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더 성장하기 위한 <바로 그 지원, 홈커밍데이!>

청년이 정책의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사회에서는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봇물 터지듯 나타나고 있다. 5년 전부터 청년예술인을 대상으로 진행되어 온 <바로 그 지원> 사업. 현재 청년정책이 화두가 되는 시점에서 <바로 그 지원> 사업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청년예술인사업 <바로 그 지원>의 지원방식과 개선점 등 바로 그 지원을 거쳐 간 이들의 생생한 의견을 듣기 위해 지난 19일 칠통마당에서 집담회를 가졌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에 참여했던 젊은 창작자, 프로그래머 등 여러 관계자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석근, 박혜민 작가가 집담회를 이끌었다.


<바로 그  지원> 홈커밍데이!

<바로 그 지원>에 대한 적절한 방법론?
‘지속적인 관계 맺기’

박혜민) 사전질문에 답변을 받았을 때 <바로 그 지원>에 대한 좋았던 점이 세 가지 키워드가 나왔는데요. 첫 번째는 프레젠테이션하고 다른 사람의 방식을 볼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로는 프로그래머 제도가 있다는 점, 세 번째는 프레젠테이션과 프로그래머 만남을 통해서 네트워크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지원>의 다양한 방법론에 관해서 얘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J) 2015년 처음 <바로 그  지원사업>을 만들 때 인천문화재단과 인천 청년예술가들이 사업명부터 기획까지 세심하게 참여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민관협업사업으로 바라보고, 민과 관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재단이 핵심가치로 부여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프로그래머가 바뀌어도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한, 심의제도와 관련해서 말씀드린다면, 사실 초기 바로 그 지원 심의제도는 문화충격에 가까웠어요. 소액다건으로 비슷한 형식을 취했지만, 지원자가 서류심사 이전에 프로그래머들을 만나면서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죠. 지원자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언어화하지 못해도 같이 언어화할 수 있는 시간이 분명 존재했던 것 같아요. 심의제도에 대해서 초기에 고민했던 것처럼 다른 방식을 고민해 보고 재단도 다채로운 심의를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석근) 문화자치, 거버넌스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러한 부분에 동의하고요, 사업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계속 지역의 청년 예술가와 같이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같은 자리가 바로 인수인계 자리라고 생각해요. 같이 만들어야 하는 방식이 강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K) 저도 프레젠테이션 대신 다른 방식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어요. 극단적으로는 프로그래머가 피티를 대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도 해봐요. 제집이 서울이라서 여기 오기 전에는 인천을 잘 몰랐지만, 바로 그 지원 프로그래머를 통해서 주변 인천을 알게 되는 것 같고 외부 사람에게 추천해주는 것 같아요.

H) 2016년 바로 그 시장의 참여자로서 심사를 받으면 그분들이 심사위원보다는 동료의 느낌이 강했어요. 서로 조언을 주고받으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 작업을 할 때 합의를 이끌 수 있었고요. 이러한 네트워크가 지속해서 연결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지원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박혜민) 사실 바로 그 지원의 강점으로 ‘네트워크’를 사전질문지에 작성해주셨어요. 프로그래머를 만나서 얘기하는 것들, 프레젠테이션때 자유롭게 질문이 오가고 끝나고 네트워크 파티를 하는 것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방식이 지속적인 관계 맺기 위한 장치였는데 더 나아가서 어떠한 방식들이 있을까요?

H) 오늘과 같은 홈 커밍 데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올해와 내년, 초장기에는 어떠했는지 되짚어보기도 하고요. 나중에 홈 커밍 데이를 다시 한다면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파티 같은 분위기였으면 좋겠어요.

A) 저도 바로 그 시장에 참여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심의가 굉장히 즐거웠어요. 여러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었죠. 심의 자체가 참여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문화로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의든 결과 보고든 참여자가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지원의 강점이었는데, 조금 딱딱해진 것 같아 아쉬워요.

2015~2018년도까지 진행된 ‘바로 그 지원’사업,
과연 내가 생각하고 우리가 바라는 바로 그 지원은 무엇일까?

<바로 그 지원>의 문제?
공간

박혜민) <바로 그 지원> 참여하셨던 분들이 가장 어려웠던 문제가 ‘공간 문제’예요. 절대적으로 공간 수가 부족할 수도 있고, 공간을 찾는 네트워크가 부족할 수 있고요. 제도적으로 바로 그 지원에서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공간의 형태가 정해지잖아요. 그랬을 때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석근) 작품을 전시하고 선보일 공간이 필요한데, 인천 지역으로 한정되니 고민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청년예술인정책에 많은 예산이 쏟아지면 공간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 바로 그 지원 사업이 시작되고 해가 거듭 지나면서 우리가 맞닥뜨린 한계와 문제가 아닐까?

H) 공간이 없다기보다는 공간의 정보가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프로그램 차원에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U) 공간에 한시적으로 임대해서 전시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용일시장에 “임시계약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요. 부동산중개인과 동행해서 전담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바로 그 지원에 공유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분들한테 실시간으로 연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C) 공간에 대한 정보는 재단 홈페이지 자료실에 연감으로 정리되어 있어요. 이것을 작가님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여기에 업데이트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공간 소개 정보들이 꽤 많이 나와 있어요.

H) 정리가 되어 있어도 지원에 선정이 되었을 때, 수십 개의 공간에 전화해서 대관이 가능한지 물어보아야 하는 일들을 거쳐야 하잖아요.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C) 원래 그러한 거들은 프로그래머가 도와줘야 하잖아요.

오석근) 프로그래머 역할이 초기에는 사전준비를 도와주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케어를 해야 하는 의무는 사실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D) 사실 프로그래머에게 있어 많은 작가를 만나 상의하는 과정이 즐겁기도 하지만 순간순간이 고된 작업이기도 해요. 우선 예산이 넉넉하게 잡히지도 않다 보니, 프로그래머가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래머가 빠지게 되는 것 같다.

C) 예산 범위 안에서 복덕방이나 부동산 역할을 하는 안내시스템이 바로 그 지원에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J) 서울보다 인천에는 젊은 공연 예술 창작자가 많지는 않아요.2,3년하고 젊은 창작자들이 다 나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재미있는 판을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작품을 지원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메리트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공간과 지원을 매개할 때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하거나, 아니면 프로그래머와 기획자가 함께 한 공간에서 전시와 공연을 묶는 작업을 진행한다면 서로에게 메리트가 되지 않을까요.

L) 연출님의 문제 제기에 동의해요. 다들 아시겠지만, 청년지원사업이 봇물이 터졌거든요. 액수도 상당히 크고요. 그런 문제점이 있는 상황에서 지원제도가 조금 더 다른 질감을 찾으려면, 현재 작품지원이나 결과지원에 대한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너무 큰 지원이 많기 때문에 낯선 등장이 조금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요.

청년예술가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언어화되지 않은 작업에 대한 갈증

J) 청년 예술가들이 겪는 문제는 나의 작업이 언어화되지 않는 거예요. 언어화는 권위를 갖고, 그 권위는 지원제도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동료들의 작업을 언어화시키는 것, 언어화되지 않은 작업을 우리 스스로가 언어화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작업을 마치고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물론 자료집이 언어화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권위 있는 비평가나 큐레이터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언어로 만들 수 있는 언어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인천문화재단에는 이미 플랫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한 것들을 좀 더 활용하면 좋겠고, 만약 이러한 플랫폼이 자리를 잡으면 인천에서 공연하는 것에 메리트도 생길 것 같아요.

E) 저희는 월간 마니또라는 페이지를 만들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 작업을 칭송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어요. 사실, 짧게 진행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재밌었어요. 친한 동료 작가들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온라인 플랫폼에서 그러한 작업이 만들어지다 보니 찾아서 보게 되고 관심을 갖더라고요. 우리끼리 이러한 방식을 통해 소화하면서, 아카이빙 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어요.

F) 저도 작업을 발표하고 비평가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작업할 때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은 동료들의 피드백이나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이었어요. 앉아계시는 작가 중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도 있지만, 직접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죠.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사적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확실히 피드백할 수 있다면, 글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좋지 않을까요?

K) 현실적으로 보면, 누군가를 소개하는 경우와 달리 자기 스스로 작품을 올리면 얼마나 많은 피드백이 올까요? 자율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면 누군가는 할 거라고 생각하겠죠. 결국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도맡아서 소개하고, 지속해서 끌고 가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남기 힘들죠.

H) 작년에 인천 청년 레지던시 활동을 할 때, 인천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어요. 바로 그 지원에도 그 매체와 연계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우리에게 글을 쓰는 것은 부담일 수도 있거든요. 리뷰하는 것이 대단한 것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SNS에 간단히 글을 남길 수 있는 것. 깊이 있는 평은 매체로 연결하면 좋지 않을까요?

박혜민) 12명의 친구가 모여서 시작한 마니또를 바로 그 지원에 도입하면 강압성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프로그램화하거나 강압성 없이 자율성을 준다면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는데요. 비평플랫폼이 필요하다면, 현실적으로 바로 그 지원에 도입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Z) 2016년도에 바로 그 지원을 참여했고 그 이후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모르는 부분들이 있었요. 이전 바로 그 지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라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니또와 같이 간접적으로도 참여할 수 있고, 바로 그 지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는 플랫폼이요. 한 번 거쳐 간 사람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어요.

오석근) 쉽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한 줄 평이라도 멋지게 남기면 되지 않을까요. 언어화가 연습이 필요한데, 우리가 아직 준비가 안 돼서 그래요. 재밌게 풀어나갈 수 있는데. 시스템을 무겁지 않게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J) 저는 인천에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재밌는데, 이 재밌는 사람들이 결과 발표회 외에서도 재밌는 것을 생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언어화일 것 같아요. 비록 그 언어가 비평은 아니더라도 말이죠. 바로 그 지원에 참여하는 분들이 제 공연을 보고 비평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자율적으로 작업을 보고 본인의 언어로 언어화하는 것이죠. 그게 글일 수도 있고요. 어떤 분은 제 연극을 보고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고, 음악으로 만들 수도 있겠죠. 마음은 좀 더 치열하게 작업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인천이 더 재미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요.

