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제압하는 무술

제5회 인천독립영화제 “오래 달리기”

제5회 인천독립영화제에서 만난 한 작품의 제목처럼,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물론 <세계화 시대의 진화>(2016)에서 ‘진화’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지난해, 한국을 공포에 도가니로 물들였던 <곡성>(2016)의 제작사는 ‘폭스 코리아’였으며, 조선총독부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다졌던 <밀정>(2016)의 제작사는 ‘유니버셜 코리아’였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는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되어 웹을 통해 전 세계에 유통되었다. 자본이 제시하는 환상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거기에 담기는 민중의 집단적 열망 역시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우리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뭉치를 보았다. <덩케르크>(2017), <군함도>(2017), <택시운전사>(2017), <혹성탈출: 종의 전쟁>(2017)과 같은 ‘탈출서사’가 그것이다. 이는 ‘상품경제’ 안에서의 부족한 해방이지만, 분명 민중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배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탈출서사를 구성하기 위해 무엇이 승인되고 있으며, 무엇이 거절당하고 있는가는 좀 더 살펴볼 문제다. 가령, <덩케르크>와 <혹성탈출>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매우 아이러니한 박스오피스 통계치를 그리고 있다. 이 두 영화는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긴 단락들을 필요로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다. 하나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비정상적인 상영관 독점이며, 다른 하나는 스펙터클의 문제이다. 전자는 영화산업의 민낯을 까발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후자의 예후는 좋지 못하다. 민중의 에너지는 언제까지 ‘이념’에 묶여있어야만 할까? <군함도>가 국뽕과 친일 사이를 오간다는 이 모순적인 결합이 아마 우리가 처한 세태일 게다. 이걸 확정하는 건, 역시 <택시운전사>이다. 이 둘의 차이는 희망과 분노의 차이, 더 정확히는 팔리지 않는 상품과 팔리는 상품의 차이이다. 슬로모션기법에 의한 적나라한 고통의 전시는 ‘분노’라는 교환가치를 충족시키지만, 여기서 희망은 희망 없는 자들의 몫이 되지 못한다. <택시운전사>에서 광주는 이미 결말이 나버린 과거이다. <혹성탈출>을 본 사람들 중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몇몇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지루하다”인데, 이 점은 스펙터클의 가장 큰 무기가 ‘전쟁’이기보다는 ‘죽음’(민족의 그 숭고한 죽음)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군함도>의 식민시기, <택시운전사>의 군부독재시기, 그리고 현재의 정치경제적 유사성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가 탈출해야할 현재의 조건 역시도 대체로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있다.

서두가 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블록버스터급 영화, 소위 말해 ‘상업영화’들을 참조하고 글을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독립영화에서의 ‘독립’이 의미하는 바가 다소 모호하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된/되려하는 영화인가? 독립영화를 상업영화에 대한 ‘카운터 시네마’로 위치시키면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손쉬운 해결책이다. 무엇보다 ‘자본 없는 영화’라는 전제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1998년 한국독립협회 창립식에서의 선언 역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독립영화의 ‘독립’이란 흔히 말하듯 검열을 거부하고 자본을 적게 쓰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은 ‘그 무엇을 위한’ 일일 때 그 의미가 완성된다. 화려하고 기름진 화면보다는 치열하고 정직한 장면들로 새로운 영상언어를 만들기 위해, 우린 상투적 영화공식에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한 사람의 인권, 소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린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 1998. 9. 18.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식에서 독립영화인 일동

위 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이 “그 무엇을 위한” 일,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 사람의 인권, 소수의 자유”를 위한 일이라는 점이며, 그것을 완성해내기 위해서 독립영화가 “상투적 영화공식”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즉, 독립영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에 대해 정당하게 우리의 몫을 주장하고, 자본의 꿈에 배어있는 민중의 유토피아를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다. 무엇보다 승리자의 개선행렬에 동참하면서 파국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제시하는 상투적인 영화공식, 즉 스펙터클에 저항한다. 그럼으로써 독립영화는 억압받은 자들의 관점에서 오늘날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었음을 폭로한다(벤야민). <군함도>의 노동착취와 <택시운전사>의 백색테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 이제 제5회 인천독립영화제에서 만났던 독립영화들을 살펴보자.

