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진,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 이수자

이름: 최병진(崔炳珍, Naldo Choi)

출생: 전북 장수

분야: 전통연희

인천과의 관계: 인천거주

작가정보: amhaeng@naver.com
               http://arirangs.com/news/view.php?no=2082

<작가의 대표이력>
창작집단 지예 대표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전문사
연수구립전통예술단 단원
모던 창작 연희 꿈꾸는산대 단원
(사)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공연팀장
(사)남사당놀이 인천지회 교육팀장
개인전
2019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 국립무형유산원, 전주
2019 <출람지예>, 성균소극장, 서울
단체전
2021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노원문화예술회관, 서울
2021 <장단더하기 리듬>, 서울, 경기 일대
2020 <K-무형유산페스티벌>, 국립무형유산원, 전주
2020 <안개가 걷희면>, 뗴아뜨르 다락, 인천
2020 <인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 생생지락>, 서운야외공연장, 인천
2020 <살판난다>, 국악전용소극장 잔치마당, 인천
2020 <덧뵈기 세상>, 국악전용소극장 잔치마당, 인천
2019 <넌버벌 퍼포먼스: 불로초>, 중구문화회관, 인천
2018 <남사당 박첨지: 인천유람기>, 인천자유공원 야외공연장, 인천
프로젝트
2020 <광대생각>,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서울
2019 <땅재주>,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서울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대표작이라고 하면 두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라는 첫 개인 발표작이고 두 번째는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라는 창작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은 남사당놀이를 수학하고 정확히 10년이 되던 해이자 생애 첫 개인 발표 공연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남사당놀이 전반에 걸친 내용을 심도 있게 학습하고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통연희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이 전통공연이라고 하면 두 번째 공연은 창작 작품이다. 남사당놀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 연희극으로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를 바탕으로 남사당놀이 6종목을 소개해 줄 수 있는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관객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할 수 없었고 극적인 요소와 대사가 많아 초등학생 관객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처럼 작품에 몰입하여 관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뿌듯했다. 남사당놀이 6종목을 하나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 기획의도였는데 이런 생각이 이번 작품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에 잘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 국립무형유산원, 2019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노원문화예술회관, 2021

2.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교과서 예술여행>이라는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였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중 한 장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교실에서 먼저 학습하고 공연장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는 사업으로, 남사당놀이 6종목을 어떻게 하면 한 작품에 보여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딱 맞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제까지 활동했던 역량을 모두 발휘하자라는 생각으로 영화감독, 연출가, 작가, 배우, 무용인, 소리꾼, 마샬아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하고 의견을 나누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을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면 항상 12시가 넘었지만,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작업에 열정을 다하게 되었다. 초연 작품이다 보니 소품제작부터 의상까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는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참 그 연희꾼이 있으면 놀이판 분위기가 바뀌고 관객들과 참 잘 놀았지.”라고 기억될 수 있는 예술가로 남고 싶다. 재담(才談)이라고 하면 관객과 주고받거나 연희자들과 대사를 주고받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마당놀이 형식의 남사당놀이는 특히 재담이 많이 발달해 있다. 재담은 공연장소와 관람객들에 따라 상황에 맞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재치와 즉흥적인 연기가 필요하다. 남사당놀이의 기(氣), 즉 예능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지만 재담만큼은 개인의 역량 차이가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재담이 기가 막힌 연희자!’로 기억되고 싶다.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앞으로의 활동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사당놀이를 바탕으로 한 2차, 3차 창작작품을 기획·제작하여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남사당놀이가 6종목이기 때문에 매년 한 종목을 선정해서 창작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인형극의 맥을 이어온 남사당놀이 덜미(인형극)를 가지고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상을 비판하고 풍자를 통해서 유쾌하게 관객들의 가슴을 뻥 뚫어줄 수 있는 덜미(인형극)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인천의 섬과 바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작품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인천의 섬과 바다를 보면 파시를 따라 놀이판을 펼쳤을 유랑집단 남사당패 선대 예인들의 발자취가 생각이 난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선보이고 어떻게 소통했을까?’, ‘이곳 섬에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배를 타고 건너왔을까?’, ‘만족할 만한 무대를 선보이고 다시 육지로 나왔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섬에 들어가는 배 위에서 바다를 보며 골똘히 하곤 한다.

글/사진: 최병진




문화정책동향 2021-04호 〔2021년 6월 16일~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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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인천문화포럼




선택과 결정: 미술 작품과 전시의 생태적 실천

선택과 결정: 미술 작품과 전시의 생태적 실천

남선우(큐레이터)

“신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피 흘릴 때 외에는 이 멋진 색을 보여주지 않으시지. 그래서 우리는 지치도록 인간이 만든 천이나 거장들의 그림에서 다양할 빨간색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네. 하지만 신께서는 바위 밑에 사는 희귀한 곤충에 그 비밀을 숨겨 두셨지.”(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내 이름은 빨강(제2권)』, 민음사, 2009, p.183)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이스탄불 궁정화가들이 ‘빨강’이라는 귀한 색을 얻기 위해 찾은 것은 연지충이라는 벌레였다. 사뭇 낭만적이고 마술적으로 묘사된 이 소설의 장면에서 인간은 빨간색을 얻기 위해 자신의 피를 내는 대신 벌레를 죽여 말려 빻아 삶는다. 또 다른 안료 중 하나인 ‘본 블랙(Bone Black)’은 짐승의 뼈를 진공 상태에서 가열하여 얻는 탄화물질로, 전통적으로 특히 상아를 태운 ‘아이보리 블랙(Ivory Black)’을 귀히 여겼다. 이것은 오래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시판 적색 식용색소는 연지충을 이용한 것이며, 동물의 털로 만드는 붓, 동물성 젤라틴으로 만드는 아교, 살아있는 동물을 직접 사용하는 설치 작품이나 퍼포먼스 등,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또한 부지불식간에 많은 생명들을 착취하고 있다.

개별 작품 뿐 아니라 미술을 보여주는 방식, 즉 ‘전시’라는 형식 또한 비인간 동물을 직접적으로 착취하지는 않더라도 환경에 빚지는 일임은 마찬가지다. 전시의 속성을 수식하는 단어 중 ‘일회성’이라는 말은 어감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일회용’이라는 의미이다. 작품을 제외하고는(때로는 작품마저도) 전시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단기간 열리고 허물어지를 반복한다. 전시가 제공하는 환경이 전시가 의도하는 감각과 내용을 전달하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기관에서 1년에 진행하는 전시의 수는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한다. 매 전시를 열고 닫을 때마다 새로 짓고 부수는 가벽과 가구, 벽면 가득 부착되는 PVC 시트지, 작품을 보호하고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회용품 등, 전시의 스케일만큼 커지는 폐기물과 탄소 발생량을 목격할 수 있다. 인류세, 동물권, 환경 문제 등을 성찰하는 전시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해 왔다. 몇 주 후면 헐릴 나무 가벽에 상영되는 숲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연 친화적 전시환경 구성을 위해 자랄 수 없는 공간으로 옮겨진 식물들, 여러 대의 트럭 채로 실려 나가는 전시 폐기물 등을 볼 때면 전시가 전달하는 내용과는 별개로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기후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1.6.8.~8.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촬영: 남기용)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부산현대미술관, 2021. 5. 4.~2021. 9. 22. (사진: 부산현대미술관)

