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BOWL ART CLUB>
코딩클럽 ‘상상을 코딩하다 2019’

–  프로그램 정보
장 소: 트라이보울전시장  일 정: 2019.06.02~30(매주 일요일, 5회) 11:00~13:00
대 상: 초등학생 4~6학년
수강료: 1만원
신청방법: 트라이보울 홈페이지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문의: 032-833-5993

– 프로그램 내용
코딩은 컴퓨터 언어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이며,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도 이 코딩을 통해 만들어 진다. 이번 코딩클럽에서는 교육생이 직접 만든 물체를 프로그래밍하여 빛, 소리 등 외부자극에 반응하여 움직이게 하는 미디어 아트 교육을 진행한다. 과학적인 요소를 연구하여 움직임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예술융합프로그램으로, 놀이로서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2019 인천아트플랫폼 대관기획 공연<플랫폼 초이스>선정작
체험아동극 비비랑 허니랑, 꿀벌친구를 찾아서!

 

– 공연 정보
일 정: 2019.06.14-16 | 6.20-23(6.22 공연없음) 시 간: 평일 11:00 | 주말 14:00
장 소: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
입장연령: 36개월 이상 관람가
관람료: 10,000원(1인 1티켓 소지)
문의: 010-3166-9896
티켓 예매: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 공연 내용
아동극 <비비랑 허니랑, 꿀벌 친구를 찾아서!>는 ‘꿀벌 친구들은 왜 사라졌을까?’를 부제로 무분별한 플라스틱 사용으로 인한 환경파괴로 사라져가는 꿀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체험형 아동극이다. 주인공 ‘비비’와 ‘허니’를 도와 꽃이 수분하고 열매를 맺는 과정, 꿀벌 집을 짓는 과정을 관객과 함께 하며 아이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자연 속에서 꿀벌의 역할과 공생하는 삶의 중요성을 공연과 체험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품이다.




고려인, 그들이 귀환(歸還)하다

고려인, 그들이 귀환하였다.

할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갔대요. 함경도에서 할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연해주로 갔고요.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거 찾으러 갔대요. 연해주에서 아버지 낳고 사는데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어서 거기에 살았지요. 저도 1956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다시 러시아로 갔는데 2년 전에 딸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와서 나는 1년 전에 손녀 봐주러 왔어요. 할아버지 고향에 왔으니 이제 여기서 살아야지. (김 할머니, 2019.05)

김 할머니의 구술에서처럼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진행형이다.
고려인의 이주 흔적은 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구한말 13세대가 빈곤과 굶주림, 그리고 착취를 피하여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작된 고려인이 최근 우리사회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이들은 허허벌판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대한의 사람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땅으로 만든 후손들이다. 예컨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크라이나 등에 거주하던 한민족이다.

 

출처: 우수리강(江) 유역의 최초의 고려인(한국이민사박물관, 2014)

고려인동포가 한국 내에서 동포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1999년 9월 제정)이 개정된 2004년 3월 이후부터이다. 특히 2007년 H2 비자의 시행으로 고려인동포의 한국행 노동이주가 매우 증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CIS지역의 경제 불황과 한국기업의 진출, 한국의 대중문화 유입,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통해 ‘동포로서의 기대’ 감정이 한국을 찾게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명 고려인이라 불리는 러시아・CIS 동포들은 한국인과 동일한 성씨를 가졌고 외모 또한 비슷한 고려인도 있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타민족과 결혼하여 출생한 외모가 다른 고려인도 있다.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할 것이라 인식한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어를 상실한 지 오래고 한국인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이산가족이 되면서까지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요소로는 출신국의 요소이다. 그 배경에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진행된 이슬람 민족주의의 부흥, 주류민족 중심의 언어정책, 소수민족에 대한 취업과 교육 기회의 제한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CIS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영향, 한국 정부와 NGO단체 등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모국방문 기회 증가, K-POP 등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기회 증가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에 대한 기대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려인 사회에 공유되는 한국의 특별한 의미, 즉, 고려인들에게 한국이 연해주와 더불어 역사적 뿌리와 사회적 연고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인의 한국행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인이 한국행을 택하는 다양한 배경요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동기는 취업을 위한 경제적 요인이다.

<표 1> 재외동포 자격별 체류 현황
 (2019. 02. 28. 현재, 단위 : 명)
출처: 법무부(2019)

