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는 사실 우리 엄마 이야기예요

<달려라, 아비>는 사실 우리 엄마 이야기예요

정영진(인천문화예술회관 주무관)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리고 스핑크스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백십 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달려간다고 생각했어.” 딸의 상상 속에서 아빠는 지구 어딘가를 핫핑크 반바지를 입고 달린다. 엄마와 함께 일상을 맞는 딸은 쾌활한 성격이다. 모녀에게는 아빠의 부재로 인한 상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씩 과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과 헤어짐 속에 담긴 사연들을 찾게 된다.

<달려라, 아비>는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연극 <달려라, 아비>는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2021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이하 한문연)에서 주관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공동제작‧배급 사업 공모에 당선돼 제작했다. 인천 내 3개 문화예술기관(인천문화예술회관, 부평구문화재단, 인천서구문화재단)과 ㈜스포트라이트가 공동으로 제작했고 총제작비의 50%는 국비 지원, 나머지 50%는 3개 기관이 각각 부담했다. ㈜스포트라이트는 작품 창작 전 과정을 세세하게 관리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인천문화예술회관
부평아트센터
ⓒ부평구문화재단
청라블루노바홀
ⓒ인천서구문화재단

작품 제작은 딱 일 년 전에 시작됐다. 한문연 사업 공모가 난 직후 인천지역 3개 문화예술회관 공연기획 담당자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두렵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생각들을 모아갔다. 그러던 차에 우연인 듯 필연처럼 다가온 작품 제안이 <달려라, 아비>였다. 대본을 들고 찾아온 제작 프로듀서의 수줍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 출신 인기 소설가 김애란의 작품을 인천에 있는 문화예술 기관과 공동으로 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소설을 각색해 송현동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인천의 이야기를 만들고 서울과 전국으로 유통해서 스테디셀러 연극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프로듀서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 제작이 1년의 숙성 시간을 거쳐 드디어 10월 22일 청라블루노바홀에서 첫 공연을 올리고, 11월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마지막 공연까지 총 9번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주)스포트라이트

<달려라, 아비>는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술빵, 팔길래, 눈 와, 첫눈” 끊어진 단어 사이로 아빠의 서툰 사랑고백이 참 사랑스럽다. 엄마와 아빠의 로맨스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애틋하고 예쁘게 자란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기 직전 집을 나간 아빠. 딸에게 아빠는 미지의 세계고 어디선가 열심히 뛰고 있는 대상이다. 아빠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엄마와 딸.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아련한 빈자리는 추억과 상상으로 메꾸며 잘 살아가고 있다.
제목은 아빠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들지만 사실 이 연극은 엄마의 이야기다. 아빠에 대한 상상 속 달리기는 택시 운전을 하는 엄마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환된다. 핫핑크 반바지를 입고 세계 곳곳을 달리는 아빠는 택시를 몰아 시내를 질주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오늘도 바쁜 일상에서 명랑함을 잃지 않은 딸의 모습으로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우리들 모습으로 그려진다.
<달려라, 아비>의 단순한 플롯 전개를 재기발랄한 극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은 영상이 맡았다. 이 극의 장르는 영상이 결합된 콘템포러리 연극이다. 반지하방이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하고 앞쪽으로 놓인 러닝 트랙과 허들은 동화적 이미지와 함께 메시지 전달을 위한 오브제로 쓰인다.
작품을 섬세하게 다듬은 김가람 연출가는 <뮤지컬 아랑가>로 명성을 쌓은 젊은 연출가이다. 그녀가 그려내는 무대는 역동적이면서도 파스텔톤의 아련한 감정이 녹아있다. 과감한 영상 도입과 무대 장치의 조합은 볼거리 제공과 함께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연극에 생동감을 불어 넣은 배우들은 누굴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지만, 딸과 함께 남겨진 삶을 긍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 역할은 정영주가 맡았다. 그는 최근 뮤지컬과 방송으로 바쁜 스케줄 임에도 연극무대의 생동감을 잃고 싶지 않아 캐스팅에 응했다고 한다. 기존의 억척스러운 이미지를 절제하고 극중 배우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연기를 택했다. 딸 역할의 이휴는 뮤지컬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신예다. 원작처럼 전체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이끌어 가면서 극중 감정의 고저를 주도한다. 아빠 역할의 장두환은 1인 다역 멀티맨이다. 아빠와 외할아버지, 택시 승객 등 다양한 남성 캐릭터를 극 속에 녹여내며 감초 역할을 한다.

ⓒ인천문화예술회관

<달려라, 아비>는 내년 대학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의 3개 문화예술기관과 제작사는 앞으로 계속 공연을 할 때마다 공동제작 명의를 쓰기로 했다. <달려라, 아비>의 출발점은 인천이다. 내년 대학로를 시작으로 대전을 지나 광주 무등산을 너머 부산 김해 공항을 돌아 제주 한라산으로, 그러다 태평양을 날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달리는 아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영진(丁榮進, Chung Young Jin)

안양아트센터, 마포아트센터, 부평아트센터, 종로아이들극장, 인천문화예술회관 등 공공공연장에서 공연기획과 홍보마케팅 업무를 주로 담당해왔다.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문화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인하대학교 문화예술교육원에서 문화예술교육개론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