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인천의 인물들 -김윤식 시인 강연
∗ 갤러리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행사일/ 2017년 7월13일(목)
장소/ 생활문화센터 H동 2층 다목적실
사진/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민경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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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일/ 2017년 7월13일(목)
장소/ 생활문화센터 H동 2층 다목적실
사진/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민경찬
지난 7월 5일 저녁, 인천 중구 신생동에 위치한 제일철물 4층에 인천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수년간 인천에서 작업을 이어온 7인의 작가들(김수환, 김재민이, 박혜민, 백인태, 오석근, 웁쓰양, 진나래)이 모여 만든 공간 ‘회전예술’의 오픈 파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을 찾은 사람들은 간단한 다과를 즐기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공간 곳곳에 펼쳐진 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신포동 콜링’이라는 이름의 만화책. 옛날 껌 종이와 함께 들어있던 작은 만화책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이 만화에는 작가들이 신포동 일대에서 작업을 하며 가졌던 고민이 유쾌한 이야기로 담겨있었다.
많은 청년들이 인천을 떠나 서울로, 원도심을 떠나 신도심으로 발길을 돌리는 요즘, ‘회전예술’의 작가들이 인천의 원도심에서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7인의 작가를 대표하여 오석근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봤다.
Q. ‘회전예술’은 어떤 공간인가?
이전에 인천에서 활동하던 청년 한 명이 이 건물의 사장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 2, 3층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때는 4층 공간이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공간이 좋아 창고가 아닌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사장님과 뜻이 맞아 연세 150만 원의 저렴한 임대료로 4년간 사용하기로 계약했다.
전시공간도 될 수 있지만,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프로젝트나 워크숍도 하고, 작가들 재교육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매달 모여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불러오고,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쳐줄 사람을 데려오고, 함께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작업 공간으로도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예술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이 공간에서 하고 싶다.
Q. ‘회전예술’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짓게 되었나.
회전예술은 회전무술에서 따온 이름이다. 회전무술은 인천 화수동이 원류인 종합무술체계로, 명재옥 원장이 수십 년간 수련한 무술을 현대사회에 맞게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회전력을 통해 정리된 힘으로 공격하고 막는 무술이라는 뜻이다.
지역의 숨겨진 가치이기도 한 회전무술이 보여주는 응용력, 상상력 등에 영감을 받았다. 회전무술 역시 예술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이 공간에 모여 회전력을 발휘하고, 재미있는 작업들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름을 짓게 되었다.
Q. 수년간 인천에서, 특히 신포동 일대에서 작업을 이어온 작가들이 공간까지 만들었다. 앞으로도 쭉 이곳에서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계속해서 신포동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천에 머무는 첫 번째 이유는 인천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인천이라는 지역에 콘텐츠가 많기도 하고, 하고자 하는 작업과 잘 맞아 떠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문화 화전민’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작업하는 것보다 정착해서 작업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인천의 원도심에는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가치가 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가치들은 계속 쌓이고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함께 배우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팽창시킬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이곳에 많다. 함께 고민하고 시너지를 내며 작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여기 모인 일곱 명의 작가들 모두 굳이 중앙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동의하는 작가들이다. 중앙과는 다른 주파수가 필요하고, 다른 통로를 만들어 앞으로 가자는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다. 때문에 오랜 시간 이곳에서 함께 작업해왔고 앞으로도 함께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이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 모인 작가들 이외에도 더 많은 작가들이 모이면 좋겠다. 상황이 더 어려운 작가들이 있으면 손 내밀어 도움이 되고 싶고, 많은 작가와의 접점을 만들어 유연하게 진화하고 싶은 생각이다.
Q. 앞으로 ‘회전예술’에서 어떤 일들을 벌일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지?
회전무술의 원류가 된 명재옥 원장을 모셔와 강연을 듣고 싶다. 지역에서 회전무술이라는 새로운 무술을 만들고 수십 년간 지켜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작가들과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각자의 작업을 발표하고 생각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제 막 시작하는 또 다른 청년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사업인 ‘바로그지원’에 공간의 작가들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하는 만큼 그 회의도 이곳에서 진행하려고 한다. 이야기 씨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는데, 이번에 사람들을 조금 더 모아서 음악 만들기 강연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각자가 가진 기술을 나누고 같이 배우는 활동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Q. ‘회전예술’에 모인 작가들 대부분이 작년 마계인천(올게이츠-청년문화대제전)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주축이 되었던 작가들이다. 올해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번 만들어 놓은 거고,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의 취지대로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청년 스스로 만든다는 취지를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청년이 주체가 되어 기획하고 운영하고 마무리까지 할 수 있는 작업이 되면 좋겠다. 청년이 스스로 만들어야지만 스스로 깨닫고 성장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조만간 평가 회의를 진행해서 가장 인천에 적합한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매년 성장하며 청년 작가들이 인천에서 신나게 작업할 기회나 계기를 만들고 싶다. 많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데 그치는 축제는 원도심을 타자화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보다 함께 지역에 대해 고민하고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인천의 청년들이 스스로 힘을 내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회전예술’의 매력은 공간을 만든 작가들이 본인들의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작가들, 새로 시작하는 후배 작가들을 위해 더 좋은 기회를 만드는 방향을 모색한다는 데에 있다. 스스로 거쳐 온 시행착오를 다른 작가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함께 모여 성장하고자 하는 그들. 그들이 가진 회전력에 더 많은 청년 작가들이 모여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날을 상상해본다.
