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년이>와 여성국극, 그리고 메타버스
최기현(인천문화재단)
2021년 5월 24일 BTS가 빌보드 뮤직 어워드 4관왕을 달성했다. SNS 영향력을 보여주는 ‘톱 소셜 아티스트’는 2017년부터 5년 연속으로 차지했고 특히 ‘톱 송 세일즈 아티스트’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 위켄드 등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수상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이 미국 주류 음악시장에서 기록한 쾌거였다.
“BTS가 공연할 때마다 중계방송을 했고, 티켓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동시에 트래픽이 몰리면서 1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팬들의 꽃다발로 온통 무대가 묻힐 지경이었지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끔 혈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때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서이레, 나몬, <정년이> (출처: 네이버웹툰) |
가상의 인터뷰이긴 하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배우였던 김진진의 인터뷰1)를 2021년에 맞게 각색했다. ‘BTS’를 ‘여성국극단’으로 ‘티켓 예매 오픈’을 ‘매표소 줄 서는 것’으로,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왕자를 맡았던 배우’로 바꾸면 실제 신문 기사 그대로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지금의 BTS만큼이나 대단했다.
여성국극(女性國劇)은 195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한국식 종합 뮤지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노래,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 ‘2020 문화체육관광부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수상한 웹툰 <정년이>는 목포 출신 시골소녀 윤정년이 매란국극단에 입단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소리 하나는 타고난 주인공 윤정년은 가난한 가정형편이 지긋지긋하다. 국극 배우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매란국극단에 입단한다. 국극단에 입단한다고 모두 공연에 서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도 대사는커녕 무대에 병풍처럼 서는 연구생이 한둘이 아니다. 마치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소속사에서 노력하는 연습생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연구생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차지하려는 정년의 등장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연 정년은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국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정년이>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웹툰) |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국극은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와 닮았다. 2021년 메인 트렌드로 떠오른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단어로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뜻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모습,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에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 MMORPG를 즐기는 것 모두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현실의 자신이 곧 가상 속 인물이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지금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과 의미가 통한다. 『메타버스』(플랜비디자인, 2020)의 저자 김상균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메타버스의 모습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여성국극의 작품은 대부분 역사 속 특정되지 않은,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하거나 또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다. 요즘 웹툰에서 유행하는 일종의 로판2)인 셈이다. 6.25 전쟁 후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로 삶을 치유하며 현실을 극복해갔다. 메타버스에서 디지털을 제하면 현실을 초월한 가상세계는 <정년이>에서 재현하는 시공간과 맞닿아있다.
주인공 윤정년은 자신이 연기하는 방자가 되기 위해, 이름 없는 군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공연 속에 등장하는 방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름 없는 군졸이 어떤 심정으로 대사를 외쳤을지 가슴 절절하게 느끼며 등장인물에 몰입한다. 윤정년의 라이벌 허영서는 단연 매란국극단의 에이스다. 유명한 음악가인 부모님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국극 공연에 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이다. 완벽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단순히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배역을 끊임없이 ‘나답게’ 해석하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혼연일체가 된다. 비단 허영서 만이 아니다. 국극을 공연하는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공연 속 <자명고>의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되고, <바보와 공주>의 평강공주와 온달이 된다. 현실의 자신이 곧 공연 속 가상 인물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세계관이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 TV와 영화 등 대중 매체의 발달, 체계적인 배우 교육의 부재 등의 요인으로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서정적인 작품세계는 산업화 이후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년이>의 배경은 여성국극의 절정기인 1956년이다. 우리나라 첫 TV 방송이 1956년임을 감안한다면 <정년이>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여성국극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극을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열정과 대비되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이 글을 읽고 여성국극에 관심이 생겼다면, 주인공 윤정년의 좌충우돌 국극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참고>
- 1) 「여성국극의 맥」, 경향신문 (1984.11.21.)
- 2) 로맨스판타지의 줄임말. 로맨스와 판타지가 합쳐진 말로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