물론 전시를 만드는 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환경과 탄소발생량은 아니다. 그렇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는 기후 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가 결단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는 미술 전시의 속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회피도, ‘그렇다면 아무 전시도 열지 않고 아무 작품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라는 극단적인 반문도 아닌 보다 발전적인 방향의 모색이 필요하다. 작품과 전시를 만들기까지의 수많은 과정과 각각에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 환경에 덜 해로운 방식을 택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PVC시트지 대신 이면지에 에코폰트 인쇄를 한 《기후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서울시립미술관, 2021), 합판을 대지 않은 모듈형 가벽을 사용한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부산현대미술관, 2021) 등, 내용 뿐 아니라 형식과 진행 과정에 있어서도 친환경적인 방법을 생각한 전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시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2021.5.21.~7.25.) 또한 전시가 담고자 하는 가치와 형식적인 실천이 일치하는 좋은 예다.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 인천아트플랫폼, 2021.5.21.~7.25.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의 제목에 나열된 단어들은 인천의 생태적 문제들에서 따온 것이다. 서해안의 상징이기도 한 갯벌을 사라지게 만든 간척지, 환경파괴에 의한 변종의 문제는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목격하게 한 뉴 락(New Rock), 인간에 의해 삶의 형태가 너무나 달라져버린 개와 새, 그리고 도시가 밀어낸 자연을 힘겹게 갈음하고 있는 정원까지. 인천을 바라보며 떠올렸지만 사실은 국내뿐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이 전시가 취하는 태도는 대안 없는 비판이나 고발이 아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겹으로 얽힌 상황 속에서 ‘문제와 함께 머무르기’를 말하는 도나 해러웨이의 제안처럼 전시의 바탕에는 현 상황에 대한 보다 다성적이고 교차적인 고려, 그리고 다양한 개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장한나, <신 생태계>, 2021, 수집된 플라스틱, 수조 3점, 기포발생기, 조명, 모래 혼합설치, 가변크기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김화용,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20, 책자, 참고자료, 이미지 월 가변설치, 가변크기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의 내용만큼이나 인상적인 점은 기획과 전시의 구현방식, 그리고 개별 작업에서 또한 생태적인 배려와 고민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례로, 김화용 작가의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2020)는 앞마당에 닭을 놓아기르던 시대부터 닭을 ‘치느님’이라 부르며 잡아먹는 오늘까지, 각종 시각 재현물에 등장한 가금류의 모습과 우리의 시선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작가가 구성한 책과 시각자료,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자리로 구성된 이 작업은 재생지를 해실이 가장 적은 판형으로 잘라 친환경 잉크로 인쇄하였으며, 전시를 위한 가구는 칠하지 않은 목재를 재사용을 고려한 크기로 재단 및 접합해 만들었다.

이외에도 장한나 작가가 채집한 <뉴 락 표본 2017-2021>(2021)과 남화연 작가가 다종의 식물로 구성한 정원 <새로운 쾌락은 오래된 경계심과 같다>(2021)는 조명 없이 자연광을 이용하고 있으며, 정원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제공된다. 또한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와 찰스 림 이 용, 파브리지오 테라노바, 주마나 마나의 영상 작업은 하나의 스크린을 시간대별로 나누어 사용하는 교차 상영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미적인 이유나 구성상의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발언과 실천의 방향을 같게 하려는 기획자와 작가의 ‘언행일치’의 태도로 보였다.

Ecology of an Exhibition 웹사이트(https://artmuseum.princeton.edu/ecologyofanexhibition/) GCC(Gallery Climate Coalition) 웹사이트(https://galleryclimatecoalition.org/)

이런 실천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들도 등장하고 있다. 2019년 프린스턴대학 미술관은 미국의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한 작업들을 소개하는 《Nature’s Nation: American Art and Environment》 전시를 진행하면서, 실제 이 전시가 환경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 전시를 만들면서 생긴 탄소발자국을 자성적으로 추적한 결과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Ecology of an Exhibition’을 만들었다. 작품과 유물을 수집하고, 전시를 디자인하고, 도록을 인쇄하고, 작품을 보존하여 길이길이 수장하는 일들을 오로지 탄소발생량의 관점에서만 살펴본 것이다. 사이트의 메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전시를 만드는 여러 단계에서 관습적으로 행하던 선택들에 대해 재고하게 되며, 우리의 다음번 선택에 참고할만한 사례들도 접할 수 있다.

또한 영국에서 출범한 GCC(Gallery Climate Coalition)는 2030년까지 미술산업에서 일어나는 탄소발생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NGO이다. 여기서 제공하는 ‘탄소발생계산기’는 작품의 운송, 포장, 인쇄 등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탄소발생량이 얼마큼 달라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이 사이트에서는 환경부담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서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의 탄소발생량이 절반이하로 줄어드는 등, 노력의 실제적인 효과도 확인할 수 있다.

중언하다시피, 미술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고려할 점이 환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향유하는 대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고려한다면 창작의 과정에서 매 순간 조금 더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또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남선우(南瑄祐, Nam Sunwoo)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월간미술, 큐레토리얼 랩 서울, 일민미술관 등에서 일했다. 《막후극》, 《무무》, 《연극의 얼굴》 등의 전시를 공동 기획했고, 『게이트웨이 미술사』를 공동 번역했다.




《잠식 항》 전시로 본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

《잠식 항》 전시로 본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2020년 정서진 아트큐브 기획전시Ⅱ 《잠식 항(航) Submerged Vessel》은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을 보여준다. 인천 아라뱃길 초입,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전시장인 정서진 아트큐브에 정박해있는 배는 떠나온 바다를 마주한다. 배를 뒤덮은 것은 틸란드시아라는 관상용 관엽식물이며, 배는 몸통 대부분을 식물로 가린 채 변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 같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무엇인가를 잠식한다. ‘잠식 항’이라는 전시의 제목에 남아있는 개념인 ‘항구’는 이제 이 수수께끼의 사물이 다른 차원의 출항을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생태계 일면을 반영함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예술의 면모를 보여준다. 감춰진 대상에 대한 해석학적 상상력은 전시공간을 각기 다른 항로로 떠나는 항구로 만든다. 2015년경 작가 김유정은 뿌리 없이 생존하는 이 식물에 영감을 받은 이후, 여러 사물을 그것으로 덮어왔다. 침실이나 부엌, 거실 등 친근한 일상 공간을 뒤덮은 식물들은 묵시록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괴함이 완전히 다른 무엇이 아니라 친근한 것에서 약간 비틀린, 즉 동일성 속의 차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2020년 정서진 아트큐브 기획전시Ⅱ 《잠식 항(航) Submerged Vessel》(김유정, 2020.07.29.~08.23.)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인천 서구 전시장에서의 배는 장소성을 살리기 위한 소재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소재주의적 발상으로 이것저것 뒤덮는 것은 아니다. 이 전시에서의 배는 상징적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어업활동을 위해 인간이 만든 배는 자연을 이용하는 대표적 도구 중의 하나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유럽의 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오염 때문에 녹아내릴 남극을 선점하기 위한 과학 탐사선, 고장이 나서 인근 해역을 오염시키는 유조선 등 그 모두가 다 배다. 부정적인 예들이지만, 우리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수출로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선 한국의 컨테이너선, 약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왜구를 물리친 거북선은 또 어떠한가? 타자와의 협력적 또는 착취적 관계 속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견인하기 시작한 역사 이래로 배의 상징성은 컸다. 바다의 지배자가 곧 세계에 대한 지배자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으니, 근대에 확립된 이 헤게모니는 아직도 생생하게 작동한다.

김유정, <잠식 항>, 가변설치(틸란드시아 식물, 배, 물류상자, 항구의 여러 가지 오브제), 2020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물론 작가는 인간과 인간의 경쟁보다는 인간과 식물과 문명의 대조항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의 지배관계를 다룬다. 논밭이나 목장이 되기 위해 불태워지고, 잘리는 식물, 인간의 이익을 위해 개조되는 식물 등은 인간의 일방적 처분에 맡겨진 대상이다. 그런데 김유정의 작품 속 식물은 인간이 이룬 위업이 무엇이든 균질하게 덮어버린다. 작품 속 식물의 역할은 인간 문명에 내재한 위험한 계층성을 무화시키는 일이다. 단지 그것이 하나의 종이라는 점이 불길한 느낌을 남길 따름이다. 건강한 생태계는 자연이든 문화든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미덕으로 하는 예술은 문화생태계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된 순간 지구에 비극이 성큼 다가왔다. 미술 또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했고, 표현의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자연을 타자화한 채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적 의미의 근대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이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을 낳았고, 이는 인간이라는 재현적 관념을 벗어나려는 현대미술과 방향성을 같이한다.

