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비전, 시대정신을 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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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이든 발전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비전’이다. 비전이 뚜렷해야 방향이 서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도 준비할 수 있다. 비전이 공유되어야 조직구성원의 의지와 에너지도 결집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전 없는 지도자만큼 무책임한 지도자는 없다. 구성원들이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조직만큼 위태로운 조직도 없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라 일도 다르지 않다. 지금 나라가 혼돈스러워 보이는 것은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고 한반도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국가의 비전이 안 보인다는데 있다. 대한민국이 힘을 모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함께 어디를 바라보고 국력을 모아야 하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나라의 중요한 분들이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놓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국가 혼란의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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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어수선하다. 지역민의 역량이 잘 모아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즉흥적으로 내던져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역사회의 비전이 정확하지 않으니 생기는 문제들이다. 설령 비전이라고 제시되어 있는 경우에도 지역의 지도자들과 공직자들과 지역민들이 그 비전에 공감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탁상에서 만들어진 비전일 경우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다 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천도 비전을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장단기 계획이 설정되고, 그것을 지역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인천시민들이 공감ㆍ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이 힘을 갖고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본다.

첫째, 인천의 비전은 현재 상황과 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진단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좋아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해서 다 끌어 써서는 안된다. 현실에 기초해서 현실적인 비전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 몇 사람이 만들어 자신들만이 공유하는 비전이어서는 안된다.

셋째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시대정신 또한 급변하기 마련이다.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이 시대의 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내 그것을 비전으로 담아내야 한다. 시대와 불화하거나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과 역행해서는 그 비전이 힘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다. 오히려 지역을 퇴행시킬 뿐이다.

여기서 특히 어려운 것이 바로 시대정신을 담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지만,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려워한다.

과연 2016년,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방성이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열린 도시’는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폐쇄성을 극복해야 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출신 지역이나 학연 등 특수한 연고 변수가 인천을 좌우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도 당연히 개방적이어야 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와 지구촌을 향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인천은 어떤 면에서도 열려 있고 유연하며 포용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전과 평화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야말로 21세기 도시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비전이다. 지금 인류 사회는 각종 위험과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어느 도시도 일상화된 테러와 전쟁과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데 있을 정도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는 모든 도시들이 직면한 핵심 과제가 된 것이다.

셋째는 ‘생태 도시’다. 지금 지구촌은 심각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험으로부터도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매년 수많은 생물종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런 21세기에, ‘생태 도시’는 선진도시의 피해 갈 수 없는 숙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넷째는 협치다. ‘민-관 협치 도시’야말로 인천의 중요한 비전이어야 한다. 시민참여형의 정책결정, 시민과의 원활한 소통, 여-야간 협치, 민-관간 협치를 통한 상생 정치야말로 지역이든 나라든 미래의 비전일 수밖에 없다. 오래된 관료제의 권위와 관(官) 중심의 사회질서를 내려놓고, 수백 년 이어져 온 수직적 위계체제의 관행을 내려놓고,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민과 관이 함께 책임지는 도시가 이 시대 정치-행정의 비전인 것이다.

다섯째는 창조다. ‘창조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역이든 창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민의 창의성을 제고해야 하며, 창조적인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드는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성을 존중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진작해야 한다. 문화예술 활동의 공간도 넓어져야 한다.

인천이 인구 300만, 3대 도시의 위상을 넘어 지방 시대를 이끄는 선진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실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설정하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열정과 의지를 모아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그것을 비전에 담아내며 지역민의 열정을 결집시켜 냄으로써, 인천이 전국의 모든 지자체들이 부러워하는 선진 도시로 발전해 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홍덕률 / 대구대학교ㆍ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




‘짜장면식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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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2005년 12월 5일 저녁 무렵의 일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소략한 발표회가 열렸다. 한중간의 도시교류, 곧 인천과 티엔진 그리고 부산과 상하이 간에 주고받은 도시 교류의 정황을 돌아보는 토론회 자리였다. 약정 질의자로 참석한 내가 거기서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은 한국의 짜장면 1일 소비량이 700만식에 달한다는 거였다. 계산을 대보니 얼추 1인당 1주일에 한번 꼴이다. 가합하다고 여긴 것은 내 스스로 거기 해당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짜장면 먹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끼니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중국집이 눈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짜장면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것이니, 인이 배겼다는 말이 그 말인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타이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타이베이 공항에 내리자 눈을 찔러오는 문구가 있었다. 타이베이에 와서 꼭 해야 할 열 가지 가운데는 르위에탄(日月潭)에 가보라거나 구꿍(故宮) 박물원에 가보라거나 103층 짜리 빌딩에 올라가 타이베이 야경을 감상해보라거나 하는 등은 그렇다 쳐도, 니우러우미엔(牛肉麵)을 꼭 먹어보라는 거다. 이 문구가 내 눈길을 잡아당긴 것은 필시, 그 전날 인천에서 짜장면의 1일 소비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기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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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칭화대학에서 개최된 학술 발표회를 마치고 타이베이 시내에 자리 잡은 니우러우미엔 거리에 들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다른 니우러우미엔 맛을 시식하고 나오는데 서점이 눈에 뜨인다. ‘직업병’을 버리지 못하고 서점에 들어가보니 <니우러우미엔지에>(牛肉麵節)이라는 책자가 다시 내 눈길을 고정시킨다. 서문을 쓴 이가 당시 타이베이 시장 마잉지우(馬英九)니 전후 사정이 감이 잡힌다. 니우러우미엔을 도시 브랜드의 물목에 올려놓은 거다. 타이베이와 우육면, 인천과 짜장면이 서로 연결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던 거였으니.

그 뒤 짜장면에 필이 꽂혀 중국의 옌타이(烟台)는 물론 산동성에서 북경까지 싸돌아다니기를 몇 차례 하던 중, 인천문화재단에서 여비를 대줄 테니 경인일보에 짜장면 이야기를 썰을 풀어보라는 거다. 당시 재단의 대표로 일하던 최원식 교수께서 평소 동아시아 타령을 하는 후배에게 ‘배당’한 용역이었겠다. 그렇게 짜장면과 인연을 맺어 연재를 마친 다음, 학교 수업에도 몇 학기 우려먹었겠다. 그런데 짜장면 뒤에 감추어진 역사와 내력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였으니…. 과장을 보태자면, 엄청나고 무지막지한 비밀이 숨어 있는 거다.

그 비밀 가운데 소소한 몇 가지를 공개하기로 하자. 첫째 춘장의 정체. 우리가 짜장을 볶는데 들어가는 이른바 춘장의 본명은 티엔장(甛醬) 혹은 티엔미엔장(甛麵醬)이다. 티엔(甛)은 영화 <첨밀밀>의 그 첨이다. 콩으로 만든 우리네 된장의 구수한 맛과는 다른 달달한 맛이 니는 건 밀가루를 주원료로 썼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으로 건너와 춘장으로 불리게 사연이다.

짜장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산동은 밀의 주산지. 따라서 주식이 밀이고 거기서 자연스레 만두라는 메뉴가 탄생된다. 노수 강의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상 위에 만두를 빚어 올린 제갈량이 바로 산동 출신이다. 그 만두에 양고기나 돼지고기 등의 소를 넣은 것은 예전에는 일반 노백성들이 언감생심 명절에나 차례가 돌아가는 그런 것인지라, 소를 넣지 않은 만두가 주식이었다. 그렇게 밀가루로만 빚어 찐 만두를 그냥 먹으면 그게 좀 그렇다. 그래서 곁들인 게 바로 날 대파인데 대파만 먹기에는 그야말로 싱거우니 그걸 춘장에 찍어먹은 것. 그런데 그 대파를 뭐라고 부르냐. 총(蔥) 혹은 따총(大蔥)이라 부른다. 춘장은 그러니까 총장의 와전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대충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허명만 화백의 <식객>에도 대강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그 대파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산동의 장치우(章丘)에서 생산되는 대파는 길이가 2m에 한 뿌리 무게가 1kg 나가는 그야말로 대파인 것. 파는 본시 양물이라 겨울에도 날씨가 웬만하면 밭에서 자란다. 그래서 중국을 휩쓴 인기 드라마 <촹관동>(闖關東)에tj ‘장치우 대파 한 뿌리면 겨울을 난다’고 하는 대사도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 만두를 한 입 베어 먹으면서 다음, 길고 굵은 대파를 총장(춘장)에 찍어 먹는 게 바로 산동의 노백성들이 일용하는 주식이었다고 보면 어김없다. 우리로 치면 여름에 찬물에 보리밥 말아 풋고추를 된장 혹은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과 영락없다.