위의 표와 같이 2019 출입국 통계에 의하면 약 50만 고려인동포 중 현재 국내 거소 등록된 고려인동포는 9만여 명에 달한다. 이에 동반 자녀를 포함하면 약 10만 명 이상이 체류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국내의 고려인동포 500명 이상 집거지를 이루며 거주하는 도시는 안산을 비롯하여 아산, 천안, 인천, 광주, 경주 등 16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중 안산에 9천여 명, 인천에 약 4천 5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법무부, 2019).
인천의 경우 최근 2,3년 사이에 어린 자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들어오는 고려인동포가 크게 증가하였다. 2018년 연수구청의 통계에 의하면 연수구에 거주하는 고려인동포는 약 4,058명으로 이 중 70%가 넘는 3,146명이 연수구 함박마을 일대에 거주한다. 이는 함박마을 전체 주민의 약 46%를 차지하는 숫자로 국내 최대 고려인동포 거주 밀집지역이 되었다. 이는 최근 2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며, 지금도 매년 500명 정도가 증가하는 추세라 한다. 이로 인해 연수구 함박마을을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박마을이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할 정도로 고려인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요인은 보증금이 필요 없는 작은 ‘원룸’의 저렴한 집값과 인근의 공단의 접근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함박마을은 외국인이 몰려들자 상가를 원룸으로 개조하여 무보증 월세로 임대하고 있다. 이주 초기 어려운 형편으로 생계를 꾸려야하는 고려인동포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특히 인천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동포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식품점은 물론이고 노점상에서부터 300석의 예식홀을 갖춘 대형 레스토랑까지 있어 한국어를 모르는 고려인이라 할지라도 생활하는 데 커다란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함박마을에서 집거지를 이루며 사는 것은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에게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단순히 상호부조를 넘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고려인동포마을 형성과 성장은 함박마을의 낙후된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예컨대 지역사회가 게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인 주민과 지역 주민 간의 마찰과 갈등,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지역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간에 갈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려인동포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주하여 살 집과 자녀들의 학교 현황, 일할 수 있는 곳 등을 문의하고 입국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들은 건설 현장이나 인근의 공단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고려인동포라 하여도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사회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김포나 이천, 강화 등 먼 거리의 일용직으로 일하느라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들이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다.
현재 함박마을 인근의 초등학교에는 러시아, CIS지역에서 태어나 생활하다 한국으로 노동 이주를 택한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온 약 2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학교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고려인 차세대의 건강한 적응을 위해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를 채용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고려인 차세대들은 차별과 무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동포 학부모들은 온종일 힘든 노동일과 미숙한 한국어 탓에 자녀들의 한국학교 생활 적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공장에서 돌아온 저녁 9시 이후에 한글을 배우고 싶지만 야학을 운영하는 곳이 없어 그마저도 어려운 현실이다.
고려인 4세는 다문화가정 자녀들과 달리 지역아동센터 등을 이용할 자격조차 없어 돌봄 등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려인 자녀 영유아는 보육료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가정 보육을 직접 도맡아서 하는 가정도 있다. 보육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보육 기관과 소통의 문제에 따른 것도 존재한다. 초등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보호자 없이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고려인 영유아 자녀와 초, 중등 학생, 그리고 부모들까지 학교와 가정을 연결해주는 방과후교실과 보육시설, 그리고 고려인 성인을 위한 성인 한글 야학이 절실한 실정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잊고 있었던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내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견인한 고려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회자하고 있다. 지난 4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고려인 1세대는 모두 독립유공자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낸 고려인에 대한 경의의 표현도 포함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러시아로 통하는 철도가 연결되고, 북한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 고향을 북한에 둔 고려인들의 쓰임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고려인동포를 단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귀환자’로 맞이할 때가 되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동포는 단순히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조상의 나라, 내 조국에서 정착하려는 정주(定住)를 목적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역주민으로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고려인동포와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문화‧자활지원 프로그램 운영과 복지 네트워크 구축 등 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여 이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글 · 사진 / 박봉수(朴奉秀, Park Bong Su)
교육학박사, 디아스포라연구소 소장,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원장




“이제는 같이 꿈을 꿔야할 것 같아요.”
밴드<스탑크랙다운> 소모뚜 인터뷰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의 모습을 통해 이주노동자 현실을 바라본 영화 <안녕, 미누>가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두차례 상영되었다. 작년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희소식도 잠시, 영화 주인공이자 밴드의 리더인 미누 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애도의 글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8개월이 지난 시점에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안녕, 미누>의 상영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의 만감이 교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밴드의 베이스를 맡았던 소모뚜 씨에게 이번 영화제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소모뚜 씨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지만,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소모뚜 씨의 배려로 영화스크린 너머에 ‘스탑크랙다운’의 지나온 삶을 잠시나마 음미 해볼 수 있었다.

영화 <안녕, 미누>를 처음 보셨을 때 어떠셨는지요?
2018년 일산에서 하는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에서 미누형하고 멤버들과 함께 봤어요. 정말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미누형의 이야기를 지혜원 감독님께서 잘 전달해주시기도 했고요. 우리가 한국 땅에서 제일 소중했던 모습을 잘 담아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인생을 헛되지 않게 살았다는 만족감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어요. 15년 전 나의 모습들이니까요. 그리고 미누형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한국 땅에서 일하느라 고생했지만, 음악을 통해 이주민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요.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 이주민의 삶을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들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모뚜에게 미누형은 어떤 분이셨나요?
미누형은 영화보다 사실 더 멋진 사람이에요. 그것보다 훨씬 멋지죠. 제가 어렸을 때 음악 생활하면서 짜증을 잘 내더라도 형이 제 곁에서 잘 참아주었어요. 형도 바빴을 텐데 밴드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죠. 분위기 메이커로 잘 챙겨주었고요. 동생들에게 살뜰하게 먼저 안부를 묻는 따뜻한 형이었어요. 제가 큰아들이기 때문에 형을 원했었는데 미누형이 한국에서 큰형 역할을 했었죠. 그리고 다른 밴드 멤버들보다 미누형과 더 가까이 지냈었어요. 왜냐하면 좋아하는 음악도 같았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비슷했거든요.

이주 노동자 인권에 대해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활동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95년도에 한국에 왔고 새벽 1~2시까지 밤늦게 일하는데 야근 수당을 못 받았어요. 어렸을 때라서 야근수당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요. 젊고 힘이 세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려고 결심했지만, 내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고 착취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어요. 그래도, 대한민국은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알 수만 있다면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서 희망을 보았고요. 친구의 똑같은 아픔을 듣고 내 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투쟁하고 결국 이들도 나와 같은 대가를 받으면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죠. 게다가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함께해주는 한국인도 계시니까 점점 힘이 났죠. 미얀마 밴드 활동 할 때도 관심 있게 바라봐주셨고요.

그리고 농성장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길을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요. 음악이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어요. 왜냐하면 무대에 올라서서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거든요. 또, 우리 음악을 들으면서 춤추고 재밌어하는 한국인과 이주민을 보면 보람과 확신이 생겼고요. 음악을 통해서 다른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어요. 미누형과 둘이 생수통을 쳤던 퍼포먼스도 사람들에게 이주민에 대한 좋은 인식을 주고 공감하게 하려는 활동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함께 갈 수 있던 것 같아요.

