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의 도시, 베를린

이번 호 부터 ‘지구별 문화 통신’을 시작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단의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소식을 소개하는 코너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줄리아, 나 베를린에 가게 됐어.”
“와우, 언제든 우리 집에 놀러 와, 며칠 지내도 되고.”

나는 줄리아를 쉐핑헨(schöppingen)의 한 레지던시에서 만났다. 쉐핑헨은 독일 북서쪽 뮌스터(Münster)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녀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 혹은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모티프로 작업을 한다. 동갑이기도 했고 관심사도 비슷해 쉽게 친해졌다. 작년 여름 베를린에 잠시 갔을 때 줄리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때 내가 본 베를린은 눈썹이 보일 만큼 짧은 앞머리가 유행이었고, 팔뚝만한 무스타파 터키 케밥(Mustafa’s Kebap)을 먹을 수 있는 곳이며, 거리를 걷다 보면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그래피티와 힙스터 같은 이들로 가득했다. 바람 불고 비가 흩뿌리는 거리를 걸으며 “아, 언젠가 다시 와야지. 그리고 나처럼 예술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 좀 더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해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에 다시 오게 되었다. 아! 베를린.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도시,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 지겹도록 말하는 곳이다. 하긴 쉐핑헨에서 만나는 예술가들 역시 다들 베를린에 산다고 했지. 예술가 아닌 이를 만나기가 더 힘든 곳, 내가 처음 느낀 베를린이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베를린에 예술가가 많이 살게 되었을까? 줄리아가 베를린으로 이사 온 건 2011년, 그때도 이미 베를린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베를린은 다른 독일지역에 비해 렌트비가 싸다. 물론 물가가 저렴하고, 수많은 종류의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래서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다야? 이런 뻔한 이유 때문에 다들 베를린으로 온다고?

“승연, 난 베를린에 살지만 사실 내 영상 작업의 대부분을 베를린에서 찍진 않아. 촬영은 독일의 다른 도시, 다른 마을에서 하고 베를린의 내 스튜디오에서 편집하는걸 좋아해. 사실 베를린엔 예술가가 너무 많아. 그러다 보니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원을 받는 게 매우 어려워. 사실 지원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 그렇지만 여기선 여러 사람들에게 쉽게 작업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고, 작업실에 초대해 편집 중인 작업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을 수 있거든. 물론 난 집에서 먹고 자고 하니 파자마를 입고 편집하러 옆방으로 갈 수도 있고. 하하.”

줄리아는 베를린에 살지만 작업의 배경은 베를린이 아니다. 하긴 나도 서울에 살지만 내 작업이 서울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서울에서 살고 있기에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갔을 때 그곳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작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는 건 흥미롭다. 줄리아가 사는 지역은 베를린의 동독지역인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이다. 그녀가 전에 살던 베를린의 노이퀼른(Neukölln)지역이 힙하고 트렌디했다면, 리히텐베르크는 조용하고 평범한 동네다. 2015년 그녀는 이곳으로 이사 왔다. 줄리아의 집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왠지 내가 상상하던 베를린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도 베를린의 다른 지역에서 본 사람들과 달리 좀 더 거칠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네를 좀 더 둘러보니 카페, 레스토랑, 수퍼마켓 등 필요한 건 다 갖춰진 곳이다. 여기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오래 전부터 여기 살던, 베를린 출신 사람들?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온 사람들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줄리아, 네게 베를린은 어떤 곳일까? 혹 10년 후에도 베를린에 살고 있을까? 베를린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 같아. 특히 예술가들 말이야. 그럼, 진정한 ‘베를리너’는 어떤 사람들일까?”

“글쎄, 난 베를린에 살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라곤 생각하진 않아.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 살면서 내가 진정한 베를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흠, 10년 후에 아마 난 베를린에서 살고 있진 않을 걸. 아마 독일의 다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지금 베를린의 내 집과는 달리 큰 집에 살며 동물들과 여유롭게 살고 싶어. 사실 작업을 하며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꼭 베를린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베를린 외 다른 여러 도시 또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건 분명하니까. 그러나 아직까진 다른 도시가 나를 부르진 않네, 하하… 지금 난 베를린에서 행복해.”


많은 예술가가 살고, 오가고, 스쳐 지나는 곳, 베를린. 베를린은 이방인들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예술가가 작업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영감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 모여든다. 그 중 일부는 떠나가고, 일부는 남는다. 줄리아의 말처럼 이방인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베를린은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베를린에서 사는 동안 베를린은 잠시나마 누군가의 고향이다. 2017년 봄에서 여름까지 베를린에서 살게 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나마 이곳이 나의 따뜻한 고향이 되길. 다시 만나 반가워, 베를린.

참, 나의 베를린 친구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줄리아 (Julia Charlotte Richter)를 소개합니다.
(줄리아 홈페이지 가기)

글 / 이승연
사진 / 박준, 줄리아(프로필)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