글, 인터뷰정리 /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김진아
사진 / 회전예술 페이스북 페이지
“마술적 리얼리즘과 인민의 삶”
7월 5일에 시작해 29일까지 이어지는 우리미술관의 국제 미디어작가 초청전 <발전 그리고 혼란软弱的激进秩序>에서 김태준과 리이판(李一凡)의 작품을 보았다.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중국의 풍경 하나가 생각났다. 정지신호가 들어온 3차선 도로. 차들이 멈춰 선다. 1차선엔 고급 승용차가 의기양양하게 서 있고, 2차선엔 후줄근한 스쿠터가 부르릉거린다. 3차선엔 소달구지가 느긋하게 들어선다. 승용차, 스쿠터, 소달구지가 나란히 정지신호를 받은 3차선 도로. 차라리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풍경. 아마도 이는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법 익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틸라이프>(2006)에서 신도시개발이 한참 진행 중인 중국의 쌴샤(三峽) 위로 UFO를 띄우면서 지아 장 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실주의적으로 찍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술적인 상황의 사실주의란 초현실주의적인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정성일, 씨네21,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1]”, 2006.11.03., (사이트 바로가기)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중국의 현실. 전시관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마주한 리이판의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공명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왜곡되어 가는 일들을 느끼게 된다. 어제도 또 내일도 논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들이 밀려든다. 나의 작품 속 부분에는 나의 꿈이 들어가 있고 다른 부분에는 현실적인 모습들이 단순하게 중복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초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오늘날 중국사회의 현실자체를(필자 수정) 허망하고 초현실적으로 느낀다.” – 리이판, 「전시 팸플릿 작가의 글」 중에서
그러나, 리이판의 사진 작업 <기념祈念>을 본 관람객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기념>은 천막천(갑바)을 커튼처럼 달아놓고 그 사이에 농촌의 풍경과 인민들을 담은 사진을 배치해 둔 작품이다. 발전과 혼란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전형적인 전원풍경이라니. 노스텔지어적인 전향을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더 앞으로 내밀면, 이런 오해는 가볍게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속 인민들의 팔, 다리, 몸통이 흩날린다. 그 흩날림은 잔상을 남긴다. 세차게 내리치는 근대화의 시간은 잔상으로밖에 붙잡을 수 없다고 증언하는 인민의 몸들. 농촌에서 주로 곡식을 털 때 흩어지는 곡물 알갱이들을 쓸어 담기 위해 쓰였던 천막천은 이 흩날리는 몸들을 붙잡고 쓸어 담는다. 그리고 중국에서 이 천막천은 농촌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자주 이용된다. <삶은 환각과도 같다如露亦如电>의 수많은 스틸사진 중 하나는 공사현장에서 시멘트 가루를 붙잡고 있는 천막천을 보여준다. 급격한 근대화의 속도에 흩날리는 인민의 몸과 재개발로 부서지는 시멘트 가루의 시간이 한데 뒤엉켜 천막천 안쪽의 삶을 이룬다. 이곳은 최신 인공위성 안테나 옆에서 돼지가 도륙되고, 폐허 위에서 연꽃과 보살이 피어나는 마술적인 현실, 중국의 초현실적인 꿈이다.
실로 이 마술적인 현실은 수많은 인민의 핑크빛 미래, ‘중국몽(中國夢)’들 속에서 태어난듯하다. 리이판의 <핑크粉紅>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물론, 이 영상의 역사적인 참조 점이 ‘중국몽’이 본격적인 화두로 떠오른 시진핑 주석의 정부 출범식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011년 12월 충칭(중경)에서의 ‘홍가대회’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참조하는 이 영상은, 붉은 깃발을 손에 쥔 여성들의 행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여성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이 행렬은 이내 왼쪽에서 등장한 또 다른 행렬과 만나고, 스크린을 붉은 깃발로 물들인다. 그리고 이 혼란이 최고조에 다다를 때 영상이 되감긴다. 이제 여성들은 거꾸로 걷고, 이 행진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면서 스크린 전체에 감도는 핑크빛 감돈다. 그리고 허망하게 사라진다. 이 영상작업이 인민들의 각기 다른 꿈들이 뒤섞이는 혼란과 그 핑크빛 미래라는 출처를 되짚는다고 말하는 게 과연 과장일까? <핑크> 다음에 오는 작품이 <삶은 환각과도 같다>인 것은 그저 우연일까?
