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loo Castle Site at Fukuoka 4

전시장 앞 흐드러지게 핀 벚꽃

전시를 보러오는 사람보다는 벚꽃축제를 즐기러 왔다가 들러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시를 개장하자마자 꽤 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좁은 통로 일방통행만 가능한 전시 구조 때문인지 빠른 걸음으로 작업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을 향해 삐쳤던 내가 우스운데, 당시에는 막 완성하고 설치를 한 작업이라 감정의 거리가 좁았던 것 같다. 관객들은 다음 관객들을 위해 멈추지 않고 빨리 지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전시 막바지에는 심적 여유가 생겨서 전시장 근처에 머물면서 관객들 반응도 살피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가끔 관객들에게 직접 작업에 관해 설명도 하고 그들에게 감상을 듣거나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다. 공공장소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봄을 여는 행사인 만큼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틈틈이 다른 작가들의 전시도 방문하면서 공공장소에서 많은 인파가 몰리는 행사에서의 예술가와 예술 작품 역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기회가 되었다.

하나미 중 셀피. 노부오 하라다 작가, 이와모토 후미오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 기간 내내 계속된 아름다운 벚꽃과 향기,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 구경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했던 부토 아티스트 노부오 하라다 선생님이 방문해주셔서 벚꽃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사케 한 병과 간소하게 준비한 주전부리를 펼쳐놓고 하나미를 해봤다. 협업 결과물을 설명해 드린 것보다 작업 속에서 확대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는데, 다행히 작업을 좋아해 주셨고 다음 작업물에 대한 의견도 내주셨다. 언젠가는 협업 물의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작업을 꼭 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지난 연재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전시장 사진 몇 개를 공유한다. 성문, 샹들리에, 내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자전적 캐릭터 홍삼 돌과 고장 난 텔레비전 타워 시리즈 등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 속 유물이 비디오 조형 형태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마지막 방에는 방금 지나온 유물들이 VR 진공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마지막 방에 설치된 가상현실(VR) 작업은 인기가 좋았다. 의외로 VR을 체험을 처음 해보는 관객들이 많았다. 상업 박람회에나 핸드폰 회사의 임시매장에서 행사용으로 준비하는 뻔한 기업 광고용 체험이 아닌 작가의 시선과 상상력이 담긴 VR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첫 경험일 수 있어서 뜻깊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 등 디지털 미디어는 일상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많은 콘텐츠가 큰 자본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다. 자본 제로의 개인 창작자로서 같은 매체를 실험하고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창작자로서 그 매체 안에서 비판적인 시각과 유연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된 생산물을 관객과 나누는 것은 그 매체의 자주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며 민주성을 지킨다. 이 자리를 통해 프로젝트를 지지해주신 인천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얄루성터VR 관람객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후쿠오카의 지역 사회 예술인과 교류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후쿠오카 아시안 미술관에서 도보 십 분 거리에 위치한 대안공간 테트라(Space Tetra)에서 아시안 아츠 에어 후쿠오카(Asian Arts Air FUKUOKA)강의 시리즈에서 발표를 초청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조금 언급했던 것처럼 후쿠오카는 근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큰 역할을 차지했고 이 유산이 이어져 아시안 아트 에어같은 풀뿌리 단체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로컬 작가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전시나 레지던시를 마치고 오면 결과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후쿠오카에 체류 중인 외국 작가들을 초청해서 강연을 열어 아시아 예술 커뮤니티의 친목을 도모한다. 자카르타 출신 연구자이자 큐레이터인 레너드 발토로메스(Leonhard Bartholomeus), 중국 총칭 레지던시를 마친 케이치로 테라에(Keichiro Terae) 작가, 타이완 타이난 레지던시에서 돌아온 마키조노 켄지 (Makizono Kenji) 작가들과 함께 발표했다. 일본 작가들의 발표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방식과 아주 달라서 신기했다. 일본 작가들은 먹어본 음식, 숙소, 재밌었던 일화 등 현지 사정과 작가들의 레지던시 생활을 주로 설명하고 작업의 과정이나 결과물에 대한 말과 사진은 아꼈다. 작업과정과 전시 결과물만 소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삼가는 프레젠테이션을 해왔던 나에겐 생소한 발표 문화였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작업보다는 현지 생활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체 성격과 커뮤니티 내에서의 접근 방식의 차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아티스트 토크 사진

레오나드 발토로메스 큐레이터는 자카르타 출신으로 한국에도 자주 소개된 롱그루파(Wrong Groupa)라는 자카르타 대표 풀뿌리 아티스트 콜렉티브의 막내 맴버다. 아시안 아트 에어 강의에서는 롱그루파의 활동을 소개했는데, 사실 그는 개인 연구를 위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연구자 자격으로 체류 중이었다.

미술관에서 스튜디오 이웃사촌이었던 발토 큐레이터와 얄루 작가

주류 탈식민주의자들의 근현대 인도네시아 풍경화에 대한 시선을 비판하는 논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의 요지는 주류 탈식민주의자에게 인도네시아의 근현대 풍경화 식민주의의 폐해이자 잔재를 무조건 비판하지만 발토 큐레이터는 당시 인도네시아 풍경화가에게 서양에서 건너온 새로운 표현기법은 수동적이고 억압의 산물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이자 현지 문화와 유산에 공명하는 자주적인 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나이가 비슷한 학자와 벽을 나누며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 사상, 아시아 근현대(미술)사를 잠깐이었지만 일상 속 수다에 녹여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노미짱이 해준 아침밥.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져 눈물이 찔끔 났다.

노미 키쿠코(Nomi Kikuko) 작가는 이와모토 큐레이터와 십년지기 친구이다. 예산을 아껴 쓰려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노미짱은 선뜻 자기 집 방 하나를 내주었다. 때때로 식사나 차를 함께 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쿠오카 현지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미짱은 근처 바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전에는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많은 예술가가 시간 조절이 자유롭고 시급이 좋은 편이라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 했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일본 사람들조차 전화기 뒤에선 상상 이상으로 심술궂고 험악하다며 웃으며 얘기해줬다. 어디를 가든 작가들은 음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임지연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시모코가와 츠요시 SHIMOKOGAWA Tsuyoshi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소개
올 한 해,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해 활동할 2018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새로운 주인공들이 뽑혔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연구와 창작활동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창작지원 프로그램과 발표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2018 레지던시 프로그램 입주 작가를 소개합니다.

