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덕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함세덕은 1936년 <산허구리>로 등단 <동승>, <무의도기행>, <고목> 등 빼어난 희곡을 쓴 한국근대극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잊혀진 작가였다. 해방 직후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선무반 일원으로 참전하여 전사했기 때문이다.그는 1988년 납․월북작가 해금 조치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작가였다. 해금 이후 함세덕에 대한 연구논문들이 활발하게 발표되었고 1991년에는 연우무대가 기획한 한국현대연극의 재발견 시리즈에서 대표작 <동승>이 공연되면서 함세덕은 관객들에게도 한국근대극의 대표적 작가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함세덕은 문제적 작가다. 식민지 시기 활동한 많은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훼절한 작가다. 1940년대 그가 일본 제국주의 정책을 선전하는 희곡을 다수 발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91년에는 친일극으로 분류되어 온 <에밀레종>의 희곡과 대본이 발견되면서 그의 친일극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함세덕은 근대희곡사의 중요한 성취를 이룬 빼어난 작가이면서 그의 행보와 작품들에는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상황이 오롯이 새겨있다.

지난 6월 7일(화) 문학시어터에서 열린 제1회 인천예술의 뿌리 포럼 “연극인 함세덕과 인천 – 함세덕과 인천연극의 미래”(주최/주관 (사)한국예총인천광역시연합회, 문학시어터)에서도 함세덕의 이러한 문제적 지점은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날 포럼은 함세덕의 작품세계와 작가적 위상, 인천에서의 활동 등을 살피는 발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만수(인하대 교수)의 “함세덕과 인천연극”, 윤진현(인하대 강사)의 “덕진의 가출을 격려하며”라는 두 발제문이 모두 함세덕의 아동극을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그간 함세덕에 대한 논의가 축적되어 온 만큼 함세덕의 작품 세계에 대한 논의를 더 넓히고자 하는 것이면서, 함세덕의 현대성에 대한 검토와 이어진다.
김만수는 함세덕 중기 아동극, <심원의 삽화> <서글픈 재능> <감자와 족제비와 여교원> <닭과 아이들> 등에는 기성세대의 편견, 신세대의 고민 등이 원형질로 녹아 있다고 지적했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말한 ‘더이상 아닌 세계’와 ‘아직 아닌 세계’의 충돌이라는 현대성에 주목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진현은 경성방송국 편성표에서 인천의 ‘꽃섬 동인회’ 활동을 발굴하여 함세덕의 인천에서의 활동을 밝혔다. 또한 윤진현은 <닭과 아이들>에 드러나는 현재성을 분석하는데, 현대 아동문학에서 가출이 “‘가정으로의 귀환’ ‘가정의 가치’를 환기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데에 비해 이 작품은 덕진이 가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들은 물론 동리 어른들도 이를 축복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가정’이 아동에게 폭력이고 위협인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가정이 생존을 위협한다면 차라리 도망쳐서 이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문제해결 방식은 오늘날에도 주목된다는 것이다.