다큐멘터리의 스틸사진들을 모아놓은 <삶은 환각과도 같다>를 보고 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김태준의 <Life is war in one capsule>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게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3D 영상으로 한 인간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리이판의 작품들과는 달리, 김태준의 작품에는 역사적 특정성이 부재한다. 나는 이러한 작업이 개별 작품으로는 퍽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궁으로의 회귀 혹은 삶의 관념적 추상화가 그것이다. 이는 근대성의 자장이 아시아의 각기 다른 내셔널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과 만나고 굴절되는 양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한다. 그로 인해 생략되는 것은 인터-아시아적인 대화의 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일방적인 것이다. 작품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떼쓰는 아이의 투정만큼이나 어리석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김태준의 작품을 본 후 전시순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만약 급격한 근대화의 과정과 그것이 빚어낸 혼란이 인민들의 삶의 터를 폐허로 만들고 그들의 몸을 짓이긴다면, 그 삶의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버티고 끝끝내 살아가는 이 생명은 무엇인가? 하나의 캡슐 안에서 반복적으로 투쟁하면서 차이를 생성해내는 <Life is war in one capsule>의 ‘생명’ 이미지. 깃발을 손에 쥔 여성들이 거꾸로 걸으면서 한데 뭉쳐지는 <핑크>의 분홍색 ‘살’ 이미지. 혼란을 응시해야 비로소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삶은 환각과도 같다>와 <기념>의 생동하는 인민의 ‘삶’ 이미지. 그래서 김태준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작품은 규칙적이지만 혼돈 적인 모습에서 출발하여 한 아이의 탄생을 보여준다. 그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동시에 기쁨과 고통을 이겨간다. 그 과정엔 주변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그리고 변화에 적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과정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 김태준, 「전시 팸플릿 작가의 글」 중에서
글,사진 /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
《꿈, 판》 일곱 번째 전시 <어디에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7월의 오후, 《꿈, 판》의 일곱 번째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인천 남구 신기시장 안에 위치한 대안공간 듬을 찾았다. 꿈을 주제로 모인 작가들이 각자의 꿈을 기록하여 전시하는 프로젝트 《꿈, 판》은 2017년 한 해 동안 진행되며, 열두 명의 작가들이 매월 돌아가며 각자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일곱 번째 《꿈, 판》의 배턴을 넘겨받은 작가는 윤대희 작가로, 이번 달 8일부터 30일까지 전시를 진행 중이다. ‘어디에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진행 중인 윤대희 작가를 만나 그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Q. 《꿈, 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꿈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대안공간 듬’을 운영하는 최바람 대표의 제안이 시작이었다. 최바람 대표가 ‘대안공간 듬’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카페의 이름도 ‘꿈에 들어와’일 정도로 원체 꿈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2015년 11월에 이 공간을 자주 왕래하는 작가들을 모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꿈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꿈이 무엇인지 한 달에 한 명씩 돌아가며 전시를 해보자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작가들과 계속해서 공간에 모여 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라 기록하지는 않았었는데, 이 공간에 자주 오고 다른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꿈이라는 소재에 호기심이 생겨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매일 꾸는 꿈을 기록하고, 그것을 작업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Q. 매달 서로 다른 전시의 제목들이 꿈에 대한 작가들의 서로 다른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번 전시의 제목 ‘어디에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은 어떤 의미인가?
2015년 처음 전시 계획을 듣고 매일 핸드폰에 그날 밤에 꾼 꿈을 기록했다. 1년 정도 기록을 했는데, 핸드폰이 고장 나 기록이 모두 지워졌다. 컴퓨터에 옮겨놓은 몇 개의 기록만이 남아있었다. 기록했던 글들이 사라지니 꿈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기록들을 읽어보아도 별다른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꿈은 단순히 하룻밤 흘러가고 지나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작업한 것들이 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김홍기 비평가가 작업에 대해서 안개 속에서 뚜렷하지 않은, ‘어디에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형체를 찾는 것 같다고 평한 적이 있다. 그때의 작업과 이번 작업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목을 정하게 되었다.
Q. 비닐에 작업한 것이 재미있다. 각각의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비닐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들을 촘촘하게 겹쳐놓은 특별한 의도가 있는가? 각각의 작업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다.
투명한 비닐에 꿈에서 보았던 각각의 이미지를 그리고, 비닐에 그린 그림을 겹쳐둠으로써 맨 뒤에 있는 그림부터 맨 앞에 있는 그림까지 각각의 레이어가 엉켜 이미지가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도했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결국 아무 형태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각각의 꿈을 기록하는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어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꿈을 기호화하는 방법도 생각해보았다. 남성이면 원, 여성이면 세모 등으로 다른 사람의 꿈들도 함께 기호화하는 작업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호화를 하려다 보니, 매일의 꿈이 너무 달라 기호화 작업이 어려웠다. 단순화하려던 의도였는데 오히려 더 난해해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래서 정리해놓은 기록 중에서 그릴 수 있는 것들, 꼭 그려야 하는 것들을 선별했다. 먼저 종이에 스케치 작업을 하고, 그것들을 비닐에 옮겼다.
드로잉 말고, 빛으로 작업한 것도 있다. 불투명한 유리에 조명을 설치해놓았다. 공간 안에 조명으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서 보면 빛이 번져 아무 형상도 없이 그저 불빛만 보인다.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한 뚜렷하지 않은 형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는데 창문 유리에 가로등 불빛이 비친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원래 형상이 어떤 것이든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Q. 이전에 했던 작업들과 달리 이번 전시가 특별했던 점이 있었나?
재료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표현하는 이미지들이 처음 시도해보는 것들이 많았다. 기존에는 평소에 경험하는 감정, 특히 불안을 주제로 드로잉을 했다.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려왔다. 어떻게 보면 공감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제 존재하는 사물을 화면 안에 처음 넣어봤다. 앞으로의 작업에 있어 변화가 많이 생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다시 꿈에 대해 작업을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방법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던 전시였다. 개인 작업을 할 때는 그림을 먼저 그리고, 그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특히나 친숙하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표현하는 매체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캔버스에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재료를 많이 찾으려 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앞으로의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Q. 앞으로 계속해서 진행될 《꿈, 판》 프로젝트에 대해 더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전시 이외에 진행하는 연계프로그램이 있다. 전시를 여는 작가는 열두 명이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분이 한 분이 더 있다. 철학자 장의준 선생님이 꿈에 관련된 영화 열두 편을 준비해서 매달 한 번씩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이름이 <꼴라주>이다. 프로젝트의 참여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꼴라주 한다는 의미이다. 영화를 보러 오신 분들이 열두 편의 영화 중 하나의 제목을 종이비행기 안에 적고, 종이비행기를 날려 통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 적힌 제목의 영화를 그날 함께 감상한다. 그 달의 전시와 영화를 억지로 연결하려 하지 않는 방식이 전체 프로젝트 형식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신다.