대파를 찍어먹던 그 춘장을 우리는 지금 양파를 찍어먹는다. 그 양파는 중국말로 양총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파(蔥)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 먹는 짜장면 치고 양파가 안 들어가는 짜장면은 찾기 힘들다. 대파가 양파로 은근슬쩍 둔갑한 소치다. 그리고 그 양파는 아무래도 대파보다는 갈무리가 쉽다. 무엇보다 저장기간이 대파보다는 훨씬 길다는 데 착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그치지 않는다. 그 양파는 누가 공급했는가. 예를 들어 인천 차이나타운에 최초로 문을 연 것으로 되어 있는 공화춘에 식재료로 양파를 공급하자면 누군가가 양파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 양파 농사를 지어 식재료로 제공했던 공급선이 바로 산동에서 넘어와 소사 부평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화농(화교 농민)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짜장면이라는 메뉴에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타이베이에 가서 니우러우미엔을 먹어야 한다면, 베이징에 가서도 꼭 먹어야 하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페킹 덕, 곧 베이징 카오(北京烤鴨), 다시 말해 오리구이다. 필자가 ‘연구년’으로 중국에 머무르던 2001년에 집 근처 음식점 궈린에서는 한 마리에 25원,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4000원 남짓이었으니 결코 비싼 메뉴가 아니건만 그 베이징 오리를 구어차이(國菜 나라를 대표하는 요리)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내공이 들어간 메뉴이다. 그 오리구이를 먹던 어느 날 갑자기 황연대오한 것이, 바로 그 메뉴가 바로 짜장면과 같은 형제간이라는 점이었다. 재료를 살피자. 하엽(荷葉 연잎)이라 부르는 밀쌈에, 일단 쫄깃한 껍질 부위가 대부분인 오리고기를 얹고 나서, 그 다음에 상큼한 오이 조각을 얹고 이어서 채친 날 대파를 얹은 다음 거기에 우리가 양파를 찍어먹는 춘장을 발라 써서 먹는다. 춘장과 대파와 밀가루가 같으며, 거기에 우리나라 짜장면에 얹어주는 채친 오이를 떠올려보면 다른 것은 오리와 돼지의 차이인 것. 식재료가 대체로 엇비슷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국채 말고 최고로 계급이 낮은 지엔삥(煎餠)도 형제에 끼워줘야 옳다. 둥그런 쇠판에 밀가루 풀을 둥글고 얇게 발라 부친 다음, 거기에 달걀을 하나 깨어 얹은 다음, 다시 대파 대신 잘게 썬 쪽파를 흩뿌린 다음, 거기에 파삭거리는 밀가루 튀김을 얹어 싸먹는 이 전병은 그 시절 인민폐 단돈 1원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다가 서너 시쯤 길가에서 자전거에 한 다리를 걸친 채 비닐에 싸서 건네주는 그 1원짜리 따끈한 지엔삥을 먹는 맛은 꿀맛이 따로 없었다. 물론 재료로 치면 얼추 비슷해서 파와 밀가루 그리고 춘장이 주재료다. 다르다면, 단백질이 돼지에서 닭(계란)으로 바뀌었을 뿐.

그런데 이 짜장면과 그 형제들을 구성하는 식재료들이 아무렇게나 합쳐져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른바 궁합, 혹은 오미의 조화에 기초하여 디자인된 것을 알고 먹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다. 오이는 쓰고 파는 매우며, 밀가루와 춘장은 달고 짜다. 따라서 신맛이 빠져 있다. 최근 인천 화교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손덕준 씨는 자기네 음식점 중화루에서 만든 짜장면에 식초를 뿌려먹는다. 그래야 오미를 갖춘단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 다꾸앙과 양파에 식초를 뿌리므로. 대신 나는 고춧가루를 뿌린다. 양파의 매운 맛이 조리 도중 불에 약해졌으니 그걸 보충하는 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맛의 어우러짐을 조화라 부른다. 서로 상반상생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상반상생의 조화는 음악으로 가도 그대로 적용되어 오음의 조화가 된다. 이걸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적용하면 전쟁의 반대말, 곧 평화가 된다. 짜장면은 평화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우리나라의 통일을 일컬어 “김치식 통일”이어야 하리라고 설파한 한 시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짜장면식 평화’로 해도 말이 되지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게다. 아마도 사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 그런 모양이다. 인천에서 발하는 평화의 메시지가 짜장면을 먹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면…

유중하 /연세대학교 중문과 교수




아직은 덜 마른, 예술가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작품 사이에서

아직은 덜 마른, 예술가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작품 사이에서
– 인천아트플랫폼 2016 플랫폼 오픈스튜디오 연계전시 <웻 페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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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에서는 9월 25일(일)까지 오픈스튜디오 연계전시《웻 페인트 Wet Paint》가 진행되고 있다. 《웻 페인트 Wet Paint》는 9월 23일(금) 부터 25일(일)까지 진행될 오픈스튜디오 확장된 전시형태로 2016년 입주 작가들의 작품과정을 볼 수 있는 자리이다. 본 전시는 각 분야별 6개국 34팀(50명) 작가들이 전시, 공연, 아카이브 전시 등을 통해 소개되며, 평면, 입체, 설치, 영상 작품 40여점과 입주작가 포트폴리오가 함께 전시된다.

《웻 페인트 Wet Paint》는 일련의 창작과정 안에 발생하는 다양한 이면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전시장에는 최종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창작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창작 이면에 숨겨진 다양한 시도, 예술가로서의 창작의 고민들이 새로운 작품들로 재편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들은 동시대적 상황과 정치 사회적 이슈, 시대문화의 여러 편린 속에서 포착되는 발상과 영감들을 각자의 독창적인 형식과 매체들로 비춰낸다. 다양한 작품에 담긴 개별 작업의 특수성을 유지하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예술가가 각자 스스로 소화해야 하는 창작의 고통들을 한자리에 모아보는 전시’가 기획의 출발이 된다. 평소에 쉽게 공개하기 어려웠던 작품의 레퍼런스, 과정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작품을 해독하는 여러 단초들을 전시장에 배치함으로써 작가들의 작품을 깊이 있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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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

