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려면 – 부평 캠프마켓 반환 이후 향방에 대하여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평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미군기지 ‘캠프마켓’이 지난 12월 11일 반환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반환 논의가 있던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날의 ‘즉시 반환’이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2010년대 들어서 토양 오염 등의 문제에 대한 협의가 지연되면서 반환 예상 시점이 계속 미뤄졌던 것도 이런 비현실적인 느낌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부평 군부대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조병창은 당시 일본 본토를 제외하면 조선과 만주국 내의 단 두 곳에만 존재했는데, 부평의 조병창이 그중 하나입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이 공간은 규모의 크고 작음이 달라졌을 뿐, 자연스레 주한미군과 그와 관련된 국군의 시설이 모인 곳이 되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군부대는 조금씩 침식되었으나 사라지지는 않고, 도시 한가운데에 마치 섬처럼 남았습니다. 수십 년 전 일부는 산곡동의 고층아파트로 변했습니다. 1997년에는 캠프마켓 건너편에 있던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2002년까지 조성공사를 거쳐 부평공원이 만들어졌고, 같은 시기 캠프마켓이 규모를 축소하면서 일부 영역이 반환되어 부영공원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캠프마켓은 송도 센트럴파크보다도 넓은 13만 평 정도의 규모입니다. 인천에서 포화되고 오래된 도시의 숨을 틔게 할 넓은 공공 공간으로 변모 가능한 곳은, 섬과 같이 존재하는 이 캠프마켓밖에 없다는 인식이 1990년대부터 시작된 기지 반환에 관련한 주장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2월 11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캠프마켓 반환 기자회견
출처: 인천시 인터넷방송 홈페이지 (자세한내용 보러가기▶)

캠프마켓 반환 후 이 공간은 대규모 도심 공원이 되는 것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습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산 이외에 도심 녹지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대규모 공원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공원이 만들어진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간석오거리에서 인천 터미널에 이르는 중앙공원이 조성된 것이 이즈음입니다. 서울에서는 여의도 광장을 여의도 공원으로 바꿨고, 선유도 공원과 서울숲, 드림랜드가 문을 닫은 자리에 조성된 북서울 꿈의 숲이 연달아 만들어진 때이기도 합니다.

대도시 안에 있는 미군기지의 활용은 대체로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됩니다. 용산 등 다른 대도시 내의 군기지에 대한 논의도 대규모 녹지 조성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도 틀린 것도 아니며, 부평공원과 부영공원이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캠프마켓 이후에 들어설 공간도 훌륭한 도심 공원이 되어 인천 북쪽 시민들의 삶의 질에 큰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저 공원을 만드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떤’ 공원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더 궁금해하고, 더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온통 나무와 물과 산책로만 있기엔 이곳은 너무 넓고, 인천 도심에서 찾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빈 공간입니다. 이 공원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할지, 어떤 공간을 품었을 때 시민들의 만족감이 더 높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어렵사리 확보한 공간을 헛되지 않고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시민사회 곳곳에서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캠프마켓의 건물 중 일부가 유일하게 일제시대 조병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박물관 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50년대 대중가요가 미군기지 주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점을 근거로 들어 대중음악과 관련된 대중음악 자료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 인천시 의료원을 확대하는 데에 이용되어야 한다거나, 시민들을 위한 평생교육원을 건립해야 한다고 의견도 있습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인천의 부족한 문화예술 시설을 이유로 들며 시립미술관이 부평에도 하나 더 지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대시설이 잘 갖춰진 사회인 야구장이 늘었으면 할 테고, 또 누군가는 유소년 축구클럽을 위한 운동장을 기대할 것입니다. 자전거 하이킹 코스나 애견 동반 놀이터를 바라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인천시는 대략적으로 공원에 대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지난 2014년 주민 공람을 거쳐 2015년 1월 최초로 고시한 내용에서는 이곳을 ‘신촌공원’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녹지 공간을 위주로 일부 체육시설을 조성하고, 용도를 정확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23개 동의 1층짜리 벽돌 건물의 ‘교양시설’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9년 5월 변경된 조서에서는 이 ‘교양시설’이 49개 동으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캠프마켓에 남아있는 건물들의 역사성을 고려해서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되, 이 안을 어떤 것들로 채워 나갈지는 앞으로 고민할 부분으로 남겨 놓은 듯합니다.

시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위해서 인천시와 부평구의 공직자 및 연구자들은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용산이 그랬듯 설계 공모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 인천시 스스로도 시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며 ‘슬로 시티 프로세스’ 방식을 취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삶에 연결되는, 더 나은 공공 공간을 상상하고 만드는 몫은 이제 시민들의 손에 넘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서울시에서 개최된 ‘새로운 광화문 광장 조성’ 2차 토론회 모습
출처: 다산콜센터 네이버 블로그 (자세한내용 보러가기▶)

저는 몇 차례 글을 통해서 이 땅의 미래를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캠프마켓의 미래를 만드는 과정은 지역 정치와 거버넌스의 실험장이자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시민으로부터의 도시계획’을 그리 믿지 않습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오래전부터 행정가와 전문가들이 지역에 필요한 공공 공간을 연구하고 조사합니다. 그렇지만 공공 공간을 마련하기 전 열리는 몇 번의 세미나나 토론회, 공청회는 대체로 잘 홍보되지 않고, 대부분 평일 낮에 열려서 참석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이전부터 지극히 관심이 높던 사람들 일부가 빅마우스의 역할을 하고, 대다수의 시민은 다 건설되고 나면 그냥저냥 큰 만족도 불만도 없이 공공 공간을 이용합니다.

