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미-래의 아름다움: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도래할, 미-래의 아름다움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허경(철학학교 혜윰 교장)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은 2021년 10월에 개관한 예술창작공간 ‘아트플러그 연수(APY | ArtPlug YEONSU artist residency)’에 입주하여 5개월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마친 작가들의 ‘결과 보고전’이다. 참여한 작가는 창작분야 6명(김민, 김민석, 윤미류, 이현우, 전장연, 정기훈), 프로젝트 분야 2팀(이정은, ‘랜-딩 페이지’)이다.
프랑스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나는 우연한 계기로 창작분야 작가 6명 모두와 ‘철학과 작가노트’ 개념의 글쓰기, 현대미학 수업, ‘이론가 매칭’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6명의 작가들과 대략 4회 정도의 모임을 하며, 작업과 작가노트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 글은 APY 레지던시 작가들과 함께한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전시에 대한 짧은 소개와 비평이다.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 아트플러그 연수, 2022.1.27.~2.27. |
1. 김민 – 불안의 아름다움
김민의 작업은 얼핏 보면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들이 ‘잘 그렸다’고 말하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그림이다. 김민의 ‘덜 그린 것 같은’ 작업은 세계의 불안함, 불완전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용옥이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이른바 우리 고유의 사유에 대해 말했듯이,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다(imperfection is a higher value than perfection). 오늘, 아름다움은 현상 그 자체의 불완전함, 그리고 그것을 지각하는 작가의 불안에서만 온다. 오늘의 예술가가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 할 때, 김민의 작업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불안과 불안정을 유지하는 능력, 건강한 불편함을 유지하는 능력이야말로 오늘의 현대미술이 (자기기만을 피하고자 한다면)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무제(#1234)>, 캔버스에 아크릴, 193.9×130.3cm, 2022 | <무제(#흐물흐물, #우직한)>, 캔버스에 아크릴, 65.1x53cm, 2022 | <무제(#생각보다, #가까워)>, 65.1x53cm, 2022 |
2. 김민석 – 예술/일상의 철학적 퍼포먼스.
나는 마르셀 뒤샹이나 존 케이지가 살아 있다면 분명 김민석과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민석은 2022년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과 분투, 즐거움과 가벼움을, 유쾌하고도 부조리하게 당신 앞에 (안) 펼쳐 보인다. 이번 작업은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처럼, 벽에 뚫린 슬릿과 핀홀을 통해서 들여다보이는 내부의 설치작업이 있고, 작가가 때때로, 무작위적으로, 나타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전시를 보러 갔는데 봤거나/못 봤거나’의 복불복(福不福), 즐거운 게임이 된다! 참고로, 나는 이 퍼포먼스를 보지 못했다. 과연,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說乎)?
* 뱀발. 때로, 김민석의 작업이 당신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나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당신이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김민석의 작업이 늘 이해되지는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남의 ‘흉내내기’가 아닌) 진짜 오늘-여기-나(우리)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앙스러운 것들>, 퍼포먼스, 2022 |
3. 윤미류 – 빛나는 사물들의 세계
윤미류의 세계는 사소한 것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세계, (사람들을 포함한) 빛나는 사물들의 세계이다(shining of things). 윤미류의 그림에는, 지구상 곳곳, 때로는 모자가 때로는 외투가, 때로는 한국인이 때로는 아일랜드인이, 때로는 어른이 때로는 아이가, 때로는 남자가 때로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윤미류는 그냥 이런저런 사물들, 이런저런 사람들을, 애정과 관심으로, 게으르지도 부지런하지도 않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러니까 때로는 과하고 때로는 모자라게, 그러나 늘 자신만의 자리,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려낸다. 이는 마치 동네 아이 또는 어르신 들을 아주 잘 찍은 인물 스냅사진에서처럼, 그들과 함께,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이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게 된, 어떤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만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다. 이제, 윤미류는 아무도 굳이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 일상의 평범한 장면에 눈길과 손길을 주고, 다정한 무관심(indifférence tendre)으로 살피며, 그들의 뒷모습, 누운 모습, 일하는 모습, 그들 자신은 결코 본 적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되돌려준다.
<Double Ripples>, 캔버스에 유채, 91×73cm(×2 pieces), 2021 |
4. 이현우 – 침묵, 빛 속에 잠긴 오후의
이현우가 우리 앞에 던져 놓는 세계는, 거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같이, 말없이 조용한 세계, 때로는 물, 때로는 바닥, 때로는 창문, 때로는 벽면이 보이는 세계, 그러나 늘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현우의 작업은 실상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는 시도이다. 이 그림들이 그려내려는 것은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세계, 곧 심미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인 동시에 종교적인 ‘말할 수 없는’ 세계,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이자, 실은 누구나가 – 일상에서 또는 일생에서 때로 한번은 느끼는 세계, 침묵과 빛이 어우러진 세계, 더 정확히는 이러한 것들이 빚어내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Stimmung, atmosphere)의 세계이다. 이현우의 그림 앞에 선 이는 실로 바라봄이 체험임을 알게 된다. 일본어 체험(體驗)의 원어 ‘experience’는 라틴어로 ‘지금으로부터 빠져나간다(ex+peritus)’와 ‘이제까지와 달라진다’라는 의미이다. 곧, 체험은 실험(實驗)이자, 말하자면, 탈-험(脫驗)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볼 때, 나와 그것이 모두 바뀐다. 이현우의 그림은, 안쪽의 내가 바깥의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는 나와 보이는 그것 사이에서 생겨나는 어떤 체험, 가히 ‘현상학적 체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체험을 체험하게 만든다. 나는 이현우가 바라본 풍경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체험한다. 거의 신비적인 그러나 결코 신비주의적이지 않은, 그런 체험을.