 

시모코가와 츠요시는 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현재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8년 9월부터 3개월 동안은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학생 때부터 사춘기에 이성을 성적으로 열망하는 것을 주제로 설치와 입체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고 들뜬 한 소년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소년은 무지개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세계 여러 장소를 찾아다니며 노력한다. 소년이 무지개를 찾고자 했던 것처럼, 사춘기 청소년들도 이성을 향해 성적인 감정을 품는다. 그러나 작가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은 그들의 감정을 매우 순수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주제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부터 작가는 이데올로기적 풍경이라는 주제를 탐구해왔다. 다른 곳을 여행하거나 출퇴근하는 일상의 경험은 평범하지만,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러한 일상의 단면을 이데올로기적 장면으로 간주하고, 객관적으로 포착한 장면들과 결합하여 풍경에 대한 비디오 설치 작업을 만들고 있다.

 

Old Chungnam Provincial office_VTR, canvas on acrylic paint, projector, SD player, video installation_220⨯130cm_2018

# Q&A
Q. 창작의 관심사와 내용, 제작 과정에 대하여
A. 나는 내가 경험했던 개인적인 조우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인상 깊게 보고 중요하게 여기는 장면들이 나의 작업으로 연결된다. 나의 영상 설치 작업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들과 내가 일상에서 느꼈던 무언가를 작업으로 전개하였다.

 
Yongam Hyndae Apartment_Carbon paper, Pencil, photo print_1030⨯728mm_2016   Cheongju Art Studio_Carbon paper, Pencil, Photo print_728mm⨯1030mm_2016

Q. 대표적인 작업 소개
A. 2011년 ‘일본-한국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된 단체전시에 참가했다. 처음 한국에서 진행한 전시였다. 규모는 작은 전시였지만,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 있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의 비디오 설치작업은 처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신촌역에서 본 풍경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전시할 때 방문한 곳과 체류한 곳에서 상징적인 건물이나 길거리 풍경 등을 리서치하여 모티프로 삼고, 작품으로 만든다. 한국 풍경은 같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나라는 풍경은 물론 관습, 문화 등이 매우 다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흡사하지만,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며 느낀 감정을 비디오 설치작업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Exhibition view of ‘Platform Artist 2018’
Incheon Scenery_VTR, acrylic on canvas_180 x 150cm_2018

Korean Scenery_digital print, pencil on tracing paper, wood frame_17.8×51.5cm_2018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 등
A. 
현재 제작하고 있는 영상 설치는 철학적인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람들이 지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유년 시절에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져있었다. 텔레비전에 만화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 때면, 몹시 걱정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어릴 적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장면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다. 현재 작업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Korean Sceneries_Video installation_OPEN STUDIO View at Incheon Art Platform_2018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나의 작업이 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다소 이해하기에 어려운 내용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보는 이들이 작업을 즐기며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작품의 방법이나 재료 등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無心川沿_VTR, acrylic on canvas, liquid-crystal projector, DVD player_2015

Q. 앞으로의 작가로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하여
A. 아직 결정한 것은 없지만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리서치와 전시를 하고 싶다.

 
Korean Scenery (Daejeon City scene)_digital print, pencil on tracing paper, wood frame_17.8×51.5cm_2018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자세한 내용 보기 ▶)




“고려왕조의 다양성과 통합, 포용과 21세기 코리아(Korea) 미래 유산”

고려 건국 1100주년․경기 천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2018. 11.2.~4, 라마다프라자수원호텔)

고려 건국 11주년과 인천
918년 음력 6월 15일(병진)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건이 즉위했다. 일부에서 ‘실질적인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라 평가하는 고려왕조 500년 사직의 출발이다. 세월이 흘러 2018년이 되었다. 왕건 즉위로부터 1100년이 되는 해다. 1000년이 되는 해는 1918년이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뺏긴 처지였으므로 기념할 수 없었고, 그 이전은 고려를 이은 조선의 시대였으므로 고려 건국을 기념한다는 것은 기대난망이었다.
인천이라는 지역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역대 왕조 중 고려만큼 인연이 깊은 왕조가 없다. 이름의 뿌리인 ‘인(仁)’은 고려 인종이 어머니 출신지인 인천을 높이기 위해 고민해 내려준 것이다. 인주 이씨 집안의 여식들은 7명이나 임금의 배필이 됐다. 몽골 침략이라는 국난을 맞아 고려인들은 개성 궁궐을 그대로 본떠 또 하나의 수도를 만들었으니 바로 강도(江都)다. ‘황궁’으로 표현되는 황제국가로서 고려의 위상 역시 강화에서 끝을 맺었으니 인천 입장에서도 고려 건국 1100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인천문화재단은 경기문화재단과 1년여에 걸친 협업을 통해 고려 건국 1100주년과 함께 1018년 현종때 처음 지방제도로 시행된 ‘경기(京畿)’ 성립 1000년을 함께 기념하고 기억하는 사업을 기획했다. 상반기에는 4월 28일 인천에서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반기에는 11월 2일부터 4일까지 수원에서 한국중세사학회와 함께 고려시대사 연구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논의하는 마당을 펼친 것이다.