인간의 부재를 극적 장치로 표현한 김유정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이 대립각을 세워나가는 시기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죽은 듯 살아있는 이 식물은 죽음을 환기시키는(memento mori) 알레고리인가? 하지만 종말적 이미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제이기에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식물은 동물 이전에 지구에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인류의 발생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고, 인류가 종말을 맞은 후에도 남아있을 존재 또한 식물일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인간의 오랜 부재를 암시하는 덥수룩한 덤불은 새로운 출발 또한 식물로부터 가능함을 보여준다. 공중에 떠 있는 습기만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식물 틸란드시아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적 측면에서 겸손과 금욕의 상징이다. 탄소중립이라는 절박한 환경 이슈가 암시하듯, 식물은 광란의 소비를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말적 한계 상황에 대한 계시처럼 다가온다. 죽은 듯이 있었던 것이 봄이 되어 활성화되는 식물의 생태 자체가 부활의 상징이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인간의 일회적이며 선형적인 생과 늘 새로이 되시작하는 나무의 생을 대조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예를 들었지만, 크게 보아 식물은 시간의 시험 앞에 승리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수 천 년 수령의 식물도 지구에 남아있으며, 수백 년 전의 씨앗이 조건을 만나면 싹을 틔우기도 한다. 작가에게 이 소재가 다가온 것은 이전에 주로 했던 프레스코 작품의 스크래치 작업을 하다가 날리는 분진을 저감하기 위한 공기정화 식물로 선택된 것이기에 치유와 복원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산/소비 주기는 광적으로 빨라졌고 회복이나 부활 또한 기약 없는 머나먼 약속처럼 들린다. 김유정이 말하듯이 ‘독식의 점령 무대’ 이후에 도래할 질서는 식물을 포함한 자연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해야 함을 경고한다. 식물 아래의 것을 들춰보면 문명은 그 민낯을 더 확실하게 드러낸다. 작가가 활용한 폐선과 녹슨 어업 도구들은 해양 생태계를 착취하고 오염시켰을 배 또한 생산 활동을 멈췄음을 알려준다.

김유정, <재생_숨>, 수집한 자개장 서랍과 라이트박스, 인조식물 2020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또한 배는 모든 기계가 그렇듯이 형태상으로 볼 때 필요한 기능만 있는 기능주의의 대명사로 그 자체가 심미적 대상이 되곤 한다. 근대의 기능주의는 이전 시대의 복잡다단한 상징적 문양들을 쓰레기로 간주하고, 한 시대의 미학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근대의 군더더기 없는 기능적 대상 또한 마찬가지로 쓰레기가 되어 쌓인다. 더구나 이전 시대의 생산/소비 주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짧아졌다. 김유정이 활용한 낡은 배는 뗏목이나 돛단배 같은 더 낡은 배의 대안으로 발명된 것이겠지만, 이전보다 더 짧은 수명을 마쳤다. 자개장과 식물 이미지를 결합시킨 또 다른 작품군은 장롱 같은 일상적 사물 또한 배와 마찬가지로 길지 않은 사용 기간을 뒤로한다. 작품 <재생_숨>에서 어느 골목에 버려졌을 낡은 가구에 작가는 사람 사는 집처럼 불을 켜주었고, 자개장과 어울릴법한 문풍지 바른 문 같은 이미지로 변신시켰다. 그 안에서는 사물과 대조항으로 설정된 자연의 이미지가 자리한다.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세트로 등장시킨다. 양자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되어 이해된다. 버려진 배와 가구는 예술작품으로 재생된 것이다. 그것은 전시 장소가 바다와 인접해있기도 하지만, 쓰레기 매립지가 있는 ‘환경 특별시’이기도 하기에 의미가 있다.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은 그것이 놓인 보다 큰 도시 또한 염두에 둔다. 생태와 환경의 문제는 인천 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이슈다. 기후변화는 현재 전 지구를 강타하고 있는 바이러스 문제보다 더 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정서진 아트큐브에서의 김유정의 작품이 생태와 환경문제를 정곡으로 찌르고 있지만, 작가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잡초 같은 것에 쌓인 오래된 사물은 오히려 침묵한다. 괴기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그 모두가 뭔가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꼭 집어서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감성이다.

무엇인가 이슈화시키는 것 자체도 상당한 공해를 만드는 역설적 상황에서 작가는 예술을 빌미로 쓰레기를 발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작가의 습관이 되다시피 한 수집은 재활용으로 이어진다. 유기물은 쉽게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깨끗하고 편리한 문명을 위한 많은 상품들이 폐기 이후에도 자연화 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자연의 정화작용을 온전히 거치지 않은 잔여물은 독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온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폐선과 자개장을 뒤덮은 식물은 시간의 가속을 보여준다. 버려진 것들이 빨리 자연화되는 것이 미덕이라면 시간은 긍정적인 요소일 것이다. 시간은 스크래치로 표면 효과를 준 프레스코화처럼 온전한 표면을 잠식한 상처들을 아물게 한다. 그렇지만 쓰레기가 자연화되는 세월보다도 더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의 시간 또한 가속화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환경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던 산업혁명 시기 낭만주의자들이 폐허에서 느꼈던 숭고함을 일깨운다. 근대의 낭만적 숭고는 긴급한 환경적 실천의 요구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선영(李仙英, Lee, Sun Young)

미술평론가. 대학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했지만 조선일보 신춘문예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년) 이래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미술 비평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공공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인천문화재단에서 추진했던 <지역공동체문화 만들기> 사업에서 수년간(2012~2015년)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연수구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 〈새며들다〉

연수구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 <새며들다>

한예솔(연수문화재단)

연초 야외공연을 계획하며 기상청 장마예보를 들여다보았다. 2020년 장마는 28.5일1) 동안 지속되었다. 장마를 피해 공연을 계획했지만, ‘역대 최장기간’ 장마로 곤혹을 치렀다. 2021년 야외공연은 39년 만에 온 7월 지각 장마를2) 피해 6월 초까지 ‘휘몰아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장마는 ‘변수’로 찾아와 야외공연 일정 소화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렇게 ‘기후변화’는 어느덧 우리 일상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연수구는 갯벌을 메워 일궈낸 도시로 국제대학·국제기구가 위치한 신도심 ‘송도’와 고려인이 사는 원도심 ‘함박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연수구의 생태 환경과 국제도시 특성은 국제교류 사업 설계 시 고려해야 할 지점으로 꼽혔다. <국제기구 협력사업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이하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는 ‘문화적 가치 확산을 통해 생태자원과 도시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동행도시 조성’을 목표로 ‘지속가능한 국제 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청사진을 그렸다.

연수문화재단은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 말부터 국제기구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파트너십(이하 EAAFP)과 교류를 시작했다. EAAFP는 송도동 G-Tower에 소재한 단체로,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 전반의 이동성 물새와 그 서식지를 보존하기 위해 2006년 11월에 설립됐다. 현재 35개국의 파트너로 확장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수문화재단과 EAAFP는 지난해 12월 <연수문화재단-EAAFP 역량 강화 세미나>를 시작으로 교류 협력을 본격화했다. 올해 3월엔 상호협력 업무협약을 맺었고, 문화예술을 통해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상의 이동성 물새와 서식지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동행을 진행 중이다.

