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디어작가 초청전 <발전 그리고 혼란>
“마술적 리얼리즘과 인민의 삶”
7월 5일에 시작해 29일까지 이어지는 우리미술관의 국제 미디어작가 초청전 <발전 그리고 혼란软弱的激进秩序>에서 김태준과 리이판(李一凡)의 작품을 보았다.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중국의 풍경 하나가 생각났다. 정지신호가 들어온 3차선 도로. 차들이 멈춰 선다. 1차선엔 고급 승용차가 의기양양하게 서 있고, 2차선엔 후줄근한 스쿠터가 부르릉거린다. 3차선엔 소달구지가 느긋하게 들어선다. 승용차, 스쿠터, 소달구지가 나란히 정지신호를 받은 3차선 도로. 차라리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풍경. 아마도 이는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법 익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틸라이프>(2006)에서 신도시개발이 한참 진행 중인 중국의 쌴샤(三峽) 위로 UFO를 띄우면서 지아 장 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실주의적으로 찍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술적인 상황의 사실주의란 초현실주의적인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정성일, 씨네21,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1]”, 2006.11.03., (사이트 바로가기)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중국의 현실. 전시관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마주한 리이판의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공명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왜곡되어 가는 일들을 느끼게 된다. 어제도 또 내일도 논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들이 밀려든다. 나의 작품 속 부분에는 나의 꿈이 들어가 있고 다른 부분에는 현실적인 모습들이 단순하게 중복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초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오늘날 중국사회의 현실자체를(필자 수정) 허망하고 초현실적으로 느낀다.” – 리이판, 「전시 팸플릿 작가의 글」 중에서
그러나, 리이판의 사진 작업 <기념祈念>을 본 관람객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기념>은 천막천(갑바)을 커튼처럼 달아놓고 그 사이에 농촌의 풍경과 인민들을 담은 사진을 배치해 둔 작품이다. 발전과 혼란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전형적인 전원풍경이라니. 노스텔지어적인 전향을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더 앞으로 내밀면, 이런 오해는 가볍게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속 인민들의 팔, 다리, 몸통이 흩날린다. 그 흩날림은 잔상을 남긴다. 세차게 내리치는 근대화의 시간은 잔상으로밖에 붙잡을 수 없다고 증언하는 인민의 몸들. 농촌에서 주로 곡식을 털 때 흩어지는 곡물 알갱이들을 쓸어 담기 위해 쓰였던 천막천은 이 흩날리는 몸들을 붙잡고 쓸어 담는다. 그리고 중국에서 이 천막천은 농촌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자주 이용된다. <삶은 환각과도 같다如露亦如电>의 수많은 스틸사진 중 하나는 공사현장에서 시멘트 가루를 붙잡고 있는 천막천을 보여준다. 급격한 근대화의 속도에 흩날리는 인민의 몸과 재개발로 부서지는 시멘트 가루의 시간이 한데 뒤엉켜 천막천 안쪽의 삶을 이룬다. 이곳은 최신 인공위성 안테나 옆에서 돼지가 도륙되고, 폐허 위에서 연꽃과 보살이 피어나는 마술적인 현실, 중국의 초현실적인 꿈이다.
실로 이 마술적인 현실은 수많은 인민의 핑크빛 미래, ‘중국몽(中國夢)’들 속에서 태어난듯하다. 리이판의 <핑크粉紅>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물론, 이 영상의 역사적인 참조 점이 ‘중국몽’이 본격적인 화두로 떠오른 시진핑 주석의 정부 출범식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011년 12월 충칭(중경)에서의 ‘홍가대회’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참조하는 이 영상은, 붉은 깃발을 손에 쥔 여성들의 행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여성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이 행렬은 이내 왼쪽에서 등장한 또 다른 행렬과 만나고, 스크린을 붉은 깃발로 물들인다. 그리고 이 혼란이 최고조에 다다를 때 영상이 되감긴다. 이제 여성들은 거꾸로 걷고, 이 행진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면서 스크린 전체에 감도는 핑크빛 감돈다. 그리고 허망하게 사라진다. 이 영상작업이 인민들의 각기 다른 꿈들이 뒤섞이는 혼란과 그 핑크빛 미래라는 출처를 되짚는다고 말하는 게 과연 과장일까? <핑크> 다음에 오는 작품이 <삶은 환각과도 같다>인 것은 그저 우연일까?
다큐멘터리의 스틸사진들을 모아놓은 <삶은 환각과도 같다>를 보고 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김태준의 <Life is war in one capsule>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게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3D 영상으로 한 인간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리이판의 작품들과는 달리, 김태준의 작품에는 역사적 특정성이 부재한다. 나는 이러한 작업이 개별 작품으로는 퍽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궁으로의 회귀 혹은 삶의 관념적 추상화가 그것이다. 이는 근대성의 자장이 아시아의 각기 다른 내셔널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과 만나고 굴절되는 양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한다. 그로 인해 생략되는 것은 인터-아시아적인 대화의 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일방적인 것이다. 작품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떼쓰는 아이의 투정만큼이나 어리석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김태준의 작품을 본 후 전시순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만약 급격한 근대화의 과정과 그것이 빚어낸 혼란이 인민들의 삶의 터를 폐허로 만들고 그들의 몸을 짓이긴다면, 그 삶의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버티고 끝끝내 살아가는 이 생명은 무엇인가? 하나의 캡슐 안에서 반복적으로 투쟁하면서 차이를 생성해내는 <Life is war in one capsule>의 ‘생명’ 이미지. 깃발을 손에 쥔 여성들이 거꾸로 걸으면서 한데 뭉쳐지는 <핑크>의 분홍색 ‘살’ 이미지. 혼란을 응시해야 비로소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삶은 환각과도 같다>와 <기념>의 생동하는 인민의 ‘삶’ 이미지. 그래서 김태준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작품은 규칙적이지만 혼돈 적인 모습에서 출발하여 한 아이의 탄생을 보여준다. 그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동시에 기쁨과 고통을 이겨간다. 그 과정엔 주변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그리고 변화에 적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과정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 김태준, 「전시 팸플릿 작가의 글」 중에서
글,사진 /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