국제학술회의 참가자 기념사진

다원성을 바탕으로 통합을 지향했던 고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중국, 일본 연구자들도 참가해서 고려왕조의 역사적 위상과 맥락, 고려시대사 연구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전망하는 유력한 수단으로서 고려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11월 2일 첫날에는 모두 11명의 연구자가 강연 형식으로 발표에 나섰다. 국내 고려사연구의 1세대가 이미 작고한 상황에서 2세대 연구를 이끈 원로 학자들과 3세대라 할 수 있는 중진 연구자들, 외국에서 고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무척 다양한 구성이었다.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의 발표 장면

발표 요지를 압축해보면, 고려는 후삼국의 혼란기를 단일한 힘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 세력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런 출발의 특징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인 천하관으로 이어져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외국에 대해서는 왕이라 하면서도 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당연히 사상적으로도 유학이든, 불교든 폭넓게 수용하여 쓰임에 맞게 썼을 뿐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과 같은 특정 종교 탄압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는 다원성에 기반한 사회였고 서로 다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합의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는 것이다.
외국 연구자들로 일본의 칸다외국어대학 도요지마 유카 교수,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의 손호 연구원, 미국의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 교수,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의 존 던컨 교수가 참가했다.
첫날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하와이대학 강희웅 교수의 총평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학자는 에드워드 슐츠 교수와 존 던컨 교수를 지도한 선생이기도 한데, 이제는 원로가 된 제자들의 발표를 자랑스럽게 다시 소개하기도 하고 초창기 고려사연구의 어려움과 연구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년에 하와이대학에서도 고려사 관련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의 연구자들과 논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시는 데서는 학문에 대한 열정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일본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발표 장면

또 하나의 고려 수도인 강화
11월 3일 둘째 날에는 7개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인천과 경기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주제로서 인천과 관련해서는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이 개경 도성과 강화 도성의 구조를 비교하여 의미를 살펴보는 발표를 했고, 민족문화유산연구원 한성욱 원장은 강화 출토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도자기 문화에 대해 고찰했다. 이밖에도 중국 연변대학 정경일 교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의 근황에 대해 직접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 발표 장면

주제별 발표와 토론이다 보니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가기도 했다. ‘경기’의 범위와 변화에 대한 의견 차이는 생각보다 컸으며, 고려시대 ‘경기인’의 범주 설정을 두고도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고대사나 조선시대사에 비해 연구자 숫자와 시민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고대와 조선을 잇는 허리로서, 그리고 조선시대 문화의 뿌리로서 고려왕조가 갖는 역사적 위상은 생각보다 높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종합토론 광경

특히 연변대 정경일 교수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분위기에 발맞춰 북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강화의 고려왕릉를 포함해 확장 등재하고, 반대로 남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에 개풍의 재릉과 후릉을 포함해 확장 등재하면 유적의 완결성도 높이고 문화유산 관련 남북 협력의 발전적 대안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는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주장, 추진해 오며 내부 검토 보고서도 제출한 바 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느꼈던 답사
셋째날인 11월 4일에는 학술대회 장소인 수원에서 고려시대 유적을 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본인의 눈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사학과에 내려오는데, 다행히 이번 답사에는 볼거리가 무척 많았다.

 
용인 서리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부산물

길이가 80미터에 달하는 국내 최대 가마인 용인 서리의 고려시대 백자가마터에는 계절을 알리는 낙엽들 사이로 자기를 굽고 남은 부산물들이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저 얕은 구릉이라고 밖에 생각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용인 처인성은 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 일부가 세월을 거쳐 흘러내려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높이 솟아있는 암벽은 안성, 이천, 수원,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차지했던 처인성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국민대의 박종기 명예교수는 연구 초기에 처인성을 답사하며 기록과 대조해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역사 연구자에게 현장 답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했다. 참여한 여러 대학의 고려시대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노학자의 열정이 전달되었길 빌어본다.

용인 처인성

몸의 비례가 맞지 않는 지방색 강한 불상의 대표로 꼽는 것이 흔히 ‘은진 미륵’이라 부르는 충남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인데, 안성 매산리 미륵보살상도 그에 못지않게 ‘균형 잃은’ 몸매를 자랑한다. 중생구제의 상징이라 할 미륵부처를 자기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세운 고려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안성 매산리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으로의 과제
학술회의라 하면 보통 연구자들끼리 모여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자리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모 대학 사학과 학생이 쏟아내는 질문을 들으며 이제는 시민과 젊은 사학도를 제쳐놓는 학술대회는 수명을 다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중세사학회는 원로학자, 중견학자, 신진학자와 함께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고려시대사 전공 석사, 박사과정생을 다수 초대했고 둘째날 학술회의 종료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나와 선배 연구자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글로만 보던 선배 학자들을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는 설렘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들도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였다. 학술대회에서 오간 수많은 논의보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공부하는 선배와 후배가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주 앉아 학문적 대화와 토론을 하는 기회였다는 점이 더 의미 있었을지 모른다.
잊혀진 것은 아니되, 관심이 적었던 고려시대는 특히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맥락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에서 강화 석릉 주변의 고분을 시범 발굴하고, 마리산 남쪽 자락의 흥왕리 이궁지를 발굴하는 등 이전과 다른 움직임이 인천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그만큼 인천은 고려와 관련된 자산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역시 그렇게 갖게 된 자산을 바탕으로 남북이 함께 공동으로 고려 역사를 조망하고 살피며, 고려의 기반이자 지향인 다원성과 통합성을 인천에서, 나아가 미래 통일 코리아에서 실현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장)




“예술은 개인이 겪은 일을 기록하고 기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임청하 작가<그 집 : proper farewell> 인터뷰

최근 인천 학익동에 재개발 사업이 박차를 가하면서 빈 집들이 증가하고 있다. 쓸쓸한 인천 학익동에 늦가을 칼바람이 불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더해가는 가운데, 한 젊은 예술가가 학익동의 붉은 벽돌집을 통해 사라져가는 추억의 마지막 빛을 밝히고 있다. 늘어진 고운천으로 지나가는 이를 맞이하는 그 집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임청하, “이제 가면 언제 올라나, 언제 올 줄을 모르겠소! 어널, 어널! 어허이, 어화널!”, fabric, and “the house”, 2018

이전에는 주로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저는 원래 회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제게 회화는 상담자나 컨설턴트 같은 존재라서 가장 편하고 효과적인 표현방식이에요. 그리고 도시와 도시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학부 때 도시와 조경 관련해서 교양수업을 간간이 듣기도 했어요. 작년에는 해방촌 도시재생센터장을 맡고 계시는 교수님을 도와서 연구에 참여한 적도 있고요. 니트 산업으로 성했던 70~80년대의 해방촌 역사와 현재 입주한 아티스트의 현황을 조사해서 그 둘의 접점을 찾는 연구였죠. 그리고 작년 여름 방학 동안에는 해방촌 주민들이랑 관계를 쌓으면서 빈집에서 전시를 했었죠.