《꿈, 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모두 꿈이라는 같은 주제로 모였고, 꿈을 기록한다는 같은 방법을 택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각각이 꿈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기록한 꿈의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 모두 천차만별이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모두가 각자 경험하기에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매달 서로 다른 작가의 작업을 소개하는 《꿈, 판》의 방식은 ‘꿈’이라는 주제를 풀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 아닐까. 앞으로 만날 다른 작가들의 꿈은 또 어떠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기대해본다.
글(인터뷰), 사진 /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김진아
한국근대문학관에서 7월 6일부터 8월 3일까지 <인천이 있는 저녁:우리가 몰랐던 인천이야기> 강좌가 열렸다. 총 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번 강좌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이 배출한 인물들, 인천의 도시발전, 인천의 경제, 인천의 골목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뤄진다. 이 강좌들 중 지난 7월 13일 <우리가 몰랐던 인천의 인물들>이라는 주제로 김윤식시인의 강좌를 듣고왔다. 강연은 인천의 인구의 구성적 특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들의 사례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인천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외지 유입 인구로 성장한 도시이다. 원주민이 10% 미만인 도시는 인천뿐이다. 인천은 백제에서부터 근대 인천의 개항, 광복, 6.25 한국 전쟁 등을 계기로 인구 이동이나 전입의 계기를 가진 지형적 특성의 도시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도시에서 살아갔던 우리의 선조들은 그 특성에 맞게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진취적인 활동가들이었다. 강연에서는 김윤식 시인이 정치, 경제, 애국운동, 교육가, 체육인, 군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던 인천사람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연에서 소개되었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인천사람들 중 몇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민들의 불편해소에 앞장섰던 발명가 이성원, 민수업
첫 번째 발명 분야에서 활약했던 인천의 두 인물을 소개하겠다. 첫 번째 인물은 신발의 대혁신 이성원씨이다. 그는 1918년 활동했던 발명가로 1905년경에 인천 양화점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바닥에 가죽을 갖다 댄 최초의 실용화를 만들어내게된다. 또다른 두 번째 발명가 민수업은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소형잠수함을 만들 때 제작에 함께 참여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불편을 잘 찾아내 이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발명가였다. 그는 비 오는 날이나 장마가 질 때 천일염을 생산하지 못하는 서민들을 보고 사계절 소금을 만들수있는 기계를 제작하였다. 또, 자동차가 지나다닐 때 나는 먼지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 것을 보고 지금의 공기청정기인 먼지를 빨아들이는 기계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애국열사 하란사
두 번째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로 조선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애국열사 하란사가 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녀는 우리나라 초기 여성 교육의 역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로 눈길을 끈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는 교사로 있던 룰루 프라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혼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거절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청해 입학해 열성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하란사는 남편이 고위 세무직 공무원이 되자, 1년간 일본 동경의 경응의숙에서 유학할 기회를 갖게된다. 그 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그녀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시 소재의 웨슬리언(Wesleyan) 대학에 입학해 1906년 학사학위를 취득하며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여자 미국 학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교육의 평등한 기회분배에 힘쓴 박창례
세 번째 교육분야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인천의 인물 박창례가 있다. 박창례는 인천 출신으로 창영학교를 마치고 계속 면학의 뜻을 펴나가기 위해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2학년 때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외 강의록으로 와세다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처럼 가난하여 배움의 길을 걷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고 인천에서 이옥녀와 함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에 진력했다. 먼저 도원동 보각사에서 강당 일부를 빌어 당시 성냥공장과 정미소에 다니는 여공 1백여 명을 모집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6개월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이흥선 정미소 창고를 빌려 여공 30여 명을 데리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이마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분서주하여 일본인의 토지를 임대하게 되었고, 각계의 유지들로부터 480원(圓)의 기부를 받아 교사를 신축하고 동명학원의 기초를 다졌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현재의 동구 송림동 114번지로 교사를 이전하고 6년제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 학교는 개교 이래 박 교장의 교육 이념으로 예절 바른 학교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같은 교육계에서의 공로로 1957년에는 인천시에서 시민상을, 1964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특공상을, 1966년에는 소년한국일보의 ‘훌륭한 어머니상’을, 같은 해 경향신문교육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1년 정년을 맞이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1982년 한국일보가 제정한 제1회 교육대상을 수상했다.
체육인이자 애국열사 곽상훈
곽상훈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경인간 기차 통학을 할 때부터 ‘경인 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 야구팀인 ‘한용단’의 응원단장이 되어 일본팀과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적개심에 불타는 응원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이래 1923년에는 조선소년군 제4호 대장이 되어 활약하였고, 1924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1925년 ‘이우구락부’를 조직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만보산 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도 활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제호의 부함장 신순성
신순성은 서울 출신으로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이수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고등상선학교에서 갑종 항해사자격을 따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해 항해술사가 되었으며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광제호의 부함장이 자리에 올랐다. 광제호는 당시 우리나라에 두 척밖에 없던 군함 중 하나로서 19세기 말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인데, 한일합방이 되자 군함의 자격을 잃어 총독부 체신국의 해사 관리선으로 이적되고 말았다. 신 함장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으로 낙향하여 1926년 광제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여생을 보냈다.