연수문화재단-EAAFP 역량 강화 세미나와 업무협약식 ⓒ연수문화재단

재단이 이같이 연수구의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유는 명료하다. 연수구 내 환경과 개발을 둘러싼 상충된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태자원의 서식지였던 바다를 메워 만든 거주지인 연수구에서의 환경은 늘 ‘뜨거운 감자’로 여겨졌다.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인천~안산 구간 노선(이하 수도권 제2순환도로) 구축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구축 계획에 따르면, 이 도로는 람사르 습지인 송도갯벌을 관통한다. 환경단체는 서식지 파괴 및 조류 충돌로 인한 개체 수 감소를 우려해 재검토를 요청했으나, 수도권 제2순환도로의 ‘전략 환경영향평가’ 결과 대안으로 제시된 해저터널, 우회 노선 등은 경제성 저하로 사업 추진이 불투명하다.3)

그래서 연수문화재단과 EAAFP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다양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때론 한 장의 사진, 하나의 음악이 세상을 바꿀 때가 있다. 이러한 일들이 현재 연수구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가치를 통해 ‘철새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일이 그래서 더 무겁게 여겨진다. EAAFP와의 협력을 통한 철새보호는 단순히 환경보호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제적 효과도 상당하다. 연수구가 바다와 갯벌을 품고 있고 국제여객터미널이 위치한 명실공히 ‘국제 해양도시’이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해양문화자원 자체가 도시의 경쟁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다. 특히 송도 갯벌의 생태자원은 문화적 가치도 높아 관광 산업적 잠재력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철새 서식지를 알리는 일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 〈새며들다〉 ‘에피소드 1. 철새 새며들다’ 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ufGpEd_vwwg)

재단은 현재 EAAFP와 철새와 서식지의 문화적 가치를 활용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며들다> 영상 제작에 한창이다. 연수구에 찾아오는 철새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지식 정보를 소개한다. 철새를 보존하기 위한 시민과 예술가의 활동을 공유함으로써 철새와 그들의 서식지가 갖는 생태적·문화적 가치를 되돌아본다. 영상은 △철새 △습지 △송도갯벌의 기록 △시각예술가 △음악가 등의 활동을 담은 6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국문과 영문으로 제작돼 지난 5월 첫 영상을 시작으로 10월까지 매월 말 △연수문화재단 △EAAFP △인천시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다.

Ⅰ. <철새에 새며들다>

첫 영상인 <철새에 새며들다>는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제작됐다. 새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도록 영상을 기획했다. 세계 멸종위기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등의 소중함을 다시금 짚을 수 있는 계기를 전달코자 했다.

탐조(探照)를 위해 멀리 가지 않더라도 멸종위기의 새들을 도심 속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점은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연수구만의 매력이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새들이 더는 소중하지 않은 것일까. 무단으로 버린 쓰레기와 불법 낚시꾼들로 인해 새들은 힘든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Dean Ingwesen ⓒCraig Brelsford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철새모니터링팀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 <새며들다> ‘에피소드 1. 철새 새며들다’ 영상 속 사진

Ⅱ. <음악에 새며들다>
새소리는 오랫동안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유년 시절 피아노 소곡집에서 연주해봤던 <뻐꾸기 왈츠>의 작곡가 요나손은 ‘솔-미’(장3도)로 뻐꾸기의 소리를 표현했다. 또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17번의 주선율은 찌르레기 새소리에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한다.4)

새와 예술은 고전시대의 작곡가에게만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인천에도 자연과 새를 사랑하는 싱어송라이터, 전유동이 있다. 전유동은 스스로를 “너무 가까이 있어 돌보지 못하는 우리의 감정과 자연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라고 표현했다.5) 2020년 발매한 전유동의 1집 <관찰자로서의 숲>은 동식물을 소재로 한 자연주의 앨범이다.6) <관찰자로서의 숲>에서는 참새, 이끼, 뻐꾸기, 딱정벌레, 따오기가 등장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인 ‘참새는 귀여워’는 인천대공원에서 참새들과 함께 녹음을 한 곡이라고 한다.

10월에 소개되는 <음악에 새며들다>는 새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천 예술가 전유동과 호주 예술가 Bowerbird Collective의 활동 소개와 두 예술가의 새를 주제로 한 음악적 교류를 담고자 계획하고 있다. 이 두 예술가의 활동을 통해 우리 동네에 있는 새의 가치를 알리고, 이들의 보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주고자 한다.

* * *

철새와 음악 주제 외에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송도갯벌을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연수구 송도 기록에 새며들다>, 멸종 위기의 새들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소개하기 위해 캐릭터화해 동화책과 굿즈 등을 제작하는 <시각예술에 새며들다>가 소개될 예정이다. <새며들다> 영상을 통해 거리를 거닐다 영상에서 보았던 멸종위기 새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연수구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고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길 바라본다.

참고

1) 기상자료개방포털, 「기후통계분석-장마」
(https://data.kma.go.kr/climate/rainySeason/selectRainySeasonList.do)

2) 서동균 , 「이번 주말 제주부터 지각 장마…39년 만에 7월 장마」, 2021.06.28.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372046&plink=ORI&cooper=NAVER)

3) 정창교,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인천구간 영향평가 원안논란」, 국민일보, 2021.06.16.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1448238?sid=102)

4) 「음악 속의 새소리」, 네이버 지식백과 (2015)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9915&cid=59001&categoryId=59006)

5) 전유동 공식홈페이지
(https://wjsdbehd1030.wixsite.com/cloudsongs)

6) 네이버 <온스테이지2.0>,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onstage0808/222156016058)

한예솔(韓예솔, Yesol Han)

연수문화재단 문화사업팀에서 야외 공원으로 찾아가는 토요문화마당 공연사업과 국제교류사업 생태문화예술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로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화화 그리고 문화예술교육

보편적 가치로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화화
그리고 문화예술교육

김상원(인하대학교 교수)

우리 문화 및 예술과 관련된 법에서 ‘문화’와 ‘예술’의 개념은 ‘문화예술’이란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표현은 「문화기본법」, 「지역문화진흥법」, 「예술인복지법」,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등 문화와 관련된 법에 수없이 사용되고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에서는 그 정의를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국악, 사진, 건축, 어문, 출판 및 만화를 말한다.”라고 기술한다. 이러한 ‘문화예술’의 법적인 정의는 사전적 의미의 ‘예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나, 왜 이러한 복합어 표현을 법조문에 명시했는지 그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다. 아마도 ‘문화기획’ 또는 ‘예술기획’과 관련된 대상과 행위자의 활동영역의 중복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론해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필자는 본 기고에서 ‘문화’와 ‘예술’의 개념을 분리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어떤 개념을 정의할 때 자체의 속성을 기술하거나, 범주화를 사용한다. 범주화의 경우, 유사한 또는 동일한 성질의 것을 하나의 범주로 간주하는 방식이지만, 그보다 앞서 선택할 수 있는 범주 구분은 의미대립쌍, 즉 반대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볼 때, ‘문화(Culture)’의 대립개념은 ‘자연(Nature)’이다. 이때 ‘자연’은 언뜻 산, 강, 바다와 같은 풍경으로 해석되곤 하지만, 본래 의미는 산, 강, 바다와 같은,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하지 않은 채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스스로 지닌 본연의 성질대로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또는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지속가능성’ 개념은 독일의 산림경제학자인 한스 카를(Hans Carl)이 1713년에 산림경영과 관련한 언급에서 그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개념은 1952년에 일반 경제학에 수용되었고, 1980년에 환경연구단체의 보고서에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의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은 1987년에 개최된 유엔의 브룬트란트 보고서(Brundland report)에 채택되면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목표 개념으로 제시된 바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면서 지구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17개의 실천 목표(빈곤퇴치, 기아퇴치, 건강한 삶, 평생학습 기회 제공, 성평등, 물과 위생의 이용과 관리, 지속가능한 에너지, 일자리, 지속가능한 산업, 불평등 감소,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 지속가능한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의 대응행동, 해양자원의 보존, 평화, 이행수단의 강화)를 정하고 있다.

이러한 17개의 실천 목표는 개인의 실천과 더불어 지역과 국가 그리고 세계가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행을 위한 강력한 제도를 구축하고 상호 교류를 통한 한계극복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 지역, 국가 간 차이가 있으며, 그 목표에 다가가기가 녹록하지 않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이론적 논의 역시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세 가지 가치(생태적 가치, 사회적 가치, 경제적 가치)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 이 세 가지 가치가 전제될 때 지속가능한 발전이 담보될 수 있다는 모델은 소위 ‘세 개의 기둥이론(Three pillars theory)’이라고 한다.