과거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상황과 여건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 생각하는지요?
아마도요. 과거에는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받지 못해 노동부에 호소하면 산업연수생이라면서 착취를 당하거나 내쫓겼죠. 그런데 지금은 이주노동자를 인정하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도를 도입했으니 옛날보다는 법의 보호 아래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이주민들이 정보를 스스로 얻거나 선배들로부터 얻으면서 권리를 함께 찾아가고 있죠. 그러나 우리 음악의 가사처럼 여전히 월급을 받지 못한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다만, 옛날에는 대다수 이주민이 불법체류자라서 진정서를 안 냈는데, 지금은 합법적으로 일하는 이주민 수가 늘어나서 기관에 진정서를 내고 내 권리를 찾죠.

최근에는 3D 산업현장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이주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렇죠. 옛날에는 이주 노동자의 80%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숨어 사느라 다양하게 활동을 못 했어요. 우리처럼 겁 없는 친구들만 활동했죠. 현재 활동가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불법체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과거에 고통과 아픔을 받았던 사람들인 것 같아요. 지금은 옛날보다 다문화 가족도 많고 여성, 아동, 미디어등 분야에서 진정성 있게 활동하는 인심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어요.

요즘 소모뚜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요?
2009년도에 미누형이 강제로 쫓겨나면서 미누형이 맡고 있던 이주민대표방송을 2년 동안 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 이주민 노래협회 ‘몽땅’에서 활동하고 있었고요. 그러던 중에 남 밑에서 일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아서 15년 동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던 형님과 뚜라라는 친구와 같이 회사를 만들었죠. 협동조합의 형태로 회사를 설립하고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는 제 고국과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어요. 이런 취지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브더욱글로리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현재 ‘몽땅’ 활동도 같이 하시나요?
처음에는 여기에 뚜라 혼자서 일하고 저는 몽땅 활동 하면서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주 노동자들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오거나 전화를 해서 도움의 손길을 구하죠. 나중에 그들이 이곳에 와서 다시 물건도 구매해주기도 하고 노동 상담을 요청하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회사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뚜라 혼자서는 회사경영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몽땅을 그만두고 여기 들어와서 일을 시작했어요. 여기는 미얀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 음식, 핸드폰, 미얀마 식품, 항공권, 숙소 등을 제공하고 있죠. 또 미얀마 복지센터라고 해서 미얀마 연합단체가 여기 있는데 거기서 제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에 처음 온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건가요?
우리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면서 찾아내야만 알 수 있었죠. 지금은 이미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길이 있기 때문에 여기 온 친구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자기가 어떤 길을 가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았던 삶을 통해 몇 가지 주의사항과 선택사항들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모뚜는 2013년도부터 부평구에 위치한 브더욱 글로리(Padauk Glory)라는 협동조합형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브더욱은 미얀마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으로 브더욱 글로리는 ‘꽃 그늘 아래에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호’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남아있는 멤버들과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의 재결성을 꿈꾸지 않나요?
미누형이 쫓겨나간 시점이 이미 밴드 활동의 막바지였어요. 그렇지만 우리 밴드를 없애려고 형을 잡아갔다는 괘씸한 생각에 우리 셋이서 밴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죠. 하지만 미누형이 있을 때처럼 밴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미누형이 노래하고 멘트를 하면 자기 파트만 잘하면 되고 공연하는 맛도 있었어요. 사명감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인드가 옛날만큼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스탑크랙다운이 우리를 위한 밴드인지, 아니면 이주민을 위한 밴드인지에 대한 거창한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미누형이 잡혀갔을 때도 스탑크랙다운은 이주민을 위한 밴드라서 활동을 이어왔고, 미누형이 멀리서 우리의 활동을 봐주고 응원해주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2집까지 발매했었나요?
단독으로는 2집까지 냈어요. 1집은 농성장에서 불렀던 <친구여 잘가시오>와 2집<Freedom>을 2007년에 발매했어요. 그리고 박노해 선생의 「노동의 새벽」을 유명가수들과 하나씩 맡아서 참여하게 되었죠. 저는 ‘손무덤’이라는 시를 작곡하게 되었고요.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 발매한 1집 <친구여 잘가시오>, 2집<Freedom>
출처 : Mnet

스탑크랙다운의 노래를 대부분 작곡 하셨잖아요.
작곡은 제가 했고 노랫말은 미누형과 같이 썼어요. 일과 공연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이 없었는데 2집은 내야겠다고 생각했었죠. 당시 벌어들였던 수익금을 개인이 쓰지 않고 대부분 앨범 작업과 활동비에 보탰어요. 일하는 내내 노래 만들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사장님 눈치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쪽지에 적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핸드폰에 녹음했죠. 집에 돌아와서는 기타 치면서 작곡하고, 새벽 2~3시에 미싱 파일로 멤버들에게 메일을 보냈고요. 그러면 멤버들이 자기 파트를 수정하고 저한테 다시 보내죠. 저도 다시 수정하고 완성해서 멤버들에게 확인받으면 그다음 날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바로 녹음했던 기억이 나요.

10년 전 인터뷰에서는 음악을 소통이라고 대답해주셨어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럼요. 음악 자체가 소통이에요. 우리가 말로 10분 이야기하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잖아요. 집중력도 떨어지고요.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아요. 음악은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저희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다행이고, 음악을 통해서 활동했던 것도 잘 선택한 일인 것 같아요.

