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球都) 인천’, 그 자부심에 덧붙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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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근대적인 외교와 무역이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근대 초기의 건축과 음식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야구 역시 인천의 그런 특성과 내력이 낳은 한 가지 산물이다. 선교사 질레트(한국명 길예태)가 YMCA 서울지부의 청년들을 모아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을 만들고 외국어학교 학생팀과 성동원두(훗날 동대문운동장. 오늘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터)에서 경기를 벌였던 1904년 무렵이 공인된 한국야구역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부터 부두와 외국인 주거지역 근처 공터 곳곳에서 미국인 병사들과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 야구가 시작된 것도 인천이었고, 본격적으로 야구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인천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개 근대문화란 빛인 동시에 어둠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며 전통문화를 강제 폐기당하던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근대적인 복식문화란 ‘단발령’이라는 문화적 폭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근대적인 여행문화란 ‘철도부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말이다.
야구 역시 외세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야구라는 것 역시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공놀이고, 일본 사람들이 일찍부터 즐겼던 스포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어지간한 다른 문화들과 달리, 한국에서 야구만큼은 굴종 대신 저항 속에서 싹을 틔웠고, 막연한 추종보다는 자발적인 열기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황성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3.1운동을 벌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과시하는 숨가쁜 세월을 막 지났을 무렵, 인천에서 ‘한용단(漢勇團 : 용감한 남자들이라는 뜻)’이라는 한국인 학생야구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주말마다 인천항 근처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이라는 곳에서 일본인 학생이나 직장인들로 구성된 팀과 경기를 벌이곤 했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관전하곤 했다. 황성 YMCA 야구단의 경기가 열리던 성동원두에 모인 사람들이 오직 신기한 서양식 공놀이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다면, 한용단의 경기가 열리던 웃터골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드디어 응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용단은 일본인 야구팀과 종종 야구대결을 벌였고, 한용단을 응원하는 것은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용단이 결국 일본인 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한 역전패를 당했을 때 한국인 관중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던 사건 때문에 강제 해산됐다거나, 해체된 한용단의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고려야구단’이라는 팀을 재결성해 해방 이전 한국 야구사에 민족적인 흐름을 이어간 자세한 사정을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인천은 단지 야구가 처음 전해지고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야구라는 서양문화를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화시킨 곳이라는 점을 짚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스포츠이며, 가장 많은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분야다. 하지만 만약 그 역사를 더듬어갈수록 낯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족보를 가진 것이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해볼수록 아찔하고 그래서 참 다행스럽다.
‘구도(球都)인천’. 그 네 글자는 인천에 살면서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지는 한 가지 자부심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 안에 혹 ‘야구가 처음 도입된 곳’이라거나 ‘50년대와 60년대에 국내 최강의 야구팀을 가졌던 곳’이라는 의미만을 담아두었던 이들이 있다면, 한두 가지쯤 더해줄 필요가 있다. 이곳 인천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야구라는 낯선 공놀이를 즐기기 시작한 곳이며, 후대의 야구팬들 역시 그것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게끔 해준 곳이라는 뜻 말이다.

글 / 김은식(작가,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저자)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그 역사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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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역 록 페스티벌의 역사는 1999년 음악 매니아들에겐 ‘슬픈 전설’로 회자되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Triport Rock Festival)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디지, 딥 퍼플,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드림 시어터, 애쉬 등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국제 규모의 록 페스티벌이 송도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많은 음악 팬들은 인천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관측 사상 유래 없는 집중 폭우 탓에 수해 경보가 내려졌다. 결국 딥 퍼플과 드림 시어터는 전설의 ‘수중 공연’을 보여주었고, 관객들의 안전 때문에 다음날 공연은 중단되었다. 그렇게 대형 록 페스티벌에 대한 음악 팬들의 꿈은 몇 년을 더 미뤄져야 했다. 그 후 7년 만에 인천시의 행사 지원 속에서 이 페스티벌은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라는 새 이름으로 송도 유원지 근방의 부지를 활용해 부활했다. 당시 같은 시기에 진행되던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과의 라인업 공유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아직 한국 팬들에게는 낯설었던 일본 록 밴드들이나 영-미, 유럽의 신진 인디 록 밴드들까지 빠르게 국내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로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비록 항상 비를 동반하는 기간이라 송도의 행사장은 진흙탕이 되기 십상이었지만, 어느덧 장화와 우비는 이 곳의 고유한 패션이 될 정도로 페스티벌 매니아들은 ‘펜타포트’라는 새로운 축제의 장에 적응해갔다. 2009년에 섭외 파트를 담당하던 기획사가 펜타포트를 떠나 새로운 록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잠시 어려움을 맞기도 했지만, 주최 측은 슬기롭게 운영 재정비에 성공했다.

2010년부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기존 구 송도 부지를 떠나 서울 지역과 더 가까워지고 잔디밭이 훨씬 많은 서구 드림파크로 장소를 옮겼다. 라인업 면에서도 헤드라이너급에서는 지명도 있는 밴드를 배치하고 가급적 국내 밴드와 아시아 밴드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더 주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티켓 가격을 낮춰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했다. 특히 2012년에는 우천시의 불편함을 확실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경인 아라뱃길의 터미널이 위치한 정서진 근방 쪽 부지로 옮겨 보다 쾌적한 진행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여전히 폭우가 내리는 시간은 존재했지만, 이제 펜타포트에 찾아오는 음악 팬들은 그에 대비한 모든 장비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록의 열기에 동참했다. 2013년부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다시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했다. 2000년대 후반 송도 신도시에 새로 구축한 ‘송도달빛 축제공원’에 마련된 부지에 이 페스티벌을 진행할 수 있는 상설 대형 무대를 건설하는 등 인천시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인천 지하철과의 연계로 외곽 지역이면서도 접근성은 용이해졌고, 한국 록의 대표 아티스트를 헤드라이너로 전격 배치하는 등 날짜별 라인업에 차별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15년에는 드디어 10주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올해도 착실하게 11번째 행사를 준비해가고 있다.

