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할머니

함흥 운흥리, 용숙씨
베를린에 오기 전 경기도 하남의 할머니집을 찾았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김용숙, 고향은 함흥이다. 나는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곳, 북한 함흥.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함흥에서 살았던 집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함흥 운흥리! 아주 큰 집이었어. 이짝 동쪽 대문으로 들어오면 소나무, 과일나무가 있고, 아름답게 만든 정원이 있고, 그리고 가운데 이짝으론 마루가 있고 창문을 열면 아까 그 정원이 보이고, 왼쪽에는 다다미방,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었어. 커다란 마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앵두나무, 소나무, 포도나무가 보였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할머니는 큰 집에서 산다. 근사했던 북한 집과 달리 남한 집은 동네 집장사가 지은 탓에 건축비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갔지만…
할머니가 함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건 겨우 스무살 때 일이다.

“따라랑 따라랑 6.25 나가지고 흥남에서 배 타고 왔어. 1.4 후퇴 때 말이지. 미군들이 함흥까지 들어왔다가 다시 후퇴를 하면서 피난민을 다 배에 실었어. 배에 다 실어가지고 거제도에 내려놨어. 피난 나왔다가 바로 돌아간다 생각했지. 다 같이 피난갈 이유도 없었고, 원래는 내가 남기로 했는데, 아버지가 나도 같이 가자고 그러더라고. 집 지켜야 한다고 동생 두 명은 집에 남았어. 친척이나 친구들? 가들은 다 안 나왔어.”

따~라앙랑 따~라앙랑,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퀴리부인처럼 여성 화학자가 되고 싶었던 우리 할머니 용숙씨는 어느날 갑자기 고향을 등지게 된 일이 어이없는지 따라랑 따라랑, 전쟁을 신나게 표현한다.

베를린ZK/U레지던시에서 지내다보니 통속적이지만 북에서 피난 온 할머니와 동서로 분단되었다 통일된 베를린 역사가 겹쳐보인다.

“바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지!”

할머니가 맨몸으로 남한에 나온 이유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자신도 모르는 새 넘어버렸다. 여든여섯 할머니가 함흥 운흥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베를린에 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아직 베를린 장벽에 가보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은 날이다.

 

너무 낮지만 견고한 장벽
유치하고 단순하다. 장벽과 철조망이란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장벽은 벽을 세워 동독과 서독을 분리했다. 너와 내가 다르니깐 나는 여기 살고 너는 저기 살란 식 아닌가? 마치 초등학교 때 책상에 선을 긋고 짝꿍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동서독 분단 시절,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고 결국 서베를린은 동독에 완전히 둘러싸인 섬 신세가 돼버렸다. 우리나라로 치면 평양의 절반에 남한사람들이 산다는 거 아닌가? 당시에는 서베를린을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 안의 자본주의 국가, 서독 지역이란 이유로 ‘육지 속의 섬’이라 불렀다. 결과적인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독이 서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은 건 서독에 이롭게 작용했다. 장벽 저 편에서 높게 세워지는 빌딩들을 바라보며 동독사람들은 서독의 풍요를 부러워했고 많은 동독 사람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긴 세월이 흐른 후 결국 장벽은 허물어졌다. 만약 평양이 절반씩 남북으로 나뉘어 한편에 남한 사람들이 살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독일처럼 이미 통일을 이루었을까? 통일이 되었다면 어느쪽으로 되었을까 하는 식의 공연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오스트 반호프(Ostbahnhof)역에 도착했다. 레지던시에서 동쪽으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장벽이 보인다. 드디어 왔다.

그런데 막상 장벽을 마주하니 좀 당황스럽다. 왜 이렇게 낮아? 게다가 두께마저 얇다. 낮고 얇은 장벽을 빼곡히 채운 건 전세계 작가들의 그래피티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1.3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갤러리다. 도로변이 구동독이고 반대편 슈프레(Sprre.R) 강변 쪽이 구서독이다. 베를린 장벽 뿐만 아니라 수프레 강 역시 동서독을 나누는 국경이었다.

벽을 따라 걷다 보니 장벽에 그려진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장벽 반대편으로 길을 건넜다. 그제야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여전히 뭔가 아쉽다. 그림이 너무 많고, 그 앞을 오가는 차가 너무 많아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기 어려운 탓이다.