5년이 지난 <바로 그 지원>,
‘낯선 등장’을 환영하고 ‘낯선 작업’을 응원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2019년도 사업 담당자) 청년 바로 그 지원이 40대를 이하로 제한을 두고 있지만, 젊은 청년들을 어떻게 초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낯선 등장’의 키워드를 어떻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어요. 바로 그 지원이 5년이 지났어요. 새로운 청년예술가들을 어떻게 발굴하고 기회를 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다음 청년들의 기획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오석근) 저는 공평하게 바로 그 지원에서 신진작가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선상에 놓지 않는 것이죠. 다만, 그분들이 넘어오고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J) 이것은 바로 그 지원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고, 인천문화재단에서 전체적으로 앞으로 고민하셔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왜 청년예술가들이 인천에 남아있지 않는가. 우리가 이 상황을 인식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는 지원제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같고, 다른 방식의 담론을 통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K) 지역에 관심을 가지려면, 그 지역을 경험해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이외에도 인천에서 머무를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작업을 한다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겠죠. 이 부분에 대해 문화재단이든 시든 지속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들이 이주하고, 씨를 뿌리면서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 또 다른 민간부문이나 조합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인천에는 그것이 없는 것 같아요.

J) 저는 인천에 살아야지 인천에 남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인천에 관심이 머물러 있거나, 동료들과의 작업을 인천에서 진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천에 남을 수 있는 플랫폼이나 판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은 잠시 거쳐 가는 플랫폼이나 지원제도가 대부분이에요. 그러한 지점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지원이 아닌 인천문화재단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석근) 바로 그 지원을 넘어 생태적 요소에서 부족한 부분들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거주하는 공간이 생기고 머무를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기고 바로 그 지원 외에 그런 의견들을 모아서 미팅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박혜민) 저도 인천 출신은 아니죠.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하고 동료작가들을 만나 인천에 있게 되었죠. 동료 프로그래머를 만난 것은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그래머들끼리 매달 보니까 네트워크가 생겨서 너무 좋았었던 것 같고요. 저는 5년이 지나면, 바로 그 지원에서 바라보는 청년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바로 그 지원을 경험한 작가들이 다음연도와 그다음 해에 프로그래머가 된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어요

B) 낯선 등장과 낯익은 등장의 구별이 필요한 것 같아요. 2015년 처음에는 프로그래머 작가들이 가장 희망했던 것이 새로운 작가를 찾는 것이었고, 그들과 동료 관계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바로 그 지원을 통해 원하는 욕구가 다른 것 같아요. 누군가는 정말 낯선 등장을 원하고, 누군가는 전문가에게 컨설팅을 받고 싶은 각자의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2016년도 첫해에 동료작가들이 인천에 모이려는 목적은 있었으니깐 지금은 등장이라는 것이 모호하기 때문에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J) 인천문화재단과 바로 그 지원의 틀을 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그 지원은 기존의 지원체계, 지원 시장을 흔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지점에서 정말 작은 단위를 실험해보거나, 생경한 작업을 실험해보는 거죠. 정말 첫 등장. 우리가 이런 것에 지원하겠다는 미션을 부여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지원하겠죠.

R) 며칠 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당황했던 질문이 “활동이 많았네요?”라고 묻더니, 그 다음에 “청년이 아니네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제가 청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A) 낯익은 사람들도 낯선 작업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지원이면 좋겠어요. 낯선 사람이 가서 작업할 수 있지만, 낯익은 사람도 가끔은 낯선 무엇인가를 하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바로 그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은 더 실험적이고 재기발랄한 작업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곳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석근) 저도 과거에 했던 지원사업이 일 년에 한 번의 기회이고, 올해 떨어지면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의 시간이었어요. 그것을 깨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지원>이었고요. 우리가 현장성을 중요시하면서 바로바로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실천할 수 있도록 바로 그 지원을 기획했던 부분도 있어요. 낯선 등장도 환영하고, 낯익은 사람들의 낯선 작업도 응원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바꿔나가는 것들이 중요할 것 같아요. 긴 시간 진지하게 심도 있는 토의 이야기 나눠서 좋았습니다. 올해도 또 즐겁게 만나요.

집담회 진행 / 예술지원팀 박소현
집담회 정리 / 정책연구팀 이진솔
영상 / 장유하 시민기자단




고려인, 그들이 귀환(歸還)하다

고려인, 그들이 귀환하였다.

할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갔대요. 함경도에서 할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연해주로 갔고요.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거 찾으러 갔대요. 연해주에서 아버지 낳고 사는데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어서 거기에 살았지요. 저도 1956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다시 러시아로 갔는데 2년 전에 딸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와서 나는 1년 전에 손녀 봐주러 왔어요. 할아버지 고향에 왔으니 이제 여기서 살아야지. (김 할머니, 2019.05)

김 할머니의 구술에서처럼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진행형이다.
고려인의 이주 흔적은 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구한말 13세대가 빈곤과 굶주림, 그리고 착취를 피하여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작된 고려인이 최근 우리사회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이들은 허허벌판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대한의 사람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땅으로 만든 후손들이다. 예컨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크라이나 등에 거주하던 한민족이다.

 

출처: 우수리강(江) 유역의 최초의 고려인(한국이민사박물관, 2014)

고려인동포가 한국 내에서 동포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1999년 9월 제정)이 개정된 2004년 3월 이후부터이다. 특히 2007년 H2 비자의 시행으로 고려인동포의 한국행 노동이주가 매우 증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CIS지역의 경제 불황과 한국기업의 진출, 한국의 대중문화 유입,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통해 ‘동포로서의 기대’ 감정이 한국을 찾게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명 고려인이라 불리는 러시아・CIS 동포들은 한국인과 동일한 성씨를 가졌고 외모 또한 비슷한 고려인도 있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타민족과 결혼하여 출생한 외모가 다른 고려인도 있다.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할 것이라 인식한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어를 상실한 지 오래고 한국인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이산가족이 되면서까지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요소로는 출신국의 요소이다. 그 배경에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진행된 이슬람 민족주의의 부흥, 주류민족 중심의 언어정책, 소수민족에 대한 취업과 교육 기회의 제한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CIS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영향, 한국 정부와 NGO단체 등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모국방문 기회 증가, K-POP 등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기회 증가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에 대한 기대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려인 사회에 공유되는 한국의 특별한 의미, 즉, 고려인들에게 한국이 연해주와 더불어 역사적 뿌리와 사회적 연고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인의 한국행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인이 한국행을 택하는 다양한 배경요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동기는 취업을 위한 경제적 요인이다.

<표 1> 재외동포 자격별 체류 현황
 (2019. 02. 28. 현재, 단위 : 명)
출처: 법무부(2019)

위의 표와 같이 2019 출입국 통계에 의하면 약 50만 고려인동포 중 현재 국내 거소 등록된 고려인동포는 9만여 명에 달한다. 이에 동반 자녀를 포함하면 약 10만 명 이상이 체류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국내의 고려인동포 500명 이상 집거지를 이루며 거주하는 도시는 안산을 비롯하여 아산, 천안, 인천, 광주, 경주 등 16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중 안산에 9천여 명, 인천에 약 4천 5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법무부, 2019).
인천의 경우 최근 2,3년 사이에 어린 자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들어오는 고려인동포가 크게 증가하였다. 2018년 연수구청의 통계에 의하면 연수구에 거주하는 고려인동포는 약 4,058명으로 이 중 70%가 넘는 3,146명이 연수구 함박마을 일대에 거주한다. 이는 함박마을 전체 주민의 약 46%를 차지하는 숫자로 국내 최대 고려인동포 거주 밀집지역이 되었다. 이는 최근 2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며, 지금도 매년 500명 정도가 증가하는 추세라 한다. 이로 인해 연수구 함박마을을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박마을이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할 정도로 고려인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요인은 보증금이 필요 없는 작은 ‘원룸’의 저렴한 집값과 인근의 공단의 접근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함박마을은 외국인이 몰려들자 상가를 원룸으로 개조하여 무보증 월세로 임대하고 있다. 이주 초기 어려운 형편으로 생계를 꾸려야하는 고려인동포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특히 인천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동포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식품점은 물론이고 노점상에서부터 300석의 예식홀을 갖춘 대형 레스토랑까지 있어 한국어를 모르는 고려인이라 할지라도 생활하는 데 커다란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함박마을에서 집거지를 이루며 사는 것은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에게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단순히 상호부조를 넘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고려인동포마을 형성과 성장은 함박마을의 낙후된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예컨대 지역사회가 게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인 주민과 지역 주민 간의 마찰과 갈등,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지역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간에 갈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려인동포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주하여 살 집과 자녀들의 학교 현황, 일할 수 있는 곳 등을 문의하고 입국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들은 건설 현장이나 인근의 공단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고려인동포라 하여도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사회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김포나 이천, 강화 등 먼 거리의 일용직으로 일하느라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들이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다.
현재 함박마을 인근의 초등학교에는 러시아, CIS지역에서 태어나 생활하다 한국으로 노동 이주를 택한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온 약 2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학교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고려인 차세대의 건강한 적응을 위해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를 채용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고려인 차세대들은 차별과 무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동포 학부모들은 온종일 힘든 노동일과 미숙한 한국어 탓에 자녀들의 한국학교 생활 적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공장에서 돌아온 저녁 9시 이후에 한글을 배우고 싶지만 야학을 운영하는 곳이 없어 그마저도 어려운 현실이다.
고려인 4세는 다문화가정 자녀들과 달리 지역아동센터 등을 이용할 자격조차 없어 돌봄 등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려인 자녀 영유아는 보육료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가정 보육을 직접 도맡아서 하는 가정도 있다. 보육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보육 기관과 소통의 문제에 따른 것도 존재한다. 초등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보호자 없이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고려인 영유아 자녀와 초, 중등 학생, 그리고 부모들까지 학교와 가정을 연결해주는 방과후교실과 보육시설, 그리고 고려인 성인을 위한 성인 한글 야학이 절실한 실정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잊고 있었던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내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견인한 고려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회자하고 있다. 지난 4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고려인 1세대는 모두 독립유공자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낸 고려인에 대한 경의의 표현도 포함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러시아로 통하는 철도가 연결되고, 북한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 고향을 북한에 둔 고려인들의 쓰임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고려인동포를 단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귀환자’로 맞이할 때가 되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동포는 단순히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조상의 나라, 내 조국에서 정착하려는 정주(定住)를 목적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역주민으로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고려인동포와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문화‧자활지원 프로그램 운영과 복지 네트워크 구축 등 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여 이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글 · 사진 / 박봉수(朴奉秀, Park Bong Su)
교육학박사, 디아스포라연구소 소장,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원장




지역+문화( )기획

지역에서 공연장을 짓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면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있다. 초기에는 지역주민들이 일상에서 접하지 못했던 예술 장르를 경험하고, 결혼식이나 환갑잔치처럼 생활에 필요한 문화적인 행사들을 소화할 수 있는 가변형 중극장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곧 이왕 짓는 거 천석 대극장은 되어야 않겠냐는 의견이 등장하고, 어느새 프로그램의 수준도 ‘LG아트센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를 따른다. 그리고 나면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지역의 오페라단이 등장해서 측무대와 플라잉타워를 갖춘 본격적인 오페라 공연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한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오페라를 일 년에 한 편도 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불과 한 시간 거리에 훌륭한 오페라 극장이 대도시에 있는데도 ‘우리 지역 주민들도 집 앞에서 고급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따라 이상한 큰 극장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는다.