이번 <proper farewell>에서도 도시 재개발의 문제를 넌지시 드러내고 있어요. 이전에도 회화 작업을 통해 도시이슈를 다루셨나요?
도시가 제 관심사이긴 하지만 도시문제를 회화 작업을 통해 직접 드러내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도시 문제를 회화로 표현하다 보니 제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어려운 지점이 많거든요. 그래도 이번 전시가 제 회화작품과 가장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제 회화작품은 주로 개인적인 부분에서 시작하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죠. 집에 대한 그리움, 누군가에게 숨기고 싶은 마음,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과 같이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담아내죠. 이러한 본성을 구체적인 제 경험에 빗대어 그림으로 표현해요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큰 주제를 내포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방식이 제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이고 이번 전시와 비슷한 것 같아요.

임청하, Wishful Thinking(바램), Oil on Canvas, 2016

그 집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임청하 작가님의 <Wishful Thinking(바램)>을 볼 수 있다.
그녀가 그린 도시는 도시에 얽힌 사회문제를 표현하기보다 그녀의 경험과 이야기가 투영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교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현재는 문래동에서 활동하고 계시는데 인천문화재단에 <바로그지원>을 어떻게 신청하게 되셨나요?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유학을 하러 외국에 갔었어요. 그러다 이 전시는 올해 4월부터 생각했어요. 졸업 전시를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이 집이 없어진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졸업하고 한국에 가기 전까지 이 집이 그대로 있으면 전시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때마침 스페이스빔에서 하는 인천 에코 뮤지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몇몇 작가님께서 <바로그지원>을 추천해주셨어요. 지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문래동에서 작업하고 있지만, 이 작업을 계기로 인천에 자주 왕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기획 전시명이 <proper farewell>이에요. 이 집에 대한 선생님의 애정이 듬뿍 느껴져요.
제가 이사도 잦고 유학을 하다 보니까 저한테는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주민들이 집이 철거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서 공감이 가지 않았죠. 저한테는 빼앗길 집도 없었으니까요. 근데 이 집을 철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의 허를 찌른 거예요. 저한테도 집이 있었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된 순간이었죠.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집이었고 어렸을 적에 자주 왔었거든요. 다행히 한국에 돌아오는 날까지 집이 남아 있었고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유품과 흔적을 전시하고자 한 계기가 있나요?
할아버지가 은퇴하시고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것도 할아버지 그림이고요. 그래서 졸업할 때 첫 번째로 이 집을 기록하며 기억하고 싶었고 제 그림과 할아버지 그림을 같이 전시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임청하, Shelves, Home(책장 혹은 집), Oil on Canvas, 2016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면도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보다는 우리 가족에게 크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동안 할아버지의 유품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집이 철거된다고 하니까 삼촌이 할아버지 물건을 한꺼번에 버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물건을 하나둘 씩 들춰서 추석에 가족들 앞에 내다보였죠. 잠시였지만 가족들이 그 물건을 통해 추억에 잠길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할아버지 방에 금고 하나가 있었어요. 굳게 닫혀 있었던 금고를 열어보니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그만 금덩어리 하나였고 나머지는 엄마와 삼촌의 출생증, 그리고 친구들한테 받은 편지였어요. 그걸 보던 삼촌이 잠시 우수에 젖으셨죠.
할아버지께서 1년 동안 지병을 앓고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이 많이 지친 상태라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못했는데,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전시를 소개하실 때 할아버지의 유품과 선생님께서 재해석한 작품이 있다고 하셨어요. 어떤 부분을 선생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시각미술을 해서 시각적인 부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죠. 그래서 어떤 것을 우선으로 눈에 들어오게 하고, 어떤 부분이 나중에 들어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해요. 어떻게 보면 연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연출되는 지점과 그대로 배치된 상태 사이를 어떻게 조율할지가 고민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아까도 할아버지의 과거를 착취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래서 어떤 물건을 재배치했다면 어떤 것은 할아버지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기 위해 그대로 두려고 했죠.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을 재배치 하셨나요?
저쪽에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던 시집이 있는데, 가운데로 펼쳐 놓은 채로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어떤 시를 자주 읽고 좋아하셨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이 집을 주제로 전시를 하다보니까 눈에 들어오는 키워드가 있어서 그 부분을 펼쳐놓았죠. 제가 기획하고 설치하는 부분에서 재해석 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사적인 공간을 공개하는데 어렵지 않으셨나요?
저는 누군가와 함께 경험하면 더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 같거든요. 제가 혼자 여행을 다녀왔을 때 공유할 사람이 없으니까 마치 꿈처럼 허무했어요. 누군가와 여행을 다녀오면 서로 그 때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서로 피드백을 주잖아요. 기억이 왜곡될지언정 견고해지죠. 제 어렸을 적 친구들이 다 여기 있어요. 이 집을 알았던 친구와 가족 누구든 다 같이 모여서 경험을 공유하면 이 집은 없어져도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집과 관련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요?
워낙 많은데요. 할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악기를 많이 다루셨어요. 제가 바이올린을 처음 켜니까 할아버지도 같이 연주했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바로 여기 3층에서요. 그리고 제가 중 2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5학년 때 유학가고 돌아왔던 2008년 여름에 할아버지께서 뇌종양 판정을 받으시고 점점 기억이 사라지셨어요. 그래서인지 할아버지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2008년에 멈춰 있더라고요. 스캐너를 열었을 때 올려진 문서도 2008년 3월이었죠. 제가 이번 전시에 놓은 방명록도 2008년이고요.

