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 문화로 꽃처럼 웃는다. 제 2회 인천생활문화축제의 성장과정

제 2회 인천생활문화축제의 성장과정

지난 9월 15일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100개의 동아리가 참여하는 2회 인천생활문화축제<생·동·감>이 이루어졌다.
인천생활문화축제는 사이:多를 첫 회로 작년에 시작되었지만, 그 첫 시작은 13년 전으로 돌아간다.

2005년, 인천에서 10년간 활동하던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는 인천의 문화를 바꾸겠다는 꿈으로 많은 시민을 만나고, 소통하고, 그 힘으로 문화예술 환경을 만들어내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문화수용자 운동을 시작하였다. 시민이 주인인 문화를 만들어 문화의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문화바람’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1,000명의 문화바람을 만나기 위해 활동가(문화기획자)들이 몇 달을 뛰어다니며 문화바람을 만들어 갔다. 문화바람이 첫 번째 한 일은 공연유치였다. 그 당시, 재미있는 공연 한 편을 보려면 인천의 공연장을 찾기보다 대학로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예술인들도 대학로에 가서 활동해야 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거기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로의 유명한 공연들이 전국 순회를 하면 인천은 빼놓을(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수밖에 없어 좋은 공연을 찾기는 쉽지는 않았다. 문화바람은 회원들이 매달 내는 회비로 공연을 유치할 수밖에 없었다. ‘백창우와 굴렁쇠아이들’, 마당극 ‘밥상을 엎어라’, ‘오!당신이잠든사이’, ‘강풀의 순정만화’ 등 연 5회 문화바람과 함께 하는 공연을 유치 또는 제작하여 무대위에 올렸고 이후 많은 시민이 참여하였다.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회원을 보는 것이었다. 문화바람 회원도 많이 늘어났지만, 온라인 활동이 자리 잡으면서 각 동아리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었던 ‘더 많은 시민’과 만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진동아리는 <동사진 전시회>를 매년 열었고, 통기타 동아리는 매월 작은 발표회를 열었다. 작은 발표회를 통해 조금씩 실력을 쌓아가던 동아리는 여름에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무대’에서 독자적인 공연을 열기도 하며 작곡동아리는 매년 창작발표회를 열었다. 활발한 동아리 활동은 자신의 모임을 넘어서 다른 동아리, 공동체, 사회로 시선을 넓혀가기도 했다. 1년에 3~4차례 교류의 자리가 열렸는데 여름에는 1박 2일로 ‘회원 MT’를 진행하였고, 가을에는 ‘체육대회’, 겨울에는 ‘송년회’를 가졌다. 또한, ‘신입회원의 날’, ‘공동체 모임’ 등을 통해 서로의 활동을 격려하고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갔다.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만난 회원들은 자신을 넘어 타인을 알게 되고, 그 타인과 함께 하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튼튼한 관계는 이후 폭발적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2006년 6월 17일, 확대된 문화바람 회원들과 함께 ‘회원의 날’ 행사를 진행하였다. 야외에서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는 취지로 만든 그 행사명은 <삐까번쩍야외축제>였는데, 그 이후2016년 인천시민문화예술축제<끼가뻔쩍시민축제>로 발전되어 11년 동안 축제가 이어졌다. 축제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회원들은 우리가 만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축제가 생긴 것을 기뻐했다. 게다가 타 동아리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형성되었다. 이는 이후 아마추어(생활문화)동아리 축제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사진] <끼가뻔쩍시민축제>에 여성통기타 동아리 ‘토마토’가 공연하고 있다.
처음 축제 이름은<삐까뻔쩍야외축제>였다. 3회 축제를 준비할 때였던 것 같다. 행사 몇 주 전부터 장소 근처에 현수막을 걸어 놓았는데, 그 현수막을 본 어떤 어르신이 사무실로 전화를 하셨다. “삐까뻔쩍이 뭡니까? ‘삐까’란 말은 ‘번쩍’이라는 일본어예요” 그래서 4회부터는 명칭을 변경했고, “끼가 뻔쩍이는 시민들의 축제”라는 의미를 담아 <끼가뻔쩍시민축제>로 정하게 되었다.

덕분에 동아리 활동은 점차 활발해지고, 합창단, 밴드 등 다양한 동아리가 생겨났다. 동아리 수가 늘어날수록 모임 공간에 대한 고민이 늘어났다. 동아리 간에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다. 일터에서 업무와 집안일을 모두 끝내고 나서 어른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곳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신나는 문화공간 <놀이터>를 만들게 되었고, 동아리들 간에 교류와 협력할 수 있는 생화문화예술동아리연합 <놀이터>가 탄생하였다. 그해는 2009년이었다.

[사진] 동아리 회장단 회의 모습이다. 놀이터는 매월 1회 동아리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여 사업과 운영에 대한 자발적인 결정을 하였다. 지금은 ‘놀이터’의 공간이 없어졌지만, 운영위원회를 꾸준히 개최하여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모단체인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에서 독립한 생활문화예술동아리연합 <놀이터>는 한 해의 주 사업으로 <끼가번쩍시민축제>를 펼쳤다. 일정기간에 참가동아리 신청을 받고, 장소를 디자인하고, 장소별로 각 동아리가 배치되어 공연, 전시, 체험으로 시민들을 맞이했다. 또, 동아리 회원들이 직접 스텝이 되어 무대설치부터 철거까지 함께 하였다. 동아리 회원들의 자원봉사모임 명을 “기동단”이라고 지었고 활약을 했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끼가번쩍시민축제>에 참여한 동아리 수는 약 1000여 개의 동아리이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축제, 서로가 격려하는 축제, 내가 즐거운 축제로 자리매김하며 자라왔다.

[사진] 오전 9시에 만나 무대 장치를 나르고 설치하는 모습이다. 동아리 회원들이 자원하여 축제 스텝이 되고 무대 설치부터 철거까지 함께 하였다.

<인천생활문화축제>는 이러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민간단체에서 주관했던 <끼가번쩍시민축제>의 목적과 의미를 기반으로 인천생활문화축제는 태어났다. 축제의 주인이 동아리 회원들이 축제의 일원이 되어 공연무대를 채우고, 전시하고, 체험을 준비하여, 동아리를 알리고, 시민에게 생활예술을 알리는 축제가 되는 것이다. 인천생활문화축제 과정은 이렇다. 워크숍을 통해 생활예술의 의미와 축제에 대한 시선을 함께 맞추고, 축제의 이름을 투표하여 정한다. 축제를 선포하고, 라인업을 함께 구성하고 출연료도 함께 논의하여 기준을 정한다. 각자 연습과 작품준비를 하고 필요한 기자재들을 준비하면 축제가 이루어진다. 물론, 100% 동아리 회원들이 준비할 수는 없지만, 그냥 공연만 하고 가는 축제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축하해 주는 축제로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인천생활문화축제는 다른 축제와 달리 준비하는 과정이 오래 걸린다. 동아리들과의 의사소통 구조가 기본이기 때문에 전체 동아리가 모이는 워크숍도 몇 차례 진행해야 하고, 실무자들도 많은 회의를 진행해야 비로소 축제가 이루어진다.

