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요강과 철거된 애경사
몇 해 전 부모님께서 도시생활을 접으시고 귀농하셨다. 시골생활을 결정하고 하나 둘 준비해 가기까지 두 분 사이에 별다른 의견차는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두 분 사이에 다툼이 시작됐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시던 물건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아버지가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놓은 할머니의 사기요강과 반닫이 궤짝을 시장에 다녀오시던 어머니가 발견하신 것이다. 평소 시어머니의 손때가 묻어있는 요강과 반닫이 등을 아꼈던 어머니는 이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왜 상의도 없이 함부로 버렸냐”는 어머니의 공격에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좁은 시골집에 쓸모없는 물건을 가져가서 어떻게 보관할 것이냐”며 응수하셨다. 두 분의 다툼은 며칠째 계속되었고, 급기야 소집된 가족회의에서 이를 이삿짐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버려질 뻔한 요강과 반닫이는 결국 이삿짐에 포함되었고, 지금 시골집 거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최근 주차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흔적도 없이 철거된 애경사 건물로 인해 지역사회의 여론이 뜨겁다. 인천 중구청은 동화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주차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고, 방치되고 있던 애경사 건물을 철거 한 뒤 이를 주차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고 철거 이유를 밝혔다. 덧붙여 이 건물이 문화재인줄 몰랐다고 해명했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해야할 공공기관이 앞장서 이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철거 직전, 그리고 철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몇몇 시민들은 이 건물이 갖는 역사성과 함께 남겨야만 하는 이유를 중구청에 전달했다. 8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을 보존하여 근대의 중심에 있던 인천의 흔적을 후세에 전달하자는 의견이었다. 언론과 방송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연일 보도하며, 애경사 건물 철거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중장비의 굉음 속에 80년 넘게 버티고 서있던 벽돌건물은 쓰러져 갔다. 손쓸 새도 없이 무너져 잔해만 남은 애경사 터를 바라보며, 반대했던 시민들 뿐 아니라 학계를 비롯한 지역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애경사 철거가 지역사회의 공분을 샀던 이유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별다른 조정과정과 협의절차 없이 철거가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철거를 지지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들의 입장은 흉물이 되어버린 건물을 남겨두기보다는 차라리 주차장을 조성해서 주민 편의와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철거와 보존, 지역 사회의 상충된 의견이 전혀 조율되지 않은 채, 애경사 건물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0만 구민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중구청의 이러한 행위는 할머니의 요강을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가족회의를 소집했던 우리 부모님만도 못한 것 아닌가.
2011년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인선 건설공사가 한창이던 때, 신포동 국일관 건너편에 남아있던 세관 창고 건물의 철거 소식으로 지역 사회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수인선 지하화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일제강점기 인천세관의 부속 건물로 지어진 벽돌 창고를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현장에 나가보니 앞뒤로 있던 창고들은 이미 헐린 뒤였고, 남아있던 창고 1동도 철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창고는 1911년 지어진 건물로 그 자리에서만 100년의 시간을 버티며, 세관 본 청사가 6.25전쟁으로 불 타 없어지는 광경을, 뒤 이어 새로 지어진 세관 건물마저 헐려 버리는 모습도 꿋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세관 창고의 철거 소식을 접한 몇몇 문화재위원들이 지역 사회에 문제를 제기했고, 지역과 중앙언론에서 이를 보도하면서 보존과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관할 행정당국이던 인천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건물의 가치를 재차 확인하고 이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은 뒤, 철도시설공단에 전달했다. 2014 아시안게임 이전에 개통을 목표로 공사를 추진하고 있던 공단 측에서 난색을 표했고, 양측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듯 했다. 창고를 보존해야 한다는 지역 사회의 여론과 인천시의 지속적인 협의 덕분인지 금방이라도 철거를 진행할 것 같았던 철도시설공단의 입장에 변화가 있었다.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미 결정된 신포역 출구를 변경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대신 제3의 부지로 이전 복원이 가능하다면 그 비용을 사업예산에 포함시키겠다고 제안해 온 것이다. 그 해 5월 공단 측의 절충안을 인천시와 문화재위원회에서 받아들여 철거 직전에 있던 세관 창고는 40m 남쪽으로 이전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관 창고가 옮겨갈 자리에는 1920년을 전후해서 지어진 세관 선거계와 화물계 사무실이 남아있어 향후 활용 측면에서 볼 때 적절한 위치였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던 건물 설계도를 분석해서 효과적인 이전 방법을 찾는 등 1년 넘는 준비과정을 거쳐 2012년 9월 지금의 자리에 복원을 마무리했다. 동쪽 벽은 통째로 들어 옮겼고, 나머지 벽체에서 사용가능한 벽돌을 골라내어 복원할 건물에 활용했으며, 새로 덮은 양철지붕을 걷어내고 애초의 붉은 기와를 올렸다. 그리고 1년 뒤, 이전 복원된 창고와 기존의 선거계, 화물계 사무실 등 인천 세관의 부속건물 세 동이 등록문화재 제569호로 지정됐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랬기에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창고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이미 철거가 결정된 건물이 보존되고, 다시 문화재로 등록되기까지 몇몇 시 문화재위원을 비롯한 지역사회와 행정당국인 인천시, 그리고 공사를 주관했던 철도시설공단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과정과 절차가 있었다. 이러한 과정과 절차는 향후 비지정문화재의 보존에 있어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지어진지 70년이 넘는 조일양조주식회사 소주공장의 철거를 시작으로 지금 애경사 철거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많은 근대건축물이 사라져 갔다. 세관 창고의 보존에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던 과정과 절차는 이미 오래 전에 무시되고 있었다.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이 하나 둘 무너져 가는 동안 시민사회나 전문가 집단, 행정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각자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번 애경사 철거를 계기로 6년 전 있었던 좋은 선례가 이어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또 다시 파괴된 근대건축물의 잔해 앞에서 한숨만 쉴 수만은 없지 않은가. 며칠 전 인천시 행정부시장 주재로 시 관계자들과 시민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2011년 세관 창고의 복원을 위해 머리를 맞대었던 노력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졌던 할머니의 요강은 시골집 거실에서 여전히 건재하시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집사람과 모으고 쌓아두는 것을 즐겨하는 나의 성향으로 볼 때, 할머니의 요강을 둘러싼 부모님의 다툼이 우리 부부에게 그대로 이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먼 훗날 소집될 가족회의에서 논리 정연한 말발로 언제나 나를 제압해 왔던 집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모아놓은 잡동사니를 남겨야 하는 이유를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겠다.
글, 사진제공/ 배 성 수 인천시립박물관 컴팩스마트시티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