이어진 토론은 이희환(시민과 대안연구소 연구원), 전성희(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진국(인천일보 편집국 부국장)이 참여했다. 이희환은 함세덕을 비롯하여 인천예술인의 문화적 기반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전성희는 함세덕 희곡에서 소년과 청년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데 그 창작배경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김진국은 함세덕 작품의 빼어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구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에서 그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함세덕의 극작가로서의 위상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이 근대문학연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근대문화사로 넓혀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포럼의 시작에서 사회를 맡은 김학균(인천예총 사무처장)은 포럼 직전 함세덕의 누이인 함성희와의 만남을 소개하면서 함세덕의 아버지 함근욱과 송암 박두성이 사돈관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근대예술인들의 연구는 근대문화사연구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포럼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쟁점은 함세덕 연구나 기념사업이 친일이라는 그의 행적 때문에 답보상태에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해가 바로 함세덕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기념사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타까움에 대해 윤진현은 “함세덕의 친일극은 사실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물론 식민지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상황을 살아야 했던 작가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이날 토론에서는 친일행적이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연구나 기념사업을 중단하는 것 또한 우려된다는 점도 분명히 지적되었다. 과오의 역사라 해서 지우거나 덮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사실을 발굴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함세덕이라는 한 극작가에 국한된 것도, 근대문학사에 국한된 것도 아닌, 식민지라는 경험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오늘의 현실을 위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관점이다.
“인천예술의 뿌리”라는 제목처럼 이날 포럼은 함세덕의 작품과 인천에서의 활동이 주요하게 논의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함세덕의 작품과 인천이라는 장소의 연관을 강조하는 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함세덕 연구에서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그의 작품들은 어촌 문학으로서의 독보적인 점이 있다. 이는 그의 작품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만이 아니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의 지리적 위치에서 그의 작품이 한국문학에서 갖는 독보적인 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함세덕의 작품 연구에서 인천이라는 특정한 장소성을 한국문학의 보편성으로 진전시키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이는 인천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천에서의 활동이 인천의 근대문화사가 아닌 한국근대문화사의 보편성과 연결될 때 인천 연극인으로서의 함세덕 연구가 한국연극, 한국문학, 한국근대 연구의 중요한 장이 될 것이다. 함세덕은 현재진행형의 작가다.
김소연 / 연극평론가
아이들의 제안으로 시작한 동아리 활동


































한국은 올해로 13년째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이젠 뉴스도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심각하다. 아직 경쟁사회에 뛰어들기 전 청소년과 청년 자살 증가율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OECD 국가들은 청소년 자살을 15.6%나 줄였다. 우리만 47% 나 늘었다. 더 큰 걱정은 자살 당사자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유족들은 일반인보다 자살 시도 확률이 6배나 높다. 또 1명이 자살을 시도하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 최소 6명은 우울증 등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고재학. 한국일보 논설. 2016, 6)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는 ‘문화 민주주의’라는 글을 통해서 사회가 생존가치 survival values보다 자기표현가치 self-expression values를 중요시할 때 민주주의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했다. ‘자기표현’이 개인 간 신뢰, 관용, 의사결정 참여 등 민주주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문화적 가치가 생존가치 추구보다 우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불안 해소와 안정감이 민주주의를 위한 자기표현가치 실현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이루려고 하는 공유경제나 경제적 자립모델을 포함한 생활과 생존가치 해결은 자기표현가치와 함께 이루어야 하는 생활문화사업 통합 목표가 된다.
결국, 공간 이용자의 자발성과 자생력 향상은 잘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자발성과 자생력을 높이는 주인의식은 권력을 나누고 함께 참여하고 책임지는 과정에서 생긴다. 브라질 작은 도시 뽀루뚜알레그리에가 민주주의 모범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고 따라 하는 이유는 모든 주민에게 주인의식을 갖게 한 ‘참여 예산제’라는 정책의 시도였다. 주인의식은 주민 각자가 시 정부 정책과 예산에 영향을 미치고, 공정한 참여를 보장하는 정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행정으로 불가능했던 긴급 현안들이 해결했으며 주민의 창조적인 생활정책들은 차별 없이 제안되고 실현되었다. 참여와 개입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문화변동을 가져와 정착되었다.












막이 오르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관객은 헛기침도 삼킨 채 최대한 정숙한 자세로 관람 매너를 준수하며 극을 ‘수용’한다. 무대 위에선 말하고 무대 아래에선 듣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공연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아무리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모방된 허구가 더 현실같이 느껴지더라도,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진행되는 연극예술은 무대와 관객 간의 소통에 한계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앞에서 인물 간에 갈등이 펼쳐질 때, 등장인물들로서는 알 수 없지만 관찰자로서는 차마 보기 힘든 운명의 고난이 전개되려는 순간에 무대로 뛰쳐들어가 개입하고 싶은 충동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등장인물에 몰입했거나 그가 처한 상황이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즉 ‘나의 문제’ 로 와 닿는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