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의 축제, 어떻게 변할 것인가

코로나19 시대의 축제, 어떻게 변할 것인가

김지선(㈜티앤엘 대표이사)

코로나19가 발발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기 무섭게 불어닥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상태에 빠뜨렸다. 과거 역사 속에서나 겪었던 팬데믹 상황을 누구도 실제로 겪어보지 못해 직면한 모든 상황들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작년에는 백신만 나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백신이 개발되니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나타나고 있어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국에 축제라니...집단적 신명과 대규모 운집을 전제로 하는 축제는 정말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작년 상반기에는 축제를 개최해야 하는지 취소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다가 9월 기준으로 97.6%가 취소 혹은 연기를 선택하였다. 그중 몇몇 축제들은 발 빠르게 대표 프로그램 위주로 비대면 언택트(Un-tack)와 온택트(On-tack) 방식으로 진행하여 겨우 개최 취소를 면할 수 있었다. 초기에 진행된 프로그램들은 단순 축제현장을 온라인으로 실황 중계하는 방식이었지만, 랜선으로 참여하는 방식과 체험키트를 발송하여 집에서 라이브로 참여하는 방식 등 점차 다양한 방식들이 고안되었다.

보령머드축제 ‘집콕머드체험키트’ (사진제공: 재단법인 보령축제관광재단)

특히 특산물축제들은 궁여지책으로 축제를 취소하기보다는 라이브커머스를 활용하여 지역경제를 살리고자 애썼으나 축제성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화천산천어축제>가 축제를 위해 준비한 산천어 밀키트(Meal-Kit) 세트로 판매에 성공하면서 축제를 대표하는 상품개발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축제가 고유의 대표상품 개발이 취약했는데 단순히 지역특산품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인의 트렌드에 맞게 재가공한 상품을 개발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가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사전예약제로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하는 방식은 축제를 개최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축제에 참여하는 인원이 너무 제한적이고 타인과의 교류와 일탈성을 느끼기에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 행사일 수밖에 없다.

춘천마임축제 <춘천마임백씬; 100Scene 프로젝트> (사진제공: 사단법인 춘천마임축제)

그렇다면 축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축제를 준비하는 지자체와 축제 기획자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축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온라인 축제는 임시방편으로 현재 축제상황을 보완할 수는 있지만 결국 오프라인 축제를 대체될 수는 없다는 의견과 비대면 방식의 축제는 또 다른 트렌드로 진화하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모두 맞는 주장이다. 디지털 시대에 랜선으로 접속해 교감하고, 메타버스로 가상공간을 만들어 VR과 AR로 체험성을 확장했지만 역시 현장(on-site)을 떠난 축제는 진정한 축제일 수 없다. 그렇지만 코로나 종식 이후 이전의 모습으로 똑같이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새로움을 맛본 이상 우리는 다시 융합되고, 진화하여 새로운 모습의 축제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을 겪으면서 많은 축제들은 ‘비대면 축제 기획’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전에 몰랐던 더 큰 시장을 발견했다. 비대면 콘텐츠는 물리적 제약과 시공간을 뛰어넘게 했고, 시간과 돈, 건강, 접근성 등의 이유로 축제를 방문하지 못했던 비 참여자들도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어느 TV 광고 카피처럼 ‘무관중에서 무한관중으로’수준 높은 비대면 축제 콘텐츠는 시간을 뛰어넘고, 지역을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축제가 더 큰 시장, 해외로 눈을 돌릴 때이다. 그동안 한국축제는 글로벌 축제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지만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축제는 아직 탄생하지 못했다. 올해 2021년에는 전국에 1004개의 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인 특유의 뛰어난 창조적 DNA와 기술력으로 좀 더 진화한 콘텐츠가 개발되어 축제산업에 불어 닥친 코로나라는 시련이 오히려 한국축제가 글로벌 축제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언젠가 마스크를 벗는 그날에는 소란스러움과 북적임, 그리고 샤우팅이 있는 축제현장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 축제장으로 물밀 듯이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가상공간에서 함께 축제를 즐기는 새로운 방문객을 만나게 될 것이다.

김지선(金智宣, Kim, Jisun)

㈜티앤엘 대표이사
한양대학교 관광학 박사
한양대학교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
파주시‧포천시‧양주시‧고흥군 축제추진위원회 위원
전)의정부음악극축제 사무국장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 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세기말 아날로그 시대의 감수성을 듬뿍 담아낸 영화 <접속>의 명대사가 흐르는 공간, 종로3가 옛 피카디리 극장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권칠인 감독을 만났다. 20~30대 여성심리를 가장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 <싱글즈> 감독이자 인천영상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권 감독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시작되었다.

‘파시’, 그리고 할리우드 키드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을 파시(波市)라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 파시는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좌우하는 가장 큰 행사였다. 권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할리우드 키드로 살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로 파시를 꼽았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극장이 가장 많기로 손꼽히던 도시였다. 파시만 되면 돈과 사람이 몰리니, 문화소비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의 조기파시는 특히나 유명했다고 한다.

애관, 미림, 오성, 문화, 인천, 현대, 동방, 금성, 아폴로, 자유……. 앉은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극장명만 해도 십 수 가지니, 그 시절 인천에 얼마나 많은 극장이 있었는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시절 권 감독에게 극장은 놀이터이고 휴식처였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천의 할리우드 키드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곧장 영화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건축공학과로 진학했어야 하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 터이니, 영화로 전공을 삼는다는 것은 요원하였으리라. 그러나 영화에 대한 그의 갈증은 대학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영화아카데미를 들어가면서 영화인으로 사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권 감독은 영화인으로서의 시작을 이렇게 소회한다. 그가 영화를 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한 가지. “앞으로 나는 분명히 가난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을 이끌었다. 그는 “적어도 정직할 수는 있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보통의 삶과 감정을 담겠다는 것을 하나의 좌우명처럼 마음에 남겼다고 말한다.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칠인 감독이지만,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인천과 보다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영상위원회(이하 영상위)의 위원장이자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위촉된 것이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의 산하기관이었던 영상위는 2013년 독립법인으로 분리된다. 같은 해에 인천독립영화협회도 설립되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뜻깊은 사건이다. 한 기관이 산하기관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단지 예산과 조직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자칫 그 기관의 위상과 영향력까지 축소시킬 위험을 내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이자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영화가 가진 성격을 이해하고 수용해준 재단의 용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러한 상생의 결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결단으로부터 비로소 인천의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마련되었음에, 권 감독은 재단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였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사진: 인천영상위원회)

