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천국이었던 동인천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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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학창시절 수많은 영화를 봤던 애관극장,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인 애관에 대한 다큐 영상이 왜 한 편도 없을까. (애관은 1895년 협률사로 출발해 1911년 축항사, 1924년 애관으로 개칭된 121년 된 극장이다.) 인천영상위에 계신 아는 분께 연락을 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처럼 애관에 관심을 갖고 촬영하려고 했던 감독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 왜 영상물이 없을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애관 측에서 촬영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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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즉시 애관극장에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전화통화도 안 되었고 소개서를 들고 찾아도 갔지만 만나주지도 않았다. 거의 포기할 뻔 했지만, 인천에 내려갈 때마다 한 번씩 찾아갔다. (아버님이 신흥동에 사신다.) 6개월쯤 찾아갔을 때 극장 운영을 맡고 계신 이사님께서 내 정성이 갸륵(?)했는지 촬영 허락을 해주셨다. 그날은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다. 이미 영화의 반은 완성한 느낌이었다. 그 후 어느덧 1년 가까이 촬영을 하고 있다.

“분명 한때 인천의 최고 스타플레이어였던 극장들은 은퇴경기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무대 뒤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굿모닝인천 유동현 편집장님의 말씀 중 몇 단어를 바꾼 말이다. 인천의 중심지였던 동인천 지역에는 애관을 비롯해 미림극장, 키네마, 동방극장, 인영극장, 인천극장, 문화극장, 인형극장, 오성극장, 현대극장, 자유극장, 장안극장, 도원극장, 시민관, 세계극장, 용사회관, 동인천극장, 항도극장, 아카데미 등등 한때 19개의 극장이 있었다. 당시 인천의 인구 수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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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송현동에서 오래 살았다. 가장 많이 간 극장은 현대극장이었다. 동시개봉관이라 두 편을 싼 값에 볼 수 있었다. 영화 포스터 붙이는 아저씨를 기다리면 재수 좋게 할인권을 얻을 수도 있었다. 내가 다닌 광성고 밑에는 자유극장이 있었고, 이곳 역시 삼류 동시개봉관이었는데 항상 성인물 한 편과 다른 영화 한 편을 틀었다.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 극장이었다. 오성극장은 특이하게도 양키시장 위에 세워진 극장이었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조그만 분수대 같은 게 있었고 사람 말을 따라하는 구관조가 인상적이었다. 자료를 찾다가 인천시청 기록관에서 오성극장 내부 사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금 오성극장은 텅 비어있고 재난위험시설 D등급을 받고 언제 헐릴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형극장은 나중에 UIP직배 영화관이 되었는데 영화인들이 UIP 직배에 반대하여 서울 직배극장에 뱀을 풀어놓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애관은 당시 최고의 극장이었다. 1980년대에 인천 최초의 70mm 영사기와 THX 음향시스템을 갖춘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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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007 시리즈, ‘터미네이터’ 등등 영화를 보고나면 친구들과 한참동안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곤 했다. 동인천 지역 극장들은 내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분명 시네마천국이었다. 그때 본 영화들이 나를 감독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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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 뵈었다. 최불암 선생님 선친인 최철은 인천 최초의 영화제작자로서 ‘수우(愁雨)’ (1948년작. 감독 안종화. 주연 김소영, 전택이)를 인천에서 제작하셨는데 ‘수우’ 시사회를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8살 최불암은 최철의 영정사진을 들고 가족과 함께 동방극장 시사회에 참석했다. 그 후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동방극장 지하에서 ‘등대’라는 음악다방을 운영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를 최불암 선생님 인터뷰를 하면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림극장에서 폐관 때까지 35년간 영사기사를 하신 조점용 선생님, 인천에서 촬영한 ‘사랑’ (1957년작. 감독 이강천. 주연 김진규, 허장강)의 촬영조수였던 정의배 선생님, 39년간 극장 간판을 그린 김정길 선생님 등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분을 만나면 그분이 다른 분을 소개해 주셔서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경험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극장은 단지 외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06다큐 작업은 끝을 모른 채 출항하는 위태로운 항해와도 같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1년 후면 영화를 완성하여 출연했던 모든 분들을 모시고 애관극장에서 시사회를 갖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윤기형 / CF 및 다큐 감독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동네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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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일요일,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아이들을 위한 아지트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동네 언니들로 이제 막 새롭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한 신생 문화예술 동아리이다. 뭐든 함께 만들어나가려고 한다는 신생 동아리, 동네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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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언니들의 시작과 현재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를 이끄는 윤종필 교장 선생님의 고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다 보니 세대차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나연 씨를 비롯한 꾸물꾸물 문화학교의 청년층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동네언니들’이다. 중학생 때부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 나온 나연 씨를 비롯한 청년층의 주도로 조금 더 젊은 시선으로 청소년과 소통하며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동네언니들’이 탄생했다. 바쁘게 한 주를 보낸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황금 같은 휴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요일마다 모인다. 바로 청소년 친구들 때문이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학업으로 바쁜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들이 주중에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치열하게 일주일을 보낸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당일에도 고등학생 친구들이 나와 동네언니들의 프로젝트를 돕고 있었다.