종종 손상된 그림도 보인다. 멋대로 장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훼손하면 안된다는 경고가 무색하게 낙서를 막는 건 쉽지 않은가 보다. 나로선 장벽을 빽빽하게 채운 그림보다 인상적인 건 벽 두께다.

고작 한 뼘 정도 두께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얇은 장벽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니 참 허무하다. 장벽 위는 아치형으로 둥글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장벽 위에는 사람들이 넘을 수 없게 날카로운 철조망이라도 설치해놓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치형의 모양이라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장벽 위를 잡고 넘기 힘들게 하려고 둥글게 만들었다고 한다. 장벽 한편에서는 부서진 베를린 장벽 조각을 판다. 장벽의 잔해라는 돌덩이를 상자에 담아 파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곳 베를린 장벽의 다른 이름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다.

과거에 목숨을 걸어야 넘을 수 있었던 장벽은 이제 전 세계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로 변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분단의 상징을 갤러리로 바꾸었다. 독일 사람들이 과거 베를린 장벽과 역사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신념 또는 맹신
장벽을 보고 레지던시로 돌아오니 건물 앞에 있는 공원에선 늘 그렇듯 터키 아이들이 뛰어논다. 레지던시가 위치한 지역은 베를린 서쪽, 시멘스트라세(Siemensstraße)인데 터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덕분에 주변에는 저렴한 케밥 식당과 터키 수퍼마켓 등이 많다. ZK/U레지던시는 특이하게 공원 한가운데 있어 항상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곳 베를린 ZK/U 레지던시는 기차역을 개조해 문을 열었다. 과거의 플랫폼은 현재 테라스로 변신했다. 그 때문인지 매일 아침 식사를 들고 나와 테라스에서 먹을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우연히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됐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었을 때 기차역은 서독에 위치했지만 동독 사람들이 근무했다고 한다. 동독에서 만든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라 동독 사람들이 관리하는 희안한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을 가운데 두고 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다. 공원이 일종의 국경 역할을 한 셈이다. 공원을 지나 도로만 건너면 서독이었다. 레지던시 디렉터, 마티아스 아인호프(Matthias Einhoff)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에 아주 큰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여기서 일했어요. 이를테면 ‘스트롱 빌리버 (Strong Believer)’들이라 할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이들은 결코 동독을 떠나지 않았죠. 자기들 체제에 대해 대단한 믿음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었던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베를린의 함흥 할머니
레지던시 건물에서 공원 끝 도로까지는 100m가 채 안 돼 보인다. 과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거리다. 당시 여기서 일했던 동독 사람들은 매일 서독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원 너머 서독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요하지 않았을까? 마티아스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믿음을 가진 ‘스트롱 빌리버’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한편 의아하다. 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혹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지 않은 사람들 또한 스트롱 빌리버들 아닌가? 과거 서독 지역에서 동독 사람들이 일하던 기차역에서는 이제 전세계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한다. 동독 사람들이 종일 바라보았을 기차역 앞 공원에서는 매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치고, 터키 아이와 독일 아이가 함께 뛰어논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날 때 곧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자기 의지로 내려왔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가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았어도 할머니는 배를 탔을까? 할머니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경계는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레지던시 건물 지붕에 세우려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를테면 어처구니인 셈이다. 나는 런던으로, 베를린으로, 파리로 여행을 다니지만 할머니는 유럽에 와보지 못했다. 허리도 아프고 귀도 잘 안들리는 할머니가 여기까지 직접 올 순 없으니 작업을 통해서나마 할머니를 이리 모시고 와 베를린을 보여주고 싶다.
할머니 모습을 한 어처구니는 함흥에서 온 내 할머니이자 분단된 나라에서 북한을 고향으로 둔 많은 이들의 모습이다. 한편 베를린 사람들에겐 수십년 전 동서독 분단시절을 상기시킬 것이다. 어처구니를 세우고 나면 공원에서 뛰어노는 터키 아이들에게 할머니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우리 할머니나 너희들이나 이유가 무엇이건 경계를 넘었구나. 쉽지 않겠지만 경계 또는 국경을 넘은 너희들이 예쁘게 자라기를 기도하겠다고.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