그렇다면 어엿한 독립법인이 된 영상위의 위원장으로서 그가 진행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권 감독은 망설임 없이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꼽았다.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의 정수를 ‘합수(合水)’라고 강조한다. 말 그대로 ‘물이 합쳐지는 곳,’ 그 뱃길을 타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모여드는 곳. 그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 시작은 재단과 함께 진행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다양성 사업인 <무지개다리 지원사업>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인식이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디아스포라영화제>가 탄생되었다. 권 감독이 떠난 뒤에도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로서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고향인 인천을 위해 좋은 선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았다.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 그는 오늘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항상 보통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장르가 멜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의 대표작인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등은 모두 그러했고, 그의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들에서 좀 더 탁월하게 드러났다.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하지만 놀랍게도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영화’라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이제 ‘영화’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가 이미 새로운 매체와 형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비법(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이미 비디오는 사라졌고, 극장도 변화했다. 다양한 플랫폼이 출현했고 거기에 맞춰 영상의 형식도 달라졌다. 우리가 사용해 왔던 ‘영화’라는 말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새로움’이 이미 영화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영화’라는 말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그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극장에서 가장 최신의 콘텐츠를”

이 변화 속에서 인천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권 감독은 현재 인천시가 진행하고 있는 ‘애관극장 공공 매입 여부’와 관련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관극장의 역사성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제는 그 활용이다. 권 감독은 공공자산으로서 극장을 매입해서 그저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활용하는 데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오히려 이 극장을 다시금 살아있는 공간으로써 활용해주길 당부한다.

애관극장

가령 애관극장이 가진 대형 스크린을 새로운 콘텐츠를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플랫폼으로 떠오른 유튜브, 그 안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최첨단의 콘텐츠를 위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료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 한류가 뜬 이후에는 내내 그 과실에만 탐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이제라도 ‘국·영·수 세력’이 만들어낸 이 관료제와 열심히 싸워야 한다. 성과와 업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피력해야 한다.

권 감독은 인천이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폭넓게 수용하려는 태도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인천시의 선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인천의 문화인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긴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해양 도시, 한반도 화약고, 실향민의 터전, 자동차 산업의 요람, 노동 운동 산실…’ 인천을 지칭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이 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는 인천을 아울러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인천과는 그렇게 가깝지도, 그다지 멀지도 않은 충북 제천 출신인 박 PD는 2004년 OBS의 전신인 iTV에서 일하면서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과는 야구라는 접점이 있었다. 그가 응원했던 전북 연고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난 2000년 해체됐는데, SK와이번스가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인수한 뒤 팀 연고지를 인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직장을 위해 온 인천에서 ‘내 팀’을 조우하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프로 야구 정규 시즌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야구장을 찾았다. 인천을 ‘야구 도시’로 접한 박 PD는 인천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도 빼놓지 않았다.

박 PD는 자신을 연출자, 편집자라고 하지 않는다. 인천이라는 도시 속에 축적된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톺고 살피는 ‘이야기꾼’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인천 섬 곳곳에 사는 주민의 삶과 이야기박 PD는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촬영차 울도를 방문하면서 인천의 섬 이야기를 다루기로 다짐했다. 당시 울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도민 중 젊은 축에 드는 건 60대였고,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정착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 섬이었다. 그물이 터질 정도로 새우와 조기가 잡혔던 이곳은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과거의 영광은 남겨진 폐가들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울도는 하루로 보면 해지기 직전이고,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말년이 다 된 섬이었어요. 인간이 태어나 청년이 되고 장년에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노인이 돼 남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순리가 아니더라고요. 섬 역시 인간의 생애와 같은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섬들을 찾아 어민의 고달팠던 삶 얘기를 듣고,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섬 곳곳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박 PD는 지난 2018년 인천 지역 섬 중에 육지와 연결돼 있지 않아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을 위주로 로드다큐 <그리우니 섬이다>를 기획했다. 북한 장산곶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백령도부터, 황금빛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굴업도, 섬소사나무 군락지인 백아도 등 10여 개 섬의 모습을 담았다.

로드 다큐 <그리우니 섬이다>, OBS경인TV, 13부작, 2018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이 다큐멘터리 속에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유명인이나 전문 리포터가 아닌 다섯 명의 사진작가다. 작가들은 수년간 여러 차례 탐사 작업을 통해 인천 지역 섬을 들여다본 섬 전문가다. 첫 회 ‘큰 물섬, 덕적도’ 편은 덕적도가 고향인 서은미 작가가 등장하고, ‘백령도 5년 만의 재회’에 나온 노기훈 작가는 『백령일지-백령도에서의 12일간의 기록』(호밀밭, 2018)이라는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리우니 섬이다’에는 작가들이 섬을 거닐며 촬영한 사진도 나온다. 움직이는 영상 속에 정지된 순간을 함께 담았다는 게 또 하나의 볼거리다.

1986년 5월 3일 시민회관에 모인 시민들… 5·3민주항쟁 다룬 ‘그 날’박PD는 인천 5·3 민주항쟁이 그 이듬해 있었던 6·10 민주항쟁을 이끈 기폭제였다는 것을 2017년 다큐멘터리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로 조명하기도 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 남구 주안동 시민회관에서 대학생·노동자 등이 펼친 반독재 투쟁이다. 그러나, 5·3민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이를 주제로 다룬 방송도 없었다고 한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 OBS경인TV, 2017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 부산과 마산 지역 정신을 대표하는 항쟁으로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5·3 민주항쟁은 인천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게 안타까웠어요. 5·3민주항쟁은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진 노동·여성·빈민 운동 등이 응축된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그날을 통해 지역의 시민 정신을 알리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 날>의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 PD는 당시 회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지 못하자 직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에 동의한 부평구와 남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기초자치단체·시민단체의 지원 덕분에 ‘그 날’을 제작할 수 있었다.

치열했던 인천의 현대사, 시민의 삶이 곧 도시의 역사인천이 품은 인물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1890~1959)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고, 광복 후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8년 일명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조봉암 선생의 삶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통찰하고자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습니다. 과거를 통해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인천의 오래된 도심인 동구 화수동 무네미 마을 곳곳을 살펴보는 공간다큐 <만남>을 제작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무네미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공간다큐 만남은 무네미 마을 속에 위치한 작은 책방부터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여러 공간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노동·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평가받는 도시산업선교회는 최근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논란이 일었던 곳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를 찾고 이 도시의 가치를 알리겠다는 게 박 PD의 목표다.