펜타포트가 이와 같이 1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록 페스티벌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공연과 관련된 여러 문화 주체들의 적극적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여러 난관 속에서도 회를 거듭할수록 보다 깔끔한 운영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주최 측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고, 인천광역시 차원에서도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통해서 행사의 지속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 행사가 지금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축은 바로 ‘관객들’이었다. 이후 생긴 다른 록 페스티벌과 달리 펜타포트는 라인업과 크게 상관없이 축제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좋아하며 즐기는 충성스런 관객들이 꽤 많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객들이 라인업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해마다 편하게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이 페스티벌이 잘 구축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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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매니아이면서 동시에 인천이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입장에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인천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행사로서 자리를 잡아 온 것에 대해 항상 뿌듯한 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인천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답게 보다 인천의 대중문화 수용자들과 더 친밀해진 행사로 폭을 넓혀가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에도 펜타포트 기간을 주변으로 하여 ‘펜타포트 음악축제’라는 이름 아래 인천 시내 여러 곳에서 공연 행사가 진행되기도 했고, 올해도 ‘사운드 바운드’ 행사의 일환으로서의 펜타포트 라이브 클럽 파티, 그리고 인천의 여러 야외 공간에서 펼쳐지는 펜타포트 딜리버리 행사가 진행되었다. 앞으로 시 문화 정책적 차원에서도 ‘펜타포트’의 이름을 좀 더 잘 활용하면서 연중 내내 대중음악과 관련된 소소한 문화 행사들이 꾸준히 진행될 수 있는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어떨까. 인천 지역의 대표 축제가 되려면 (외지에서 참가하는 매니아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천 시민들에게 항상 곁에 있는 음악 축제로서 그 기능을 더욱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페스티벌 운영 자체도 (인천 시민들을 위한 할인도 시행되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이 안정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더욱 다양한 음악 팬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다채로운 구성을 행사장 내․외 공간에서 펼쳐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인천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좋은 로컬 뮤지션들을 발굴해 이 기회를 통해 보다 넓은 대중에게 소개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발전하며 오랜 세월 인천과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그 위치를 지켜가기를 기원한다.

글 / 김성환(음악 저널리스트, 매거진 B.Goode/Paranoid 필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2016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돌아오는 9월 2일(금)부터 4일(일)까지 송도 트라이볼에서는 <2016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다. 올 해 2회를 맞는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은 송도 센트럴 파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트라이볼에서 진행되는 음악축제로 수준 높은 공연과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서 관객들과 함께하고 있는 트라이볼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다.

트라이볼에서는 여름의 중심 음악축제를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재즈’라는 장르로 페스티벌의 주제를 잡았다. 재즈는 다른 장르에 비해 자유롭다. 민족성을 기반으로 감정에 충실한 음악이기에 클래식이나 팝뮤직처럼 형식에 매이거나 그 틀을 깨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인종이나 국적, 종교 등에서도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사노바, 스윙, 월드뮤직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 열려있는 진정 자유로운 음악이 바로 재즈다. 지금도 다양한 음악들이 재즈와 만나고 결합되어 또 다른 새로운 음악을 생산해 내고 있다. 잼(즉흥 연주)은 어떤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재즈라는 장르를 통해 대표되는 공연의 모습이 바로 즉흥 연주다. 재즈는 이렇게 여러 장르와 아티스트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축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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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재즈 페스티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단순히 이벤트성 행사가 아닌 실제로 사람들이 찾아와 즐길 수 있는 축제여야 했기 때문이다. 페스티벌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진행된 많은 트라이볼의 공연 프로그램들은 재즈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트라이볼에서 진행되는 문화예술 축제에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관객들도 함께 키우는데 목적을 둬 왔다. 그래서 지난 2015년 첫 번째 재즈페스티벌을 치루면서도 가장 먼저 한 고민은 ‘관객들과 어떻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지’였다.

사실,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함께 있는 페스티벌이라는 시스템 방식은 현대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적 흐름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 축제 프로그램의 숫자가 2014년에 555개, 2015년 664개, 2016년 693개로 집계되었고 문체부 기준 이외의 축제까지 합치게 되면 매년 2,000여개의 축제가 매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축제 프로그램의 양적 팽창이 현 한국에서 좋은 축제를 만들어 내기 힘든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축제의 많고 적음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방향성이 없이 너도나도 따라가는 똑같은 축제를 지양하고 현실과 공간을 고려한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축제를 통해 관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기획자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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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좋은 페스티벌이란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페스티벌이란 기획자의 의도와 아이디어로 시작되지만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함께 참여하는 아티스트, 관객과 제작진까지 여러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좋은 축제를 기획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예산과 유명한 아티스트의 섭외를 위한 네트워크도 필요하지만, 페스티벌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운영되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를 서로 의논하고 보완해나가는 정리의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의 경험으로 부족한 점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을 준비하면서 수정을 통해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올해 트라이볼 페스티벌은 작년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부분이 달라질 예정이다. 먼저 지난해와 다르게 올해는 해외 아티스트 초청과 함께 장르에서도 다양화를 추구했다. 브라질 출신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베로니카 누네즈(Veronica Nunes)와 리카르도 보그트(Ricardo Vogt) 듀오는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을 통해 첫 내한공연을 가진다. 브라질리언 재즈, 보사노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연주자 상을 수상한 ‘김책’과 ‘김오키’ 그리고 폭넓은 음악적 이해로 자유로운 음악을 선보이이는 ‘송남현’과 ‘표진호’ 등으로 구성된 더 사우스 코리안 리듬 킹스는 당일 즉흥연주를 통해 재즈가 보여줄 수 있는 자유로움과 마음을 터놓고 음악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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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뿐만 아니라 올해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확장되어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부터 조성된 미디어 전시실에서는 전 세계 다양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재즈 영상들이 상영되고 관련 강연 및 미팅들이 진행된다. 야외광장에는 인조 잔디를 설치해 야외에서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트라이볼의 야경을 배경으로 재즈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공연을 마치고 난 늦은 시간부터 새벽까지는 트라이볼 내부에서 애쉬드 재즈, 일렉트로닉, EDM 등 다양한 음악을 통해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파티 & 댄스 타임도 준비되고 있다.

트라이볼은 지난 2012년 재개관 이후 공연, 전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되어 매년 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현재 국제적인 문화예술행사의 유치와 함께 국제교류에도 힘쓰고 있으며 최근에는 문화예술회관 연합회에 등록을 마치고, 지역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기반시설로서의 역할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천에서도 문화축제들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송도지역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축제로 자리 잡은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도시환경을 주제로 한 <그린 컬처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트라이볼의 대표 프로그램인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 역시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을 계속할 생각이다. 특히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의 경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수년간의 조사와 노력을 토대로 이루어진 함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많은 관객들이 함께 하기에 좋은 페스티벌을 만들어 내기 위한 다양한 의견 수렴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른 잠재된 발전 가능성을 더욱 믿고 있다. 노르웨이 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몰데(Molde)에서는 매년 7월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다. 6일간 진행되는 축제기간 동안에는 도시 곳곳에서 500개 이상의 콘서트가 진행되며 10만 여명의 방문객과 수천 명의 뮤지션들이 페스티벌을 통해 즐기고 하나 되는 감동적인 순간을 맞는다.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은 이제 시작점에 서 있다. 너무도 많은 축제가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송도에서 시작된 3일 동안의 음악축제 하나로 인천의 문화예술의 많은 것이 변화할거라고 믿거나 혹은 바꾸고 싶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페스티벌은 즐기고, 느끼고, 잘 노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함께한 관객들은 행복할 수 있고 문화예술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치 있고 보람된 경험이다. 인천 전역에서 재즈라는 자유로운 음악으로 축제를 즐기는 관객들과 아티스트들이 공존하는 그런 문화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좋은 페스티벌로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의 꾸준한 성장을 기대해 본다.