공공이 떠맡아야 하는 역할이 무겁지만, 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도록 공유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계획을 검토·수정하며, 이렇게 시민들과 정말로 함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지역 언론은 지속적으로 인천 시민사회 곳곳에서 어떤 공공 공간을 원하는지 발굴하는 등, 캠프마켓이 반짝 이슈로 머물지 않게 사람들의 관심을 북돋아 주었으면 합니다. 약간의 농담이 섞인 이야기입니다만, 어쩌면 정말로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주변의 산 및 이미 조성된 공원과 연결된 녹지나 체육시설, 박물관이 아니라, 서울 동부권역 혹은 경기 동부권역까지 가지 않아도 도심 안에서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일 수도 있습니다. “인천시는 공원을 만들려 합니다. 어떤 공원이 좋을까요?”보다는 “인천 시민은 이 자리에 어떤 공간을 원하시나요?”가 더 나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더 소모되는 질문이지만, 저는 여러 번 그 지난한 과정이 오늘날의 도시계획에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여 년 전 ‘마을 만들기’가 도입되던 때부터, 시민들이 원하는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제도적 방법들이 마련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운영하는 행정가들의 조바심으로, 때로는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많은 제도들이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작은 성과들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으나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캠프마켓은 주한미군의 손을 떠났지만, 아직 토지 정화의 문제가 남아있고, 당장 빵 공장이 문을 닫는 시점은 내년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직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캠프마켓이 정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시민이 잘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시민이 스스로 쌓아 올려서 만든 공간’이어야 합니다.

글 /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건축사)

참고문헌

전갑생(2016). 한국전쟁기 인천의 미군기지와 전쟁포로수용소. 황해문화
심주영(2017). 용산미군기지 공원화 과정의 도시담론 분석. 한국도시설계학회지 도시설계, 18(5)
전대욱,허훈(2015). 미군 반환기지의 특성과 통일대비 활용방안. 한국정책연구, 15(1)
인천광역시보 제1445호. (2015. 1. 26.) 인천광역시청
인천광역시보 제1742호. (2019. 5. 7.) 인천광역시청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의 김훈종, 이승훈, 이재익 PD와 함께한 ‘한국영화 100년, 인생영화를 말하다!’

[출처]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

올해 가장 화제가 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제72회 칸영화제에서 대상격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한국영화의 저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이 쾌거는 한국영화 100주년이라는 시점에서 그간 이뤄온 한국영화 100년 역사를 자양분 삼아 한국영화의 문을 새롭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12월 12일 인천문화재단은 송도 트라이보울 공연장에서 겨울특강 ‘한국영화 100년, 인생영화를 말하다!’를 개최했다. 인천시민문화대학 하늬바람의 일환으로 진행한 이번 특강은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의 김훈종 PD가 진행을 맡았다. 그는 이승훈, 이재익 PD와 함께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각자의 인생영화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BS방송국 3명의 PD는 8년간의 팟캐스트 방송에서 쌓은 유쾌하고 노련한 입담으로 자신들이 겪었던 영화현장에서의 다양한 곡절과 사연들을 전하였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은 시점에서 지금 우리 시대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자리였다.

‘펭수’와 ‘마블’과 ‘BTS’, 하나의 세계관으로써 당당히 주류로 서다
먼저 이승훈 PD는 ‘펭수’와 ‘마블’과 ‘BTS’ 주제로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이들을 이야기하기 전 2018년 힙합경연프로그램 <쇼미더머니777>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가수 ‘마미손’에 대한 언급을 먼저 했다. 얼굴에 핫핑크 복면을 쓰고 참가자로 나온 그는 가린 얼굴에도 감출 수 없는 특유의 랩핑으로 이전 시즌에서 심사위원과 같은 프로듀서로서 참가한 또 다른 랩퍼 ‘매드크라운’을 떠올리게 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마미손과 매드크라운 둘만은 서로 절대 같은 인물이 아니라며 부인했고 이 둘은 각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결국 음악시상식 <2018 MAMA>에서는 이 두 인물에게 서로 다른 대기실까지 주었는데 이승훈 PD는 이 결정에 담긴 의미에 강하게 주목하였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마미손과 매드크라운이 비록 같은 동일인일지라도 이들의 서로 다른 ‘세계관’을 별개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우스운 이야기 취급이 아닌 하나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인형 탈을 쓴 사람으로서가 아닌 남극에서 온 펭귄인 ‘펭수’ 자체로, ‘BTS’와 같은 아이돌 그룹이 정한 각종 컨셉 역시 그 자체의 세계관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영화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마블은 영화가 아닌 테마파크’라는 발언을 해 여러 가지 의미로 큰 화제가 되었다. 우리는 실제로 마블의 영화를 보면서 아이언맨 같은 삶은 살 수도 없고 꿈꿀 수도 없다. 현실에서는 많이 공감하기는 어렵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이한 지금 전 세계의 관객들과 더불어 한국의 수많은 관객들 역시 마블이 구축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긴다. 소수의 마니아 영화가 아닌 완결된 세계관을 가진 엔터테이먼트식 영화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청춘영화와 우리 사회, 해답보단 위로를 건네다
이승훈 PD의 이야기 키워드는 ‘청춘’이었다. 많은 이들은 청춘의 일부로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시대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과거 한국영화를 통해 본 청춘은 거의 사랑을 위해 죽고 사는 듯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던 애틋하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던 청춘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갔다. 아마 예전 영화에서 느끼던 청춘의 사랑이 좀 더 아득하고 희망적이고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영화에서 보이는 청춘의 사랑은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 볼 수 있듯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 많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시대와 큰 연결고리를 갖게 되는데 그러기에 당대영화를 당대에 보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 ‘기생충’에 담긴 오늘날의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는 두 청춘 남매가 등장한다. 이 두 청춘은 크게 반항적이지도 무능하지도 않다. 다만 자신들이 가진 꿈과 작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끔찍한 지하 방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청춘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큰 희망도 품지 않고 그렇다고 사회를 향한 강한 분노와 비난의 말도 쏟아내지 않는다. 절망 속에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이 청춘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예전 청춘들의 뜨거운 반항적인 태도가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영화지만 전 세계인이 ‘기생충’을 통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늘날 극심한 빈부격차가 전 세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청춘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청춘들의 모습이 이러할지도 모른다. 타개할 수 없는 현실 속에 결국 청춘들은 기성세대에 대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보다 뜨거운 청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양한 청춘을 공유하는 영화를 통해 명확한 해답은 어렵지만 어쩌면 조금의 위안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라는 환상을 통해 삶을 곱씹는다.
마지막으로 김훈종 PD가 이야기를 마무리하였다. 한국영화는 100년간의 역사를 통해 그동안 매우 큰 문화적 역할을 해 왔다. 80년대 우민화 정책 중 하나로 성(性)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영화제작에서 벗어나 90년대 이후 좀 더 다양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발전을 위해 많은 영화인들이 함께 노력해왔다. 개인적으로 김훈종 PD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는 ‘삶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원래 삶이란 것이 그런 것이라는 삶의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우리는 이것을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잔인하게 전달한다. 관객들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드는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삶에 대하여 끊임없는 성찰과 고찰을 하고 고민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라는 환상을 통해 부조리하고 아이러니로 가득한 삶을 곱씹는 기회를 제공한다.

