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즐거움을 큐레이션합니다: 이종범 『스펙타클』 발행인 겸 편집장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인천의 즐거움을 큐레이션합니다이종범 『스펙타클』 발행인 겸 편집장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인천 청년들이 취재한 인천 이야기, 지역 잡지 『스펙타클』

“인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알려주고 싶었던
공간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난달 창간호를 낸 잡지 『스펙타클(Spectacle)』 발행인 겸 편집장인 이종범(29) 씨는 이같이 말했다. 표지에 적힌 말 그대로 인천에 사는 ‘인처너(Incheoner)를 위한 잡지’다. 이 씨는 편집자 주에 “인천에 깊숙이, 혹은 느슨하게 한 발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면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인천하면 흔히 떠오르는 일관된 상상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목차를 이룬다. ‘차이나타운 어느 집 자장면이 원조인지’, ‘월미도 테마파크에서 무슨 놀이기구를 타야 재밌을지’ 이런 진부한 소재를 다루는 책자가 아니다. 인천이 꽤 익숙한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졌다. 이 씨는 이번 호 주제인 ‘코로나 시대의 로컬’에 대해 “팬데믹 상황이 불러온 단절 속에서도 우리의 도시를 즐겁게 바라보는 방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스펙타클』에는 인천의 사람, 가게, 풍경,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권 없이 떠날 수 있는 인천의 세계 여행지를 소개한 내용도 그중 하나다. 중앙아시아부터 오세아니아·아메리카·유럽·동남아·동북아 등 각 대륙의 음식을 파는 곳이 상세하게 정리돼있다. 인천 곳곳에 있는 외국 음식점에서 이국적인 맛을 즐기고 여행하는 기분도 낼 수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부평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미얀마 유학생 술라와의 인터뷰에서는 인천이란 도시가 가진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미얀마 음식점이 부평에 가면 여럿 있다는 그의 얘기처럼, 부평은 유학생, 노동자, 활동가 등 재한 미얀마인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활성화한 곳이다. 야채 곱창과 가수 ‘SS501’을 좋아하는 술라의 일상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2월 발생한 군부 쿠데타 이후 현지에 있는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주변 사람이 군부에 의해 끌려갔다는 짧은 인터뷰에서 미얀마가 처한 비극은 더 크게 와닿는다.

집에서 마시는 ‘홈술’이 지겨운 이들을 달랠 지역 ‘혼술 플레이스’도 빼놓을 수 없는 읽을거리다. 집에서 가볍게 마시는 캔 맥주 대신, 도수 높은 위스키가 끌릴 때 방문하기 좋은 곳들이 포함됐다. 인하대 인근의 가게 2층에는 서가에 가지런히 놓인 책 사이로,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가 놓여 있는 ‘심야 책 바(Bar)’가 있다. 입구에 “취기가 아닌 공간과 술을 즐겨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눈길을 끄는 곳. 홀로 술을 즐기는 이에게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평리단길 일대 양복점 외관을 한 가게는 와인과 막걸리, 소주 등 다양한 주종을 판매한다. 젓갈 파스타, 봉골레 떡볶이, 스위스식 감자전 등 ‘무(無)국적’ 안주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입안 가득 달곰한 맛을 돋운다.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술집은 직접 구운 쿠키와 맥주·위스키를 주로 내놓는데, 오후 2시부터 문을 여니 홀로 낮술 즐기기 딱이다. 잡지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내가 아는 인천에 이런 곳이 있나’하는 생각에 빠진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동료들과 인천을 탐방하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우리, 학교 문집 만들 듯 소소하게 할까요?
아니면 기왕 하는 거 좀 의미 있게 한번 해볼까요?”

이 씨가 잡지 『스펙타클』을 만들게 된 계기는 특별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그가 지난 3월 결성한 지역 청년 모임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1기 팀원들이 “우리 활동을 바탕으로 책 한 권 내보자.”고 제안했던 게 시작이었다. 제작비는 책이 발행되길 바랐던 시민들의 후원으로 충당했다. 인천에서 일하는 청년 10여 명은 3~4명이서 팀을 이뤄 동네를 탐방하고, 인천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기획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분야의 창작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천 스펙타클과 강화유니버스가 함께 진행하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썸머세션의 3일차
(출처: 인천스펙타클 인스타그램)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만나서 교류하는 활동이 많이 제한됐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내가 사는 곳에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를 만든 이유입니다.”

스펙타클 유니버시티의 팀원은 학생이고, 교육자이자 연구자다. 다 같이 콘텐츠를 발굴·기획하면서 어떤 주제든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폭넓은 범위에서 활동이 이뤄진다. 어떤 날에는 공방에서 나뭇조각을 깎아 숟가락을 만들고, 또 다른 날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LP 재즈 바에서 공연을 듣는다.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의 새로운 취미인 등산을 체험하기 위해 계양산을 갔다가 초입길에 있는 맛난 커피집을 들르기도 했다. 이렇게 지난 6개월 활동을 마무리한 1기 팀원들의 발자취는 『스펙타클』 창간호에 담겼다. 지난달에는 40명의 팀원이 새로 꾸려진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2기에 합류했다. 이들의 활동은 내년에 발간될 『스펙타클』 2호에 반영된다. 이 씨는 지속해서 지역 모임을 운영할 계획이다.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뭔지 고민했습니다. 취향에 맞는 공간과 하고 싶은 일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스펙타클 유니버시티가 인천에서 좋은 동료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종범 기획자는?

이 씨는 2017년 『서울보다 멀고 제주보다 가까운 인천의 카페들』을 출간했다. 개항기 일본식 목조 건물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카페와 송도국제도시 마천루 사이에 자리 잡은 커피집까지 총 30곳을 방문하고 책으로 집필했다. 그는 동네 특색과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카페라고 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가장 작은 단위의 문화 공간이 카페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서울보다 멀고 제주보다 가까운 인천의 카페들』, 2017 『인천의 창작자들』, 2019
(출처: 인천스펙타클 인스타그램)

“서울로 대학교와 회사를 다니다 보니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만 3~4시간이더라고요. 그런데 주말에도 서울에 가서 문화생활을 할 때가 많잖아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천에서도 퇴근 후와 주말의 삶을 보낼 만한 근사한 곳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역 카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어요.”

2019년에는 인천을 무대로 활동하는 『인천의 창작자들』을 발행했다. 음악·미술·디자인·공예 등 인천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삶과 활동을 담았다. 이 씨는 지난 5년간(2017~2021년) 지역 사회 문화 기획이나, 창작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예술반점 길림성, 인천 서구 크리스마스마켓, 인천크리에이티브 마켓 서멀장, 인천시 문화가 있는 인천애뜰 콘텐츠 등을 기획했다. 앞으로도 도시 인천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찾는 게 이 씨의 목표다.

