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화자
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인천 권번(仁川 券番)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다. 권번은 기생조합으로 기생으로서의 기본인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193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가수 이화자는 부평 태생으로 인천 권번 출신이다. 이화자에 대해서는 1938년 8월호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이서구(李瑞求)의 「유행가수 금석(今昔) 회상」에 나온다.
“요사이 신인으로 이화자, 조영심(趙影心) 두 미희가 전속진에 가담되어 있다. <중략>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
이밖에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춘계 독자 위안회’ 출연 기사가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손목인(孫牧人), 장세정(張世貞), 이난영(李蘭影), 김정구(金貞九) 등 쟁쟁한 가수들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이화자는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립동」은 이른바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 섰고,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가 인쇄되어 레코드 상점마다 배포될 정도로 첫 곡부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38년 “백만 번의 갈채를 거듭한 이화자 독점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꼴망태목동」이 대히트하면서 마침내 ‘민요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선이 굵은 구수한 목소리의 넋두리 같은 표현과 콧소리의 간드러지는 흥얼거림 등 독특한 창법이 특징”이었던 이화자는 이어 1940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듯한 「화류춘몽(花柳春夢)」과 또 다른 가요 「살랑 춘풍(春風)」등을 내놓아 팬들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꼭 한 곡, ‘자서곡(自敍曲)’이라고 이름 붙여 그 1년 전인 1939년에 발표한 「어머님 전 상백(上白)」 노래 또한 당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이화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아편에 손을 대, 끝내 아편 중독자가 되고 광복 후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만신창이로 혼자 생활하다가 1950년, 30대의 나이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