제2회 인천생활문화축제의 목표는 더 많은 동아리가 참여하고,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며 우리(동아리)도 즐거운 축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결과 84개 공연 동아리, 15개 체험 동아리, 11개 전시동아리 등 총 100개 동아리가 참여하였으며, 60명의 스텝이 배치되어 진행되었다. 6곳의 공연장소, 5곳의 전시장소, 1곳의 체험 장소를 비롯해 푸드 트럭, 이벤트 부스 등이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었다. 그리고 장소마다 컨셉을 달리하여, 칠통마당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중앙광장은 넓은 잔디 위에서 관객과 공연자가 편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꾸몄다. H 동은 밴드팀만의 공간으로 꾸며져 간단한 음료와 함께 개성 있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사진]칠통마당에서 공연하고 있는 첼로동아리‘바첼리’. 이번 축제에는 총 100개 동아리가 참여했으며, 그 중 84개는 공연팀이었다.

[사진]인천아트플랫폼 중앙광장 공연장. 공연장마다 컨셉을 달리하여 진행되었다. 중앙광장에서는 17개팀과 통기타 콜라보공연, 합창콜라보공연이 이루어졌다.

한중문화관 야외는 공연장소 중 가장 많은 동아리가 공연하였다. 축제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축제의 과정을 담은 영상과 더불어 20개 동아리가 모여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펼쳤다. 또, 지나가는 이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버스킹 무대를 마련하였다. 전시도 카페 서니구락부, 하버파크호텔 등 시민들의 접근성이 높은 곳으로 전시장소를 섭외하였으며 일주일간 전시가 이루어진다.

[사진]H동 밴드 동아리 공연장. 작년보다 밴드동아리 참여율이 높아 밴드팀이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특화하였다.

[사진]축제의 마지막은 20개 동아리가 창작곡으로 콜라보레이션 공연한 것이었다. 축제 전 연습모임을 갖고, 즐겁게 서로 배려하고 준비하여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어쨌든 9월 15일 축제는 끝났다. (물론, 전시동아리의 전시는 21일까지 진행된다) 동아리들이 축제에 임하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했다. 축제당일 우천예보가 있었고 비도 내렸다. 운영진이 야외공연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동아리 팀원들은 괜찮다며 운영진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테이블을 나를 때도 사람이 없어 고심했지만 도와주겠다며 함께 날라주었다. 오랫동안 축제에 참여해서 힘들 텐데 웃으며 공연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다리 아픔도 싹 없어졌다.

축제 당일 철거까지 완료 후 만보계를 보니 총 2만8천 보를 넘게 걸었더라. 아마, 실무자들이 다 그러했을 것이고, 참여했던 동아리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 걸음만큼 축제는 보람된 일이다.

김경원(金京垣, kim kyeong won)

. 문화바람 대표
2회 인천생활문화축제 총연출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에 의연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스위쏨>인터뷰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당한 상황에 처해있어도 몇 번이고 말을 삼켜야만 했다. 마치 김근희 작가의 <조중균의 세계>에서 한 대목은 이를 반영한 듯했다.

혜란씨에 따르면 조중균씨는 매일 똑같은 시를 쓴다고 했다. ‘지나간 세계’라는 제목이었고 “어머니, 깃대를 들고 거리를 걷는다”로 시작해 “우리가 버린 꽃은 말이 없네”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조중균의 세계> 인용

이처럼 침묵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통쾌하게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만났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안락한 집을 탈출한 <스위쏨>이다.

 

스위쏨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진아 : 스위쏨은 5명의 청년이 가던 길을 버리고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모인 팀이에요. 그중 3명은 현재와 같이 생활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사범대를 다니다가 영화에 관심을 둔 계기가 있으셨나요?
진아 : 처음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했었죠. 근데,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고 말하거나 혹은 다 같이 세상을 바꿔보자고 얘기하면 거부감을 가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제가 사범대를 나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러던 친구들도 영화나 문화예술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접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나와 멀지 않다고 느끼거나 혹은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러한 부분이 재밌게 느껴져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졌고, 복수전공으로 영화를 선택했죠.

자신의 목소리를 영상으로 제작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아 : 네, 직접 말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영상으로 제작할 때 제 목소리가 더욱 잘 전달되어 사람들이 더 공감하고 와 닿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부각하기보다 자신과 엄마의 내적인 이야기를 첫 작업에서 선보이셨어요.
진아 : 제가 임용고시를 준비하지 않고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엄마였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 작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 프로젝트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 교환일기, ©스위쏨
2016년 인천문화재단 ‘바로그지원’에서 선정된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 프로젝트는
집 나온 스물넷 딸들이 엄마와 주고받은 일기 내용을 담고 있다.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를 통해 엄마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변화도 있었을 것 같아요.
진아 :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를 하기 전에는 저에 대한 엄마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미안한 감정이 막연하게 있었죠. 근데 이 작업을 통해서 엄마의 생각을 좀 더 알 수 있었고 마음의 부담을 덜어 놓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민경 : 저도 진아와 같이 사범대를 졸업했는데, 저희 엄마도 제가 임용고시를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이야기하셨어요.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당시에는 엄마가 원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나를 거기에 맞추어 살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근데 작업을 하면서 엄마도 내 미래와 진로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엄마의 두려움을 떨칠 수 있도록 내 길을 열심히 걸어야겠다고 느낀 것 같아요.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에서 엄마와 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는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진아 : 엄마가 일기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숨기려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엄마는 스물네 살 때 공장에서 일하셨는데, 그것이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였던 것 같아요. 엄마한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쉽게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으셨죠. 그때 <바로그지원>프로그램에서 선배 예술가들이 멘토로 계셨는데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그분들 중 김재민 작가께서 엄마랑 둘이서 의미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라고 제안하셨죠. 그래서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지로 둘이 여행을 다녀왔죠. 그때 엄마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던 것 같아요.