“언제 타도 북적이는 용산행 지하철에 가까스로 몸을 구겨 넣으면, 맞은편에 텅 빈 동인천행 승강장이 눈에 들어와요. 인천이란 도시가 서울과 인근 지역을 향하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 아닌, 충분히 내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라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 The Beginning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 The Beginning

이주경(연수문화재단 문화사업팀)

연수문화재단에서는 지난 10월 인천 연수구 옥련동에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APY: ArtPlug Yeonsu Artist residency)를 개관했다. 본래 이곳은 1992년에 세워진 ‘가천인력개발원’으로 의료 종사자 양성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의료 관계자 연수원으로 운영된 이후 약 10여 년간 비워져 있던 공간을 연수구에서 2020년 말부터 2021년 5월까지 리모델링을 진행하여 현재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트플러그 연수가 위치한 연수구 옥련동은 송도유원지가 가장 호황이던 1980~90년대와 맞물려 한때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시기를 지나, 현재는 그 당시의 활발하고 때론 화려했었던 기억을 가진 구도심의 풍경을 안고 있다. 예전 구 송도유원지와 인접해 있던 이 공간을 많은 분들은 아직 가천인력개발원으로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아트플러그 연수는 다시 한번, 아티스트 레지던시만의 독특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예술을 통해 인천 연수구 옥련동 도심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아트플러스 연수 전경 Ⓒ연수문화재단

국내에서 예술가의 창작 작업 공간으로써 아티스트 레지던시가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후반 「폐교재산의 활용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시작되었다. 이후 대안공간의 증가와 폐산업 시설 재생 모델 사례가 늘어나며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지자체 및 민간에서 그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여 한때, 약 150여 개의 레지던시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국내 창작스튜디오의 이러한 양적 증가는 예술계 특히 시각 예술계에 건강한 환류와 예술가의 안정적 창작지원의 기반이 되었지만, 약 30여 년간의 국내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행보와 그 이면을 돌아보면, 여전히 창작공간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엇갈린 시선들이 존재한다. 창작스튜디오의 의의를, 해당 존재 가치의 수적 환산에 의한 당위성에 대입해 보는 관점으로 단순 치환해 버리는 관점이 여전히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예술의 본질적 가치와 확산에 대한 방법론과 개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대신, ‘아트플러그 연수’가 국내 레지던시 후발 주자로서 2021년 하반기 개관을 준비하며, 어떠한 지점에서의 고민을 시작으로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지면을 통해 공유하며 단편적이지만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지역과 예술계의 입장과 시선을 바라보고자 한다.

기관의 성격과 미션에 따라 해당 레지던시의 역할과 목표는 상이하지만, 대체로 지자체 주도의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공공성에 대한 당연한 의무와 더불어 예술가의 창작지원을 기본으로 입주작가들의 직접적 참여를 통한 지역 내 문화예술의 확산이라는 조금은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운영된다. 실제 그러한 목표를 위해 표면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입주작가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러한 프로그램이 물론 긍정적 효과를 거두기도 하지만, 이는 앞에서 언급한 국내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 중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여러 가지 사례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물론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특징 중 하나인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정주함을 목적으로 해당 레지던시가 있는 지역에 일정 기간 거주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 내 예술적 순환, 교류, 확산에 대한 실효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창작스튜디오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며, 운영주체는 이를 위해 레지던시 프로그램 작동에 대한 본질적 구조와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아트플러그 연수는 고민의 지점을 지역성과 순환·교류라는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로그램의 다양한 지점을 실험하고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해 ‘창작분야’와 ‘프로젝트&리서치 분야’로 나누어 2021년 파일럿 입주작가를 선발하였다.

2021입주작가 김민석 전시전경 2021입주작가 윤미류 전시전경
<2021 ARTPLUG: The Beginning> 전시전경 (아트플러그 연수, 10.22.~11.28.) Ⓒ연수문화재단

예술창작공간의 기본 프로그램인 창작분야 입주작가 운영을 통해 예술창작공간으로서 시설의 공간적 정립과 그 역할에 대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기 위해 시범 운영 중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작공간 본연의 역할인 예술가의 안정적 창작지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연구하고 준비하려 한다. 이와 더불어 아트플러그 연수의 지역적 역할에 대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기획자 레지던시인 프로젝트 분야를 선발하였다. 창작공간의 지역연계 과제와 레지던시 네트워크 및 자발적 순환에 대한 목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풀어가기 위해 올해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 중이다. 예술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두 가지 측면으로 운영되는데, 자율 주제 프로젝트 지원과 연수구와 연관된 리서치 프로젝트 지원이 있다. 국내에는 기획자의 아트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 아트 프로젝트는 동시대의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며 때론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아트플러그 연수는 프로젝트 입주분야의 운영을 통해 다양한 기획을 실현할 수 있는 장으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유연함과 실험성을 확대하고자 한다. 또한 연수구 문화자산에 대한 ‘현대화’를 통해 인천 연수구의 지역성 및 공동체성의 예술적 해석과 더불어 지역 문화자산의 지속 가능한 기반을 구축하고자 한다.

아트플러그 연수 2021입주작가 아카이브 ‘랜-딩 페이지’ 프로젝트 프리 리서치
<2021 ARTPLUG: The Beginning> 전시전경 (아트플러그 연수, 10.22.~11.28.) Ⓒ연수문화재단

현재 아트플러그 연수에서는 개관전을 겸하여 2021년 파일럿 입주작가 프리뷰전 <2021 ARTPLUG: The Beginning>(10.22.~11.28.)을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1 입주작가 프리뷰전으로 창작 6팀의 작업과 프로젝트 2팀의 프리 리서치를 보여준다. 전시 제목 ‘The Beginnig’은 예술창작공간으로 새롭게 변모한 아트플러그 연수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을 제시하고 실천하기 위한 시작임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는 8팀으로 창작분야 김민, 김민석, 윤미류, 이현우, 전장연, 정기훈 작가의 작품과 프로젝트분야 랜-딩 페이지(이현인, 조근하, 오타하루카, 타케마사토모코), 이정은 작가의 프로젝트 프리 리서치를 살펴볼 수 있다. 이번 2021년 프리뷰 전을 기점으로 아트플러그 연수에서는 여러 논의와 제의, 동조와 이견, 실행과 교차가 날것 그대로 오고 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풍경을 대면하는 예술창작공간으로 시대적 관계의 틀을 새롭게 조직하고자 한다. 올 한 해 지역사회와 예술계에 유의미한 지점으로 작동될 수 있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이주경(李周暻, LEE Ju Kyeong)

이주경은 예술경영 석사 졸업 후 축제조직에서 공연기획과 폐산업시설 문화 재생공간 개관 프로그래머와 다년간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획 업무를 경험했다. 현재는 인천 연수문화재단 문화사업팀 차장으로 근무 중이며, 연수문화재단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 개관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달려라, 아비〉는 사실 우리 엄마 이야기예요

<달려라, 아비>는 사실 우리 엄마 이야기예요

정영진(인천문화예술회관 주무관)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리고 스핑크스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백십 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달려간다고 생각했어.” 딸의 상상 속에서 아빠는 지구 어딘가를 핫핑크 반바지를 입고 달린다. 엄마와 함께 일상을 맞는 딸은 쾌활한 성격이다. 모녀에게는 아빠의 부재로 인한 상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씩 과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과 헤어짐 속에 담긴 사연들을 찾게 된다.

