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희미한 연극인 강성렬
“<혁신단> 임성구 일행이 애관의 전신인 협률사에서 신파 연극을 공연한 것이 45~6년 전의 일이다. 그 후 김도산과 <취성좌(聚星座)>의 김소랑 등이 나타났다. <중략> 임성구의 연극에 심취한 인천 소년 강성렬은 후에 <취성좌> 무대에 나타났고, 인천권번 기생들이 총동원되어 가무기좌에서 공연할 때 무대감독을 맡았다. 그는 기생 일점홍(一点紅)과 눈이 맞아 행방을 감춘 일까지 있었다.”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에 보이는 인천 연극인 강성렬(康成烈 ?∼?)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내용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다. 『인천시사』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인천에 남은 거의 유일무이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강성렬은 크게 두드러진 연극 활동을 보이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1924년 <문화극단>이라는 연극 단체의 단장 직함을 가진다. 이 극단에 대해 1923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가 ‘각처에 흩어져 있던 신파연극계의 중요한 배우들로 새로 조직된 단체라고 전한다. 시대일보에도 “문화극단 단장 강성렬 씨의 주선으로” 1924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인천의 표관(瓢館)에서 “『뉴니뻐-샬』 가주특작(加州特作) 「라주음의 비밀」전 삼십륙 권 영화를 두 번에 난후어 인천에서 공개할 터인데 본보 독자에게는 특히 반액으로 우대할 터이라는 바” 운운하는 기사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는 1925년 인천에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배경으로 연쇄극(連鎖劇) 「연(戀의 역(力)」을 촬영한다는 기사가 있을 뿐이다. 명색이 극단 단장이었는데도 개인 기록조차 없는 것은, 그가 한국 연극계의 인텔리도 아니요, 연기의 비중이 컸던 대배우도 아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인천권번의 유명한 기생 일점홍과 눈이 맞아 행방을 감추기까지 할 정도였던 강성렬. 아무튼 그는 임성구의 연극에 심취한 소년에서 훗날 <문화극단>의 단장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크든 작든 이 나라 무대 예술계에 나름대로 종사했고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인천 연극사에조차 이름 한 자가 올라 있지 못한 것이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김윤식의 인천 인물 발굴은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 갖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