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 항》 전시로 본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

《잠식 항》 전시로 본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2020년 정서진 아트큐브 기획전시Ⅱ 《잠식 항(航) Submerged Vessel》은 생태적 지표로서의 예술을 보여준다. 인천 아라뱃길 초입,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전시장인 정서진 아트큐브에 정박해있는 배는 떠나온 바다를 마주한다. 배를 뒤덮은 것은 틸란드시아라는 관상용 관엽식물이며, 배는 몸통 대부분을 식물로 가린 채 변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 같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무엇인가를 잠식한다. ‘잠식 항’이라는 전시의 제목에 남아있는 개념인 ‘항구’는 이제 이 수수께끼의 사물이 다른 차원의 출항을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생태계 일면을 반영함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예술의 면모를 보여준다. 감춰진 대상에 대한 해석학적 상상력은 전시공간을 각기 다른 항로로 떠나는 항구로 만든다. 2015년경 작가 김유정은 뿌리 없이 생존하는 이 식물에 영감을 받은 이후, 여러 사물을 그것으로 덮어왔다. 침실이나 부엌, 거실 등 친근한 일상 공간을 뒤덮은 식물들은 묵시록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괴함이 완전히 다른 무엇이 아니라 친근한 것에서 약간 비틀린, 즉 동일성 속의 차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2020년 정서진 아트큐브 기획전시Ⅱ 《잠식 항(航) Submerged Vessel》(김유정, 2020.07.29.~08.23.)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인천 서구 전시장에서의 배는 장소성을 살리기 위한 소재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소재주의적 발상으로 이것저것 뒤덮는 것은 아니다. 이 전시에서의 배는 상징적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어업활동을 위해 인간이 만든 배는 자연을 이용하는 대표적 도구 중의 하나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유럽의 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오염 때문에 녹아내릴 남극을 선점하기 위한 과학 탐사선, 고장이 나서 인근 해역을 오염시키는 유조선 등 그 모두가 다 배다. 부정적인 예들이지만, 우리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수출로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선 한국의 컨테이너선, 약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왜구를 물리친 거북선은 또 어떠한가? 타자와의 협력적 또는 착취적 관계 속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견인하기 시작한 역사 이래로 배의 상징성은 컸다. 바다의 지배자가 곧 세계에 대한 지배자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으니, 근대에 확립된 이 헤게모니는 아직도 생생하게 작동한다.

김유정, <잠식 항>, 가변설치(틸란드시아 식물, 배, 물류상자, 항구의 여러 가지 오브제), 2020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물론 작가는 인간과 인간의 경쟁보다는 인간과 식물과 문명의 대조항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의 지배관계를 다룬다. 논밭이나 목장이 되기 위해 불태워지고, 잘리는 식물, 인간의 이익을 위해 개조되는 식물 등은 인간의 일방적 처분에 맡겨진 대상이다. 그런데 김유정의 작품 속 식물은 인간이 이룬 위업이 무엇이든 균질하게 덮어버린다. 작품 속 식물의 역할은 인간 문명에 내재한 위험한 계층성을 무화시키는 일이다. 단지 그것이 하나의 종이라는 점이 불길한 느낌을 남길 따름이다. 건강한 생태계는 자연이든 문화든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미덕으로 하는 예술은 문화생태계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된 순간 지구에 비극이 성큼 다가왔다. 미술 또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했고, 표현의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자연을 타자화한 채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적 의미의 근대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이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을 낳았고, 이는 인간이라는 재현적 관념을 벗어나려는 현대미술과 방향성을 같이한다.

