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사진: 박현주) |
“봄꽃이 피고, 단풍이 질 때마다 공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면 좋겠어요. 산책 나온 이들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과 안부를 주고받고요.”
수십 년 전만 해도 이웃들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 끈끈한 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옆집에 사는 이가 누군지도 모른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관계 속에서도, 이웃 간 뭉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27년째 인천 서구 석남동에 살고 있는 윤미(60) 씨는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주민이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는 윤미 씨는 오는 6월부터 2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서구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제3차 법정 문화도시 예비 문화도시로 지정되면서 지역 고유의 문화를 알리고자 주민이 주축이 된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를 구성했다. 윤미 씨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다른 위원들도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진행하게 됐다.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일상이 멈췄잖아요. 이웃 간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한번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바라는 문화도시는 거창한 게 아녜요. ‘내’가 집에 머무는 것보다 동네 밖으로 나왔을 때 더 즐겁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문화도시 아닐까요.”
주민들의 적극적인 활동 소식을 접한 지역 소재 기업인 SK석유화학에서도 지원하는 데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인천서구문화재단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른 행정적 절차를 모색하는 등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민·관·산이 함께 지역 사회를 위해 힘을 모은 사례로 인정받아 지난 4월엔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사업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는 다음 달 석남녹지도시숲에서 진행하는 ‘어울림 마당’과 오는 9월 석남동 전통 시장인 강남시장에서 여는 ‘시장 데이’ 등 총 2개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어울림 마당’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체험·공연·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함께하자는 게 행사의 주된 취지다.
“문화란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전반을 의미합니다. 재활용품으로 화분을 만들거나, 헌 칫솔을 가지고 오면 대나무로 만든 친환경 머그컵을 증정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우리가 가진 자원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자는 의미죠.”
주민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재주와 능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작은 기타처럼 생긴 악기 ‘우쿨렐레’를 잘 다루는 주민은 이날 소공연을 열기로 했다.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인 캘리그래피에 소질 있는 또 다른 주민은 현장에서 이를 시현하기로 했다. ‘시장 데이’엔 주민들이 전통 시장을 방문하고 시장을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추석이 있는 달이니 시장에서 한가위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통 시장은 역사가 깊으니 지역 특색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전통 시장이 낯설 수 있는 어린이와 청년들도 재밌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세대마다 관심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파악하고 있어요.”
윤미 씨는 오랜 기간 지역 사회 일원으로서 주변 사람들을 돕는 등 나눔 활동을 해왔다. 주변에선 “그렇게 일하면 돈이 나오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윤미 씨는 “아니. 그냥 우리 동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해서”라고 대답한다. 주로 가까운 이웃들과 소모임을 꾸려왔던 그는 2015년 ‘내 지역 일을 조금 더 넓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에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동네 곳곳에 관심을 가지니 이곳저곳 윤미 씨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2018년엔 다문화 가구 아이들이 좀 더 우리 사회에 ‘마음 붙이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너나들이’라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서로 ‘너’, ‘나’ 하고 부르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으면 해서 붙인 이름이다.
“주민자치위원으로 있을 때 동 행정자치센터 바둑교실을 다니던 다문화 아이가 눈에 띄더라고요. 애가 수업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와선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하루는 아이를 붙잡고 물어보니 부모님이 일을 해서 학교 마치고 갈 데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너나들이’에선 다문화 가구 아이와 그의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다문화 가구 부모들은 대부분 맞벌이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간이라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유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는 게 윤미 씨의 설명이다.
‘너나들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활동은 우리나라 명절에 하는 ‘전통음식 만들기’다. 다 함께 모여 산적을 만들고, 동그랑땡을 빚고, 육전을 부쳤다. 아이들 입맛에 ‘딱’ 맞을 법한 음식들이니 다들 연신 ‘맛있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온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날, ‘너나들이’는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이전처럼 한 달에 2번씩 모임을 갖진 못해도, 항상 연락하며 서로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지난 설엔 떡국 재료를 준비해서 갖다 줬는데 아이들이 못 본 사이 한 뼘씩 더 컸더라고요. 집에서 가족들끼리 재밌게 보내라고 윷놀이 판도 전해줬어요. 우리 문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해서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윤미 씨가 수년간 ‘너나들이’를 통한 문화 전도사 역할을 지속하면서 그동안 먼저 다가가길 머뭇거렸던 이들 역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얼마 전엔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에서 하는 ‘어울림 마당’ 행사에 오라고 여러 다문화 가족에게 전화했더니 ‘언니가 오라면 당연히 가야죠. 친구들도 데려갈게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앞으로도 이들에게 든든한 동네 언니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고요. 나는 이미 이웃들에게 받은 게 많아요. 이제 그때 받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부산댁이었던 윤미 씨가 남편을 따라 인천에 왔을 때, 낯선 곳의 이웃들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든든한 존재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으면 다들 한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눴다. 온 동네 주민이 모여 국수를 삶아 먹었다. 누군가 급한 일이 있을 땐 너 나 할 것 없이 돕겠다고 나섰다. 다들 이웃들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도록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 놨다.
“지금도 과거 이웃 간 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우리 지역만이 갖고 있는 색깔을 찾아 주민들을 이어줄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가 모여서 사회를 지탱하는 ‘몸’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웃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건 문화가 아닐까요.”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경인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