<달려라, 아비>는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연극 <달려라, 아비>는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2021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이하 한문연)에서 주관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공동제작‧배급 사업 공모에 당선돼 제작했다. 인천 내 3개 문화예술기관(인천문화예술회관, 부평구문화재단, 인천서구문화재단)과 ㈜스포트라이트가 공동으로 제작했고 총제작비의 50%는 국비 지원, 나머지 50%는 3개 기관이 각각 부담했다. ㈜스포트라이트는 작품 창작 전 과정을 세세하게 관리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인천문화예술회관
부평아트센터
ⓒ부평구문화재단
청라블루노바홀
ⓒ인천서구문화재단

작품 제작은 딱 일 년 전에 시작됐다. 한문연 사업 공모가 난 직후 인천지역 3개 문화예술회관 공연기획 담당자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두렵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생각들을 모아갔다. 그러던 차에 우연인 듯 필연처럼 다가온 작품 제안이 <달려라, 아비>였다. 대본을 들고 찾아온 제작 프로듀서의 수줍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 출신 인기 소설가 김애란의 작품을 인천에 있는 문화예술 기관과 공동으로 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소설을 각색해 송현동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인천의 이야기를 만들고 서울과 전국으로 유통해서 스테디셀러 연극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프로듀서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 제작이 1년의 숙성 시간을 거쳐 드디어 10월 22일 청라블루노바홀에서 첫 공연을 올리고, 11월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마지막 공연까지 총 9번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주)스포트라이트

<달려라, 아비>는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술빵, 팔길래, 눈 와, 첫눈” 끊어진 단어 사이로 아빠의 서툰 사랑고백이 참 사랑스럽다. 엄마와 아빠의 로맨스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애틋하고 예쁘게 자란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기 직전 집을 나간 아빠. 딸에게 아빠는 미지의 세계고 어디선가 열심히 뛰고 있는 대상이다. 아빠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엄마와 딸.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아련한 빈자리는 추억과 상상으로 메꾸며 잘 살아가고 있다.
제목은 아빠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들지만 사실 이 연극은 엄마의 이야기다. 아빠에 대한 상상 속 달리기는 택시 운전을 하는 엄마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환된다. 핫핑크 반바지를 입고 세계 곳곳을 달리는 아빠는 택시를 몰아 시내를 질주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오늘도 바쁜 일상에서 명랑함을 잃지 않은 딸의 모습으로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우리들 모습으로 그려진다.
<달려라, 아비>의 단순한 플롯 전개를 재기발랄한 극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은 영상이 맡았다. 이 극의 장르는 영상이 결합된 콘템포러리 연극이다. 반지하방이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하고 앞쪽으로 놓인 러닝 트랙과 허들은 동화적 이미지와 함께 메시지 전달을 위한 오브제로 쓰인다.
작품을 섬세하게 다듬은 김가람 연출가는 <뮤지컬 아랑가>로 명성을 쌓은 젊은 연출가이다. 그녀가 그려내는 무대는 역동적이면서도 파스텔톤의 아련한 감정이 녹아있다. 과감한 영상 도입과 무대 장치의 조합은 볼거리 제공과 함께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연극에 생동감을 불어 넣은 배우들은 누굴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지만, 딸과 함께 남겨진 삶을 긍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 역할은 정영주가 맡았다. 그는 최근 뮤지컬과 방송으로 바쁜 스케줄 임에도 연극무대의 생동감을 잃고 싶지 않아 캐스팅에 응했다고 한다. 기존의 억척스러운 이미지를 절제하고 극중 배우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연기를 택했다. 딸 역할의 이휴는 뮤지컬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신예다. 원작처럼 전체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이끌어 가면서 극중 감정의 고저를 주도한다. 아빠 역할의 장두환은 1인 다역 멀티맨이다. 아빠와 외할아버지, 택시 승객 등 다양한 남성 캐릭터를 극 속에 녹여내며 감초 역할을 한다.

ⓒ인천문화예술회관

<달려라, 아비>는 내년 대학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의 3개 문화예술기관과 제작사는 앞으로 계속 공연을 할 때마다 공동제작 명의를 쓰기로 했다. <달려라, 아비>의 출발점은 인천이다. 내년 대학로를 시작으로 대전을 지나 광주 무등산을 너머 부산 김해 공항을 돌아 제주 한라산으로, 그러다 태평양을 날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달리는 아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영진(丁榮進, Chung Young Jin)

안양아트센터, 마포아트센터, 부평아트센터, 종로아이들극장, 인천문화예술회관 등 공공공연장에서 공연기획과 홍보마케팅 업무를 주로 담당해왔다.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문화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인하대학교 문화예술교육원에서 문화예술교육개론을 강의하고 있다.




어느 공연 담당자의 단상

어느 공연 담당자의 단상

성채은(부평구문화재단)

내 탓이오, 내 일이오
어떠한 문제나 갈등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내 탓이오’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답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지구온난화도, 바다거북의 멸종 위기도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일도 그렇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말고 다 ‘내 일이오’ 하다 보면 잘되겠지. 그리고 그것이 답이겠지 생각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지방공연을 내려가 식당 반찬을 알아보는 것도 내 일이고, 카페가 문을 열지 않은 시간 눈이 덜 뜨인 출연자에게 커피를 만들어 주는 것도 내 일이다. ‘공연 담당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공연과 관련한 A부터 Z까지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름 분야별로 업무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업무 칸막이들 사이에서 어디에 넣어야 할지 애매한 일들은 모두 ‘담당자’에게 귀결된다. 업무 진행 구조가 불합리해서가 아니라,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공연이 끝난 밤, 회사에 남아 배우들의 옷을 빨다가, 대기실에 남겨진 도시락의 잔반을 치우다가, 가끔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혼자 머릿속으로 알고리즘을 돌려볼 때가 있다.
지금 이 일이 내가 생각한 업무의 범위 안에 있는 일인가 → 아니다 → 그렇다면 이 일은 다른 누군가의 업무에 속한 일인가 → 아니다 → 누구의 업무에도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인가 → 그렇다 → 그럼 나구나… 다음주에는 관객 제공용 선물 450개를 포장해야 한다.

Office Worker
나는 사무직이다. 언젠가 무려 외국으로 여행을 편히 갈 수 있었던 시절, 입국신고서를 작성할 때 직업을 묻는 란에도 그렇게 적었다. ‘Office Worker’ 비록 온종일 사무실 책상에 한 번을 못 앉는 날도, 무대에 올릴 소품을 찾느라 발품을 팔고, 홍보물을 옆구리에 끼고 근처 카페와 공연장들을 돌아다니는 날들이 수두룩하지만 내 직업의 기본 설정값을 정의한다면 ‘사무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도 아니고 특수기술을 가진 전문직도 아닌, 공연 관련 일을 하는 사무직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가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돕고, 행정적인 뒷받침을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정도는 그들의 예술적 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소리가 너무 드라이하지 않나요?”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질문에 “객석에서 들을 때는 잔향이 나쁘지 않습니다.” 같은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기술적이고 실제적인 대답은 음향감독님이 해주시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어…”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공연장을 보유한 재단의 예술기획팀에서 일하게 되다 보니 알아야 하고 해야 하는 것은 더욱 많아졌다. 오랜 시간 클래식 관련 공연만 해봤었던 나는 지금의 재단에서 일하게 된 후 너무나 많은 무대 용어, 공연 용어들을 눈치껏 배우고 습득해야 했다. 지난해, 자체 제작 뮤지컬을 맡으면서는 배우 오디션부터 테크 리허설, 드레스 리허설 등 많은 인원이 촘촘하게 운영되는 과정을 0에서부터 처음 겪고 배웠다.