관객들이 영화 <안녕, 미누>를 어떻게 보셨으면 좋겠나요?
제 감정을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많이 보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 땅에서 일만 하는 기계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한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다문화사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나름 함께 한몫하면서 같이 살아왔다는 것을 한국 분들이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서로 고마움을 느끼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주민도 각자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 오고 있지만, 한국도 이주민 없이 한국 사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거예요. 앞으로도 만날 일이 많을 텐데, 서로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모뚜님이 한국에서 원하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꿈이라는 것을 같이 이루어야 할 것 같아요. 옛날에는 혼자 꿈을 꾼 것 같아요. 이제는 꿈도 같이 꿔야 재밌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옛날에는 자신의 목표만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잖아요. 이곳에 정착해서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풍족하게 살고 싶고, 가족들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아요. 근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같이 꿈을 꾸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각자 길을 가면 서로 만나기가 어렵고 힘이 될 수 없어요. 한국에 오는 이주민의 꿈이 내 꿈과 전혀 다르지 않아요. 나도 그들도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같이 꾸고 싶어요.
미얀마복지센터를 설립한 이유도 그들과 같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예요. 내가 그들을 지원하고, 보호해주고, 내 삶의 경험을 나누면 때문에 이분들도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보답하죠. 그러면 어느새 제 꿈도 쟁취하는 거예요. 꿈을 같이 꾼다는 것은 이런 거죠.

인터뷰 진행 · 정리 /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 김가영




인천역사서포터즈! 강화의 역사유산을 만나다

올 한해 인천역사와 문화유산을 비롯하여 인천역사문화센터 사업을 시민에게 소개하는 <인천역사서포터즈>가 지난 5월 18일에 강화도로 전체답사를 떠났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강화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바로 연미정이다.

연미정 입구

오늘 깊이 있는 답사를 위해 인천문화재단 정민섭 연구원이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월곶돈대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불린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연미정 해설

널리 알려진 이야기뿐만 아니라, 서포터즈가 알지 못할법한 이곳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화에서 가장 먼저 이방인과 마주한 지역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오페르트’ 인물과 얽혀있다.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중국 상해에서 상업하다가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통상 수교를 목적으로 조선 해안가에 접근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이 연미정 부근이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억하며 다음 목적지인 성공회강화성당에 이동하였다.

성공회강화성당

성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친숙한 한옥의 모습으로 맞이한 성공회성당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불교사찰 형태의 모습을 띤 성당의 외관에는 보리수나무가 있고 향교 등 유교 문화재에서 흔히 보는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당시 낯선 서양의 종교가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 우리나라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과 정성이 느껴졌다.

삼도직물 터

점심을 먹기 직전 공터에 번듯하게 서 있는 굴뚝을 지나칠 수 없었다. 바로 옛 직물공장이었던 삼도직물 터의 흔적을 만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근대 강화는 자그마치 60여 개의 공장이 모여 있을 정도로 직물 산업이 융성하였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기록한 소창체험관이 자리하고 그 업을 이어 가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가릉과 강화능내리석실분 가는 길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강화지역의 남쪽으로 이동하면 고려왕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가릉과 능내리석실분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푸르른 숲을 조금 올라가면 그곳을 만나게 된다.

강화능내리석실분

이곳은 강화에서도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려시대 묘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힌 구조와 축조 방법을 통해 향후 고려시대 묘제에 대한 복원·정비에 많은 기초자료가 되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분오리돈대

마지막으로 강화의 시원한 해변이 보이는 곳으로 향하였는데, 동막해변 부근에 위치한 분오리돈대이다.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는 강화의 해양관방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민섭 연구원의 해설을 통해 들은 분오리돈대의 가치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분오리돈대

돈대 위에 올라가 자연경치를 바라보니 사방이 널찍하고 옆에 해변은 썰물 때 갯벌로 되어 적이 상륙하기 어려운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는 자연 그대로 어우러져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하는 것들이 많은데 이곳 또한 그 점이 단연 돋보였다. 이렇게 인천역사서포터즈 답사에 함께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강화의 문화유산에 대해 많이 알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런 소중한 이야기를 더 많은 시민이 알 수 있도록 서포터즈가 노력할 거라 확신하며 역사 도시로서 인천의 문화적 가치의 저력을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 제2기 인천역사 서포터즈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며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에 더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돈대에서 바라본 전경

글 · 사진 / 이정민(시민기자단)




