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김지영, 최수련, 편대식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 김지영 KEEM Jiyoung
김지영은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뜻밖의 사고처럼 벌어지는 사회의 사건 배면(背面)에 위치한 구조적 문제와 그 사건이 돌출된 양상을 통해,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맺는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는 세월호가 드러낸 세계의 균열에 천착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입주 기간 동안에는 작품 제작을 위한 연구과정을 세분화하여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더불어 초가 심지를 태우며 발하는 빛의 다양한 열감을 포착하여 담아낸 <붉은 시간> 연작을 보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그리기 방식을 확장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고민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익숙해서 감각하지 못하거나, 감각하지 못하도록 가린 시스템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뎌진 삶의 기울기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 작업이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당겨오거나, 우리가 더 이상 의식하고 있지 않은 대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길 바란다. 우리에게 희미한 것 혹은 무뎌진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깊숙이 침잠한 것을 두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기에, 매체와 그 형식을 구성하는 일에 더욱 고심하게 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단어도 각각 쓰이는 때와 불러내는 인상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미술에서의 매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설치, 회화, 책, 사운드, 영상 등 각각의 매체가 고유의 속도를 지니고 있고 저마다 압축 가능한 범주와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작업이 의미를 전달할 속도와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이에 적합한 매체와 형식을 고민하여 작업을 만들고 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사회적 사건을 마주하는 태도를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2018년 산수문화에서 열었던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전시는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을 막연한 반복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반복되어온 것인지 구체적으로 목도하고자 진행한 <파랑 연작>(2016~2018),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구축되는 역사를 은유하는 <기억의 자세>(2016/2018)로 구성되어 있다. <파랑 연작>과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195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있었던 사건들 중 와우아파트,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유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32개의 사건을 바탕으로 삼는다. 구조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그리기[<파랑 연작>]와 쓰기[<닫힌 창 너머의 바람>]를 통해 사회적 사건의 반복성과 현재성을 드러내고, 그 유사성 속에 세월호 사건을 넣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하게 세월호 사건을 호명하고자 했다. <기억의 자세>는 뜨개실이 전시 기간 동안 천천히 한 코씩 풀려나가는 설치 작업이다. 움직임을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풀리던 실이 어느새 실타래가 되는 모습을 통해 묵묵히 흐르는 시간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사회적 사건은 평범한 여느 날을 비극적인 날로 뒤바꾸고, 개인을 재난의 희생자로 만든다. 이는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개개인의 삶이 역사의 흐름을 이룬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개개인이 동시대의 사건 혹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사유하는지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차가운 머리로 그 구조를 인식하되, 뜨거운 공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 하나의 지점 혹은 두 지점의 중간이 아니라, 두 지점이 함께 작동해야 비로소 세계의 재난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이와 같은 사회적 사건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의 토대를 담아낸 전시였다.
나는 작업을 준비하면서 역사의 곡절마다 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사건을 어떻게 휘발시켜왔는지 그 반복되는 실책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 반복성이 동시대 재난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것의 현재성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그 터전을 이루는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모든 투쟁은 삶을 터전으로 하며, 모든 삶은 죽음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모든 죽음은 저마다 고유하다. 나는 그 각각의 죽음이 얼마나 고유한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잊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더불어 감히 내 작업이 작금의 사회를 마주한 하나의 미술로서의 기록이 되길 바란다.