현재 <미스사이비-인천 청년 보이콧 스터디> 프로젝트를 제작하고 계시는데, 시작하게 된 모티브가 있나요
진아 : 작년에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를 영화로 찍었는데 편집을 오랫동안 못하고 있었어요. 처음으로 지원금을 받아서 찍은 영화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영화를 마무리해서 남들에게 평가를 받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왜 나는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연 연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생각을 좇다가 스스로 결론을 내렸는데, 어렸을 적부터 평가나 경쟁에 익숙해진 탓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만 행복할 수 있다고 배워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왜 이렇게 배웠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그 틀을 벗어나 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죠.

보이콧 스터디 1화-자기소개, ©스위쏨
영상 (자세히보기 ▶)
<미스 사이비-인천 청년 보이콧 스터디>는 단편 극영화<미스 사이비>의 제작을 위해 진행하는 프리프로덕션 과정의 일부로
SNS를 통해 청년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상 프로젝트이다.
<인천 청년 보이콧 보이콧 스터디>는 대학 입시, 졸업, 취직 등 사회가 말한 평범한 길을 가지 않고
독립영화에 뛰어든 다섯 명의 청년들이 겪는 고민과 갈등을 그룹스터디 형식으로 보여주었다.

보이콧 스터디 2화-수능, ©스위쏨 제공
영상 (자세히 보기▶)

<보이콧 스터디> 프로젝트의 주요키워드를 공시, 청년, 인천으로 꼽으셨어요. 인천 청년들의 고민이 단지 인천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청년들의 고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정 지역으로 한정시킨 이유가 있는가요.
진아 : 물론, 지금 말씀드린 것들이 인천뿐만 아니라 모든 청년이 가진 문제의식일 것이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청년들이 가지는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스위쏨 친구들은 인천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성장한 지 20년이 넘었어요. 그래서 저희만이 혹은 인천 청년들만이 가진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 지점이 바로 서울에 대한 열등감과 인천에 살아온 자기 부정인 것 같았어요. 인천에 오랫동안 살면서 ‘인천을 떠나야 해, 인천을 벗어나야 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했는데, 20년 동안 인천에서 만들어온 정체성을 왜 우리 스스로가 부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었죠.

9월 13일 인천문화통신3.0은 <스위쏨> 김진아, 김민경, 한세하(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지연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인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나요?
진아 : 20대 초반까지는 항상 벗어나고 싶었어요. 주변에서 항상 인천을 떠나야 한다고 들었고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든지 아니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했죠. 이런 얘기를 계속 듣다가 21살에 처음으로 인천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선배들이 앞에서 끌어 주며 내가 살아온 인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이 즐거웠어요. 그때 처음으로 인천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인천에서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진아 : 인천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기보다 제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인천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일단 제가 계속 살아온 곳이기도 하고 재미난 일들을 함께 벌일 사람들이 여기 다 있거든요. 조금만 손만 뻗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이 있으니까요. 특히, 제가 지금 인천 독립영화협회에서 활동하고 있거든요. 인천 독립영화인들인 모여서 만든 협회인데, 서로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보기도 하죠. 그래서 굳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 같아요.

이번 청년레지던시 지원사업에 선정되셨을 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진아 : 작년 말에 동료들이랑 함께 영화를 찍었는데, 때마침 청년문화예술 레지던시 사업이 생기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 지원 사업에서는 몇십 년의 경력을 갖춘 선배님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지원 사업을 받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의 기획에 프로젝트 보조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었죠. 물론 선배님들로부터 배우는 부분도 많았지만 정작 제가 하고 싶은 기획을 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어요.

단편영화 <스물넷 엄마를 만나다> 촬영현장 ©스위쏨

보이콧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먼저 있어야 할 텐데요. <보이콧 스터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진아 : <보이콧 스터디>조회 수가 저조해서 다른 영상을 제작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올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영상 피드백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최근에 시험 준비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왔어요. 뭔가 공감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계기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음먹은 대로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보이콧 스터디> 6,7화에서는 ‘선배 미스사이비를 찾아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요. 미스사이비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건가요? 어떤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진아 : <미스사이비>는 저희가 12월에 찍으려는 단편영화에요. 미스사이비는 독서실 총무로 일하고 있는 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공부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하죠. 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쓰인 문학작품에 비슷한 인물이 없는지 살펴보았어요. 그 중 ‘필경사 바틀비’와 ‘조중균의 세계’를 찾았는데 두 캐릭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노동이나 그 가치에 대해서 자기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에요. 특히 둘 다 무엇을 보이콧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미스사이비>가 자칫 실업 포기를 유도하는 영화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관람객이 영화 <미스사이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진아 :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는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이 친구들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나도 이런 경험이 있었는데’라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내가 왜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당장 내 눈앞에 시험이 있고 생계가 걸렸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미스사이비> 프로젝트에서는 경쟁, 차별, 평가에 대해서 과격하게 다루고 있지만, 넓어진 스펙트럼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의연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요. 시험에 응시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요.

<보이콧 스터디> ‘자기소개서’ 편에서 불평불만이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어떠신지 궁금해요.
진아 : 네 맞아요. 제가 짜증도 많고 화도 많이 내기도 해요. 근데 눈앞의 사회 문제를 무난하게 넘겼다면 모든 프로젝트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물론 제 성격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지만, 작업할 때는 제 성격이 좋게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민경 : 나쁘게 표현하면 불평불만인데, 좋게 생각하면 문제의식을 느끼고 현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제가 모르고 스쳐 지나간 점에 대해서 진아가 문제 제기하면 그 부분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고 해결하려고 이야기를 나누죠. 이러한 과정들이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같아요. 사실 진아뿐만 아니라 저희도 불평불만이 많아서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신가요?
저희의 일상을 담은 영화를 제작할 거에요.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계속 발견하려고 해요. 현재는 저희가 청년레지던시 사업이 끝난 3개월 뒤에 어디서 작업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거든요. 이러한 고민이 향후 작업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스위쏨 모두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페미니즘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보이콧 스터디에서도 수능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결국에 페미니즘으로 끝이 나더라고요. 언젠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해보고 싶어요.

