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외침이 비에 쓸려가다.
연극 <블랙아웃> 극단 십년후

아이들의 외침이 비에 쓸려가다.
무대에 덧입혀지는 영상은 여름 한낮의 아파트, 별이 빛나는 한밤의 아파트, 상가 앞 거리, 대형 마트, 교회 앞에서 흔들리는 나무, 경찰서 앞, 소방서 앞, 문 닫은 시장 등으로 바뀐다. 무대 가운데는 배우들이 주로 연기하는 공간으로 단을 쌓아 올려 높낮이를 활용한다. 공터 혹은 광장과도 같은 곳이다. 음악은 서민들이 전기 없이 살아가는 암울한 상황을 담은 듯 우울한 곡조다.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5월 17일(수)에 시작한 연극 <블랙아웃>은 한여름을 살아야 하는 도시에 전기가 끊긴 후 시민들의 하루하루가 날씨와 마찬가지로 푹푹 쪄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 상황을 동희와 동민이라는,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의 시선으로 그려서 아이들이 처음 맞이하는 암울한 세상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극단 십년후의 연극 <블랙아웃>은 박효미 작가의 동화 「블랙아웃」이 원작이라고 한다. 필자는 공연 첫날인 17일에 본 연극의 내용과 형식에 국한하여 이 리뷰를 쓴다.

공터로 사람들이 모인다. 거리 전광판에 ‘전기가 끊겼지만 원자력발전소 등을 점검 중이고 곧 복구할 예정’이라는 뉴스가 뜬다. 복구할 거란 걸 사람들은 일단 믿기로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상황은 심상치 않다. 마트는 일찍 문을 닫기 시작하고 경찰이 나타나 고압적인 태도로 줄을 서라고 한다. 소방서에서는 급수 중단을 알리며 문을 닫는다. 나중에는 소방관과 시민이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부모님이 중국 광저우로 출장을 가셨다는 동희, 동민 남매는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려고 하지만 마트에서 어렵게 구한 물건을 두 번이나 도둑맞는다. 

처음에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고 동희와 동민은 서로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물을 닦으라고 티격태격한다. 또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다. 물과 먹을 것이 떨어져가는 것이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마트에 같이 가자며 신경을 써주지만 마트에도 물건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이 이어지자 이웃 아주머니는 남매의 엄마가 전에 꿔간 돈을 쌀로 가져가겠다며 남매의 집에서 쌀 포대를 들고 나가려고 한다. 슈퍼맨 옷을 입은 아주머니의 가족(아이들이 삼촌이라고 부르는)은 차마 못할 짓을 했다며 남매에게 쌀을 돌려준다. 구직 중인 이 청년은 유약하지만 극에서 유일하게 양심이 살아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몸에 두른 교인들은 전기도 물도 없이 지쳐가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예수님이 이 상황에서 당신을 구원하시리라는 맹목적인 메시지를 퍼뜨렸다. 지친 남매는 평소 다니지 않던 교회까지 찾아가지만 교회 관계자는 신자들에게만 물을 준다며 손에 쥔 안내 봉으로 동희의 가슴팍을 밀어 줄 밖으로 밀쳐버린다. 동민에게는 윽박지른다. 신자라는 이유로 맨 앞줄에 서 있던 아주머니는 새치기하는 아들의 자리까지 맡아 놓고 있었다. 남의 자식을 모른 척 하고 자기 자식만을 위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어른들은 위기 상황에 닥치자 아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자기만 살겠다는 거다. 이 장면은 이웃을 돌보라는 성경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는, 바로 교인들 스스로 ‘불신지옥’에 빠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트에서 산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신고를 해도 경찰은 지금 그 정도 일은 별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남매를 건성으로 대한다. 동희는 ‘블랙아웃이 되니 국가가 국민을 버린다!’고 경찰서 앞에서 외친다. 부당하고 무기력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여학생의 마지막 외침이다. 그 소리를 들은 경찰은 시끄럽게 구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동희에게 언덕 너머 시장 끝에 있는 마트에서 아침 일찍 2시간만 물건을 판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경찰들이 시민들에게는 쉬쉬하며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던 거다.

경찰에게서 들은 마트의 위치 정보를 동희는 끝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경찰 병력을 뚫고 대형 마트로 돌진할 만큼 급하고 흥분해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물론 시장 쪽 마트 주인이 아이들에게 다시는 마트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협박했고 또 그 근처에서 도둑을 만나 폭행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말 못할’ 이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극의 전체적 구조를 놓고 보자면 ‘경찰은 문을 여는 마트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며 동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바로 그때! 극의 절정을 코앞에 두고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큰 비가 내려 이 상황을 종결시켜 버린다. 극의 절정에 이르러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정보가 비를 맞고 그냥 사라진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마트는 손님들에게 현금만 요구하고, 물건은 없는데 CCTV는 돌아가고, 거리에는 똥오줌이 흘러넘치는 등 생활 속에서 벌어질만한 일들의 디테일이 살아있다. 다만 이러한 디테일 역시 극 구조 안에서 상승선을 탈 수 있다면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재난 속에서 어떤 일상이 펼쳐지는지 사건들은 죽 이어지지만 극의 긴장감을 상승시킬 만큼 충분히 서로 연결돼 있지 않아서 에피소드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격앙되어가는 동희와 동민의 감정선에 이야기를 얹기보다는 각색 과정에서 극의 구조를 더욱 선명히 한다면 작품 전체가 탄력적으로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연극 <블랙아웃>이 더 완성도 높은 좋은 공연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극단 십년후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동화 원작을 각색해서인지 아이들의 시선으로 재난 속 세상의 변화를 그리고 있는데 연극에서는 아이의 시선에 사건들이 갇혀버리는 형국이 되어서 다른 인물군의 일상이 좀처럼 입체적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성인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그린 사건의 톤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고, 그렇다고 아동청소년극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연극을 만들려다가 공연의 성격이 모호하게 된 것은 아닐까. 동화라는 좋은 씨앗에서 출발한 연극인만큼 아동청소년 관객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열 명 이상의 배우들이 이리 저리 마트로 우르르 몰려가는 상황을 다 함께 종종걸음 치며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군중 속에서 두 명의 배우들만 움직이고 나머지는 멈추는 등의 표현은 재미있었다. 연극적인 표현 방법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불 꺼진 아파트 단지에서는 별빛을 볼 수 있다는 걸 표현하는 영상에도 여러 번 눈길이 가 닿았다. 전기가 끊긴 아수라장의 상황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극의 마지막에는 계절이 바뀌어 눈이 내린 한겨울이다. 슈퍼맨 옷을 입고서 쌀 포대를 되돌려주던 이웃 삼촌도 옷을 갈아입었다. 삼촌과 마주친 동민의 장바구니 안에는 그때처럼 또 햇반과 물이 들어 있다. 동민은 자라는 중이고 삼촌은 구직 중이다. 관객들은 ‘취직…?’이라며 뒷걸음질 치는 삼촌을 보며 웃었다. 악다구니를 쓰던 어른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기가 끊긴 후 동요하는 군중뿐만 아니라 어른과 아이들의 대비랄까, 그 갈등 또한 <블랙아웃>의 한 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이 겪었던 혼란과 이기심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눈이 덮어버렸을까. 

 

글 / 김혜진(공연비평가)
사진/ 극단 십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