세 개의 기둥 이론(Three pillars theory)‘세 개의 기둥 이론’은 독일 올덴부르크 대학의 베른트 하인스(Bernd Heins) 교수가 1994년에 자신이 제시한 모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사한 개념이 이미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다루어진 바 있고, 이 보고서에서 다루어진 지속가능성에 대한 세 개의 모델을 1994년 독일연방의회의 연구위원회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모델은 1996년에 독일 화학산업 협회(Verband der Chemischen Industrie, VIC)에서 최초로 도입되었기에, ‘세 개의 기둥 이론’의 정확한 기원을 정확히 밝히기 어려운 상태이다. (참조: https://de.wikipedia.org/wiki/Drei-S%C3%A4ulen-Modell_(Nachhaltigkeit))

‘그림1’은 세 개의 기둥 이론의 초기 모델이고,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진화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부터 2번째까지는 가치의 우선순위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두 번째 모델은 ‘약한 지속가능한 발전(Week sustainable development)’ 모델이고, 세 번째 모델은 가치의 우선순위가 제시되어 있어, 이를 ‘강한 지속가능한 발전(Strong sustainable Development)’ 모델이라고 부른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세 가지 기둥 모델이 1998년부터 널리 사용되었고, 유엔을 비롯한 각국은 이 중에서 ‘강한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을 수용하고 실천했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실천목표는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못하거나, 형식적으로 이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계는 ‘강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우선순위만으로는 그 실천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구자이면서 활동가인 존 혹스(Jon Hawkes)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네 번째 기둥인 ‘문화’를 제안하였고, ‘문화’는 인권, 문화적 다양성, 지속가능성, 참여 민주주의 및 평화를 위한 조건 조성에 전념하는 세계의 도시와 지방정부에 의해 2004년에 승인된 ‘문화를 위한 의제 21(Agenda 21 for culture)’에 포함되었다.

2015년 70차 유엔총회는 ‘문화를 위한 의제 21’을 보완하고,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시민권, 문화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달성 가능한 그리고 측정 가능한 행위와 약속을 지원할 수 있는 글로벌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문화가 포함된 미래」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는 시민과 함께 그리고 시민을 위한 정책을 실행하고 발전시킬 때 지방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역문화 정책의 강화를 제안하고 있으며, 지역발전모델의 기초 단위로서의 문화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독일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그림4’에 제시된 네 번째 기둥인 ‘문화’를 모두를 위한 보편적 가치를 문화화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간주하며, 이를 ‘문화교육’으로 표방하고 있다. 독일정부와 문화협의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ESD)’이란 맥락에서 환경교육을 자원의 책임 있는 사용과 이를 문화화시키기 위한 문화교육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교육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시민 토론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독일 지방정부는 지역문화조정사무소(Koordinationsbüro Kulturregion)를 두고 공공 및 민간 문화종사자와 지역의 문화담당자(기관) 사이의 소통(Kommunikation), 협력(Kooperation), 조정(Koordination) 그리고 합의도출(Konsensfindung)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의 문화정책은 1970년대 격변과 성장의 국면을 겪으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사회정책이라고 선언하면서, ‘모두를 위한 그리고 모두에 의한 문화(Kultur für alle und von allen)’를 지향가치로 제시했다. 이제 문화정책은 사회정책이다. 왜냐하면, 문화정책은 사회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수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3년에 발표한 「예술을 위한 예술인가(Art for Art’s Sake)?」란 연구보고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어려서 예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양한 직업영역에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에 주목하고, 예술교육은 예술가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 있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하는 사례는 영미권에서 적용되고 있는 펠드만(Burke Feldman)의 「원칙에 기반한 예술교육(Discipline-based arts education, DBA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술교육의 목적은 예술가와 예술비평가와 같이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예술교육이 “젊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이해하는 능력, ‘문명화된 삶’이 계속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심오한 만족감을 부여”하는데 이바지한다고 보고, 예술교육의 도구화를 강조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이미 40여 년 전에 시작했고, 우리나라도 ‘문화예술교육’이란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는 ‘예술교육’은 ‘예술을 위한 예술교육’이 아니라, 사회정책으로서의 문화정책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모든 사람에 의한 문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화교육이 필요하며, 이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예술적 개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술적 개입에 기반을 둔 문화교육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보편적 가치를 문화화시키는 데 기여하며, 이는 체화된 문화자본으로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김상원(金常元, Sangwon Kim)

독일 아헨대학교 철학박사.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교수, 인하대 문화예술교육원 원장, 인하대 대학원 문화경영학과 학과장, 인하대 대학원 도시계획학과 및 도시재생학과 교수(겸직, 참여교수).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원영 / 행정학 박사

(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겸임교수
(현) 기호일보 칼럼 「최원영의 행복이야기」 집필
(현) 인문학 모임 다카스(DACASDiscover Accept Concern Achieve Spread) 클럽 이끔
(전) 인천문화재단 초대이사
(전) 극단 십년후 창단 및 대표

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원영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류: 선생님께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무래도 극단 십년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극단을 떠나셨지만, 지역극단의 의미를 만들어낸 리더십이라는 명성은 여전하시니까요.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 내가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인데, 서로 아주 친했어요. 이 친구가 지금은 밀양연극촌 3대 촌장으로 있어요. 원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지금 우리 나이로 66세니까 대학을 퇴직할 때가 됐잖아요. 어쨌든 교수로 있으면서 촌장이 된 거죠. 그 친구 얘기예요. 당시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 하니까 이 친구가 본인도 유학을 떠나겠다, 이런 거죠.

류: 그럼, 같이 유학을 결심하신 건가요?

최: 그렇진 않아요. 저는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하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중앙대 연극과 연출 전공을 했는데 일본에 갔다가 인도로 가서 학위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십 년 있으면 대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포 한 잔 나누면서 헤어지기 전에 십 년 후에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만나자.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 평생 무료로. 돈은 다른 일에서 벌고.

류: 멋진 포부셨군요.

최: 그래서 1984년에 떠나서 1994년에 돌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어요. 논문이 아니라 동아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곳에 진실한 사랑이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귀국한 지 몇 개월 후에 친구도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도 연출을 할 수 있는 극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십 년 전의 약속을 이름으로 해서 ‘십년후’가 창단이 된 거죠. 처음에 3년을 같이 하다가 그 친구는 경산에 있는 대경대학교에서 마침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그게 장진호 교수예요. 장 교수가 가면서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 십년후의 송용일 대표예요. 장 교수가 떠난 후에 이분이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연출을 했죠. 이분이 당시 경기대학교 연극과에 겸임교수로 있었는데 무대제작이 전공이세요. 그렇게 같이 꾸려왔죠.
우리가 사랑으로 극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처음에 고등학교 막 마친 일곱 명을 데리고 시작했어요. 그게 1994년이에요. 1~2년 지나서 어느 날 그중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다니던 단원이 연습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그 친구가 학비가 모자라서 밤새 종일 서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한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 장 교수가 몸 연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니까 지치잖아요. 또 일까지 그렇게 하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얼마가 돈이 더 필요하니? 그랬더니 80만 원이래요.

류: 당시 80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죠. 제가 95학번인데 당시 학비가 160~18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돈 가치는 훨씬 컸고요.

최: 네, 그래서 80만 원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선배님을 찾아갔고 80만 원을 거의 강탈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걸 극단에서 줄 수가 없잖아요. 다들 어려우니까. 그래서 밖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돈을 주면서 당장 아르바이트 그만두라고 했죠.

판타지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02.12.4.~12.8. ⓒ극단 십년후

또 한 가지는 그게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할 때였어요. 그게 대작이었죠. 그때 잘 돼서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공연 횟수로 보면 한 300회 정도 했어요. 큰 성공을 한 거예요. KBS에 가서도 하고. 그런데 뮤지컬이 돈이 많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이 12월 8일이었던 것 같아요. 인하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공연이 있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을 갔어요. 대공연장은 1500석이었죠. 그날은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고약하게도 눈비가 섞여 내렸어요. 그런데 2층 매표소에서부터 사람들이 두 줄로 쭉 서서 주차장이 있는 데까지 늘어선 거예요. 직원이셨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유명 가수가 오는 것 아니고서는 이렇게 줄이 늘어선 적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작곡을 해주신 분이 최종혁 선생님이셨어요. 그날, 이 어른과 제가 손을 잡고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요.

