ‘체험’의 일부로 오락화함으로써 망가뜨리려 한다. 이러한 폭력에 맞서 자신들의 존엄과 생태계를 지켜내겠다는 공동의 의지, 그것이 서로 다른 꿈을 꾸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은강 주민과의 연대를 통해 ‘쪽방 체험관’을 막아낸 이들은 소설의 끝에서, 수많은 곁이 모여 촛불을 밝히던 광화문으로 향한다. ‘곁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은강을 지금 이곳에 호출한 김중미는 한동안 우리에게 잊혔던, 하지만 그간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던 질문을 새삼 던지고 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가난의 상대화를 넘어서, 진정으로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우리는 어떻게 공동의 곁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의 질문이 웅숭깊은 것은 오랜 시간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가난한 이들의 애틋한 삶의 증언들을 차곡차곡 담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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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지우, 강, 여울은 20대 중반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들은 아마도 특히 여울이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을 것이다. ‘공정’을 말하는 이들의 생각을 향해 어른들은 이기주의니, 경쟁주의니 하는 말로 쉽게 꾸짖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현장에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더 나은 사회를 요구했던 그곳에도 그들은 지우, 강, 여울의 모습으로 자리했다. 지금은 어떨까. 혹시 공정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말처럼 떠오른 이유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새롭게 ‘곁’을 창안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은 아닐까. 우리가 ‘곁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물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수환(姜受芄 Kang, Soohwan)

아동문학평론가, 문화연구자. xysnp@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