3층에서는 주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데, 다른 층에는 어떤 테마를 선보이실지 궁금해요.
1층은 좀 더 아카이브 전시 같아요. ‘연희집단 갱’과 ‘자표자기’라는 팀을 <바로그지원>에서 만났거든요. ‘자표자기’는 인천 부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입주하고나서 1년이 지나자 재개발 통보를 받아서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어요. 그 일을 겪고나서 그곳에 남겨진 사람에 대해 아카이브전을 하고 싶다고 하셨죠. ‘연희집단 갱’은 현재 까마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까마귀의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면서 길놀이를 하고 있어요. 도시개발 문제에 직접적인 구호를 외치기보다 그 장소를 거닐면서 꽹과리치며 춤추고 놀다가도 잠시 멈춰 풍경을 바라보죠. 그런 태도가 이번 제 전시작품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졸업 전시 때 영상하던 러시아 친구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친구의 할머니도 평생 사셨던 집이 정부에 의해 밀리게 되었죠.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사건을 모티브로 할머니의 경험을 판타지적으로 풀어 보고자 해요.
그리고 3층 곳곳에서 다른 작가님의 작품도 눈여겨볼 수 있어요. 이 건물 자체와 재개발에 주제를 갖고 작업한 오수(오승욱)작가님, 할아버지의 시점과 이집에 축적된 기억에 대해 작업한 안치영 작가님, ‘그집’의 시점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동그랭 팀의 작업이죠. 아, 마지막으로 우나연 작가님께서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세요.

러시아 친구도 같이 참여하나요?
네, 전시에는 못 오지만 영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타의에 의해서 집이 없어지는데, 꼭 집만이 아니더라도 내가 의도지 않게 무엇과 작별을 한다는 것은 국경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주제라고 생각해요. 인간이면 누구나 이별을 해야하는 시점이 있고, 그러다 보니 비슷한 주제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던 것 같아요.

 
오수(오승욱), 창, 혼합매체, 2018

오수(오승욱), 문, 혼합매체, 2018

동그랭, ◯ ◯ . ◯ ◯ ,커스터마이즈 소프트웨어, 빛센서, 빔프로젝터, computer
dimension variable, open source, michael pinn, 2017

안치영, .ZIP, 혼합매체, 2018

“저의 전시 의도도 재개발이라는 주제로 하다보니 도시에서 겪는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이 의식하고 있긴해요. 하지만 이집은 저의 가족과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부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겪는 개인의 이야기에 주제를 맞추고자 노력했어요. 친구랑도 얘기했었는데, 예술은 개인이 겪는 일을 기록하고 기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집 :proper farewel> 전시에서는 임청하 작가님 외에도
동그랭, 연희집단 갱, 오수(오승욱), 우나연, 임청하, 자표자기,
Alessandra Pozzuoli, Charlie Enrenfried, Sofiya Fayzieva 등 여러 작가가 참여한다.
서로가 그 집을 넘나들어 또 하나의 사라질 역사를 기록해보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2층에서는 어떤 작업을 선보이시나요?
2층은 할머니께서 최근에 생활하던 공간이라서 조금 더 현재를 기념하기 하기 위해 오프닝 잔치를 펼칠 예정이에요.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은 없으신가요?
여기 전시를 구상할 때 주민들도 이곳에 오셔서 함께 즐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이미 이 동네를 다 떠나셨거든요. 개별적으로 초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오늘 재개발 조합장에 초대장을 드렸죠.

<Proper farewell>전시를 마치고, 도시와 관련해서 또 다른 작업을 펼칠 예정인가요?
저는 이 전시가 저한테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운도 좋았고요. 아직 집이 없어지지 않았고 집과 작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니까요. 게다가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이라서 제 마음대로 작업 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참여 작가들과 한 주제를 가지고 공유할 수 있었죠. 문득 다음에도 이런 주제로 전시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는데, 어느 시기에 주제가 적절하고 깊게 가담한다면 작업하겠지만 한동안은 문래동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 임청하 작가 제공

 




벽면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중 퍼포먼스 <그리는대로>

벽에 낙서하는 대로 떠나는 상상여행
공연예술계의 新장르 공중 퍼포먼스의 묘미

출처: 취재기자 정해랑

지난 1~2일 인천아트플랫폼 야외 중앙광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특별한 공연이 개최됐다. 벽면 무대를 세워 줄 하나에 몸을 매달린 채 시각적 볼거리를 선사하는 공중 퍼포먼스가 펼쳐진 것이다.
작가 김소희가 기획한 이번 공연 <그리는대로>는 한 소녀가 벽에 그린 풍선을 타고 떠나는 상상 여행을 영상과 공중 퍼포먼스를 접목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공연 <그리는대로>는 벽면을 따라 수직으로 세워진 스크린 무대를 통해 무한하고 자유로운 창작공간을 만들어내며 관객들에게 공연예술의 새로운 장르로서의 공중 퍼포먼스를 알렸다.

 

출처: 취재기자 정해랑

공중 퍼포먼스가 관객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국내에서 공중 퍼포먼스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아직 공중 퍼포먼스는 많은 관객에게 낯선 장르이다.
작가 김소희는 2011년부터 공중 퍼포먼스 창작단체 ‘프로젝트 날다’에서 활동해 왔다. 2017년에는 ‘버티컬 씨어터 타블로’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중 퍼포먼스와 연극적 요소를 결합해 작가 김소희만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을 완성했다. 첫 작품 <일어나>에 이어 이번<그리는대로>를 두 번째로 발표하며 관객들을 다시 찾았다.



출처: 취재기자 정해랑

공중 퍼포먼스는 지상의 무대가 아닌 수직으로 세워진 벽면 무대를 배경으로 줄에 매달린 배우들이 공중에서 연기를 펼치기 때문에 곡예나 묘기 등의 환상적인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그 덕분에 선보이는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시각적 즐거움은 많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공중 퍼포먼스의 인기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배우이기도 한 작가 김소희는 이번 공연에서도 배우로 나섰다. 김소희는 하늘을 유영하듯이 숙련된 솜씨로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이며 음악과 영상에 맞춰 표정과 동작으로만 퍼포먼스를 소화해냈다.
제작비도 비싼 데다 위험성도 높고 완성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공중 퍼포먼스는 다른 장르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공중 퍼포먼스를 제작하겠다는 단체도 연기하겠다는 배우도 선뜻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겸 배우 김소희는 공연예술계에서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로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기대를 모은다.