공연장뿐만 아니다. 지역의 축제도, 관광 콘텐츠도, 교육 프로그램도 지역의 필요에서 논의가 시작되는 듯하지만, 곧 ‘킬러콘텐츠’를 찾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 킬러콘텐츠는 지역의 남녀노소와 다른 지역의 관광객은 물론이고 외국인 여행자까지 단칼에 베일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 ‘차별성’까지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기획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결국 서울과 유사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조금 더 좋지 않은 결과가 뒤따른다.

우리는 삼선짜장이란 단어를 들으면 그냥 짜장면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보다 머릿속에 더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지역문화기획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그냥 문화기획보다도 구체적이지 않다. 우리 머릿속에 지역은 너무 크고, 희미하며, 많은 욕망이 담겨있다. 삼선짜장의 시원함도, 사천짜장의 개운함도, 유니짜장의 고소함도 포기할 수 없어서, 지역문화가 ‘춘장짜장’처럼 의미 없는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문화기획은 그러한 짜장들의 장점을 모두 갖춘 ‘절대짜장’을 개발해서 모두가 즐겨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화기획은 왜 사람들이 이연복의 짜장보다 자신이 초등학교 때부터 먹어온 동네 짜장면을 더 맛있어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와이프의 분노게이지를 걱정하면서 먹는 당구장 짜장면을 더 즐기는지 관찰하고, 그들이 항상 먹는 짜장면을 다르게 생각해보거나, 다른 음식을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은 사건을 디자인하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문화기획은 사실 지역문화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사람은 시간과 공간상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항상 특정 지역에 존재한다. 따라서 지역문화가 아닌 문화는 존재하지 않고, 지역문화기획이 아닌 문화기획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지역’이라는 단어를 더한 ‘지역문화기획’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되려면, 머릿속의 지역이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머릿속의 지역문화기획을 인천 문화기획으로, 인천 문화기획을 동구 문화기획으로, 동구 문화기획을 금곡동 문화기획으로, 금곡동 문화기획을 배다리마을의 골목 하나, 서점 하나의 문화기획으로 좁혀나가야 한다. 동시에 300만 인천시민이 아닌 그 하나의 서점을 찾은 한 사람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 만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다 보면 자연히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화기획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다른 이의 문화를 기획한다는 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다다른다. 문화는 기획될 수 없다. 문화를 이루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화와 기획 사이에 생략된 단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문화(적인 문제해결 방법)기획
문화(적인 서비스) 기획
문화(예술 프로그램) 기획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지역의 구체적인 한 사람을 위해 문화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기획하거나 문화적인 서비스를 기획하거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 지역문화기획인가?’하는 고민이다.

나는 감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300만에서 시작하는 기획보다, 한 명에서 시작하는 기획이 지역의 (차별성이 아닌) 고유성을, 고유한 가치를 더 잘 담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역 오페라단의 일원으로 대극장의 건립을 주장했던 단원분도 한 명의 사람으로 만났었다면, 일곱 살 난 아이를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극장이나 다리가 불편한 노모가 자신이 부르는 가곡을 가까이 들을 수 있는 소극장을 원하지 않았을까?

 

글/ 주성진

주성진 SungJin Choo 朱成振
(주)메타기획컨설팅에서 8년간 배우고 일하며 조직을 덜 고상하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음. 이후 6년간 독립하여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스스로의 명칭을 고민하다가, 용역으로 가득한 프로필을 보며 <문화용역 주성진>으로 사업자를 등록함.

안산/ 시흥/ 익산 등 지자체의 문화전략 컨설팅, 아시아예술극장/ 부산영화의전당/ 통영국제음악당 등 공연장 운영전략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예술인파견지원사업/ 문화파출소운영지원사업 등 문화예술관련 지원사업의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하였음. 최근에는 다수의 문화기획 교육과정에 관여하며 멘토를 사칭하고 청년들에게 문화기획을 배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음.




인천 성냥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는 배다리마을의 성냥박물관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의 탄생

2016년 4월 18일 배다리 마을 사람들의 오랜 사랑방이던 동인천우체국이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지역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던 우체국의 간판이 내려지자 마을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1926년 11월 1일 개국한 아흔 살 동인천우체국의 폐국은 인구 감소와 이용률의 저조로 인한 시대의 흐름이었지만 원도심의 쇠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슬픈 사건이었다. 그 후 지자체에서는 이곳을 활용하여 마을의 주민공동시설이나 쉼터와 같이 주민들의 공간으로 되돌리려는 많은 사업을 검토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진행하지는 못했다.

한편 인천 동구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는 2017년부터 도시생활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5년 동안 송림동을 시작으로 송현동, 금곡・창영동 등 인천 동구 전 지역을 조사하는 마을 기획조사에서 인천의 근현대 산업사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성냥공장이 빠질 수는 없었다. 조사팀은 이 과정에서 현재의 동인천우체국이 포함된 부지가 옛 조선인촌공장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촌주식회사(이하 조선인촌)의 규모와 사세가 조사팀이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놀랍도록 컸다.

2018년 가을, 인천광역시와 국립민속박물관은 ‘2019 인천 민속의 해’를 맞이하여 마을박물관을 만드는 사업을 공모하였다. 우체국과 성냥공장의 상관성을 확인한 인천 동구청은 국립민속박물관 및 인천광역시, 건물 소유자인 우정청의 협력을 얻어 1년여 간 마을박물관을 만드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를 맡아 ‘신 도깨비불! 인천성냥공장’이라는 주제로 인천의 성냥과 성냥공장의 모습, 서민생활사 중에 나타난 성냥의 다양성을 이 공간에 풀어놓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공사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은 2019년 3월 개관하였다.

 
(자료1)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전경   (자료2) 개관 준비에 한창인 전시실 내부


배다리의 성냥공장과 사람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후 초창기의 성냥은 서민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고급 수입품이었다. 성냥은 초창기에는 용어가 통일되지 못하고 인촌燐寸이나 석냥으로도 불렸다. 이 시기 세창양행에서는 성냥을 수입하였고 1886년 인천 제물포를 시작으로 서울과 대구에서 성냥 제조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는 기계화 설비를 갖춘 정식 공장이라기보다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성냥을 원하는 수요자들에게 원활한 공급을 이룰 수 없었다. 높은 가격과 원활하지 못한 공급에도 불구하고 기존과는 다르게 한 번의 마찰로 쉽게 불을 얻을 수 있는 성냥의 매력은 감소하지 않았다. 성냥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사랑받으며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조선인촌은 금곡리 32번지에 근대적인 생산시설을 갖추고 1917년 설립되었다. 조선인촌이 위치한 인천은 성냥개비의 원료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하였으며 이는 인천을 비롯한 서울 등의 인근 도시에 제품을 판매하기 용이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좀 더 지역을 좁혀보면 공장이 위치한 배다리 마을은 풍부한 노동력을 이끌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천 동구의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를 이르는 배다리 마을은,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외국인 조계지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와 교회가 생겨났으며 삼거리에 열리는 생필품 시장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잦게 하여 거주지를 확장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성냥공장과 같이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간장공장, 고무공장 등과 같은 산업시설도 속속들이 생겨났다.

 
(자료3) 일제강점기 조선인촌(주) 정문에서 바라본 공장 전경   (자료4) 조선인촌(주)에서 생산한 조선표, 쌍원표 성냥

조선인촌은 축전기, 축발기, 축열기, 상포접착기, 적린도포기 등 분야별 성냥 제조공정을 위한 전문기계를 도입하였다. 과거의 성냥제조는 크게 성냥개비와 성냥갑 제조공정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성냥개비와 성냥갑을 모두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무를 해당하는 크기로 절단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성냥개비 형태의 원목은 머리 부분에 두약을 찍기 위해 축열기에 꽂고 축발기로 털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나무로 재단한 후 종이상표를 붙인 성냥갑에 가지런히 담으면 완성된 제품이 나왔다. 성냥개비를 만드는 일은 기계 공정으로 이루어졌지만, 성냥개비를 담는 작업은 기계가 아닌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 여자직공이나 어린아이들이 노동에 동원되었다. 1938년 신문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촌의 직공은 800명, 가정 부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2,800명에 달하였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장의 생산 물량과 그에 따른 성냥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았다. 연구 논문에 따르면 당시 전국성냥공장에서 생산한 전체 생산량 10,903톤 중 5,217톤, 즉 47%를 조선인촌에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배다리 성냥공장은 우리나라 성냥 보급에 앞장섰다. 성냥공장 주변의 마을 주민들도 이에 일조하며 살아왔다.

