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역사가 담겨있는 인천의 근대건축물

지금 인천에서는 보존해야 할 건물은 부수고, 멸실된 건물은 다시 세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 중구는 근대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이 이용할 주차장을 세우기 위해 또 다른 근대문화유산을 부순다. 이런 모순은 어제 오늘의 사건이 아니고 벌써 10년 넘게 반복되어 온 현상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간추려도 문화주택과 전 새마을협의회 건물(관동2가), 조일양조장(선화동), 동방극장과 송주옥(신포동), 애경사(북성동2가) 등이 사라졌다. 의미있는 근대건축물을 연달아 부수면서, 사진 몇 장을 근거로 대불호텔을 복원하고, 심지어는 현대식 건물 외관에 목재를 붙여 일본식이라 우긴다. 거대한 일본고양상이 길을 막고, 차이나타운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목적은 단 하나 관광이다. 이미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는 심산이다.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든 때 인천으로 돈을 쓰러오는 사람이 많아지고, 인천사람들이 돈을 번다니 기쁘다. 그러나 관광객이 인천을 찾는 이유는 어줍잖은 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동네에는 없는 인천 개항장만이 간직한 근대문화유산을 보기 위해서다. 이번에 철거된 애경사 건물만 해도 1930년대에 유행하던 건축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벽돌을 쌓아 구조체를 만들고, 당시 첨단 건축기술이던 철근콘크리트 보를 걸었다. 손쉽고 값이 저렴한 트러스 대신 철근콘크리트 보를 쓴 것은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리기 위해서였다.
건물에 적용된 디자인 수법도 돋보인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처리해 안정감과 변화를 주었고, 벽체돌림띠와 인방, 창대석은 당시에 유행하던 인조석으로 마감했다. 특히 벽체 모서리 벽돌을 서로 엇갈리게 한 단 걸러 표면에 몰탈을 발라 모서리를 강조하는 방법은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애경사(2009년과 1937년)  출처 : 좌측_필자촬영   우측 _대경성사진첩(1937년)

애경사 부지 앞뒤로 도로가 지난다. 원래의 도로는 지금은 이면도로가 된 ‘참외전로 59번길’이다. 이 길에 면한 건물의 모습은 건물 철거 전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전면도로인 ‘제물량로’는 해방 후에 개설된 것으로, 이 도로개설로 애경사 부지 일부가 잘려나갔다.

혹자는 애경사 건물이 역사도 불분명하고, 예술가치도 없는 낡은 건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략 1930년대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애경사 건물에 적용된 건축양식은 당시 유행했던 세제션 양식이다. 세제션은 19세기에 유행된 장식주의에서 벗어나 기능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양식으로 분리(파)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일본건축계는 분리파 건축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많은 건축물을 이 양식으로 지었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낡고 하찮은 건물이지만, 애정을 갖고 바라보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예술사조로 식민지 건축물을 평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으나, 보잘 것 없는 건물이라는 말을 반박하기 위해 덧붙여 본다.
전쟁의 포화와 산업화 시대의 개발압력에도 살아남은 건물이 관광이라는 돈벌이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진 이 시대에도 근대건축물이 계속 사라지는 현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원도심이다보니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고, 사람이 몰려들다보니 주차난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역사와 문화가 담긴 건물을 허무는 일은 지극히 비문화 행동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원인은 낡은 건물이니 철거한다는 단순한 접근방식에 있다. 근대건축물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댄다면 건물의 외벽을 살리면서도 주차장을 만들 수 있다.

개항으로 설정된 인천 조계지에는 격자형 가로망과 도로, 전기와 수도와 같은 도시기반 시설이 갖춰졌다. 인천으로 몰려 온 외국인은 이곳에 자기나라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을 옮겨와 건물을 세워 나갔다. 결과적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의 건물이 인천에 들어섰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환경이 남아 있는 인천개항장은 인천만이 가진 역사자원이다. 화교의 생활터전인 차이나타운이 있어 소중한 역사문화환경을 생동감있게 만든다. 인천시민은 식민지 잔재인 근대문화유산을 보는 시각도 남달랐다. 먹고 살기 급했던 1960년대 초에 인천 근대건축이 가진 가치를 담은 ‘개항과 양관역정’이 발간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의식을 갖고 있었다. 높았던 인천시민의 문화자존심이 관광이라는 돈벌이 앞에 허물어지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애경사(비누와 양초제조)가 있었던 중구 북성동2가. 정미소와 양조장, 간장공장이 있었고,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는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풍국제분(현, 삼화제분) 등이 위치한 동구 만석동 일대로 이어지는 지역은 인천 최초의 공업지역이다. 일제강점 말기 부평일대에 세워진 산업문화유산과 인조견을 만들던 강화읍내의 산업유산도 주목해야할 근대문화유산이다. 해방이후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과정에서 세워진 현대건물도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건축물’은 지은 지 50년이 경과한 건물을 말한다. 해방이후에 세워진 건물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상당수는 개항이후 해방이전까지 외국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세운 것으로 일본에서는 이를 식민지 건축이라 부른다. 일제강점의 쓰라린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근대건축은 결코 멋지거나 예술가치가 높은 건물이 아니다. 식민지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간 뒤 근대건축물 안에서 우리가 써 내려간 역사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떠들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더 이상 서로를 미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확실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당장은 인천 전역에 산재한 문화유산에 대한 철저한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이 조사가 단순한 학술용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근대건축 전문가를 필두로 그동안 현장에서 활동한 시민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 전수조사 후에는 보존 대상과 철거해도 되는 건물을 시민합의를 통해 가리고, 한옥 등 건축자산법에 따른 기본계획도 세밀하게 수립되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건축에는 시대가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애경사를 철거한 자리에 들어설 주차장은 우리 시대의 사상적 가치와 문화수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될 것이다. 문화재지정 해제를 요구하는 서명부와 유서 깊은 건물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현상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근대건축물 철거의 책임문제는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말이다. 누구의 잘, 잘못을 넘어 이번 일을 인천의 문화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성숙한 문화의식을 가진 지혜로운 인천시민이다.

 

글, 사진제공/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