앞으로의 한국영화 100년,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한국영화는 양과 질에서 끊임없는 발전을 이룩하였고 지금도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다. 100만 관객도 어려웠던 한국영화는 이제 1,000만 영화를 다수 양산하며 올해는 영화 ‘극한직업’을 통해 코미디영화도 1000만 영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아직 해결해야 하는 영화산업 구조의 문제와 머지않아 변화될 극장 패러다임 등 앞으로 한국영화가 부딪혀야 할 파도는 높고도 거칠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과 행보를 보아서는 앞으로의 한국영화 100년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글/
김지인 시민기자단




윤두현 YOON Doohuyn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소개
올해 한 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창작활동을 펼쳐나갈 2019년도 10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는 공모로 선정된 국내외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창작 역량 강화를 위해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발표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시각과 공연분야에서 활동하는 10기 입주 예술가의 창작과정과 작업세계를 공개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86년 출생, 서울 거주
윤두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환경조각 을 전공하고 미국 메릴랜드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작가는 생활에 밀접하거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여 설치, 사진, 조각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컴퓨터 바탕화면을 이용하여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묻는 작업 <시에라(Sierra)(2018)>와 <Wallpaper(2017-)>시리즈를 비롯하여, 일상 도구(온도계, 수평계 등)를 이용하여 실제와 이상의 차이를 찾아보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시에라(Sierra)_플라스틱에 프린트 부착, 종이에 디지털 프린트 후 벽에 부착_7×3.9m(바닥), 2.5×17m(벽)_,2018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보통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생각해 내고 하나씩 풀어나가는데, 작년부터는 바탕화면을 이용하여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초에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풍경으로 풀어보기 위해, 인터넷에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검색에서 나오는 이미지들(그래픽이미지, 그림, 사진 등)을 사용하여 가상의 환경을 실제에 구현해 보려 했다. 이 작업을 계속하던 중 하루, 가장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풍경이 컴퓨터나 핸드폰의 바탕화면에 눈이 가게 되었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탕화면 이미지를 포토샵의 기능들을 통해 해체, 확대, 흐리게 하여 왜곡하고, 이것을 출력 후 다시 해체하여 설치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형설치 같은 경우는 작업실에서 가설치 후 사진으로 찍고 포토샵으로 설치물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본 후, 그 도면을 참고로 전시장에 설치한다. 현재에는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무엇에 관해 작업하고 있다.

 
모하비 낮 밤(Mojave Day and Night)_디지털 프린트_42×100cm_2019   모하비 낮 밤(Mojave Day and Night)_프린트_42×100cm_2019_디테일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이번 2019년 6월부터 9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 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출품한 작업 〈모하비 낮 밤(Mojave Day and Night)〉이라는 작업과 2018년 8월 연남동의 CR collective라는 공간에서 전시했던 《시에라(Sierra)》전의 조각들이 있다. 시에라와 모하비는 맥 컴퓨터의 OS이름이자 바탕화면 그리고 산맥의 이름으로, 여러 맥락이 얽혀 있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가상과 실제의 경계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관객을 그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작업을 많은 지원을 통해 할 수 있었다. 두개의 곡면형 벽을 사용한 모하비는 약 20×3.5미터, 시에라 바닥의 조각들은 7×3.9미터로 설치하게 되었다. 이 작업들은 계속해서 확장과 변형이 가능한 형태로써 관람자들에게 특정하게 바라는 의미 없이, 될 수 있으면 자유롭고 다양하게 해석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모하비 낮 밤(Mojave Day and Night)_디지털 프린트 후 벽에 부착_3.5×20m_2019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주로 많은 작가들의 작업, 전시들을 보면서 영감을 받고, 인터넷으로 작업들을 계속 리서치 한다.

Manufacture: Undo_디지털 프린트, 아크릴_가변설치_2018-19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작업 스스로 혼자서도 잘살아가는 작업을 만들고 싶다.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관객이 원하는 대로 내 작업을 해석했으면 좋겠다. 작업에서 이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다.

 
Wallpapers series_디지털 프린트_60×220cm_2018   Wallpapers series_디지털 프린트_200×120×30cm_2017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보통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생각한 후, 하나씩 진행하는데 아직 실험중인 작업이나, 기회가 없어 보여주지 못한 작업들이 있다. 이 작업들을 보여주고 싶고, 현재하는 작업도 계속해서 발전시킬 생각이다.

시에라(Sierra)_디지털 프린트_120×40cm(좌,우)_2018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작가정보 :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019 트라이보울 예술아카데미 <재즈로 읽는 모던 조선>