방법으로서의 디아스포라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전시 패러다임은 급진적 전환의 시기를 맞이한다. 미술시장을 점령한 유명작가와 유파주의 일색의 전시 문화가 변화를 겪게 된 원인은 아무래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 해체에 따른 냉전주의 종식과 맞물려 있다. 이와 더불어 탈식민주의 연구가 가속화되면서 착종된 식민지 문화에 의하여 나타난 혼종성과 다양성의 현상을 국가와 개인, 거시사와 미시사의 관계를 탐색하는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근대 식민주의의 바탕인 서구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을 존재론적 관점보다 사회문화역사적인 관점으로 형성된 실존으로서의 해석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즉 포스트모던 세계로의 이행은 개인이란 존재가 구성되는 조건과 환경이 혈연과 지연에 제한되지 않고 개인, 국가, 민족, 역사, 세계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적 자각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시는 서구를 중심으로 한 국제 모더니즘 미학을 따르고 있었다. 서구는 미술을 통해서도 동양을 타자의 세계로 남겨두고 미술이 서양의 전유물이라는 또 다른 관념을 끊임없이 생산-재생산하였다. 여전히 미술사와 미학, 그리고 예술가 모두 주로 서구남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탈식민주의 연구의 등장은 인문학계뿐만 아니라 미술 지형도에도 지각 변동을 예약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시는 국가, 지역, 매체와 장르, 작가의 유명세에 따라 공간을 분할하거나 서열에 따른 배치가 수두룩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시기획의 이면에는 여전히 서양 백인 남성작가라는 기표는 기념비적 삶과 사상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문화연구로, 이어서 문화예술현장으로 확장되었다. 드디어 전시라는 영역이 오랜 관습을 재현하는 정치학이 아니라 당대를 비평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말할 수 없었던 타자들에게 말을 할 권리를 제공하는 담론의 장으로 펼쳐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전시가 시대성을 담는다는 의미는 완성된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구축되고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미학적 정치성의 발견’을 예견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다룬 당대 전시들이 처음부터 문화적 차이를 정당하게 제시한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대지의 마법사”(1989, 퐁피두센터)란 전시는 아프리카 작가들을 백인 작가들과 동등하게 초청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작가로서의 등가를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서구미술을 진보적인 것으로, 아프리카 미술을 민속적인 것의 영역에 가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탈식민주의 개념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은 이후 많은 국제적 규모의 적지 않은 전시에서도 목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마법사들이 열린 지 30년이 지난 현재, 전 지구화 시대의 시각예술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를 내재한 사회운동의 성격이 탑재된 문화적 산물로 성장하였다. 지난해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가 주목한 것도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분할된 국경과 국가주의가 세계화와 디지털 기반 (영상)문화에 의하여 어떻게 재편되고 번역되는지를 다뤘다는 점만 보아도 19세기 말 제국주의 식민정책 이후의 점점 더 가속화된 식별 불가능하게 변하는 세계 지형도는 전보다도 더 섬세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임에 분명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와 발맞춰 열린 인천아트플랫폼의 기획전 <태양을 넘어서>(2019)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인천이라는 장소가 가진 정치지리학적 의미를 박물관학의 차원이 아닌 한국의 동시대 미술가들이 경험하고 바라보는 이산(離散)이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웠다.

전시는 총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러시아 레핀미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고려인 변월룡의 회화와 서한으로 채워졌고 2부는 디아스포라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하고 번역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으로 이뤄졌다. 우선 1부 “고국으로의 귀환”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1916~1990)이 1954~55년에 평양미술학교로 파견을 나가 된 덕택에 경험한 2년간 모국에서의 삶과 그리움을 주목하고 있다. 평양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변월룡은 다시 평양에 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데올로그의 경계에서 모진 그리움만으로는 국가체제를 초극할 수 없는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한다. 당시의 그리움은 이후 기억 속의 평양을 다시 화폭으로 소환되어 이중의 디아스포라로 체현된다. 게다가 남북분단의 현실은 어느 국가도 선택할 수 없는 삼중의 디아스포라가 되어 그의 절망감을 배가시킨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인물화와 달리 그리움과 체념을 담아 기억의 풍경을 그린 “평양재건”(1953)과 같은 작품에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인상주의적 붓질로 조국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담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지인들과 교류한 편지에는 돌아가고 싶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달리 되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안타까운 입장과 고국에 대한 애정이 잘 담겨 있다. 2부 “부유하는 태양”에서는 김기라, 임흥순, 이수영, 가나자와 수미 등 국내외 작가 8명이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단연 가나자와 수미의 작업이 돋보였다. 그는 “Number-가족”(2012년)에서 폐지된 외국인 등록법 이전에 부여받았던 자신의 외국인등록번호 “B176404263”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번호를 외국인 증명서류 위에 계속해서 적어 내려간다. 마치 폴란드계 프랑스 작가 로만 오팔카의 숫자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오팔카 역시 디아스포라의 삶을 작업의 배면으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숫자는 매우 실존주의적 의미를 품고 있다. 이에 비하여 가나자와는 제도가 개인을 식별하는 법질서 내부의 존재방식을 질문한다. 이수영은 이주민의 고향과 같은 서울 가리봉동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양꼬치 식당에서의 맛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작가는 디아스포라의 원 의미를 새롭게 재배치한다. 그것은 이방인의 삶의 궤적을 좇는 행위이자 또 다른 관점에서는 자신이 처음 만난 감각적 세계의 원천을 찾아 떠나는 시원으로의 여정으로도 볼 수 있다. 온갖 임시방편의 장치들을 몸에 장착하고 떠난 그의 여행은 고행과 여행, 고통과 유희가 공존한다.

디아스포라는 근대가 열리면서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 나누기,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과열 현상으로 자신의 땅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만 한 이산의 상태를 일컫는다. 산파, 산종, 이산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유목인으로 사는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했으나, 현재는 근대 이후 모국이 아닌 타 문화권에 거주하는 모든 이산자와 이산 문화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된다. 특히 인천은 개항지이자 하와이와 멕시코 노동이민이 시작된 장소이기에 디아스포라와는 어쩔 수 없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를 이슈로 하는 주제전으로써 <태양을 넘어서>는 이미 시작 전부터 한계를 가지고 제작된 전시다. 아무래도 인천아트플랫폼의 정체성이 작가들의 창작공간이기에 규모가 있는 주제전시를 자체 제작하기엔 시스템의 공백이 없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여러 관점으로 유의미하다. 첫째, 인천시립미술관 설립이 예정된 상황에서 인천의 정체성과 연계하여 지역미술거점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 둘째, 인천아트플랫폼의 지정학적 장점을 활용하여 디아스포라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래밍과 활동의 잠재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한국의 창작스튜디오 대부분이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인천아트플랫폼이 새로운 운영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레지던시의 연구 기능, 교육을 비롯한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전문가, 비전문가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전시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바람을 갖게 해준다.