“인천을 무대로 한 시민들의 삶을 담고 싶습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한 부두 노동자, 실향민, 산업화 과정에 있었던 공장 노동자들까지요. 많은 이가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이 도시의 역사로 축적됐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일궈낸 인천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근대 음악의 향연, 인천 콘서트 챔버

근대 음악의 향연,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인천 콘서트 챔버 대표)

토크 콘서트 <모던상하이 모던인천>서구 문물이 유입된 개화기에는 대부분의 문화 양식이 변화를 맞이한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이다. 19세기 중후반 서구 열강의 입김은 동아시아의 음악 문화를 변화시켰다. 각국의 정서는 서양의 조성 음악 선법을 뒷받침하여 새롭고 다양한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그중 대표적으로 미국의 재즈가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재즈는 한국과 중국의 20세기 초에 유입되었다. 이후 각국의 정서와 결합한 모습으로 재탄생하며 유행가의 초석을 다졌다. 이렇게 탄생한 음악 장르가 중국의 ‘상하이 라오거’와 한국의 ‘재즈송’이다. 재즈의 영향으로 탄생한 양국의 음악은 각기 다르면서 비슷한 구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던상하이 모던인천>, 인천아트플랫폼, 2021.7.31.

인천 콘서트 챔버는 <모던상하이 모던인천> 공연을 2021년 7월 31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개최했다. 개항기 서양 문물의 유입지였던 옛 상하이와 인천을 조명하며 재즈에서 영향받은 양국의 음악을 소개하는 공연을 했다. 무대에는 단국대학교 장유정 교수, 상명대학교 최명숙 교수,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 대표의 대담과 함께 양국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본 공연은 단순히 각국의 음악을 알리는 자리를 넘어 작품으로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의 시대상과 사회상 그리고 음악적 정서에 관한 접점을 공유했다. 공연은 한중의 근대 유행가를 도구로 국가와 민족적 문화의 다양성을 소개하고 존중하는 것에 기획 의도가 있었다.

인천 콘서트 챔버와 ‘근대 음악’언제부터인가 ‘개항기’, ‘개화기’, ‘근대’ 등의 키워드가 주목된다.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를 들추는 다양한 활동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천 콘서트 챔버는 근대 문화를 단순히 콘텐츠의 소비재로 활용하지 않는다. 풍파와 격동의 시대인 근대의 희로애락을 억지로 감정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 문화 중 음악 유산을 발굴하여 그것의 의미를 찾고 현시대에 전달하는 것이 활동의 주된 목적이다. 음악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의 옛 모습을 반추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인천근대양악열전> 공연 모습
인천근대음악 현장학습 강연

또한, 한국인의 ‘음악적 모국어’ 형성에 영향 끼친 근대 인천을 넘어 21세기 인천의 새로운 음악적 역할을 모색한다. 음악적 모국어란 음악을 인지할 때 한국의 전통 음악보다는 서양의 조성 음악을 보편적인 음악으로 인지하는 음악적 관습을 의미한다. 제물포 개항 후 2년 뒤 1885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음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인천 내 근대식 학교의 찬송가 또는 창가라 불리는 음악 수업은 대한민국 국공립학교의 음악 학제를 편성하는데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었다. 근대 인천이 국민의 음악적 모국어 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의 존재는 엄연하다. 인천 콘서트 챔버는 한국인의 음악적 정서 확립에 기여한 옛 인천이 21세기에는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인천 콘서트 챔버의 작품 활동단체의 활동 철학과 방향은 주로 공연 무대, 음반 제작, 강연, 기고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 안팎에서 발현된다. 공연의 경우에는 근대 인천 연구와 작품 활동의 역사학자, 음악학자, 인문학자, 사진작가, 문학작가, 미술작가 등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동시대 음악과 접목하는 토크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으며 <원더풀 동인천>, <인천근대양악열전>, <모던상하이 모던인천>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인천시 관내 초중고교를 방문하여 한국과 인천의 근대 음악을 강연과 공연이 결합한 렉처 콘서트 형태인 <역사 음악 이야기: 근대 음악 콘서트>도 진행하고 있다. 나아가 토크 콘서트와 렉처 콘서트를 넘어 극 형태로 작품을 전환한다. 무성영화 시대에 존재했던 변사 배역을 합류시킨 낭독극 <이화자전>. 그리고 인천의 다양한 근대 음악을 묶어 소개하는 음반인 <인천근대양악열전>도 발매하였다.

인천 콘서트 챔버 근대음악 공연 홍보물
<인천근대양악열전> 음반

올해 하반기에는 낭독극을 음악극으로 전환하여 <이화자전>을 개최한다. 이와 함께 본 작품에 삽입되는 음악 작품을 한데 묶은 음반인 <인천 용동 권번 예인 이화자 다시 부르기>도 CD와 LP로 동시 발매 예정이다. 특히, 이화자 소재의 다양한 작품 활동은 인천 용동 권번 출신 예인의 재조명과 같은 원론적인 의도가 아니다. 이화자의 삶과 작품으로 한국 근대의 여성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한계를 지적하고 고찰하는데 기획 의도가 있다.

인천 콘서트 챔버 단원들

인천 콘서트 챔버의 나아갈 길음악은 문화이다. 음악이 문화의 개념 중 하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음악 자체가 문화의 한 갈래이다. 때문에 음악은 시대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 음악을 통해 특정한 시대를 바라볼 수 있다. 특히 한국 근대 음악은 추억을 소환하는 예스러운 음악이 아닌 시대의 초상이다. 인천 콘서트 챔버의 다양한 활동은 인천의 근대를 음악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인천을 기점으로 발화된 서양 음악의 궤적을 들여다보며 작품 연구와 더불어 시대와 사회의 현상까지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한국 근대 역사 속 인천이 가진 의미를 음악으로 전달한다. 지난날의 빛과 그림자가 잊히지 않도록 그리고 기억될 수 있도록 인천 콘서트 챔버는 오늘도 노래한다.