<face>, 캔버스에 유채, 80x80cm, 2022 |
5. 전장연 – 도달할 수 없는, 안정감
도달할 수 없는, 위태로운, 안정감, 균형.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 작가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남편이자 아버지인 작가에 대해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만큼이나, 반대로,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모든 섬세함을 여성주의적 실천으로만 환원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앉아서, 서서,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지 않는 이들은 사이사이 보이는 아이들의 작은 장난감과 머리핀, 고무줄, 구슬, 동전을 결코 볼 수 없다. 전장연의 작품은 예술과 일상이, 설치와 회화가, 윤리와 정치와 예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당신은 몇 개의 보는 장소(地點), 보는 관점(觀點), 서 있는 자리(立場) 들을 갖고 있는가?). 이것들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일은, 추구되어야 할 일일 뿐, 결코 도달 불가능한 일이다. 전장연의 작업은 지금 나의 답이, 지금 너의 답일 수도, 나중 나의 답일 수도 없음을, 모든 균형이란 오직 찰나적인 위태로운 균형일 수밖에 없음을, 시각적이자 촉각적으로, 시간적이자 공간적으로, 윤리적이자 정치적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심미적으로 웅변한다.
<5 개의 꼭지점(5 pointed star)> 메탈봉, 스프링, 손잡이 스폰지 타투 스티커, 80x120x110cm, 2021) |
<circle bonding>, 철근, 머리방울, 80x130x80cm, 2022 |
6. 정기훈 – 현대와 미술을 넘어
정기훈의 작업은 서양ㆍ현대ㆍ미술 3가지를 모두 의문에 붙인다. 정기훈은 서양을 넘어 인류학으로, (근)현대를 넘어 전-(근)현대와 선사시대로, 미술을 넘어 기술과 예술, 장인과 예술가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로 나아간다. 작업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늘 유머를 잃지 않으며, 결코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정기훈의 작업은 예술과 관련된 기존의 모든 범주들 사이에 설정된 경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때로는 허무하게 보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보이며, 때로는 우리를 헛웃음 짓게 만드는, 이 작업은 얼핏 과거를 다시 재현하는 작업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철저한 오해이다. 인간은 결코 과거를 살거나 다시 살 수 없으며, 설령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당사자의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직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정기훈은 결코 과거를 오늘 재현하지 않는다/못한다. 정기훈은 오늘, 오직 오늘의 방식으로 과거를 다시 재구성해볼 뿐이다. 정기훈의 작업은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고, 정기훈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가 보편적이며 따라서 변경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중 어떤 것이 참으로 변경 불가능한 필연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연마술>(Grinder), 뼈, 가죽, FHD VIDEO 00:10:00, 2022 |
7. 이정은 – 라지 파크와 빅아트
이정은의 작업은 ‘간척된 땅 위에 조성된 송도 센트럴 파크의 지형, 토양, 풀과 나무, 한옥과 정자, 다리, 공공미술 등이 어떻게 설계ㆍ계획ㆍ관리되고 있는지’에 관한 리서치 작업으로, 추후 <결과 자료집>의 형태로 발간될 예정이다.
8. 랜-딩 페이지 – 땅 위로 내려앉는 블라인드/베일?
‘랜-딩 페이지’는 이현인, 조근하, 타케마사 토모코, 오타 하루카가 함께하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실제와 가상, 또는 현실과 실재, 현재와 과거, 여기와 저기 사이의 차이와 동일성의 놀이를 수행한다. 말하자면, 현실 위로 내려오는 또는 올라가는 블라인드는, 그리스의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말하는 베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위키피디어에서 찾을 수 있는 교과서적 해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이러한 해석이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베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미 이 해석의 해석 아님을 가정하는 오류, 곧 베일 뒤편에 ‘있는 그대로의, 진짜 현실’이 있다는 황당무계한 19세기적 과학관으로 우리를 되돌리지 않는가? 차라리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베일, 블라인드는 우리가 믿는 현실이 하나의 구성된 허구이고, 허구는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틀일 뿐, 모든 허구가 반드시 거짓이나 날조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허구, 그러니까, 예술적 장치가 아닐까? 이제 우리는 마그리트를 따라, 최근의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푸조 자동차 회사를 예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듯이,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 곧 예술적 상상력은 차라리,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없게 하는 능력에 관계된 어떤 것, 우리로 하여금 드디어 ‘땅 위로 내려앉게 해주는 첫 장면’(land-ing page),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조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랜-딩 페이지’ 전시 설치전경 |
나가면서,
당신의 행운을 빌어요.
i wish you good luck.
허경 Huh Kyoung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철학박사, (전)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현)철학학교 혜윰 교장, 팔복예술대학 학장. 지은 책으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읽기』(세창),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공저ㆍ문지), 『푸코의 미술』(근간) 등이, 옮긴 책으로 푸코의 『상당한 위험』(그린비), 『담론의 질서』(세창), 들뢰즈의 『푸코』(그린비) 등이 있다. rendezvous00@naver.com
사진제공: 연수문화재단(촬영: 조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