사라진 성냥공장의 추억

광복 이후 적산기업이었던 조선인촌은 미군정으로 강제 귀속되었다. 이에 따라 일자리를 잃은 조선인촌의 노동자들은 생산설비를 밀반출하거나 불하받아 성냥공장을 세웠다. 1950년대에는 조선인촌이 있던 인천 지역에 우후죽순으로 성냥공장이 들어선다. 조선인촌 이후 화수동에 위치하여 가장 사세가 컸던 대한성냥을 비롯하여 인천인촌, 인천성냥, 평안성냥, 고려성냥, 송현성냥, 한국성냥 등 10여개가 넘는 성냥공장이 등장한다. 아쉽게도 이 시기 생산하던 성냥이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공장 주변의 주민들은 각각의 성냥 공장의 위치와 상표, 공장이 돌아가던 모습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던 모습 등을 기억하며 증언한다. 인천의 성냥산업은 한일협정으로 염소산칼륨이 부산항으로 직수입되던 1968년대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성냥산업의 공급과잉이 나타난 시점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은 성냥공장을 폐쇄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좀 더 불을 얻기 편한 라이터가 등장함에 따라 전국의 성냥공장은 점차 사라져갔다.

 
(자료5) 인천 대한성냥공장의 생산품   (자료6)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전국 성냥

현재 인천의 성냥공장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백여 년 전 존재했던 성냥공장과 더불어 그 삶을 영위했던 주민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성냥공장을 보기 힘든 오늘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자산이 되어 남았다. 그 자산을 발판으로 배다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전시공간이자 주민들의 문화시설인 성냥마을박물관이 개관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천 성냥에 관한 더 많은 추억과 자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바라건대 이러한 자료를 자양분삼아 튼튼히 성장하며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이보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 저작권 및 출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이보라 Bora Lee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학예연구사(2008년~현재)
<성냥을 통해 본 우리의 옛날>(2008년), <6.25, 그 날 이후>(2011년), <인천의 영화광>(2014년), <추억 속의 우리 집에 가다>(2016년) 등 매년 지역사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2017년부터 인천동구 도시생활사조사를 기획하여 현재 『인천의 오래된 동네 송림동』, 『인천의 마음고향 송현동』 등 두 권을 발간한 공동저자이다.




2019년 인천문화재단 주요 사업을 소개합니다

올해는 인천문화재단이 출범한 지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자양분 삼아 시민과 지역예술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더욱더 다채롭고 새로운 문화예술 사업을 선보일 인천문화재단의 행보를 기대하며, 이번 문화통신3.0 기획코너에서는 앞으로 진행될 문화재단의 주요 사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책연구
인천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정책 개발

2019년 정책연구팀은 연구 역량 강화를 통해 문화정책과제를 발굴·개발하고 민관협력 체계 안정화를 통해 인천 현안에 맞는 정책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예정입니다. 우선 보다 많은 시민과 문화정책과 예술 담론을 공유하고자 홍보를 강화합니다. 또한 시민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문화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문화정책 민관 거버넌스 ‘인천문화포럼’의 실효성을 높입니다. 포럼 위원들의 의견이 실제 정책과 예산에 반영될 운영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부서 자체적으로도 사회 문제 해결형 문화정책을 연구하고 발굴할 것입니다. 아울러 깊이 있는 문화기획자 양성을 위해 ‘지역문화 전문인력 역량 강화’사업을 시행합니다. 기존 수료생을 포함하여 인천의 지역문화 전문인력을 희망하는 교육생을 발굴하고 현장 밀착형 교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문화사업
생애주기별 예술지원체계 다각화

인천에서 활동하는 청년, 중견, 원로 작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수요자 맞춤형 지원제도를 다각화합니다. 원로예술인의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청년 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진작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견 예술인과 전문 예술단체의 창작 활동을 기획부터 실행까지 다년간 지원하는 플랫폼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확대된 창작지원과 더불어 작은 예술공간 지원, 인천 문화예술 연구모임 지원, 예술단체 컨설팅, 미술품 구입 등 다양한 지원제도의 운영을 통해 인천 예술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문화예술의 눈으로 소통의 방식을 제안하는 시민문화활동지원사업
2018년까지 3개 영역(문화공동체활성화, 시민축제, 시민예술프로그램)으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던 시민문화활동지원사업이 올해는 하나로 통합되어 더욱 입체적인 프로젝트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이는 지역과 문화예술 생태계의 대내외적 환경 변화에 따른 것으로, 단순한 공연․전시․교육의 형태를 넘어서 문화예술이 지역 현안과 만나는 ‘사회적 예술’의 형태를 지향합니다. 공모를 통해 진행되는 2019 시민문화활동지원사업은 <인천, 예술을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시민 스스로 주변의 문제들(환경, 교통, 육아, 젠트리피케이션, 쓰레기 처리 문제 등)의 해결방안을 문화예술과 결합한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열린 소통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인문, 예술로 함께하는 열린 학슴 플랫폼, 하늬바람
인천시민문화대학 하늬바람은 그간 유아와 청소년, 노인 등 일부 세대에게 집중되어 왔던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전 연령, 특히 일반 성인에게까지 참여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시작된 사업입니다. 봄과 여름, 겨울에 만나는 3번의 특강을 비롯하여 인천의 보석 같은 문화공간들과 함께하는 “지역연계 프로그램”, 예술창작의 과정과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일상예술 프로그램”, 세상을 보다 깊이 있는 사유와 문화적 관점으로 바로 볼 수 있는 “인문사회 아카데미”까지 매해 30여 개의 다양한 강좌들로 인천시민들과 만나오고 있습니다.

축제문화
전문가와 시민의 관점으로 보는 인천의 축제, 축제협력네트워크
축제협력네트워크사업은 전문가와 시민의 시각으로 인천에서 열리는 다양한 축제들을 모니터링하고 서로 간에 의견을 공유하는 목적의 사업입니다. 축제의 대상은 축제를 방문하는 모든 시민이고 이러한 시민들의 눈으로 관찰된 여러 정보와 자료는 다시금 축제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하는 선순환의 과정을 지향합니다.

청년문화활동을 통한 지역의 새로운 의미 발견, 문화예술특화거리사업
청년세대가 가진 특별함은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독창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표현되고 창조될 수 있는 환경과 여건 또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 사업은 청년문화활동을 위한 레지던시프로그램으로 원도심을 중심으로 지역이 가진 가치와 소중함을 재발견하고자 기획된 사업입니다. 문화예술을 매개로 장기적인 계획을 통해 지역, 공간이 점차 문화화될 수 있는 역할이 되고자 합니다.

한․중․일 3국의 아름다운 하모니, 동아시아 합창제
동아시아 합창제는 인천이 2018년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됨에 따라, 한∙중∙일 3국의 합창단이 모여 함께 공연하는 사업입니다. 3국의 문화적 특성과 상호 화합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공연으로 단순 공연을 넘어 지속적인 교류관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섬 주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 섬마을밴드 음악축제
섬마을밴드 음악축제는 음악연주에 관심이 있어도 전문음악교육의 기회를 접하기 어려웠던 섬 주민들을 위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연주자들을 현지에 파견합니다. 주민들의 연주실력 향상을 돕고, 그 결과물을 무대에서 뽐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올해 3회를 맞이하는 섬마을밴드 음악축제는 앞으로도 섬 주민들의 일상 속에 예술이 녹아들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공간문화
트라이보울 공연 및 전시사업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트라이보울(Tri-bowl)은 다양한 지역문화진흥과 시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한 공간입니다. 트라이보울의 공연 및 전시사업은 자체 기획 및 공모로 진행되며 세부사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월 ‘문화가 있는 날’을 중심으로 열리는 상설기획공연, 트라이보울의 공간적 특성을 고려하여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트라이보울 기획전시 및 일루미네이션, 지역 및 신진 예술인과 단체를 대상으로 공연 및 전시기회를 제공하는 지역예술활성화 공모사업, 마지막으로 유관기관과 지역 매체와의 협력을 통한 국제교류 및 네트워크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문화진흥을 위한 문예회관의 역할 수행을 통한 다양한 형태의 문화체험개발로 인천 시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트라이보울 아트 클래스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예술교육사업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어려운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송도 투어 문화나눔사업<해피 클래스>, 예술가와 함께 창작하는 과정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예술탐구 심화 워크숍 <토요클럽>, 공연·축제 연계 워크숍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천 시민과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연예술인 역량강화 프로그램 2019 펌프(PUMP)
인천공연예술연습공간이 주관하는 공연예술인 역량강화 프로그램 ‘펌프(PUMP)’는 다양한 매개를 기반으로 인천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양질의 창작물을 제작하도록 도모합니다. 공간의 모태인 상수도 가압장 속 펌프가 ‘흐름’, ‘공급’, ‘교류’를 상징하듯이 지속적인 프로그램과 프로젝트, 공연예술을 추구합니다. 또한 다양한 역량강화 워크숍과 네트워킹을 통해 전문예술인에게는 양질의 콘텐츠 창작 기반을, 신진예술인에게는 기초역량 배양을 통한 인큐베이팅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우리미술관 전시사업
우리미술관은 문화소외지역 내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조성된 지역 밀착형 상설 소규모 미술관입니다. 2015년부터 예술성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전시를 기획하여 운영하고 인천 소재의 대학교와 주민과 함께 지역성을 탐구할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도 전시를 개최해왔습니다. 또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레지던스(창작문화공간 만석/금창)를 운영하며, 11월과 12월에는 입주작가들의 작품 전시회를 준비합니다. 2018년에는 지역작가가 지역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만다라 그리기 워크숍>과 <청소년 미디어아트 워크숍> 전시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습니다. 우리미술관은 앞으로도 생활 속 시각예술 체험을 통해 문화 수요에 부합하고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과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전시와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인천 청년예술가와 함께 만들어가는 청년문화창작소
올해 상반기 개관 예정인 청년문화창작소는 인천 청년예술가들과 재단이 함께 만들어가는 청년거점 공간 구축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청년예술가 전용 창작·네트워킹 공간을 지원하고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기획 및 운영하여 청년예술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문화예술 관련) 청년정책을 제언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성하며, 단순 교류를 넘어선 전문적인 청년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관
새롭게 개관한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

2019년 한국근대문학관은 개관 6년 차를 맞이합니다. 올해 문학관 사업에 가장 큰 사건은 새로운 기획전시관의 개관입니다. 2017년까지 재단 청사로 쓰던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올 하반기 기획전시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 예정입니다. 2019년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 탄생 120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2019년 기획전시는 <소파 방정환 탄생 120주년 기념 아동문학 특별전>이란 주제로 9월부터 새로 개관하는 기획전시관에서 진행됩니다. 시민대상 강좌는 총 3개가 예정되어 있는데, 우선 ‘죽음학’을 주제로 한 인문학특강이 3월부터 시작되며, 한국문학 및 세계문학을 주제로 한 교육프로그램이 연중 진행됩니다. 이 외에 책과 문학을 주제로 한 책축제가 시민참여형 프로그램으로 운영될 예정이며, 한·중·일 3국의 작가와 문학연구자가 참여하는 동아시아문학포럼이 하반기에 개최될 예정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는 인천아트플랫폼
인천아트플랫폼은 2009년 인천광역시가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중구 해안동 일대의 근대 개항기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예술가 창작공간입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아트플랫폼은 그간의 운영이 동시대 예술 안에서 위치하였는지 짚어보고, 아트플랫폼의 전시 및 활동 등을 정리하여 다음 10년의 비전을 제시할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함께해온 1기 작가부터 올해 입주한 10기 작가들이 참여하는 ‘홈커밍 전시’를 비롯한 기념행사를 9월 말에 개최할 예정입니다.

