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결정: 미술 작품과 전시의 생태적 실천

선택과 결정: 미술 작품과 전시의 생태적 실천

남선우(큐레이터)

“신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피 흘릴 때 외에는 이 멋진 색을 보여주지 않으시지. 그래서 우리는 지치도록 인간이 만든 천이나 거장들의 그림에서 다양할 빨간색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네. 하지만 신께서는 바위 밑에 사는 희귀한 곤충에 그 비밀을 숨겨 두셨지.”(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내 이름은 빨강(제2권)』, 민음사, 2009, p.183)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이스탄불 궁정화가들이 ‘빨강’이라는 귀한 색을 얻기 위해 찾은 것은 연지충이라는 벌레였다. 사뭇 낭만적이고 마술적으로 묘사된 이 소설의 장면에서 인간은 빨간색을 얻기 위해 자신의 피를 내는 대신 벌레를 죽여 말려 빻아 삶는다. 또 다른 안료 중 하나인 ‘본 블랙(Bone Black)’은 짐승의 뼈를 진공 상태에서 가열하여 얻는 탄화물질로, 전통적으로 특히 상아를 태운 ‘아이보리 블랙(Ivory Black)’을 귀히 여겼다. 이것은 오래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시판 적색 식용색소는 연지충을 이용한 것이며, 동물의 털로 만드는 붓, 동물성 젤라틴으로 만드는 아교, 살아있는 동물을 직접 사용하는 설치 작품이나 퍼포먼스 등,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또한 부지불식간에 많은 생명들을 착취하고 있다.

개별 작품 뿐 아니라 미술을 보여주는 방식, 즉 ‘전시’라는 형식 또한 비인간 동물을 직접적으로 착취하지는 않더라도 환경에 빚지는 일임은 마찬가지다. 전시의 속성을 수식하는 단어 중 ‘일회성’이라는 말은 어감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일회용’이라는 의미이다. 작품을 제외하고는(때로는 작품마저도) 전시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단기간 열리고 허물어지를 반복한다. 전시가 제공하는 환경이 전시가 의도하는 감각과 내용을 전달하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기관에서 1년에 진행하는 전시의 수는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한다. 매 전시를 열고 닫을 때마다 새로 짓고 부수는 가벽과 가구, 벽면 가득 부착되는 PVC 시트지, 작품을 보호하고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회용품 등, 전시의 스케일만큼 커지는 폐기물과 탄소 발생량을 목격할 수 있다. 인류세, 동물권, 환경 문제 등을 성찰하는 전시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해 왔다. 몇 주 후면 헐릴 나무 가벽에 상영되는 숲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연 친화적 전시환경 구성을 위해 자랄 수 없는 공간으로 옮겨진 식물들, 여러 대의 트럭 채로 실려 나가는 전시 폐기물 등을 볼 때면 전시가 전달하는 내용과는 별개로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기후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1.6.8.~8.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촬영: 남기용)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부산현대미술관, 2021. 5. 4.~2021. 9. 22. (사진: 부산현대미술관)

