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목적성 기념비에서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의 여정: 2021 트라이보울 초이스 선정전시 《축적 새김 확장》

무목적성 기념비에서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의 여정2021 트라이보울 초이스 선정전시 《축적 새김 확장》

정수경(전시기획자)

바다를 비우고 땅을 다지며 형성된 도시에 (눈에 띄는 동시에 주변과 조화되지 않는) 트라이보울만큼 이 땅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건축물이 또 있을까.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스스로를 ‘Flâneuse’(방랑자)로 여기며 이곳, 저곳에 켜켜이 새겨진 도시/건축 미감을 탐구해 온 필자는 몇 해 전에 발견한 이 난해하고도 아름다운 오브제를 처음 만난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4년 인천 프랑스문화원 알리앙스프랑세즈의 기획으로 진행된 재즈 공연에 어시스턴트로 참여하면서 트라이보울에 방문했다.)

트라이보울 전경 ⓒ트라이보울

1. 볼록한 배의 배꼽 안으로 진입하기움푹진 콘크리트의 부피감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출입구를 통해 건축물 내부로 향하는 과정은 마치 ‘부른 배의 배꼽으로 진입’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어릴 적 읽은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처럼. 배꼽으로 진입한 공간 여행자는 낯선 터널과 같은 깊고 굴곡진 계단을 만난다. 계단을 올라 그 끝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회색이던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 펼쳐진 세상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내부에서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건축의 ‘켜’라는 개념을 살펴봐야 한다.1) 트라이보울 내부 공간은 이 ‘켜’가 얇다. 즉, 부른 배에 트여있는 작은 틈으로 진입하면 1층의 좁고 긴 터널(과 같은 계단)을 지나게 된다. 이 공간의 사용자가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순간 곧바로 3층을 마주한다. 역으로, 3층 대공간에서 내려다보면 2층과 1층의 구분이 어렵다. 층간 구분이 어려운 트라이보울을 공간의 켜가 얇다고 말한다. 거인의 배꼽으로 진입한 사용자는 익숙한 물리적 감각을 전복하는 새로운 건축적 체험을 제공받는다. 트라이보울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잊지 못하는 점은 바로 이 난해하고도 아름다운 공간을 직접 걸었기 때문이다.

트라이보울 입구 ⓒ정수경

2. 무목적성 기념비자본주의의 바이블인 합리성에 따라 지어지는 모든 건축물은 ‘네모의 꿈’ 속에 있다. 네모난 방, 네모난 건물, 네모난 계단, 네모단 복도 속에. 버려지는 공간(Dead space)이 생길 수밖에 없는 원형의 건축은 평당 이용면적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공간 논리에는 적합하지 않다. 합리성에서 비켜 나간 트라이보울은 <2009 인천 세계도시축전>의 일환으로 설계됐다. 당시 인천시에서 제시한 설계 기준은 단 하나, ‘입체적인 공간 체험이 가능할 것’이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불룩한 배로 들어가는 느낌을 자아내는 트라이보울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건축 설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3천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싶다면 음향시설과 관람객 군집의 동선을 유기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설계의 주안점인데, 트라이보울은 ‘목적이 없는’ 건물이었기에 설계과정에서 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유걸(b.1940-)은 제안된 프로그램이 없기에 기존의 건축의 규칙들에 완벽하게 ‘반’하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보통의 건축은 고정된 넓은 밑면을 갖추고, 윗면으로 올라가면서 뾰족하게 혹은 비틀어서 모양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 대성당과 같이. 유걸은 이 아주 오래된 건축의 명제를 뒤집어, 좁은 밑면에서 넓은 윗면으로, 고깔 모양이 뒤집어진 역 쉘(易-shell)구조를 완성했다. 유걸은 세계 최초 역셸구조 콘크리트 건축을 설계했고, 포스코 건설과 비정형 디지털 건축연구소 WITHWORKS와 함께 시공에 성공했지만, 어떻게 사용될지 정해지지 않은 트라이보울은 결국 무목적의 기념비, 송도의 도시 미감을 돋보일 랜드마크로서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무목적성 기념비는 곧 자본의 논리에서 한 켠 떨어져 있는 ‘예술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보통 미술관 건축은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예술을 담는 목적을 띄므로 데드스페이스와 보이드(void, 커다란 빈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물랑 대성당 프로젝트 정면부 입면도 ⓒCentre historique des Archives nationales – Atelier de photographie Tri-bowl ⓒiArc architects

