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아직, 더, 많이 만나야 하는 북한 작품들《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展
한상정(인천대학교 교수)
작년에 이어 경인일보가 《조선화가 아카이브 II: 조선화의 거장》(2021.07.23.~08.10.) 전시를 주최했다. 40명의 작가에 200여 작품. 숫자도 화려하지만 작가와 작품도 호화롭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정현웅, 림군홍, 이쾌대, 김주경 등 미술사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 있지만, 실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근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에서 동시대 조선화가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엄청난 폭염에 구원자처럼 보이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출입문을 열었다. 대전시실로 다가가는 동안 멀리 전시회 제목이 적혀있는 가벽이 보이기 시작했다(사진 1). 보라색과 흰색, 휴전선 경계를 중심으로 공간을 두 개로 분할하고, 그 위에 상대의 색을 지닌 글씨로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모든 글씨가 잘 드러난다. 상대의 성격을 활용한 각자의 드러냄이 인상적이다.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 이번 전시 개최의 철학일까.
사진 1. 전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처음’ 전해주는 가벽 | 사진 2. 해금된 작가들의 이름들이 한쪽 벽에 적혀있다. |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진한 꽃분홍, 진달래색 가벽에 전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옆에 70명의 월북 화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벽이 보인다.(사진 2) 1988년에 해금되기 전까지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했던 작가들이다. 오랫동안 매장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치 묘비의 표식처럼도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은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작가의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곳 같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역시 진달래색으로 “나는 우리 조국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스며있는 조선의 정신과 기백을 화폭으로 형상한다.”는 조선화의 핵심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리석호의 글이 있다. 1965년에 리석호가 했던 발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북한 특유의 ‘조선화’의 관점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3. 리석호, <수련>, 98×30.5cm, 조선화,1959년 |
본격적인 전시공간에 다가가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섹션은 ‘조선화의 거장 3인 특별전’이다.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의 작품들은 연이어 감탄이 튀어나온다. 강하게 휘몰아치다가 한없이 애틋하고 섬세하고 여리게 붓과 먹, 색으로 꽃과 풀과 나무와 물고기를 재현한다. 리석호의 발언이 작품에서 드러날까 궁금해서 <수련>을 보았다(사진 3). 그 어떤 윤곽선도 없이 붓과 먹의 번짐만으로 수련과 수면의 움직임과 잠자리까지. 조선의 정신과 기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과함 없는 간결함과 단정함은, 실로 아름답다. 한글로 작가 이름을 적는 것도 멋지다. 우리 동양화는 주로 한자였는데. 아주 깔끔한 거대한 벽 하나에 이 작품 하나만, 액자를 제대로 하고 조명을 맞춰서 걸어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이런 욕심을 부리게 만드는 작품이 너무 많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두 번째는 ‘낯선, 낯설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월북한 18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도 보인다. 조선화만이 아니라 스케치, 판화나 유화 등 형식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전쟁. 이 몇 단어로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잡한 이유들로 어떤 이들은 월북을, 다른 이들은 월남을 했을 것이다. 남북의 대립이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었을 때, 월북한 작가들도 그 작품들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해금되었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이미 작고했겠지만, 그 작품들은 7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세월을 견딘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있을까.
사진 4. 길진섭, <어머니의 초상>, 27×38cm, 스케치, 1974년 | 사진 5. 정현웅, <꿈>, 34.5×25cm, 유화, 1967년 |
사진 6. 출품 작가들의 인물화 모음 |
길진섭(1907~1975년)의 <어머니의 초상>(사진 4)은 타계하기 1년 전의 연필스케치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의 모서리도 닳아있고 접혀있던 흔적도 역력하다. 이미 작고하신지 오래된, 흐릿해가는 모친의 사진을 보며 오래오래 그렸던 것일까. 그 아릿한 마음에 울컥하게 된다. 정현웅(1910년~1976년)은 1966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의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7년부터 평회원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그린 것은, 누구의 꿈일까(사진 5). 월북했던 화가들은 그 이후, 어떤 작품들을 어떤 철학으로 해나갔을까.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함께 녹아있을까.(사진 6) 여전히 우리에겐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세 번째 섹션은 ‘From Korea To Korea’로 동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풍경화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는 확실히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예컨대 최창호의 <5월의 백두산>(사진 7)은 분명히 리석호가 말했던 ‘조선의 기백’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북한의’ 미술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작품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김승희의 <봉산탈춤>(사진 8)이야말로 이런 전시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인물들 아래 ‘황해도 봉산탈춤, 해주강령 서흥탈춤 경기도의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 동해서해남해탈춤(중략)’이라고 호명하는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해도 은율탈춤은 없다. 북한에서는 사라졌을지도 또는 인천에 은율탈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서로 많은 것을 알아가야만 한다. 전시 기간 중 모 국회의원이 만수대창작사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인가, 전에 갔을 때보다 관람객이 더 많아 보였다. 이제는 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엔 제재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술가와 그 작품조차 접하고 연구할 수 없었던 시대로 회귀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예술의 영역마저 제한을 가한다면, 어떻게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사진 7. 최창호, <5월의 백두산>, 134×75cm, 조선화, 2008년 |
사진 8. 김승희, <봉산탈춤>, 151×101cm, 조선화, 2007 |
첫해에 공훈예술가 황영준의 개인전을, 올해 조선화와 월북 화가들 작품을 선보였다면, 내년은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조선화가 아카이브’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 다양한 조선화들을, 아니면 조선화의 내용적 형식적 변천을 좀 더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시가 될까. 아니면 조선화의 범주를 벗어나서 또 다른 유형의 북한 작품들을 보게 될까. 여하간,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에서 다른 북한미술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품사진: 정형렬 제공
전시사진: 필자 제공
한상정(韓尙整, Han, Sang-Jung)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문화대학원/인문문화예술기획 연계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