물론 전시를 만드는 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환경과 탄소발생량은 아니다. 그렇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는 기후 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가 결단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는 미술 전시의 속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회피도, ‘그렇다면 아무 전시도 열지 않고 아무 작품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라는 극단적인 반문도 아닌 보다 발전적인 방향의 모색이 필요하다. 작품과 전시를 만들기까지의 수많은 과정과 각각에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 환경에 덜 해로운 방식을 택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PVC시트지 대신 이면지에 에코폰트 인쇄를 한 《기후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서울시립미술관, 2021), 합판을 대지 않은 모듈형 가벽을 사용한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부산현대미술관, 2021) 등, 내용 뿐 아니라 형식과 진행 과정에 있어서도 친환경적인 방법을 생각한 전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시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2021.5.21.~7.25.) 또한 전시가 담고자 하는 가치와 형식적인 실천이 일치하는 좋은 예다.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 인천아트플랫폼, 2021.5.21.~7.25.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의 제목에 나열된 단어들은 인천의 생태적 문제들에서 따온 것이다. 서해안의 상징이기도 한 갯벌을 사라지게 만든 간척지, 환경파괴에 의한 변종의 문제는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목격하게 한 뉴 락(New Rock), 인간에 의해 삶의 형태가 너무나 달라져버린 개와 새, 그리고 도시가 밀어낸 자연을 힘겹게 갈음하고 있는 정원까지. 인천을 바라보며 떠올렸지만 사실은 국내뿐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이 전시가 취하는 태도는 대안 없는 비판이나 고발이 아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겹으로 얽힌 상황 속에서 ‘문제와 함께 머무르기’를 말하는 도나 해러웨이의 제안처럼 전시의 바탕에는 현 상황에 대한 보다 다성적이고 교차적인 고려, 그리고 다양한 개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장한나, <신 생태계>, 2021, 수집된 플라스틱, 수조 3점, 기포발생기, 조명, 모래 혼합설치, 가변크기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김화용,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20, 책자, 참고자료, 이미지 월 가변설치, 가변크기 (사진: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의 내용만큼이나 인상적인 점은 기획과 전시의 구현방식, 그리고 개별 작업에서 또한 생태적인 배려와 고민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례로, 김화용 작가의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2020)는 앞마당에 닭을 놓아기르던 시대부터 닭을 ‘치느님’이라 부르며 잡아먹는 오늘까지, 각종 시각 재현물에 등장한 가금류의 모습과 우리의 시선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작가가 구성한 책과 시각자료,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자리로 구성된 이 작업은 재생지를 해실이 가장 적은 판형으로 잘라 친환경 잉크로 인쇄하였으며, 전시를 위한 가구는 칠하지 않은 목재를 재사용을 고려한 크기로 재단 및 접합해 만들었다.

이외에도 장한나 작가가 채집한 <뉴 락 표본 2017-2021>(2021)과 남화연 작가가 다종의 식물로 구성한 정원 <새로운 쾌락은 오래된 경계심과 같다>(2021)는 조명 없이 자연광을 이용하고 있으며, 정원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제공된다. 또한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와 찰스 림 이 용, 파브리지오 테라노바, 주마나 마나의 영상 작업은 하나의 스크린을 시간대별로 나누어 사용하는 교차 상영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미적인 이유나 구성상의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발언과 실천의 방향을 같게 하려는 기획자와 작가의 ‘언행일치’의 태도로 보였다.

Ecology of an Exhibition 웹사이트(https://artmuseum.princeton.edu/ecologyofanexhibition/) GCC(Gallery Climate Coalition) 웹사이트(https://galleryclimatecoalition.org/)

이런 실천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들도 등장하고 있다. 2019년 프린스턴대학 미술관은 미국의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한 작업들을 소개하는 《Nature’s Nation: American Art and Environment》 전시를 진행하면서, 실제 이 전시가 환경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 전시를 만들면서 생긴 탄소발자국을 자성적으로 추적한 결과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Ecology of an Exhibition’을 만들었다. 작품과 유물을 수집하고, 전시를 디자인하고, 도록을 인쇄하고, 작품을 보존하여 길이길이 수장하는 일들을 오로지 탄소발생량의 관점에서만 살펴본 것이다. 사이트의 메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전시를 만드는 여러 단계에서 관습적으로 행하던 선택들에 대해 재고하게 되며, 우리의 다음번 선택에 참고할만한 사례들도 접할 수 있다.

또한 영국에서 출범한 GCC(Gallery Climate Coalition)는 2030년까지 미술산업에서 일어나는 탄소발생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NGO이다. 여기서 제공하는 ‘탄소발생계산기’는 작품의 운송, 포장, 인쇄 등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탄소발생량이 얼마큼 달라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이 사이트에서는 환경부담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서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의 탄소발생량이 절반이하로 줄어드는 등, 노력의 실제적인 효과도 확인할 수 있다.

중언하다시피, 미술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고려할 점이 환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향유하는 대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고려한다면 창작의 과정에서 매 순간 조금 더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또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남선우(南瑄祐, Nam Sunwoo)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월간미술, 큐레토리얼 랩 서울, 일민미술관 등에서 일했다. 《막후극》, 《무무》, 《연극의 얼굴》 등의 전시를 공동 기획했고, 『게이트웨이 미술사』를 공동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