 

파국의 알레고리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2016)는 이번 영화제에서 만난 작품들 중 아마도 가장 예쁘면서 동시에 가장 답답한 영화가 될 것 같다. 영화는 경북 영해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평범한 고등학생 정호(류성록)의 이야기를 다룬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서정적인 이미지들을 제시한다. 아련한 때깔을 머금은 논 풍경과 그곳을 미끄러져 달리는 자전거, 창문 사이로 노을이 드는 교실풍경과 그 속의 소년소녀, 해질녘 부둣가에 서있는 소년과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수평선 같은 것 말이다. 이 이미지들은 일종의 클리셰이다. 일본의 청춘물과 아니메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는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친숙함 속에서 영화가 이끌어가는 서사 역시도 그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호는 은희(지우)를 짝사랑하지만, 그 소녀의 옆에는 이미 진규(이서원)이라는 멋진 소년이 있다. 이를테면, 청춘물의 흔한 삼각관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 역시도 바로 이 영화가 일본의 청춘물과 아니메를 참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윤태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수첩에 적어놓았던 일본의 아니메 가사를 자주 꺼내보았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인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는 1995년 안노 히데아키에 의해 연출되었으며 일본 TV도쿄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오프닝곡 ‘잔혹한 천사의 테제’에 나오는 가사이다. <에반게리온>은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기말적 테마와 그 안에서 파국을 마주하는 자폐적인 성격의 소년을 그리고 있다. 자세히 파고들 수는 없지만, 우선 <에반게리온>의 열풍이 일본을 ‘폐허’ 상태로 전락시켰던 당시 버블경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과 이러한 현상이 단지 일본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예컨대,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것은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이르러서이지만, 한국은 그 이전부터도 이미 은밀한 통로를 통해 일본의 대중문화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8년은 한국이 IMF외환위기를 맞닥뜨렸을 때이기도 하다. 최윤태 감독은 ‘어린 시절’ 보았던 <에반게리온>의 파국을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를 통해 현재로 소환한다.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가 답답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정호의 유일한 친구인 형국(조성하)의 가족이 서울로 ‘야반도주’를 하면서 일어나는 곤란한 상황을 묘사한다. 정호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 그러나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 사건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민정(문수형)의 엄마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국어선생은 자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정호에게 관심이 없고, 어머니는 부재중이다. 정호는 홀로 파국을 맞닥뜨리는 중이다. 이 사건이 정호가 형국이 어디 있는지를 말하지 않아서 생긴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형국이 서울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정호는 왜 그래야하냐고 물었다. 정호가 받은 답은 “요즘 상황이 그렇잖아”라는 모호한 것이었다. 정호는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파국 속에 놓여있다.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는 파국을 바라보는 시점 숏이다.

한편, <기쁜 우리 젊은 밤>(2017)은 좀 더 직설적이다. 잔심부름센터의 라이더(김희), 연극 배우를 꿈꾸는 대리기사(김해나), 자동기계 안마기를 설명하는 영업사원(권오성)은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보통의 청춘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름’이 없다. <기쁜 우리 젊은 밤>은 하나의 ‘접촉사고’를 중심으로 이들을 묶는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말단 영업사원이 접대자리에서 술에 취한 거래처 상사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는다. 그 상사는 술에 취하면 가위바위보를 시키고 이긴 순서대로 과장, 차장, 사원을 결정한다. 대리기사가 호출되어 그들을 태우고 길을 나선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라이더가 모는 오토바이와 ‘접촉사고’가 난다. 라이더, 대리기사, 영업사원이 합의를 보려하지만 서로의 책임을 물으면서 합의가 불발된다. 그때 차에서 상사가 내린다. “가위바위보 해!”라고 소리치고는 차를 타고 떠난다. 라이더, 대리기사, 영업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그 뒤를 쫓는다. 앞서 달리는 권력자는 ‘술에 취해 있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서로의 책임을 묻기에 바쁘다. 후에 이어지는 암전. “끼이익!”소리와 함께 자동차 전복사고가 일어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단숨에 요약하는 파국의 알레고리.

 

파국의 기원
왜 안마기 영업사원이 ‘자동기계’가 되었는지 물어야할 것 같다. 자그마한 노력으로는 도저히 컨베이어벨트에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동기계처럼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순환소수>(2017)는 ‘도박’에 문제 걸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자동기계가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한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엄마 란희(이란희)는 가족을 떠나 망향 휴게소에서 설거지 일을 한다. 현정(윤서형)은 치킨집에서 오토바이 배달을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고등학생 현웅(김사무엘)은 친구들과 스포츠 도박으로 한탕을 치려고 궁리중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란희의 노동, 현정의 취업, 현웅의 도박이 정확히 같은 계열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잿빛이다. 란희는 창가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현정은 짜증이 나있는 상태다. 무리하게 배팅을 건 도박에서 진 현웅은 울기 일보 직전이다. 그들은 지쳐있다.

