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공동체 2. 도시재생 시대의 지역 공동체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 만들기’에 이어 ‘도시재생’이 도시 계획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새로운 정부는 대선공약에 ‘도시재생 뉴딜’을 강조하면서, 앞으로의 도시정책이 ‘낙후 지역 철거-기반시설 공급-아파트 건설’의 방법에서 ‘지역 공동체 보존-기반시설 보완-소규모 정비사업’으로 전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익숙하게 보아왔던 넓은 빈 토지에 대단위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 원도심의 좁고 오래된 주택지를 철거하고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은 더 이상 최선이 아니라는 이러한 전환 속에는 ‘오래된 도시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사라진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 또한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인식 속의 ‘공동체’는 막연하게 ‘삭막한 도시’와 대비되는 ‘따듯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공간’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지역공동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이런 막연한 감정이 일종의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인 뒤르켐은 전통 사회에서의 통합은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이 없이 기존의 사회규범과 가치를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우려되는 빗장 공동체(Gate Community)는 지역 공동체라는 도구를 통해서 도시 안에서 계급 분리를 극단적으로 실행한 예가 됩니다. 최근 오래된 도시의 유지와 재발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새로운 도시 문화 형성을 위한 공동체가 생겨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반면, 결국은 도시 문화를 소비주의적으로 전용하고, 기존 거주자들을 축출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공동체는 지역보다 다른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지곤 합니다. 산업혁명 이래 도시 공동체의 중요한 한 축은 ‘노동자’라는 계급 기반의 공동체였습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에 대한 반발로 벌어졌던 ‘점거’운동 또한 이러한 공동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또 미적 감수성이나 취향 등도 공동체 형성의 계기가 되는데, 20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일시적으로 유지되는 선택적인 공동체로서 ‘정서적 공동체’를 제시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휴대전화, 인터넷은 공간적 간격을 지우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스마트폰과 SNS는 이제 오히려 공간적으로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공동체가 근린보다 더 가깝고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미 1960년대에 이렇게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공동체를 ‘근접성 없는 공동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전통적 농촌사회에 비해서 더 복잡하고, 파편화된 도시 속에서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런 관점들에서는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도시 계획 속에서의 지역공동체 재건의 움직임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와 동등한 선에서 지역공동체를 하나의 선택지로 제시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의 도시 속에서의 삶은 점점 더 ‘가정’ 안의 것들을 밖으로 빼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을 하나 둘씩 도시 속으로 빼내고 가정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지요. 청년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 오피스텔, 고시원 등은 점점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주방을 줄인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일어나는 ‘집밥’의 유행은 그들이 밥을 ‘안 해 먹는 것인지’, ‘못 해 먹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합니다. 주방을 줄였지만 침실이 늘어난 것은 아니어서, 방 안의 책상이 좁아 공부할 곳을 찾아 집 밖의 카페와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맞벌이를 통해 가정경제를 지탱하면서 보육은 가정 안에서의 돌봄 대신에 어린이집을 선택합니다. 때론 어린이집을 마친 이후의 시간도 가족이 아니라 ‘도우미 이모’와 함께 합니다. 이런 단편적인 예들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은 주방과 공부방을 가정에서 빼내어 도시 속에서 그때그때 식당과 카페 공간을 구매하고,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도 어린이집과 도우미 이모를 구매함으로써 대신합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가정의 영역을 줄여버린 도시의 삶을 종종 ‘삶의 외주화’라고 부르곤 합니다.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삶은 ‘외주화’를 권장해 왔습니다. 가정과 지역의 영역에서 한 부분씩 구매의 영역으로 꺼내 올 때마다 흔히 그것을 ‘블루오션’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무수히 늘어난 외주화 된 삶을 모두가 비슷하게 구매할 수 없다는 것도 점차 분명해졌습니다. 그 격차에 대한 절망감이 국가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욕구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복지정책에 대한 요구말이지요. 그러나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국가가 시장을 통해 외주화 된 삶을 공공서비스로 온전히 충족 시켜주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환상과 가능성은 어쩌면 이 지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가 처음으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 사업은 ‘사람의 가치’와 ‘신뢰의 관계망’을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미 가정에서 이탈해버리고, 공공서비스가 보완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메꿔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재발견하겠다는 의도이고, 이를 위해 사라진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도시 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이야기했던 길가에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골목의 아이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근린이 서로의 삶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요.
국가 권력이 의도적으로 주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재건한다는 부분에서, ‘마을 만들기’는 시민사회와 주민 스스로의 자치의 영역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실질적으론 그들까지 국가의 미시적인 통치 내부로 포섭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공동체 재건은 단순히 일부 복지 수혜 계층에 대한 공공서비스 제공의 수준을 넘어서, 지역 주민 전반이 파편화된 구조에서 서로의 삶을 호혜적인 구조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도시재생에서의 지역 공동체 형성은 지역 주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여러 공동체를 동시 다발적으로 시도하고, 이들이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형태를 띱니다. 연령, 직업, 취향 등 많은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의 요소들이 전통적 공동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새롭게 재건하는 지역 공동체는 과거처럼 기존의 규범을 답습하는 장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외주화된 삶’을 다시 지역 공동체로, 때로는 가정으로 복원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천은 계속 비어있는 땅을 찾아내고, 땅이 없을 때에는 갯벌과 바다를 메워가며 높은 아파트로 도시를 채워가면서, 상대적으로 원도심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습니다. 이제 도시재생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바라는지, 그 삶을 위한 지역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제 깊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J. Jacobs(2010),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 J. Scott(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 D. Harvey(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 김미영(2015),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여러 형식, 사회와이론 27
– 박주형(2013), 도구화되는 ‘공동체’ –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간과사회 23(1)
– 이정민,이만형,홍성호(2016), 근접성 없는 공동체의 사례 연구 – 충북 괴산 탑골 만화방을 대상으로,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