김세진 / 프로듀서, 인천문화재단 공간사업팀




음악으로 다시 발견한 인천, 사운드 바운드 축제

1883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과 각국 외교사절, 무역상이 모여들었던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의 신포동은 한때 서울 명동, 부산 광복동, 광주 충장로와 함께 우리나라의 4대 번화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인천의 신포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번영과 함께 중구 개항장 주변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바다와 인심을 두루 갖춰 누구나 한번쯤 반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낭만이 있는 인천 신포동 일대를 돌아다니던 개인적인 취미가 사운드 바운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013년 5월 11일 동인천역 부근의 오디오상가 뒷골목을 시작으로 LP까페, 복합문화공간, 재즈까페, 뮤지션이 운영하는 횟집 등에서 1회 사운드바운드(Sound Bound) in 아날로그 신포(Analog Sinpo)가 개최됐습니다. 공연의 제목처럼 ‘소리(Sound)’를 ‘되튀는(Bound)’ 과정으로 동인천 일대 장소를 이동하며 콘서트를 즐기는 것입니다. 출연 뮤지션은 허클베리핀, 이장혁, 머쉬룸즈, 몽키즈, 블랙백 등과 공모를 통한 인천 지역 뮤지션이 출연했습니다. 또한 동인천 오디오 상가에서는 중고 LP/CD 셀러를 모집하여 프리마켓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오디오 상가 뒷골목에서 LP를 뒤적거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막걸리 한 잔 즐기면서 사운드 바운드는 소소하게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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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인천아시안게임 기간에 맞춰 신포동에서 진행되었고 기존의 공간에 ‘파란광선’, ‘라뽐므’ 등이 추가되며 길다래, 오석근, 김수환 등 지역 작가들과 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작가들은 빈 상가를 며칠 빌려서 단 하루 공연/DJ파티를 위해 노가다와 철수 작업까지 강행하는 열정을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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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운드바운드부터는 주제를 정해서 좀 더 집중해서 소개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3회의 주제는 ‘공간’으로 잡았는데, 역사적음악적 유서가 깊은 장소에서 공연을 통해 ‘장소의 의미’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2009년 뮤직펍으로 시작해 200여 회의 밴드 공연이 이뤄진 <글래스톤베리>, 30여 년간 동인천을 지켜온 LP카페 <흐르는 물>, 동인천의 흥망성쇠를 같이 한 재즈 클럽 <버텀라인>, 인천시가 구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재조성한 복합문화예술공간 <인천아트플랫폼>, 1920년대 개항장 얼음 창고로 사용 후 방치되다 2015년 재탄생된 <빙고> 등 옛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인천 일대의 ‘공간’에서 음악으로 가득 한 봄밤이 연출되었습니다. 음악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장소와 역사에 취하고, 함께한 사람들에 취한 아름다운 봄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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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사운드 바운드 in 부평 애스컴(ASCOM)>은 기존의 공간과 음악에 ‘이야기’를 주제로 잡아 부평의 ‘애스컴시티(ASCOM CITY)’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평 3동 내 신촌 지역은 과거 일제 강점기 육군 조병창 지대에서 광복 후 미군 부대가 들어서며 많은 사람이 몰렸고, 시민들에게 반환을 앞두고 있는 현재까지 해당 부지의 풍경도 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특히 미군 부대가 주둔하던 시절,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클럽들이 형성되며 골목 안은 밤새 미군을 상대로 하는 밴드 음악이 흘러 넘쳤습니다. 현재 클럽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골목은 유지된 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사운드 바운드는 그 골목 안 이야기를 주제로 음악과 기쁨, 그리고 슬픔의 역사를 담아내려 했습니다. 여행 팟캐스트로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탁 피디의 여행수다’와 함께하여 골목 안 이야기를 팟캐스트로 담아내었으며, 음악 평론가 나도원이 들려주는 ‘인천 음악 이야기’ 란 토크 콘서트도 준비되었습니다. 또한 90년대 초중반 부평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지음 음악 감상회’를 부활시켜 마을의 새로운 커뮤니티 활성화를 기대하는 한편, 부평 신촌 지역의 과거 ‘애스컴 시티’를 볼 수 있는 전시관도 운영하였습니다.
<사운드 바운드 in 부평 애스컴(ASCOM)>에는 오리엔탈쇼커스, 램즈X오곤, 이지에프엠, 만쥬한봉지, 씨없는수박 김대중이 공연 팀으로 참여하였고, 70년대 컨셉의 의상과 골목 사진전 등 부평 신촌 지역의 원류를 찾기 위한 소소한 작업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해당 부지는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판이다. 친일파의 배신과 탐욕의 역사,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제국주의 병참 기지, 전쟁과 외국 군대의 주둔 그리고 시민운동까지” – 『캠프마켓』 한만송 저