얼핏 보면 도박, 취업, 노동은 무관한 것, 심지어는 완전히 대칭점에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도박에서의 한탕 한탕이 매번 그 이전과 이후의 판과 무관한 것처럼, 기계를 조작하는 노동자의 노동 역시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 매번 그 이전과 이후의 노동과는 관련이 없다(벤야민). 쉽게 말해 도박과 노동 둘 모두 작업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매순간의 구직활동은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런 내용도 갖지 못한다. 성공 후에도 기다리는 건 노동이다. 그래서 도박, 취업, 노동 모두 마치 순환소수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무한히 반복된다. 순환소수는 예를 들어, ‘0.57575757…’처럼 소수점 아래의 숫자가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기쁜 우리 젊은 밤>에서 술에 취한 권력이 매번 과장, 차장, 사원의 직급을 손쉽게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재편할 수 있는 것처럼, 노동의 내용을 결정하는 건 생산관계를 재편하는 자들의 몫이지 순환하는 소수들의 몫이 아니다. 취업난 때문에 현정은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보기 원하고, 그것에 성공한다면 현정은 란희처럼 지방으로 떠날 것이다. 현웅은 영화의 마지막에 와서 현정이 했던 오토바이 배달 일을 물려받는다. 만약 ‘0’이 자본주의와의 조우라는 시작점을 찍는다면, 에이젠슈타인의 <파업>(1925)을 상기시키는 <군함도>의 노동착취는 그 안에서 순환하는 ‘57’ 중 하나일 것이다. ‘군함도’는 란희가 묶여있는 ‘망향 휴게소’와 무관치 않다.

 

파국에서 벗어나기
<밀정>에서 그리는 독립운동의 목표는 다이너마이트를 식민지 조선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소수’ 속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반복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할 것 같다. 5와 7 또는 7과 5 사이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기. 혹은 0을 폭파하기. <무방향버스>(2017)가 지시하는 게 바로 그 지점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무방향버스>는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으려는 가족의 고투를 그리는 추리극 같다. 적어도 주인공을 따라 엄마가 사라진 ‘이유’를 탐색하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엄마의 외상장부를 찾아낸 주인공은 엄마가 외상값을 받아내려 떠났다고 생각하고 장부에 적힌 사람들을 찾아간다. 여기서 주인공이 얻는 건 욕지거리밖에 없다. 그보다는 엄마가 사라진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게 더 낫다. 빈 손으로 돌아온 후 주인공은 장부 속에서 이상한 숫자들을 발견한다. 무작위로 쓰여진 버스의 고유번호들. 그렇게 찾아간 버스회사에서 주인공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엄마가 ‘무방향버스’를 타고 떠났다는 것. 류인서의 시 <봄, 무방향버스>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쓴다. “저만 아는 노선들을 외상 장부처럼 품고 돌보지 않는 언덕 넘고픈, 달달한 악몽의 향기 가득한 길 / 당신도 나도 아직 가보지 않은 방향이어서 하마터면 방황하는 근원이라 부를 뻔했다” 버스는 종점과 종점 사이를 반복 운행한다. <무방향버스>는 여기에 “없음의 방향”을 추가하자고 말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 회사를 찾아 ‘도나스’를 팔았던 엄마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오가던 버스가 사라진 곳,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노선도’에 그곳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혹, <세계화 시대의 진화>(2016)와 <야간근무>(2017)는 계속 같은 노선도만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이주노동자여성과 결혼이주여성의 억압받는 삶은 디아스포라영화의 단골 메뉴이다. 물론, 억압적인 정치경제적 질서가 계속되는 세상 속에서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영화의 힘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해보는데 있는 것이라면, <세계화 시대의 진화>와 <야간근무>는 기존의 디아스포라영화에서 몇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과장이긴 하지만, 고통의 전시는 때때로 위안부의 기억을 꺼내오는 <군함도>의 황당한 플래시백이나 극사실적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택시운전사>의 슬로모션처럼 상품으로 전락하곤 한다. 상업영화가 환상으로 비약하면서 억압받은 자들을 이용해 먹는 동안, 몇몇의 다른 영화들은 <기쁜 우리 젊은 밤>의 대리기사처럼 “예술은 독립운동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옆에 탄 사람은 이미 잠들어 있다. 차라리 때에 따라서는 <여자답게 싸워라>(2017)처럼 ‘백초크’를 걸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래, 한판 붙어보자고!” <여자답게 싸워라>에서 윤영은 단순히 ‘남성’과만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싸우는 대상은 갑질의 멜로디가 반복되는 전화기, 수동적인 여성상, 무엇보다 고시원의 어둡고 비좁은 공간 그 자체다. <여자답게 싸워라>의 고시원 복도를 통과하는 핸드핼드 쇼트에서 <악녀>(2017)의 도입부 시퀀스를 떠올리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비폭력담론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이 두 영화가 보여주는 해방적 제스처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야기해보자. <악녀>는 여성의 투쟁을 가시화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조선족’을 괴물로 부각시키는 황당무계한 스펙터클이다. 반면, <여자답게 싸워라>는 이러한 스펙터클에서 민중들이 꿈꾸는 열망만을 정수로 취한다. 그럼으로써 ‘여성’이 처한 제반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탐색하고, 시종일관 전복의 기회를 노린다. 주짓수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무술이라고 한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영화가 하고 있는 게 정확히 이러한 무술이지 않을까?

 

글/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