인천 콘서트 챔버 홈페이지: www.inconcham.com
사진제공: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李承黙, LEE SEUNG MOOK)

– 인천 콘서트 챔버 대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음악분야 심의위원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문화 음악분야 연구생




안녕하십니까! 통합문화이용권 담당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통합문화이용권 담당자입니다

남경진(인천문화재단)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3번의 전화벨이 울리기 전 어김없이 나의 손에는 수화기가 들려 있다. “안녕하십니까! 인천문화재단 통합문화용권(문화누리카드) 담당자입니다.” 수화기 건너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저 한부모 가정 엄마인데요, 그 문화누리카드 있잖아요. 문자 받았어요.” 2021년 올해부터 문화누리카드에 자동으로 지원금 10만 원이 충전되는 자동 재충전 안내 문자를 이야기하시는 듯하다. “자동 재충전이 정상적으로 되었다는 문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거 말고…….” 그럼 인천시와 군‧구 협조로 발송된 카드 이용안내 문자를 말씀하시는 건가? “아! 문화누리카드 이용하시라는 안내 문자를 받으셨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기계처럼 자동으로 나오는 멘트를 다 읊기도 전에 나의 말을 막으셨다. “다 썼어요.”, “네? 아! 10만 원을 다 쓰셨어요? 잘하셨습니다!”

“문화누리카드 덕분에 아이가 너무 즐거워했어요.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가 평소 친구들과 놀러 다니질 못했어요. 학교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엄마인 제가 여유가 없어서인지……. 그런데 문화누리카드로 친구들과 영화관 가서 영화도 보고, 서점에 가서 책도 사보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문화생활을 즐길 기회가 생겨 좋아했어요. 제가 일하느라 바쁜 나머지 아이에게 여유롭게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문화누리카드로 아이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함께 어울릴 기회가 되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바라보며 처음 벨이 울리며 떠올랐던 여러 생각은 사라지고, 하나의 생각만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문화누리카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해냈다!’라는 것이다.

문화누리카드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통합문화이용권(문화누리카드)은 경제적, 사회적, 지리적 어려움으로 문화예술을 생활 속에서 누리기 힘든 분들에게 지원하여 문화예술, 관광, 체육 분야 활동 등에 이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전화를 주신 분은 단순히 이 10만 원 카드 지원 때문에 고마워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이 한 장의 카드는 아이에게 단순히 문화예술 비용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경험’을 주었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 영화를 보여주고 공연장에 데려다주고 하는 일이 곧 문화생활을 모두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문화생활을 함께 할 기회를 주는 것이 곧 문화누리카드의 진정한 역할이다. 문화예술은 처음 벽이 생기면 접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아이는 문화누리카드를 통해 친구들과 즐겁게 문화예술을 경험하며, 이 벽을 일찌감치 허무는 기회를 가졌다. 문화 향유의 기회만이 아닌 즐길 방법까지 문화누리카드를 통해 다가갈 수 있었다.

현금을 주어도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연극을 관람하기가 쉽지 않다. 물질적 빈곤만이 문제가 아닌 정신적 빈곤 역시 우리가 챙겨야 하는 부분이다. 문화누리카드를 통해 문화예술이 대단한 것이 아닌 우리 삶 속에서도 쉽게 접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는 이 아이는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여유를 찾을 줄 알게 될 것이다.

통합문화이용권 사업 담당자로서 나는 이 순간이 좋다. 물론 사업을 진행하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난관과 사업 운영에 필요한 예산 확보 과제가 매년 있지만, 이 한순간으로 나와 내 동료는 한발 한발 움직일 힘과 원동력이 생긴다. 벨소리가 또 울린다. 이제 그만 정리할 시간이다. 오늘도 나와 내 동료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문화누리카드 현장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남경진(南炅瑨, Nam Kyeong jin)

2016년부터 인천문화재단에서 통합문화이용권(문화누리카드)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김지영, 최수련, 편대식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 김지영 KEEM Jiyoung

김지영은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뜻밖의 사고처럼 벌어지는 사회의 사건 배면(背面)에 위치한 구조적 문제와 그 사건이 돌출된 양상을 통해,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맺는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는 세월호가 드러낸 세계의 균열에 천착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입주 기간 동안에는 작품 제작을 위한 연구과정을 세분화하여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더불어 초가 심지를 태우며 발하는 빛의 다양한 열감을 포착하여 담아낸 <붉은 시간> 연작을 보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그리기 방식을 확장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고민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익숙해서 감각하지 못하거나, 감각하지 못하도록 가린 시스템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뎌진 삶의 기울기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 작업이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당겨오거나, 우리가 더 이상 의식하고 있지 않은 대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길 바란다. 우리에게 희미한 것 혹은 무뎌진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깊숙이 침잠한 것을 두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기에, 매체와 그 형식을 구성하는 일에 더욱 고심하게 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단어도 각각 쓰이는 때와 불러내는 인상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미술에서의 매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설치, 회화, 책, 사운드, 영상 등 각각의 매체가 고유의 속도를 지니고 있고 저마다 압축 가능한 범주와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작업이 의미를 전달할 속도와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이에 적합한 매체와 형식을 고민하여 작업을 만들고 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사회적 사건을 마주하는 태도를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2018년 산수문화에서 열었던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전시는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을 막연한 반복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반복되어온 것인지 구체적으로 목도하고자 진행한 <파랑 연작>(2016~2018),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구축되는 역사를 은유하는 <기억의 자세>(2016/2018)로 구성되어 있다. <파랑 연작>과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195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있었던 사건들 중 와우아파트,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유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32개의 사건을 바탕으로 삼는다. 구조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그리기[<파랑 연작>]와 쓰기[<닫힌 창 너머의 바람>]를 통해 사회적 사건의 반복성과 현재성을 드러내고, 그 유사성 속에 세월호 사건을 넣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하게 세월호 사건을 호명하고자 했다. <기억의 자세>는 뜨개실이 전시 기간 동안 천천히 한 코씩 풀려나가는 설치 작업이다. 움직임을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풀리던 실이 어느새 실타래가 되는 모습을 통해 묵묵히 흐르는 시간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사회적 사건은 평범한 여느 날을 비극적인 날로 뒤바꾸고, 개인을 재난의 희생자로 만든다. 이는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개개인의 삶이 역사의 흐름을 이룬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개개인이 동시대의 사건 혹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사유하는지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차가운 머리로 그 구조를 인식하되, 뜨거운 공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 하나의 지점 혹은 두 지점의 중간이 아니라, 두 지점이 함께 작동해야 비로소 세계의 재난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이와 같은 사회적 사건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의 토대를 담아낸 전시였다.
나는 작업을 준비하면서 역사의 곡절마다 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사건을 어떻게 휘발시켜왔는지 그 반복되는 실책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 반복성이 동시대 재난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것의 현재성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그 터전을 이루는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모든 투쟁은 삶을 터전으로 하며, 모든 삶은 죽음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모든 죽음은 저마다 고유하다. 나는 그 각각의 죽음이 얼마나 고유한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잊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더불어 감히 내 작업이 작금의 사회를 마주한 하나의 미술로서의 기록이 되길 바란다.