류: 정말 기쁘셨을 것 같아요. 지금도 흔치 않은 일일 텐데요.

최: 그런데도 그때 저는 6~7천만 원 정도 빚을 졌어요.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실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원래 우리 애들이 밝아요. 근데 그날은 말이 없이 무척 무거웠어요. 당시 창단 때부터 같이 있었던 이경미라는 단원이 주인공인 삼신할머니를 했었는데, 이 친구도 얼굴이 어두운 거예요.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연출 선생님과 기획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기획사가 그 전날인가 이 작품을 찍어 갔대요. 그러면서 이건 전국적으로 공연해도 성공할 것 같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2억을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순회공연을 하면서 2억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다 갖고, 그 이후부터는 반반씩 나눈다는 조건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조건이고. 이 제안은 저희에게는 무척 좋은 조건이잖아요?

류: 그렇죠. 괜찮은 조건인 거죠.

최: 우리는 그런 기획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삼신할머니 역을 탤런트를 쓰자는 거예요.

류: 아…. 그게 문제였네요.

최: 극단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쁜 게 아니죠. 살림이 뭐가 있어야 애들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기회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어요. 연출자도 마찬가지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빚은 청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선생이라 생각이 좀 달랐어요.

류: 그러셨을 거 같아요.

최: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를 키워서 저기 더 큰 세상에 우뚝 세우고 싶은데, 이런 기회에 내 아이는 객석에서 보고 있고 다른 탤런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면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우리가 처음 이 극단을 만들 때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기획사에 전화해라. 20억을 줘도 이 아이를 삼신할머니로 쓰지 않으면 못한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안 되었어요.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01.12.1.~2. ⓒ극단 십년후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2006년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아이가 연기상도 받았고요. 물론 연출상도 받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도 전국에서 2~3천만 원씩 공연비를 받으며 6~7년을 더 공연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살리고 작품도 살렸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극단의 저변이 넓어졌어요. 단원들도 극단에 대한 믿음이 생겼겠죠. 그리고 리더 그룹이 우리도 눈앞의 금덩어리보다 제일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류: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께 극단 십년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겠군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은 많이 들어도 역사를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먼저 ‘Universal’, 작품에 좀 철학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Easy’, 작품이 좀 쉬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Exciting’,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강조 했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극본은 대체로 고동희 선생이 썼어요.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공연이 단군신화를 다룬 <박달나무정원>이였어요. 다음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즉 대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울타리 밖으로 사랑을 전파하려고 한 인물이 누굴까 하고 찾으니까 바로 광개토대왕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꽃님>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후 이런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 집단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충만하게 넘쳤을 때 외부로의 확장,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찾다 보니까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한 <도칸, 소서노>가 나왔죠.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봤어요. 이렇게 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 시대의 영웅들 속에 감춰져 있었던 모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극단 십년후 슬로건 ⓒ극단 십년후

우리 극단의 슬로건이 창단 때부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예요. 원래의 극단 로고는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잎사귀가 있고, 그것을 태양이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이 태양이 좀 구부러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크려면 누군가가 받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만 돋보이고 밑에 있는 잎은 영원히 사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구부러진 태양이 제일 밑에서 받쳐 주는 잎을 빛을 줘서 키워요.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극단 단원들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처음에는 우리 극단의 연출가도 이걸 이해 못 했어요. 안무 선생님, 화술 선생님까지 붙여서 열심히 가르치고, 음향이나 조명도 가르치고 했는데 연기가 될 만하면 나가고 하니까. 이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그랬어요. 키워서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손해 볼지 몰라도 나중엔 그렇지 않다. A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스타가 되면 결국 자기를 키워준 곳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올 때는 그냥 오는 게 아니죠. 관객들과 스탭들을 달고 오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을 달고 오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여기서 내보낼 수 있어야 더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는 거죠. 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구현될 수 있도록 희망으로 바꾸어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극단의 가치인 ‘사랑으로 살겠습니다’의 요체인 셈이에요.

류: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 오신 것 같아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궁금한 게 미국에서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귀국 후에는 의외로 연극 활동을 하셨으니까 내부에서 부딪치시거나 힘드셨던 적은 없었는지요?

최: 많았지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승승장구를 하니까 한번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가 공간이 좀 작아요.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인원수를 줄여서 2천만 원 정도 받고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7명 나오는 작품으로 축소해서 공연을 했어요. 이때 맡았던 중견 배우가 자기 나름으로는 여기서 공연을 하면 아르바이트비 정도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가 우리가 빚을 좀 청산을 했을 때예요. 다 끝나고 나서 기획실장이 정산보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공연을 대표했던 중견 배우가 속이 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줄 돈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던 거예요. 당연히 속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나 말했어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처음 준비했을 때, 녹음해주신 원로배우나 수많은 스텝이 거의 무료로 해주셨어요. 작곡해주신 최종혁 선생님 같은 분은 보통 뮤지컬 작곡하면 받는 금액의 5분의 1 정도만 받고 기꺼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중견 배우는 용산에서 한 달 동안 번 수입만을 나누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적다고 생각한 거죠.

류: 두 분 다 사실은 좋은 뜻이셨네요. 그 배우님께서는 고생한 단원들을 더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고,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고생하셨던 분들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거군요.

최: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작품을 하고 나서 돈을 나누는 전통이 있어요. 뭐냐면 돈을 봉투에 넣고 이름을 써서 광주리에 넣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수고한 단원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단원이 그중 하나를 뽑아서 그 사람을 주면서 포옹을 하고, 뽑힌 사람이 다음 봉투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주고 포옹하고, 이런 식으로 해요.
사실 저는 20년 가까이 극단을 이끌면서 저는 월급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시작할 때 약속이었으니까. 저는 밖에서 벌어 먹고살고, 때로 모자라면 채워 넣는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죠. 아까 말했던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2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냐고 의논해보라고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줬어요. 그랬더니 배우들이 극단이 어려우니까 극단에 놔둡시다. 이러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워요?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저는 살림살이하는 고 실장을 불러서 배우들, 스탭들에게 전처럼 광주리 행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도립극단이나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중견 배우들 몇 분은 나눠드린 수고비를 다시 극단에서 쓰라며 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분들도 돈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류: 정말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렇게 실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극단 십년후를 벗어난 선생님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십년후 대표를 그만두시고 밖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근황을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제 꿈이기도 했어요. 처음엔 극단 안에서 단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열었어요. 사실 당시 단원들은 인문학이 뭔지 모르고 저도 공부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훗날 단원들이 외국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요. 그 공부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인문학을 끼워 넣었던 겁니다.
처음엔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양철학을 함께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학부 과정만 했어요. 저는 10년이면 박사까지 다 끝날 줄 알고 한국에서 대학 다닌 것을 기재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 것만으로 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인하대에서 석박사 10년을 또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인문학 공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을 접하다 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제 생각 또한 달라졌어요. 예컨대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절로 아름답게 크도록 여건을 형성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린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은 기호가 달라서 불행할 수도 있잖아요. 미국을 가기 전에는 그런 설계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인문학을 접한 후에는 그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그때 알게 된 거죠. 만약 제가 빈 텃밭을 마련해서 제 계획대로 심어서 계획대로 결실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저만이 느끼겠지만, 만약 제가 이 텃밭만을 마련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텃밭을 가꾸게 해주는 리더라면 훗날 텃밭에 꾸려질 아름다운 동산은 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지 않겠어요?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구성원이나 저 모두 감동일 겁니다. 모두가 텃밭의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류: 요즘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이미 20년 전에 시작하셨군요. 당시엔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더 지배적이던 시절인데요. 확실히 앞서 나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너무 과찬이시고요. 하하. 제가 미국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정경숙(政經塾)』이라는 일본 책이었어요.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책이에요. 결국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정치경제 아카데미를 설립한 거죠. 저도 꿈이 이런 아카데미를 하고 싶었어요. 극단 십년후가 그 첫 번째 실험이었던 거죠. 40대 후반엔 성경과 불경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결국 용어는 달라도 가르침의 끝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바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카스(DACAS)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D(discover)’는 ‘발견하라’라는 의미인데, 뭘 발견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자는 거죠. 그런데 그 이치를 찾아서 배워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A(accept)’는 그걸 내 걸로 만들라는 거죠. 세 번째 ‘C(concern)’는 관심을 두는 거죠. 이건 사랑으로 교류하고 나누라는 의미에요. 그렇게 나누다 보면 ‘A(achieve)’로 함께 성취하겠지요. 다섯 번째는 이렇게 성취한 것을 우리끼리 갖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누어라. 즉 ‘S(spread)’, 확산시키라는 거죠.
이 과정을 6개월에서 1년을 인천에 있는 리더 그룹들과 함께했어요. 이런 취지로 11년 전에 30~40명 정도로 시작을 했지요. 이것 역시도 무료예요. 처음에는 무료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샀어요. 주변에서는 제가 정치를 하려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또 가까운 지인들은 무료이면 사람들이 더 안 온다고 걱정도 해주셨어요. 더구나 이걸 제가 혼자 강의를 했어요. 혼자서 한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에요. 교육의 일관성 때문이었어요. 여러 강연자가 오면 각각의 좋은 강의여도 모든 강의 일정이 끝나면 찐하게 남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1500명 정도가 이 공부를 했어요.