이렇게 지역을 들여다보고 역사를 공부하며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단지 공연으로만 기획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프로그램들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애국지사의 땅에서 친일파의 땅으로, 일제 조병창에서 미군 기지로, 최신음악이 연주되던 기지촌에서 쇠락한 동네로 지나온 ‘부평 애스컴(ASCOM)’을 주제로 전시, 팟캐스트, 감상회 등의 프로그램에 음악과 공연을 통해 관객 분들이 조금이나마 무겁지 않게 애스컴의 이야기를 알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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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사운드바운드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철수 중에 할머니 한 분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전시장 사진에 있는 바로 그 분이셨습니다. 몇 년 전 ‘루비살롱’을 운영했었던 기간 이상으로, 그분도 몇 십년 전 신촌에서 ‘송도홀’을 운영하였었다고 합니다.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저는 20년 가까이 잊혀졌던 우리 선배들의 꿈과 삶을 알고 더 나아가는 일을 계속 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음악으로 잘난 척 하는것이 아닌, 음악을 매개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간이 갈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 동안 이곳에 계셨던, 이곳을 지켜오셨던 그 분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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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펜타포트 페스티벌’과 함께 ‘뮤지션’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국내 최장수이자 최대 록페스티벌인 펜타포트와 함께 공연의 중심이 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뮤지션’들을 주목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인천 아트플랫폼 A동과 C동, 글래스톤베리, 버텀라인, 낙타사막에서 진행된 사운드 바운드는 국악, 재즈, 월드 뮤직, 포크, 신스팝, 사이키델릭, 메탈 그리고 DJ 파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담았습니다. 또한 10Cm, 피터팬 컴플렉스, 단편선과 선원들, 크래쉬, 잔나비, 오곤, 세움, 사비나앤드론즈, 피해의식, 줄리아드림, 써드스톤, 오대리, 영이네, ohsukkuhn 등 사운드 바운드 역대 최강 라인업을 구성하였습니다. 부평 사운드 바운드에서 음악 애호가들을 모집하여 화제가 되었던 ‘지음 음악 감상회’도 2기 멤버를 모집하며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다섯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대형 무대에서 펼쳐지는 펜타포트와는 다르게 소규모 공연장에서 펜타포트 출연 아티스트들과 가까이 호흡하며 하나됨을 연출할 수 있는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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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운드바운드 스태프들은 인천의 섬에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 듣고 섬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며 준비하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모든 곳에 이야기가 있고 노래와 공연이 있습니다. 저희가 앞으로 갈 곳이 어디든 답사와 자료 조사를 하면서 늘 좋은 곳을 알게 되고, 취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조기떼의 소멸과 함께 오랜 역사를 이어온 연평도 파시도 끝났다. 조기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연평도 어장에는 조기군단이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월 따라 사람은 늙어가고 파시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인들 모두 이승을 떠나고 나면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흔적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더 늦기 전에 파시의 기억을 채록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 강제윤 저

강제윤 작가의 말처럼 잊혀지는 곳들에 대해 노래와 공연으로 찾아가고, 이야기와 이미지를 남겨놓고 싶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바뀌어 버리는 한국이라면 더욱 말이죠. 그동안 사운드바운드라는 공연 기획물로 소개해온 공간들과 부평 애스컴의 이야기들, 앞으로 소개될 섬의 풍경들 외에도 새로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인천 음악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운드바운드를 진행하면서 제가 본 인천은 음악과 관련된 화려한 과거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났고, 힘들고 부끄러웠지만 때로 즐거웠던 순간들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럴싸한 공간이라도 하나 남겨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남은 건 사진 몇 장뿐입니다. 번화가는 쇠퇴하고 불이 꺼진 지금은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크게 변하지 않은 그곳을 지나온 우리들이 이제 그곳의 과거와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집 걸러 비어있는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건물들, 희망보다는 억울한 사연들이 오가는 항구, 먹고살기 위해 계속되는 질긴 삶의 분쟁. 제가 태어나고 살아온 인천의 인상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부평에서 클럽을 운영하다가 결국 문 닫고 동네를 욕하며 서울로 갔던 저는 요즘 사운드바운드를 진행하면서 꽤 즐겁습니다. 그렇게 척박하고 원망스럽던 인천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풍경들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 동네와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곳이 옆 동네보다 가치 있는 곳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몰랐던 후배들도 동의하고 의미 있게 함께할 수 있는 장이 우리 인천에 꼭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앞으로도 사운드바운드가 가는 곳에 많은 관심과 제보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만들어나가겠습니다. 인천의 곳곳에서 사운드바운드와 함께 음악과 역사와 장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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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규영(루비레코드 대표)




종이 인형이 들려준 생의 희노애락 – 인천비타민연극축제 극단 나무 ‘이야기 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현실은 노래, 그림, 사진 등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감동 받기도 하며 다시 한 번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연극도 그 방법의 하나이다. 연극을 보며 배우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은 온전히 그와 우리만의 시간이며, 우리는 그와 함께 울고 웃고 호흡하며 우리의 삶과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천에는 2006년부터 연극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인천비타민연극축제가 있다. 연극인들의 순수예술공연축제인 이 축재는 올해 11회를 맞이하고 있다. 올해 주제는 ‘연극, 주파수를 맞추다’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연극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시도가 이뤄졌다. 올해는 가장 먼저 아이들과 소통하며 교감하는 ‘하하 호호 주파수로’ 연극으로 인천비타민연극축제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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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나무의 <이야기 하루>는 노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무대 위에 종이로 만들어진 투박하고 거친 가구들이 있고 그 사이로 하루라는 노인이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인 하루는 폐지를 주우며 생활하는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힘든 일상을 보내고 외로이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며 깊은 잠을 잔다. 그런데 곤히 잠든 그의 뒤로 세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정체 모를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하루의 머리맡에 둘러서고 하루의 머리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보이지 않는 그것은 그들에 의해 상자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때부터 노인 하루는 걸음마를 막 뗀 자신의 모습을 한 종이인형과 그의 과거 속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복했던 과거와 마주한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즐겁게 친구들과 어울리던 그 시절부터 전쟁 참전까지… 그러던 하루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갑순이와의 만남을 겪는다. 갑순이와 하루는 첫눈에 반하여 평생을 약속하게 되고, 하루는 꿈에서 행복한 자신과 갑순이를 바라보며 눈물 어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꿈속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자신들을 닮은 아이들을 낳아 놀이공원에 가기도 하고 연을 날리기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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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평생을 살면서 행복한 순간만 있을까? 가장이 되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중년의 하루에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쉼 없이 반복되는 일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가족의 무게 속에 마냥 행복했던 하루의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과 고난이 역력했다. 순탄하지 않은 세상살이는 사랑하던 갑순이와 하루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하루는 갑순이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던 하루는 쓴 물을 삼키며 “저 때 저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며 뒤늦게 한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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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은 살아갔다. 장성한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손주·손녀를 보며 행복했으며, 그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함께 했다. 굴곡지고 탈 많은 순간도 있었지만, 갑순이와 단둘이 남은 하늘 아래서 둘은 서로를 의지했다.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갑순은 결국 하루의 곁을 먼저 떠나버리고 만다. 꿈에서마저 아내가 떠나버리자 노인 하루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홀로 남아 투박하게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하루에게 세 명의 검은 옷은 입을 사람들과 아내 갑순이 다시 나타난다. 다시 나타난 아내를 보며 눈물 가득한 행복한 웃음을 짓는 하루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게 노인 하루의 인생 구경은 끝난다. 세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무리는 저승사자들로 홀로 외롭고 고독한 그리고 힘겨운 노년을 보내는 노인 하루에게 그의 희로애락이 담긴 기억을 보여주며 그를 위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우리의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구겨지고 주름진 인형을 통해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공연인 <이야기 하루>는 사실 아이들에게 쉽지 않은 작품이다. 하루라는 한 사람을 소재로 그의 희로애락이 담긴 인생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마다 필요한 최소한의 대사만이 쓰이는, 표정이 부재한 종이인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비언어 이미지극이기에 아이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시키고, 곳곳에 아이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과 장치를 배치한 것은 물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극을 가득 채우는 국악과 섬세한 종이인형의 움직임이 효과가 있었다. 시작 전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천방지축이었던 아이들은 이러한 노력 끝에 연극과 교감하고 소통이 되었는지, 극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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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나무의 <이야기 하루>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재였고, 비언어 이미지극이라는 낯선 개념이었지만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야기 하루>는 아이들에게 종이인형을 통해 꿈과 과거를 여행한다는 상상의 즐거움을 주었고, 어른들에게는 낡고 구김이 많은 인형들과 노인 하루를 통해 유년시절의 향수와 부모의 인생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기에 사실은 모두와 주파수를 맞춘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 시민기자 오지현