전시장은 하나의 작업실이 되기도 한다. 최현석 작가는 전시기간 동안 출퇴근 기록기를 설치해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작가가 직접 전시장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공개한다. 최현석은 그 동안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지필묵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를 빌려 현대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작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현실에서 마주한 부조리한 사회 현상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을 묘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는 그 시점을 전환해 ‘기록화를 그리고자 하는 나’, ‘밖에서부터 바라본 관찰하고 있는 나’를 기록했다. 즉, 평소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작가 자신의 수집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작가는 스튜디오에 거주하며 먹고 자고, 생활하며 느끼고 고민하는 것들을 작업으로 그려냈다. 이런 시점의 전환은 작가에게 있어 하나의 새로운 시도임과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어려운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마술과 같은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두었는데, 전시장 한쪽 벽에 걸린 드라이기를 작품에 쏘여야만 숨겨진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번 작품에는 작가 일상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조 섞인 한탄,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초라한 이면을 드러내지만 자신의 민낯을 공개하는 듯한 불편함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전시장 맞은편으로 가보자. 매주 주말 오후 1시~5시까지 서해영 작가가 <Would you be my model? in Incheon>을 진행한다. 이 작업은 2015년 호주 시드니에서부터 시작한 작업으로 거리에서 사람들의 두상조각을 만들어 주며 그들과 ‘소통’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는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시간이나 기억을 공유하는 프로젝트로 불특정 다수에 가까운 개인과 느슨한 ‘관계 맺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본인이 마주한 특정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작업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우연처럼 불거지는 화학작용을 만들어 낸다. 작업의 규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거리 조각과는 조금 다른데 돈을 받지도, 만들어진 두상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도, 작업에 걸리는 시간을 정해두지도 않는다. 참여하는 사람이 허락한 시간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완성된 작업은 전시장 벽에 일정기간 전시되지만, 작품은 결국 폐기되고 만다. 그리고 그들과 나눈 대화와 시간들은 영상이나 사진과 같은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 결국 작가는 인간관계의 가치 속에서 전시장 내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관계 맺기’의 방법을 실험해 보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는 계속 변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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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영상작업도 있다. 보이치에흐 길비츠는 뉴욕과 바르샤바를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로 환영과 실재와의 차이, 그것의 예술적 재현에 대해 탐구해 왔다. <작가의 페인팅>은 문화적 고정관념과 지역의 언어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역과 장소에 작가 본인을 배치함으로써 예술의 저항의식을 실험한다.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이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고전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재현하는 그의 작품은 예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정치, 문화적 흐름을 반영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쫓아야 하는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질적인 시공간 속에 마치 환영과도 같이 자리 잡은 작가의 모습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환기시킨다. <작가의 페인팅>은 2015년도부터 진행하고 있는 작품으로 아직도 계속 작업 중이다.

김춘재의 완성된 유화작품 옆에는 사진 꼴라주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수집한 사진 자료들을 콜라주하며 화면을 재구성하는 사전 작업 방식을 공개한다. 작품으로 이어지지 못했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용된 사진들을 원래의 이미지로 출력해 있는 그대로의 풍경들을 선보이고, 그것이 콜라주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김춘재의 작품은 꿈과 상상, 현실의 파편들이 직조되면서 이상과 현실의 풍경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자연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삭막한 현실의 충돌에서 오는 불안, 의심, 호기심과 같은 내면으로의 몰입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적 낯선 공간을 재현하게 만든다. 마치 시간의 순서가 중첩되고 공간의 분할이 교차하는 상상의 풍경과 같은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서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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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설치 방법을 시도한 작가도 있다. 양유연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그리기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본다. 두꺼운 장지가 아닌 얇은 순지를 두 장으로 겹쳐 채색한 뒤 그 뒷면과 앞면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한다. 작가는 직접 붓질이 닿지 않고 배어 나온 마치 상흔과 같은 그림을 통해 새로운 그리기 방법을 실험하고자 한다. 양유연은 사회 구조 안의 피동적 존재들, 소외되어 가는 소수자의 모습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어둠과 상처의 키워드들은 현대인들의 감정 기저에 깔려있는 내밀한 심리적 상흔들을 상기시킨다. 이런 응축된 정서를 표현하듯 작가는 옅은 채도의 물감을 여러 겹 칠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전시장에서 다시 작업실로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들은 완성되지 않은 작업, 작품으로 실현되지 못한 작업, 작업의 과정을 드러내 보이거나 기존의 방식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사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작업실에서 온전히 홀로 감내해야 했던 창작의 고통들이자 그 시간의 기록들이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시간과 공간을 마주할 때 우리의 기억은 특별해진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때 기존의 사유체계는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인천아트플랫폼에 모인 예술가들 또한 낯선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며 예술로 소통하는 느슨한 예술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저마다 다르게 경험하는 시간의 다양성, 개별 작업의 입체성, 특수성 등은 다양한 예술적 층위를 이루며 서로간 창의적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전시장에 작품은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마치 예술가들의 창작에 대한 열정처럼, 내일은 오늘과 다른 새로운 예술을 꿈꾸며 끝없이 예술을 실험하고 탐구해 나간다.

글 / 오혜미(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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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교육자들의 이야기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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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인천생활문화센터 칠통마당으로 첫 눈에 보기에도 개성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강원도, 경기도, 서울과 인천에서 <지역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나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 참여하고 있는 기관과 단체들의 교류의 장으로 4개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함께 준비한 워크숍 ‘사방팔방’ 참여자들이다.

워크숍은 <문화디자인 자리>의 최혜자 대표가 열었다. “미사여구를 벗고 다시 문화예술교육으로”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전달하기보다는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참가자들은 아트플랫폼 인근 카페 여덟 곳에 두런두런 모여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10명 남짓이 둘러앉은 분임토의는 문화예술교육 활동의 경험이 많은 이들이 퍼실리테이터로서 이야기의 흐름을 잡았는데, 조금씩 스타일은 달랐지만 참여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그 중 몇 가지를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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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인사로 시작되었다. 어느 지역에 있는 어떤 단체 혹은 기관의 아무개이고 올해 펼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누구와 함께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자기 소개로 시작된 이야기는 같이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과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활동 사례 나눔으로 이어졌고, 때로는 각자의 활동에 대한 자부심과 격려로, 때로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교육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는 쉽게 공동의 주제가 되었다.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 그들에게 말 붙이기 위해서 얼마동안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문화예술교육의 본질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부딪쳤을 때 이를 해결했던 방법에 대해서는 눈을 반짝였다. 비슷한 상황에 대응했던 자신의 노하우를 보태주기도 했고, 역시 시작하기 전에 예상치 못했던 감동 스토리에는 다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마을회관에서 매일 화투를 치시는 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화투에서 교육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얘기나, 그분들이 동네에 나타난 낯선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지만 얼마 지나 알고 보니 그동안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는 얘기는 문화예술교육이 예술에만 갇혀있는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노인분들을 만나려고 보건소장을 먼저 만났다는 경험도 교육을 프로그램 안에서만 한정하지 않는 참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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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 아는 문화예술교육의 좋은 점과 성과를 어떻게 가시화해야 할지에 대해, 지속가능한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속 깊은 이야기도 오갔다. 공모사업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하고 있다거나 지원금이 먼저인지 사람이 먼저인지 생각하게 되면서 처음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거나… 같은 일을 하면서 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고민을 꺼내놓고 풀어놓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어진 3시간은 서로가 누군지 알기에도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어서 이런 고민들을 깊게 논의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활동과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사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사람들도 바쁘다. 이번 워크숍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왔을 테고 와서도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되었고,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 덕에 처음 만난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고, 서로에게 조언자가 되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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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들은 저녁을 먹고 서로 배움을 주고 받을 것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워크숍을 함께 하고, 2일차에는 인천아트플랫폼과 복합문화공간 트라이볼, 월곶예술공판장을 탐방한 후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간 각자의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워크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그들의 현장으로 이어졌으면, 이렇게 기획된 워크숍이 아니더라도 고민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자리가 그들의 일상에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일상을 함께 고민하는 현장에서 자주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글 / 김영경(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




사이를 좁혀, 경계 위를 걸어가다.

사이를 좁혀, 경계 위를 걸어가다.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9.2~9.4, 인천아트플랫폼 일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 모든 적은 한때 친구였다 /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 고요히 칼을 버리고 / 세상의 거지들은 다 /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 어떻게 눈물이 햇살이 되겠는가 /어떻게 상처가 잎새가 되겠는가’
– 정호승, ‘나뭇잎 사이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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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간다’는 표현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좁은 틈을 포용하는 여유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 사이의 좁은 틈을 포용할 때에 비로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4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이’에 집중해보자는 의미에서 ‘사이를 걷는’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스어로 ‘흩어지다’, ‘퍼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스포라는 원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인천은 한국 최초의 이민이 시작된 도시이며 장기 체류 외국인이 7만 명을 넘어서는 만큼 ‘디아스포라의 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제에 와보고서야 알게 됐다.