류: 제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강연에 대해 블로그 같은 곳에 후기를 올리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최: 제가 인터넷을 안 해서 못 봤네요. 감사한 분들이네요.

류: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비결을 여쭙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대중강연의 비결은 역시 다카스로부터 온 것일까요?

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카스에서의 경험이 결국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지금 기호일보에 매주 쓰는 칼럼도 그렇고요.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쓰는데 벌써 5년이 되었죠.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 30년을 새벽에 연구실에 가서 독서를 해요. 미국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11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12시부터 3시까지 공부하고, 잠시 잤다가 다시 6시면 일을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몸에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3시간 이상은 못 자는 것 같아요. 몸이 그 리듬에 맞춰진 거지요.
책을 사면 저는 어떻게 읽느냐면, 컴퓨터에 워딩을 하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300여 페이지 책이 약 80페이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다른 새 책을 읽다가 지치면 워딩해 놓은 요약본을 다시 봅니다. 그때 어느 부분은 ‘사랑’에 대한 자료 파일에 넣고, 또 다른 부분은 ‘친절’이라는 파일에 넣고, 이런 식으로 작은 파일들이 주제별로 수십 개가 있답니다. 그 파일들 안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 내용이 주제별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칼럼이나 강의에 필요한 자료들이 30년 동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인문학 콘서트는 기호일보 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5~6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경비는 기호일보사에서 책임지고 저는 강의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고마운 신문사에요.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론사가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거든요.

류: 코로나 이후로 인문학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가요?

최: 코로나 때문에 강연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유튜브로 녹화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최원영의 책갈피>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어요. 많은 분이 시청하고 계시진 않지만 몇 분이라도 이 방송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의 책갈피] 1화 <정답 없는 길 그래도 그 길을 가보고 싶다>, 2021. 5. 26.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wIZ6UEtefs)

류: 인터뷰 후에 저도 꼭 구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정리하는 느낌의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 십년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또 극단 바깥에서 지금의 십년후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최: 지금 참 힘들 거예요. 힘들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아무래도 열악하니까. 그래도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 단원들이 조금 더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다음은 두 가지 길밖에 없잖아요. 포기하든지 버티든지. 포기하면 다른 데 가서 또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럴 수 없을 만큼 연극을 하고 싶다면 답은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고루한 생각일 수 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배고파야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십년후 식구들 모두 너무나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십년후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너희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단원들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다카스라는 아카데미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곳 역시 십년후에서의 경험이에요. 그러니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이지요.

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지만, 특히 공연계가 타격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있어요. 극단 십년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최: 그래도 온라인으로 공연을 몇 차례 하면서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1년에 2~3편씩은 꼬박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요. 2년 전에는 김구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공연했고요.
십년후의 힘은 같이 밥 먹는 공동체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밥숟가락에서 정이 생기잖아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중구에 극단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건물 지하실이 수년째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용일 대표가 원래 무대 제작자예요. ‘서울무대’라고 아주 큰 무대 제작사를 운영했어요. 예컨대 <투란도트> 무대 지붕을 제작했고 유명한 영화 세트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무대 제작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죠. 이분의 지론은 장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극단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주인어른하고 이야기가 잘 돼서 그 지하실에 소극장을 지금 꾸미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오래 공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류: 선생님께서는 공동체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것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어느 쪽이 선생님께 더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저는 원래의 꿈이 지금 하는 이것이었죠.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 이렇게 전하는 것을 위한 저 나름의 실험이 극단 십년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 연장선에 있다고 봐요. 인문학 콘서트가 올해 가능하다면 하려고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다카스 회원들과 함께 그 안에서 <봉숭아학당> 같은 연극도 준비를 해왔어요. 이렇게 극단과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 연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연관이 되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이 돼요. 만약 극단 십년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경험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류: 삶에서 수많은 선택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런 선생님의 실행이 축적되고 그것이 강연에 녹아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의 축적도 있지만, 그 실행에서 오는 힘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진짜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변곡점이 있잖아요. 변곡점마다 선택의 길이 두 개가 나오죠. 이 선택의 길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이걸 얻으면 저걸 잃고 저걸 얻으면 이걸 잃기 때문이에요. 이때 무엇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그건 바로 ‘가치’인 거죠. 사랑이라는 가치를 기준에 두고 바라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사실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주위에서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결국 사회적 신뢰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겠지요.
우리 극단에서 작곡해주신 최종혁 어르신과의 관계가 그래요. 처음엔 무릎 꿇고 겨우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이제 이 집단에서 내쫓지 말어.” 이렇게 식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신 분장사분은 얼마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비용을 또다시 극단에 후원금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이렇게 우군이 되어준 스탭이 계셔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변곡점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속해서 행동해나갈 때, 사회적 신뢰가 생기고, 이 신뢰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화를 이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요.

류: 지금 말씀에 백 프로 공감합니다. 손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면,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고 남도 깎아 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할 때,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문제죠. 사실 그게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갈등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죠.

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크려고 해야 같이 성장하는데, 옆을 밟으면서 크려고 하면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최: 그렇죠. 결국 자신도 덫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류: 선생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가치를 지켜온 선생님의 실행과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의 가능성을 성장시키는 힘 역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 제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조금 꺼려요. 강의할 때나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이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 조연희 씨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조연희 씨 인터뷰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조연희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참여 작가

■ 육아로 지친 일상 속, 문화 활동 통해 자신감 되찾아조연희 씨(35)는 여가에 그쳤던 문화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18년, 부평구문화재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기자단에 지원했다. 그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을 주관하는 부평구문화재단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관람한 공연·전시 등 문화 활동을 시민에게 온라인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한 공연을 단순히 관람하고 평가하는 관객 입장이었다면, 기자단 활동을 한 이후엔 작품 기획과 제작, 연출 등 작품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배우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 얼마나 소통했을까?’ 등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육아와 씨름하던 조 씨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은행원이었던 조 씨는 결혼하고 두 살 터울의 자녀를 키우느라 일을 관둬야 했다. 육아로 장시간 일을 하지 않다 보니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뜻하는 ‘경단녀’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조 씨는 ‘사회에 나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고 한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 곳곳에서 하는 길거리 공연과 한국무용, 사진전, 뮤지컬을 찾아다니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기자단 활동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되찾았어요.”