일확천금의 도시, 인천! – 춘원 이광수의 장편 <재생>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01 일확천금의 도시, 인천! – 춘원 이광수의 장편 「재생」
「재생」은 춘원 이광수가 1924년 11월 9일부터 이듬해 9월 28일까지 총 21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무정」과 「개척자」에 이은 3번째 장편소설로 삽화는 우리 근대 삽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석영 안석주(1901~1950)가 그렸다.

이 작품은, 돈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돈을 선택하는 여인과 돈으로 인해 사랑하던 애인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후일 부자가 되어 복수를 꿈꾼다는 내용을 가진 전형적인 통속 대중소설이다. 사랑과 다이아몬드 사이에서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사랑을 배신한다는 저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장한몽」(1913))의 이광수 식 버전이다.

이 작품에서 인천은 애인에게 배신당한 남자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곳으로 등장한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부자의 첩으로 가자 남자는 여인에 대한 복수, 즉 500만 원을 벌기 위해 인천에 내려와 미두중매소(오늘날의 증권회사)의 직원으로 취직하는 것이다. 현재 국민은행 신포동 지점 자리에 있었던 인천 미두취인소는 오늘날의 선물거래소와 같은 곳으로, 일제강점기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던 곳이다. 이광수는 이 작품에서 인천과 미두취인소를 “거의 모든 계급, 모든 종류 사람들이 갑작부자를 바라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으로 그렸다. 또한 「재생」에는 월미도도 등장하는데, 월미도는 더위를 식히는 피서지이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우연히 살아남은 자들의 아름다운 연대-12회 인천여성영화제

∗ 갤러리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부평, 음악도시로 가는 길

부평구는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한 ‘문화특화지역 문화도시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부평문화재단 주관 하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국비 포함 총 37억 5천만 원을 투입하여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을 진행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인천광역시와 부평구가 주최한다. 본 사업은 부평아트센터를 비롯해 부평아트하우스, 부평 3동 유휴 공간, 굴포천 복개 지역 주변, 캠프마켓을 거점으로 하여 음악을 중심으로 시각, 마을공동체, 생활문화, 아카이브 5개 분야의 생산, 연구, 지원, 소비 기능이 융합된 선순환된 문화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부평에서 추구하는 문화도시는 1980년대 문화와 예술이 활성화된 도시를 일컫는 기존의 개념에서 확장되어 1990년대 창조도시, 2000년대 공유도시를 거쳐 현대에서 강조하는 ‘문화 창조 공유도시’의 개념을 가진다. 문화예술인과 주민 협의체가 중심이 되어 공감대 형성을 위한 소통과 참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정보의 공유와 사업 계획의 전반을 함께 고민하며 문화예술이 누구에게나 공유되고 향유될 수 있는 문화도시를 꿈꾼다.

 부평, 왜 음악도시인가?
왜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도시인지 그 당위성을 묻는 이들이 많다. 부평은 조선 최대 군수공장이었던 부평 조병창에서 해방 후 미군의 주둔지 애스캄시티(ASCOM City: Army Service Command City), 1973년 이후부터는 캠프마켓(Camp Market)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한국으로 들어오는 미군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다. 부평 전체의 30%나 차지할 정도로 큰 규모였던 캠프 마켓은 미군들이 자대 배치를 대기하기도 했고, 각지에 위치한 미군부대의 물자를 조달,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덕분에 미국에서 갓 넘어온 세계 유명한 팝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최신 악기, LP판 등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캠프 마켓 영내에는 12개의 미군 클럽이 있었고, 영외에는 신촌 일대에 23개 민간인 클럽이 영업을 했다. 재즈, 블루스, 팝, 로큰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팝송 번안과 통기타, 댄스, 발라드, 힙합 등을 거치면서 지금의 ‘K-pop’을 생성한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클럽에서 연주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음악인들이 모이게 되면서 부평 출신 가수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배호, 현미, 한명숙, 국내 1세대 록 가수인 신중현 등이 부평 미8군 클럽에서 활동했고, 신지, 최성수, 구창모 등의 스타들의 고향도 부평이다.