출처: 취재기자 정해랑

공연 <그리는대로>는 벽에 낙서하는 일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벽에 낙서하는 행위는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벽에 낙서하며 미소를 짓곤 했던 경험 말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 벽에 낙서하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낙서는 무언가를 내 마음대로 그려보고 완성한 결과물에 성취감과 자아를 느낄 수 있었던 만족과 기쁨의 행위였다.
작가 김소희는 낙서에 대한 이런 긍정적 의미를 예술적 감성으로 풀어냈다. 낙서를 생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한 수단으로 여긴 것. 그러한 낙서를 그녀는 상상을 통해 벽에 그려봄으로써 자유를 더했다. 자유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공연은 틀에 갇히지 않았고 매우 유동적이었고 이는 관객에게 예술의 본질과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해랑 프리랜서 기자
blog.naver.com/marinboy58
marinboy58@naver.com




2018 인천생활문화예술동아리 축제 <원데이 페스티벌>

일시 : 2018. 10. 27. (토)요일 12시
장소 : 문화창작지대 틈 및 옛 시민회관쉼터 야외광장
주최 : 인천광역시
주관 : 인천문화재단  

사진 시민기자단 민경찬 




2018 인천청년문화대제전, 무대 없는 아티스트들에게

인천청년문화대제전은 인천광역시가 주최하고 인천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창작지원금 지원사업이다. 청년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시민과 함께 축제를 만들고자 2016년에 시작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였다. 6월 말부터 지원을 받아 선정된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10월 27일과 28일에 송도 트라이보울에서 열린 인천청년문화대제전(Hi, Youth Festival)에 전시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축제에 참여할 ‘슈퍼루키’들을 선발한 기준은 학벌도 아니고 경력도 아니며, 오직 작품이었다. 인천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도 청년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청춘은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반짝반짝하고 아름답지만 막상 청춘 한가운데에서 보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자신의 바람과 주변의 기대는 번번이 부딪치고 열정과 노력만큼 결실이 돌아오지 않는 일도 많다. 자기 능력이 아무리 높아도 능력대로 펼칠 무대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천청년문화대제전은 청년 아티스트들에게 마음껏 끼와 역량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펼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 준 축제인 것 같다.

28일 일요일은 날씨가 많이 춥기도 하고 비가 오다 그쳤기 때문에 야외 전시와 공연을 모두실내로 옮겼다. 옮긴 과정에서 공연 시간이 조금씩 변경되었기에 나는 천천히 실내에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였다. 트라이보울 2층 전시장 입구에는 관람객을 위한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푸른색의 몽환적인 포토존으로 겨울과 어울렸다. 포토존 우측에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방명록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얀 블록이 서 있었다. 비치되어 있는 색연필 등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있는데, 이미 알록달록한 방명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춤추는 스케치북’이라는 주제로 전시된 그림 작품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쳤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었던 목수 제페토처럼 작가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작품들이 이 공간을 생명력 넘치게 만들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어느 위치에 어떤 방식으로 전시하느냐에 따라 빛을 달리하는데, 각자 제자리에 꼭 맞게 빛나고 있었다. 굳이 설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어떤 고민에 대한 작품이 많다고 느껴졌다.

 
 

사실 영상이 눈에 확 들어왔다. ‘콩나무의 일기장’이라는 주제로 영상들을 전시해 두었는데 주로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고민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 영상은 ‘신선한 생각가게’(최강석 작가)의 0.04 지코(Zico)였다.나와 같은 나이의 연예인을 보면 왠지 열등감이나 자괴감이 든다. 유명한 아티스트인 지코의 인생이 1이라면 내 인생은 0.04 지코 정도 되지 않을까? 모든 인생이 각자 다르다 해도 왠지 비교되고 불안하다. 아마 세상에는 이처럼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하며 불안해하는 마음도 어쩌면 자신을 좋아해서 생긴 것은 아닐까? 많은 청년들이 느끼고 공감할 만하다. ‘잘 될 거야’ 또는 ‘힘내’라는 말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위안을 느낀다. 이 영상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오후에 내가 본 공연은 철새들의 겨울나기였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철새들의 모습은 정착하기 어려운 신진 공연예술가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공연 입간판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첫 라인업은 포크스푼이라는 밴드였다. 제3회 인천평화창작가요제에서 예술상을 받았으며 ‘사람들’이라는 곡을 부른 팀이다. 포크스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포크하고 펑키한 음악들이었다. 공연 중간중간에 세션과 보컬이 함께 안무를 간단하게 했는데, 보고 듣기에도 즐거운 무대였다. 세상 사람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에는 MR과 악기를 함께 사용하여 크로스 오버 음악을 하는 메리플레인의 공연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가요를 자신들만의 느낌으로 불러 메리플레인을 처음 보는 관객도 편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메리플레인의 ‘생각이 나서’라는 곡은 한 번만 듣고도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고 후렴구가 쉬워서 좋았다. 청년 아티스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받은 관객들의 얼굴은 조명이 없어도 즐거움으로 빛났다.

2018 인천청년문화대제전 ‘하이 유스 페스티벌’은 작품을 다양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청년 아티스트들이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을 많이 발견할 때면 어쩐지 늘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따뜻해진다. 취업을 준비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된 부분이 있다. 경력자만 뽑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처음 취업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경력을 쌓고 와야 취직할 수 있느냐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술도 똑같다. 유명하고 화려한 경력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계속 태어나고 자라며 새로운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탄생한다. 날 때부터 멋지고 유명한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어떤 유명인이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첫 무대들이 있었을 것이다. 새싹을 발견하고 꽃을 틔울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는 모든 기회들 덕분에 철새 같은 청년 아티스트들도 어딘가 자리를 잡고 봄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무대 없는 아티스트들에게. Hi, Youth!

