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씨와 금희씨
지난 4월 8일(금)에는 좀 바빴다. 정보산업고에서 사전투표하고 상경해서 인사동 여자만에서 구중서, 정희성 두 선배를 모시고 즐거운 점심을 들고 여자만 앞 인사동사람들에서 차도 한잔 하노라니 벌써 오후 다섯시, 일정 때문에 먼저 일어서 낙원표구에 가 표구 맡기고 6시에는 홍대 앞 카페 꼼마에서 열린 문학동네 시상식에 참석했다. 제자 김금희 군이 제7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덕으로 오랜만에 젊은 문단 공기를 쐰 셈인데 예정에 없는 즉석 축사까지 하곤 대학 은사 정병욱 선생의 사모님이 수를 다하셨다는 전갈에 강남성모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빈소에서 임형택 선배를 비롯한 대학 선후배들과 담소하다가 길이 멀어 10시반쯤 서둘러 인천 길을 더듬어 귀가했다.
그뒤 시상식에서 받은 수상작품집을 틈틈이 뒤적거리다가 장강명의 소설 「알바생 자르기」에서 나도 모르게 멈췄다. 칙릿(chick lit)의 기풍이 물씬한 이 단편 역시 대도시 서울의 젊은 직장여성들을 생생하게 포착할 줄 아는 작가답게 은영(최과장)과 혜미(비정규직)의 밀당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갑을관계임에도 두 여성이 상투형으로 단일화되지도 않았거니와, 특히 후자의 생존술은 놀랍게 치밀해서 자칫 밉상으로 보이기도 할 만큼 리얼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천에 산다. 서두에 “혜미 씨는 집이 멀어요” 할 때 웬지 불길하더니 기어코 “혜미 씨가 인천에서 1호선 타고 오거든요”에 이르러 하릴없다. 야간대학을 나온 비정규직 신세로 퇴근하면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에 출석해야 하는 이 시대 청춘의 평균적 초상! 그녀가 바로 인천인 것이다.
서두에 어느 날의 서울 일정을 개관했지만 새삼 인천과 서울의 문화적 거리를 실감한 바, 상경하기 전 투표하러 들른 정보산업고는 옛 인천고 자리다. 볼품없는 파싸드 너머에 엎드린 정보산업고를 보니 절로 인천고 교사(校舍)가 그립다. 불 타기 전 송림학교와 마주본 인천고 역시 붉은 벽돌 집이었다. 그나마 지금도 여전한 창영학교가 위안이다. 붉은 벽돌의 이 세 학교가 배다리 철교를 마주보고 건재했다면 절로 배다리 일대가 향기로웠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는 더 이상 근대건축물들을 부수지 말아야 한다. 이러구러 상경해 인사동에 오니 더욱 그렇던 것인데, 내가 가져간 두점의 글씨(廣山과 南田)를 알아보고 장황을 추천하는 표구사 주인의 응대에 내심 놀랬다. 빈소에서 나눈 대화조차 죄송하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으니 긴 하루가 길지 않았다.
오늘의 인천은 어디에 있는가? 외형적으로는 대구를 넘어 한국 제3의 도시라고 자랑해도, 과연 인천은 제3의 도시일까? 대구보다 아니 광주보다도 인천의 위치에너지는 낮다. 정치적 후순위는 그렇다쳐도 문화는 어떤가? 정치는 낮은데 문화가 높을 수도 있겠지만 인천은 아니다. 인천정치의 현주소는 인천문화의 현주소다.
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 있을까? 갑자기 문화 문화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문화에 비약은 없다. 교양의 원말인 독일어 Bildung이 ‘형성’이듯 일상의 지속적인 축적 위에서 문화로 가는 길이 스스로 열릴 것이다. 그러니 예전에는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는데, 하며 자대(自大)하지 말 일이다. 자대하면 곧 지금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소(自小)하게 되니 헛애만 키일 뿐이다. 옛일을 아는 건 물론 좋은데, 그게 오늘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그저 복고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히 사라진 옛것을 애도하지 말고 혜미 씨를 여여(如如)히 즉 지금의 간난을 포옹하고 미래로 투척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리고 그 도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혜미 씨가 등장하는 이 작품집의 맨앞에 인천 작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위치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란 그는 인천을 살며 인천을 사유한다. 혜미 씨이면서 혜미 씨가 아닌 우리의 김금희들이 바로 인천 문화의 오늘이요 내일이 아닐까.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