인천영상위원회와 인천문화재단이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지난 9월 2일부터 4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렸다. 다양한 층위의 디아스포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과 함께, 감독, 작가, 관련 연구자 등과 관객이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토크’, 한국과 오키나와의 민요를 연주하는 칸류메이의 공연, 어쿠스틱 국악 그룹 다나루와 극단 앤드시어터의 퍼포먼스, 유럽의 난민문제부터 새터민들의 삶에 대해 고민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여기와 저기사이> 전시, 재일조선인 2세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온 서경식 교수의 특별강의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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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서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흩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를 통해 소개되었다. 개막작인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연출 김하경 달린)는 1905년 한국을 떠나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연과 그 후손들의 증언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스크린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분할된 화면과 자막 등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했다. 상영작 <거미의 땅>(연출 김동령, 박경태)은 폐허가 된 의정부 미군 기지촌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세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두 영화는 역사가 외면하고 사람들이 망각했지만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전통적 의미의 디아스포라를 담은 영화 이외에도, 계급, 인종, 민족, 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떠도는 사람들에 주목한 현대적 디아스포라에 관한 영화들도 소개되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다섯 명의 단짝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월미도와 동인천 일대의 15년 전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는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며 지금은 많이 달라진 동네의 모습과 비교하는 쏠쏠한 재미도 제공했다. 그러나 동네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청춘들의 고민은 같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청춘들이 살아온 터전은 여전히 그들에게 정착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방황하는 청춘들은 먼 곳으로 떠나기를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2016년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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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영화제의 특별한 상영회, 이주민 대상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 <영화, 소(疎)란(LAN)>에서 완성된 영화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이주가정, 화교, 유학생 등 인천지역 디아스포라로 구성된 팀들을 대상으로 5개월간 진행된 영화 제작워크숍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각각 청소년들의 고민, 한국에서 겪은 소통의 어려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화, 소(疎)란(LAN)>의 작품들은 다른 얼굴, 다른 언어를 가졌다는 이유로 낯설게만 바라보았던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베트남예술단 무지개언덕 팀이 만든 <705호의 일요일>은 한국어 수업에 참여하게 된 각자의 사연을 영화로 구성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선주민이지만, 다른 지역의 이주민이 된다면 우리도 똑같이 겪을 수 있는 그들의 사연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천화교중산중학 여채현 학생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영화도 찍고 소통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어 행복했고, 직접 만든 작품을 완성시켜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어 더 뜻깊었다.”며 <영화, 소(疎)란(LAN)>에 참여한 소감을 또랑또랑하게 말하기도 했다. 수업을 진행한 인천여성영화제 라정민 씨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중도 입국한 청년들이 모인 새꿈학교의 경우 한국어가 능숙한 친구들이 별로 없어 지난해에는 그림을 그려 소통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한국어가 많이 늘어 촬영이 수월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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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좁을수록, 사이가 가까울수록, 마찰과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의 사이에 놓인 좁은 틈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사이를 넓히려고만 한다면 점점 경계는 명확해지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위험해진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좁은 틈을 포용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 모두는 눈물을 햇살로 만들고, 상처를 잎새로 만드는, 서로를 치유하고 치유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현대사회의 디아스포라,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틈을 좁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어릴 적 장소 경험에 대한 기억, 인천의 문화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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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한번 여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짚어 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천에 절반에서 훨씬 못 미치게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이 30년이 넘는다. 인천의 역사적 사실들이나 문화유산 그리고 작금의 문화예술들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찾는 일이라면 공부를 하고 답사를 해서라도 조금은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인천에 뿌리박고 살고 있는 분들이 훨씬 더 귀한 작업들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몫은 아닌 것 같았다. 틈틈이 발을 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외지에서 살아 온 나로서는 마음속에 ‘윤곽’으로 그려지는 개인 경험들을 되짚어 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엉뚱하게도 북미 원주민 사회들을 답사하다가 만난 한 고고학자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자세한 것들을 묻지 말고 단 한 가지 그들 삶 의식을 관통하는, 주제가 담긴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었다. “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참으로 막연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잠자코 그의 말을 따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이 질문이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즉각적으로, 단 몇 마디로 강에 얹혀사는 자기 삶을 압축해 표현했으며 어떤 이는 새삼 성찰적으로 삶을 돌이켜 보곤 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강에 얹혀서 사는 자기 문화에 대한 ‘가치’ 표현이었다. 어떤 이는 매우 실용적 차원에서 어떤 이는 매우 철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를 표현했다.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 이번에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천은 내게 무엇일까?” 그런데 인천에 정주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몸 부대껴 온 바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 안에 살 때의 경험에서도 밖에서 드나들 때의 경험에서도 인천은 내게 통로(route)로 접촉점으로 길 혹은 거리(street)로만 떠올려진다. 그것도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통로, 접촉점, 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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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부터 중학교까지 현 제물포역 뒤 인천대학교 앞쪽, 한 곳에서 살았다. 이 일대는 피난을 와서 간신히 일터를 잡은 직장인들과 소상인들과 토박이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그래도 인천 도심 외곽에 있는 주택가로 당시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들이었다. 흙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단층 기와지붕의 서양식 반 한옥 반 형식의 집을 짓고 대문 안 쪽에는 마당을 두었으며 밖으로는 작은 텃밭을 두었다. 어떤 집은 텃밭 대신에 우물터를 두었다. 마을 바로 옆에는 몇몇 농가들과 밭들이 있었고 곧바로 그 옆으로 화교 동네가 있었다. 화교 동네의 건축 양식은 사뭇 달라서 붉은 벽돌로 사방을 두르고 가운데 마당을 둔, 좁은 창문의 집들이었다. 창문틀은 거의 어김없이 푸른색이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마을 근처에서 혹은 뒤쪽 ‘성광학교’ (구 선린학원, 인천대학교의 전신) 산을 넘어서 채소 농사를 했다. 나의 어렸을 적 ‘통로’에 대한 경험은 우리 동네에서부터 옆의 농가들 그리고 화교 동네로 이어진다. 단오 때에는 농가 큰 앞마당에 높이가 10미터는 넘었음직한 그네가 설치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처녀들부터 아줌마들까지 그네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어느 가을밤 드럼통 위에 놓인 작두 위에 오른 무당을 보고, 밤하늘에 대비되면서 불빛을 흐트러뜨리던 붉은색, 푸른색 옷가지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적이 있다. 그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필자의 중부지방 도당굿의 첫 답사이다. 한편 화교 동네는 색다른 경험을 주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꽁꽁 사방을 두른 집 모양새나 푸른 창틀이나 이곳저곳에 붙은 붉은색 글씨와 문양들이나 음험해 보였다. 그곳 사람들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네가 아니라 우리 집 바로 뒤에 살던 화교 한 집의 나보다 다섯, 여섯 살 위로 보이던 소년으로부터 십팔기(十八技)를 배우면서부터 그 동네에 대한 두려운 생각도 사라졌다. 자기 집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작은 칼 두 개를 들고 춤추는 듯 몸을 날리던 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그 후 빵도 얻어먹고 좋은 나날을 보냈다. 이후 화교 동네에도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집 마당으로 들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당’이었던 것 같은 좀 무서운 공간도 보았다.