2019년은 3개국(한국, 노르웨이, 미국)의 23팀(28인)의 작가들의 입주로 사업을 시작합니다.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서로 다른 배경의 입주 예술가들에게 ‘리서치 투어’, ‘플랫폼 살롱’ 또는 ‘이론가 매칭’ 등 다양한 연구‧비평 프로그램으로 실험적이고 다양한 창작 활동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예술가들의 창작 결과물은 오픈스튜디오와 결과보고 전시를 통해 선보이며, 올해에는 특히, 모든 입주 예술가들에게 창‧제작 발표의 기회를 마련하여 시민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다채로운 전시와 공연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또한 3년 차에 접어드는 호주 아시아링크(Asialink)에 이어, 대만의 피어 투 아트센터(Pier-2 Art Center)와 국제교류 프로그램에서는 작가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한편,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창작공간과 관련한 국제 세미나 및 포럼을 개최하며 동시대 예술의 화두를 짚어보고,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확장과 인프라 구축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 외에 디아스포라, 항구 도시 등 인천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전시’와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의 한계를 실험하는 ‘콜라보 스테이지’, 아이와 어른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스트릿 아트 페스티벌’등으로 시민들을 찾아갈 계획입니다.

인천역사문화센터
시민과 함께 역사에서 미래를 찾는 인천역사문화센터는 지난해에 이어 시민과 연구자를 위해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예정입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에 우리 센터도 기념사업을 준비했습니다. 4월 27일에는 경기문화재단,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경기도박물관(용인)에서 개최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4월 11일 OBS 방영 예정)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센터의 이러한 사업을 통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더 많은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인천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제공하기 위한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이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사업은 인천의 역사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고 웹에서 인천의 공간(지도)을 매개로 하여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인천대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와 함께 추진해 나가는 이 사업을 통해 시민과 연구자들이 인천 역사자료를 더욱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강화관방유적 조사연구
2015년부터 진행해 온 돈대 등 강화관방유적 정밀 실측조사는 2019년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올해는 신미양요 150년이 되는 2021년을 준비하기 위해 신미양요 격전지인 강화 광성보의 3개 돈대(광성, 손돌목. 용두)에 대한 실측조사 작업을 진행합니다. 올해와 내년 신미양요 격전지 유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실측조사에서 만들어진 결과물들은 2021년에 뜻깊게 활용될 예정입니다.




‘행성적 사랑(Planetary Love)’을 위한 실험의 장

-2018 예술정거장 프로젝트 리뷰-

2018 예술정거장 프로젝트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Underground On the ground)’는 지하철 역사에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일종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예술작품이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을 벗어나 공공의 장소에 놓이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1967년 영국의 미술행정가 존 윌렛(John Willett)의 저서 『도시 속의 미술 Art in a City』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다. 공공미술이 처음 시행된 초기에는 기념비적 조각 작품이 야외에 놓였고 이후에는 도시계획에서 예술이 작품이 위치하는 장소를 고려한 까닭에 ‘장소 특정적 예술(site-specific art)’라는 특징이 있다. 최근에는 커뮤니티아트(community art)처럼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소통하며 완성하는 ‘뉴 장르 퍼블릭 아트(new genre public art)’의 형태로 진화해 왔다.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Underground On the ground)’는 이러한 공공미술의 변화과정 가운데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모습으로 펼쳐 보이며, 미술관의 전시가 공공의 공간에서 선보이는 다채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최은동, 아톰, 120×70×240cm, F.R.P, 2011

혼종성의 공간 연구와 다층적인 서사들
이번 프로젝트에는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미국, 프랑스 출신 29팀(30여 명)의 30여 작품이 선보인다.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인천이라는 지역성과 인천시청역사의 특성을 자세히 연구하며 지하철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주목해, 평면,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 아카이브 전시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를 구성했다. 전시 기간은 2018년 12월 13일부터 내년 10월 3일까지인데, 언사이트(Unsite)를 비롯한 4개 팀의 작품이 인천시청역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시민들에게 일상에서 예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Underground On the ground)’는 총 다섯 개의 소주제를 구성하며 현대 사회와 인천이 지닌 ‘혼종성(hybridity)’의 특성을 담아내었다. 공적 공간에서 만나는 현대미술 전시라는 의미로 ‘언더그라운드 아트 뮤지엄(Underground Art Museum)’과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예술을 선도한 원로들의 자료를 아카이빙 형태로 전시하는 ‘언더그라운드 필름타임즈(Underground Film Times)’, 도시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해 지하 공간에 대한 잠재력을 살리고 예술과 일상이 만나 친숙한 공간을 조성하는 ‘아트 로드 언더그라운드(Art Road Underground)’, 지하 공간의 새로운 탈바꿈을 통해 정서적 환기를 제공하는 ‘언더그라운드 어메니티(Underground Amenity)’, 지하철이라는 장소 특정성과 어우러지는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Underground On the ground)’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개의 개념 안에 녹아든 작품들은 각각의 고유한 다름(alterity)과 차이를 수용하면서 함께 어우러진다. 동시에 식물의 뿌리, 혹은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지하철노선같이 개별 작품들은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다층적인 서사를 펼쳐낸다.

이병찬, 소비생태계, 600×450 ×450cm, 에어모터, ledrgb, led, 필름, 비닐, 광섬유, 미러볼 등, 2018

예술가들의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Felix Gonzalez Torres)
프로젝트 안으로 들어가 개별 작품들을 살펴보자. 2018 예술정거장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작품구성으로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의(Felix Gonzalez Torres, 1957-1996) 참여다. 4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는 쿠바 출신의 난민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성 소수자로 살면서,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매몰되지 않고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해 많은 울림을 전했다. 그는 만남, 이별, 삶과 죽음 등을 주제로 한 개념미술작품을 선보이며, 사후에도 많은 현대미술작가에게 창작의 영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자신은 “죽음 이후에도 활동할 것”이라는 자조적 예언처럼 그의 작품은 사후에도 수차례의 전시와 다양한 프로젝트로 여전히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 출품된 토레즈의 <무제(The New Plane), 1991>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으로 인천시청역을 비롯해 총 6개의 공간(인천시청역, 간석역, 인천예술회관역, 인천종합버스터미널역, 원인재역, 인천아트플랫폼)에 설치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주류든 주변부든 모든 존재는 평등하며,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 무제(새로운 계획), 가변설치, 빌보드, 1991 인천아트플랫폼

한국 실험예술의 재조명
‘언더그라운드 필름 타임즈(Underground Film Times)’는 기획팀에서 준비한 섹션이다. 지하철 역사 한편에 6개의 전시 부스를 설치하고,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예술을 이끈 6명의 원로작가 김구림,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성능경, 윤진섭의 자료를 아카이빙 형태로 전시했다. 김구림은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로서 초창기 행위예술의 도입기에 가장 중요한 활동을 한 작가로 평가되며, 이강소는 대구 현대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해오면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업을 펼쳤다. 이승택은 물, 불, 바람, 연기 등 비미술적인 재료를 사용해 현대조각의 영역을 확장하고, 기존 예술에 대한 반개념적 정신과 새로운 도전으로 미술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술을 전개했다. 또한 이건용은 미술계 주류와 관계없이 개념미술, 행위미술, 설치작업 등에서 실험적 시도를 감행해 전위미술 부문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성능경은 개념적 퍼포먼스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된다. 윤진섭은 회화, 판화, 설치, 오브제, 퍼포먼스 등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에 주력했으며, 이후에는 활발하게 비평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도한 6명의 사료로 구성된 ‘언더그라운드 필름 타임즈(Underground Film Times)’는 저항과 실험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언더그라운드 필름 타임즈

언더그라운즈 필름 타임즈

에필로그
인천시청역사에는 이외에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주목받은 육근병, 김승영 등 국내 정상급 작가들과 주로 장소의 특성을 활용한 설치예술을 하는 프랑스 출신 피에르 파브르(Pier Fabre)의 작품이 전시된다. 또한 한국의 도시화로 농촌의 현실을 그려낸 이종구, 도시생태계의 스펙타클한 이미지를 새로운 생명체로 번안한 이병찬, 사용된 장난감 완구를 이용해 ‘업사이클링(up-cycling)’의 선순환의 가치를 살려낸 김용철, 통일된 한국의 미래 풍경을 제시하는 홍원석 등의 작품들은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혹은 전지구화된 세계가 지닌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 것들이기도 하다.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Underground On the ground)’는 인천이라는 지역성과 세계 속의 인천이라는 글로컬(Glocal) 한 사유를 담아냈다. 여기에는 지구라는 행성의 평화와 공생을 위한 실천 전략으로서 가까운 이웃과 타자에 대한 환대를 주요 개념으로 삼고, 지구가 공통으로 껴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다층적인 시각을 구성해냈다. 또한 우리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글로컬한 생각을 예술적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실험하는 장이 되었다. 인천시청역사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은 동시대 시각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해 보는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개방과 포괄의 원을 확장해보길 기대한다.