작가정보: keemjiyoung.com

■ 최수련 CHOE Sooryeon

최수련은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재현되는 동양풍 이미지의 양상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을 지켜보며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낡고 이상한 것으로 치부되는 ‘동양적’인 것들을 반쯤은 의심하면서도 좋아하고, 그것의 효용을 다시금 상상해본다. 동북아시아가 공유하는 전통적인 클리셰 이미지를 바탕으로 비애, 여성, 현실과의 괴리, 내면의 오리엔탈리즘, 의심, 무지와 부조리 등을 그려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선녀>(2017~)나 <태평녀>(2019~) 연작과 같은 전통 동양풍의 여성 이미지를 주로 그려왔다. <태평녀> 연작에서는 <선녀>처럼 출처가 비교적 명확한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라 주로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성 인물들을 그렸는데, 이는 선녀를 포함한 동양풍의 예쁜 여자 이미지의 소비 방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클리셰를 그리고 싶은 나의 모순적인 욕망을 직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내 작업의 기저를 이루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비애감을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20년 산수문화에서 진행했던 개인전 《무중필사 霧中筆寫》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익숙한 작업 방식에서 탈피하여 손에 익지 않은 방식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던 결과물이 주를 이룬다. 재료도 바꾸고, 여러 이미지 레이어들을 겹치는 방식을 시도해봤다. 가볍게 쓰고, 긋고, 다듬고, 칠하면서 회화의 조형적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전시였다. 기존 유채 작업에서도 사진의 참조 비중이 점점 더 줄면서,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단순한 필치로 그려내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태평녀, 리넨에 유채, 145×112cm, 2020

‘한자보다 한글이 더 익숙한 세대’를 위한 필사 작업은 내가 한자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모름의 상태가 너무 불편해서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다. 배워가면서 작업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도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의 주요 관심사는 감각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가볍고 재밌게 그리기’다. 대형 캔버스도 ‘이건 그냥 습자지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리는 것이다. 드물지만 내 그림을 보고 깔깔 웃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 작품이 성공했다고 느낀다. 그런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
최근 몇 년간 작업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금년은 그 변화를 더 연구하고 심화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작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했던 《태평선전》 전시에서 한자가 포함된 광고물 형식의 작품 제작을 시도해보면서, 인쇄체의 글씨를 따라 쓰고 다듬는 과정이 ‘쓰기’가 아니라 ‘그리기’에 가깝고, 그림을 처음 그리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볍고 재밌게 그릴 수 있었기에 기존 작품 안에 이러한 작업 방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또한 1년간 눈여겨본 동인천에 위치한 문 닫힌 무속용품 상점에 대한 리서치도 조금씩 시작해보려고 한다.

■ 편대식 PYOUN Daesik

편대식은 이미지와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으며 현재는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나’라는 매개를 통해서 시간을 물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연필로 작업의 표면을 칠하는 지난한 반복적 행위를 통해 시간을 기록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개항기 근대 건축물이 보전되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개항으로 인한 문화의 뒤섞임을 표출하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연필로 칠한 표면은 마주한 시공간을 비추는데, 시간과 문화가 뒤섞여 공존하는 공간에 작품이 개입되면서 발생하는 순간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연필로 화면을 검게 칠하는 지난한 과정의 작업을 해왔다. 내 작업은 장지를 여러 겹 덧붙여 두꺼운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일정한 비율로 작아지는 기하학적 도형의 선을 눌러 자국을 낸 후, 표면을 연필로 칠하는 과정을 거친다. 나는 작품의 표면을 통해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와 그 작업 과정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 가볍게 소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표면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없애고, 작업의 물성을 더욱 강조하며 시간을 물질화함으로써 작업에 내재된 시간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작업 과정을 간략히 말하자면, 먼저 작품의 지지대인 패널을 만들고, 그 위에 퍼티를 두텁게 바르고 갈아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그 위에 아크릴 도료를 올리고 다시 갈아내어 더 고르고 매끈한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작 지점부터 끝 지점까지 한 방향의 선들을 그려 표면을 칠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 번 칠하고 지나간 자리는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Moments,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Moments 전시 전경,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17년 (재)한원미술관에서 선보인 개인전 《순간의 연속; A Series of Moments》에서 전시했던 작품 중 일 년 동안 작업했던 <Moments>(2017)를 꼽겠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화면을 연필로 채운 작업으로, 작업의 크기 때문에 제작 과정 중에는 작품 전체를 본 적이 없었고, 전시장에 설치한 후에야 처음으로 전체를 확인했었다. 드라마틱한 이미지나 서사는 없지만, 일 년의 시간을 한 공간에서 바라봤던 전시 작업이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게 있어 작업은 시간을 소비하고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얻어진 결과를 두고 과정을 되짚어가는 과정으로 관객들과 마주하게 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관객이 인식하고 감상했으면 하는데 대개는 이러한 과정은 직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작업을 대하는 관객들은 작업을 보고 "전시 없나요?", “금속판을 가져다 뒀나요?”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면 내부로 들어가는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대화를 통해서 나 또한 변하는 지점들이 발생하고, 관객도 영향을 받고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흥미롭고 이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의 작업은 아직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이 없지만, 진행해오던 작업의 흐름을 이어가며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작업에 녹여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지속하는 것이다. 작업을 지속하고 시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싶다.

* 작가가 제공한 사진과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소설가 이재은

이름: 이재은(李在恩, Lee Jae Eun)

분야: 문학(소설)

인천과의 관계: 인천거주

작가정보: 마음만만연구소(theredstory.tistory.com)
1인 문화예술공간. 소설창작워크숍, 단편소설 깊이읽기, 문학필사 30일 온라인 강좌 등을 진행한다.

수 상
2015 중앙신인문학상
2019 심훈문학상
단행본
소설집 『비 인터뷰』(아시아, 2019)
짧은소설집 『1인가구 특별동거법』(걷는사람, 2021년 10월 출간 예정)
기 획
2017~2021 십분발휘 짧은소설 공모전(마음만만연구소, 나비날다책방)
2021~2022 초보 독서가를 위한 짧은소설 안내서(마음만만연구소)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이재은, 『비 인터뷰』(아시아, 2019)

등단작 「비 인터뷰」로 하겠습니다. ‘대표격’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 작품을 통해 작가로 인정받았으니까요. 그런 걸 떠나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인’ 최선의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저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저를 아끼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살고 싶었던 바람을 글로 풀어내려고 했거든요. 내가 미치겠으니까 타인에게 마음을 쓰거나 돌볼 여력이 없는 거예요. 세계가 좁았다고 해야 하나, 좁은 지붕 아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기회에 인터뷰 명목으로 지붕 너머 사람들, 마을 밖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겼어요. 인터뷰는 대화잖아요. 마주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거예요. 생각과 의견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눈빛도 스치고 감정도 느끼면서 ‘인터뷰어인 나’와 ‘소설가 지망생인 나’가 함께 꿈틀거렸던 것 같아요. 글쓰기에 변화가 생겼고, 쓰는(말하는) 존재와 읽는(듣는) 존재를 동시에 배려하게 되었습니다.