피난 내려 와 인천에 자리잡은 일가친척 중에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현 숭의동 공설운동장 뒤 전도관 밑 산기슭에 살았다. 아주 좁고 구불거리는 동네 길 한켠에 흙벽돌로 두어칸 짜리 집을 짓고 거기서 소소구레한 일들을 하면서 사셨다. 작은 할머니가 생선을 공판장에서 받아다가 ‘다라이’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생선 행상을 하셨는데 집 마당에는 그물에 말리는 생선들이 아래 쪽 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하늘에 나부꼈다. 도화동에서 숭의동 언덕길로 걸어서 그 작은 골목길을 지나 그 집에서 공설운동장의 운동 경기를 보던 나날들이 있었다. 야구는 동산고등학교 팬이었고 동인천고등학교도 좋아했다. 모두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들이었으니까…당시는 야구가 인천사람들에게 묘한 정서를 낳는 것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경기 룰에서부터 정교한 테크닉, 그리고 스타킹과 꼭 끼워 입은 줄무늬 바지와 모자 등등이 무언가 ‘근대’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것 같았고 그게 근대도시 인천의 취향과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고교야구는 지방들 간의 경쟁의식과 ‘지방 즐기기’까지 선사하는 것이었다. 서울 이외에 부산, 대구, 광주, 군산 등등이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계기가 선거 말고는 고교 야구가 컸던 것 같다. 여하튼 나도 부산고가 어떻고 군산상고가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떠들어대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축현 ‘국민학교’를 다녔다. 엄밀히 말해서 그냥 쫓아 다닌건데 그래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라 했고 실제로 교실 수업도 며칠 동안 받았다가 선생님들이 달래서 ‘졸업’했다. 사실상 학교 공부보다도 학교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현 제물포역 앞 길이 당시에는 주요 지방도로로 신작로라 불렸다. 그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리면 참으로 감미롭고 신선한 경험세계가 펼쳐졌다. 축현 학교 담장에 내 기억으로는 장미였는지 찔레였는지 빨간 꽃들이 길게 이어졌고 담장 건너 길 맞은 편, 동인천역 작은 광장 한 코너에 있던 제과점에서 빵굽는 냄새가 났다. 아침 햇볕이 길거리에 쏟아지고 그건 내게는 다사로운 노란색이었다. 건물 그늘이 진 곳은 상큼한 바람이 불었다. 빵굽는 냄새와 노란 햇볕과 건물 그늘…이런 것들이 모여서 ‘도시’의 취향이 되었다. 이따금 병원에 가느라 경동 ‘싸리재’ 길에도 가고 신포시장 밑 동방극장에 쫓아가 영화도 봤다. 당시 도심 여러 곳들에 적산가옥을 개조한 점포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건물 양식은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모두가 ‘현대식’ 쇼윈도에 타일 건물들로만 느껴졌다. 동방극장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 안에는 극장 내부에 하얀 색상에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것으로 기억되는 원형 타일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어째 중국풍인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인천 도심의 경험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 확대된다. 그림그리기 대회 때문에 자유공원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그 코스가 현 인천문화재단 자리 창고들, 구 시청 그러니까 현 중구청 그리고 차이나타운을 거치곤 했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이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당시는 이름이 없이 인천 도심의 한 길거리에 있는 중국인 사는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내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목조 이층 건물 곳곳에, 그리고 이층 베란다 앞틀에 본래 입혔던 붉고 푸른 색들이 바래고 벗겨져 현란함과 퇴락의 느낌이 교차하고 거기에 널어놓은 빨래들과 이층 베란다를 다니는 가족원들의 머리모양과 의상까지 더해졌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시각적 이국(異國) 정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 방식의 살림살이, 그것도 한국 땅에서 퇴락해가는 살림살이의 구차한 모습들이 그 건물과 의상들에 찌들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 이것저것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색다름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저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부모께서 이북에서의 생업을 잇고자 1960년대에 현 석바위 법원 인근에서 과수원을 시작했다. 논밭 사이에 낀 작은 구릉지에 과수원이 있었고 좁은 논길을 걸어 경인선 철로를 넘어 산모퉁이를 돌면 주안염전과 갯벌이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숭의동에서 도화동 집까지 걸어 책가방을 놓고 다시 석바위의 과수원에 갔다. 제물포역에서 주안역까지가 2.1Km인지 2.5Km인지 여하튼 2Km남짓한 거리였는데 꼭 그 선로를 따라 걸었다. 굵은 못을 갖고 다니다가 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하게 눌려진 못을 거두어 모아두곤 했다. 콜타르였을 것이다. 선로 밤나무 침목들을 딛고 뛰면서 침목에 발라놓은 목재 보호제의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일상적 주거나 농촌 생활에서 나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 보면 그 화학제품의 냄새가 ‘근대’에 대한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과수원 작은 농가 방에 누우면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집 벽으로부터 흙과 짚 냄새가 섞여서 났고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와 함께 늦은 오후를 진득하고 뉘엿하게 만들었다. 과수원 밖을 나서서 자주 가는 곳이 염전이었다. 한 1Km 정도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는 길 산모퉁이가 시각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하나의 문턱이었다. 그 모퉁이를 넘어 펼쳐지는 세계는 과수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염전 바닥의 타일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얕은 바닷물을 후끈거리게 하고 수로 곳곳에 수차를 밟아 바닷물을 염전으로 품어내는 염부들이 있었다. 주안염전에는 바닷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 저수지 너머로는 깊게 파인 갯골들과 검은 갯벌들이 뜨거운 햇볕에 드러나 있다. 길에는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소금창고들이 누워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고즈넉함과 외롭고 처연함을 만드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태양의 이글거림과 고무신 안쪽까지 스며들어 온 개흙의 진득거림이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필자는 여름에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해 아니면 시원한 소금창고 속에서 만화책을 보기 위해 염전에 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즐기기 보다는 염전과 갯벌과 사람들 일하는 모습의 강렬하고도 적막하고 처연한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짓눌려 돌아오곤 했다.

대학 다닐 때의 단골 여로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곳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단순하고 단일하고 투명한 장소감과 장소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중첩되어 있었고 비유를 하자면 장소들이 목소리가 청명한 게 아니라 허스키 풍으로 복합적이거나 걸지거나 삭혀 있었다. 동인천역에서 구 인천여고 가는 길로 조금 접어들다 보면 밴다방이라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생긴 다방으로 디스크자키가 있었고 클래식이나 조금 조용한 팝송, 당시 활발했던 통기타 가수와 김민기, 양희은 풍의 가요들을 틀어주었다. 인천의 대학생들, 좀 젊은 문인들, 연극인들 그리고 외지에서 방학 때 귀향한 대학생들이 이 다방을 메웠다. 조금 더 문화적으로 연조가 깊은 젊은이들은 더 그윽한 것을 찾았다. 술집들이 그 욕구를 채워주었는데 꼭 가는 곳이 하인천역으로 넘어가는 곳의 잡어횟집, 인천여고 인근의 삼치구이집, 용동 큰우물집, 신포시장의 백항아리집, 옛 키네마 극장 뒤편 다복집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이나 손발짓이나 여러 행각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체득적인 정서나 감각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심하고 치밀한 감각이면서 또한 복합적으로 배어 들어간 감각이기도 했다. 그들은 막걸리와 함께 먹는 생선 몇 조각이 어떻게 말려져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구워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좀 곰삭고 찌든 맛이 있어야 한다.” 생선 맛에 대한 이들의 말이나 그것을 주장하느라 서로 간에 오갔던 손짓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음식 맛의 감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구현해야 할 자기 삶의 감각, 지역 감각 같은 것이었다.

필자에게 인천은 통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넘나드는 통로로 있었다. 집에서부터 인근 농촌을 거쳐 화교 동네까지, 집에서부터 동인천역을 지나 축현 학교까지, 자유공원 밑 길거리와 차이나타운까지, 철로를 따라 석바위 과수원을 거쳐 주안염전과 갯벌에 이르기까지 어릴 적의 장소 경험들,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도심 다방과 술집들에서의 장소와 사람 경험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천에서 형성되어 왔던,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인천의 지리적, 공간적 계열을 따라 문화 경험의 통로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에게 인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찾아 들어가고 부대끼며 체화시켰던 감각의 장소들이다. 그것은 한 곳에 단일하게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움직거리는 경험의 통로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소와 접하고 사람과 접하고 감각을 생성하는 접촉지대이다.

문화 중심이라는 말은 본래는 마치 가마솥이 끓듯 다양한 것들이 모여들고 접촉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지역문화를 뜻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다양한 문화의 통로, 길, 접촉지대로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생성되는 감각들과 의미들을 가치로 바꾸어 생산해내는 문화생산의 처소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인천은 그런 곳이다.