03가치(같이)테트리스, 동네언니들의 첫 프로젝트
가치프로젝트는 동네언니들 동아리가 꾸물꾸물 학교 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2m의 철골 구조물의 큐브를 자유롭게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동네언니들은 ‘가치테트리스’라는 이름으로 직접 철골 구조물을 꾸미고 이를 채울 수 있는 대형의 테트리스 블록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같이 하며 함께하는 가치를 만들어내자는 이 프로젝트는 준비단계에만 2~3주가 소요되고 기한에 맞춰 3일 만에 제작해야 하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합심해서 하다 보니 사이도 더욱 돈독해지고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오게 됐다. 이 기간에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커플의 결혼식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에 모두 함께 참석하고 다시 돌아와서 정신없이 작업했던 때를 이야기하며 동네언니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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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을 되돌아보다, 일상재발견
최근에 동네언니들은 일상재발견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기획 단계부터 자체적으로 시작한 첫 프로젝트로 사진을 찍으면서 가까운 일상의 가치를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려워하며 숙제처럼 의무로 사진을 찍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침대 밑의 물건들, 내 주변의 빨간 물건과 같이 사소한 일상을 담다 보니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고, 사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네언니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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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을 넘어 인생을 나누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에서 문화예술교육 외에도 청소년과 다양한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대학에 진학한 청소년 친구도 있다고 한다. 이 친구는 현재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면서 동네언니들의 행사나 일정이 있을 때,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악을 전공한 동네언니들의 성지 씨 역시 서양화로 전공을 바꿔 가보지 않은 길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영향받은 것처럼, 청소년에게도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와 함께 자신이 겪은 경험을 나눠서 청소년들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한다.

동네언니들, 자신들의 변화
동네언니들 구성원의 대부분은 청소년 시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은 다시 모여 문화예술기획자로, 멘토로 성장했다. 나연 씨는 동네언니들 활동을 시작하면서 단순히 수업을 듣던 참여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활동을 하게 되니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전과는 달리 실무부터 결정까지 책임져야하다보니 고민도 많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든다는 것이다. 정후 씨는 개인 작업을 주로 하는데, 좀더 열린 시각을 갖게 됐고, 은진 씨는 음악교육이라는 전공을 살려 도움을 주고 있으면서 자신 역시 동네언니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일주일에 2~3번 회의를 위해 모이면서 생활의 중심이 동네언니들로 바뀐 것 같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동네언니들은 올해를 시작으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운동회부터 성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예정이며, 이후에는 문화예술교육 역량 강화를 통해 더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가능하다면 중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또한 수치만으로 책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을 쌓아가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에게 동네언니들이란?
동네언니들은 그들에게 의미가 크다. 성지 씨에겐 입시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사회생활이고, 은진 씨에게는 다른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정후 씨는 동네언니들을 작업의 일환처럼 느끼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생활의 중심 같다고 했다. 나연 씨에게 동네언니들은 기획자로서 의무감과 책임감이 막중한 성장통과 같다. 이전까진 화려한 연꽃만 봐왔다면 동네언니들의 활동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 같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군가가 나의 멘토가 되어주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상대가 되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동네언니들은 자신들도 겪은 학창시절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쉬어갈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드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더 넓게 보며 문화예술을 조금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기회를 주고자 자신의 시간을 기쁘게 활용하고 있었다. 동네언니들이 어느새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렸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들이 앞으로 인천을 중심으로 더 많은 청소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큰 그림을 그려가며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지역을 반영하는 문화의 창, “축제”를 바라보다.-한국지역문화지원협의회 오스트리아 연수(2016.08.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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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이면 다양한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축제”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며 지역의 고유한 사회, 문화적 특성을 알리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축제”의 홍수 속에서 지역성과 독창성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축제에 대한 방향성과 비전, 자원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축제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축제의 성공적인 개최와 꾸준한 유지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선행조사와 효율적인 운용이 필수다.

올 여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연수를 통해 오스트리아 브레겐츠(Bregenz)와 잘츠부르크(Salzburg)를 방문, 축제에 참여하고 관계자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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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겐츠는 인구 2만 5천명의 작은 도시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넓은 보덴 호수와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알려진 한적한 휴양도시였지만 1946년 축제행사가 시작된 이후로, 현재 호수 위로 세워진 무대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페스티벌의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인구의 10배가 넘는 25만여 명의 관광객이 매년 여름 동안 브레겐츠를 방문하고 있다.
사실 브레겐츠가 역사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도시였기에 축제가 생겨난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끝난 후 별다른 극장도 없었던 상황에서 지역을 특화할 수 있는 하나의 콘텐츠로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관광객들을 위한 공연을 시작한 것이 축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호수’라는 천연자원과 결합하여 높은 시너지를 생성해냈다. 이후 1950년에는 호수에 나무기둥을 설치하여 그 위로 수상 무대를 만들었고 5년 뒤, 인근의 곡물창고였던 공간을 개조하여 만든 브레겐츠의 첫 실내 극장 “Theater am Kornmarkt” 등을 만드는 등 관련 인프라를 꾸준히 늘려왔다. 7,000석의 야외극장과 공연뿐만 아니라 각종 컨퍼런스가 가능한 페스티벌 하우스, 브레겐츠 미술관 등이 10분 내 거리에 서로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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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는 전쟁 폭격 피해가 적었던 구도심과 건축물을 활용한 페스티벌을 개최하자는 발상이 바탕이 되었다. 대성당 광장에서 시작된 무대는 이후 승마학교를 축제장으로 활용하고 축제극장이 건립되면서 점차 커져갔고 1948년, 잘츠부르크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축제의 예술 감독으로 합류하고 1950년에는 오스트리아 연방법에 의거 페스티벌재단이 공식 출범해 체계적인 관리체계와 지원 방안을 마련하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세계 최고의 페스티벌로 성장시켰다.

