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선생 발자취를 기리며…2017 우현상

인천이 낳은 한국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우현 선생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인천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우현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지난 2년간의 공적기간을 기반으로 제30회 우현학술상에 한국 근대의 미술시장과 수장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서인 『미술품 컬렉터들-한국의 근대 수장가와 수집의 문화사』의 김상엽 미술사학자를 선정하였다. 제11회 우현예술상에는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개인전 – L’Homme Debout(서있는 사람)>의 정현 작가를 선정하였다. 인천 태생인 정현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5),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선정(2004) 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소마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17 우현상 시상식은 오는 9월 27일(수) 오후2시, 인천아트플랫폼 A동 칠통마당에서 개최된다. 올해의 우현예술상 수상작인 정현 조각가의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개인전 – L’Homme Debout(서있는 사람)>에 대한 리뷰를 이번 호에 담았다. 

 

< 리뷰 >
서 있는 사람들 혹은 침묵의 메아리

루브르박물관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은 루이13세 시대에 재상을 지낸 리슐리외의 대저택이었으나 그가 죽은 후 루이 13세에게 기증되었고, 훗날 루이 14세가 루브르에서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왕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물의 주요공간은 프랑스 문화성의 여러 부서와 최고행정법원, 헌법재판소, 국립극장 등이 입주해 있지만 회랑을 따라 각종 상점과 카페, 갤러리가 도열해 있기 때문에 파리시민들에게도 친숙한 장소이다. 또한 이 건축물의 중정에는 다니엘 뷔랑의 장소특정적인 작품인 <두 개의 기둥>과 폴 부리의 분수조각이 설치되어 있어서 예술공간으로서 명성도 높다. 이 중정의 북쪽으로 길게 펼쳐진 정원에는 동시대 미술가들의 야외전시도 개최되고 있다.
작년 3월 30일부터 6월 12일까지 이 팔레 루아얄 정원에 정현의 <서 있는 사람>이 설치되었다. 정현의 전시는 5년 전부터 파리 이부(Ibu) 갤러리가 추진하였으나 역사적인 공간에 무거운 조각작품을 설치하는데 따른 프랑스 문화부와의 협의를 거치느라 계속 연기되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마침내 개막하기에 이르렀다. 면적이 2만㎡에 이르는 정원의 한 부분은 분수와 화단, 작은 정원조각이 여기저기 놓인 휴식공간이 있고 아케이드와 평행하여 좌우로 나무들이 도열한 중앙 공간에 침목으로 만든 47여점의 조각을 설치하니 보행로나 산책로로 사용되던 장소가 새로운 의미를 발산하는 공간으로 재맥락화된 느낌이 들었다. 철로에 놓였던 침목은 기차의 육중한 무게를 버팀은 물론 기름과 먼지 등 온갖 세월의 풍상을 받아들이고 견뎌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인고(忍苦)와 함께 ‘날 것’의 싱싱함을 지닌 견고한 물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전기톱으로 자르고 켜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간직한 침목의 속살과 피부는 자연현상에 노출되면서 원래의 피(기름)와 땀(때)에 의해 원래상태로 환원된다. 그것은 질곡의 시간을 버텨낸 인간의 역사를 반추함과 아울러 소리 없는 아우성을 안으로 삼키고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모습은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지시한다기보다 인체를 연상시키는 것에 그치고 있으나 이러한 추상성이 이 침목을 둘러싼 나무들과 조응하며 작품이 놓인 장소를 침묵과 사유의 장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검은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군상의 숲 사이를 걷노라면 이 조각이 주변의 역사적인 건물들과 분명하게 대비되면서도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경 속에 녹아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느낌은 아직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렸던 3월 말의 개막식 때보다 마치 작품을 호위하듯 좌우로 늘어선 나무들의 녹음이 우거진 8월말에 더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로서는 개막식에 이어 7월부터 이 작품이 철수되기 직전인 9월 말까지 파리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던 덕분에 여러 차례 이 정원을 찾아가서 작품이 환경 속으로 녹아드는 과정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이 작품 사이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한참 올려다보며 의미를 해석하는가 하면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무심한 듯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진지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이 군상 조각의 숲에서 침묵의 메아리를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역사 속에 스러져간 무수한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파리를 떠나는 날 정현은 작품의 이동을 위해 파리로 왔다. 팔레 루아얄 전시에 대한 좋은 반응으로 기간을 3개월이나 연장하였으나 이 전시를 기획, 진행했던 씨릴 에르멜(Cyril Ermel) 디렉터의 노력으로 파리 근교의 고성과 정원으로 유명한 생 클루(Saint Cloud)국립공원에서도 연장전시를 하게 된 것이다. 시월 초에 개막한 생 클루 전시는 올해 초까지 이어졌다.
정현의 팔레 루아얄 정원과 생 클루에서의 전시는 한국의 조각가가 파리의 역사적인 장소에서 작품을 발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버려진 재료에 생명을 부여한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방법이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고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 : 최태만/미술평론가
사진 :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