이종구, 대지의 손, 105x70x10cm, 종이부조와 오브제(), 2005대지의 손, 113x75x15cm, 종이부조와 오브제(), 2005

홍원석, 컬러풀 아시아 하이웨이, 가변설치, 혼합재료, 2018

·사진 고경옥 Ko Kyongok 高敬玉

고경옥 Ko Kyongok 高敬玉
홍익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하고, 쿤스트독미술연구소 연구원, 이랜드문화재단 수석큐레이터, 수원시미술전시관 책임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미술현장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여러 작가론을 썼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18 예술정거장 프로젝트>의 수석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예술과 사회에 대한 연구로써 다양한 인문학 공부에 힘쓰고 있다.
curatorko@naver.com




인천과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서점

인천서점의 문이 열렸다. 아트플랫폼 H동 1층에 큰 창을 통해 묵직한 구조물이 들어앉은 모습을 오며 가며 지켜본 이들은 궁금해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꽤 긴 시간을 비워놓은 공간에 서점이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사건인듯했다. 더군다나 ‘인천 책’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독립서점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사람들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대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인천 책’이라니 기뻐했고, ‘인천 책’이라니 걱정했다. 지역 출판사에서의 활동을 바탕삼아 기획자의 꿈을 키워오던 필자는 이러한 반응을 일찌감치 예상했었다. 상반된 두 가지의 반응은 운영자 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다. 모두 인천서점 대한 애정에 기인한 참모습임을 알고 있기에. 반반의 민족답게 기대 반 걱정 반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편으론 너무나도 과분한 관심 탓에 급격하게 자신감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이 모든 것이 순간일 뿐이라는 재빠른 결론을 짓고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말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졌다. ‘인천서점’은 어느 능력 있는 혹은 뒷배가 두둑한 한 개인에 의해 탄생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서점 전경과 내부

‘인천서점’의 대표인 필자는 문학을 전공한 전공자도, 소위 말하는 텍스트 중독자도 아니다. 그저 짬이 날 때면 책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80년대 생으로 인천에서 나고 자라서 어쩐지 인천에 대한 애정이 평균보다 조금 더 많은 1인일 뿐이다. 대학 시절 지역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일 배우던 것에서 이어져 인천서점을 오픈하기까지 이르렀다. 일을 배우던 출판사에서는 일 년에 크게는 2~3번, 작게는 4~5번의 출판기념회를 열곤 했다. 신문사와 협업으로 제법 규모가 큰 책을 만들기도 했고, 지역 활동가나 작가의 작품들, 전공 분야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간간이 인쇄 전에 원고나 사진을 보기도 하면서 책 속에 담길 이야기에 흥미로움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책이 세상에 나오면 출판사에서는 행사장에서 책을 구매한 개인이나 단체에 택배 발송으로 책을 보낸다.

대형서점에 납품하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지역의 소규모 출판사는 마케팅이나 홍보를 전담할 인력이 없기도 하고, 구매력 없어 보이는 책을 대형 서점의 서가 한 켠에 꽂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렵게 대형 서점에 들어간다고 해도 주문량이 없으면 어느새 스리슬쩍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지역출판의 한계다. 그렇다 보니 종종 저자나 책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관계자에게 볼멘소리를 듣는다. ‘서점에 갔더니 책이 없더라, 인터넷 서점에서도 왜 검색이 안 되냐’ 하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런 현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에 지역의 이야기를 출판하는 곳임을 알고 직접 찾아오신 분들은 ‘이런 좋은 책들을 왜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껄껄하시며 시원섭섭한 웃음을 보이셨다. 도리어 그런 분들은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던 인천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이나 오랜 서적을 아낌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인천서점의 내부모습

‘인천서점’은 인천의 이야기를 담은 책, 인천 작가들의 책을 판매하고 전시하고 이야기하는 서점이다. “책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책을 손가락으로 꼭꼭 집어가며 넘기는 그 손맛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세상엔 취향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수천만 명이며 그렇기에 개성 있는 독립서점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지 않은가. 판매량으로만 따진다면 ‘인천서점’은 변변치 못한 서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인천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인천의 모습을 담은 책들이 있다. 대형서점에서 보기 어려운 지역의 책이지만 인천서점에서는 만날 수 있다, 인천 책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인천서점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난생처음 인천이라는 지역에 와 정착하여 살아갈 사람도, 인천 토박이지만 정작 인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알고 싶은 사람도 어디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인천서점’이 그런 분들의 친구가 되어드릴 것이다.

이제 서점의 문을 연 지 열흘이 되었다. 오픈 행사에서 받은 관심에 비하면 아직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면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여러 바람이 마음과는 다르게 거창하게 보이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인천서점은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인천의 책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곳에 와 주인장에게 귀띔해줄 수도, 좋은 책은 서로 추천하며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동네 책방이자 인천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래서 ‘인천서점’은 판매도 하지만 전시에도 집중하려 한다. 쉽게 만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들을 만나고, 이것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할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알다가도 모를 우리네 인생처럼 오늘도 인천서점의 새로움을 기대하며 활짝 문을 열어본다.

인천서점 윤승혜 대표

·사진 윤승혜 (인천서점 대표)




도전, 그리고 해냈다!

공연이 드디어 끝났다.
지난 8월 첫째 주 토요일에 신흥동 칠통마당에서 첫 만남이 있은 뒤에 석 달여를 달려온 결과를 어제와 오늘 무대에 올렸다. 연습 과정 내내 참여하며 과연 이 상태로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하며 염려했던 일이 언제였지 싶을 정도로 모두가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며 즐겁고 뿌듯하게 우리의 연습 결과물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2018 인천 시민왈츠 시민창작뮤지컬 <강화, 1866 삼람성 분투기>
©최종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걸음
이제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지난봄을 난 참 힘들게 꾸리고 있었다. 웃어도 웃지 않고, 즐거워도 즐겁지 않은. 보통 한 마디로 힘든 시간이었다. ‘우울’이라는 게 딱 달라붙어 새로 시작되는 아침도 반갑지 않고, 늘 반복되는 일상도 버거운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천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시민 창작 뮤지컬 <2018 인천왈츠> 단원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며칠 망설이다 신청했는데, 그 신청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토요일 1시면 서둘러 도화동의 공연예술연습공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 지나고 나면 토요일엔 소파에서 티브이 시청하기가 내 생활이었다. 아이들은 자라 내 손길보다는 관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직장 관계로 가끔 마주하는 남편도 편히 쉬며 내 간섭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힘들다 외롭다는 생각에 퇴근길에 걸어오며 울고, 가족들에게 하소연해도 요즘 말로 1도 달라지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오로지 티브이 앞에서만 내 마음을 달래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토요일의 연습을 기다리며 5일을 보내고 서둘러 간단히 집안일을 마친 뒤 연습실로 가는 내 발길은 날 듯 가벼울 수밖에.

내 이름 석 자가 불리지 않았다.
오늘 공연이 끝나고 우리 모든 인천왈츠 단원들은 저녁을 함께하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석 달여를 지내며 즐거운 시간도 많았지만, 위기의 순간도 있었고,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잘 헤쳐 온 것을 서로 자축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작년보다 2배 이상 많은 시민이 인천왈츠에 신청했다. 너무 많은 인원이라 스텝 관계자들은 참 난감해했단다. 드라마 팀만 108명이 지원을 해서 두 개조로 나누어 연습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참여를 못 하는 이들도 생겼고, 배역이 정해진 뒤에는 더 많은 인원이 불참했다. 몇 주 동안 기본 동작과 호흡, 발성 등을 익히며 준비하는 과정이 지나고, 간단한 대사와 노래를 통해 배역을 받았는데, 이 배역을 받고 못 받는 시간을 통해 불참하는 인원이 더욱 발생한 것이다. 사실 나도 첫 번째 배역을 발표할 때는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는 부르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 참 서운하고 속상했다. 아니 창피했다. 배역을 정할 거라는 날이 오기 전에 설령 내가 배역을 받지 못하더라도 참여하는 데 의미를 두자고 생각했었다. 코러스나 안무로도 참여할 수 있다 했기에 그렇게라도 끝까지 참여하며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래서 내 옆에 있던 이에게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서 접했던 피천득의 ‘소리없는 연주’라는 수필을 떠올리며 우리도 끝까지 가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참 냉혹했다. 내 이름이 불리지 않으니 그냥 기분이 나빴다.

2018 인천시민왈츠 오리엔테이션
©백지영

11시가 다 되어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참 여러 생각을 했다. 내가 무엇이 부족했지? 노래는 뭐 썩 잘 부르지 못한 것은 인정한다 해도 대사는? 왜 아니지? 그동안 연습 시간에 늦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안무나 몸을 풀고 걷고 구르는 모든 연습을 할 때도 가능하면 앞에 서서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왜 나는 선택을 못 받았지? 화가 났다. 조연출에게 연락해서 왜 내가 선택을 못 받은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물어볼까? 버스에서 내린 나는 공원을 걷고 있었다. 운동해서 일단 체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마 전부터 시작한 걷기 운동이었다. 그래, 더 열심히 해서 반드시 배역을 받고 말 테다. 나를 처음에 뽑지 않은 것을 분명 후회할 거야.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고 숨겨진 능력도 참 많은데…. 걸음이 빨라질수록 내 생각은 그렇게 굳혀지고 있었다. 그 뒷날부터 쪽대본을 외우기 시작했다. 외워 가면 또 연습하며 지도해 주신대로 익혀 가면 연출 선생님의 눈에 들 거로 생각하고 반드시 그렇게 되고 싶어서 금방 까먹는 대본을 자꾸 읽고 또 읽으며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토요일이 되니 연습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기 싫었다. 배역이 없으니 내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내 발걸음을 그냥 집에 앉히려고 했다. 다행히 버스에 올랐고 난 또 어김없이 연습실에 있었다.
지난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8월 첫 주에 초등학교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지난 5월에 결정했던 제주 여행을 예약할 거라는. 아차, 잊고 있었구나! 11월 3, 4일에 제주도로 놀러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어떡하지? 친구들과의 약속이 선약이었는데 우리 공연은 11월 17, 18일이라 3일에 여행을 가게 되며 연습에 분명 차질이 있을 터였다. 지금은 토요일만 연습하지만, 공연날짜가 가까워지면 일요일은 물론이고 평일까지도 연습하게 될 터인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게 되면 연습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고 그게 나라는 것은 나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었다. 망설이다 사실대로 말했다. 결정은 내가 해야 하는데도.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 그 말에 용기를 내고 제주 여행은 못 가겠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내 공연에 많은 응원을 해주고 축하해주었다.
그날 연습실에는 지난주보다 자리가 좀 더 비어 있었다. 그리고 강화 여인들을 연습할 때 한 자리가 비어 있었고, 출석부를 들여다보시던 연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황미경 님! 야호, 내게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연습 무대로 나갔다. 열심히, 또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강화 여인들의 대사는 짧았다. 정말 짧았다. 금방 외워도 될 채 10줄도 안 되는 대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한 줄 한 줄이 어렵다. 연출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머릿속에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내 목구멍을 통해 나가는 소리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차분하게 열정을 보이시며 원하는 대사를 끌어내려고 이끄셨고 칭찬을 해주셨다. 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들으며 대사를 해내는 이도 있고, 좀 더 연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이도 있었다. 연습 무대가 아닌 양옆의 자리에서 들으면 쉽게 이해되는 것들이 연습 무대에만 서면 몸이 굳고 혀가 굳었다. 다행히 나 같은 이가 드물게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조금씩 연기라는 것을 해내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2018 인천시민왈츠 연습과정
©백지영