매년 26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경제 효과는 우리 돈으로 2,500억 원에 이른다. 공연 중심의 음악축제이지만 인근 미술관에서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시기에 맞춰 아카이빙 전시 등 특별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무대들도 마련된다. 15만이 조금 되지 않은 잘츠부르크에서 페스티벌과 관련해 일하는 사람 수만 해도 3,300여 명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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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두 지역에서 축제가 시작될 때 지역적인 특성은 서로 달랐다. 한쪽은 이미 모차르트의 출생지이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반면 한쪽은 작은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축제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공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두 축제 모두 기획 단계에서부터 향유 대상을 명확히 설정한 후 이에 따라 조직 설립 및 공적기금 유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브레겐츠와 잘츠부르크 모두 초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기획, 대중적인 장르를 중심으로 축제를 진행했다. 축제 기간을 휴가철로 설정한 것도 성공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민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축제 조직을 공공기관과 연계하여 체계적인 조직기구로 변화시키고 공적기금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입하였기에 콘텐츠 구성뿐만 아니라 홍보 및 재원 마련을 위한 체계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현재 관리부서 외에도 홍보마케팅, 후원 및 개발 부서 등 다양한 전문부서에서 직원들이 근무 중이며, 매년 30~40%의 공적보조금을 바탕으로 자제 수입을 충당하여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간을 축제 공간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두 도시의 페스티벌은 도시를 특징지을 수 있는 가장 주요한 공간에서 진행된다. 브레겐츠의 경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보덴 호수에 메인무대를 제작했고, 잘츠부크르 또한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도심에서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열린다.

셋째, 관련 인프라가 주요 진행 장소 인근으로 꾸준히 구축되어 축제를 즐기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보장한다는 점이다. 두 도시 모두 축제 메인 행사장 인근 1Km 이내에 부대행사를 위한 극장 및 문화시설, 식당들과 쇼핑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축제 기간 동안 방문자들의 이동 동선을 한정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축제의 경우 소비 성향이 두드러지기에 더욱 그렇다. 두 도시 모두 티켓 판매 및 후원협찬 등을 통한 직접 수입 이외에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금액은 축제 예산의 최소 8~10배에 이르고 있다.

넷째, 지역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지역민들 역시 이를 체감하고 적극 협력한다. 잘츠부르크 축제와 브레겐츠 축제의 티켓 가격은 100유로에서 200유로 내외로, 저렴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금액이다. 하지만 축제 메인 프로그램 외에 지역 주민들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부대 프로그램과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무료 혹은 저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의 단기 일자리는 지역 주민들에게 훌륭한 경제활동의 보조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다섯째, 경제성을 고려한 효율적인 공간운용방식을 모색하고 신규관객 유입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메인무대인 수상무대는 한 번 설치되면 2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한국의 야외 오페라가 수일 또는 일주일 남짓 설치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하우스는 축제 기간 외에는 국제 컨퍼런스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 년 내내 축제 공간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 신진 예술인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 및 워크숍은 물론이고, 축제의 메인 장르인 클래식뿐만 아니라 재즈, 록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페스티벌도 일 년 내내 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축제의 부가가치 확대를 위한 홍보 및 재원 확보를 위한 지역기반의 기업 및 후원자들과의 연계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가상품의 경우 축제의 명성을 활용한 다양한 로고 상품 및 TV 중계권 판매 등의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롤렉스나 아우디 등 다양한 기업들의 페스티벌 후원 및 협찬이 장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정 후원관객을 바탕으로 한 기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축제 사무국에서는 후원사 및 협찬사를 위한 다양한 프로모션들과 함께 후원자 대상 네트워크 파티 등을 열고 있으며, 직접 발행하는 잡지와 지역 관광지를 활용해 축제와 기업의 동반 관계를 홍보하고 있다.

오늘날 “축제”는 중요한 문화콘텐츠로 우리 삶과 연관되어 있다. 단순히 즐기기 위한 유희적 대상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 향유해야 하는 미래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효율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축제들이 선행연구와 환경조사 없이 무분별하게 생겨나고, 장기적인 계획이 없이 실행되어 몇 년 만에 사라지고 있는 현 상황이 너무나도 아 쉽다. 물론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축제를 진행해온 오스트리아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짧은 역사 속에서도 축제의 다양성과 개채 수를 확장해온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생각되기에 더욱 그렇다.

