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각지대에서 찾은 공기들: 2021 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 Ⅰ 《공기의 모양》

일상의 사각지대에서 찾은 공기들2021 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 Ⅰ 《공기의 모양》

곽세원(월간미술 기자)

대규모 물류단지와 공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정서진로를 지나 경인아라뱃길과 서해가 합쳐지는 지점까지 오면 아라인천여객터미널을 비롯해 선상체험공원, 아라타워, 산책로 등으로 조성된 명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오렌지색의 컨테이너 박스 모양의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은 바로 2019년 5월에 오픈해 개관한지 3년도 채 안 된 ‘정서진아트큐브’다. 총 두 개의 층으로 이뤄진 이곳의 규모는 90㎡. 그마저도 전시공간은 1층에 불과하다. 그러나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정서진의 드넓은 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내부가 답답하단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2021 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 Ⅰ《공기의 모양》 전경(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정서진아트큐브에서 진행 중인 《공기의 모양》(2021.4.7.~5.23.)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공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기획된 전시로, 김윤수, 신현정, 전희경이 참여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작품은 신현정의 <날씨 회화>(2013~2019)지만 시선을 좀 더 왼편으로 돌려 김윤수의 공간으로 향했다.

김윤수, <바람은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준다>종이에 흑연가루, 가변설치, 각 36.4×25cm, 2015 (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김윤수는 비닐이나 골판지와 같이 유연한 재료를 사용해 감거나 쌓는 등의 행위를 무수히 반복하여 물질과 시간이 공간에 개입하고 점유해가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그의 조각은 지문 또는 발자국처럼 구체적인 형태에서 시작되지만 긴 시간을 거쳐 추상적인 형상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바라봐야 물성으로 드러나는, 심연의 풍경과도 같은데, 이는 김윤수의 조각이 미니멀한 외양을 지녔음에도 서정적이고 시적(詩的)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바람은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준다>(2015) 제하의 드로잉 설치작업과 36점의 드로잉을 책으로 엮은 <바람의 표면>(2015)을 선보였다. 자신을 “조각가”로 소개하는 그에게 드로잉은 3차원의 조각 중에서도 ‘가장 얇고 투명한 조각’이다. 질감과 무게 등을 고심해서 선택한 종이에 남겨진 흑연가루의 흔적에서 언젠가 그를 찾아왔을 바람이 떠올랐다. 불현듯 내가 만난 오늘의 바람도 누군가의 과거가 묻어 있는 바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듯 그에게 바람은 한없이 이어지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의미지어진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자 김윤수의 시간과 나의 시간, 그의 바람기억과 나의 바람기억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람은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준다>로 걸음을 옮기니 벽면을 부유하고 있는 듯한 종이들이 그에 따른 반응을 보내왔다. 지금 이곳을 점유하고 있는 공기의 존재를 재차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전희경, <바람에 대한 연구>,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x145cm, 2021(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김윤수의 작업이 절제된 밀도와 색감으로 공기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면, 전희경의 회화는 밀도 높은 색감과 자유분방한 필치로 비가시적인 공기를 가시적인 대상으로 현현하게 한다. 전희경은 현실과 꿈, 이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감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내면적인 풍경을 추상적으로 풀어내 왔다. 이전 작업들에서 조금은 막연하다고까지 느꼈던 작가의 이상을 향한 열망이 일명 ‘연구’ 시리즈 작업에서는 매일을 함께하는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였다. 신작 1점을 포함해 이번 전시에 선보인 <바람에 대한 연구> 시리즈는 총 5점, 유독 과감한 필치의 붓질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이 소개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침없이 내지른 듯한 붓질은 현실을 초월한 또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아주 일상적인 빛, 공기, 바람, 대지와 같은 자연적 요소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화면에 담는다.
색의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그러데이션, 날카로운 도구로 물감을 긁어낸 흔적, 화면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가장자리의 검은색 면은 능동적 행위의 결과이자 작가 내면의 복잡다단한 심리들이 표출된 결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의 ‘내면적인 풍경’은 유기적인 자연에서 기인한다. 이는 곧, 내면적인 풍경이 ‘그’에게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닿을 수 있는 ‘나’들의 이상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세상, 나와 너를 이어주는 일종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것, 전희경에게 바람과 공기는 그러한 존재다.

신현정, <날씨 회화-오늘의 신간>, 캔버스에 스프레이, 앵글, 가변설치, 각 135×155×60cm×2ea, 2013~2019(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마지막으로 신현정의 <날씨 회화>(2013~2019)로 가보자. 앵글 구조물 위에 비스듬히 서서 통창으로 들어오는 채광을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날씨 회화>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환경의 계절적 변화가 자신에게 일으키는 감각적인 반응과 그로 인해 포착되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왔다. 전시에 소개된 <날씨 회화>는 말 그대로 날씨에 대한 회화적 기록이다. 무더운 여름날 시작되었다는 이 연작은 작가가 날씨를 감각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떠올린 색을 스프레이로 분사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캔버스의 측면 부분을 분사하기 때문에 화면에 남겨진 스프레이의 입자는 자연스럽게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 안쪽을 향하게 된다. 그의 회화는 외부세계와 연동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기’라는 비가시적인 환경적 조건을 수용하는 ‘장(場)’인 것이다. 또한 작가는 붓과 물감 대신 공장에서 생산된 스프레이를 사용하고, 작품을 벽에 거는 대신 책장용 철제 구조물 위에 세워두며, 사각형 대신 원, 삼각형, 육각형 모양의 프레임을 캔버스로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회화의 전통적인 문법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다소 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부정’이나 ‘파괴’라기보다 ‘확장’의 의도를 갖는다. 이는 그가 실제 작품만큼이나 ‘(빈)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회화/캔버스를 사물처럼 다룬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작업에서 주재료로 사용되는 ‘스프레이’는 분사되는 순간 작가 자신도 개입하기 어려운 우연성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는 고압상태로 있던 용기 안의 내용물이 공기와 만나 캔버스 표면에 안착하기까지의 수동적인 기다림을 즐거운 기대감으로 소화한 것 같다. 최근 접한 작업에도 천을 탈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연적 효과가 나타난 걸 보면 말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보는 만큼 안다.’가 되는데, 《공기의 모양》전시에서 본 세 작가의 작품들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사각지대를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하여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나아가 주변 환경과 관객에 유기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전시장을 나서는데 희미한 흑연가루로, 에너지 넘치는 필치로, 분사된 스프레이 입자로 현현된 공기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공기를 갖고 다닐 수 있게 하고 싶었다.”는 기획자의 말이 떠올랐다.

곽세원(郭世媛, Gwak Seweon)

이화여대에서 회화판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술전문지 『월간미술』 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