단편영화 <364일> 촬영현장 ©스위쏨
<스위쏨>의 한세하 감독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편의점 알바를 하며 겪은 일을 영화로 제작함

단편영화 <364일> 스틸컷 ©스위쏨

 

인터뷰 정리/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스위쏨 제공
김지연




2018 제2회 인천생활문화축제<생.동.감>

일시 : 공연 2018.9.15.(토)요일,
전시 : 2018.9.15(토)~21(일)요일
장소 : 인천차이나타운 옆 인천아트플랫폼
주최 : 인천광역시
주관 : 인천생활문화축제추진위원회, 인천광역시문화원연합회,
생활문화예술동아리연합 놀이터, 강화문화원,
부평문화원, 연수문화원, 서구문화원, 중구문화원,
미추홀학산문화원, 남동문화원, 계양문화원,
화도진문화원, 옹진문화원

사진 시민기자단 민경찬 




환상의 낭만夜시장…2018 트라이보울 문화예술마당 나이트마켓

8일 트라이보울 야외광장서 개최
플리마켓·작은 갤러리·문화공연 등의 다채로운 즐길 거리
환상의 일루미네이션 조명쇼 펼쳐져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가을밤 송도 트라이보울에서 야시장 한 판이 벌어졌다. 지난 8일 오후 6시 트라이보울 야외광장에서 ‘2018 트라이보울 문화예술마당 나이트마켓’이 개최된 것이다. 이번 나이트마켓은 시리즈 문화프로그램 ‘문화예술마당’ 중 한 차례로써 진행된 것으로 지난 8월 18일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오는 트라이보울의 문화예술마당은 예술가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문화·예술의 장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나 손쉽게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기획됐다.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올해의 문화예술마당에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만남의 장을 제공할 목적으로 플리마켓을 새롭게 추가하며 시민참여의 폭을 더욱 넓혔다.
이번 나이트마켓에서도 안 쓰는 중고물품들을 판매하는 플리마켓과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 드로잉, 인테리어 소품 등을 만나볼 수 있는 아트마켓이 한자리에 열렸다. 플리마켓이나 아트마켓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상품들은 시민들에게 색다른 쇼핑의 재미를 선사하며 많은 호응을 얻었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는 ‘작은 갤러리’와 직접 페인팅한 셔츠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행사 등도 함께 운영됐다. 이날 나이트마켓은 다채로운 문화·예술적 요소를 갖추며 많은 시민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출처 : 취재기자 정해랑

문화공연도 빠지지 않았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된 나이트마켓은 해가 저물자 본격적인 신진 예술가들의 문화공연이 막을 올렸다. 수녀들이 연기하는 생기발랄한 발레 무용극을 선보인 발레단 ‘발레노바’의 공연과 로맨틱하고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한 밴드 ‘E.S.Q’의 색소폰 공연이 연이어 펼쳐지며 트라이볼 일대를 가을밤의 낭만으로 물들였다.

출처 : 트라이보울 제공

출처 : 트라이보울 제공

오후 9시 일루미네이션 조명쇼가 시작되며 이날 나이트마켓의 분위기는 정점에 다다랐다. 단 20분 동안 펼쳐진 조명쇼는 이날 마켓의 하이라이트로써 최대 볼거리로 꼽혔다. 트라이보울 건물 외벽에 시시각각 변하며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쇼에 보는 이들의 감탄과 환호를 절로 자아냈다.
조명쇼는 실력파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김바다의 음악에 맞춰 펼쳐졌다. 다양한 장르로 선곡된 그의 음악은 카멜레온같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조명쇼와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정해랑 프리랜서 기자
blog.naver.com/marinboy58
marinboy58@naver.com




인천 X 인디 = 인천 인디음악 페스티벌 in 주안미디어문화축제!

인천 2호선 시민공원역에 위치한 옛 시민회관 쉼터에서는 미추홀구에서 주관한 <주안미디어문화축제 2018>이 2018년 9월 8일부터 9월 15일 토요일까지 약 일주일에 걸쳐 열렸다. 인천 미추홀구(남구)에는 문화창작지대 틈, 영화공간주안 등 미디어와 문화에 관련한 공간이 자리한다. ‘미디어’라는 주제가 막연하기도 하고 시민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8 주안미디어문화축제는 이러한 부분을 해소하고, 시민들에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인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와 ‘VR’을 축제의 핵심을 두어 개최되었다. 축제 기간 중 14일 금요일과 15일 토요일은 몬스터 레코드에서 기획한 ‘인천 인디음악 페스티벌 날것2’가 열렸다. 기획한 컨셉 제목 그대로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력파 인디 뮤지션들을 서울에 가지 않아도 인천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가장 가까운 인디 음악 페스티벌
인천은 문화예술에 대해 굉장히 관심도 많으며 이와 관련된 행사나 공연들도 활성화되어 있다. 인천에서 빈약한 문화예술 장르를 꼽으라면, 인디음악과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디음악’이라고 말하면 흔히 ‘홍대’, ‘신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인천에서 선보이는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시민들이 굳이 먼 걸음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내 집 앞에서 신나는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뮤지션에게도 인천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작을 마련해준 셈이다. 많은 사람의 기다림을 하늘도 알았던 걸까. 공연 시작 전만 해도 흐릿했던 날씨는 점점 개기 시작했고, 비도 그쳤다. 덕분에 선선한 바람과 함께 야외 공연을 즐겁게 만끽할 수 있었다.

인천 인디음악 페스티벌 ‘날것2’
몬스터 레코드에서 기획한 인디음악 페스티벌 ‘날것’은 2017년에도 개최되었다. 이번 ‘날 것2’의 라인업은 ‘오왠’, ‘죠지’ 등 유명 아티스트들을 포함해서 인디 뮤지션 총 8팀이 함께했다. 필자가 관람했던 토요일에 선보인 5팀은 힙합, RnB, 록 등의 다양한 장르가 섞여있었다.

그레이하운드

첫 번째 팀인 ‘그레이하운드’는 몽환적인 사운드의 RnB 음악을 하는 듀오였다. 많은 사람이 아는 비욘세의 ‘Crazy in Love’와 같은 유명한 곡들을 완벽하게 자신들만의 느낌으로 커버하거나, 게임 BGM을 어레인지 하는 등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면서도 본인들의 뚜렷한 무대를 선보였다.