아직까지 인천은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제외하고 뚜렷하게 지역을 대표할 만한 축제가 없다. 인천소래포구축제와 부평풍물축제도 주목할 만한 축제로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지역의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공간 구성과 향유 대상을 철저히 검토하여 구성된 다채로운 프로그램, 지역민들이 실제 축제를 통해 수혜자로서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장치와 제도가 필요하다. 안정적인 운용 능력 배양을 위한 자생력 확보 및 가치 확장을 통한 축제의 장기적인 계획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인천의 인구가 3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인천에 방문하는 관광객 및 방문객의 수도 무려 100만이다. 이제는 새로운 매력을 가진 인천의 축제, 우리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반영한 콘텐츠가 간절히 필요할 때다. 앞으로 발전할 인천 축제의 가능성과 미래를 기대한다.

김세진 / 인천문화재단 공간사업팀, 프로듀서




문화정책동향

<300만 인천>

인천주권시대, 애인(愛仁)토론회 통해 시민大토론 
인천시의 신규 프로젝트와 주요 사업 추진에 『애인(愛仁)』명칭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300만 인천시대, 애인 페스티벌과 함께해요
인천시에서는 인구 300만 시대를 앞두고 시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꿈과 희망을 주며,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을 대표하며 상징할 수 있는 ‘제1회 애인(愛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기존에 열던 행사 몽땅 묶어 ‘愛仁’ … 잡탕에 파묻힌 인천의 가치
애인(愛仁) 페스티벌이 ‘오합지졸 축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천시와 10개 군․구가 기존에 하던 축제를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임의적으로 묶다 보니 100여 개에 이르는 행사를 아우르는 연결고리가 없어서다.

‘3백만 도시 인천’ 타이틀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  
인천시가 이번 년도 안으로 인구 3백만 도시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5천여 명 정도 유입이 되면 이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인데, 보는 이에따라 시각차도 있는 분위기다. 

300만 인천, 맛집에 사람 꾀듯이
인천시가 최근 ‘브랜드 담당관실’ 조직을 신설하면서 행정에 상업 마인드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브랜드(brand)’는 한마디로 말하면 ‘상표(商標)’다. 인천시가 이 조직을 만든 이유는 인천만의 독특함이 묻어나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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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

인천 도시재생사업 민간 전문가가 코디한다. 
「인천 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은 작년 12월에 국토교통부로부터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일반지역으로 선정됐다. 중구 월미도, 내항, 개항장 일대와 동구 배다리지역에 산재된 해양․지역자산을 창조적으로 재생해서 해양․문화․관광 융합의 창조경제모델도시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 ‘개발만능’으로 빠지나

인천내항에 ‘해상관광호텔’ 들어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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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예술현장>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1.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상) 
예술가와 예술현장 종사자들이 예술 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예술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현장의 당당한 주인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천지역 예술현장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동시에 타 지역의 예술경영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자생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2.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중)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3.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하)
  
선택과 집중, 지속성 담보한 지원정책 필요 
 
인천시의회, 예술인 복지증진 조례 발의 
인천시의회 황흥구 문화복지위원장이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활성화하고 문화예술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인 복지증진 조례를 발의했다. 이 조례는 시장이 3년마다 기본방향 및 목표, 사업의 실행계획을 포함한 예술인복지증진계획을 수립토록 의무화했다.

무용단․극단 예술감독 장기공석 파행 
인천시는 교향악단․합창단․무용단․극단 등 4개 시립예술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4곳 가운데 절반인 무용단과 극단 등 2곳의 예술감독이 공석이다. 무용단과 극단의 전 예술감독은 모두 지난해 12월 31일 자로 임기가 종료됐다. 규정에는 1년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지만, 두 예술감독 모두 연장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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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상문화>

인천상륙작전 흥행 발판 ‘영상산업 육성’ 
인천시는 인천영상산업 발전 중장기 계획을 통해 영상산업 육성방안을 구체화하고 추후 관련 조례를 개정해 인프라 구축이나 영상물 제작지원 등을 위한 근거를 마련할 계획이다.
 
인천 ‘영상산업 메카’ 중장기 청사진 
  
인천영상위원회 총회 개최, 제2기 위원회 출범  

인천상륙작전과 인천차이나타운  
  
제4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성황리에 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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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문화시설>

한반도 역사에 한 획 그은 ‘인천史’를 널리 알려라 
인천시가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의 국립화 추진을 통해 문화주권 실현에 시동을 걸었다.

월미도․내항․영종도… 국립 해양박물관 유치, 속도낸다 
인천시는 올 10월 말까지 자체 진행하고 있는 국립 인천해양박물관 건립 타당성 연구용역을 마무리하고, 11월께 해양수산부에 박물관 건립을 건의할 계획이라고 28일 밝혔다.