송도국제도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복합문화공간인 ‘트라이보울’에 다녀왔다. 평소엔 트라이보울이라는 독특한 건축물의 미적요소에 매료되어 “전시” 작품에만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트라이보울 ‘공연장’에서 출연진과 관람객이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공연. 그리고 잠시 우리나라 대중가요에서 잊혔다고 생각했던 장르인 ‘재즈’를 작은 콘서트로 선보였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이번 2019 트라이보울 예술아카데미는 지난 12월 13일 <저항으로 읽는 근대가요>를 시작으로, 이번 12월 20일에 선보인 <재즈로 읽는 모던 조선>까지 2회에 걸쳐 공연이 진행되었다. 대중음악사학자로 유명한 ‘장유정’ 보컬(해설)과 함께 주화준(드럼), Cray koo (피아노), 오정택(콘트라베이스)까지 총 4명이 완벽한 하모니를 진행하였다. 진행을 맡은 장유정 해설은 꼭 이 세 명과 공연을 해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한 대목에서, 이번 공연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재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 재즈가 들어온 초창기 풍경을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공연은 시작됐다. 그런데 재즈의 사전적 의미만을 전달한다면 공연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관람객이 조곤조곤 따라부를 수 있는 곡 ‘리라꽃 피건만’. ‘항구의 블루스’ 등을 장유정 보컬에 의해 관람객에게 쉽게 전달되었다. ‘재즈’라는 장르는 잘 몰라도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면, 재즈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공연 중간에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관객들에서 작은 탄성이 들려왔다. 음악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데, ‘재즈’만큼 격동의 세월을 거쳐온 장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1920년대에 서양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되기 시작한 ‘재즈’라는 장르는 우리나라의 최초 보이그룹과 걸그룹을 만들 정도로 인기를 끌며 대중에게 전파되어 갔지만, 30년대부터 군국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서양에서 들어온 ‘재즈’는 일제의 야욕으로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재즈는 비록 서양에서 전파된 음악 장르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오고서는 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재해석 되었는데, 처음에는 번안곡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재즈의 역사는 창작곡이 나오면서부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 갔다. 비록 우리나라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굴레에서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익숙한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닐까?

역사이야기와 함께한 재즈공연은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 마지막 공연에는 “앵콜”요청은 물론, 추운 겨울 찾아온 관람객들을 위해 공연 측에서 작은 선물을 준비해주셨다. 따뜻하고 감미로운 재즈 선율에 금요일 밤이 더욱 깊어져 갔다.




2019 <점점점> 연말 프로젝트 ‘인천반점(占)


행 사 명 
: 점점점 공동 프로젝트<인천반점>
행 사 일 : 2019.12.28.(토) 14시~20시 
행사장소 : 창작공간 4개소 및 예술인 점방(차스튜디오)

상세내용 : 공지사항 홈페이지 참조 (공지사항 홈페이지 바로가기 ▶)


행사정보

문화예술특화거리<점점점> 공동 프로젝트<인천반점(占>이 오는 1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개항장 및 중구 일대에서 개최된다. 인천광역시 주최, 인천문화재단 주관의 행사에서는 점점점 참여 예술가 4팀이 새로운 창작공간 4개소를 소개하고 초청예술인이 운세를 점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점점점>은 인천의 문화생태 활성화를 위한 예술실험 사업으로 지역을 거점으로 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다년도 사업이다. <점점점>은 기존 지원사업의 한계를 극복하여 예술가들의 문화 자치역량을 강화를 목표로 한다. 사업명 ‘점점점’은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점점 좋아지고 확장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이 사업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참여자가 선정 이후에 창작활동에 적합한 공간을 직접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간 매칭 컨설팅 또한 지원이 된다. 올해 선정된 예술가 4팀(영일상회 인천점, 중구난방, 거북이와 두루미, 작은연극연구소)은 12월 초에 중구 소재의 창작공간을 발견하고 입주했다.




해금 동아리 ‘해금꽃비’를 만나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마당 한가득 들어찬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에서 해금꽃비김희자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해금을 가까이에서 많이 접한 경험이 없어 흔히 국악을 전공한 분들이 하는 악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인천에 해금 동아리가 있다고 하여 궁금증이 더욱 커졌습니다.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진 이야기를 해주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했어요. 어느 날 딸이 아주 감동적인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축가로 색소폰 연주를 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축가로 연주할 악기를 하나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찾아보기 시작했죠. 살면서 음악은 전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오카리나,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를 찾아 고민하다가 신부 엄마가 한복을 입을 때를 생각해서 국악기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음악으로 힐링한다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이해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악기를 선택하신 후에 어떻게 배우게 되셨나요? 
엄청나게 검색해봤지만 거의 없었어요. 어렵게 찾아보니 인천에는 세 곳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서구여성회관 프로그램이 시간대가 맞아서 만 3년 전에 입문하게 되었죠.

해금 연주를 처음 시작할 때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어요. 저보다 몇 년을 앞서 배우신 분들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어렵다더라구요. 그 이후로 ‘대금 10년, 해금 30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아차! 악기 잘못 골랐다’ 싶기도 했어요. 그래도 노력은 했죠.

그런데 어떻게 동아리를 만들게 되셨나요?
같이 배우는 분들에게 어떻게든 무대를 만들어 볼 테니 공연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공연 준비로 연습하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계기를 만들어 본 거죠. 이때 여덟 명이 같이 연습을 시작했고 그 후에 동아리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그때 저희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고 실력도 급성장하게 되었죠.


‘해금꽃비’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희 단원은 현재 8명이고 2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있고요. 가정주부도 있지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정기모임은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합니다.

동아리에 강사 선생님이 따로 계신가요?
아니요, 저희는 서구여성회관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곳 프로그램을 통해 수업을 받았어요. 최근에는 해금 강좌가 인기라서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하려면 경쟁률이 너무 높았죠. 그러던 중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강사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개인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실력이 많이 향상될 수 있었어요. 저는 강사의 역할이라기보다는 동아리 운영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행히 회원 개개인이 재능을 갖고 있어 곡을 선정하는 담당, 음원을 제작하는 담당이 따로 있어요.

해금이라는 악기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해금은 찰현악기라고 해요. 밀어서 내는 악기라는 뜻인데 이런 유형의 악기는 원시 악기라고 해서 어느 나라에나 있는 악기죠. 중국의 얼후하고도 비슷한데 얼후의 소리는 개량되었다고 볼 수 있고, 해금은 명주실을 사용하여 전통 그대로의 소리를 갖고 있죠. 

해금을 처음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세요.
해금은 명주실에 말총 활을 쓰기 때문에 스틸보다는 부드럽지만, 계속 연습을 하다 보면 손이 아프고 관절도 아플 수 있어요. 해금은 고정된 것이 없고 공중에 떠 있는 줄을 양손으로 모두 이용하여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렵다고 할 수 있죠.