 
래퍼 ‘탐탐’   브릭
 
락밴드 ‘카딘’   죠지

유연한 멘트와 멋진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던 래퍼 ‘탐탐’은 대부분 중 장년층으로 이루어졌던 관객에게 힙합에 대한 경계를 허물도록 모두가 즐기는 공연을 만들어 주었다. 세 번째 팀 ‘브릭’의 감미롭고 세련된 RnB 음악이 사람들의 귀를 열게 하였고 무대를 집중시켰다. 토요일 라인업 중 유일한 락밴드였던 ‘카딘’은 밴드 사운드 특유의 풍성한 사운드와 화려한 기타 솔로 및 드럼으로 페스티벌 특유의 들뜬 분위기를 만들었다. 마지막 라인업인 ‘죠지’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떼창’(관객들 다수가 함께 입을 모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터져 나올 정도로 멋진 라이브와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무대 공연 뒤편에 설치된 큰 전광판에서는 아티스트의 음악과 어울리는 영상이 보였다. 미디어 축제답게 아티스트들의 무대 분위기가 더욱 고조될 수 있도록 신경 쓴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3시간이라는 긴 공연 시간을 관객들이 지치거나 지루해하지 않도록, 공연 중간에 약 10분 정도 이미테이션을 갖게 되었다. 쉬는 동안 레크레이션이 진행되었는데, 푸드트럭에서 맛있는 음식을 식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알찬 공연 내용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에서 퀄리티 높은 페스티벌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축제 내내 질서와 청결을 위해 발 벗고 뛰던 스태프들도 인상 깊었다. 

인디 음악 하면 문화 예술적 가치가 낮은 무대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모든 아티스트를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모르거나 접해본 적 없는 아티스트라고 해서 색안경을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가장 멋진 조미료다.

‘날것 2’축제가 진행되었던 이틀 동안 옛 시민회관 쉼터를 찾아준 사람들의 시간은 멋진 인디 아티스트들의 멋진 무대로 빛나지 않았을까? 나의 시간이 그러했듯 말이다. 이번 축제가 많은 사람에게 인디 음악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남게 하고, 멋진 곡과 아티스트들을 알게 된 기회였을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잠시 쉴 틈을 만들어주는 축제였다. 부디 내년에도 훗날 내후년에도 인천 곳곳에서 이런 멋진 무대가 열리길 기대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하나 되어 훈훈한 미소를 띠고 손을 위아래로 흔들던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글·사진/ 이은솔(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단)




[큐레이션 콕콕] 가가례

가가례(家家禮)는 집마다 예가 다름, 혹은 집마다 저마다의 절차와 규범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차림 예법을 상기해볼까요. 제사상은 북쪽에 놓아야 하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남쪽, 제사음식은 5열 차림으로 한다든가(1열에는 밥과 국, 2열에는 구이, 3열에는 두부나 고기, 4열에는 나물, 김치, 포, 마지막 5열에는 과일 등),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동조서율(대추는 동쪽 밤은 서쪽), 조율이시(서쪽부터 차례대로 대추-밤-배-감 순),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 등도 있습니다. 삼치, 갈치, 꽁치 등 ‘치’자가 들어간 생선은 상에 놓지 않는다든가 복숭아는 귀신 쫓는 음식이라 올리면 안 된다는 설도 있죠. 전통 상차림에 따르면 평균 35~40종의 제물을 차린다고 합니다.

출처: 매일경제

조선의 유학자들이 펴낸 예서(禮書)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요? 2016년 ‘국학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 관혼상제 전문가 김시덕 박사(56·대한민국역사박물관)는 “고려 말 들어온 주자의 ‘가례’ 이후 모든 예서가 ‘과, 과, 과, 과’입니다. 과일을 6종류 또는 4종류 올린다고 돼 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일을 놓아야 할지 정하진 않았어요. 조선 후기 학파와 무관하게 사용된 예서 사례편람(四禮便覽)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김 박사는 “19세기 중반에 쓰인 ‘금곡선생 문집’에 조율시이(棗栗柿梨)가 나오지만 이게 늘어놓는 순서는 아니다”며 “이전까지는 집에 있는 과일로 차리다가 19세기 들어서 네 종류의 과일이 상차림으로 정착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말리거나 묻어서 오래 보관이 가능했던 대추, 밤, 감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포는 왼쪽에, 젓갈류는 오른쪽에 하는 방식이 가가호호 퍼진 것은 1970년대 이후일 가능성이 큽니다. “1960년대부터 학자들이 전국을 돌며 제사 상차림을 조사했어요. ‘집안에 이러이러한 차림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당시에는 없어도 이후로는 그렇게 차리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조사자로부터 ‘역전파’가 된 겁니다.”

조율시이가 기록된 습례국 진설도. 191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동아일보

이이는 1577년에 간행한 『격몽요결』에서 제철 재료로 음식을 하되 별다른 게 없으면 떡과 과일 두어 가지만 올리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추석 차례는 축문도 읽지 않고 술도 한 번만 올려 간소하게 지냈습니다. 한 해의 수확을 앞두고 별 탈 없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의식에 가까웠죠. 추석은 농번기를 목전에 두고 모두가 쉬어가는 휴일이었던 겁니다. 1970년대 이후 대중매체가 추석 차례에 무슨 대단한 법도가 있는 듯 굴었으나 이는 소비사회를 맞아 새로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현대인의 삶의 문화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해마다 전통적인 제사 형식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전통’ 차례나 제사가 귀찮은 과거의 산물일지도 모르죠.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제안한 현대 제사상. 상차림을 간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출처:중앙일보

2004년부터 우리 전통 문화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대중에게 소개해온 (재)아름지기가 ‘가가례家家禮: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展을 열었습니다. 아름지기는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목표로 전통 장인 및 현대 작가들과 생활문화를 연구해왔습니다. 신연균 이사장은 “엄격한 제사의 본질과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되 현대에 맞는 적절한 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현대 제사 상차림을 제안한다”고 기획의도를 밝혔습니다. 핵가족과 1인 가족이 늘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공간도 원룸이나 아파트로 변했으며, 여행 중 또는 해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상황을 고려해 시대에 맞는 상차림과 풍경을 보여주는 거죠.

전시는 세 분야로 구성됩니다. 전통과 현대의 제사 음식 문화, 4가지 현대 제사상, 제사 문화 공예디자인이 그것입니다. 퇴계이황 종가의 불천위 제사와 명재윤증 종가의 제사상, 아파트에서의 제사상과 혼자서도 얼마든지 고인을 기릴 수 있는 1인 제사상도 있습니다. 지난 8일에 오픈한 전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계속됩니다.

이건민 산업디자이너가 제작한 ‘이동형 제기 세트’.
정해진 공간이 아닌 추모 공간이나 여행 중에도 손쉽게 제사상을 차릴 수 있다.
출처:중앙일보

전시장 곳곳에서 ‘현대인의 일상 공간과 삶의 모습에 맞도록 간소화한 제사상’을 볼 수 있는데요, 뷔페처럼 여러 음식을 그릇 하나에 모아 담거나, 병풍 대신 실내 가림막을 치고, 제사상을 따로 놓는 대신 식탁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유기나 목기로 된 제기 대신 평소에도 디저트 그릇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기와 유리 소재의 제기도 볼 수 있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 때 쓸 수 있는 ‘이동형 제기 세트’도 있습니다. 접시, 술잔, 촛대, 젓가락을 고루 담되 서로 부딪쳐 깨지거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프레임에 고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네요.