 

조경만 /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뉴스 큐레이션(2016.09.20~10.03)

요약이 당신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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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주의. 게시글이 길어 스크롤을 계속 내려야 하니 그 압박에 주의하라는 말이다. 읽기 싫으면 누르지 말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 신조어의 생애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스압’은 지고 ‘요약’이 뜬다. 짧고 간결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정보 다이어트’가 인기다. 매체는 넘쳐나고 알고 싶은 건 많다. 400쪽 분량의 책을 20분 만에 ‘읽어내고’ 구매를 결정한다. 신문의 긴 호흡보다 핵심만 간추린 카드뉴스에 호감을 갖는 독자가 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아도 드라마와 예능의 줄거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읽어내면서 피로를 최소화하기. 콘텐츠 과잉의 시대, 요약이 당신을 유혹한다.

언젠간 쓸모 있을지 모를 짧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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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는 일/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우리나라에서는 기간제 일자리 혹은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정착했다. 독일 격언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는 나치가 강제수용소 정문에 이 문구를 걸었던 역사 때문에 현재는 배척받는 문구가 됐다. 프리랜서의 ‘랜서’는 창을 의미하는 ‘랜스’에서 나왔다. 돈을 받는 대가로 창을 들고 싸워주는 용병이 현재의 자유계약 개인사업자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됐다. 당장은 쓸데없지만 언젠가 쓸모 있을지 모를 짧은 지식. 더 궁금하면 아래를 클릭하시라. 총 440개의 지식이 올라와 있다.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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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칼럼니스트 고종석 씨가 친구에게 하듯 편하게 말한 지 꽤 됐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미래를 헤아려보는 건 힘든 일이야.”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1998년)에서 영어가 보편어가 되지 않을 것,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나타날 것, 다시 ‘유목’과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유목 문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고종석은 아탈리와 동의하거나 혹은 다르게 생각한다. 21세기 끝 무렵이 되면 (문학적 전통이 깊은 언어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보편어로서 전 세계를 평정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이 21세기 안에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탈리가 예측한 지금 이 세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도 없고, 마냥 부정할 필요도 없어.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력에 기반해서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버리면 그만이야. 아무튼 과거(불과 20년도 안 된 과거이지만)에 쓰인 ‘현재에 대한 예언서’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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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대상 수상작 ‘내추럴 디스오더(Natural Disorder) 2015’. 덴마크로 입양된 한국계 남성이자 뇌성마비 장애인 야코브 노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장애 때문에 겪는 취업‘장애’, 장애에서 탄생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등을 연극, 애니메이션 등으로 표현했다. 미래의 DNA 기술이 장애 아이를 걸러내는 데 쓰일 거라는 전망 속에서 ‘미래에 남지 않을, 멸종할 인류’로 살아가는 불편을 예술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겼다. 인간은 누구나 정상성의 압박을 받는다. 이 사회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강박. 그 과정에서 타자를 배제하고 묘한 차별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쉬쉬하는 추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궁정의 광대” 야코브 이야기.

5전 국민이 인천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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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꼭 여기서 찍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 바로 송도국제도시다. 청라 커널웨이 수변공원이 ‘애정신 장소’로 주목 받을 때 송도에서는 ‘주인공 집’이 조명된다. ‘닥터스’의 금수저 의사 진서우(이성경)를 위한 송도 오크우드 프리미어 호텔의 120평 최고급 펜트하우스,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조들호 전 부인(박솔미)는 더샾퍼스트월드 아파트 63층에서 ‘살았다’. ‘W’의 강철도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송도를 질주했다. 인기 장소로의 급부상은 넓은 도로와 적은 차량 덕분.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혜리)이가 뛰어다니던 부평 십정동 열우물 마을은 철거를 앞두고 인적이 드물었지만 드라마 영향으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지 않는 도시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인천만큼 공항과 항구, 섬과 달동네, 원도심과 신도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은 드물다. 마약 밀매, 범죄와 폭력 이미지에서 벗어나 ‘키스하는 도시’로의 반가운 변화.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신포동의 떡 빚는 글쟁이, 성광떡집 이종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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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국제시장 골목 가운데 작게 보이는 간판, 성광떡집.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곳 떡집은 시인이자 문화 활동가인 이종복 작가의 생활터전입니다. 오토바이로 신포동 일대를 오가며 따끈한 떡을 실어 나르는 떡집 사장님, 신포동에서 나고 자란 이종복 시인이 생각하는 인천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방앗간에서 떡을 빚으며 글을 쓰는 이종복 시인과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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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방앗간 사장님이자 문화 활동을 하는 시인이라고 해야 할 텐데요. 어디에 더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A. 부모님과 둘째 형님에 이어 방앗간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떡집 사장이지만, 정체성은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응모해보기도 했는데 고배를 마셨죠. 그러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구연 시인을 만나면서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인천을 공부하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보낸 시절은 ‘죽음’이 아닌, ‘죽임’이 일상적인 시절이었어요. 사회 저변에 폭력이 일상화되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도 컸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이나 돌출되는 감정들을 느꼈고, 이를 스스로 정화하고 내면을 다루는 방식을 찾다보니 ‘시’가 보였죠. 시(詩)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포괄적 내용을 집약하는 상징적인 장르에요. 그렇게 시인으로 활동한지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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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버지와 형님에 이어 가업을 물려받으셨는데, 방앗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조부의 당숙이 김대건 신부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인천으로 내려와야 했던 상황이었죠. 조부께서 그렇게 인천에 정착하셨고, 저의 아버지부터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오셨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아리를 구워 파는 일도 하셨는데, 1947년부터 방앗간을 시작하셨죠.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둘째 형님이 물려받았고, 잠시 일을 도와준다고 함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네요. 그 해가 1988년인데, 방앗간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법학도였으니 사법고시를 준비했겠죠. 사실 어린 시절에는 집안 배경 탓에 신학과를 가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일반 대학을 진학하면서 법대를 가게 되었는데, 그 갈림길들이 매우 다른 삶을 만들었네요. 사실 방앗간을 이어받는다는 일이 어렵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서 해 오셨던 일이고, 제가 살아왔던 삶의 모든 부분이 방앗간과 함께 했던 터라 어색한 일도 아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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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에 신포동에 관한 기억은 다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신포동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제가 태어나고 자란 신포동은 당시 인천에서 최고의 번화가이자 유일한 도심이었죠.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만 벗어나도 인천은 논과 밭, 염전과 바다였어요. 송도, 화도진, 제물포, 주안… 지금이야 도심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과수원이나 염전, 허허벌판의 대지였으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여기 신포동 인근 일대 뿐이었어요. 이 일대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문화를 가진 곳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외국인 선교사, 화교, 일본인이 한데 어우러져서 인종이나 문화적 괴리감도 없었으니까요.
  