해금은 악보를 보고 연습하나요?
국악은 정간보를 사용합니다. 요즘엔 기존 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오선지에 있는 음을 손가락 기호로 표시해 연습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해금을 시작하셨지만,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삶의 변화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는 동아리 모임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몸에 탈이 나기도 했지만요. 그리고 집에서 연습하면 시끄럽게 소리가 날 수밖에 없으니 가족들이 피해를 많이 받았겠죠?(하하) 그리고 예전에는 야외에서 운동을 많이 했는데 동아리 하면서는 실내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졌죠.

동아리의 재정적인 운영은 어떻게 해나가세요?
엄마들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따로 회비를 걷지는 않아요. 작은 공연을 통해 받는 출연료를 모아서 부평생활문화센터 모임 공간을 대관하거나 공연 유니폼을 맞출 때 보태어 사용합니다. 최근엔 부평구문화재단의 동아리 지원금을 받아서 저희에겐 큰 힘이 되었고 정말 고마웠죠.

‘해금꽃비’라는 이름은 누가 만드셨어요?
저희 팀원들이 여러 이름 가운데 투표로 결정했어요. 해금이라는 악기로 촉촉하게 적셔주는 꽃비가 되면 좋겠다는 이름입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해금이라는 악기로 일면식도 없는 8명이 모였잖아요. 처음에는 동아리에 대해 생각하는 점이 모두 달랐어요. 그래서 팀 화합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예를 들어 우리는 ‘공연을 위한 팀’이라고 여기면서 실전처럼 연습에 매진하는 등 최소한의 규칙에 합의부터 했죠.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공연이 있을 때는 의상을 갖추고 리허설을 반드시 하는 등 단 10분의 공연을 위해 많은 기다림과 노력을 해요. 이때 그 시간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개인 비용으로 처리하다 보니 좀 어려울 때가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작게는 ‘회원들의 생일 파티는 꼭 해주자’라는 소소한 계획도 있고, 크게는 인천을 넘어 전국 국악 경연 대회라든지 국악방송 등에도 나가고 싶은 계획이 있습니다. 점차 공연 기회와 지역을 넓혀갔으면 좋겠어요. 인천시에서 하는 특별한 행사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동아리 인원도 늘려가야겠지요.

해금에 처음 입문하신 분들이 ‘해금꽃비’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나요?
처음 해금을 접하시는 분이라면 반드시 전공자에게 배우시고, 기본 실력을 갖추셨을 때 저희와 같이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원이 좀 많아지고 활동량도 많아지면, 해금이라는 악기를 동아리에서도 배우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요.

다른 장르와의 협연도 가능할까요?
다양한 악기와 협연도 가능합니다. 오카리나, 기타, 하모니카, 가야금도 좋고요. 다만 모두가 연습 시간을 맞추는 일이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아리 자랑 한 번 해주세요.
동아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부분들을 회원들이 정확히 나눠서 각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재정, 음식, 의상, 음원, 선곡, 자원봉사 활동을 담당하는 회원들이 다 따로 있죠. 물론, 분위기도 아주 화목하고 좋습니다. ‘해금꽃비’ 많이 불러주세요.

‘해금꽃비’는 활동 범위를 계속 넓혀 여러 사람에게 해금이라는 악기를 소개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금이 가진 처연한 소리가 모든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국악이 어울리는 행사가 많으면 좋겠고, 특히 아이들에게 해금을 소개하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전공자를 통해 기본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데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아쉬움도 전하셨고요. 마지막으로 해금뿐만 아니라 우리 국악기에 대한 강좌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건네시면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다문화밴드 ‘너나우리’ 를 만나다.

배다리 청과물 시장 맞은편, 악기점이 늘어선 도로변에 자리한 허리우드 악기사 2층에는 뮤직 갤러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여러 동아리 중 다양한 국적에서 온 다문화 밴드가 있어 그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중국, 일본, 모로코, 필리핀, 베트남이 고국인 그들은 결혼이민으로 한국에 살며 밴드 ‘너나우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연습을 마치고 악기를 정리하는 시간이어서 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먼저 동아리 소개를 해 주세요.
‘너나우리’는 어쿠스틱도 하고 밴드도 하는 다문화 밴드지만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한국 아줌마들도 있어요. 결혼 이민자와 한국 아줌마가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는 모임입니다.  

다문화 밴드인 만큼 회원들이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소개도 해주세요.
(선생님) 현재 회원이 10명이에요. 처음에 다문화 센터에 가서 이런 모임을 만들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처음 오신 분들은 주로 중국 분들이 많았고 지금은 일본, 모로코, 베트남, 필리핀, 페루에서 오신 분들도 있어요.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2017년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노래를 선정하여 중창단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결혼 이민자들이 노래를 통해 한국어도 배우고 발음 교정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죠. 그 당시에는 15명 정도가 함께 했어요. 그 당시 한국 아줌마인 송도숙 언니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셔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죠. 중창단이기 때문에 화음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송도숙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시게 되었나요? 
(송도숙) 우리 선생님이 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OK입니다. (모두 웃음)

‘너나우리’ 모임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선생님) 저희가 처음 만난 게 2017년 7월이었어요. ‘만남’, ‘걱정 말아요 그대’ 등 좋은 한국 노래에 화음을 넣어서 10월에 첫 공연을 했어요. 3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했지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분이었어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마유미) 선생님이 하자!라고 해서 우리는 그냥 열심히 따라갔어요. 그때는 한국어 발음을 잘 못해서 어려웠는데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특성이 있다 보니 공연도 하게 된 거죠.

한국 노래를 배우는 건 어떠셨어요? 어렵지 않았나요?
(마유미)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라서 어려웠어요, 그래도 모두 다 똑같이 어려워했는데, 선생님이 쉽고 재밌게 알려주시니까 잘 배울 수 있었어요.
(선생님) 여기 오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이 오세요. 리리는 정말 차이나 가수라고 여겨질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고, 유튜브 방송도 해요. 아스마 씨도 모로코 가수예요. 노래로 요양원 봉사도 다닐 정도거든요.

그럼 중창단에서 밴드 활동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선생님) 중창단을 하면서 ‘악기를 좀 배워보자’라고 했는데 모두 흔쾌히 좋다고 했어요. 2018년부터 다 같이 통기타를 배우고, 다문화행사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러다 통기타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젬베도 배우게 되었죠.