<2021 서현진과 함께하는 브런치 콘서트: 춤출까요?> 10월 “광기, 무섭도록 아름다운” ⓒ부평구문화재단

올해 새롭게 담당하게 된 ‘브런치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구성이라 조금은 익숙하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클래식 음악과 무용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연으로 기획하여 음악감독과 무용감독을 섭외하고 대본작가도 구했다. 공연의 회차별 주제도 정하고 사회자와 출연진도 섭외하고 홍보물도 만들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싶었는데 아뿔싸, 텅 빈 무대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사회자는 무대에 계속 앉아있을 거야? 무용 공간은 어디까지로 잡을 거야? 첫 번째 주제가 바로크라며, 그럼 바로크 느낌을 무대에 어떻게 표현할 거야?” 무대 연출자가 따로 있다면 단박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에겐 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바로크 이미지의 작화막을 달아야 하나? 그러기엔 딱 떨어지는 이미지적 정의가 있는 건 아니잖아. 10월 공연 주제 ‘광기’는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지? 무용을 위한 무대 공간은 어느 정도로 확보를 해야 할까? 연주자들 공간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잘 안 보이겠지?’ 일을 하면서 숱하게 찾아오는 이런 막막함이 무한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때에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나의 취미생활을 해본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오해 마시라.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찰스 부코스키, 민음사)는 책 제목이다. ‘책 사기’는 나의 오랜 취미생활이다. 주로 명민하게 돌아가지 못하는 나의 두뇌 때문에 괴로워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때에 행해진다. (끝까지 다 읽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책을 사는 것으로라도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같은 말을 뱉어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내가 아직 어리숙한 담당자, 기획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늘 어렵다. 일의 범위는 너무 넓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조금이고, 나는 늘 서투르다. 예술가가 본인의 예술을 펼쳐낼 때는 한발 뒤로 물러나서 그의 세계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그 세계가 관객석과 너무 멀어질 때는 그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그 간극을 좁혀줄 제안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가용한 예산의 범위 내에서 최대의 효율을 취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운영을 구상하고 실행해내야 하며, 그 실행은 무대에 오르는 예술가와 관람하는 관객, 그리고 이 기관까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무직’이지만 그 ‘사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사무실 안에도, 밖에도 산적해 있다.

2020 부평구문화재단 제작공연 창작뮤지컬 <헛스윙밴드> ⓒ부평구문화재단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이것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까지 하다 보면, 내 손이 닿은 영역이 많아질수록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진다는 것을. 지방공연을 내려가 로드뷰를 훑어가며 찾아낸 국밥집이 맛이 좋으면 그 또한 내가 뿌듯한 일이고, 내가 포장한 증정품을 들고 돌아가는 관객의 즐거운 뒷모습도 감사한 일이 된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서 기획한 공연의 객석이 채워져 나가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사실 툴툴거리는 볼멘소리들은 내 몸을 일으켜 뭐라도 하나 더 하게 하는 노동요 같은 화력이다.
눈앞에 세 개의 공연이 연달아 줄지어 있다. 분명 수많은 상황에서 고민에 빠지고 뛰어다녀야겠지만 고민의 시간과 뛰어다닌 걸음만큼 보람과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일이고 나의 업무이다.

성채은(成采垠, Chae-eun Sung)

부평구문화재단 예술기획팀 대리. 교향악단, 클래식 공연 기획사에서 근무하다 부평구문화재단에 입사하여 마케팅팀, 기획조정팀을 거쳐 예술기획팀(당시 공연사업팀)에 근무중이다. 2020년은 코로나로 공연 계획과 취소를 반복했지만, 부평구문화재단 자체 제작공연 <헛스윙밴드>를 맡아 무사히 전 회차 공연을 마쳤다. 2021년 <헛스윙밴드>의 지방공연과 <함께하는 브런치 콘서트: 춤출까요?>를 비롯한 공연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제4회 임진예성포럼, 남북역사문화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다

제4회 임진예성포럼,
남북역사문화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다

정민섭(인천문화재단 평화문화예술교류사업단)

임진예성포럼은 안정적, 지속적 남북역사문화교류사업 모델을 만들기 위해 인천문화재단과 경기문화재단, 중국 연변대학교 조선반도연구원 등 3개 기관이 창립한 정기 국제 학술 포럼이다. 포럼의 주제는 인천·경기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북한 황해남·북도 및 개성, 남포지역의 유무형 문화자산 등에 대한 학술적 비교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2018년 포럼 주제는 ‘고려의 대외교류와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 유적 비교’였으며, 2019년은 ‘남북한 중세 왕릉의 세계유산 교차 확장 등재 가능성 검토’가 주제로 다루어졌다. 한편, 2020년에는 연변대 연구진의 북한현지조사를 중심으로 한 <황해남도 역사문화 조사연구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에 3회 포럼은 ‘황해남도 문화유산 조사연구를 위한 예비적 검토’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다만,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인해 연변대학교 관계자의 포럼 대면 참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전 녹화 영상으로 참여를 대체하기도 했다.

이상의 세 차례 개최된 임진예성포럼의 성과를 토대로 2021년 제4회 포럼은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황해남·북도 유·무형 문화자산의 현황’을 주제로 개최했다. 특히 무형유산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황해남·북도 역사문화 조사연구 사업>에서 유형유산 뿐만 아니라 무형유산에 대한 검토도 함께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북의 역사문화교류는 대부분 유형유산을 매개로 진행되었다. 이는 유형유산이 명확히 남북 한 간의 연계와 동질성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진행된 임진예성포럼은 유형유산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2021년 인천, 경기문화재단과 연변대는 이러한 편중을 극복하고 황해남·북도 역사문화 조사연구 사업과 학술포럼 간의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해 무형유산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게 되었다.

<제4회 임진예성포럼> 현장 모습

둘째는 북한 내부의 무형유산에 대한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은 비물질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관리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민족제일주의와 관련한 체제 우월성 선전, 주민 교양, 대외적으로 유네스코 무형유산을 통한 국제적 동참 등 여러 이유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비물질문화유산 중 황해도 지역의 비물질문화유산은 인천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인천으로 이주한 황해도지역 피난민에 의해 황해도 일대 무형유산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제4회 임진예성포럼에서 북한의 황해남·북도지역의 비물질문화유산과 인천의 무형유산과의 교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했다.

이에 제4회 임진예성포럼은 「1900년 전후 황해도 해주백자의 제작배경과 양식」, 「황해도 굿의 특징과 전승현황」, 「교류와 매개로서 문화유산-황해도 지역의 비물질문화유산과 인천·경기지역 간 교류와 협력」, 「북한의 비물질문화유산 부각과 의미」 등 총 4개의 주제발표 및 토론을 진행했다.