신 이사장은 “제사는 조상을 섬길 뿐 아니라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를 담은 의식인데 본질은 사라지고 한 상 가득 차려야 한다는 가문의 허례허식만 남았다”며 “조선 시대에도 지역과 가문의 특색에 맞게 상차림을 하는 ‘가가례’가 제사의 기본 원칙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원은 “식생활이 변하면서 제물에도 변화가 생겼다”며 “이제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리고, 겨울철에 수박과 참외를 차리는 경우도 흔하다. 또 커피, 사이다, 피자 등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추가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조상을 기리는 정성으로 차린 것이라면 나무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한학 연구자 이병혁 교수는 ‘한국의 전통 제사 의식’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옛날 제사음식도 그 당시에는 생활 음식이었다. 지금의 제사음식도 현재의 생활 음식과 가까워져야 한다”며 “시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만 강조하다가는 현실생활과 동떨어져 전통은 오히려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표했네요.

출처 : 국제뉴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명절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물가 자료를 비판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차례상을 세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우리는 유교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교 예법인 차례를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렇게 차려라’ 하고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가격이 어떻다고 물가 자료를 안 내놓잖아요. 석가탄신일에 사찰의 시주금액이 얼마인지도 내놓지 않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차례상의 물가 자료를 내놓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들 처지에서는 차례상을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사과와 배는 추석에 나오기에는 이른 과일이며, 흔한 포도를 올리거나 가정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던 거죠.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 전체의 5~10%였습니다. 나머지는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들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계급 질서가 무너집니다. 양반이 약 70%가 되는 거죠.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대다수가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했고, 유교 예법을 지키게 된 입장에서 자연스레 차례를 지내게 됐다는 겁니다.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양반’이라는 인식이 퍼집니다. 해방 후에도 양반인 것처럼 행세해야 대접받는다고 생각해 양반이 해야 하는 차례를 지내게 된 거죠. 문제는 많은 사람이 차례 지내는 법을 몰랐다는 겁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차림 탓에 가계 부담이 커진다면 추석에 반드시 차례를 지내야 하는 걸까요? 가가례, 가정마다 염두에 둔 명절의 예가 다르겠지요.

*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라이프 스타일] 차례상에 현대식 그릇… 커피·피자도 올리고
중앙일보, 2018.9.4(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종가에서 아파트까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展
메트로, 2018.8.12(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가가례’ 설 차례상 차리는 법… 원리·원칙 알면 헷갈리지 않아요
매일경제, 2016.2.8(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청춘직설]‘추석 차례’ 가짜 전통과 싸워라
경향신문, 2017.9.1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대추→밤→배→감? 차례상 과일, 종류-순서 따로 없었다
동아일보, 2017.1.27(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왜 “추석 차례 지내지 말자”고 할까
노컷뉴스, 2016.9.1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7. [리얼푸드] “조상님, 차례상에 피자를 올려도 되겠나이까?”
헤럴드경제, 2015.9.24(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문화재와 함께하는 밤마실 <2018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

문화재 도보탐험, 스탬프투어, 근대문화체험, 문화공연, 문화마실, 저잣거리 등
일시: 2018. 9. 8(토)~9. 9(일)요일 오후6시~11시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 일원
주최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 중구
주관 인천관광공사

영상. 시민기자단 김유라




상상속의 자유로운 연미정(燕尾亭)

월곶돈대 홍예문

연미정에 가기 위해 차를 주차하고 별 기대 없이 약간의 언덕을 올라갔다. 월곶돈대 홍예문을 들어서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정자와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것이다. 시원한 풍광 너머로 연미정에 올라 바라보는 조강은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나가는 곳에 있다. 그 모습이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지금이야 북한과 가까워 저 바다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이곳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세곡을 실은 배들이 바로 연미정 아래 정박하여 조수를 기다렸다 출발하곤 했던 곳이니 얼마나 왁자지껄했을까. 그 뱃사람들의 모습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만 남았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고려 고종 31년(1244)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冑)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모아 연미정에서 하과(夏課:여름 공부)를 하고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최소 770년 전에도 연미정의 여름은 공부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던 듯하다. 지금도 더운 여름날 연미정에 오르면 느티나무의 그늘과 북녘에서 불어오는 산들산들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조선시대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설치한 왜관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삼포왜란) 그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황형에게 연미정을 하사했다. 지금도 그 인연으로 황 씨문중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또 정묘호란 때는 금나라 부장 유해(劉海)가 바로 이 연미정에서 조선과 화친하였다. 연미정은 그곳에서 역사의 영화와 치욕을 모두 겪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대로여서 더욱 마음이 쓰이는지 모른다.
지금은 한강과 임진강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만이 자유로이 이곳 앞을 지날 수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시끌벅적 붐비던 연미정을 상상해 보며 다시 그 영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미정과 느티나무

글·사진 / 홍인희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멈춰진 미래 – 인천의 빈 공간들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도시와 지방 정책의 여러 쟁점 중에서도 특히 ‘인구 감소’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실 겁니다. ‘이촌향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의 인구 유출은 ‘지방 소멸’을 염려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인구 증가를 위해 아주 다양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방 중소도시의 인구 감소 추세는 쉽게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방 중소도시의 풍경은 흔히 잘 변하지 않습니다. ‘시내’의 오래된 건물과 가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터미널이나 역의 모습도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서 크게 재건축이나 재개발 사업이 벌어지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인천은 오히려 최근 들어 많은 곳이 변모했습니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원도심도 있지만 지난 10년간의 인천은 다른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달라졌습니다. 서구와 남동구에 비해 비교적 덜 개발되었던 지역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경제자유구역 사업으로 바다는 인천을 대표하는 스카이라인의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은 꾸준히 확장되어 제2터미널이 문을 열었고, 영종도 곳곳은 공항 배후 도시로 변화하였습니다. 원도심은 80년대에 대규모로 지어졌던 주공아파트가 상당수 재건축되었고, 개화기의 오랜 역사가 있는 곳들은 그때 기억을 되살리는 공간들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패션이나 음식, 인테리어, TV 프로그램처럼 도시에도 어떤 트렌드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시가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것, 다시 말하면 도시 개발이나 재개발의 결과는 과거나 지금이나 매번 비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획 당시 도시 계획은 항상 더욱 나은 방향과 훨씬 좋은 미래를 위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면에서 인천은 도시계획의 백화점 같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70년대 택지개발 공간과 8-90년대 대규모 아파트 건설 공간,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민간 주도의 국제도시 공간, 최근 근대 유산 중심의 도시재생 공간을 한 도시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기획되어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은 도시계획 트렌드의 변화 관점에서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경제자유구역 개발에 이르러 우리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집이 지어지는지에 관심 두기보다 외국 기업의 투자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랜드마크 건축물이 언제쯤 지어지는지, 새로운 관광지 개발은 언제 이루어지는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도시를 만들 때 목표는 국가 내부에서 필요한 주택공급을 넘어서 세계적인 금융과 물류와 사람들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1990년대, 국제도시와 경제자유구역 계획의 초석이 되는 세계적인 트렌드에 부합되는 도시를 만드는 송도정보화신도시계획은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인천이 바라는 도시는 세계 수준의 정치·경제적 네트워크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세계 도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외국인과 외국 기업이 인천에 머무르길 바랐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천은 공간적으로 다른 세계 도시와 유사한 모습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른바 ‘참조도시 전략’입니다.