글·사진 / 시민기자단 이은솔




10월의 어느 날, 오싹한 하루를! 계양호러축제

지난 10월 20일 토요일에 인천 계양구 작전체육공원에서 2018 계양호러축제 ‘I-SCREAM’이 열렸다. 이번 축제는 낮 12시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되었으며 공연이나 체험을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지역에 있는 작은 공원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서울이나 놀이공원에서만 접할 수 있는 호러축제를 개최하여 인천 시민들에게 문화를 다양하게 접할 기회를 선사하였다.

 

행사장 입구 반대편 잔디밭 위에 나무와 벤치를 이용해 3D 포토존이 세 군데에 마련되었다. 포토존들은 호러축제와 잘 어울리는 소품을 활용해 세심하고 재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붐벼 한참을 기다려야 찍을 수 있었다. 낮 12시부터 시작된 체험에는 호러 분장이나 눈알떡 만들기와 가면 만들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행사 시작 4시간 만에 대부분 체험 부스가 일찌감치 마감되었다. 한편 공원 한쪽에 귀신의 집이 마련되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은 축제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귀신의 집 앞에는 축제가 시작된 시간부터 끝날 무렵까지 체험을 기다리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작전체육공원 내 공연장에서 호러 콘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콘테스트 참가자들의 분장과 퍼포먼스를 보고 시민들이 가장 많이 환호하는 참가자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는 이벤트였다. 콘테스트에 참가하려고 분장과 의상을 갖춘 참가자가 많아서 2부로 나눠 진행되었다. 많은 참가자 중에서도 특히 호러 영화에 나올 법한 분장을 한 어린이 참가자들이 섬뜩한 표정과 몸짓으로 퍼포먼스를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호러 콘테스트가 끝나자마자 호러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보게 된 풍선아트쇼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풍선으로 여러 도구나 꽃, 동물을 표현하였다. 신기하고 재치 있게 무대를 선보여 남녀노소 모두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이어 비보이팀 C.P.I. crew와 예술공연연합회 마리모의 무대가 이어졌다. 어둑해진 시간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더하여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연이었다. 실제로 공연을 보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2018 계양호러축제 ‘I-SCREAM’은 뜨거운 기대와 관심 속에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인천시민 약 2만 명이 축제를 즐기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계양호러축제는 인천에서 호러 축제를 쉽게 접할 수 없던 시민들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사하였다. 앞으로도 이 행사가 지속되어 인천 시민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글 / 시민기자단 김다솔
사진  / 김다솔, 몬스터 레코드 제공




[큐레이션 콕콕] 문학과 연극 사이, 낭독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묵독이 일반적인 시대에 소리 내어 읽는 ‘몸의 행위’로 책 읽기의 새로운 감각을 알리고자 제작됐죠. 2003년에 처음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글자를 침묵 밖으로 끌어내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게 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요즘 문학과 연극계에서 낭독이라는 새로운 극형식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연극계에서 낭독은 개막 전에 작품을 미리 공개하는 리딩 공연으로 선보였습니다. 연극 제작 전 투자자를 찾기 위한 쇼케이스나 홍보용이었죠. 문학에서도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을 강조하지만, 작품이 낭독의 형태로 소개되는 일은 드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작품을 만나는 시간. 낭독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파편화된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자 없이 구어만 존재하던 시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의 모양새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낭독극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세트는 치우고 배우와 대사만으로 ‘생각하는 희곡’을 추구합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을 찾아가는 거죠. 빠름을 강조하는 디지털 시대에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되새기는 낭독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낭독극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한 장면
출처:파이낸셜뉴스

“텅 빈 무대 위에 대본을 든 배우들만 덩그러니 있다. 다른 그 무엇보다 대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함이 흐른다. 적막을 뚫고 관객까지 달려가는 배우들의 언어는 날쌔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 빈 공간에서 관객들은 상상의 유희를 펼친다. 듣는 희곡의 즐거움을 새삼 느낀다.” (‘극장, 낭독에 빠지다’ 중에서)

<낭독 독서법>을 쓴 진가록 작가는 “낭독은 하나의 선포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인생에 가로놓인 벽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낭독을 하면 책 속 인물에 감정 이입하기 쉽다고 합니다. 목소리의 울림, 색깔, 진동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낭독뮤지컬 ‘파리넬리’ 한 장면
출처:위클리공감

낭독+연극뿐만 아니라 낭독+뮤지컬도 있습니다. ‘파리넬리’는 뮤지컬 제작사 HJ컬처가 기획한 ‘낭독뮤지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마리아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배우가 노래하고 편지를 읽으며 극을 이끕니다. 무대에는 동그란 단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피아노 한 대가 전부입니다.

18세기 최고의 카스트라토(변성기가 시작되기 전 거세해 소년 시절에 지니는 고음역을 유지하는 가수)였던 파리넬리. 극은 신이 내린 목소리를 지닌 동생 파리넬리와 불멸의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형 리카르도가 주고받은 편지를 테마로 진행됩니다. 사건보다 내면에 집중하게 하는 낭독의 형식을 극대화했죠.

‘파리넬리’의 프로듀서인 사노 아유미는 “스마트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펜을 들고 편지지를 보며 오랜 시간 고민한 마음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시각보다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배우들도 의상과 분장보다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제작비가 줄어드니 흥행 부담도 줄고, 관객도 온전히 노래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도 낭독극의 장점입니다. 이는 티켓 값에도 영향을 줘, 관객들이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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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문학 사이에 위치한 ‘낭독극’을 미국 뉴욕의 맨해튼 오프브로드웨이나 대학가에서는 ‘스테이지 리딩(Stage Reading)’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읽어주는 낭독극이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기를 소재로 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하여 두 남녀의 만남에부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과 그때의 감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냉장고 위의 인생’은 냉장고에 붙여진 쪽지를 이용해 엄마와 딸의 마음을 들려줍니다.

출처:명랑캠페인

지난여름에는 소설가 윤고은의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이 공연됐습니다. ‘1인용 식탁’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점심을 먹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프로젝트 그룹 ‘키르코스’ 배우들이 낭독극으로 만들었죠.

유시민 작가의 1988년 등단작인 중편소설 <달>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군대의 고문관이라 불리는 주인공 김영민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사와 군대 경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등을 담은 작품입니다. 공연기획사 후플러스가 진행한 ‘2018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죠.