국립한국문학관 설립하는 대신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활용하자 
인천 소재 한국근대문학관이 국립한국문학관으로 낙점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립한국문학관을 설립하는 대신 기존 문학관 활용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데다, 국립문학관이 갖춰야 할 요건을 상당 부분 충족하고 있어서다.

‘인천 계양산성’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 
인천의 대표적 성곽유적인 계양산성(桂陽山城)의 국가문화재 지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인천광역시(시장 유정복)와 계양구는 인천시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해양관방유적 ‘뜻밖의 난관’ 
인천 강화군이 문화재 보호정책에 따른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며, 강화 해양관방(關防)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반대하고 나섰다. 8월 초께 열릴 예정이던 강화 해양관방유적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관련 문화재청 심의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인천 첫 국립 문화기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설립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고려 역사, 근대 유적지를 발굴․조사하는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 설립된다. 인천에 문을 여는 첫 번째 국립 문화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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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인천>

아트센터 인천 ‘난항’ 
한국의 오페라 하우스를 표방한 ‘아트센터 인천’의 준공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계획 당시 2014년 9월에 준공하기로 했으나 여러 차례 합의서가 변경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발이 지연됐다.
 
<strong골칫덩이 인천아트센터, 시도 경제청도 ‘못맡아’ 

인천시-NSIC 갈등… 아트센터 완공 지연 

‘새우등 터진’ 아트센터 인천… 내년 개관식 비상

총체적 부실…송도 ‘아트센터 인천’ 공사비 환수 실사작업 본격화

‘아트센터’ 지원단지 개발 120억만 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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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
 

유커 ‘공연 상품’에 30억 투자… 학생들이 빈좌석 채웠다. 
‘비밥(BIBAP)’ 공연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도마 위에 올랐다. 막대한 예산 지원에도 인천의 가치는 물론 정체성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다. 유커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 또한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인천시는 이들 공연의 기대효과를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시의회 역시 까다로운 예산 심사를 예고한 상태다.

볼거리 없다며 들여온 ‘비밥’ … 지역문화 생태계까지 교란중 

비밥 투자비 10억, 지역예술 133개 사업 지원 맞먹어

‘비밥’ 둥지 튼 송도 트라이볼, 지역 예술공연은 곁다리 신세 

‘비밥’ 지원 타당성 꼼꼼히 살핀다

인천, 외래 관광객 상설공연 내년에도 ‘비밥’…송도 트라이볼서




문화 없이 성장이 가능한 도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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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 시장의 심장 월스트리트, 예술의 중심지 브로드웨이를 동시에 품고 있으면서 세계 최첨단의 유행이 펼쳐지는 쇼핑가가 밀집한 맨하튼은 명실공히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불린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지금도 세계의 많은 여행자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러브 스토리를 위시하여 많은 명작의 배경이었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인천의 송도국제도시 혹은 경제자유구역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에 맨하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인프라를 배후로 약 40조원의 민간 자본 조달로 지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도시 개발구역인 이 도시의 마스터플랜은 콘 페더슨 폭스(KPF)의 뉴욕 사무소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맨하튼이 태생부터 지역시민들의 역이탈을 막기 위해 문화적 공간에 대한 치밀한 설계를 병행했듯 송도 역시 다양한 문화적 아이템들이 생기고 있으며 일부는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다.

이쯤에서 뉴욕에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는 공간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필자와 같은 몇몇 영화광의 열정으로 시작된 시네마테크인 뉴욕의 시네마테크, <필름 포럼,Film Foru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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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독립영화를 상영할 공간을 찾아 카렌 쿠퍼를 대표로 50개의 간이 의자로 시작했던 뉴욕의 <필름 포럼>은 이제 미국을 대표하는 시네마테크가 되었다. <필름 포럼>의 발전과정은 DRFA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의 신뢰성에서부터 시작됐다. 보석같은 작품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 프로그래머들의 안목과 그 열정이 지금의 필름포럼을 만든 셈이다.

이 극장에서 <쉘 위 댄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서던 젊은 날의 그때를 잊지 못한다. 물론 이 극장에서는 한국영화 <워낭소리>도 개봉한 바 있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단골 레퍼토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의 고전>, <작가주의 특선>, <세계 영화는 지금>이라는 3개의 섹션이 3개의 관을 채우고 1년 365일 다채롭게 극장은 돌아간다. 뉴욕의 관객들은 밤이 되면 그리니치빌리지로 속속 모여든다. 그리고 전세계의 영화 동지들이 지금 어떤 화두로 영화를 만드는지 진지하게 토론하며 영화에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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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포럼 40주년 프로그램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 DRFA 365 예술극장도 40주년엔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물론 프로그램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극장이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사한 후 <필름포럼>은 55명의 정규 직원과 수십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끊임없이 극장을 꾸며나갔다. 영사기를 HD로 바꾸어 어떤 매체의 소스도 디지털로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의자 시트를 벨벳으로 바꾸었다가 가죽으로 바꾸었다가, 조명을 바꿔본다거나 하는 등 전직원이 극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느낌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 극장의 연간예산은 800만 달러로 대부분 시와 기업들의 후원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2013년의 개인 기부금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필름 포럼의 수석 프로그래머인 캐런 쿠퍼는 작품 선정의 기준을 묻는 기자에게 “관객들의 사고에 도전의식을 던지는 개성적인 작품이 최우선”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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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동검도에 35석의 예술극장을 지을 때만 해도 필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나간 이상주의자로 낙인찍혀야 했다. 30년이 넘은 필름 콜렉션의 긴 여정 끝에 내가 모은 이 필름들을 이제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기로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나눠야 할 공간의 지리적 요건의 1순위는 산과 바다가 보이는 자연친화적인 곳이어야 했다. 수도 없이 고민했고 많은 시간을 들여 찾아낸 곳이 바로 동검도였다. 동검도가 초지대교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것도 필자를 끌어당기는 중요 요소였다.