강연자 김윤식 시인은 이번 강연에서 소개되었던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들의 사례들을 되새기며 우리 선대들의 진취적, 창의적 삶이 인천인의 진정한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담긴 말을 끝으로 강연은 마쳐졌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도시의 바쁜 일상에 잊고 살았던 필자의 삶의 터전 인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지에서 올라와 생활하고 있는 필자에게 인천이란 낯섦, 새로운 시작의 도시이다. 인천에 이주해 이주민으로의 삶을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과 필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조들이 인천에서 자신의 삶의 에너지로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달성했던 것처럼 필자 또한 선조들의 진취적인 삶을 되새기며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겠다. 누군가 당신에게 ‘인천은 무슨 의미인가?’ ‘인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인천의 역사가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작게는 자신의 추억이 담긴 동네의 골목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은 궁금증을 던지는 것으로 바쁜 일상에 잊혔던 우리의 삶의 터전을 다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선조들의 역사, 삶을 배운다면 그저 출근길로만 느껴졌던 동네의 골목길이 새롭게 보이고 역사적 장소라고만 생각했던 명소들에서 선조들의 생활이 보일 때 비로소 도시의 숨의 물결이 현재까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인천이 있는 저녁: 우리가 몰랐던 인천이야기> 강좌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7월 6일부터 8월 3일 매주 목요일 마다 진행된다. 이 강좌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인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글/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최승주
《이부웅 도예 여정》, 2017년 7월 1일~7월 31일, 강화도 도솔미술관
청자, 욕망의 그릇
인천이 청자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비색 고려청자의 발전과 절정을 준비하던 곳이 이 땅, 인천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역사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미술의 역사는 사실 인간 욕망의 역사라 할 만하다. 돌이켜보면 현대 이전의 거의 모든 미술 활동은 의뢰인과 생산자가 존재했고, 그들이 만들어낸 미술품(당시에는 그것을 ‘미술’로 부르지도 않았지만)에는 뚜렷한 지향점과 실용적 목적이 담겨 있다. 물론 그 지향점은 오늘날의 미학적 지향점을 궁극의 목표로 포함하지는 않지만. 청자 역시 그랬다. 청자가 고대의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중국은 아주 예전부터 부모가 돌아가시면 옥기(玉器)를 부장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래야 저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옥의 생산은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당연히 옥기는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비싼 물건이어서, 기록에 따르면 떵떵거리던 부자가 옥기 부장으로 몰락했다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비쌀수록, 귀할수록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 법. 그리고 그 비싸고 귀한 물건을 대신하는 물건을 만들려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법일까.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이미 서진(西晉) 무렵에 옥색과 가깝게 그릇을 구우려고 하는 시도가 절강성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빛나는 순금을 빚어내려는 중세의 연금술사처럼 중국의 도공들은 옥을 재현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마침내 당말오대(唐末五代)에는 청자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중에서도 월주요의 청자는 천하제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인천과 녹청자
한반도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중국처럼 옥기를 부장하는 풍습은 곧 청자로 바뀌게 되었고, 한성백제 시대 도읍이었던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출토된 중국제 청자 파편들은 이를 증명한다. 세월이 흘러 고려왕조가 들어서고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고려로 귀화한 중국의 도공들이 중요한 생산자였다. 도자기는 흔히 흙과 불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만큼 재료(태토)가 되는 흙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고려청자는 좋은 흙을 찾기 위한 모색과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처음은 개경 지역이었다. 개성 지역에서 발굴된 초기 청자 가마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흙은 청자를 만들기에 썩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던 듯, 이내 경기도 용인 지역으로 청자의 주된 생산지가 옮겨 가게 된다. 그러던 과정에서 중요한 청자의 생산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우리는 인천, 그 중에서도 서구 경서동 일대에서 생산된 청자를 ‘녹청자’라 부른다. 이 녹청자는 이후 전라북도의 부안, 전라남도의 강진 일대에서 생산될 최고급 청자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소 투박하면서 거친 듯한 녹청자는 발전 도상에 있는 청자의 초기 모습이기도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당시 고려인들의 미감이 그대로 녹아 있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유홍준 선생은 이러한 현상을 ‘청년기’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세련미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패기 있는 기상이 담기며, 노회한 기교보다는 선 굵은 청년의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녹청자가 만들어진 인천 땅은 씩씩한 청년의 기상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이부웅의 여정
인천 출신으로 인천에서 녹청자를 평생 만들어온 도예가가 그의 긴 여정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이부웅 도예 여정》이 열린 강화도 도솔미술관에서 만난 그의 녹청자를 비롯한 옹기 20여 점은 초기 청자의 웅혼함과 그가 평생을 두고 탐구해왔던 정제된 미적 실험정신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년에 들어선 이부웅 선생의 작품들은 녹청자로부터 시원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 도예의 미학적·형식적 실험을 반영한다. 90년대에 제작한 발(鉢)은 넉넉한 품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과 예민한 감수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녹청자라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백자와 토기의 장점을 수용한 각병(角甁)과 유병(油甁)에 이르면 전통을 해석하는 현대적 감각의 산물인 양 읽힌다. 특히 유병은 전통 옹기를 그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변주함으로써 하나의 성공적 오브제로 승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마치며
이 전시는 2017년 처음으로 선보이는 인천문화재단의 ‘원로예술인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모든 원로예술인들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평생을 두고 오직 녹청자의 현대적 해석에 몰두한 이부웅 선생의 여정을 제시하는 이 전시는 인천문화재단이 원로예술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시민들에게 그 뜻을 환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군다나 녹청자의 고향인 인천에서 인천 작가에 의해 재현·발전한 결과물을 인천시민과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보인다. 앞으로도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역의 원로예술인들이 당당하게 창작 활동을 펼쳐 보이는 장으로서 ‘원로예술인 지원사업’이 자리 잡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이부웅 선생의 도예 여정에 경의를 표한다.
글, 사진 / 인천문화재단 예술지원팀 박석태(미술평론)
아편전쟁
이원태․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6. 5.