「1900년 전후 황해도 해주백자의 제작배경과 양식」에서는 20세기 들어선 시기 국가가 생산하던 도자기 생산시설인 분원이 폐지와 민영화를 겪은 과정을 살폈다. 그리고 해주백자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옹기와 백자 결합한 화려한 해주백자의 모습은 당시 어떤 시대상황을 반영하는지에 대해 확인했다. 「황해도 굿의 특징과 전승현황」에서는 분단 이전 시기 황해도 굿의 특징과 분포 현황 및 분단 이후 황해도 굿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교류와 매개로서 문화유산-황해도 지역의 비물질문화유산과 인천·경기지역 간 교류와 협력」에서는 2010년대 북한의 비물질문화유산 정책의 변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범위가 확장되는 황해도 일대 비물질문화유산의 현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황해도 일대 비물질문화유산과 인천과의 연계 검토를 통해 비정치적인 무형유산을 활용한 교류 가능성도 함께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물질문화유산 부각과 의미」 에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비물질문화유산 관리 현황과 그 특징 그리고 비물질문화유산이 강조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종합토론을 통해 개별 주제발표와 관련하여 황해남·북도의 유·무형문화자산의 연구과제와 더불어 남북교류의 매개로서 무형유산의 가능성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진행했다.

2021년 임진예성포럼은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으로 많은 시민과 연구자들이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포럼에서 논의된 주제발표와 토론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우선, 지금까지 각론적으로 논의되었던 인천과 황해남·북도가 공유하고 있는 무형유산의 현황과 조사연구 성과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북한의 현재 비물질문화유산 정책 방향을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인천과 북한과의 무형유산 교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는 다양한 인천형 남북역사문화교류의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평화문화예술교류사업단은 앞으로 제4회 임진예성포럼에서 도출된 다양한 무형유산들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를 통해 남북역사문화교류사업의 폭을 확대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다.

정민섭(鄭珉燮, Min-sup Jung)

인천문화재단 평화문화예술교류사업단 대리. 역사고고학[성곽] 전공.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을 거쳐 현재 평화문화예술교류사업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인천의 다양한 평화자산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평화자산에 대한 문화예술적 해석과 활용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트플랫폼 입주예술가: 양지원, 윤지영, 임형섭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양지원 YANG Jiwon

양지원은 드로잉 작업을 기반으로 설치, 텍스트, 사운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드로잉이라는 매질을 이용해 자신에게 익숙한 그리기, 쓰기와 같은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어떤 대상(글자)의 형태가 지닌 조형적/언어적 요소를 변주시키고 이를 통해 원래의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로 파생되어나가는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씨앗, 산책, 관찰, 언어, 글자, 춤, 소리, 시, 침묵, 궁창, 공간, 분위기,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노트 안에 늘어놓은 단어 중 일부이다. 이 단어들은 최근 몇 년간의 전시를 통해 드러났고 알게 모르게 지금도 작업 안에서 작동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미술교육을 받아왔기에 그린다는 행위가 친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여 생각해보면서 그리기라는 행위에 숨겨진, 무언가 놀라운 시원을 찾아가려는 듯한 마음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그리고 쓰는 행위(글쓰기가 아닌 쓰기)를 반복하는 스스로를 관찰하면서 일종의 쓰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기와 쓰기, 그림과 글자, 글자와 언어, 언어와 소리’가 현재 나의 화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글자의 형태를 살펴보며 그것을 조형적, 언어적으로 변주하고 글자의 기존 기능을 벗어나 다른 어떤 기능을 가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글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어떤 요소일 수도 있고, 글자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무언가로, 우선은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다. 당분간은 글자를 불러내어 쓰기와 그리기에 속하지 않는 어떤 이미지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지 시도해보고자 한다.

바닥) JWY.D.001.19, 비닐 시트, 가변치수, 2019
벽) JWY.D.002.19, 비닐 시트, 가변치수, 2019
《모음 Moeum》, SeMA창고, 서울, 2019
JWY.D.01.21, 벽 위에 페인트, 목탄, 콩테, 오일 스틱, 가변크기, 2021
《산실 産室》, 인천아트플랫폼 G1 전시실, 인천, 2021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그간의 전시들은 우연히 혹은 공모를 통해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의 특징이 살아있는 전시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모음 Moeum》(SeMA창고, 서울, 2019) 전시가 진행된 SeMA창고의 경우 60년대의 사용 조건을 유지한 전시 공간으로, 나무 조각들이 얼기설기 엮인 천장의 틈새로 강한 자연광이 들어오고 나무로 만든 선반이 벽을 둘러싸고 물리적 특성을 가진 공간이었다. 나는 이 전시 공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활용하되 작업이 공간을 장악하거나 더 드러내기보다는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공간 안에 스며들어 어떤 분위기가 생성되기를 바랐고, 그 때문에 재료 선택도 한참을 고민했던 전시였다.
더불어 올해 8월 인천아트플랫폼의 새롭게 조성된 전시장에서 진행했던 《산실 産室》(인천아트플랫폼 G1 전시실, 인천, 2021) 전시는 공간의 물리적 특징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높은 층고의 화이트 큐브에서 벽 드로잉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충분한 설치 기간을 가질 수 있어서 이미지 간의 조율과 편집을 통해,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현재는 드로잉, 사운드, 텍스트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앞으로도 공간적 특징이 있는 곳과 화이트 큐브라는 상반된 공간 안에서 드로잉 그 자체와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다양한 매체를 만나 드로잉이 발현되는 가능성을 보고 싶다.

작가정보: jiwonyang.org

윤지영 YOON Jiyoung

윤지영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개인의 삶의 환경으로 주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더 ‘잘’ 살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행동양식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드러나지 않는 내부 구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작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비대면 소통이 흔해진 현재의 상황이 시공간에 대한 경험과 소통방식을 바꿔 놓았으며 사고와 인식의 방향을 우리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만들었다고 간주한다.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상태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우리가 관계를 맺는 데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환경으로 개인에게 주어질 때, 더 ‘잘’ 살기 위해 혹은 더 ‘나아지기’ 위해 개인이 취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있는 ‘희생의 구조’나 ‘믿음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에도 주목하여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지금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요즘 어떤 것에 대해 시간을 들여 생각하거나 찾아보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생각을 잇고, 리서치를 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곤 한다. 주로 입체와 영상으로 작업의 결과물을 만드는 편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춰 매체는 정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편이라 말할 수 있겠다.

<Yellow Blues>(2021) 전시전경
《젊은모색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2021(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효섭 촬영)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대표작이나 대표 전시를 고르기보다는 올해 하고 있는 작업(<Yellow Blues> 시리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상황이 지속되면서 ‘직접 만나서 소통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소통방식이나 사고가 영향을 받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외부활동이 통제되고 개개인이 격리되는 상황에서 당연시되었던 시공간에 대한 경험을 재인식해야 하는 상황은 인식의 방향이 자신에게 먼저 향하게 되는 것 같다. 이처럼 조금씩 스스로 매몰된 개인이 자기의식 과잉(self-consciousness)의 상태를 겪는 것, 외적 사건과 자신을 끊임없이 연관 짓고 자신의 상태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인지나 기억의 왜곡이 생기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질문에 관한 생각을 지속하면서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 사람의 감정과 감각이 변해가는 과정 자체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다양한 상태의 조각을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작가정보: jiyoungyoon.com

