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 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세기말 아날로그 시대의 감수성을 듬뿍 담아낸 영화 <접속>의 명대사가 흐르는 공간, 종로3가 옛 피카디리 극장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권칠인 감독을 만났다. 20~30대 여성심리를 가장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 <싱글즈> 감독이자 인천영상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권 감독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시작되었다.
‘파시’, 그리고 할리우드 키드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을 파시(波市)라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 파시는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좌우하는 가장 큰 행사였다. 권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할리우드 키드로 살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로 파시를 꼽았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극장이 가장 많기로 손꼽히던 도시였다. 파시만 되면 돈과 사람이 몰리니, 문화소비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의 조기파시는 특히나 유명했다고 한다.
애관, 미림, 오성, 문화, 인천, 현대, 동방, 금성, 아폴로, 자유……. 앉은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극장명만 해도 십 수 가지니, 그 시절 인천에 얼마나 많은 극장이 있었는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시절 권 감독에게 극장은 놀이터이고 휴식처였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천의 할리우드 키드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곧장 영화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건축공학과로 진학했어야 하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 터이니, 영화로 전공을 삼는다는 것은 요원하였으리라. 그러나 영화에 대한 그의 갈증은 대학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영화아카데미를 들어가면서 영화인으로 사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권 감독은 영화인으로서의 시작을 이렇게 소회한다. 그가 영화를 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한 가지. “앞으로 나는 분명히 가난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을 이끌었다. 그는 “적어도 정직할 수는 있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보통의 삶과 감정을 담겠다는 것을 하나의 좌우명처럼 마음에 남겼다고 말한다.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칠인 감독이지만,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인천과 보다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영상위원회(이하 영상위)의 위원장이자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위촉된 것이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의 산하기관이었던 영상위는 2013년 독립법인으로 분리된다. 같은 해에 인천독립영화협회도 설립되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뜻깊은 사건이다. 한 기관이 산하기관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단지 예산과 조직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자칫 그 기관의 위상과 영향력까지 축소시킬 위험을 내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이자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영화가 가진 성격을 이해하고 수용해준 재단의 용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러한 상생의 결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결단으로부터 비로소 인천의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마련되었음에, 권 감독은 재단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였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사진: 인천영상위원회) |
그렇다면 어엿한 독립법인이 된 영상위의 위원장으로서 그가 진행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권 감독은 망설임 없이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꼽았다.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의 정수를 ‘합수(合水)’라고 강조한다. 말 그대로 ‘물이 합쳐지는 곳,’ 그 뱃길을 타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모여드는 곳. 그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 시작은 재단과 함께 진행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다양성 사업인 <무지개다리 지원사업>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인식이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디아스포라영화제>가 탄생되었다. 권 감독이 떠난 뒤에도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로서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고향인 인천을 위해 좋은 선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았다.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 그는 오늘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항상 보통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장르가 멜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의 대표작인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등은 모두 그러했고, 그의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들에서 좀 더 탁월하게 드러났다.
싱글즈(2003) | 뜨거운 것이 좋아(2008) | 관능의 법칙(2014) |
하지만 놀랍게도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영화’라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이제 ‘영화’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가 이미 새로운 매체와 형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비법(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이미 비디오는 사라졌고, 극장도 변화했다. 다양한 플랫폼이 출현했고 거기에 맞춰 영상의 형식도 달라졌다. 우리가 사용해 왔던 ‘영화’라는 말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새로움’이 이미 영화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영화’라는 말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그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극장에서 가장 최신의 콘텐츠를”
이 변화 속에서 인천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권 감독은 현재 인천시가 진행하고 있는 ‘애관극장 공공 매입 여부’와 관련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관극장의 역사성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제는 그 활용이다. 권 감독은 공공자산으로서 극장을 매입해서 그저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활용하는 데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오히려 이 극장을 다시금 살아있는 공간으로써 활용해주길 당부한다.
애관극장 |
가령 애관극장이 가진 대형 스크린을 새로운 콘텐츠를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플랫폼으로 떠오른 유튜브, 그 안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최첨단의 콘텐츠를 위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료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 한류가 뜬 이후에는 내내 그 과실에만 탐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이제라도 ‘국·영·수 세력’이 만들어낸 이 관료제와 열심히 싸워야 한다. 성과와 업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피력해야 한다.
권 감독은 인천이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폭넓게 수용하려는 태도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인천시의 선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인천의 문화인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긴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