Q. 그럼 그 당시 기억과 달라진 모습이 나타난 지점은 언제부터였나요?
A. 군대를 다녀왔을 때였어요. 강제징집으로 군대를 다녀왔는데, 작은 내무실 안에 전국 팔도에서 모인 청년들이 있었죠. 거기서 처음으로 인천이 아닌 전국의 지역을 만났어요. 제대하고 돌아오니 세상이 좀 달라지고 있었어요. 또 어린 시절에 보던 인천의 모습과 다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어릴 때는 다양한 문화가 유연하게 흐르던 인천이었다면, 청년 시절에 보게 된 인천은 서울을 향해 치열하게 싸워가는 팔도 각지의 사람이 모인 지역이더군요. 이 모습을 보면서 지역의 문제, 인천의 정체성 등을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 문제가 저를 지금까지 오게 한 평생의 숙제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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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천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올해는 특히나 가치,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모습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요즘 인천이 가치 재창조라는 단어를 주목하면서 여러 사업들을 하고 있어요. 예컨대 과거의 인천 인물을 찾아내고, 이를 정리한다거나 인천의 외형에 주목하면서 섬을 비롯한 자연에 주목하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죠. 이런 사업들을 펼치면 인천 시민들에게 가치와 자존감이 자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긍심과 가치의 이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화적 경험과 양분을 주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인천의 정체성을 만들고 가치를 키우는 최우선적인 일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시간이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는 거죠.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가는 과정을 문화적 관점으로 실행해야 하고, 그 과정을 사회적 약속을 통해 지켜야 합니다.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성급하게 움직이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 조금 더 천천히 긴 호흡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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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단이 기부금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이제 정확히 1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기부자의 입장에서 보시기에 아트레인 기부금사업을 평가하자면 어느 지점이 좀 더 보강되어야 할까요?
A. 인천문화재단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어떤 사업이 실행되는지 모두 다 보여요.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부 영역만큼은 일반적인 사업보다도 더 투명하게 외부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부자가 몇 명이고, 현재 기부금이 얼마가 모였고, 어떤 사업에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돈이라도 기부를 한다는 건 그만큼 그 단체 혹은 기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지금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이런 정보들이 나와 있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재단도 자랑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만큼 노력해서 문화예술을 위한 기부금을 이만큼 모으고 있고, 이런 사업에 쓰고 있습니다” 뻔뻔하다고 느껴질 만큼 보여줘야 해요. 물론 인력이 부족하고 사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은 이해해요. 하지만 방안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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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트레인을 통해 모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는지, 특별히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아트레인의 기부금은 지원금을 받아 창작 활동을 하거나 수혜를 받고 있는 예술인이나 단체가 또 다른 지원의 영역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해요. 예술창작의 역량 평가 등 일반적인 지원사업의 기준과 잣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혜자를 발굴해서 문화예술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가 이 사업으로 수혜를 받았는지,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모든 부분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죠. 사업의 방식도 일반적인 공모 형태는 지양하길 바랍니다. 기부금을 낸다는 것은 누군가가 진심으로 단체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뜻이죠. 그만큼 소중하고 책임감 있게 쓰여야 하는 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업을 만드는 일은 어렵고 힘든 영역임이 분명하지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문화재단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종복 선생님과의 시간이었습니다. 말씀해주신 지점들을 실행 과정에 반영함으로써 기부자를 위한, 인천 시민을 위한 문화재단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어주신 이종복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성광방앗간(조선떡집)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3, 신포국제시장 내 위치
전화번호 : 032-772-5093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땅이 된 바다, 김순임 작가

 

땅이 된 바다, 김순임 작가

개항장 일대를 걷다보면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의외로 잘 알지 못하고 지나간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는 이곳 또한 과거에 바다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9월, 바람이 분다. 바다로부터… 그리고 바다로부터 온 무엇이 인천아트플랫폼 스튜디오 앞 거대한 나무가 되어 자라났다. 김순임 작가의 작품 <굴 땅>이다.
김순임은 일정 공간에서 리서치 과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정서, 삶, 공간이 형성되어 온 배경 등을 주로 자연물을 이용해 예술 형태로 발전시킨다. 작품 <굴 땅>은 인천 해안가 사람들의 고된 삶의 역사가 그 지역 생계수단인 굴과 그 껍질로 덮혀 개간된 땅 위에 살고 있음에 주목한 작업이다. 작가가 직접 그곳에서 수집한 굴 껍질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해 만든 설치작품은 그들의 삶과 노동, 소멸이 잉태한 새로운 생성을 상징한다. 또한 바다를 땅으로 일구고 척박한 삶과 역사를 버텨내며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력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김순임 작가의 개인전 《땅이 된 바다》는 10월 30일 까지 진행되며 인천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 연계전시 《웻페인트 WET PAINT》전(2016.8.26-9.25 B,G1,G3 전시장)에서는 본 작업과정이 기록된 영상과 도면, 모형 등과 같은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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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이번 전시《땅이 된 바다》의 작품 <굴 땅>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만석동에 갔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닷가에 이주한 땅 없는 사람들은 바다가 공짜로 내어준 굴을 캐어 팔아 가족과 자신을 생존케 하면서 오랜 시간 이 곳(인천 만석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팔고 버려지는 것은 산처럼 쌓이는 굴 껍질들뿐이었는데 그 장면이 매우 인상깊었다. 굴이 원래는 한 생명체의 집이었지만 또 다른 생명(사람)을 위해 내어주고, 그 껍질들로 다시 해변을 메우고 땅을 개간한 곳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온 것이다. 굴로 개간된 땅들은 점점 넓어져 이제는 이곳이 원래 바다였다는 것조차 알 수 없지만, 이곳엔 사람이든 굴이든 생명을 담았고 살게 했던 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노동과 생존이 꿈처럼 피어나고 넝쿨처럼 자란 형상을 풍요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Q2. <굴 땅> 작업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있다는데, 그것은 무엇이고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2015 겨울 인천 만석동 우리미술관 개관전(집과 집 사이)을 위해 지역 리서치를 하면서 이 지역과 이곳 사람들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천 만석동은 매우 검소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 버려지는 것은, 내다팔고 남은 굴 껍질과 연탄재뿐이다. 버려지는 굴 껍질조차 오랫동안 이 지역에 쌓여 땅으로 개간되는데 쓰였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땅 아래를 채운 것이다. <굴 땅>은 인천 해안가 사람들의 고된 삶의 역사가 만들어낸 땅의 이야기를, 그 지역의 생계수단인 굴, 그 껍질로 덮혀 개간된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내어준 바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자 했다.
 

빈손으로 바다에게 와
땅을 짓고 집을 세워 가족을 지킨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정착해준 바다.
바다였던 도시
바다였던 집들
바다였던 길
바다였던 사람들
잠시 정주하지만, 보이지 않는 땅 속에 숨은 바다의 꿈
사람에게 자신을 내 준 바다 이야기
그리고 그런 사람의 이야기

Q3. 주로 만나는 주변, 그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 그리고 그 만남에 의해 생성되는 기억이 얼마나 특별해 지는지에 주목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자연, 주변의 것들을 작업으로 연결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떤 특정 계기가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소백산 자락의 풍기에서 자라면서 자연 외에는 놀거리가 없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미술대학의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교 뒷산 숲에서 구한 재료나, 버려지는 것들로 작업을 해야 했던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가부장으로 가족을 지배하셨던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버지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함께 살았던 시골에서 어린 여자아이로 성장하며, 주변인을 관찰하게 된 것까지… 나의 성장 과정과 배경이 자연스레 작업의 방식 속으로 들어왔고,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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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장소 특정적 또는 대지미술에 가까운 작업들을 해오면서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 오히려 자연이 작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작품을 설치할 때 고려하는 요소가 있는가?