부평 주민과 함께 걷는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의 다양한 해외 사례를 연구하고, 고민해 온 부평구문화재단 박옥진 대표이사는 부평이 음악도시,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창의인력이 모이고,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음악 산업을 꽃피우는 지역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부평구문화재단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16년 2월 부평구문화재단에 문화도시사업팀이 신설되었고, 음악 중심의 문화도시를 구축하는 만큼 오랜 기간 음악,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해온 기획자들로 구성되었다. 생생한 현장에서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작업하며 쌓아 온 노하우를 가감 없이 발휘하여 부평이 음악도시로 변화하는 데 민·관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될 것이다. 사업 선정이 확정된 2015년, 부평구문화재단의 주최로 전문가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 4회에 걸쳐 ‘2015 부평문화포럼 – 새로운 변화의 시작, 문화도시 부평’이 진행되어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에 대한 방향성을 모색하는 사전 준비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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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화도시 사업의 정책방향 및 사례’를 주제로 부평에서 진행될 문화도시 추진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의 이슈와 전략적 사업 추진의 중요성이 제안되었고, 두 번째, ‘문화도시의 자생적 운영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부평 문화도시의 자생적 운영과 지속성을 위한 가치와 철학, 생태계 조성, 도시공간과 문화 계획의 통합적 접근, 민관협력, 시민참여, 네트워크 구축 등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주요 논의 점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세 번째 포럼의 주제로는 ‘왜 부평 음악·융합도시인가?’를 중심으로 부평 문화도시의 비전에 대한 검토와 부평의 문화예술 자원인 풍물대축제, 미군부대의 대중음악 역사를 융합하여 현재의 부평 음악문화로 만들고자 하는 방향성과 과정에 대해 논의하였다. 지역 정체성, 음악 관련 사업의 형태, 시민의 음악 활동 등이 결합되어 부평의 음악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문화도시 부평의 미래’를 주제로 문화특화지역 사업이 제시하는 문화도시 브랜드에 대한 시각과 부평 문화도시 전략 수립의 중요성에 대해 제시되었다. 부평의 문화도시 브랜드 전략에 대해서는 부평 시민의 생활문화를 간과하지 말아야 함을, 누구나 인정, 상상, 참여할 수 있는 부평만의 방법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부평구문화재단은 국내에 아직 성공사례가 없는 음악 중심 문화도시로서 의미 있는 사례로 성장하기 위해 국내 음악도시 사례 지역을 방문, 연구해왔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의 사례가 되고 있는 가평, K-pop 클러스터 조성 및 음악극 축제가 자리 잡은 의정부, 음악창의도시 통영 등의 사례를 통해 문화도시 조성 시 발생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검토하며, 도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전 준비 시간은 문화도시 사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속 가능한 문화도시 부평을 함께 논의하는 장으로서 민·관이 협의를 통해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부평 음악도시,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마주치다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은 행정 주도하에 추진, 실행되었던 기존 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Top-Down 방식을 벗어나 Bottom-up 방식을 채택했다. 조성된 도시 속에서 실제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갈 주민과 문화예술인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기 위함이다. 많은 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고 조율하는 과정들이 쉽진 않겠지만 5년 뒤 사업의 결과를 보았을 때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문화도시로의 성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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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굴포천 및 미군부대 주변 도시재생 총괄기획을 겸하고 있는 황순우 총괄기획가를 중심으로 음악, 시각, 마을공동체, 생활문화, 아카이브 전문가들을 워킹그룹으로 구성되었다. 워킹그룹은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문화예술인 및 유관기관 관계자,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 수렴하는 역할을 가진다. 각 분야에 특화된 주제를 논의하며 부평에 실제로 필요하고 어울리는 음악·융합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방법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음악 분야는 정유천 회장((사)라이브음악발전협회)과 유세움 대표(문화공작소 세움)가 참여하고, 시각분야에 이승희 사무국장(부평미술인회), 마을공동체 분야에 이연옥 작가(부평예술인회), 아카이브 분야에 서은미 대표(시티인천)가 참여한다. 특히 아카이브 분야는 그동안 깊이 있게 조명되지 못 했던 부평의 음악적인 역사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사라져가는 도시문화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고취시키고, 수집 관리한 도시자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컨텐츠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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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그룹을 통해 수렴된 의견은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로 발전하여 실무회의를 거쳐 논의되고 추진 협의체 의결을 통해 실행된다. 실무회의는 인천광역시와 부평구청, 부평구문화재단으로 구성되어 수렴된 아이디어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방안을 검토한다. 주민의 생활문화, 지역적 특성, 경제 기반, 관련 법안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의견을 바라보며 최적의 방향과 방법으로 도시에 적용되어 많은 주민들이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가깝게 즐기고 경험할 수 있는 고민과 논의가 진행된다. 선정된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는 의견을 제시한 문화예술인 및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부평이 음악도시로 지속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지역에 적합한 ‘지역성’ 발굴과 자발적인 참여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자생성’과 ‘전문성’을 가장 중심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도시, 그 출발선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올해는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이 시작되는 첫 번째 해로 부평구문화재단 주관으로 지난 6월 9일 ‘부평 음악·융합도시 포럼 – 음악 중심의 문화도시를 열어가는 부평’이 진행되었고, 10월 14~15일 ‘부평밴드페스티벌’ 개최와 공모사업을 예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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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을 통해 부평은 고유의 역사와 문화예술 콘텐츠를 활용하여 타 지역 음악 도시와는 달리 유의미한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문화도시의 정책 수립 방향과 내용 등 발생될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제안이 제시, 논의되었다. 홍대 앞 문화 변화 과정에 비추어 부평이 음악 중심 문화도시를 추진할 때 ‘지역성’과 ‘자생성’에 좀 더 주목할 것을 제안, 사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홍보와 유통 플랫폼의 고려, 지역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의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함이 강조되었다.

음악도시 부평의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해 오며 2015년 개최된 ‘부평밴드페스티벌’은 올해 부평 음악의 요지였던 미군부대에서 열린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구성하여 음악의 집중도를 높이고, 클럽이 성행했던 시대를 추억하며 누구나 편안하게 즐기고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한다. 공모사업으로는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에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이 예정되어있다.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은 시작의 단계이다. 부평이 지닌 문화예술 자원과 역사로부터 어떻게 부평의 매력을 살리고 구조화할 것인지 창의적이고 문화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반환되는 60만㎡ 규모의 부평미군부대 부지와 개발이 미흡했던 도시의 구석구석이 음악과 휴식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일상적 삶에 부평의 음악문화가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음악 산업의 과도한 서울 집중을 극복하고, 침체기를 맞은 한국 인디음악의 활성화를 유도하는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부평 음악융합도시가 ‘음악을 중심으로 한 지속 가능한 문화도시 창출’의 성공사례가 되길 기대한다.