3. 비정형 공간에서 일 벌이기새로운 공간론을 탐구하는 전시 《축적 새김 확장》2)의 기획안은 오랫동안 머릿속 한 폴더에 저장되어 있던 트라이보울의 건축적 체험에 기반을 둔다. 이 낯선 경험이 무엇인가 오랫동안 고민해본 끝에 이 공간을 고대 그리스 공간이론인 ‘카오스(Chaos) 이론’3)을 빌려 새롭게 정의해 볼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세상의 근원이 카오스에서 창조됐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흔히 혼돈으로 번역되는 이 카오스는 시원적(始原的)인 심현 혹은 갈라진 ‘틈새’로서, 하늘과 땅과 같이 이미 존재하는 두 개의 사물 사이의 열린 ‘빈터’이다. 그 작은 틈에서 필요한 어떤 것들이 – 예를 들면, 해와 달, 산과 물, 낮과 밤처럼 – 나름의 우선순위를 두고 탄생한다. 즉 카오스는 비어있는 무한의 공간이 아닌, 자신을 채울 것을 예지하는 공간이며, 그 자체가 무(無)인 것이 아닌 그 속에서 사물들을 생성하는 독창적인 활동들이 나타나는 갈라진 틈새이다. 필자는 카오스의 ‘빈틈’을 위에서 언급한 ‘거인의 배꼽’으로 상정한다. 배꼽 안으로 들어온 용감한 창작자, 관람자 그리고 기획자들의 행위에 따라 트라이보울의 둥근 공간이 공연장으로 때론 마켓으로 때론 전시장으로 자유롭게 변모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수봉마을’로도 변모했다.4) 무목적성 기념비의 조형 속에 건축가가 열어 놓은 켜가 얇은 대공간은 문화예술공간의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아닐까. 건축사 연구자 겸 전시기획자인 필자는 이곳을 ‘카오스’에 비유했지만. 이 비정형 공간은 더 많은 일을 벌일 곳으로, 더 다양한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21 트라이보울 초이스 선정 전시 《축적 새김 확장(Accumulation Sgraffito Expansion)》
(트라이보울 3층 전시장, 2021.8.19.~9.17.) /좌 ⓒ트라이보울, 우 ⓒ정수경

건축가 유걸은 트라이보울을 짓고 난 후 평생의 건축관이 변화했다고 한다. 목적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고. 건축의 목적은 건축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공간 점유자가 정해나가는 것이라고. 한 건축가의 공간 실험과 문화예술공간으로서 10년간 트라이보울이 쌓아 온 실험 결과는 지금, 위드 코로나 시대에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집이라는 공간이 상황에 따라 오피스로, 헬스장으로, 학교로, 카페로 전환되고 있는 지금 이 비정형의 공간을 비가시적인 설계도를 이용해 쪼개거나 덧붙여 다양하게 사용했던 예술가들의 실험은 그 어떤 레퍼런스보다 중요하니까 말이다.

<각주>

  • 1) 사전적 정의로는 포개어진 물건의 하나하나의 층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건축에서는 한 층과 층의 레이어를 말한다.
  • 2) 필자는 전시를 통해 여든의 유걸의 건축 실험을 재조명하고 건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강준영, 김재준, 배대용의 축적하고 확장하고 새기는 예술적 행위를 트라이보울 내부로 가져왔다. 합리성에 기반한 기존의 물리적 건축문화를 선회하며 비물리적 층위의 공간론을 탐구했다.
  • 3)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주로 카오스를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지하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카오스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떤 공간 개념이었다.
  • 4) 공연 <수봉산방>(2021.9.4.)은 트라이보울의 역셸 구조를 수봉 공원의 언덕처럼 응용해 관람객들의 움직임과 참여를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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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트라이보울 초이스 2021 선정전시 《축적 새김 확장》을 기획하면서 리서치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새로운 공간론을 실험하는 본 전시는 끝이 났지만 다음의 두 영상을 통해 기획자와 작가들이 축적하고 새기고 확장한 낯선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렉쳐 콘서트 <트라이보울과 유걸: 비정형 콘크리트 속 부유하는 공간>
(출처: 트라이보울 유튜브 계정)
《축적 새김 확장》 전시 영상
(출처: 트라이보울 유튜브 계정)

정수경 (郑樹耕, Jung SooKyeong)

공간에 담긴 시간성과 미감을 읽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건축적 체험을 글과 전시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파리 1대학 Panthéon Sorbonne 미술사학과 학사, 미술사·건축사 석사를 졸업하고, 건축사학 박사과정 연구원으로 있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건축큐레이팅 학예연구원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리서치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독립기획자 및 연구자로 장소성에 대한 연구물을 집필중이다. Instagram계정 (@mee.mee.jung)에서 기획의 단상들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