되돌리고 싶었던 선택
그런데 우리 연습 과정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맡은 배역을 충실하게 해내던 단원이 갑자기 개인적인 일로 불참을 선언했고,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연습에서 빠져나가는 인원이 늘어난 것이다. 108명이 출발했는데, 어제오늘 무대에 선 드라마팀 단원은 35명이다. 내가 무대에 선 배역은 강화 여인이 아니다. 시작은 강화 여인이었으나, 포수로 무대에 올랐다. 포수가 5명이 필요했는데, 경상 포수 배역을 맡은 단원이 결석하더니 연락도 없이 대역으로 연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로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구멍 난 배역에 대해 걱정을 하는 분위기였다. 공연날짜는 다가오는데 연습은 사람이 없어 못 하게 되는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연출팀에서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하며 애써 조바심을 달래는 터인데, 단원 중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할 수 있는 지원자를 찾는다고 하셨다. 우리 연습 단원 중 최고령자가 노래도 상당히 잘하시고 앞으로 결석할 일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날 마침 자리한 그분께 조심스레 강화 여인에 참여하신다면 내가 경상도 포수로 가겠다고 말을 해버렸다. 물론 그즈음 가까이 지내던 양 장군 부인 역할을 하는 이도 나랑 같은 생각을 했다는 그 말과 충동에~ 아, 이것은 정말 실수였다. 함부로 그렇게 내가 경상도 포수를 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날 집에 와서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평소 나도 경상도 사투리를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터였는데, 막상 연습한 것을 들어보니 아니었다. 이것은 사투리도 뭐도 아니었다. 못하는 거였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해가며 강화 여인에서 내 자리를 굳히고 몸에 붙게 잘해나가고 있다 하던 중이었는데 내가 일을 크게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모든 사람이 함께한 자리에서 약속했으니 어떡하든 나는 지켜야 한다. 녹음해 온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또 듣고, 내가 해야 할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런데 잘 안 외워진다.
석 달 반을 연습하며 내가 정말 잘한 것이 있다. 공식적인 연습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한 것! 직장 일로 좀 늦게 간 적은 있으나, 모든 연습에 꾸준히 참여했다. 아마 그런 열정 때문에 11월에 연기연습을 위해 연출 선생님이 부르신 석호진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실력이 참으로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달달 외운 사투리로 힘겹게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내게 석호진 배우님의 지도는 햇살이었다. 오아시스였다. 그때 배운 것을 연습하면서 전날보다 나아졌다는 단원들의 칭찬과 격려를 들을 수 있었고, 공연날에도 떠올리며 연습을 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내 일처럼 격려해주고 이끌어주고 칭찬해준 단원들 덕에 오늘 이렇게 무대에 섰다고 자신한다. 고맙고, 사랑한다, 모두.

<2018 인천시민 왈츠> ‘강화 1866, 삼람성 분투기에서 포수 역할을 맡은 황미경 씨
©노형민 제공

시민과 같이 만드는 인천왈츠
인천왈츠는 대사나 노랫말 등을 단원이 같이 참여할 수 있다. ‘강화 1866, 삼랑성 분투기’라는 제목도 단원들이 지은 것이다. 노랫말도 공모했는데, 극 중 양헌수 아내가 부른 노래는 내가 응모한 노랫말을 바탕으로 거의 80% 이상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노래는 물론이고, 이 ‘강화 1866, 삼랑성 분투기’에 더욱 애착이 크다. 그리고 처음으로 음악을 듣던 날도 잊을 수가 없다. 큰 기대 없이 들은 노래는 연습을 마치고 나가시는 음악감독님을 붙잡고 이렇게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제가 아주 큰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석 달여의 연습을 이어가며 과연 이것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 염려했던 우리의 우려보다 더 애태우셨을 여러분들- 극단 집현의 최경희 대표님, 이상희 연출님, 신영길 음악감독님. 그리고 두 시간여를 지하철로 오셨다는 안무 선생님. 그리고 특히 우리 포수들에게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수염을 붙여 멋진 포수로 탈바꿈해주신 분장 선생님 등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그 외 여러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참 사진을 찍어주시던 기사님도. 또한 뒤에서 조용히 인천왈츠의 살림을 꾸려나가신 인천문화재단 생활문화팀의 백지영 님, 마지막으로 석 달여를 함께 달려온 우리 35명의 단원 하나하나를 지독하게 사랑하며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나저나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 막을 내렸는데, 앞으로는 어떡하지?^^

2018 인천시민왈츠 연습과정
©백지영

글 황미경(黃美京, Hwang Mikyeong)
현재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재직중
사진 노형민, 최종규, 백지영




“고려왕조의 다양성과 통합, 포용과 21세기 코리아(Korea) 미래 유산”

고려 건국 1100주년․경기 천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2018. 11.2.~4, 라마다프라자수원호텔)

고려 건국 11주년과 인천
918년 음력 6월 15일(병진)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건이 즉위했다. 일부에서 ‘실질적인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라 평가하는 고려왕조 500년 사직의 출발이다. 세월이 흘러 2018년이 되었다. 왕건 즉위로부터 1100년이 되는 해다. 1000년이 되는 해는 1918년이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뺏긴 처지였으므로 기념할 수 없었고, 그 이전은 고려를 이은 조선의 시대였으므로 고려 건국을 기념한다는 것은 기대난망이었다.
인천이라는 지역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역대 왕조 중 고려만큼 인연이 깊은 왕조가 없다. 이름의 뿌리인 ‘인(仁)’은 고려 인종이 어머니 출신지인 인천을 높이기 위해 고민해 내려준 것이다. 인주 이씨 집안의 여식들은 7명이나 임금의 배필이 됐다. 몽골 침략이라는 국난을 맞아 고려인들은 개성 궁궐을 그대로 본떠 또 하나의 수도를 만들었으니 바로 강도(江都)다. ‘황궁’으로 표현되는 황제국가로서 고려의 위상 역시 강화에서 끝을 맺었으니 인천 입장에서도 고려 건국 1100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인천문화재단은 경기문화재단과 1년여에 걸친 협업을 통해 고려 건국 1100주년과 함께 1018년 현종때 처음 지방제도로 시행된 ‘경기(京畿)’ 성립 1000년을 함께 기념하고 기억하는 사업을 기획했다. 상반기에는 4월 28일 인천에서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반기에는 11월 2일부터 4일까지 수원에서 한국중세사학회와 함께 고려시대사 연구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논의하는 마당을 펼친 것이다.

국제학술회의 참가자 기념사진

다원성을 바탕으로 통합을 지향했던 고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중국, 일본 연구자들도 참가해서 고려왕조의 역사적 위상과 맥락, 고려시대사 연구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전망하는 유력한 수단으로서 고려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11월 2일 첫날에는 모두 11명의 연구자가 강연 형식으로 발표에 나섰다. 국내 고려사연구의 1세대가 이미 작고한 상황에서 2세대 연구를 이끈 원로 학자들과 3세대라 할 수 있는 중진 연구자들, 외국에서 고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무척 다양한 구성이었다.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의 발표 장면

발표 요지를 압축해보면, 고려는 후삼국의 혼란기를 단일한 힘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 세력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런 출발의 특징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인 천하관으로 이어져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외국에 대해서는 왕이라 하면서도 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당연히 사상적으로도 유학이든, 불교든 폭넓게 수용하여 쓰임에 맞게 썼을 뿐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과 같은 특정 종교 탄압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는 다원성에 기반한 사회였고 서로 다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합의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는 것이다.
외국 연구자들로 일본의 칸다외국어대학 도요지마 유카 교수,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의 손호 연구원, 미국의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 교수,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의 존 던컨 교수가 참가했다.
첫날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하와이대학 강희웅 교수의 총평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학자는 에드워드 슐츠 교수와 존 던컨 교수를 지도한 선생이기도 한데, 이제는 원로가 된 제자들의 발표를 자랑스럽게 다시 소개하기도 하고 초창기 고려사연구의 어려움과 연구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년에 하와이대학에서도 고려사 관련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의 연구자들과 논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시는 데서는 학문에 대한 열정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일본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발표 장면

또 하나의 고려 수도인 강화
11월 3일 둘째 날에는 7개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인천과 경기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주제로서 인천과 관련해서는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이 개경 도성과 강화 도성의 구조를 비교하여 의미를 살펴보는 발표를 했고, 민족문화유산연구원 한성욱 원장은 강화 출토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도자기 문화에 대해 고찰했다. 이밖에도 중국 연변대학 정경일 교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의 근황에 대해 직접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 발표 장면

주제별 발표와 토론이다 보니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가기도 했다. ‘경기’의 범위와 변화에 대한 의견 차이는 생각보다 컸으며, 고려시대 ‘경기인’의 범주 설정을 두고도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고대사나 조선시대사에 비해 연구자 숫자와 시민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고대와 조선을 잇는 허리로서, 그리고 조선시대 문화의 뿌리로서 고려왕조가 갖는 역사적 위상은 생각보다 높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종합토론 광경

특히 연변대 정경일 교수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분위기에 발맞춰 북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강화의 고려왕릉를 포함해 확장 등재하고, 반대로 남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에 개풍의 재릉과 후릉을 포함해 확장 등재하면 유적의 완결성도 높이고 문화유산 관련 남북 협력의 발전적 대안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는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주장, 추진해 오며 내부 검토 보고서도 제출한 바 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느꼈던 답사
셋째날인 11월 4일에는 학술대회 장소인 수원에서 고려시대 유적을 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본인의 눈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사학과에 내려오는데, 다행히 이번 답사에는 볼거리가 무척 많았다.