박재은 / (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인천과 연길을 잇는 10년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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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밟자마자 ‘변강도시 수려연변(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 아름다운 연변에 취하다)’라는 한글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분명 중국에 도착했는데 가장 먼저 마주치는 글자가 한글인 상황인 셈. 입국심사를 거쳐 짐 찾는 곳을 지나자마자 출국장으로 연결되는 작고 아담한 공항 밖으로 나오면 한자와 한글이 병기된 ‘연길’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위풍당당하다. 시내로 이동하는 내내 중국어를 몰라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한글은 거의 모든 곳에 병기되어 있었다. ‘연길이 조선족 자치주의 심장부’라는 말이 그때서야 실감났다.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자와 병기하도록 아예 법으로 못 박았다는 중국의 포용력(?)도 함께. 물론 연길에 조선족만 사는 것은 아니다. 한글을 모르는 한족들이 구글 번역기에 기계적으로 돌려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글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실제 연길에서는 중국어를 전혀 몰라도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어디에서나 한국어가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어로 말을 걸면 “한국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글 간판들에 취해 외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쯤이면 곳곳에 나부끼는 계도성 현수막이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이며, 엄연한 외국이라는 현실을 일깨워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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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금), 길림신문사가 주최하고 인천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제10회 인천문화재단컵 중국조선족중학생사이버백일장’ 시상식이 중국 연길시 국제호텔에서 열렸다. ‘인천문화재단컵 사이버 백일장’은 2006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인천컵 인성교육 글짓기 공모’로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2012년에는 한국 보리출판사와 중국 흑룡강신문사가 이 공모작 수장작들을 선정해 『엄마가 한국으로 떠났어요』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길림신문은 중국 정부에서 공인하는 대표적인 한글 언론매체로, 길림성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중국 내 뉴스는 물론 해외 곳곳에 흩어져 사는 200만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 신문사다. 조선족이 누구인가? 일제 시대, 생활고로 중국에 건너갔거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이 되자 그곳에 자리잡았던 사람들의 후예가 아닌가. 실제 이 지역(도문, 화룡, 안도, 돈화 등)은 항일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곳으로, 곳곳에서 민족학교와 기념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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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나눔’을 주제로 진행된 올해 백일장 공모에는 총 325편의 작품이 접수되었고, 산재지역 학생들의 작품이 84편, 연변지역 학생들의 작품수가 261편으로 산재지역 학생들의 참여율이 26%로 높은 편이었다. 평심(예심)과 본심을 거쳐 총 16명의 수상작이 뽑혔는데, 연길시조양천 제1중학 3학년 강해연, 흑룡강성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 3학년 리해횡 등 10명 학생이 동상(상금 300위안)을, 연길시실험중학 2학년 김정흔, 룡정시룡정중학 2학년 박수진 등 3명 학생이 은상(상금 500위안)을, 심양시조선족 제1중학교 2학년 김진희,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서영혜 2명 학생이 금상(상금 1,000위안)을, 용정시용정중학 1학년 차은주 학생이 영예의 대상(상금 2,000위안)을 수상했다. 16명 학생 수상자 외에도 10명의 선생님이 우수교원상을, 학생들의 적극적인 백일장 참여를 독려한 3개 학교가 조직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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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장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들이 가득했다. 중국 전역에서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다. 하루 먼저 와서 연길에서 숙박하고 참석한 수상자도 있고, 한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부랴부랴 한복을 빌려 입고 왔다는 수상자도 있었다. 아이들이 수상하는 경우 부모가 함께 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떠들썩하고 큰 규모의 시상식은 분명 아니었다. 아리랑이 울려퍼지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길림신문사의 김영화 기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이날 행사에는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연변TV, 연변라디오방송, 해란강닷컴 등 길림 지역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연변주교육학원 초중조선어문교연실 허애란 주임,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사 주필 등도 참석했다. 경과보고에 이어 시상이 이어지고, 길림신문사는 행사 10주년을 기념해 “조선족교육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지난 10년 동안 변함없이 조선족 중학생 인성교육상과 사이버백일장을 후원해준 재단의 공로를 높이 기린다”며 인천문화재단에 감사패를 증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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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를 맡은 연변주교육학원 조선어문교연실 허애란 주임은 “항상 이때쯤이면 길림신문사에서 언제 ‘선물’을 보내주나 고대한다”면서 “이 백일장은 민족 청소년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추억으로 담을 수 있는 앨범과도 같은 존재이며 이 글들을 심사하는 우리로서는 젊은 피들과 함께 뛸 수 있는 심장을 선물받은 것 같다”고 심사 소감을 밝혔다. “백일장에 오른 다수의 작품들을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친구 등 가까운 주변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사랑이야기는 물론 학교 선생님, 이웃, 그리고 낯모를 사람들까지 글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글 주제의 폭이 넓고 컸으며 특히 진솔한 감정세계를 잘 드러냈기에 설득력이 있었다”는 심사평도 뒤따랐다. 10년을 진행해오면서 길림신문의 이 백일장은 조선족 사회의 현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다. 실제 백일장에서 수상한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등 좋은 성과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고 한다. 올해 시상작 제목 중에는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 얼마나 가깝게 연결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단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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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에는, 그리고 이곳 인천에도 많은 조선족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가고, 연길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아주 어리거나 아주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이렇게 수십 만 명의 조선족이 한국에 나가 있다보니, 결혼식도 아예 한국에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남과 북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고, 한국인은 아니지만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 조선이라는 역사를 공유한 남북의 발전을 바라마지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곳이 바로 연길이었다. 연길 TV에서는 중국 방송과 연길 방송(자체 제작하는 뉴스와 중국 뉴스를 더빙한 프로그램이 동시에 나온다), 실시간 한국 방송(KBS, SBS 등)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오늘 유행한 아이템이 내일이면 연길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같은 동포로서 역사와 문화,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조선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 사회에 일시적인 지원이나 후원은 있어도, 이 백일장처럼 꾸준하게 진행된 행사를 찾기 어렵다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오고가는 비행기가 모두 만석일 정도로 한국(인천)과 연길은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고리가 잘 보이지 않을 뿐. 이 백일장만 해도 중간에 예산이 50%로 삭감되면서 규모가 축소되면서 중단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06년부터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고, 양 측이 함께 의지를 모아온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10년간 이어진 이 작은 백일장이 인천과 연길의 인연을 이어가는 한편, 활발한 교류로 이어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글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정지은

<2016 백일장 수상작 읽으러 가기>
대상 –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용정시용정중학 1학년 차은주)
http://tuney.kr/8pAdHI

금상 – 태양의 후예(심양시조선족 제1중학교 2학년 김진희)
http://tuney.kr/8pByQz

금상 – 사랑해 또 고마워(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서영혜)
http://tuney.kr/8pC6cK