아편전쟁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청나라와 영국이 벌인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세기 말 20세기 초 인천에서도 아편을 둘러싼 전쟁이 있었다. 물론 소설이다. 영화와 소설의 결합을 뜻하는 ‘무블(무비+노블)’표방하며 김탁환과 이원탁이 공동 창작한 장편소설 아편전쟁은 1900년을 전후한 인천 개항장을 무대로 동갑내기 세 젊은이의 우정, 사랑, 좌절과 아편을 둘러싼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및 서양 각국의 세력 다툼을 숨 막히는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천형 누아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재미도 재미려니와 19세기 말~20세기 초 인천의 조계지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진 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청나라-일본-서양 각국 조계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물론 조선인들이 일본 조계에서 서양 과자를 먹는 풍경 등 신문물을 접한 당시 인천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과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속도감 있고 박진감 넘치는 필치로 전개된다.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하는 이 작품은, ‘범죄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물론 한 세기 전 인천의 여러 풍경도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더운 삼복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글/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연구사 함태영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입니다. 무더위를 식히러 떠나야죠. ‘거기’가 ‘여기’처럼 무덥더라도 일단 떠나고 봐야죠. 즐거운 휴가를 망치지 않으려면 주의사항에 감염병 체크를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음식도, 풀숲의 진드기도, 모기도 조심해야 해요.
살모넬라증과 병원성 대장균은 물이나 음식을 통해 전파됩니다. 어패류를 충분히 조리하지 않고 먹으면 비브리오패혈증에 걸릴 수 있죠. 풀숲이나 야외에서 진드기에 물리면 쯔쯔가무시증 또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 모기에 쏘이면 지카바이러스, 말라리아, 일본뇌염 등의 진단을 받을 수 있네요.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감염병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특히 쯔쯔가무시증과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의 발생건수는 지난해 대비 280%(760건)나 늘어났네요.
국외유입 감염병 사례는 2014년 400명에서 2015년 491명으로 23% 증가했고, 지난해부터 지카바이러스 감염증 발생 국가가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현재 국내에 유입된 지카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는 21명으로, 동남아 여행자가 16명(76%), 중남미 여행자가 5명(24%)입니다. 지카바이러스는 모기 외에도 성접촉, 수혈, 모자간 수직감염, 실험실 등을 통해서도 감염된다고 하네요.
감염병과 전염병은 같은 말일까요?
세균, 스피로헤타, 바이러스, 진균, 기생충과 같은 병원체에 감염돼 발병하는 감염병이 다수에게 전파되는 걸 전염병(傳染病)이라고 합니다. 전염병은 ‘염병’이라고도 불리네요.
빨래판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득득 문지르면 시끄러운 소리가 듣기 싫어 역신이 물러간다는 염병 치료법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폐옹과 정종, 적취 등으로 표기했는데 폐옹은 폐렴 또는 폐결핵, 정종은 풍사(風邪)로 피부에서 독기가 발생해 가렵고 청황색의 고름이 나오는 걸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홍역과 콜레라, 수두, 장티푸스 등이 다수 발병했는데 콜레라는 1819년에 중국에 들어와 1820년에 중국 대륙을 휩쓸고 1821년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뒤, 1822년에는 일본에 파급됐습니다. 아시아가 동시대에 공통된 질병을 앓은 거죠.
1885년 광혜원이 문을 열면서 우리나라는 서양의학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15년 2월에 ‘전염병예방령’을 발포하고 그해 8월 세칙을 시행했네요. 20세기 초반까지 극성을 부리던 천연두, 발진티푸스, 재귀열, 성홍열, 트라코마, 말라리아도 거의 사라지고, 인플루엔자, 전염성 감기, 살모넬라식중독 등도 거의 볼 수 없는,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비전염병 창궐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아, 한국전쟁 이후 잠깐 혼란기를 겪긴 했어요.
천연두에 걸렸을 때 치료를 목적으로 행하던 무속 의례다.
불과 얼마 전인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기억하실 겁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으로 첫 환자 확진 후 38명이 사망하고 1만 6천여 명이 격리됐었죠.
메르스 최초 감염자는 중동 지역에 출장을 갔다가 5월 4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68세 남성이었죠. 이 환자는 바레인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 출장을 갔다가 카타르를 거쳐 돌아왔습니다. 이후 발열 등의 증상이 나타나 두 차례 병원을 방문했으나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고, 세 번째 병원 응급실을 방문해 3일간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메르스에 대한 사전 정보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이 해외 여러 나라를 돌았다는 걸 밝히지 않았고, 미진한 대응은 병원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진단이 늦어졌고 이후에 벌어진 일은 언론 보도를 통해 익히 들으셨을 겁니다.
모 기업에서 하는 사회공헌 활동 중 ‘감염병 확산 방지 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발병 후 백신을 개발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감염병을 감지하고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A라는 사람이 여러 나라를 돌고 입국했을 경우 우리나라 공항에서는 직전 방문 국가만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통신사는 고객의 로밍서비스 자료로 모든 방문국을 체크할 수 있죠. KT는 로밍이나 위치 정보로 메르스 사태 진화에 기여한 경험을 토대로 첨단 방역망을 마련했습니다. 지난해 질병관리본부와 MOU를 맺고, 고객이 바이러스 위험지역에 갔다는 걸 질병관리본부에 알려주면 본부에서 문자메시지 등으로 예방법 등을 전달하는 서비스를 구축했습니다.