2.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청탁이나 마감이 ‘작업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얼마 전에 책방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기회가 있었어요. 책방 이름과 주인장 닉네임을 빌려도 되느냐고 묻고, 그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그 책방에는 주인보다 더 주인 같은 고양이가 있는데 소위 ‘사랑 덩어리’거든요. 고양이를 보러 책방에 들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죠.
제가 쓴 소설에서 저로 추측되는 작가 J는 그 고양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미신을 적용, 몇 번이나 냥이에게 해를 가하죠. 그렇게 된 이상 아무리 픽션을 썼다고 해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주인장이 싫어하면 어쩌지? 왜 맘대로 냥이를 죽이냐고 하면 어쩌지? 떨리는 마음으로 소설을 보냈는데 이틀 동안 답장이 없는 거예요. 큰일 났군, 단단히 화났나 보다, 새로 써야 할까? 흠…….
이틀 만에 통화가 됐는데 개인적인 일 때문에 바빴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은 아직 보지도 못했고요. 소설은 소설이지, 다행히 잘 이해해주셔서 무사히 작품집에 실었습니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예술가보다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자신을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편한데 언젠가는 당당히 “소설가 이재은입니다.” 밝히고도 싶고 “작가 이재은입니다.”라고 소개하고도 싶어요. 저의 꿈은 소설가(家)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작가(家)가 되는 거예요. 두세 권의 책을 내고 사라진 사람이 아닌 소설로, 에세이로, 여행기로 글집을 짓는 사람[作家]이 되고 싶어요.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10월에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옵니다. 이번엔 짧은 소설이에요.
제목이 『1인가구 특별동거법』인데 제가 1인 가구로 살고 있기도 하고, 특별동거는 음… 외로우니까…(웃음) ‘혼자 사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홀로 #여성 #비혼 #외로움 #늙음’과 ‘죽음’에 관한 사유를 붙잡고 있을 거예요. 로맨스나 기적, 기이한 화해보다는 고통과 억압에 관한 파토스를 세심하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소래습지생태공원

결국엔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냐에 따라 ‘영감’의 형상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마음일 때 어떤 장소에 갔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네, ‘달걀과 닭’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 또는 ‘그 공간’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고 슬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마음은 의식이나 주제, 생각이나 감각으로 바꿔도 됩니다. 우연과 운명의 조화로 무언가 만났을 때 찌르르 울림이 오죠. ‘그곳’을 대상화하기보다 ‘여기 있는 존재’를 더 아끼고 그들에게 마음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소래습지생태공원이 꽤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설탕밭」(『1인가구 특별동거법』)은 그곳을 배경으로 쓴 짧은 소설인데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별이 있어 그랬다.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어. 몇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빛나는 별이, 밝다고 할 수 없는 그 작은 빛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어.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별빛 하나만으로 족해. 나를 비춰주는 빛 하나만 있으면 된다. 가령 반딧불이 같은 거 말이다. 그것만 있으면 돼. 저기 저 빌딩 좀 봐라. 저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도나도 아등바등하지만 여기서 보면 한 점일 뿐이잖니.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 있으면 빛의 소중함을 잊기 마련이다.”

폐염전과 갯벌, 작은 호수와 호수 위의 데크, 거기 붙어있는 계절별 서식 조류 안내판, 먼지 나는 흙길 같은 게 좋아요. 칠면초와 억새풀의 색감도, 그 너머 아파트 단지에서 빛나는 불빛도 따듯하고요. 힘들 때 ‘괜찮아. 나는 수많은 돌멩이 중 하나일 뿐이야.’ 읊조리면 조금 위로가 돼요.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한상정(인천대학교 교수)

작년에 이어 경인일보가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2021.07.23.~08.10.) 전시를 주최했다. 40명의 작가에 200여 작품. 숫자도 화려하지만 작가와 작품도 호화롭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정현웅, 림군홍, 이쾌대, 김주경 등 미술사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 있지만, 실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근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에서 동시대 조선화가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엄청난 폭염에 구원자처럼 보이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출입문을 열었다. 대전시실로 다가가는 동안 멀리 전시회 제목이 적혀있는 가벽이 보이기 시작했다(사진 1). 보라색과 흰색, 휴전선 경계를 중심으로 공간을 두 개로 분할하고, 그 위에 상대의 색을 지닌 글씨로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모든 글씨가 잘 드러난다. 상대의 성격을 활용한 각자의 드러냄이 인상적이다.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 이번 전시 개최의 철학일까.

사진 1. 전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처음’ 전해주는 가벽 사진 2. 해금된 작가들의 이름들이 한쪽 벽에 적혀있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진한 꽃분홍, 진달래색 가벽에 전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옆에 70명의 월북 화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벽이 보인다.(사진 2) 1988년에 해금되기 전까지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했던 작가들이다. 오랫동안 매장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치 묘비의 표식처럼도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은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작가의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곳 같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역시 진달래색으로 “나는 우리 조국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스며있는 조선의 정신과 기백을 화폭으로 형상한다.”는 조선화의 핵심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리석호의 글이 있다. 1965년에 리석호가 했던 발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북한 특유의 ‘조선화’의 관점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3. 리석호, <수련>, 98×30.5cm, 조선화,1959년

본격적인 전시공간에 다가가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섹션은 ‘조선화의 거장 3인 특별전’이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의 작품들은 연이어 감탄이 튀어나온다. 강하게 휘몰아치다가 한없이 애틋하고 섬세하고 여리게 붓과 먹, 색으로 꽃과 풀과 나무와 물고기를 재현한다. 리석호의 발언이 작품에서 드러날까 궁금해서 <수련>을 보았다(사진 3). 그 어떤 윤곽선도 없이 붓과 먹의 번짐만으로 수련과 수면의 움직임과 잠자리까지. 조선의 정신과 기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과함 없는 간결함과 단정함은, 실로 아름답다. 한글로 작가 이름을 적는 것도 멋지다. 우리 동양화는 주로 한자였는데. 아주 깔끔한 거대한 벽 하나에 이 작품 하나만, 액자를 제대로 하고 조명을 맞춰서 걸어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이런 욕심을 부리게 만드는 작품이 너무 많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두 번째는 ‘낯선, 낯설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월북한 18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도 보인다. 조선화만이 아니라 스케치, 판화나 유화 등 형식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전쟁. 이 몇 단어로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잡한 이유들로 어떤 이들은 월북을, 다른 이들은 월남을 했을 것이다. 남북의 대립이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었을 때, 월북한 작가들도 그 작품들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해금되었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미 작고했겠지만, 그 작품들은 7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세월을 견딘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있을까.