임형섭 LIM Hyungsup

임형섭은 듣는 소리로부터 비롯된 감각을 사람의 목소리, 몸의 움직임 등을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시·지각화하여 표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선(line)에, 청각적인 부분에서는 사람의 목소리와 소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의복과 움직임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을 완성하여 가을 중 공연으로 올릴 예정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오디오비주얼 작업을 새로이 제작하고자 하며, 시각예술분야 작가와 협업하여 선과 공간을 이용한 전시도 준비 중이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소리에 기반을 둔 작업을 한다. 소리에서 비롯된 감각을 오로지 청각으로만 또는 시각, 파동, 몸의 움직임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람의 목소리(육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육성이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높은 악기라는 말은 차치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익숙한 재료인 목소리는 매력이 다분하면서 동시에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2010년에 목소리를 재료로 삼아 작업을 시도했지만 참담한 결과물을 받아든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 및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나의 작품 제작과정을 설명하자면, 먼저 어떠한 현상의 체험 또는 생각의 인지를 통해 작품의 개념과 주제의 기본적인 틀을 어렴풋이 구상한다. 이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친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여 결과물을 완성한다.

woodenman, 오디오비주얼, 7분 58초, 2017
《Monologues》, CICA Museum, 김포, 2020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나의 대표작으로는 <Woodenman for 4CH Audio-visual>(2017)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화자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숫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태어난 나이와 연도로, 학교에서는 번호로, 군대에서는 군번으로 불리며 구분된다. 숫자가 나를 대체하는 것이다. 작품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숫자가 아니라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개인적으로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작업의 재료로 다루는 시도를 해 본 작업이기도 하다.
음악과 공연은 시간 예술이다. 일단 시작되면 관객의 시간은 오롯이 공연을 만든 작가나 퍼포머의 통제 하에 놓인다. 이 시간 동안은 관객에게 내 생각과 목소리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업 제작에 들이는 시간 역시 나를 ‘온전한 나’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에, 내 작업의 궁극적인 의미는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나는 다른 수식어 없이 ‘임형섭’이라는 내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자면, 영상 공부에 좀 더 매진하여 영상 작가를 따로 고용하지 않고 개인 작업만으로 영상 설치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 작가에게 제공받은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연속적 블루, 작가 전희경

이름: 전희경 (全姬京, Jeon Heekyoung)

출생: 1981

분야: 시각예술

인천과의 관계: 작업실(인천 서구 위치)

작가정보: 인스타그램 @jeikei_jeonheekyoung

주요개인전
2021 <Into the Blue> 미학관, 서울
2020 <달빛이 가장 고요했던, 그곳>, 아터테인, 서울
2019 <안온한 세계>, (구)떡집, 안산
2018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 신한갤러리 역삼, 서울
2014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겸재정선 미술관, 서울
주요단체전
2021
<예술인지원사업 SEORO 2021 선정 시각미술 청년작가전>, 청라블루노바홀, 인천
<매니폴드_사용법>,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서울
<공기의 모양>, 정서진 아트큐브, 인천
<ABSTRACT-ING>, 신세계 갤러리 센텀, 부산
2020
<회화, 정신적 에너지의 귀환>, 아터테인, 서울
<문턱만 닳도록>, 세마창고, 서울
<OP.23 NO.8 In A FLAT MAJOR>, 오브, 서울
<나와 자연 사이의 거리>, 광주신세계갤러리, 광주
2019
<서울로 미디어캔버스>, 서울만리동광장, 서울
<회귀본능>, 경기창작센터, 안산
<와유금강>, 겸재정선미술관, 서울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2017-2020 경기창작센터, 안산
2013 관두미술관, 타이페이, 대만
2012 타이동 미술관,타이동, 대만
2011 오픈스페이스배, 부산
2009 분다눈트러스트, 뉴사우스웨일주, 호주
수상 및 선정
2015 네이버문화재단 ‘헬로우아티스트’ 선정
2015 에트로 미술상 은상 수상
2013 겸재정선미술관 ‘내일의작가’ 대상수상
작품소장
2018-2019 국립현대미술관_미술은행
2015-2016 백운갤러리(백운장학재단)
2015 이랜드문화재단
2014 겸재정선미술관
2013 대만 타이동 미술관
2012 국립현대미술관_미술은행 그 외 개인컬렉션
창작지원
2021 인천서구문화재단 청년예술인창작지원
2020 인천문화재단 창작공간지원
2020 인천서구문화재단 전문예술인창작지원
2019 안산문화재단 전문창작지원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대표작이면서 최근작이기도 한 <연속적 블루>라는 제목의 10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회화작품이다. 회화작품은 크게 풍경의 요소가 드러나는 회화 시리즈와 자연의 요소인 바람이나 공기를 추상적으로 풀어낸 시리즈 그리고 달과 동굴을 모티브로 한 시리즈 등 다양하다.
풍경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회화작품은 다양한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고,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과정에 있어서 우여곡절이 많아 그런지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연속적 블루> 연작은 거대한 미지의 산과 숲, 물의 공간 등을 상상 속에서 거닐면서 탐험하는 과정을 작품 구성의 뼈대로 하고 있다. 산으로 비유되는 관계의 공간을 오르고, 안개로 비유되는 절망의 공간을 통과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고, 만남과 이별의 과정이 개인의 이야기가 작품 시작의 작은 모티브가 되었고, 10폭의 회화작품 속에서 산을 오르면 숲을 만나고 비를 만나듯, 우리의 만남과 이별하는 삶의 과정을 마치 한 폭의 풍경 회화 속에서 상상하듯,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연속적 블루> 1~3, 193.9×130.3cm, acrylic on canvas, 2021

2.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우연한 계기로 인천 서구 검암동으로 거주를 이동하게 되면서, 자연과 도시의 그 어느 중간쯤, 살게 되었다. 작업실이 있는 인천 서구 검암동은 편리성이 발달된 중소도시이면서, 5분만 걸어 나가도 논밭과 산, 강이 있는 자연에 둘러싸인 장소이다. 우연히 도시와 자연의 중간 즈음 나의 세상을 펼쳐 놓게 되면서, 자연의 바람의 터치, 공기의 밀도, 습도의 감촉, 햇빛의 색 등의 자연의 것들이 작품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집착에 가까운 일상의 루틴은 일몰 직후 1~20분 동안, 그 시간대에서 느낄 수 있는, 마치 낮과 밤이 교차되는 순간의 대기의 움직임 등 급격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이 작품의 원천이 된다. 특히, 해가 막 뜨거나, 질 무렵에 습관적으로 밖을 나가는데, 그때의 자연이 변화하는 색(色), 형(形)은 작품의 직접적인 영감이 된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시대성을 반영하며 다양한 매체로 실험하거나, 스튜디오형 작가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교감하며 현장에서 작품을 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로 성장하고 싶다. 또 탐구의 깊이를 농도 짙게 나아가며 그 범주의 경계를 늘 넘을 수 있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축전 아트프로젝트 <It jumps and walks in the dark>, 설치전경, 제주도, 2021 <OP.23 NO.8 IN A~FLAT MAJOR> 전시전경, 오브, 서울, 2020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작품의 방향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잡는 경향은 아니지만, 내년에는 작품의 깊이를 단단히 하는 시기를 갖고자 한다. 10여 년이 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나만의 작품세계를 창작하고 만들어냈는데, 이 세계를 더 깊고 넓게 발전시키면서, 진지한 태도로 회화라는 매체에 대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또 개인적으로는 올해부터는 1개월 정도 자연 속에서 지내보려고 한다. 언제,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1년 중의 1개월은 꼭 작가로서의 삶과 현실의 삶 모두를 잠시 놓아보고자 한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인천 서구 검암동의 미-개발된 논밭 일대와 공촌천 주변의 산책길이다. (곧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으로 나의 영감을 주는 장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곳으로 이주할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고 동네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다 보니, 지금은 삶에서 매우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도시에 살면서 봄마다 논밭의 비료 냄새를 맡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계절마다의 농작물을 보며 자연과 인생의 시간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넓은 면적의 하늘을 보며 드넓게 펼쳐질 나의 세상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예술적 영감과 삶의 근원인 것 같다.