 
입체낭독극 <어쩌면>과 <웃는 동안>
출처:명랑캠페인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살아가던 ‘나’의 죽음이 친구들에게 알려집니다. 전화를 받은 성민은 영재를 찾아가고, 라면을 먹던 영재와 함께 화장실에서 꼼짝 않는 민기에게 소식을 알리러 갑니다. 펑펑 울며 통곡할 줄 알았던 그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멋진 양복을 사러 가죠.” 소설 <웃는 동안>의 내용입니다.

<어쩌면>에는 나, 압정, 라디오, 거울 네 명과 소설책을 읽고 있는 또 다른 배우가 등장합니다. 네 명의 소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죽은 이들의 말과 행동을 재연합니다. 작가가 쓴 따옴표 하나, 괄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가죠. 연극과 소설의 경계를 잊은 관객들은 무대 너머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입체낭독연극<어쩌면>과 <웃는 동안>은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텍스트로 합니다. 독자가 만들어낸 수만, 수천 가지의 느낌들은 모두 다르기에 수많은 해석이 존재합니다. 가만히 앉아 읽기만 하는 낭독극과 달리 책상 위를 오르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손짓·발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입체낭독연극입니다.

출처:위클리공감

지난 9월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낭독음악회에서는 이육사, 도종환, 박용재, 이원 시인의 작품이 낭독됐고 신촌, 합정, 연희동에 자리 잡은 독립서점과 카페에서는 때때로 시인의 낭독회가 펼쳐집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읊기도 합니다. ‘밥 딜런 낭독회-샷 오브 러브’에는 대중음악평론가와 시인, 뮤지션 등이 함께했네요. 시인이 시적인 가사를 소개하면 뮤지션이 직접 밥 딜런의 노래를 들려주는 거죠.

출처:원주시 공식 블로그

소설 토지의 날은 박경리 선생이 26년에 걸친 집필 기간 끝에 5부 20권 분량의 토지를 완간한 기념으로 해마다 8월 15일에 열립니다. 소설 토지 1부 첫 장면이 1897년 8월 15일이고, 토지의 마지막 장면도 (1945년) 8월 15일, 토지 완간일은 (1994년) 8월 15일이고, 박경리 문학의 집 개관 역시 8.15가 붙은 2010년 8월 15일입니다.

해마다 시 낭송 대회, 토지 명장면 따라 그리기, 물통에 감동 메시지 남기기, 토지 한 문장 쓰기, ‘토지’ 속 등장 인물에게 편지쓰기 등의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 처음 ‘박경리 소설 낭독공연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예선을 치른 뒤 본선에 오른 네 팀이 박경리 문학의 집 공연에서 열연했고, ‘설화’, ‘불신시대’ 같은 박경리 소설을 낭독극으로 선보였습니다.

출처: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의 목요낭독회가 올해로 3년째 진행됐습니다. 참여자들은 3개월간의 연습 끝에 지난달 낭독극 <뷰티인사이드>를 공개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낭독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1. 예스책방 책읽아웃
매주 목, 금요일 방송된다. 오은 시인이 진행.

2. 알라딘의 서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된다. 신간 중 추천하는 책 4권을 낭독.

3. 낭만서점
매주 화요일 한 편의 소설을 선정해 들려준다. ‘세계문학 읽기’ 코너에서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와 배우 김성현이 매월 두 편의 세계문학 고전을 선정해 낭독.

글 · 이미지 이재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눈이 아닌, 말과 귀로 책을 읽는다! 낭독의 매력
위클리공감, 2018.8.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소설 『土地』 완간일, 8월 15일 ‘소설 토지의 날’
네이버 블로그(이슬마루), 2018.8.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명랑한 낭독, 팔딱거리는 소설 <웃는 동안>
네이버 블로그(명랑캠페인), 2017.9.1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낭독’의 시대, 뮤지컬과 소설의 그 중간지점
브런치(서정준 JJ), 2018.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삶을 바꾸는 ‘우리말 낭독’의 힘-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충청매일, 2017.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극장, 낭독에 빠지다
파이낸셜뉴스, 2014.2.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강화도의 목장 이야기

목장(牧場) 하면 떠오르는 곳이 바로 제주이다. 한라산의 중산간지대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목장과 뛰어다니는 말떼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제주도의 대표적인 문화 이미지이다. 전근대(前近代)시기 말은 국방, 교통, 운송, 교역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가축이었다. 특히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은 “군국(軍國) 사무(事務)” 즉 “나라를 지키는 일과 같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강화도에도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130여 목장 중 이름난 곳이었다. 강화에 처음 목장이 생긴 것은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몽골과의 화친 이후 개경에서 가까운 강화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목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는 제주만큼 따뜻하지 않아 겨울철 말에게 먹을 건초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성과 가까워 위급 시 말의 수송이 편리하고 상시적인 관리가 쉽다는 점, 물과 풀이 풍부해 말 사육에 적합했던 점 등은 강화 목장 설치의 근거가 되었다.

강화도의 목장은 태조 이성계가 탔다는 ‘사자황(獅子黃)’과 효종 대 전략적으로 길렀던 ‘벌대총(伐大驄)’의 산지로 유명했다. 아울러 강화도의 각 목장에는 말뿐만 아니라 소나 양,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으며 그 규모도 상당했다. 하지만 강화의 목장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축소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서 목장의 운영보다 백성의 곤궁한 삶을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화의 목장은 농경지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지된다.

벌대총을 기른 진강목장의 석축 담장(ⓒ인천시립박물관)

현재 강화도에는 진강목장(양도면), 길상목장(길상면), 북일곶목장(화도면), 매음목장(삼산면)만이 그 흔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두꺼운 목장의 석축 담장이 우뚝 솟아 있는 제주도의 말목장과는 달리 방치되어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제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강화도 목장유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목장의 흔적이 남은 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웠으면 좋을 듯하다.

그 옛날 사자황과 벌대총이 뛰어놀던 강화도의 목장은 이제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인천 시민께 그 흔적이라도 알려 강화의 또 다른 문화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정민섭(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