 
변월룡, <아내와 아들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0×74.5㎝, 1951
  변월룡, <소나무가 있는 풍경>,
캔버스에 유채, 59.5×97㎝, 1954

김기라, <이념의 무게_북쪽으로 보내는 서한들_수취인 불명_황해>,
단채널 비디오, 10분, 2013

김수미, <Number-가족>,
외국인 등록 원표 기재 사항 증명서, 외국인 등록 번호, 노트, 편지, 가변설치, 2019

민성홍, <연속된 울타리: 벽지>,
볼펜, 벽지에 목탄가루, 수집된 오브제, 세라믹, 나무구슬에 채색, 가변설치, 2018


정현(Hyun Jung): 미술비평가, 독립전시기획자로 활동한다. 비평활동을 하나의 배움의 과정으로 여기면서 글쓰기를 실천하고자 한다. 미술비평, 시각문화, 전시기획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란 질문으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려 애쓴다. “이상뒤샹”(2013), “그다음 몸”(2016)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큐레토리얼 비평 실천”(현실문화 2014), Art Cities of the Future: 21st century Avant-Gardes, (Phaidon, 2013) 등의 공저가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민기자단의 눈으로 본 디아스포라 영화제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사이를 잇는
2019. 05.14(금)-05.28(화)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아트플랫폼 일대

주최 : 인천광역시
주관 : 인천광역시영상위원회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 한중문화관, 한국영상자료원
협찬 : 프룻오브더룸, 화이트진로, 케이슨24, (주)일화
협력 : 유엔난민기구, 인천대학교, 경인일보, 알라딘

영상 김유라, 장유하 시민기자단




제 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스케치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디아스포라 영화제 속 아카데미: 난민인권운동의 작은이정표

<아카데미장소 입구>

제7회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지난 24일부터 28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됐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를 내세운 영화제는 정치적, 문화적 소수를 아우르며 다름의 가치를 성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벌써 7회를 맞이했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영화제를 알게 되었고, 올해 처음 영화제에 방문했다. 사실 나는 영화 보는 것보다도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들어 보고 싶었다.
과거의 나는 ‘국제앰네스티’라는 인권단체에서 펀드레이저 활동을 했었다. 당시에는 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활동을 지지해달라 시민들에게 호소했지만, 막상 작년 제주도 예멘 난민수용에 대해 사람들의 찬/반이 양분화되었을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되기도 했다. 늘 난민은 보호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우리나라 안에서 많은 난민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난민 인권운동’이라는 단어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난민’도 ‘인권’도 성인들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어인데 청소년교육프로그램이라니 의외였다.

<토크쇼 장소>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김세진 공익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란 소년 김민혁군과 그를 도왔던 친구들 박지민군, 최현준군에게 질문하면 그들이 답변하는 토크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민혁군은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의 주인공으로 민혁군의 중학교 친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신의 학급 친구를 공정한 심사를 통해 난민으로 인정해달라는 글을 올리면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청원문에 따르면 민혁군이 천주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며, 한국의 난민법에 따라 정당한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에도 난민 신청은 기각되었다고 했다. 이후 다른 친구들 또한 난민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난민 문제를 계속 알렸고, 돌아가면서 릴레이 시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민혁군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수개월이 지나고 결국 법무부는 민혁군의 난민 지위를 인정했고 민혁군은 현재 최초의 난민 패션모델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난민’이라고 하면 전쟁을 피해 이동하는 ‘피난민’을 생각하는데, 그 외에도 난민에는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자국을 벗어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포괄되어 있다. 이란의 경우, 태어남과 동시에 무슬림이라는 종교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갖게 되는데 이란 형법상 개종하는 자를 배교자로 지칭하며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민혁군은 한국에 살면서 천주교로 개종했고, 이로 인해 본국에 돌아가면 생명을 잃을 수 있으므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고 인정을 받아 난민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김세진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난민 인정률이 약 3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1994년~2017년까지 난민 인정자가 약 800명 정도 되는데, 신청자 수를 고려하면 1.5%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일까? 민혁군에 이야기에 따르면, 난민신청제도 자체가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서류를 준비하려고 해도 요청하는 서류들이 본국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서류 확인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유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민혁군은 개종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유였는데, 처음 인터뷰를 준비할 때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해서 정말 준비 없이 갔다가, 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부분이나 십계명,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 등 갑작스러운 질문에 답변하지 못해서 반려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닌 이상 일반 성인도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중학생인 민혁군이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청이 반려됐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신청문제뿐만 아니었다. 현재 민혁군은 난민의 지위를 어렵게 인정받았지만, 청소년증이 발급되지 않고, 은행거래는 물론이고 핸드폰조차 본인 명의로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민혁군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직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추방의 위험을 느끼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민혁군의 사례는 널리 알려져서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난민이 제대로 된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체적인 여론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하고, 난민수용에 대한 반대가 대다수를 이룬다. 김세진 변호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을 때도 반대하는 악플이 달리거나 없었던 이야기를 지어내서 마치 사실인 양 뿌려지는 가짜뉴스들로 인해 편견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함께 노력했던 것은 내 곁에 있는 나의 ‘친구’의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는데, 한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대세가 옳은 것은 아니에요. 대세를 꼭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그것이 옳은 일인가? 정의로운 일인가? 생각하면 좋겠어요.”

지금도 저 문장은 나의 마음속을 맴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객관적인 위치에서 문제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난민문제도 그렇다. 대다수 사람이 말하는 것,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휩쓸려 그 의견에 옹호할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뒤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보통 영화제라고 하면 영화만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아카데미나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좋았다. 또한 프로그램별 주제가 있고, 사람들에게 조금 더 쉽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어서 아카데미 참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지면 지금보다 더욱 의미 있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지연




제 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스케치 ‘디아스포라의 눈’

디아스포라 영화제 그리고 ‘겟아웃’으로 본 블랙 디아스포라

다양한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프로그램 중, 나에게 아직은 다소 낯설고 어려운 ’디아스포라‘ 개념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해 줄 프로그램 <디아스포라의 눈>에 참여하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은 한국 현대미술의 작가와 프로그램 참여자가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영화를 보고 이주민이나 소수자가 보고 있는 세계와 삶,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다.