송도국제도시 마스터플랜은 참조도시 전략 안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의 공간 구조를 도입하는 것부터 주요 대도시의 스카이라인, 건축물의 상징적 형태, 공간감 등을 유사하게 하기 위해 블록의 크기나 특징적인 공간들을 벤치마킹하기까지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습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도시 공간들을 주로 참조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공간구조에서는 비엔나의 방사상 구획과 파리의 주요 대로들과 런던의 도시 내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것을 참조하고, 공간감에서는 필라델피아의 블록 사이즈와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베니스의 대운하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마 몇몇 떠오르는 공간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센트럴파크 바로 옆의 상징적인 초고층 빌딩은 다른 디자이너의 작품이지만 묘하게 새로 재건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연상시킵니다.

 
 
<위: 암스테르담의 운하(좌)와 송도 커넬워크(우). 아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프리덤타워)(좌)와 송도 동북아트레이드센터(우).>

이러한 전략은 실제 외자 유치와 개발 계획에 이르러 더욱 심화 됩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참조한 도심 공원은 그대로 센트럴 파크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가 디자인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골프장도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작은 운하들을 낀 공간은 송도 한 부분의 쇼핑몰이 되었습니다. 개발이 진행되다가 안타깝게 무산된 여러 프로젝트들도 이름에서부터 다른 나라의 무언가를 이식해오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파라마운트 무비 테마파크’ ‘밀라노 디자인시티’ ‘영종 브로드웨이’. 지금은 미단시티로 이름이 변경된 영종도 운북복합레저단지 개발 사업에 최초로 당선된 컨소시엄이 제시한 네이밍은 신향(新香)이었습니다. 이름에서부터 홍콩(香港)을 벤치마킹하고, 홍콩과 같은 공간이 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계획들이 국제도시의 구석구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계획은 예정보다 느리고 달라지더라도 조금씩 진전되고 있지만, 많은 계획들이 무산되거나 기약을 잃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 될 것 같았던 100층이 넘는 두 초고층 빌딩 계획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자리 잡았던 공간들은 도로로 블록만 조성된 채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운북 복합레저단지(현 미단시티) 2006년 우선협상대상 컨소시엄의 계획조감도>

세계적 트렌드에 부합하는 도시가 되기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데이비드 하비의 표현을 원용하면 ‘도시는 기업 자본과 개발업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중심 도시가 되기 위해 인천의 국제도시는 기업이 개발하고 기업이 투자해야 하며, 좋은 제안서와 뛰어난 추진력을 가진 디벨로퍼가 필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은 다른 세계도시와 비슷하게 금융산업과 생산자 서비스업처럼 당시에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넓은 땅에 ‘국제업무지역’의 이름을 붙여 두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이 오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중에 많은 땅은 여전히 비어있거나 오피스텔이 되었거나 대형 쇼핑몰이 될 예정입니다. 다국적 기업이 어떤 지역에 새로 자리를 잡기 위해 고려하는 많은 요소는 어쩌면 한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만족시키기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인천의 국제도시는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시도했고 어렵지만 여전히 시도하고 있지요.

많은 계획이 부침을 겪는 것을 계획의 실패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모든 도시 계획은 많은 계획가와 학자와 행정가와 시민이 최선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애쓴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변화의 요소와 가능성을 모조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보는 도시계획은 계획이 길수록 더 많은 수정이 꾸준히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계획의 진행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의미 있고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는 도시계획에서 마스터플랜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작은 목표를 하나씩 이루어 나가며 전진하는 점진주의 시각도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여 오늘날 거의 모든 대규모 개발은 마스터플랜을 세우면서도 단계적 개발계획을 수립합니다. 인천경제자유구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적인 마스터플랜을 달성하기 위해 목표들이 단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득 채워진 주거단지와 아직 더 적합한 사람과 기업을 기다리는 업무지역을 보며, 어쩌면 마스터플랜을 달성하기 위한 단계가 아니라 정말 ‘어떤 땅의 쓰임새는 도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5년이나 10년 후에 결정하겠다’는 유보적인 태도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8년에 예측하는 2020년과 1995년에 예측하는 2020년의 간극은 너무나 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후반에 ‘굴뚝 산업’으로 불리던 제조업이 오늘날 인공지능 등 최신 기술과 결합해서 ‘4차 산업’으로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글,사진 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샤론 주킨(2015), 무방비 도시, 국토연구원
게오르그 짐멜(2005),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 물결
데이비드 하비(2005),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문화과학사
SoA(2016), “송도신도시: New City for Non Place on the New Place”, 확장도시 인천. 마티




Yaloo Castle Site at Fukuoka 2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후쿠오카성 재건축 기념 기획 전시>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싣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작년 여름에 있었던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서의 레지던시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인천재단 후원의 Yaloo Castle Site의 계기가 된 나의 첫 후쿠오카 생활에서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적어본다.

카와바타 시장에 전시된 야마카사

환영식 티세레모니 자원봉사자 분들, 말레이시아 작가 Sum Yen과 함께

대학원 졸업 후 작업에 계속 집중하고자 레지던시를 연이어 다녔다.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다른 레지던시들과 성격이 매우 달랐다. 대부분의 사설 재단 레지던시는 자유분방하고 매우 사적인 분위기다. 숙소와 스튜디오만 제공하고 작가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대신 모든 일을 작가 스스로 해결한다.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후쿠오카시 소속으로 회계팀, 학예팀 모두가 공무원이다. 계약 기간 내 작업 활동에 관련된 모든 결정이 여러 단계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이런 경직된 시스템 안에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장려받는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답사, 자료 수집, 강의, 워크숍, 전시 기획, 협업, 전시 설치까지 모든 과정은 많은 회의와 준비과정을 거쳤다.