사진 4. 길진섭, <어머니의 초상>, 27×38cm, 스케치, 1974년 사진 5. 정현웅, <꿈>, 34.5×25cm, 유화, 1967년
사진 6. 출품 작가들의 인물화 모음

길진섭(1907~1975년)의 <어머니의 초상>(사진 4)은 타계하기 1년 전의 연필스케치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의 모서리도 닳아있고 접혀있던 흔적도 역력하다. 이미 작고하신지 오래된, 흐릿해가는 모친의 사진을 보며 오래오래 그렸던 것일까. 그 아릿한 마음에 울컥하게 된다. 정현웅(1910년~1976년)은 1966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의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7년부터 평회원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그린 것은, 누구의 꿈일까(사진 5). 월북했던 화가들은 그 이후, 어떤 작품들을 어떤 철학으로 해나갔을까.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함께 녹아있을까.(사진 6) 여전히 우리에겐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세 번째 섹션은 ‘From Korea To Korea’로 동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풍경화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는 확실히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예컨대 최창호의 <5월의 백두산>(사진 7)은 분명히 리석호가 말했던 ‘조선의 기백’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북한의’ 미술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작품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김승희의 <봉산탈춤>(사진 8)이야말로 이런 전시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인물들 아래 ‘황해도 봉산탈춤, 해주강령 서흥탈춤 경기도의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 동해서해남해탈춤(중략)’이라고 호명하는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해도 은율탈춤은 없다. 북한에서는 사라졌을지도 또는 인천에 은율탈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서로 많은 것을 알아가야만 한다. 전시 기간 중 모 국회의원이 만수대창작사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인가, 전에 갔을 때보다 관람객이 더 많아 보였다. 이제는 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엔 제재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술가와 그 작품조차 접하고 연구할 수 없었던 시대로 회귀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예술의 영역마저 제한을 가한다면, 어떻게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사진 7. 최창호, <5월의 백두산>, 134×75cm, 조선화, 2008년
사진 8. 김승희, <봉산탈춤>, 151×101cm, 조선화, 2007

첫해에 공훈예술가 황영준의 개인전을, 올해 조선화와 월북 화가들 작품을 선보였다면, 내년은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조선화가 아카이브’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 다양한 조선화들을, 아니면 조선화의 내용적 형식적 변천을 좀 더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시가 될까. 아니면 조선화의 범주를 벗어나서 또 다른 유형의 북한 작품들을 보게 될까. 여하간,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에서 다른 북한미술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품사진: 정형렬 제공
전시사진: 필자 제공

한상정(韓尙整, Han, Sang-Jung)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문화대학원/인문문화예술기획 연계전공 교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이병국(문학평론가)

강화길의 소설은 어떤 폭발을 예비하는 것처럼 읽힌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엄청난 사건이 인물들을 휘감을 것만 같은데 그 긴장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서사는 부지불식간에 독자의 영역에 슬며시 옮겨져 있다. 이를 당혹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는 소설이 구축해 놓은 공간에 우리가 깊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소라 생각했던 그곳이 섬뜩하고 낯선 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강화길이 재현한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세계가 얼마나 위협적이며 폭력적인지를 알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세계를 만들고 굳건히 유지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최근작 『대불호텔의 유령』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이전 소설과는 달리 닫힌 구조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가 자신이 과거에 쓴 단편소설 「니꼴라 유치원」을 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소설가 소설의 형식을 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재하지 않는 장소의 실재하는 유령에 관한 소설 쓰기는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 변주되며 분명한 결말로 나아간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3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전체 스토리는 소설가인 ‘나’가 몇 년 전 발표한 단편 「니꼴라 유치원」을 쓸 때 경험했던 일과 그 와중에 새롭게 알게 된 ‘대불호텔’과 관련된 사람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소설에서 1부와 3부의 화자는 작가인 ‘나’다. 1부에서 ‘나’는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마다”(19쪽) ‘증오, 원한 미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의 기원이랄 수 있는 여섯 살 무렵의 경험(문용 옹주를 자처하는 이문용의 집과 관련된)과 그 소리를 잠시나마 잊게 한 대불호텔의 과거를 전해줄 박지운과의 만남이 여기에 담긴다.

2부는 박지운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69쪽)은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인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워 진행되며 3부는 2부에서 재현된 박지운의 이야기와는 다른 제3자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액자 내부 사건의 공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다. 1884년경 2층의 목조가옥으로 숙박업을 시작해 1888년 3층 벽돌 건물로 탈바꿈하여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1950년 중반으로 전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불호텔은 쇠락하여 ‘중화루’라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으며 호텔은 3층에서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97쪽)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고연주’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이 호텔에 『힐 하우스의 유령』의 저자 셜리 잭슨이 묵게 되면서 사건이 진행된다.