집에서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세요?
(마유미) 우리 가족은 아주 좋아합니다. 음악도 배우고 한국에 적응해가는 것도 좋아해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언니들한테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어요. 배우는 것이 많아서 아주 좋아해요.
(리리) 좋아요. 애들도 좋아하고. 항상 응원해줍니다.
(선생님) 리리의 경우, 우리가 올해 동구 화도진 축제에서 시민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70팀 중에서 예선을 통과해 12팀이 뽑혀서 본선에 진출했어요. 리리의 딸이 동영상을 찍어서 엄마 목소리라고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다녔어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이야기 좀 해주세요.
(모두) 중구에 있는 ‘흐르는 물’에서 세계음악소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저희가 초대되었어요. 그날 저는 한복을 입고 젬베를 치고 리리는 치파를 입고, 마유미 씨는 기모노를 입고, 모두 전통 옷을 입고 한 시간 정도 공연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이 계셔서 좋은 이야기만 하시는 거 아닌가요?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야스미) 힘든 거 없어요. 너무 재밌어요. 매주 월,화요일만 기다려지고 여기에 오는 게 너무 좋아요.

‘너나우리’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요?
(선생님) ‘너나우리’가 점점 커나가는 걸 보면서 밴드를 만들고 싶은데 아직은 첫발을 뗀 정도이고 내년에는 밴드다운 밴드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악도 퓨전 타악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체계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마유미 씨가 대북, 건반, 노래 등 못 하는 게 없고 아스마 씨도 리듬감이 정말 좋거든요,

선생님은 예전부터 여성밴드 활동도 활발히 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다문화 밴드를 하면서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까요?
(선생님) 보람이 많죠. 우리 리리가 언젠가 ‘선생님을 만나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울컥했어요. 스테파니라는 친구를 위해 <파니>라는 노래를 만들어 평화창작가요제에 내보기도 했죠. 한국 생활에 정착했지만, 조금은 다른 생김새와 서툰 한국어 때문에 결혼 이민자에 대해 편견을 갖고 보는 분들이 아직은 많거든요. 예전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여기 있는 이민자들이 음악을 통해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제가 오히려 너무 보람되죠

우리 동아리 자랑 한 번 해주세요.
(선생님) 우리 같은 동아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이민자와 한국 아줌마가 함께하는 동아리 중에서 전통춤을 추는 동아리는 있지만, 악기를 다루는 밴드 동아리는 독보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스마) 사이가 좋고 가족 같아요.
(송도숙) 다국적이라는 기분이 안 느껴져요.
(리리) 한국에 있는 친정집 같은 느낌이에요.
(선생님) 속상한 이야기를 터놓으면 친정 언니들처럼 편이 돼줘서 든든하다고 송년회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음식을 갖고 와서 같이 나누어 먹기도 해요.

선생님이 회원들에게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선생님) 제가 올해 몸이 아팠어요. 지금까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제가 꼭 같이 다녔는데 올해는 다문화축제에서 초청공연을 할 때 저 없이 공연했어요. 공연 동영상을 병원에 있는 저에게 보내줘서 새벽에 봤는데 너무 잘하고 대견해서 엉엉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제 나 없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눈물) 저 없이도 되어야 하고요.

‘너나우리’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멤버가 워낙 가족같이 끈끈하다 보니 이들 사이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고, 지금 어느 정도 중급단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실력이 초급이신 분들이 따라오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초급반 클래스가 개설되어야 하는데, 리리와 송도숙 언니가 교육을 맡아주시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회원분들이 선생님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마유미) 다문화이신 분들이 여기에 꼭 오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눈물)
(아스미) 우리 멤버들 절대 헤어지지 말고, 끝까지 가요.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송도숙) 살면서 기회가 많이 주어져도 놓치는 사람이 많죠. 여기 계신 분들은 기회를 잘 잡았어요, 선생님만 믿고 따라가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해요.

선생님의 노력과 열정과 애정으로 하나가 된 ‘너나우리’이지만, 그 마음을 볼 수 있는 회원이 있어 선생님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과 눈물이 섞인 기분 좋은 수다였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회원의 말은 최대한 그대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소파 방정환 탄생 120주년 기념 특별전 <방. 탄 어린이, 새 시대를 열다>


제 목
: 방. 탄 어린이, 새 시대를 열다
기 간 : 2019년 12월 6일 ~ (매주 월요일 휴관)
장 소 :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
문 의 : 032)773-380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 02)322-551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행사정보

어린이날을 만들고 근대 어린이운동에 헌신한 소파 방정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린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한국방정환재단과 함께 2019년 기획전시 <방. 탄 어린이, 새 시대를 열다>를 12월 6일부터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근대 어린이운동에 빼놓을 수 없는 소파 방정환 선생과 그 문학을 전시콘텐츠화한 것으로, 어린이들이 보고 만지고 듣고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전시로 꾸민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동안 방정환 관련 전시가 몇 차례 있었지만 방정환만을 주제로 어린이가 중심이 되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전시는 이번 한국근대문학관의 전시가 국내 최초가 된다.




해금의 음악적 가능성 연구프로젝트, 박수아 쇼케이스 <해금을 해금하다>

[출처] 인천아트플랫폼 홈페이지

두 줄의 현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음색의 우리나라 악기, ‘깡깡이’라는 별명도 가진 이 악기는 바로 ‘해금’이다. 12월 3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대중에게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이 악기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자리, 해금 연주자 박수아의 쇼케이스 <해금을 해금하다>가 마련되었다. 전통적인 해금의 연주를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해금의 모습을 제시한 이번 공연은 해금 연주자 박수아의 연주에 전자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이원우, 피아노의 신기원, 타악기의 임찬희가 함께하며 더욱 풍성한 무대를 꾸며주었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시도, 해금(奚琴)을 해금(解禁)하다
꾸준한 국악의 길을 걸어온 해금 연주자 박수아는 다수의 수상경력과 화려한 공연경력을 쌓으며 젊은 연주자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연주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는 단순히 해금의 활을 켜는 것에서 벗어나 해금을 분석하고, 고민하고, 다양한 연주법을 찾는 일련의 과정들을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해금의 전통적인 연주법 이외에도 해금에서 발생하는 모든 다양한 소리를 찾고 이를 음악으로 구현하고 싶어 ‘해금으로 금지된 것을 해지한다.’라는 뜻의 해금(奚琴)을 해금(解禁)하다로 이번 공연의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시도에 대한 그녀의 강한 확신은 훌륭한 연주의 결과로 드러났다.뮤지션 박수아 제공