조 씨는 부평구문화재단 SNS 기자단 외에도 인천시·남동구 SNS 기자단과 인천환경공단 인천환경미디어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부평구 문화도시 지정을 추진하는 민·관 기구에서 시민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는 부평구문화재단이 생활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참여하고 있다.

■ 지역 이야기를 담아낸 연극부터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공연까지, 눈에 띄는 작품들 ‘속속’인천에서 나고 자란 조 씨는 문화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8년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_부평 편>을 부평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으로 손꼽았다. 연극은 비옥한 토지를 가져 물자와 사람이 많았던 부평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징용해 무기 제조 공장 ‘조병창’으로, 해방 직후엔 미군의 군수 보급 기지인 군수지원사령부로 재편된 과정을 그려냈다.

“땅에도 고유 무늬가 있다는 의미의 ‘터무늬 있는 연극’은 평소처럼 공연장에 앉아서 보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관객이 배우를 따라 부평 곳곳을 이동하면서 관람하는 색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니 각 공간이 지닌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어요.”

조 씨는 이 연극을 통해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 숙소로 쓰인 미쓰비시(삼릉·三菱) 줄사택과 영단주택, 미군이 주둔하면서 클럽의 음악이 발달한 신촌 일대를 누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이었어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줄사택이 훼손된 것을 보고 ‘왜 이곳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크더라고요. 각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조 씨는 지난해 9월 부평아트센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진행된 연극 <극장을 팝니다>도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극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가정 아래 관객이 극장 예비 매입자로 방문한다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연극 한 회당 5명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극장을 팝니다>는 개인 유선 이어폰을 꽂은 관객이 진행자 이야기를 듣고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으로 전개된다. 관객 1명이 지정된 동선으로만 다니도록 기획된 코로나19 시대 맞춤형 비대면 공연이다.

“불 꺼진 대강당에 나 홀로 입장해서 둘러볼 기회가 언제 오겠어요. 무대 뒤편 숨겨진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이 문을 닫았잖아요. 이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연극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기발하고, 색다른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 지난달부터 마을 환경 개선 사업 참여 “지역 사회를 위한 문화예술 활동 참여 지속할 것”조 씨는 지난 6월부터 부평 주민과 지역 예술가가 협력해 마을 문화 예술 환경을 개선하는 부평구문화재단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회화와 팝아트·사진·공예·도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부평 지역 마을 4곳이 지닌 고유의 특성을 되살리기 위해 투입된다. 예술가는 주민과 함께 마을을 ‘어떤 방향으로 조성할지’ 논의하고, 벽화 제작이나 공예품 전시 등 각 마을에 어울리는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조 씨는 새롭게 단장하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글로 남기는 기록 작업을 맡는다. 그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데다, 수년간 시민 기자 활동을 통해 글을 썼던 이력이 있어서 적임자로 꼽혔다.

2021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포스터 ⓒ부평구문화재단

“이번 사업은 주민과 예술가가 수차례에 걸쳐 기획 회의를 한 뒤 진행됩니다.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들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저는 4개월간 마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생생하게 담겠습니다.”

조 씨는 앞으로도 지역 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도움이 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문화생활이 단순히 부차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주민 간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활용됐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지역 사회 문화예술 활동에 관심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예술’이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가는 길

‘예술’이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가는 길

한은혜(은하수미술관 대표)

2020년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코로나19라는 전염성 질병의 유행으로 생활의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었다. 비대면 교육 시장의 활성화, 화상회의와 재택근무, 배달 문화의 확산, 방역의 생활화 등 각 분야에서 언택트 상황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났고, 10년 후쯤 미래에 일어날 것만 같았던 많은 일들이 앞당겨졌다.

미래에는 많은 것들이 기계화·비대면화 될 것이라며 다방면의 기술적인 연구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런 일들은 기술분야의 산업 또는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예술활동 분야처럼 느껴졌고 나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로 모든 상상이 빠르게 실현되었고, 강제적으로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 꽤 아날로그한 감성과 생활 습관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나도 어느새 무인 상점을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온라인 공간에서 화상회의를 직접 주최하며, 온라인 공연을 감상하기도 한다.

2020년 코로나19 이후 팬데믹이 선포되고 문화예술교육의 장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교육 대상을 예술의 단순한 향유자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예술 경험을 더 깊게 내재화하고 실재적으로 삶의 변화와 사회 문제 해결까지 이끄는 매개체로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교육의 장에서 ‘대면과 현존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물음은 소극적인 기다림을 선택하게 했다. ‘괜찮아지면 만나러 가자. 조금 기다렸다가 만나러 가자.’고 다짐하면서.

인천서구문화재단 아동·청소년 특화 교육사업 <2020 찾아가는 예술학교: 찾아가는 미술관> 교육 현장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이 상황이 길어지고, 중요하고 긴박한 일상의 상황 등을 정리해 나가다 보니 그사이 ‘정서적 우울감’, ‘코로나19로 인한 공포감’, ‘아동의 발달 지체’, ‘가정에서의 스트레스 증가’ 등 새로운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예술과 예술교육현장의 새로운 시도와 노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은하수미술관도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2020년 상반기 동안 미루었던 교육을 어떻게 시행해야 하고 지금까지와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고, 인천서구문화재단의 <찾아가는 예술학교: 찾아가는 미술관>을 만나게 되었다.

은하수미술관은 이전부터 ‘찾아가는 은하수미술’이라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양한 명화 작품들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달하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본 후에 ‘명화일기’로 감상을 기록하고 작품을 재해석하는 인문학과 예술의 융합 교육 콘텐츠였다. 그래서 우리는 ‘온택트로 찾아가는 미술관’을 컨셉으로 하여 더 재미있는 그림이야기와 창작 키트를 가지고 찾아가기로 했다.

학교의 요구와 문화예술 강사들의 제공 서비스, 아이들의 실제 교육 참여와 만족도가 일치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많은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미리 문화재단과 미팅을 하고, 콘텐츠를 영상으로 제작한 후에, 학교에 전달해 콘텐츠의 내용과 활동의 수준 등이 우리가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 맞는지 교사로부터 확인받고, 필요할 경우 학교 교사들을 만나서 직접 수업의 시연을 거치며 콘텐츠를 보완했다.

인천서구문화재단 아동·청소년 특화 교육사업 <2020 찾아가는 예술학교: 찾아가는 미술관> 교육 현장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좌충우돌의 준비기간을 거쳐 2020년 하반기에 400여 명의 아이들과 만났다. 아이들이 활동한 사진을 전달받은 후에 ‘진작에 우리는 이렇게라도 만나야 했다.’라고 생각했다. 우린 주저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너무나 익숙했다. 비대면도, 영상 콘텐츠도, 영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비대면으로 만난 찾아가는 예술학교는 아이들에게도 강사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고 단절을 이어주는 기회였다. 2021년 역시 코로나19 상황은 2020년과 다르지 않다. 다만 교육을 하는 우리는 이전보다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상도 열심히 보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전달 방법도 고민하고, 아이들이 비대면 속에서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도 고민했다.

‘만남’의 형식은 달라졌지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싶어 한다. 서로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서로 공감하고 싶다. 아이들이 예술을 만나러 나올 수 없다면 예술이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확대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길은 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야만 한다. 방법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항상 우리는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온라인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만남의 공간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표현하며, 교감할 수 있는지 교육 현장에서도 새로운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언택트 중심의 생활은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비대면은 확산 될 것이다.

가상의 공간 속에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다고 느낄 만큼 가깝고 친밀하게 다가서서 경험과 교육을 내면화 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교육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자 앞으로의 숙제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 예술과 문화예술교육은 위로를 넘어서 다시 공감과 창의성, 자기 내면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다짐한다.

‘우리가 조금 느려도 기다려줘.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러 갈게.’

한은혜 (韓誾慧, Han Eunhye)

동국대학교국어국문학과 졸업(2007). 은하수미술관 대표(2018).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 미술 <시간을 달리는 수인선 낭만열차길 조성> 프로젝트 진행(2020). 길 위의 인문학 <거리로 나간 예술, 그라피티 아트로 마을에 흔적을 남기다> 강의(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