2014년 11월 15일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여배우 <실바나 망가노 특집>을 시작으로 지난 3년간 수많은 희귀작들이 관객들과 만났다. 관객층은 김포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인천과 서울까지 저변을 넓혀나가 이제는 1달에 2,500여 명의 관객이 작가주의 영화를 보기 위해 동검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누군가 DRFA 365 예술극장의 작품 선정 기준을 묻는다면 필자 역시도 캐런과 비슷한 대답을 할 것 같다. 영화는 세상을 선도하는 선각자 같은 시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놓친 진짜 걸작들을 찾아내서 관객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3주년을 앞둔 DRFA의 숙제는 ‘2관 설립’이다. 그동안 수많은 분들로부터 2관 설립에 관한 제의를 받아왔지만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송도다. 송도는 전국의 8대 경제자유구역 중 10년 동안 단연 외투 실적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로 특히 8대 경제자유구역의 외자 유치금을 모두 합산했을 때 약 95%이상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이 홀로 일궈낸 투자 성과로 나타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송도에서 온 관객 분들이 그 먼 길을 거쳐 동검도의 DRFA에 들어서면서 한결같이 ‘송도에도 이런 예술극장이 하나 있었으면’하는 탄식을 하는 것을 봐 왔다. 이 분들의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과연 문화 없이 뉴욕이 세계의 중심부가 될 수 있었을까? 혈관이 비어 있는 백짓장 같은 도시에 문화는 생명을 공급하는 행위다. 유독 한국에서만 R&D, 바이오, 패션, 첨단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등한시하는지 영원한 미스터리다. 앞으로 송도에도 필자와 같은 문화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거대한 콘크리트 도심 속에 문화를 정착해나가기를 바래본다. 

유상욱 / 동검도 DRFA 365예술극장 대표, 영화감독




순수 서정과 우리말 조탁의 훌륭함 청록집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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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서정과 우리말 조탁의 훌륭함
청록집

청록집은 해방 1년 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3인의 합동시집이다. 박목월은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박두진은 「묘지송」, 「도봉」 등 12편, 조지훈은 「완화삼」과 「승무」 등 12편 등 총 3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3인의 저자는 일제 말 「문장」 잡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시인들이며, 시집에 있는 작품 대부분은 「문장」지에 실린 것들이다. 한국 근대시의 대표적 절창으로 이루어진 「청록집」은 우리 자연을 소재로 한 순수 서정시집이자 아울러 우리 시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품이다.

일제 말 암흑기에 창작된 작품들이 해방 후 책으로 묶여 나온 이 시집은 광복 전후 한국 시사를 연결해주는 작품집이자 해방 후 최초의 우리말 시집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송도의 여름밤, 재즈로 물들다. 2016 트라이볼 재즈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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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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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집 앞에 나타나는 곱슬머리에 가늘고 쭉 찢어진 눈을 가진 꽃남방을 입은 남자는 빨간 벽돌 건물에서 걸어 나와 나를 향해 서슬 퍼런 미소를 보내고 사라지곤 한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그 남자는 봄이 시작될 무렵부터 매일 오후 4시경이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중이다. 어떤 날은 자기 몸보다 커 보이는 헝겊 뭉텅이를 이고 가고, 또 어떤 날은 허름해 보이는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걸어가기도 한다. 회사원은 아닌 거 같고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까?