음악도시 인천의 역사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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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 용산보다 클럽이 많았던 부평
음악 팬들이 인천의 서양음악 역사를 이야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시대와 장소는 1960~1990년대에 음악인들이 집결했던 신포동 및 동인천 일대나 부평, 관교동 등지를 많이 이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범위를 글쓴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인천의 음악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조선후기 개항시대부터 ‘두터운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니까. 서양 군악대의 행진곡이나 찬송가 등이 가장 먼저 유입되고 연주됐으며 한국 최초로 서양음악 교육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인천이라는 점은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글쓴이가 이 장에서 미군 주둔 이후 1960년대를 글의 ‘시대적 기점’으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글쓴이에게 허락된 원고분량 및 주제상 조선시대부터 훑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 두 번째는 서양음악의 범위를 소위 ‘팝 뮤직’의 부분으로만 한정한다면 해방 이후 미군정 혹은 한국전쟁 이후 시기서부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통상적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이후 한국 내의 서양 대중음악에 대해서는 대체로, 주둔했던 미군부대의 주변에서 수많은 기록들이 나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군부대 주변이 팝 음악이 유입되고 소비되는 가장 큰 시장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즈와 로큰롤 등 당시 미국민들 눈높이에서 유행하는 서양 대중음악의 소비는 군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고, 자연히 한국도 이 영향을 받았다. 실례로 훗날 가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배호와 오기택 등의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보이스가 미국의 크루너 재즈 보컬리스트(이를테면 프랭크 시나트라, 냇 킹 콜과 같은)들을 자양분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던 인천은 당시 이러한 서양 대중음악의 한국화에 좋은 토양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미 군수지원 사령부 ‘애스컴(Ascom)’이 있던 부평은 그 중심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인근의 음악 클럽 수가 한때는 용산보다도 많았다는 기록도 여러 문헌과 전언 등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이곳을 거친 가수나 뮤지션들도 훗날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케이스가 상당했다. 앞서 언급한 배호를 비롯해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과 키보이스의 김홍탁, ‘몰라요 몰라’를 부른 그룹 데블스의 김명길과 연석원, 그리고 지난 2004년 작고한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과 현 사랑과 평화의 리더 이철호 등은 이 당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거나 연주한 경험들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인천 뮤지션들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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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 동인천과 남구 원도심
부평의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해도,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 역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이는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시청을 중심으로 발전한 상권 및 문화권과 궤를 같이 했기 때문인데, 실제 이 주변으로 많은 클럽들(당시엔 ‘고고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옛 인천시민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바다. 대표적으로 초창기 ‘사랑과 평화’가 장기간 공연하기도 했던 뉴 반도와 맞은편에 위치했던 뉴 월드 관광나이트, 그리고 옛 인형극장 자리에 있던 신광 나이트클럽, 그리고 동인천역 인근 인영 고고장과 옛 인천 사람들이면 다 아는 극장식 나이트클럽 ‘국일관’ 등의 기록은 과거 신포동 음악 신이 보여준 ‘중흥과 쇠퇴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주요 멤버들이 연주하던 곳으로 유명 가수들도 많이 무대에 올랐던 ‘국일관’은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명소로 평가받았다. 국일관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난 2010년까지 영업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으나, 영업 종료 이후 2014년 건물을 철거해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고 현재는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가 새 건물을 세운 상태다.
그런데 부평이나 신포동보다는 다소 훗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곳들 말고 뮤지션들이 모여들던 또 하나의 중요한 거점이 있었으니, 현재 ‘인천의 압구정동’으로 불리는 관교동이 바로 그곳이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허허벌판에 차도 다니지 않던 곳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순복음교회와 남인천여중, 인명여고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갔고, 동아, 풍림, 쌍용 등 대형 아파트들의 건축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그 근처에는 원룸이나 빌라, 상업건물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즈음 이 동네에는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뮤지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글쓴이가 기억하기로 당시 이곳에서 연습실로 쓸 만한 공간들의 월세가 엄청나게 싼 편이었는데, 대부분 보증금이 100만 원 이하에 월세 또한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훗날 음악 칼럼니스트 성우진을 비롯한 음악계 선배들과 뮤지션들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당시 관교동에 연습실을 잡고 있던 밴드는 블랙 신드롬과 크래시 등 한국 헤비메탈 역사에서 북극성과도 같은 팀들은 물론 제로 지와 터보, 그리고 체리필터 등도 있었다. 그러니까, 관교동에 모였던 뮤지션들의 대부분은 록/헤비메탈 계열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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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관교동으로 뮤지션들이 모여들기 전 시점이라 할 수 있는 1985년에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헤비메탈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현 부활의 드러머 채제민과 과거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의 수장이었던 양범석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던 ‘제3세계의 꿈’이라는 밴드와 이승철, 김경호 등 가수들과도 함께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박창곤, 김창완 밴드 출신으로 현재 인천 밴드 ‘미인’의 드러머 이민우 등이 멤버로 활약했던 ‘아웃사이더스’가 지금은 없어진 옛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인천의 대표 록 밴드 ‘사하라’의 공연을 비롯해 시민회관이 역할을 다하고 사라질 때까지 많은 횟수의 록 공연들이 그곳에서 열렸고, 그중엔 한국의 음악 전문지 ‘핫뮤직’이 기획해 전국의 유명 록 뮤지션들이 모두 모이는 기획공연도 수차례 있었다. 이렇게 옛 시민회관에서의 공연 그리고 현 인천예총이 사용 중인 수봉공원 문예회관(인천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들이었던 RPM, 비비드, LPG, 사두, 440E(B4U) 등이 자주 공연을 가졌음) 등에서의 무대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된 밴드들끼리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가 결성되기도 했는데, 이 연합회는 1997년경까지 활동하다 지역의 모든 문화신을 집어삼켰던 IMF의 광풍을 이기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됐다.

인천 음악 신의 부활, 관건은 ‘지역사회의 관심’이다
비록 여러 요인들(IMF, 도시 변화로 인한 상권 이동, 그리고 당시 밴드들의 좁았던 자작곡 퍼센트 등등)이 겹치며 인천의 음악 신도 완전히 사라졌지만, 다행인 것은 15여년 뒤인 2000년대 후반 및 2010년대 초반서부터 서서히 부활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것이다.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통해 지역의 공연문화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문화기획자들은, 홍대의 인디 문화를 인천서도 꽃피울 수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금 토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실례로 2007년경부터 연주자들의 무대를 기획한 재즈 클럽 ‘버텀라인’과 2009년 영업을 시작한 ‘글래스톤베리’ 등 신포동의 음악 클럽들이 홍대 인디 신에서 기획공연으로 자리를 잡은 라이브 클럽들을 벤치마킹해 1주 정도에 1~2회씩 지금도 자체 무대를 열고 있고, 이 영향은 본디 LP카페로 출발했던 ‘흐르는 물’ 등 인근 업소들이 간헐적으로 기획공연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부평의 ‘락캠프’, 주안동의 ‘쥐똥나무’, 인하대 인근의 ‘울림’ 등이 홍대 클럽을 일부 모델화해 공연을 열고 있고, 사라진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천밴드협회’가 몇 년 전 조직돼 활동을 재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인천 부평에서 활동했던 ‘루비 레코드’는 2013년부터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형 축제 ‘사운드바운드’를 통해 과거 신포동과 부평 등 대중음악 역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는 곳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뮤지션 중에서는 일본 뮤지션들과도 교류 중인 ‘해머링’과 ‘투견’, ‘블랙 메디신’ 등을 비롯해 최근 인디 신에서 주목받는 알포나인틴, 빌리지 브라더스, 포 헤르츠 등이 인천과 서울 등을 오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글래스톤베리’의 이진우 대표는 “인천 전역에서 음악에 대한 다양한 일과 다양한 무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다채로운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한 바가 있다. 실제 이 대표의 이러한 언급은 지역 내 클럽의 오너들과 문화기획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 인천 음악 신의 부활은 이들이 내리는 노력의 뿌리에 인천시민들이 보여주는 관심을 거름으로 할 때에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아직은 이들의 노력에 비해 지역사회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매우 저조한 편인데, 공직자들과 언론은 물론 시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하다. 시나 구에서도 할 일이 많다. 가장 먼저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밴드는 물론 인천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활동까지 빼놓지 않고 기록해나가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인천의 위치는 그 기록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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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배영수(인천in 기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