5월 26일 일요일에 한중문학관 4층에서 진행된 <디아스포라의 눈>에서는 영화 ’겟아웃‘을 보고 이 영화에서 다뤄진 디아스포라에 대해 토크쇼 진행자와 행사 참석자가 이야기를 나눴다.’겟아웃‘은 흑인 디아스포라(중세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노예로 팔려나간 흑인 또는 그들의 삶)를 다룬 영화이며, 객원 프로그래머로 김아영 현대미술 작가가 자리하였다. 김아영 작가는 상영 후 토크 시간에 흑인 디아스포라, 포스트휴먼, 아프로퓨처리즘에 대한 논제와 사례를 중심으로 담론을 진행하였다.

# 목화솜
영화의 주인공인 흑인 크리스가 백인의 집에 있는 목화솜으로 자신의 귀를 막은 덕분에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크리스에게 도움이 된 물품으로 ’목화솜‘을 사용한 데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과거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던 시절, 백인들은 다량의 목화솜을 채취하기 위해 흑인들의 노동을 착취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이 이 목화솜을 백인 제레미에게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아영 작가는 이 장면이 ’흑인이 백인에게 목화솜을 던짐으로써 모멸감을 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술의 융합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인간상’을 뜻하는 단어이다. 김아영 작가는 포스트휴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느 흑인 학자의 글을 언급하였다.
‘포스트휴먼을 다룬 담론에서 단 한 번도 인종의 문제가 고려된 적이 없다. 모든 과학 기술의 발전은 큰 자본과 권력 주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확산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항상 백인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포스트휴먼 또한 백인에 의해 규범화된 인간으로 개조되는 것을 지향점으로 다뤄진다. 흑인은 규범화된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배제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아프로퓨처리즘
‘아프로퓨처리즘’은 미국에 있는 흑인들이 아프리카 문화를 선진 기술과 융합하여 탐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문화이다. 즉,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었던 흑인이 그 끔찍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상상과 사변의 결과물이다.
아프로퓨처리즘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은 주로 흑인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로 설정한다. 또한,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장소로는 억압과 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이 아닌 제3의 가상 공간을 설정한다. 아프로퓨처리즘을 구현한 대표 예술작품으로 마블 영화 ‘블랙펜서’가 있다. 블랙펜서는 아프리카의 실존 부족의 전통을 기반으로 아프로퓨처리즘을 멋지게 구현하였으며, 올해 초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3개의 상을 받았다.

흑인들은 차별받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를 활용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진화한 모습을 띤 포스트휴먼은 흑인의 형상이 배제되고 있다. 이는 지금도 세상에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김아영 작가가 본인이 바라본 흑인의 삶과 이야기를 대변해준 덕분에,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흑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디아스포라의 눈>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차가운 시선에 대한 문제를 사유해보는 자리였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다솔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인천광역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지난 5월 25일 토요일, 이날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 상영 행사에 참석했다.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는 무료이기 때문에 티켓 부스에 가서 표를 받을 수 있다. 표를 받고 난 뒤, 설레는 마음으로 상영관으로 향했다.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불이 꺼지면서 흰 스크린에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와일드니스’는 라틴계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사회는 그들을 혐오하고,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실버 플래터 클럽바 안에서만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곳은 그들이 지켜내야 하는 장소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각자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마치 그들과 내가 실제로 마주하듯 말이다. 아무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 표정만으로도 그들이 집단에 대한 소속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이 인상 깊게 느낄만한 요소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상영이 끝나고, 현대미술 정은영 작가와의 토크쇼가 시작되었다. 작가는 관객에게 작품 해석과 그녀의 견해를 들려주었다. 토크쇼 맨 마지막에는 관객이 작가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진다. 작품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대한 궁금증까지 풀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현대미술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인간이 예술의 중심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 ‘와일드 니스’를 제작한 우창 감독은 자신이 밀접하게 경험한 퀴어 공동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존 미술이 가지고 있었던 장르성을 벗어난 충격적인 시도가 된 것이다
.
끝으로 정은영 아티스트는 디아스포라와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했다.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고향 집단에서 배제된 순간부터 새로운 디아스포라 영역에 속한 것처럼 우리가 사회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서 항상 논제 거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였다. 다수의 관객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고 보고 느낀 것을 함께 공유해보는 시간이었다.

토크쇼가 끝나고 디아스포라, 즉 민족 단위에서 결여된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어서 내가 속한 집단 속에서 확고한 마음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주제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방문객에게 의미 있는 축제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다혜




[큐레이션 콕콕] 인천의 벽화

벽화. 시멘트벽에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범죄율이 줄어들고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띱니다.

“풋풋한 청춘의 ‘생얼’은 계속될 수 없다. 파운데이션, 파우더, 아이섀도, 립스틱……. 구불구불한 골목에 색조 화장을 한 벽화가 길게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은 늙는다. 잡티로 거뭇해진 낡은 담벼락에 붓 터치를 한다. 다크서클 같은 어두운 골목에 색이 들어오면 마을 곳곳에 빛이 든다.”

유동현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의 말입니다.