인간의 부재를 극적 장치로 표현한 김유정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이 대립각을 세워나가는 시기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죽은 듯 살아있는 이 식물은 죽음을 환기시키는(memento mori) 알레고리인가? 하지만 종말적 이미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제이기에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식물은 동물 이전에 지구에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인류의 발생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고, 인류가 종말을 맞은 후에도 남아있을 존재 또한 식물일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인간의 오랜 부재를 암시하는 덥수룩한 덤불은 새로운 출발 또한 식물로부터 가능함을 보여준다. 공중에 떠 있는 습기만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식물 틸란드시아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적 측면에서 겸손과 금욕의 상징이다. 탄소중립이라는 절박한 환경 이슈가 암시하듯, 식물은 광란의 소비를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말적 한계 상황에 대한 계시처럼 다가온다. 죽은 듯이 있었던 것이 봄이 되어 활성화되는 식물의 생태 자체가 부활의 상징이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인간의 일회적이며 선형적인 생과 늘 새로이 되시작하는 나무의 생을 대조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예를 들었지만, 크게 보아 식물은 시간의 시험 앞에 승리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수 천 년 수령의 식물도 지구에 남아있으며, 수백 년 전의 씨앗이 조건을 만나면 싹을 틔우기도 한다. 작가에게 이 소재가 다가온 것은 이전에 주로 했던 프레스코 작품의 스크래치 작업을 하다가 날리는 분진을 저감하기 위한 공기정화 식물로 선택된 것이기에 치유와 복원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산/소비 주기는 광적으로 빨라졌고 회복이나 부활 또한 기약 없는 머나먼 약속처럼 들린다. 김유정이 말하듯이 ‘독식의 점령 무대’ 이후에 도래할 질서는 식물을 포함한 자연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해야 함을 경고한다. 식물 아래의 것을 들춰보면 문명은 그 민낯을 더 확실하게 드러낸다. 작가가 활용한 폐선과 녹슨 어업 도구들은 해양 생태계를 착취하고 오염시켰을 배 또한 생산 활동을 멈췄음을 알려준다.

김유정, <재생_숨>, 수집한 자개장 서랍과 라이트박스, 인조식물 2020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또한 배는 모든 기계가 그렇듯이 형태상으로 볼 때 필요한 기능만 있는 기능주의의 대명사로 그 자체가 심미적 대상이 되곤 한다. 근대의 기능주의는 이전 시대의 복잡다단한 상징적 문양들을 쓰레기로 간주하고, 한 시대의 미학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근대의 군더더기 없는 기능적 대상 또한 마찬가지로 쓰레기가 되어 쌓인다. 더구나 이전 시대의 생산/소비 주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짧아졌다. 김유정이 활용한 낡은 배는 뗏목이나 돛단배 같은 더 낡은 배의 대안으로 발명된 것이겠지만, 이전보다 더 짧은 수명을 마쳤다. 자개장과 식물 이미지를 결합시킨 또 다른 작품군은 장롱 같은 일상적 사물 또한 배와 마찬가지로 길지 않은 사용 기간을 뒤로한다. 작품 <재생_숨>에서 어느 골목에 버려졌을 낡은 가구에 작가는 사람 사는 집처럼 불을 켜주었고, 자개장과 어울릴법한 문풍지 바른 문 같은 이미지로 변신시켰다. 그 안에서는 사물과 대조항으로 설정된 자연의 이미지가 자리한다.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세트로 등장시킨다. 양자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되어 이해된다. 버려진 배와 가구는 예술작품으로 재생된 것이다. 그것은 전시 장소가 바다와 인접해있기도 하지만, 쓰레기 매립지가 있는 ‘환경 특별시’이기도 하기에 의미가 있다.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은 그것이 놓인 보다 큰 도시 또한 염두에 둔다. 생태와 환경의 문제는 인천 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이슈다. 기후변화는 현재 전 지구를 강타하고 있는 바이러스 문제보다 더 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정서진 아트큐브에서의 김유정의 작품이 생태와 환경문제를 정곡으로 찌르고 있지만, 작가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잡초 같은 것에 쌓인 오래된 사물은 오히려 침묵한다. 괴기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그 모두가 뭔가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꼭 집어서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감성이다.

무엇인가 이슈화시키는 것 자체도 상당한 공해를 만드는 역설적 상황에서 작가는 예술을 빌미로 쓰레기를 발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작가의 습관이 되다시피 한 수집은 재활용으로 이어진다. 유기물은 쉽게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깨끗하고 편리한 문명을 위한 많은 상품들이 폐기 이후에도 자연화 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자연의 정화작용을 온전히 거치지 않은 잔여물은 독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온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폐선과 자개장을 뒤덮은 식물은 시간의 가속을 보여준다. 버려진 것들이 빨리 자연화되는 것이 미덕이라면 시간은 긍정적인 요소일 것이다. 시간은 스크래치로 표면 효과를 준 프레스코화처럼 온전한 표면을 잠식한 상처들을 아물게 한다. 그렇지만 쓰레기가 자연화되는 세월보다도 더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의 시간 또한 가속화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환경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던 산업혁명 시기 낭만주의자들이 폐허에서 느꼈던 숭고함을 일깨운다. 근대의 낭만적 숭고는 긴급한 환경적 실천의 요구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선영(李仙英, Lee, Sun Young)

미술평론가. 대학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했지만 조선일보 신춘문예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년) 이래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미술 비평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공공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인천문화재단에서 추진했던 <지역공동체문화 만들기> 사업에서 수년간(2012~2015년)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