작가정보: keemjiyoung.com
■ 최수련 CHOE Sooryeon
최수련은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재현되는 동양풍 이미지의 양상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을 지켜보며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낡고 이상한 것으로 치부되는 ‘동양적’인 것들을 반쯤은 의심하면서도 좋아하고, 그것의 효용을 다시금 상상해본다. 동북아시아가 공유하는 전통적인 클리셰 이미지를 바탕으로 비애, 여성, 현실과의 괴리, 내면의 오리엔탈리즘, 의심, 무지와 부조리 등을 그려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선녀>(2017~)나 <태평녀>(2019~) 연작과 같은 전통 동양풍의 여성 이미지를 주로 그려왔다. <태평녀> 연작에서는 <선녀>처럼 출처가 비교적 명확한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라 주로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성 인물들을 그렸는데, 이는 선녀를 포함한 동양풍의 예쁜 여자 이미지의 소비 방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클리셰를 그리고 싶은 나의 모순적인 욕망을 직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내 작업의 기저를 이루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비애감을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20년 산수문화에서 진행했던 개인전 《무중필사 霧中筆寫》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익숙한 작업 방식에서 탈피하여 손에 익지 않은 방식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던 결과물이 주를 이룬다. 재료도 바꾸고, 여러 이미지 레이어들을 겹치는 방식을 시도해봤다. 가볍게 쓰고, 긋고, 다듬고, 칠하면서 회화의 조형적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전시였다. 기존 유채 작업에서도 사진의 참조 비중이 점점 더 줄면서,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단순한 필치로 그려내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태평녀, 리넨에 유채, 145×112cm, 2020 |
‘한자보다 한글이 더 익숙한 세대’를 위한 필사 작업은 내가 한자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모름의 상태가 너무 불편해서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다. 배워가면서 작업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도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의 주요 관심사는 감각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가볍고 재밌게 그리기’다. 대형 캔버스도 ‘이건 그냥 습자지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리는 것이다. 드물지만 내 그림을 보고 깔깔 웃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 작품이 성공했다고 느낀다. 그런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
최근 몇 년간 작업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금년은 그 변화를 더 연구하고 심화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작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했던 《태평선전》 전시에서 한자가 포함된 광고물 형식의 작품 제작을 시도해보면서, 인쇄체의 글씨를 따라 쓰고 다듬는 과정이 ‘쓰기’가 아니라 ‘그리기’에 가깝고, 그림을 처음 그리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볍고 재밌게 그릴 수 있었기에 기존 작품 안에 이러한 작업 방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또한 1년간 눈여겨본 동인천에 위치한 문 닫힌 무속용품 상점에 대한 리서치도 조금씩 시작해보려고 한다.
■ 편대식 PYOUN Daesik
편대식은 이미지와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으며 현재는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나’라는 매개를 통해서 시간을 물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연필로 작업의 표면을 칠하는 지난한 반복적 행위를 통해 시간을 기록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개항기 근대 건축물이 보전되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개항으로 인한 문화의 뒤섞임을 표출하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연필로 칠한 표면은 마주한 시공간을 비추는데, 시간과 문화가 뒤섞여 공존하는 공간에 작품이 개입되면서 발생하는 순간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연필로 화면을 검게 칠하는 지난한 과정의 작업을 해왔다. 내 작업은 장지를 여러 겹 덧붙여 두꺼운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일정한 비율로 작아지는 기하학적 도형의 선을 눌러 자국을 낸 후, 표면을 연필로 칠하는 과정을 거친다. 나는 작품의 표면을 통해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와 그 작업 과정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 가볍게 소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표면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없애고, 작업의 물성을 더욱 강조하며 시간을 물질화함으로써 작업에 내재된 시간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작업 과정을 간략히 말하자면, 먼저 작품의 지지대인 패널을 만들고, 그 위에 퍼티를 두텁게 바르고 갈아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그 위에 아크릴 도료를 올리고 다시 갈아내어 더 고르고 매끈한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작 지점부터 끝 지점까지 한 방향의 선들을 그려 표면을 칠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 번 칠하고 지나간 자리는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Moments,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 Moments 전시 전경,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17년 (재)한원미술관에서 선보인 개인전 《순간의 연속; A Series of Moments》에서 전시했던 작품 중 일 년 동안 작업했던 <Moments>(2017)를 꼽겠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화면을 연필로 채운 작업으로, 작업의 크기 때문에 제작 과정 중에는 작품 전체를 본 적이 없었고, 전시장에 설치한 후에야 처음으로 전체를 확인했었다. 드라마틱한 이미지나 서사는 없지만, 일 년의 시간을 한 공간에서 바라봤던 전시 작업이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게 있어 작업은 시간을 소비하고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얻어진 결과를 두고 과정을 되짚어가는 과정으로 관객들과 마주하게 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관객이 인식하고 감상했으면 하는데 대개는 이러한 과정은 직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작업을 대하는 관객들은 작업을 보고 "전시 없나요?", “금속판을 가져다 뒀나요?”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면 내부로 들어가는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대화를 통해서 나 또한 변하는 지점들이 발생하고, 관객도 영향을 받고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흥미롭고 이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의 작업은 아직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이 없지만, 진행해오던 작업의 흐름을 이어가며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작업에 녹여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지속하는 것이다. 작업을 지속하고 시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싶다.
* 작가가 제공한 사진과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