사진촬영 장소(도로): 서구 검암동 748

원고작성/사진제공: 전희경




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 연극 〈유원〉

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연극 <유원>

엄현희(연극평론가)

<유원>(원작_백온유, 각색_신재훈, 연출_전윤환)이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공연되었다. 연극은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유원』을 각색했다. 이 작품은 극단 앤드씨어터가 상주단체로 있는 인천서구문화회관의 지원을 받아 함께 만든 청소년 이야기 극으로, 지역 예술 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단체에서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며 콘텐츠를 확장한 것이다. 앤드씨어터는 이전에도 소설 『아몬드』(원작_손원평)를 낭독공연으로 만들어 2018, 2019년에 공연했다.

연극 <유원>,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2021.10.8.~10.10.
주최주관: 앤드씨어터, 인천서구문화재단 ⓒ앤드씨어터

연극 <유원>은 청소년을 주요 관객으로 하는 청소년극이란 명칭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작품 자체도 청소년극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왕따 문제, 성적 스트레스, 연애 상담, 학교 폭력 등의 학교생활이 주가 아니다. 그보다 <유원>은 주인공 열여덟 유원의 심리를 따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과 마주하며 소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소녀는 자라난다. 소녀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 원작은 유려한 각색을 따라 편안하게 무대로 안착한다.

연극을 관람하며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주황빛 노을로 다가왔다. 작품은 특히 저 너머 주황색 조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소녀와 그녀의 친구가 옥상에서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소녀들 혹은 주인공 유원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저 아래, 사람들의 느릿하며 평온한 몸짓일까? 그러나 유원에게 그 색은 그렇게 간단한 색이 아닐 수도 있다. 유원에게 선명한 주황색은 붉은색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유원 언니를 죽게 하고 유원을 살린, 다시 태어나게 만든 불길한 화재 불꽃과 닮은 색 말이다. 실제로 작품은 유원이 화재를 떠올릴 때마다 극장 뒷벽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 역시 반복해서 보여준다. 유원은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불우한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불안하게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 삶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앤드씨어터

<유원>은 자신이 의도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소녀 이야기다. 창작진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재난을 상기시키며,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라 말한다(공연 소개 참조). 조용히 숨죽인 채 혹은 외면하거나 상처를 인정하며 함께 나아가는 갖가지 모습의 삶들. 경험은 도려내거나 떼어낼 수 없다. 다만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뿐. 따라서 연극은 유원과 유원 주변 그들 모두 삶 혹은 선택에 대해 섣부른 판단 대신에 잠자코 자리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것 같다. 주인공 유원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입체적으로 살아 있는 점이 이 작품 미덕이다. 소설 원작도 다양한 군소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도 유리한 장점으로 드러난다. 서로 간의 호흡이 잘 맞는 배우들이 무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앤드씨어터

작품이 공연된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은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꽤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배우들은 핀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작품이 동선이나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소극장 공간 운영을 떠올리게 할 때마다 초반에 다소 두드러져 보였다. 작은 공간에서 핀 마이크를 쓰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다양한 층의 높이를 활용하거나, 비교적 넓게 공간을 사용하거나 장면이 겹쳐지며 연출되는 식으로 시간이 흐르며 핀 마이크는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앞서 언급한 옥상 장면처럼 연극은 시야를 확장하며 공간을 넓게 쓰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작은 방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갑자기 확장되는 공간 미장센은 몇 개의 계단과 기다란 커튼 외 별다른 세트가 없었음에도 안정감 있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지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작진은 대극장 공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작품을 관람하며 청소년 이야기 극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점이 읽혔다.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그 시기를 관통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원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과거의 자아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특히 삶의 어느 면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인공 유원의 눈을 따라 만나게 되는 모습은 무엇일까.

ⓒ앤드씨어터

주인공 유원이 인간이란 각양각색 미로를 만나 헤매면서 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연극 <유원>은 점점 파고들수록 의미가 달라지며 색깔이 달라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한발씩 길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원은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과 부딪침 속에서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은인이지만 증오했던 아저씨와의 만남도 아저씨의 아이들을 통해 유원에게 구원으로 가는 길로 뒤바뀌며, 스스로를 희생하며 동생을 살린 언니의 그림자에 힘겨워하던 마음도 생명과 삶에 대한 기쁨으로 변화한다. 연극의 마지막 <유원> 무대를 감싸는 주황빛 석양이 처음과 다르게 여지없이 따뜻하게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연극은 절망과 파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 수수께끼 같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여전히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안녕이라고 묻는 듯하다.

엄현희(嚴鉉熙, Um Hyun Hee)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과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 함도윤의 〈Never Give Up〉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히는 젊은 춤함도윤의 <Never Give Up>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젊은이는 내일을 밝히는 존재다. 인천 무용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신진 안무가가 등장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대정신을 함양한 개성 있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발레 창작에 지평을 넓히고 있는 데다가 관객의 호응과 감흥을 이끌 대중적인 감각까지 함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지켜봐야 할 젊은 발레 안무가로서 함도윤을 조명해 본다.

최근 심상치 않은 인천 무용계의 젊은 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접근성이나 영향력 등에 있어서 무용 문화가 활발하게 조성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오래도록 그렇지 못했다. 국내 무용계의 질적, 양적 주도를 지닌 서울과 인접한 지역으로 이에 관련된 혜택보다는 피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의 주요한 공연들을 1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도달하여 감상할 수 있는 관계로 굳이 인천에서 유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얕은 인적 자산, 열악한 제작 환경, 시민의 관심 부족 등이 더해져 인천 무용계의 활로를 막았다. 대학 무용과나 예고 무용과가 거의 없는 현실 또한 신진 발굴 및 양성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의 독립 무용가들은 외로이 분투하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곤 하며 차세대 무용가들은 인천에서 기반을 잡기보다는 서울로 진학 및 진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인천 무용계는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조짐을 보인다. 젊은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인천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맑으나 궂으나 묵묵하게 인천 무용계를 지원해온 인천문화재단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인천문화재단의 무용 관련 지원사업에는 서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실력자들이 상당수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력을 보이고 가운데, 함도윤 같은 전도유망한 젊은 창작자가 기대 이상의 성과로 주목을 받았다.