얼마 전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빅데이터를 활용한 ‘감염병 확산방지 프로젝트’가 반영됐습니다. 공동 선언문은 보건 위기 대응을 위한 보호조치와 보건 시스템 강화를 위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역할과 국제협력을 강조했죠. 구체적인 방안으로 “인류의 거대 이동이 주요 보건 위기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인지하며, 이 주제에 관해 국가와 국제기구가 협력을 강화하도록 독려한다”고 적시했네요.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으로 인한 손실은 한 해 약 69조 원이라고 합니다.
인수공통전염병은 사람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질환이에요. 동물이 사람에게 옮기는 병이라고 생각하면 쉽죠. 최근 전 세계에서 발생한 전염병 중 49%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AI는 닭과 칠면조, 철새 등 조류에서 바이러스가 나타나 감염되는 병이에요. AI 바이러스에 감염된 야생 조류가 사육 중인 닭이나 오리와 접촉하거나 배설된 분변을 통해 전파되고 그게 사람에게 옮겨오는 거죠.
한국인이 AI에 감염된 사례는 없지만, 질병관리본부는 AI를 면밀한 주의가 요구되는 전염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고열, 기침 등 독감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폐렴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데다 특효약이 없어 치사율이 50%라고 하네요. AI 유행 시기에는 조류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소화기 질환이 아니므로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섭취하는 것은 상관없고요.
지자체들은 여름철 감염병 예방관리를 위한 질병정보 모니터망 지정, 하절기 비상방역 근무, 하천변/공중화장실/침수 우려/집단수용/쓰레기/가축사육/공원 등의 방역과 소독, 소외계층 대상별 맞춤 방역, 주거지역 정화조 친환경 유충구제 등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육청은 학생감염병 예방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모의훈련을 실시하네요.
일상에서는 손을 자주 씻어야겠죠. 마시는 것, 먹는 것 조심하고요.
* 본문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1. 휴가철 주의해야할 감염병은 무엇이 있을까?
2017.6.28. 쿠키뉴스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빅데이터로 감염병 확산 막는다…세계적 관심
2017.7.10. 채널A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韓 첨단 ICT, 전 세계 감염병 확산방지 기여한다
2017.7.9. 아시아경제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AI, 그것이 알고싶다
2017. 1. 1. 쿠켄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시민과 함께하는 감염병 예방관리
2017. 6.19. 더데일리뉴스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정석희 개인전 <들불>
행사일/ 2017.07.13~2017.08.06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
시간/ 11:00 – 18:00, 월요일 휴관
안상훈 개인전 <굿: 페인팅>
행사일/ 2017.06.24~2017.07.16
장소/ E1동 창고갤러리
시간/ 11:00 – 18:00
촬영,편집,구성/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유라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5월 30일에 있었던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인 송현동 구 ‘애경사’ 건물의 철거를 계기로, 인천의 근대 건축물이 다시 재조명되는 듯 합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인천시 내 근대 건축물을 전수 조사하기로 하였고, 각 구청에 근대 건축물 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인천시는 알려지지 않은 근대 건축물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니, 이번 일을 계기로 건축 유산이 더 주목받고 보호받는 방향으로 진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돌이켜보면, 낡고 오래된 건물로만 이해되던 근대 건축물이 보호의 대상으로 존중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도시 명소로 부각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1년의 일로, 이 제도를 계기로 만들어진 지 50년 이상 된 건조물이나 시설물 중 “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이 되고, 그 가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 한 시대의 조형의 모범이 되는 것” 등이 등록문화재 지정을 통해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등록문화재 소유자에게 유지와 보수 비용, 세금 등의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이 훼손되지 않고 꾸준히 관리될 방법을 만들게 되었고, “개조, 내부변경, 부분변경, 창조적 모티브의 채용”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현재에도 사용가능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근대 건축물의 수명을 연장하고, 활용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사회 전반적으로 일종의 복고주의가 유행하면서 잘 보존되고 활용되는 근대건축물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를 연상시키는 상업시설, 패션이나 디자인에서 레트로한 경향이 유행을 타게 되었습니다. 또한, 건축과 인테리어에서 속칭 ‘인더스트리얼 모던’이라고 불리는, 인테리어 요소에서 구조나 설비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혹은 그것을 모티브로 이용하는 방법들이 유행하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80년대 건축된 단독주택의 리모델링이 부각되고, 북촌 한옥마을로만 이해되던 도시형 한옥이 전국 각지에서 재발견되며, 나아가 근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레플리카가 아닌 오리지널로써의 근대 건축물들이 다시 도시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천, 서울, 부산, 군산 등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들은 도시 역사의 스토리텔링을 위하여 이러한 근대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관광 자원화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1900년대 초중반 건립된 근대 건축물, 특히 서양식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재발견하고 건축물에 남아 있는 기억을 되살려 도시의 삶에 역사의 깊이를 심기엔 무척 어려운 부분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건립되어 행정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으로 사용된 건물이고, 이것을 ‘기념’하기에는 이 건축물들에 남겨진 역사적 기억은 침략과 고통의 역사이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벽에 부딪히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건축물을 통해 역사 공간을 구성하고 관광 자원화 하려는 시도와 그 공간의 실제 기억 사이의 딜레마에 처한 도시는 우리나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근대에 들어서 서구 세계와 접속하면서 해안 주요 도시에 열강의 조계를 내어주어야 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의 수많은 서양식 건축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열강 침략의 유산입니다.