나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집 앞 평상에서 고구마순을 다듬다가 옆집 새댁과 또 나타난 ‘그 자’를 바라보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도 비슷한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난 그 남자, 그런데 오늘은 평소 가던 방향과 다르게 우리를 향해 순식간에 성큼 성큼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하얀 치아가 다 보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노오란 종이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오픈 스튜디오에 놀러 오세요.” 나는 남자의 순박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물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남자가 대답했다. “저, 저요? 저는 인천아트플랫폼에 살고 있는 미술작가인데요?” 남자는 빨간 벽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허연 이를 모두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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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스튜디오는 창작공간,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등(이하 레지던시) 내에 작가들이 머무는 스튜디오 모두를 개방하는 행사를 말한다. 레지던시는 일정 기간 동안 작가에게 작업공간과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예술 진흥 기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국공립 레지던시들이 생겼는데 인천아트플랫폼은 경기창작센터 등과 함께 2009년도에 개관했고 현재 전국에 공,사립 레지던시는 100여개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레지던시는 입주하는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필요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인천아트플랫폼은 1888년에 만들어진 (전)일본우선주식회사와 1940년대에 만들어진 대한통운창고건물 등을 증개축한 전시장, 공연장, 스튜디오, 교육 공간 등을 입주 작가에게 제공하고 다양한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입주작가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공간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튜디오인데 스튜디오는 쉽게 말해 작가가 먹고 자며 작업(그림 그리기, 조각하기, 작곡하기, 책 읽기, 글쓰기 등)을 하는 공간이다. 레지던시의 주요한 프로그램으로는 전시, 공연, 시민 문화예술교육, 입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이론가 매칭, 살롱, 리서치 투어 등), 오픈스튜디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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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스튜디오는 작업 공간을 일정 기간(인천아트플랫폼은 1년에 3일) 동안 개방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작가의 작업 공간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7회를 맞는 오픈스튜디오 기간(9월 23일(금)~25일(일))에 개방되는 작가의 작업실은 방 하나 하나가 대부분 완결된 형태의 전시 공간이나 체험 공간으로 바뀐다. 오프닝 파티는 물론, 스튜디오 밖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레지던시 공간의 여러 개의 프로그램 중 오픈스튜디오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작가와 작품이 타인과 가장 밀접하게 만나고 소통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작가는 오픈스튜디오를 준비하면서 많은 긴장(스트레스)과 설레임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홀로 작업하는 것이 익숙한 작가에게 오픈스튜디오 기간 동안 자신의 작업실을 찾는 비평가, 큐레이터, 연출가, 안무가, 컬렉터, 관(람)객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과 1:1로 마주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와 공연 등을 준비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작업실을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많은 준비(마음의 준비 포함)를 한 결과물이 오픈스튜디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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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문화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주 접하기 힘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지어다! 특히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더 세분화하여 나열한다면 추상미술, 개념미술, 동양화, 서양화, 클래식, 재즈, 국악, 프리뮤직, 미디어아트, 사운드 아트, 현대무용, 퍼포먼스, 피지컬댄스 까지 무궁무진하다. 말만 들어도 예술이 불편하거나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때를 활용하길 권한다. 방문이 활짝 열린 작가의 스튜디오 하나 하나가 어렵기만 했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은 쉬운 답을 찾아 줄 것이다.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특히 앞서 언급한 예술이 익숙하지 않은 분이거나 예술에 관한 독해능력을 키우고 싶은 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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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평소 관심 있던 장르의 예술가를 찾는다.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그림 그리기나 악기 연주에 한번쯤 심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미술동아리, 연극동아리, 노래 동아리, 책읽기 동아리 등에서 단서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정말 다양한 예술 장르의 작가들이 살고 있다. 석회(회벽)에 스크래치를 내서 그림을 그리는 김유정 작가, 보는 사람까지도 불안하게 만드는 불안한 드로잉을 하는 윤대희 작가, 연극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연극집단 앤드씨어터, 클래식인지 재즈인지 국악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김성배 작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섬은 발로 디뎌본 섬 전문가 강제윤 작가 등 누굴 만나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테니, 만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다.

둘째,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면 부담 없이 묻는다. 학교에서 1+1은 왜 2인가요? 라는 식의 당연한 질문은 하기도 힘들고 받아도 힘들다. 하지만 오픈스튜디오에 왔다면 그 당연한 질문을 쉽게 던져 봐도 괜찮다. ‘미술이 무언가요? 연극은 무언가요? 무엇으로 그리셨어요? 왜 그리시나요? 왜 만드나요? 조각은 무엇인가요? 추상은 뭔가요? 그림은 어떻게 하면 잘 그리나요? 사진은 어떻게 하면 잘 찍나요? 예술가는 누군가요?’ 등등 평소 가졌던 예술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천아트플랫폼에는 예술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많은 작가들이 있다. ‘나는 미술이 될 꺼야!’라고 외치며 미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최선작가,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작품 자체가 근현대미술사인 위영일 옹, 동양화적인 붓터치와 서양화의 재료를 모두 읽어 볼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김춘재 작가, 나와 너의 몸을 여러 예술적 언어로 탐구하는 고등어 작가와 김푸르나 작가 등 예의를 갖추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불편해할 작가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은 작업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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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것도 저것도 복잡하다면 방 번호대로 이동해 보자. 사실 스튜디오의 E-1, E-2 와 같은 방 번호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1번 방부터 가장 끝방까지 게임의 미션을 수행하듯 움직여보는 것은 가장 쉽고 빠르게 오픈스튜디오를 즐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혹시 또 모른다. 모든 미션을 완료한 마지막 방에서 뜻하지 않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자, 이제 23일(금)부터 활짝 열릴 인천아트플랫폼 구석구석을 돌아볼 일만 남았다.