인천에도 저마다 특징을 가진 벽화마을이 있습니다. 송월동 동화마을, 배다리 헌책방거리, 열우물 벽화마을, 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거리, 노적산 호미마을 등이 대표적이죠.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
출처 : 아시아투데이
  중구 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거리
출처 : 연합뉴스
 
동구 배다리 헌책방거리
출처 : 조선일보
  동구 창영동
출처 : Daum카페(homihomicafe)

호미마을에는 낡은 골목과 지저분한 빈터를 호미질해서 생기를 넣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호미질’은 벽화 그리기로 시작했죠. 봉사자와 주민의 손길이 만나 퍼즐 맞추듯 담장을 채웠습니다. 열우물은 마을에 열 개의 우물이 있어 열우물(十井), 또는 십정리라고 하기도 하고 추위에도 얼지 않는 큰 대동 우물이 있어 열(熱)우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열우물 마을의 벽화 역사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닥친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5년부터 십정동에 거주하던 이진우 ‘거리의 미술’ 대표가 동네를 환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작했죠. 2002년 열우물 프로젝트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뒤 수차례 중단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벽화 그리기는 최근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우물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합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2016), SBS 드라마 ‘가면’(2015) 등에 모습을 보였죠. 하루아침에 인기 여행지가 돼 주말이면 나들이객과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몰려왔습니다. ‘한류 열풍’에 중국인 관광객도 모습을 보였고요.

 
평구 십정동 열우물 벽화마을
출처 : 한국일보
  오는 6월 18일까지 동구 만석동 우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이진우 작가 연작
출처 : 경인일보

문학산 끝자락에 위치한 호미마을은 1950년대에 한국전쟁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1960년대 동양제철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활성화됐습니다. 인천 화학공업의 중심지였고 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송도역을 품고 있었죠. 덕분에 마을은 언제나 왁자지껄했습니다. 하지만 화학공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공해와 소음으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동양제철화학 공장이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골목에 버려진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중 텔레비전에서 ‘게릴라 가드닝’이란 걸 접하게 되었어요. 낙후된 동네를 찾아다니며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화단을 만들더라고요. 직접 실천해보니 놀랍게도 화단을 만든 후 쓰레기 불법 투기가 줄었어요. 골목이 깨끗해지고, 화단에 예쁜 꽃들이 피니까 곰팡이로 뒤덮여 시커메진 담장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벽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너무 밋밋한 거예요. 비영리봉사단체인 네오맨벽화사업단과 함께 벽화를 그렸죠. 예전에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마을에 도깨비가 나온다고 아이들의 출입을 막기도 했는데 벽화가 생긴 이후에는 철마다 아이들 손 붙잡고 산책 오기도 해요.”
노적산 호미마을 대표로 활동하는 유현자 씨의 이야기입니다.

 

미추홀구 노적산 호미마을
출처 : 미디어인천신문

벽화 사업이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촬영 소품으로 쓴다고 화분과 의자를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거나 허락 없이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스태프라고 소개하기에 커피를 외상으로 주었는데 알고 보니 도둑이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열우물 마을의 주민은 촬영 협조 차원으로 받은 적은 돈 때문에 이웃끼리 원수가 된 경우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가수 겸 배우 박유천(33) 씨가 구속되면서 그의 이름을 딴 ‘박유천 벚꽃길’이 철거됐습니다. 지난 4월 말, 계양봉사단은 계양구 서부천에 조성된 280m 길이의 박유천 벚꽃길 벽화, 안내판, 명패 등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박유천 보고 싶다’ 등의 글과 그의 모습을 담은 벽화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인터뷰 내용, 드라마 대사, SNS의 언급을 담은 34개 명패도 모두 없앴습니다. 계양봉사단은 2013년에 박씨 팬클럽 ‘블레싱유천’에서 550만원을 기부받아 벚꽃길을 조성했었죠.

출처:연합뉴스

깜짝 놀랄 만한 소식도 있습니다.
인천 내항의 사일로 시설이 2019년 독일 ‘아이에프 디자인 어워드(iF Design Award)’에서 본상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아름다운 공장 프로젝트’ 본상 수상에 이어 2년 연속 상을 받은 겁니다. 독일 아이에프(iF) 디자인 어워드는 미국의 IDEA, 독일의 REDDOT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데, 올해는 52개국에서 6400여 개의 출품작을 제출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사일로 슈퍼그래픽은 1979년 인천 중구 월미도에 건립된 곡물 저장고(사일로·Silo)를 도시 랜드마크로 탈바꿈하고자 추진된 사업입니다. 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지난해 1월 총예산 5억5000여만 원을 투입해 곡물 저장고에 높이 48m, 길이 168m, 폭 31.5m의 크기의 초대형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벽화 전체 도색 면적은 2만 5000㎡로 축구장 4배 규모이고, 벽화 제작에 무려 86만 5400리터의 페인트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지난해 11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는데 이전 기록인 미국 콜로라도 푸에블로 제방 프로젝트(1만 6554㎡)보다 8446㎡ 정도(1.4배) 더 크다고 전해집니다.

사일로 디자인은 한 소년이 물과 밀을 가지고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순수한 유년 시절을 지나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계절의 흐름으로 표현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북 커버에 그리고 성장 과정을 의미하는 문구가 16권의 책 제목으로 디자인됐습니다. 100일 정도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고 하네요.

 

인천 내항 사일로
출처 : 위키트리

글·이미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인천항 곡물저장고 벽화, 2년 연속 ‘iF 디자인’ 본상 수상
인천투데이, 2019.3.1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인천항 곡물 저장고 벽화, 미국 제치고 세계 최대 벽화 기네스북에 등재
매일경제, 2018.12.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예쁜 골목벽화…아이들과 산책하는 동네 됐어요”
인천시 인터넷신문I-View, 2019.5.2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응팔 촬영지라 부럽다고?…동물원 원숭이 된 기분”
한국일보, 2015.12.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웹툰·갤러리] 골목 벽화 색즉시공
인천시 인터넷신문I-View, 2019.5.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