해금연주에 담은 인천의 정서, 해금과 전자음악의 절묘한 만남
박수아 연주자의 설명과 함께 진행된 5곡의 연주로 이루어진 70여 분은 해금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곡마다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상은 해금연주의 정취를 더욱 돋우며 관객들을 연주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첫 곡은 <신(新) 천년만세>로 조선 시대 천년만년 수명을 기원하던 선비들의 음악을 해금과 피아노로 재구성하여 연주한 곳이었다. 무게감 있는 피아노 연주 위에서 뛰노는 해금의 선율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연주자의 연고지인 ‘인천’을 노래한 <미추홀 풍류>로 2017년 초연된 ‘Soul in Michuholl’을 피아노와 해금 2중주로 새롭게 편곡한 곡이었다. 인천을 상징하는 바다의 잔잔한 영상과 함께 전해진 이 연주는 같은 인천인이라 그런지 유독 더 마음에 와닿았으며 특유의 매력적인 멜로디가 마음을 울리기도 하였다. 세 번째, 네 번째는 해금과 전자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무대로 꾸며졌다. 이미 전자음악 컨테스트 <2019 Fest-M>에서 1위를 차지하고 서울국제컴퓨터음악제에 초청되어 선보이며 그 가치를 입증받은 ‘Micro Layers’는 해금의 평음, 요성 그리고 트레몰로의 스펙트럼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데이터의 흐름을 청각적으로 구현하였다고 한다. 다소 괴기스러울 수 있는 분위기의 이 곡은 굉장히 혁신적이고 놀라운 연주로 연주자가 의도한 대로 해금의 무한한 가능성을 선보일 수 있었다. 역시 전자음악과 함께 이어진 네 번째 무대 ‘Blink’는 타악기 사물북이 함께 더해지며 눈의 깜빡임을 극적인 연주로 표현하였다. 마지막 다섯 번째 무대는 인천의 민요 <나나니 타령>을 해금 독주곡으로 구성하여 해금, 피아노, 타악기의 앙상블을 통해 무대에서 구현되었다. 화려한 영상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연주는 본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써 손색이 없었다.

무대에서 입증된 해금의 무한한 가능성
이번 공연은 해금 연주자 박수아의 세 번째 독주회이자 자신의 음악을 많은 이들 앞에 선보이는 쇼케이스 자리였다. 전통음악에서부터 전자음악까지 해금의 다양한 연주 가능성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연고지 인천 지역의 특징을 음악으로 녹여낸 이번 공연은 해금의 다양한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완벽하게 매료시켰다. 또한 당차고 단단해 보이는 젊은 연주자는 해금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의 무대로 충분히 입증하였으며 그녀의 연주 행보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그녀가 펼쳐나갈 무한한 해금 연주의 세계를 주목해보도록 하자.

 

글 /  시민기자단 김지인




이민하 LEE Minha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소개
올해 한 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창작활동을 펼쳐나갈 2019년도 10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는 공모로 선정된 국내외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창작 역량 강화를 위해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발표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시각과 공연분야에서 활동하는 10기 입주 예술가의 창작과정과 작업세계를 공개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민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첨단예술표현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작가는 망각에 저항하면서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다움’이 상실되어가는 구조를 추적한다. 원시적인 매체와 신기술을 결합한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업은 모순이 점철된 형식과 육화된 텍스트를 특징으로 한다. 작가는 아이치 트리엔날레(Aichi Triennale, 2010), 고베 비엔날레(KOBE Biennale, 2013)를 비롯한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가리봉동 일대의 벌집을 주제로 한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갤러리 구루지, 2017)을 기획하였다. 작품 활동과 전시기획 외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아트레일 조성 프로젝트》(항동철길, 2015)와 같은 다수의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진행해왔다.

그을린 세계(The Scorched World)_소가죽, 불도장, 버티컬 플로터, 프로세싱_0.2m×14m×4m_2018/2019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가죽과 인두(버닝펜)라는 소재를 사용한 작업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소재나 매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작업하는 편이다. 주로 알려진 작업은 설치나 영상의 형식이지만 드로잉이나 사진작업도 있고 퍼포먼스를 하거나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원래 동양화를 전공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닥섬유를 이용한 설치작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신이 만들기를 더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렸을 적부터 가죽이라는 소재를 특별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08년 5월 광우병 촛불집회로 인해 촉발되었다. 광우병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다가 빠르고 효율적인 소고기 생산을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 동종 부산물을 사료에 섞어서 먹이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유전자가 변형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08년 12월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가자전쟁이 벌어졌는데, 뉴스 속보로 전송되는 화염에 휩싸인 불타는 도시의 이미지와 촛불로 뒤덮인 광장의 이미지를 보면서 일견 아무 관련이 없는 두 사건 속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가죽에 인두로 지질 때 발생하는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와 연기로 인한 (무언가의) 환기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많아서 홀로 조용히 무언가를 조사하는 사람이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으로 연결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한 가지 이슈에 매료되면 관련 서적, 영화, 자료 등을 살펴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수많은 고리 중에서 한가지 시각적 이미지를 낚아채서 작품화를 진행하는데, 자료를 찾으면서 동시에 작품의 재료 손질에 해당하는 바탕 작업을 병행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을린 세계(The Scorched World)_소가죽, 불도장, 버티컬 플로터, 프로세싱_0.2m×14m×4m_2018/2019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2017년 ‘아남네시스(Anamnesis)’ 프로젝트는 영상과 설치작품 <Immolation>으로 구성된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2008년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당시에는 실행할 여력이 안 되었다. 작가가 덮어쓴 가죽이 제2의 피부로 치환되어서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아로새긴다는 착상이었다. 가죽을 소재로 사용해 오면서 ‘한 꺼풀 벗기면 다 같은 피와 살’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왔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종으로 나눌 수 있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종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과 우리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해온다는 것을 부각하고 싶었다.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차별을 겪은 이야기를 공유해 달라고 모집했지만, 영상촬영 때문에 참가자 모집이 무척 힘들었다. 남자들의 경우 한이 맺힐 정도의 인상 깊은 이야기가 없을뿐더러, 수치를 감추고 싶어하는 남성사회의 문화가 작용하여 결국 한 명도 모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여성 참가자 5명으로 압축되었는데 차별의 위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맨 처음에 참가자들이 보여준 글은 신문기사나 고소장 같았다. 나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서 감정에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자’라고 제안을 했고 3~4회 걸쳐 그들을 만나면서 글을 추상적으로 함께 다듬어 나갔다. 그중에 한국인 혼혈인 이탈리아 국적의 코수 리디아 씨가 이상적인 미적 성취를 이뤘는데, 그녀의 글은 자신을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수천 개로 분열된 자아를 노래하는 한 편의 시로 완성되었다. 글이 완성된 후, 퍼포먼스 형식으로 영상을 촬영했는데, 직부감 컷이 꼭 필요해서 층고가 높은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을 대관해서 진행했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작품을 제작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구현 방식을 밀착시켜서 형식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노력하는 편이다. 현재로는 육화된 텍스트가 핵심 단어로 기능하는 것 같다.