이 중에서 상하이의 경우는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줍니다. 상하이는 오래된 구도심과 옛 조계 지역을 재건하면서, 이런 역사적 기억을 긍정적 기억으로 치환하는 시도를 합니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서양 각국의 침략의 역사였던 조계 지역은 실제로는 중국인들이 더 많이 섞여 살았던 일종의 ‘국제도시’로 이해됩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인 상하이의 역사적인 대구(對句)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 해석을 기반으로 상하이의 오래된 주거지와 조계지는 과거 중국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한 ‘상하이 모던’의 상징 공간으로 이해되고, 오늘날 국제적인 금융 도시인 상하이의 원조와 같은 모습으로 관광 자원화 됩니다. 신텐디, 티엔즈팡과 같은 지역이 근대 주거 건축물 등이 적극적인 외부 보존과 내부 수리를 거쳐 가장 떠오르는 상업 공간과 관광지로 변신한 것입니다.
굳이 근대 건축물을 관광자원이나 공공시설, 전시관 등으로 이용하지 않더라도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변화한 도시에 걸맞게 증축되어 업무시설이나 상업 건축물로 이용된 사례들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2006년 완성된 뉴욕의 허스트 타워는 본래 대공황 시기에 6층으로 지어진 업무용 건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은 노후화되고, 기업은 더 많은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건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허스트 타워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노먼 포스터는 철거와 재건축 대신 증축을 택합니다. 기존 건축물의 외면을 살리면서 내부에서 기존 건축물을 기단 삼아 182m의 초고층 빌딩을 세운 것입니다.
일본 도쿄의 중심가인 마루노우치 지역도 오래된 업무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비슷한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근대건축 보존을 독려하기 위해서 외관을 보존하면 내부 개조와 용도 전용을 폭넓게 허용해주고, 보존에 대한 보상으로 재건축 과정에서 용적률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 은행으로 만들어진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미츠비시 이치고칸 뮤지엄처럼 증축 없이 내부 개조를 통해 재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쿄 중심가에서는 1990년대부터 정부 정책에 따라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면서 고층 증축을 하는 사례가 확산되었습니다. 1993년 기존 건물의 2개 입면만을 남기고 고층으로 증축한 도쿄은행협회빌딩, 1995년 21층의 고층 건물을 증축한 제일생명관(DN타워 21), 1920년에 건설된 건축물의 1/3을 보존하며 초고층 빌딩으로 증축 및 재개발한 일본공업클럽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마루노우치가 본격적으로 재개발되면서 2005년 미츠이무로마치 타워가 건립되고, 2013년 고층 증축과 함께 중앙우체국 건물의 입면과 내부구조 일부를 보존하면서 내부를 쇼핑몰로 개조한 ‘키테’(KITTE)등이 개관하면서 마루노우치는 일본 경제의 황금기 기억을 장소에 보존하면서도 현대적인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심지어 도쿄에서는 이미 없어진 근대건축물을 사진과 도면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재현된 신바시 정류장은 신바시-요코하마 간의 일본 최초의 철도의 시점이었습니다. 1997년 업무용 빌딩과 주택 등으로 재개발되어 사라진 이 역은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가 드러났는데, 옛 건물에 대한 자료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재현된 건물이 원형과 다름을 명시하면서까지 이 건물을 복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박물관에 밀어 넣지 않고, 도시 안에서 계속 생명력을 갖고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한 다양한 모습의 결과들입니다.
한때 낡은 주거지역에서 도시 미화와 관광을 목적으로 ‘벽화마을 만들기’가 대 유행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화동, 동피랑 마을, 부산 감천마을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려진 벽화 그리기는 무수한 지자체에서 벤치마킹 되었지만, 대부분 사후 관리에 실패하거나, 개성 없는 복제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가 이제는 잘 논의조차 되지 않는 벽화마을의 사례는 각 도시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는 방법으로 ‘요즘 유행하는 어떤 것’을 잘 찾아 가져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스토리텔링과 정체성 찾기에 더 좋은 방법은 도시에 숨겨져 있는 기억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발견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서의 도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그때 도시를 살아온 사람들의 여러 작은 기억들을 찾아내어 현재에 다시 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지난 과거의 향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도시의 작은 역사가 베낄 수 없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찾아내어 여러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근대 건축물들뿐 아니라, 지금까지 도시 풍경을 어지럽힌다고 무시 받았던 오래된 건물들을 적극적으로 재이용하려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은 식민통치의 상징이어서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고도성장기의 건축은 건축적 철학이 부족하거나, 건설 수준이 조악하다고 비판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떠한 건물들은 그 건물이 있었던 동안 간직해온 역사를 통해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은 낮고 낡아서 수익성이 떨어지니 고층의 산뜻한 현대적 건물로 재개발해야 한다’는 과거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근대 건축물을 통해 인천의 100년 전을 지금도 느낄 수 있듯, 신포동의 극장들과 번화가, 송림동과 만석동을 채우던 공장들, 양조장들과 같은 50년 전의 구도심의 여러 기억 또한 현재에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개항과 산업화를 관통해오며 인천은 다른 도시들보다 더 많은 기억과 이야기거리를 쌓아왔음에도 더 현대적인 도시와 발전된 미래를 좇아오느라 그것들을 잊어왔습니다. 오래된 건축물과, 그 안에 있는 오래된 기억들을 찾아내어 기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인천경제자유구역과 같이 미래를 꿈꾸는 인천의 다른 한 편에 깊은 역사를 채워나가길 기대해 봅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한지은(2014), 도시와 장소 기억,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문화재청(2005),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등록문화재 제도 안내, 문화재청
– 이토 타케시(2006), 도쿄에 있어서 근대건축보존의 성립과 전개, 서울학연구, (27)
– 이현정,윤인석(2007), 한국 근대건축의 보존과 활용-명동지역의 장소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8)
– 임태희,이시다 준이치로(2005), 일본 근대건축 보존개념의 변천에 관한 연구-1970-1999까지의 월간 『신겐치쿠(新建築)』誌를 대상으로-,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