얄루파크 전시협업 회의중

처음엔 이런 번거로움이 불편하고 창작에 제약을 준다 느껴졌다. 하지만 ‘네 작업이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해’라던지 오픈 스튜디오, 렉쳐 프로그램, 전시 때만 급하게 작가를 쪼아 작업 내놓으라 하는 태도가 아니라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위해 공정한 과정을 꼼꼼히 거치고 작가가 목표한 최상의 작업을 풀어내는 것이 곧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로 함께 일한다는 점이 뜻깊게 느껴졌다.

야마카사 장인 스튜디오 방문

교외로 야마카사 장인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는 출장으로 분류하여 출장비가 나오기도 했다. 봉투를 건네는 큐레이터분이 부끄러워하실 정도로 적은 액수였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거치는 절차와 격식이 오히려 고마웠다. 작은 부분까지 업무로 분류된다는 게 오히려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여름 내내 다양한 강의, 워크숍, 행사, 수많은 미팅, 전시까지 신나게 임했다.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작업을 소개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의미 있다. 미국 각지를 다니며 강의 경험은 많지만, 일본에서 일반 미술관 관객을 위한 강의나 워크숍은 처음이었다.

싱가포르 학생들과 애니메이션 워크숍

대체적인 작업에 대한 반응은 어디든 비슷하지만 동, 서양 관객들의 감성과 배경 지식에 따라 작품별 이해도나 선호도가 조금 갈린다. 예를 들어 미국 중부의 농업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얄루농장> 작업 시리즈물을 한국이나 일본에서 소개할 때 부연설명도 길어지고 관객호응도 밍밍하다. 미국에서라면 설명이 길어질 홍삼이나 케이팝을 소재로 한 작업은 관객들과 내가 같은 맥락 속에 있기에 부연설명 없이도 유연한 소통이 가능하다. 강의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국 관객에게 ‘작업이 오리엔탈 하네요’ 또는 ‘일본적이에요’라는 코멘트를 종종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참 한국적이네요’라는 코멘트를 들었다. 같은 해 겨울, 한국에서 한 강의에서는 한 관객분이 ‘작업이 되게 중국적이네요’라고 말했다.

강의사진

일본에서 최연소 관객은 유치원 단체 관람객으로, 작업 하나하나에 서로 느껴지는 바를 필터 없이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학급에서 가장 우수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범생이 가장 진부한 질문과 해석을 해낸 점도 재밌었다. 여자 어린이들은 부끄러웠는지 질문이나 응답을 전혀 하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다. 후쿠오카 지역사회 문화 종사자들을 접촉하고 큐레이터분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후쿠오카가 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쿠오카에 아시아 최초로 아시아 아트 뮤지엄이 생긴 것도 같은 이유라 한다. 무시무시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핑계로 사용된 ‘아시아니즘’이 처음에는 순수한 개화 운동사상이었다는 것도 배웠다. 후쿠오카 출신 개화 학자들은 당시 유럽처럼 아시아도 함께 뭉쳐 서양 강대국에 맞서야 한다는 이론을 세우고 다른 아시아 국가의 개화 학자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꾀하여 그들의 자국 개혁과 개화 활동을 돕는다. 지리적 위치가 큰 몫을 한 건 물론이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주의 노선을 택하고 아시아니즘이 공식 사상으로 채택되면서 처참하게 의미가 변질되었다.

후쿠오카 전통주택 가정을 방문

일부 학자들, 그들의 자손과 제자들은 계속해서 좋은 뜻을 이어가고 있다. 후쿠오카에는 아시아를 울타리 삼아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작가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도 그 산물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친일파를 가려내는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한 후쿠오카 아시아니즘의 유래와 역사인 듯하다. 대중매체와 인기 역사 서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비판적 시각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후쿠오카시 소속 공공 기관이고 학예 팀 대부분이 일본인 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아쉽지만, 그 딱딱함이 무색하게 내가 머무는 잠깐 사이에도 수많은 아시아 작가들과 학자들이 끊임없이 방문하고 활발한 연구, 전시가 이어지는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아시아’ ‘한국’ ‘일본’이라는 인위적, 물리적 울타리 또는 정체성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 야마카사 축제 모형   하카타역에 설치된 카자리야마

레지던시 관련 사전 조사를 할 당시에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마카사 축제였다. 하카타 주민들이 건물 10층 높이의 거대한 가마를 이고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는 이 축제는 구역별로 가마를 만들어 경주를 연다고 한다. 사진으로 접한 대형 가마들은 아름다웠고 나에게 최적의 리서치 주제였다.

야마카사 경주 리허설

 
야마카사 경주 리허설   가마 제장 장인과 가마꾼으로 활약하고 있는
나카무라 작가와 함께

도착 전 사전 조사를 할 때는 야마카사 장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창작 과정, 장인만의 노하우나 에피소드 등이 궁금했다. 조사과정에서 더 흥미롭게 관찰했던 점은 야마카사 축제를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역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특유의 배타성이었다.

 
야마카사 가게   주인 아저씨 어릴 적 모습과 그의 아버지

야마카사 축제 참여를 통해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계승하는 지역 사회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축제를 준비한다. 여름 한 달을 통째로 할애해야 하는 축제 특성상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실제로 후쿠오카 곳곳에 축제 기간 동안 문이 닫혀있는 가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야마카사 축제를 사랑하는 하카타 사람들은 다양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야마카사 전통을 지켜낸다. 조사하면서 놀라웠던 점은 영어로 된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장대한 축제는 해외에 많이 소개됐을 법한데 말이다. 야마카사 협회 관계자를 만났을 때 여쭤봤다. 굳이 외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노력해서 알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축제는 그들만의,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일본 밖 사람들에게 알려져 축제 본연의 가치가 흐려지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여러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안내문과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힘쓰지 않는다. 지역사회 관광 상품 개발에 큰 공을 들이고 관광객 유치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세계 대부분 도시와는 대조적이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대하는 하카타 사람들의 대담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쿠시다 신전에 위치한 야마카사 협회 방문

야마카사 기록을 빌려 신난 얄루작가

글·사진/ 얄루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는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수상을 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