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 있는 저녁, 인천의 진취적 인물들을 찾아가다.
한국근대문학관에서 7월 6일부터 8월 3일까지 <인천이 있는 저녁:우리가 몰랐던 인천이야기> 강좌가 열렸다. 총 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번 강좌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이 배출한 인물들, 인천의 도시발전, 인천의 경제, 인천의 골목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뤄진다. 이 강좌들 중 지난 7월 13일 <우리가 몰랐던 인천의 인물들>이라는 주제로 김윤식시인의 강좌를 듣고왔다. 강연은 인천의 인구의 구성적 특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들의 사례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인천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외지 유입 인구로 성장한 도시이다. 원주민이 10% 미만인 도시는 인천뿐이다. 인천은 백제에서부터 근대 인천의 개항, 광복, 6.25 한국 전쟁 등을 계기로 인구 이동이나 전입의 계기를 가진 지형적 특성의 도시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도시에서 살아갔던 우리의 선조들은 그 특성에 맞게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진취적인 활동가들이었다. 강연에서는 김윤식 시인이 정치, 경제, 애국운동, 교육가, 체육인, 군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던 인천사람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연에서 소개되었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인천사람들 중 몇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민들의 불편해소에 앞장섰던 발명가 이성원, 민수업
첫 번째 발명 분야에서 활약했던 인천의 두 인물을 소개하겠다. 첫 번째 인물은 신발의 대혁신 이성원씨이다. 그는 1918년 활동했던 발명가로 1905년경에 인천 양화점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바닥에 가죽을 갖다 댄 최초의 실용화를 만들어내게된다. 또다른 두 번째 발명가 민수업은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소형잠수함을 만들 때 제작에 함께 참여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불편을 잘 찾아내 이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발명가였다. 그는 비 오는 날이나 장마가 질 때 천일염을 생산하지 못하는 서민들을 보고 사계절 소금을 만들수있는 기계를 제작하였다. 또, 자동차가 지나다닐 때 나는 먼지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 것을 보고 지금의 공기청정기인 먼지를 빨아들이는 기계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애국열사 하란사
두 번째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로 조선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애국열사 하란사가 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녀는 우리나라 초기 여성 교육의 역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로 눈길을 끈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는 교사로 있던 룰루 프라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혼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거절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청해 입학해 열성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하란사는 남편이 고위 세무직 공무원이 되자, 1년간 일본 동경의 경응의숙에서 유학할 기회를 갖게된다. 그 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그녀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시 소재의 웨슬리언(Wesleyan) 대학에 입학해 1906년 학사학위를 취득하며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여자 미국 학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교육의 평등한 기회분배에 힘쓴 박창례
세 번째 교육분야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인천의 인물 박창례가 있다. 박창례는 인천 출신으로 창영학교를 마치고 계속 면학의 뜻을 펴나가기 위해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2학년 때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외 강의록으로 와세다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처럼 가난하여 배움의 길을 걷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고 인천에서 이옥녀와 함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에 진력했다. 먼저 도원동 보각사에서 강당 일부를 빌어 당시 성냥공장과 정미소에 다니는 여공 1백여 명을 모집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6개월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이흥선 정미소 창고를 빌려 여공 30여 명을 데리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이마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분서주하여 일본인의 토지를 임대하게 되었고, 각계의 유지들로부터 480원(圓)의 기부를 받아 교사를 신축하고 동명학원의 기초를 다졌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현재의 동구 송림동 114번지로 교사를 이전하고 6년제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 학교는 개교 이래 박 교장의 교육 이념으로 예절 바른 학교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같은 교육계에서의 공로로 1957년에는 인천시에서 시민상을, 1964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특공상을, 1966년에는 소년한국일보의 ‘훌륭한 어머니상’을, 같은 해 경향신문교육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1년 정년을 맞이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1982년 한국일보가 제정한 제1회 교육대상을 수상했다.
체육인이자 애국열사 곽상훈
곽상훈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경인간 기차 통학을 할 때부터 ‘경인 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 야구팀인 ‘한용단’의 응원단장이 되어 일본팀과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적개심에 불타는 응원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이래 1923년에는 조선소년군 제4호 대장이 되어 활약하였고, 1924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1925년 ‘이우구락부’를 조직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만보산 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도 활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제호의 부함장 신순성
신순성은 서울 출신으로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이수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고등상선학교에서 갑종 항해사자격을 따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해 항해술사가 되었으며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광제호의 부함장이 자리에 올랐다. 광제호는 당시 우리나라에 두 척밖에 없던 군함 중 하나로서 19세기 말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인데, 한일합방이 되자 군함의 자격을 잃어 총독부 체신국의 해사 관리선으로 이적되고 말았다. 신 함장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으로 낙향하여 1926년 광제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여생을 보냈다.
강연자 김윤식 시인은 이번 강연에서 소개되었던 인천의 진취적인 인물들의 사례들을 되새기며 우리 선대들의 진취적, 창의적 삶이 인천인의 진정한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담긴 말을 끝으로 강연은 마쳐졌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도시의 바쁜 일상에 잊고 살았던 필자의 삶의 터전 인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지에서 올라와 생활하고 있는 필자에게 인천이란 낯섦, 새로운 시작의 도시이다. 인천에 이주해 이주민으로의 삶을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과 필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조들이 인천에서 자신의 삶의 에너지로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달성했던 것처럼 필자 또한 선조들의 진취적인 삶을 되새기며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겠다. 누군가 당신에게 ‘인천은 무슨 의미인가?’ ‘인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인천의 역사가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작게는 자신의 추억이 담긴 동네의 골목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은 궁금증을 던지는 것으로 바쁜 일상에 잊혔던 우리의 삶의 터전을 다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선조들의 역사, 삶을 배운다면 그저 출근길로만 느껴졌던 동네의 골목길이 새롭게 보이고 역사적 장소라고만 생각했던 명소들에서 선조들의 생활이 보일 때 비로소 도시의 숨의 물결이 현재까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인천이 있는 저녁: 우리가 몰랐던 인천이야기> 강좌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7월 6일부터 8월 3일 매주 목요일 마다 진행된다. 이 강좌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인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글/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최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