양종남 / 인천아트플랫폼 운영팀장




동네방네 알림판(2016.09.20.~10.03)

인천에서 벌어지는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각종 행사들의 소식을 한번에 전해드립니다. 또한 좋은 소식이 있으면 함께 널리 알리고, 축하하고자 합니다. 매월 1주, 3주 화요일마다 발송되는 인천문화통신을 활용해 다양한 소식을 전하세요. 다음 문화통신은 각각 10.4(화), 10.18(화)에 발행됩니다.
알리고 싶은 행사 내용을 http://me2.do/xRtWJVeH 링크에서 입력하시면, 기간에 맞춰 실어드립니다. 많은 활용 부탁드립니다. #인천문화예술 #동네방네 #알림판 #소식

인천 인디음악페스티벌 날것(9.24, 계양경기장 일대)

몬스터프렌드에서 인천의 인디음악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축제 공연 <제 2회 ‘표현하라! 인천 인디음악 페스티벌 날것’>을 준비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음악을 들려주는 인디음악페스티벌로 푸드트럭과 함께해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함께 준비된다. 또한 인천 계양경기장을 활용, 이 공간을 지속적인 축제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확인한다. 인디뮤지션들이 날것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뮤지션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인 이번 페스티벌은 시민 누구나 참여해서 즐길 수 있다.

제2회 인천평화창작가요제(9.24, 18:00, 인천대학교 공연장)
“대한민국을 대표할 평화의 노래를 찾습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평화의 노래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인 제 2회 인천평화창작가요제가 오는 24일(토) 열린다. 음원과 서류심사,공개오디션을 거쳐 올라온 10팀(금공강, 하이산, 순천615 합창단, 봄봄, 달세뇨, 경인고속도로, 청년가온누리, 소소함프로젝트, 1Way, 단식광대)이 본선 무대에 오르며, 1회 대상팀 ‘솔가’와 성공회대 문화대학원합창단 ‘항동예술단’이 게스트로 나온다. 또한 일본의 ‘일어서라 합창단’과 싱어송라이터 하라다 요시오도 함께해 무대를 빛낼 예정이다. 300인의 시민평가단이 함께 심사에 참여하며, 대회 이후에는 참가한 뮤지션들이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뮤지션 파티’도 준비되어 있다.
☞ 문의 032-442-8017

비인위적 모놀로그(9.28~10.2,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
염지희 작가가 4회 개인전을 연다. 관객석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전시장과 공연장의 기능을 동시에 사용한다. 해당 장소의 특성을 이해해 경계없는 자유로움과 실험 정신을 도모하는 시도다. 동시다발적이고 느슨한 서사가 존재하는 연극으로 복합적인 무대를 구성, 일종의 체험형 연극으로 준비될 예정이다. 9월 28일(수) 오프닝 행사에서는 영화상영 행사도 연계해 진행된다.

 

01모발나눔 콘서트&전시(10.6 19:00, 잇다스페이스)
문화프로젝트 공간 잇다스페이스에서 두 번째 모발나눔 콘서트와 전시를 진행한다. 이날 행사는 박재동 화백의 기부전시, 요술당나귀 어쿠스틱 에코밴드에서 활동하는 라마와 소프라노 정찬희의 공연으로 꾸며진다. 입장료 전액은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를 통해 소아암 아이들의 가발 제작비에 사용될 수 있도록 기부한다. 장소는 잇다스페이스(인천 중구 참외전로 172-41번지)이며, 공연 입장료는 1만원이다.
☞ 소개 https://www.facebook.com/Jungheesuk1?fref=ts

 


 




한국 여자 아나운서 1호 이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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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의 하나가 이옥경(李玉慶 1902~미상)이다. 순수 문화 예술인이라기보다는 방송인 혹은 언론인의 범주에 두는 것이 옳겠지만 ‘문화’의 개념을 좀 더 넓게 확장해서, 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이옥경을 소개한다.

“약 40년 전, 조선 여성으로 고등여학교를 다닌 이옥경 여사는 인천해관 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 강사였던 이학인 씨의 무남독녀로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 출신이다. 그녀는 경성방송국의 초대 여자 아나운서였다. 부군 노창성 씨는 금년에 작고했다.”

이 글은 1955년에 출판된 고일(高逸) 선생의 저서『인천석금(仁川昔今)』「외국인 학교」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는 오늘날의 인천여자고등학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옥경은 여학교 졸업 후 동경의 일본여자음악학교를 중퇴했다고 한다. 그녀는 워낙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는데 거기에 일본어 실력까지 유창해 1927년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 같은 공개채용이 아니라 남편 노창성(盧昌成, 1896~1955)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직원으로 방송국 설립의 기술 일을 맡아하고 있었는데, 개국이 가까워 시험 방송을 하던 중 아나운서가 모두 남자여서 청취하는 시민들이 딱딱하게 느낄 것 같아 미모에다 고운 목소리를 겸비한, 거기에 일본어까지 능통한 부인 이옥경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 잡지는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 배꽃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름한 그에 얼굴, 호리호리한 몸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그때의 방송국 안 여러 사람들의 눈을 황홀케 한 때가 많았다.”고 쓰고 있다. 이옥경의 아나운서 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고, 그 후 5남매의 어머니로서 평범한 삶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알려진 노라 노는 그녀의 딸 노명자였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