아남네시스(Anamnesis)_영상 4K_20분 25초_2017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초등학생 때, 갑옷과 무기가 정리된 백과사전식 책에 끌렸었다. 나는 무기에서 고문 도구로 그리고 생체실험과 전쟁사로 이어지면서 홀로코스트와 조우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바로 세계사였다. 대체 이런 일들은 왜 벌어지는 것이며, 인류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는 걸까? 영향을 받은 책이 많아서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과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에게 존경을 표한다.
2010년 2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시리아를 중심으로 레바논, 요르단 등 인접국가 6곳을 리서치를 빌미로 돌아다녔다. 사실 <아남네시스> 작업에서 작가는 반군과 정부군이 함께 사는 마을을 상정하여 그곳에서 가죽 오브제를 짊어지며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작가는 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가죽 오브제에 직접 새겨 필사하는 로드다큐 형식의 영상으로 구상했었다. 언젠가 더 담대해지고 환경도 잘 갖춰진다면 꼭 실행해 보고 싶다. 촬영팀과 코디네이터, 통역사 등 대규모의 원정단을 꾸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전시지원금 같은 제도로는 실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이겠지만, 대규모 해외 로케이션에 걸맞은 지원금 제도가 현실적으로 없지 않은가. 사실, 세계지도 작업도 1964년 뉴욕 박람회의 상징인 유니스피어(Unisphere)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전체가 지름 120피트(36.576m)인 이것의 10분의 1 크기인 지름 3m의 구체로 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인터랙티브하게 구글링한 검색 내용에 맞춰서 좌표가 이동되는 것도 상상해봤다.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 누군가 제작비를 대준다면 바로 실현하게 할 자신도 있다.

 

상흔(Stigma)_5m×7m×2m_2019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학생 시절부터 예술가가 액티비스트의 역할도 가능한지 궁금했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다수 존재해왔고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지만, 실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움직이려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그래도 한 가지, ‘망각에 저항하는 도구’로써 예술의 역할은 있지 않나 하는 희망적인 생각이 있다. 인정받은 예술품의 특권이란 어딘가에 소장되어 보존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리고 후손들은 그 작업을 연구하고 교육할 것이고 말이다.
작년 고양 레지던시의 오픈스튜디오 때에도 관객 중에 한 분이 ‘질 것을 아는 싸움을 왜 계속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주셨다. 그건 바로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진흙탕 속에 발을 딛고 있으나 이상은 저 높은 곳을 향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분은 나에게 사회학이나 인류학을 전공해 보라고, 혹자는 정치가가 되어 보라고 조언해 준다. 내가 예술가를 선택한 것은 남겨질 작업이 ‘망각에 저항하는 도구’로 기능하기를 염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앞에 두고 관객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관객들도 내 작업의 배후에 있는 수많은 연결지점을 발견하면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내 작업이 예술로 인정받는 순간이란, 관객들이 관람 후에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제물(Immolation)_5명의 참가자들의 이야기
(우즈베키스탄, 터키, 중국, 이탈리아),
120개 국어로 된 다양한 종파의 기도문들, 철 프레임_400×150×280cm_2017
  제물(Immolation)_이탈리아어와
한국어 버전의 참가자 이야기
_돼지가죽에 실버 펜_48×113cm_2017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기회가 된다면 해외 레지던시를 더 경험해 보고 싶다. 2018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국제교환입주 프로그램을 통해 바우하우스 데사우(Dessau) 재단의 레지던시를 3개월간 경험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데사우라는 소도시에 있으면서도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확장의 가능성을 느꼈다. 특히 나의 관심사나 작업 주제들이 무거워서인지, 전시를 자주 하는 편이 못 된다. 그런데 내 작업이 가지고 있는 ‘차별-배제’, ‘인류-피부색’, ‘학살’, ‘성-속’, ‘육식’ 등의 키워드들은 오히려 유럽에서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나의 작업에 쉽게 만족을 못 하는 편이다. 나로서는 평생을 연구할 대주제를 설정하고 나아가고 있는데, 그 연구의 목표는 오픈해 놓은 셈이다. 거듭할수록 끝없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서 종종 방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나 희생자에 대한 애도에 중심을 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그 배후에 있는 구조를 알기 원하며, 그 구조가 드러나는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 그와 동시에 ‘그 구조가 드러난 작업’을 앞으로 10여 년 후에는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또한 ‘인간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드러나는 작업을 실현하고 싶다. 그 방법을 작업하면서 찾아 나가는 중이다. 이 방식은 수도자가 수행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목표를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지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다. 그 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탐구형 예술가로 기억해 주면 좋겠다.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A Concrete Box for Human Storage)_2-3합 장지에 콩댐, 인두 및 컷팅_480×330cm_2018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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