 
용인 서리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부산물

길이가 80미터에 달하는 국내 최대 가마인 용인 서리의 고려시대 백자가마터에는 계절을 알리는 낙엽들 사이로 자기를 굽고 남은 부산물들이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저 얕은 구릉이라고 밖에 생각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용인 처인성은 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 일부가 세월을 거쳐 흘러내려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높이 솟아있는 암벽은 안성, 이천, 수원,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차지했던 처인성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국민대의 박종기 명예교수는 연구 초기에 처인성을 답사하며 기록과 대조해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역사 연구자에게 현장 답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했다. 참여한 여러 대학의 고려시대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노학자의 열정이 전달되었길 빌어본다.

용인 처인성

몸의 비례가 맞지 않는 지방색 강한 불상의 대표로 꼽는 것이 흔히 ‘은진 미륵’이라 부르는 충남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인데, 안성 매산리 미륵보살상도 그에 못지않게 ‘균형 잃은’ 몸매를 자랑한다. 중생구제의 상징이라 할 미륵부처를 자기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세운 고려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안성 매산리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으로의 과제
학술회의라 하면 보통 연구자들끼리 모여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자리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모 대학 사학과 학생이 쏟아내는 질문을 들으며 이제는 시민과 젊은 사학도를 제쳐놓는 학술대회는 수명을 다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중세사학회는 원로학자, 중견학자, 신진학자와 함께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고려시대사 전공 석사, 박사과정생을 다수 초대했고 둘째날 학술회의 종료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나와 선배 연구자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글로만 보던 선배 학자들을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는 설렘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들도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였다. 학술대회에서 오간 수많은 논의보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공부하는 선배와 후배가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주 앉아 학문적 대화와 토론을 하는 기회였다는 점이 더 의미 있었을지 모른다.
잊혀진 것은 아니되, 관심이 적었던 고려시대는 특히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맥락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에서 강화 석릉 주변의 고분을 시범 발굴하고, 마리산 남쪽 자락의 흥왕리 이궁지를 발굴하는 등 이전과 다른 움직임이 인천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그만큼 인천은 고려와 관련된 자산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역시 그렇게 갖게 된 자산을 바탕으로 남북이 함께 공동으로 고려 역사를 조망하고 살피며, 고려의 기반이자 지향인 다원성과 통합성을 인천에서, 나아가 미래 통일 코리아에서 실현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장)




생활예술의 선구자, 전석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나다

같이 노래 부르는 사람들 ‘sing along’

sing along(싱어롱, 같이 노래 부르기).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sing along은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듣던 말이었다. 교회에서 주로 들었다. 복음성가를 함께 부르는 시간,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기를 다뤘고 함께 노래하며 간단한 율동도 하는 시간이었다. 비단 교회뿐 아니라 학교나 사회에서도 종종 sing along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니 부담이 없었고 다 함께 아는 노래여서 더 좋았다. 그게 왜 좋았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시간에 우리는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로 시작하는 ‘실로암’을 불렀고, ‘가방을 둘러맨 어깨가 아름다워…….’ 라고 시작하는 노래나 ‘조개 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같은 후크송들을 신나게 불렀다. 국민가요라고 불리진 않았지만, 그 시대를 거친 사람들 대부분은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그 노래들을 다 배운 것일까?

오랜만에 그런 자리를 보았다. 인천음악플랫폼 1층에 나이 지긋하신 분들 50여 명이 모여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앞에서는 전석환 선생님께서 키보드 하나를 가지고 노래 부르기를 이끄셨다. 노래는 대부분 짧고 알려진 노래였고, 모두 따라 부르기에 쉽게 큰 글씨의 악보로 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여성들이 많다며 키를 낮게 조정해주기도 하셨고 잘 모르는 노래는 좀 틀려도 된다고 하셨다. 익숙한 노래들은 후렴을 반복하거나 빠르기를 조정해 멋있게 마무리하기도 했다. 종종 화음 소리도 들렸다. 모두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고 평화로웠다.

인천음악플랫폼에서 열린 <sing along, 인천> 공연

sing along의 처음, 전석환

전석환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몇 개를 미리 읽었을 때 내가 접한 정보는 sing along을 만든 사람이라는 설명이었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에 감명을 받아 많은 사람과 함께 노래하는 운동을 하셨다. 통기타 하나 들고 많은 사람과 노래를 했다. ‘좋은 노래’를 불러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으셨던 선생님은 군부대, 학교, 방송을 통해 좋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에 집중하셨다.

” 체육회에서 얘기하지만, 생활체육이 성공했잖아요. 체육생활 타이틀을 생활체육으로 바꿨거든요. 내가 얘기하는 게 오늘 이거야. 생활 음악을 하라는 얘기야. 음악 생활이 아니라. 신앙도 생활신앙을 하라는 거예요. 신앙생활 하라고 하지만, 난 그런 말을 안 써요. 목사님에게 바꾸라고 말하죠.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을 할 수 있도록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하죠. 문화예술인들한테도 자꾸 생활 속에서 들어간 작곡을 하라고 하죠.  노래를 불러도 따라부르기 어려운 노래는 갈 때가 되었다는 거야. “

누군가 잘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생활예술은 우리가 처음 발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활체육에서 영감을 얻어 생활예술이라는 단어를 생각한 것처럼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 분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오신 분을 만나게 된 것이 기뻤다.

2018.10.18 <sing along> 공연을 마치고 전석환 선생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현된 노래부르기

“공개방송하면 찬조 출연(게스트 공연이 있는게)하는 게 단일지사거든요. 근데 나는 다 함께 노래하거나 삼천만이 합창하는 거지. 누구 한 사람만 독창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학교나 직장에 가면 직원 중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데려다가 마이크 주고 같이 부르게 하기 위한 게 목적이지. 누군 혼자 남아서 솔로 부르고, ‘와, 잘한다’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게 찬송가에서 얻은 거야. 교회에서는 예배가 기도와 찬송, 설교인데요. 그중에서 찬송을 무시하는 목사들 많은데, 이거는 내가 일본 가서도 얘기했지만, 찬송을 열심히 하는 교회는 잘 돼요. 단합이 잘되거든요. 공동체 의식이 좋아지거든. 그런 거를 어렸을 때부터 터득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에서 연극을 하거나 청년들이 뭐 한다고 하면 나는 솔로를 안 시켰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창영교회에서 성가대 지휘할 적에 4시간 전곡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중 헨델의 메시아에 솔로 부분이 있지만, 나는 솔로를 안 시켰어. 소프라노 파트도 전부 같이 불렀죠. 어떻게 보면 좀 이단적인 행동을 한 거예요.”

내가 인터뷰 당일 목격한 노래 교실에서도 그랬다. 모두 즐겁고 편하게 부르는 노래로 1시간이 꽉 채워졌다. 절대 가르치지 않았고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리더’이기를 바라셨다. 리더는 ‘인도자’이지 ‘지도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인도자가 되어 sing along 시간을 편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도 끊임없이 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통기타를 치는 것을 이단시 해왔지만, 그는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신디사이즈도 처음으로 도입했다. 교회나,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들은 선생님의 그런 행보를 싫어했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나쁜 악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노래가 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 어떤 악기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생활문화가 통기타, 오카리나, 우쿨렐레, 하모니카 등 대학에 전공이 없는 악기로부터 시작했고 공예도 캘리그라피, 바느질, 뜨개질 등에서 시작되었다.이처럼 우리는 고급문화 저급문화를 구분해 저급문화를 ‘아마추어’ 또는 ‘예술적인 것이 아닌’ 것들로 취급했었다. 그러나 생활예술이 부상되면서 그런 경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전석환 음악가 인터뷰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 장충체육관에 전국대회로 사람들이 모였어요. 거기서 독창곡 <보리밭>을 시작하는데, 옛 생각이라는 노랫말에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온 거예요. 이 장충체육관이 뜨는게 아니라 내 몸이 뜨는 것 같았어요. 옛 생각에서부터 음이 올라가는데 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니까요.  ···(중략)··· 그게 슬로우 락이라서 소리만 크게 부르면 딱 뭉쳐지거든. feeling이 부딪히는 게 아니라 꼬아지니까 이건 무서운 거야. 내가 거기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막 신나게 부르는 게 아니고 슬로우 락이라서 감정 세계가 느껴졌어요. 그게 묶어지면서 꼬아지는 거죠. 내가 그래서 핵폭탄이 터져도 그건 부서지지 않을거 라고 얘기를 했어. 노래가 그만큼 무기보다 무서운 거라고.  ···(중략)···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감동을 하듯이 그런 데서 오는 엔도르핀은 대단하죠. 그건 돈 주고도 못 사고 의학적으로도 해석을 못 해. “

인터뷰하기 전에 전석환 선생님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다. 그는 군인 출신이기도 했고, 클래식 전공자였다. 이북이 고향이었고, 월남해서 조국을 위한 일에 관심이 많았고, 군대, 새마을 운동 등 관 주도의 일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한 그분의 역사가 나와 너무 달라서 혹시 말이 통하지 않거나 너무 다른 생각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화하면서 그 걱정은 없어졌다. 오히려 나는 생활예술을 가르쳐 주실 선배님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술이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라고 평생을 피력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좀 더 대중적인 악기를 도입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노래 부르기를 원했던 그는, 예술이 주는 감동을 되도록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오랜 노력 때문에 지금 생활예술이 공론화 되는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그의 ‘함께 노래 부르기’는 지금 ‘누구나 어디서나 예술하기’로 발전했고, 통기타와 신디사이저의 실험은 우쿨렐레, 오카리나, 하모니카가 되었다. 그의 원칙이었던 ‘좋은 노래, 부르기 쉬운 노래’는 아직도 우리의 숙제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늘 자신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예술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시대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 것이다.

인터뷰 진행 정리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 사무처장 최경숙

사진 / 정책연구, 개항장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