공간과 자연을 내가 직접 고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공간과 자연이 작업을 선택한다고 믿는다. 작가가 어떤 작업을 구현하고 그 작업을 하기 위한 공간을 찾는 일보다 마음에 들어오는 공간을 만나고 그 공간과 함께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나의 이상이라는 얘기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일치했다. 먼저 인천의 ‘만석동’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 자연, 환경 등을 배웠고, 그래서 그 공간이 마음으로 들어와 작업의 씨앗으로 발현되었다. 그곳에서 받아온 굴 껍질과, 어떤 형상으로 세상에 나올지에 대한 대략적인 드로잉이 나오고, 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서 주변 공간과 환경을 한 달 넘도록 산책하며 관찰했었다. 이 작품이 어디에서 행복하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이번 작품 <굴 땅>은 이렇게 해안동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매번 매 작품, 매 만나지는 공간마다 고민하는 요소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Q5. 거대한 설치 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어려운 점들이 많았을 것 같다. 노동 집약적이고 큰 규모의 작품을 작은 체구의 작가가 직접 설치하는 모습이 가히 수행자를 방불케 했다. 구상만 하고 실현하지 못한 작품이 있거나,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헤프닝이 있다면?
사실 무척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의 무게는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어려움을 잊을 만큼의 큰 즐거움이 있어 이런 작업들을 계속하는 것 같다. 대형작업들은 특히 나 혼자의 힘이나 경제력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렵고, 당연히 공공 공간일 경우가 많으므로 다양한 서류작업들이 필요하다. 작가들이 무척 힘들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부분일 것이다. 작업을 구현하기 위해 지원 가능한 단체나 기관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 나머지 작업을 구현하는과정에서 날씨, 사람, 기술 등의 것들은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귀이 여기고 배우며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잘 준비하면 오히려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도 필요하다.
구상하고 실현하지 못한 작업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드로잉 북에 쌓인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서, 기술적으로 아직 몰라서, 재정적으로 불가능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것들은 사실 모두 큰 문제는 아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드로잉 북을 봤을 때 그때 실현가능하면 하면 되는 것이니까. 드로잉한 작업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충분히 익지 않았고 충분히 배고프지 않아서가 아닐까? 개념이 소통가능할 만큼 잡혔고, 방식이 이해가능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너무 해보고 싶어지면, 실현 가능한 방법들을 찾고 제안하고 지원하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깝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뜨거운 날씨에 《땅이 된 바다》의 설치를 진행했었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나다니던 주민들에게서 기운을 얻었다. “어? ‘땅이 된 바다?’ 그래, 여기가 오래 전에 바다였지, 하하하” 하고 웃으며 지나가는 할아버지들, “이게 뭔지 알아? 바다의 굴 껍질이야” 아가에게 말해주는 아기 엄마, 그리고 갓난아이를 안고 바다와 넝쿨, 굴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는 등 작업 주변에서 작품을 즐기는 사람들이 작업 중인 나와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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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과 작가의 특별함으로 재해석한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 는 국내외에서 작가 김순임을 주목하게 한 대표 작업으로 보여진다. 작업에 대해 설명해 달라.
<I meet with stone. –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 일명 ‘Stone Project’는 2003년 1월 안양에서 처음 시작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5년에 한번씩 전체를 모아 개인전을 통해 발표를 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새로운 지역이나 새로운 시간에 길 위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만나면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셔터를 눌러 그 돌멩이가 보았음직한 풍경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돌멩이 위에 돌멩이를 만난 날짜와 장소를 적어둔다. 산의 돌은 그 산을, 강의 돌은 그 강을, 시골의 돌은 그 시골을, 도시의 돌은 그 도시를 닮아있다. 그곳에 오래 산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돌멩이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지만 이름 없이 길 위에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기도 한다. 그런 이름 없는 돌멩이를 누군가 작가가 만나고 그 만남을 기록하면, 전시장에서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사람들이 하나하나의 돌멩이를 자세히 보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으려 하게 되니 말이다. 전시장 벽에 붙은 종이에 있는 사진과 새겨진 날자와 장소, 돌멩이에 써진 날자와 장소를 기반으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인연이 생겨난다. 매칭되는 사진과 돌멩이를 찾는 관람객에게는 작품을 1,000원만 받고 그 자리에서 나눠준다. 그 관객이 그 돌과 맞여진 인연을 위해 찾는데 들인 시간이 그 비용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은 또 누군가에게 기억되기에 이제 더 이상 이름 없는 ‘무엇’이 아니게 된다.

Q7. 그럼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은 무엇이고, 그 이유가 있다면?
모든 작업이 다 애착이 가지만 작업이 완성되고 나면 작품은 모두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다. 나의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은 ‘다음 작업’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나의 온 영혼이 집중해 있고 또 다음에 만들어질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직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말이다.

Q8.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내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전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관객들 모두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보았거나 느꼈던 것들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흔하고 사소한 것들을 작품을 통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 나의,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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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1. 전시명 : 김순임 개인전《땅이 된 바다_ 굴 땅》
2. 기 간 : 2016년 8월 26일(금) ~ 10월30일(일)
3. 장 소 : 인천아트플랫폼 E동 앞 야외
4. 전시연계 간담회 :《땅이 된 바다》에 관한 수다
1) 초대패널_ 채은영(임시공간 기획자), 정상희(Space Ado 기획자), 김순임(작가)
2) 장소 : 인천아트플랫폼 G2
3) 일시 : 2016년 10월 29일(토), 오후 3시

글 / 오혜미(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




글과 사진으로 일상을 그리는 글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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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억을 남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쓸 때도 있고, 짧은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자신들의 생활과 삶을 글로 엮어내며 글을 통한 재미를 찾아가고 있는 글게미 동아리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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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게미의 시작

글게미는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시작되었다. 배다리에서 각자 사진 강좌를 들으며 자유롭게 사진을 공부하다 <손바닥 사진책 만들기>라는 강좌를 통해 글쓰기를 접한 것이 글게미 의 시작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모였던 17명의 수강생 중 최종 결과물을 완성한 7명(류태숙 조경연 강종식 장덕윤 이연실 이미옥 신인화)의 수강생이 글을 좀 더 공부해보자는 욕심에 하나로 뭉쳤고, 그렇게 글쓰기 동아리 ‘글게미’가 만들어졌다.

‘글게미’는 서해안 사투리 ‘게미’에서 가져왔다.  게미는 음식의 감칠맛을 뜻하는데 글에 감칠맛을 더한다는 의미와 사진에 글을 더하여 감칠맛을 낸다는 중의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 사진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글과 사진을 같이 하는 사람은 적다. 
글게미는 사진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글로, 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사진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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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와 새로운 도전, 카드소설
글게미 회원들은 주로 일상의 기억들을 모아 에세이를 쓴다. 매월 1번 모여 각자의 글에 대해 품평하고, 2달에 한 번씩 강좌를 이끌었던 이재은 선생님에게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올해의 글쓰기 키워드는 ‘탈 것’으로 이와 관련해 회원들이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는 중이다. 글쓰기 외에도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또 있다. 바로 연희문학창작촌 <문학, 번지다> 프로젝트 선정작인 <돋보기 없이 읽는 카드소설>이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소설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도 즐길 수 있도록 시도한 작업이다. 현재 이재은, 이유, 유현수, 황현진 선생님과 기존의 소설을 카드소설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카드소설을 쓰면서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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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게미 회원들이 쓰는 글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유롭게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글게미의 왕언니인 류태숙 씨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인이 되어가는 자신의 변화를 다루면서 ‘내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를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강종식 씨는 자신의 어렸을 적 향수를 일으키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장덕윤 씨는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기억을 기록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때의 감성이나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것들을 사진이나 글로 남긴다고 한다.

에세이를 쓰는 것도 어렵고 힘들었던 그들에게 소설쓰기는 훨씬 더 어렵고 생경한 숙제였다. 카드소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이전까진 글게미 회원들끼리 에세이를 쓰고 서로의 글을 돌려보는 품평회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지만, 소설은 또 달랐다. 소설가의 지도 아래 첨삭과 품평을 받는 것조차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글게미로 활동하면서 생긴 변화들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글을 보는 시선에 대한 변화이다. 강종식 씨는 글을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단어나 문장에 좀 더 신경쓰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동아리 활동 이전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장덕윤 씨는 의무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류태숙 씨도 처음에는 짧은 글을 주로 썼지만, 이제는 긴 문장의 글도 수월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노트를 깔아놓고, 순간순간의 감정과 기억을 기록하는 등 글쓰기가 생활화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다른 회원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숙제처럼 글을 썼지만, 쓰다보니 각자의 글을 통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격려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여유가 생겼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봄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에 말걸기
글게미 회원들의 공통점은 이전부터 글에 대한 관심이나 동경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가슴 속으로만 간직했던 것은 배울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평소 글에 관심이 많던 장덕윤 씨는 예전에 인천에서 글쓰기 강좌를 찾아봤지만 없어서 서울까지 갔다고 한다. 지금도 단기 강좌가 있지만, 인천 내에서 글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다고 이야기했다. 류태숙 씨도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면서 일반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업 기회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글쓰기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있던 만큼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작업과 시도가 이뤄지기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모습이었다.

글게미의 모토는 ‘같이 가자’ 다. 누구 하나 뒤처지지 말고 함께 하는 것에 가치를 두며 지금처럼 변함없이 글게미로서 활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모토이자 목표이다. 2016년 글게미 동아리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회원들이 1년 동안 쓴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이며, 두 번째는 사진 전시회다.

속에만 담아오던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어 글로 풀어내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글게미 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과 글을 쓰고 나누는 것이 어려웠지만, 점차 각자의 내면을 바로 보며, 글과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음을 열게 된 그들의 시도가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성취이며,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탈출구인 글게미 안에서 그들의 감칠맛 나는 글쓰기가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