개성 있는 젊은 발레 안무가, 함도윤

발레 안무가 함도윤 ⓒGRACE

1988년생으로 서른세 살인 함도윤은 안무가로서는 아직 신진이다. 무용수들의 경우는 20대 초중반부터 데뷔하여 빠르게 주목받는 데 비해 안무가들은 안무와 연출뿐 아니라 기획, 행정, 홍보마케팅 등 다방면에서 역량과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다음에 데뷔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서 자란 함도윤은 어려서 발레를 배웠던 여동생의 영향으로 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 현대무용을 보고 ‘저런 춤도 있구나, 저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예술적 충동이 들었으며 그 계기로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 당시에는 현대무용을 배우고 싶었으나 근처의 무용학원에서는 발레를 가르쳐서 우선 발레로 인천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막상 예고를 다니면서 발레를 제대로 배우다 보니 그 고유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인 발레리노(남자발레무용수)는 아닌 새로운 창작에 대한 열정을 내면에 품은 미래의 안무가로서다.
2007년 한성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재홍 교수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폭넓은 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개인 조교를 하면서 발레 훈련과 창작뿐 아니라 예술가의 자질, 작품 제작 과정, 회의를 이끄는 방식, 문서 작성 및 정리, 강의 노하우 등을 습득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학교 발표회를 통해 이것저것 작품을 만들다가 스물여섯 살에 《K-Ballet 월드》에서 <사라지는 것들>로 안무가로 정식 데뷔하였다. 《K-Ballet 월드》는 우리나라 최대 발레협회인 한국발레협회에서 주관하는 축제로서 국내 3대 발레 축제의 하나다. 신진 안무가로서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무용 작품을 만든다는 게 안무가에게는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재정 면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6년부터 3~4년간 돈을 벌기 위해 주로 뮤지컬에 출연하였다. 100회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춤을 추는 때도 있었는데 커튼콜에서 박수 세례를 받으면서도 어느 날 문뜩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일 매진에 커튼콜과 박수 세례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발레로 대중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발레계로 돌아온 함도윤은 2019년 <붉은 대지>, 2020년 <청년실신>과 <피터팬>, 그리고 올해 <Never Give Up>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개성 있는 신진 안무가로 빠르게 주목받고 있다.

<청년실신>, 성수아트홀 ⓒ어글리아트컴퍼니(허웅)

굴복하지 않은 젊음, <Never Give Up>
7월 16~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 오른 <Never Give Up>은 인천문화재단의 예술표현활동 지원을 받아 전작 <청년실신>을 70분짜리로 재창작한 것이다. “높은 거보다 돈이 더 무서운 거죠.”라는 고층 빌딩 청소부의 말에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청년실신 시대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영혼들의 치열한 삶을 발레로 표현하였다. 이 시대 청년을 대변하는 용어가 청년실업, 위험수당, 야근수당, 학자금대출, 생활고, 카드대출, 비트코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대단히 현실적이면서도 시기적절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Never Give Up>에서는 이 시대 청년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홉 명의 남자무용수들은 실업, 경쟁, 스펙, 빚, 파산, 사고, 자살 등 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이라는 미로에서 헤매는 것 같다. 벼랑 끝에 놓은 듯한 엣지 있는 춤으로써 이러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다. 직설적인 춤적 표현이 만연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특히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등 국내 최정상급 무용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무용수들이 여럿 있는바 주제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감각적인 춤적 실현이 인상적이다.
발레지만 그 정형성에 한정되지 않은 동작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현대무용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발레를 기본으로 하여 현대무용, 비보잉, 아크로바틱 그리고 연기적 제스처까지 폭넓게 넘나들면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움직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안무와 실연뿐 아니라 음악, 조명, 장치와 소품 등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폭넓은 짜임새가 두드러진다.
젊은이들이 느끼는 처절한 삶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해 뜰 날을 기원하는 모두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마무리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 안에서 함도윤의 굴복하지 않은 젊은 열정과 패기마저 느낄 수 있다.

<Never Give Up>,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GRACE

함도윤의 안무 특징 살펴보기
함도윤이 본격적으로 안무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스타일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발레계의 다른 신진들에 비해 자기 색깔이 뚜렷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안무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시대정신을 진지하게 반영한 주제 의식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국내 발레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이 시대의 사회상을 예리하고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함도윤 스타일로 각인되고 있다.
또한, 남성 춤에 있어서 강점을 지닌다. 직설적이고 역동적인 춤은 강한 에너지마저 담고 있는데, 이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공유한 잘 훈련된 남자무용수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뮤지컬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 의식도 엿보인다. 발레에 메인 정형적인 표현방식에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하고 감각적인 창작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함도윤 같이 춤 예술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중력을 갖춘 젊은 무용가들의 등장은 인천 무용계의 미래를 밝게 비춘다. 실제로 인천 무용계가 오랜 침체를 딛고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젊은 무용가들의 활약에서 기인하다. 그리고 인천문화재단의 꾸준한 지원이 인천 무용계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한 바탕임은 자명하다.

심정민

무용평론가이자 비평사학자. 한국춤평론가회 회장과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현재 <춤>과 <댄스포럼>에 고정지면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국립극장 등에서 심의·평가·자문 등을 맡아왔다. 저서로는 『무용비평과 감상』(2020)과 『새로 읽는 뉴욕에서 무용가로 살아남기』(2016)외 다수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고 싶어지는 만화『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최기현(인천문화재단)

달리기는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달렸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족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는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많은 사람이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잘 안다. 체중 감량 외에도 심폐기능과 혈관 건강을 향상시키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 장점이 있다. 달리기가 주는 유익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달리지 않는 사람이 많고, 많은 사람이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산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는 제목 그대로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살아가며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 그리고 주인공 ‘서바람’처럼 인생에서 달리기 한 가지만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는 주말 아침이 한 주간의 밀린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라면, 그녀에게 주말 아침은 달리기 위한 시간이다. 서바람의 20년 지기 친구 한태수는 사내 연애를 하다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한태수는 실연을 잊기 위해 헤어진 다음 날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다.

돌배,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위즈덤하우스, 2018)

장거리 달리기에 도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체육시간 이후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과체중의 남자 한태수는 1㎞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달리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못하겠다.”는 한태수의 고백은 일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는 우리의 푸념과 이상하리만큼 닮았다.

제목에 있는 ‘헤어지다’는 동사는 누군가에게 글자 그대로 실연을 의미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뜻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좋지 않은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그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만, 대처는 모두 다르다. 학생이라면 공부가 잘되지 않고, 공부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담당하던 업무가 잘 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고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활동이 왠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하거나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슬럼프’라고 부른다.

“소질이 있어야 달려? 소질이 없으면 달리면 안 되는 거야?”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한태수의 푸념에 서바람의 답변은 독자에게 신선함을 준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 슬럼프를 겪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달리기를 하는데 꼭 소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소질이 없다고 달리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버티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헤어진 다음 날, 달리는 행위는 글자 그대로 달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그 사건 때문에 자신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견디면서 일상을 꾸준히 살아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중 한 장면

슬럼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슬럼프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을 인내할 때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찾아온다고 한다. 슬럼프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상의 러너스 하이는 분명히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벌써 11월이다. 2021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돌아보니 체중이 조금 늘었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몸도 마음도 조금은 게을러졌다. 신기하게도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를 달리고 싶게 만드는 만화다. 등장인물들처럼 달리기의 매력을 흠뻑 느끼고 싶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공원을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억제하면서 만화를 끝까지 읽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동네 공원 한 바퀴라도 뛰어야겠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