1950년대 중화루 (사진: 인천광역시 중구청) 대불호텔 터에 복원한 대불호텔 전시관

이 소설의 중요 키워드는 장소에서 비롯된, 그러면서 인물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 즉 위태로운 삶을 초래한 세계의 불합리한 억압에 기반을 둔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없는 전후 1950년대의 상황과 화교로 맥락화된 소수자의 안정적 삶이 허락되지 않는 정황 등이 맞물리면서 대불호텔은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장소로 의미화된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강한 생활력이며 ‘유령’으로 상징된 악의인 셈이다. 이는 이 소설의 초점화자인 작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어린 ‘나’가 이문용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이문용이 문용 옹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 비록 그녀가 ‘가짜’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주는 존재가 부재한 상태가 ‘지나간 미래’로서 ‘나’의 거울쌍이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악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악의’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귀신 들린 여자’ 고연주,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인정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는 셜리 잭슨,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을 자신의 존재 상태로 채택한 지영현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박지운에게 ‘악의’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용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그녀(들)은 악의에 기반을 둔 존재 내부의 충동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를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그녀(들)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구체적 장소를 점유하면서도 기묘하게 미끄러지면서 불편한 지위로 밀려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되는 그녀(들)은 대불호텔 내부와 조우하지 못한 채 외부에 의해 상상된 방식으로만 추상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악의에 가득 찬 타자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욕망의 잔영,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는 어쩌면 전체 서사의 중심이 되는 2부가 박지운의 불확실한 기억, 아니 악의적 각색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들) 삶의 구체성은 다른 이에 의해 구성될 뿐, 그 자신은 이미 죽은 존재로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박지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과거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화자와 서술 주체에 의해 이중으로 구성된 존재로 그녀(들) 모두 타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 속 구성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 낙차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자 하는 충동이며 악의가 전부이길 바라는 세계의 의지가 추동한 결과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 여성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서발턴의 발화에는 그 권리를 둘러싼 허용과 배제의 권력이 개입되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담화의 장이 이미 폭력적으로 중층 결정된 공간 속에서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기주체성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는 이 유령의 모습은 소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물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세계로부터 제한되지 않으려는 수행성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1955년 대불호텔에서 죽은 여자는 스스로 주체화될 수 없는, 일종의 서발턴의 상징적 죽음임과 동시에 폭력적 세계 속에 그들을 가둬두려는 욕망의 실패담에 가깝다. “악의? 그까짓 것들.”(295쪽) 그렇다. 악의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에게 악의에 기대도록 만든 세계가 문제일 따름이다. 폭발 직전의 순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192쪽, 195쪽) 즉 언제든 무너질지 모르는 순간을 포착하는 강화길 작가에게 악의는 세계로부터 배제된 소수자의 생존 수단이었다. 믿을 수 없는 타자와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주어진 자기주체성이 그것인 셈이다. 그러니 세계 따위 언제든 무너져도 괜찮은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대불호텔의 유령』이 담고 있는 역사적 현실과 복합적인 사유를 풀어내기는 어렵기만 하다. 다만, “모든 것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 우리는 늘 그런 위협 속에 산다”(277쪽)는 사실, 그 절망적인 매혹을 수용케 한 것은 장화와 홍련 그리고 그들로 인해 죽게 된 다른 수령들의 마음을 들어준 수령의 마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303쪽) 여성이라서, 되놈이라서 이 땅에 속할 수 없다고, 떠나라고 하는 패악을 감당해야 했던 그들에게 대불호텔 안에서나마 잠시라도 평화로운 순간을 제공하여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148쪽)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환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병국(李秉國, Lee Byungkook)

2013년 <동아일보>로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2019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최기현(인천문화재단)

2021년 5월 24일 BTS가 빌보드 뮤직 어워드 4관왕을 달성했다. SNS 영향력을 보여주는 ‘톱 소셜 아티스트’는 2017년부터 5년 연속으로 차지했고 특히 ‘톱 송 세일즈 아티스트’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 위켄드 등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수상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이 미국 주류 음악시장에서 기록한 쾌거였다.

“BTS가 공연할 때마다 중계방송을 했고, 티켓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동시에 트래픽이 몰리면서 1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팬들의 꽃다발로 온통 무대가 묻힐 지경이었지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끔 혈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때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서이레, 나몬, <정년이> (출처: 네이버웹툰)

가상의 인터뷰이긴 하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배우였던 김진진의 인터뷰1)를 2021년에 맞게 각색했다. ‘BTS’를 ‘여성국극단’으로 ‘티켓 예매 오픈’을 ‘매표소 줄 서는 것’으로,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왕자를 맡았던 배우’로 바꾸면 실제 신문 기사 그대로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지금의 BTS만큼이나 대단했다.

여성국극(女性國劇)은 195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한국식 종합 뮤지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노래,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 ‘2020 문화체육관광부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수상한 웹툰 <정년이>는 목포 출신 시골소녀 윤정년이 매란국극단에 입단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소리 하나는 타고난 주인공 윤정년은 가난한 가정형편이 지긋지긋하다. 국극 배우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매란국극단에 입단한다. 국극단에 입단한다고 모두 공연에 서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도 대사는커녕 무대에 병풍처럼 서는 연구생이 한둘이 아니다. 마치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소속사에서 노력하는 연습생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연구생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차지하려는 정년의 등장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연 정년은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국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정년이>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웹툰)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국극은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와 닮았다. 2021년 메인 트렌드로 떠오른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단어로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뜻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모습,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에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 MMORPG를 즐기는 것 모두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현실의 자신이 곧 가상 속 인물이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지금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과 의미가 통한다. 『메타버스』(플랜비디자인, 2020)의 저자 김상균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메타버스의 모습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여성국극의 작품은 대부분 역사 속 특정되지 않은,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하거나 또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다. 요즘 웹툰에서 유행하는 일종의 로판2)인 셈이다. 6.25 전쟁 후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로 삶을 치유하며 현실을 극복해갔다. 메타버스에서 디지털을 제하면 현실을 초월한 가상세계는 <정년이>에서 재현하는 시공간과 맞닿아있다.

주인공 윤정년은 자신이 연기하는 방자가 되기 위해, 이름 없는 군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공연 속에 등장하는 방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름 없는 군졸이 어떤 심정으로 대사를 외쳤을지 가슴 절절하게 느끼며 등장인물에 몰입한다. 윤정년의 라이벌 허영서는 단연 매란국극단의 에이스다. 유명한 음악가인 부모님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국극 공연에 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이다. 완벽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단순히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배역을 끊임없이 ‘나답게’ 해석하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혼연일체가 된다. 비단 허영서 만이 아니다. 국극을 공연하는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공연 속 <자명고>의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되고, <바보와 공주>의 평강공주와 온달이 된다. 현실의 자신이 곧 공연 속 가상 인물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세계관이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 TV와 영화 등 대중 매체의 발달, 체계적인 배우 교육의 부재 등의 요인으로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서정적인 작품세계는 산업화 이후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년이>의 배경은 여성국극의 절정기인 1956년이다. 우리나라 첫 TV 방송이 1956년임을 감안한다면 <정년이>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여성국극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극을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열정과 대비되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이 글을 읽고 여성국극에 관심이 생겼다면, 주인공 윤정년의 좌충우돌 국극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참고>

  • 1) 「여성국극의 맥」, 경향신문 (1984.11.21.)
  • 2) 로맨스판타지의 줄임말. 로맨스와 판타지가 합쳐진 말로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