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의 탄생과 신문 속 이발소 이야기” – 인천시립박물관 김성이 학예연구사

이발소의 탄생과 신문 속 이발소 이야기

어느 동네나 미용실은 많이 있다. 이렇게 미용실이 한 골목에 여럿 생겨난 건 이제는 남자들도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자들은 으레 이발소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발소를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이발소 삼색등은 번화가가 아닌 오래된 골목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달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더딘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발소에는 나이 지긋한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고 있다. 낡은 이발도구와 삐그덕 소리를 내는 의자는 이발소의 시간을 말해준다.

일상 속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일상이 아닌 역사의 뒤안길을 걷고 있는 ‘이발소’는 100여 년 전 단발령과 함께 등장한 공간이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왕이 솔선하여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수 천 년 동안 지켜온 장발의 풍습은 위생과 편익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상투를 깎아버리게 했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은 민심을 들끓게 했다. 유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즉, ’사람의 신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체두관(剃頭官)이라는 임시벼슬까지 만들어 백성들의 상투를 마구 잘랐다고 하니 그들의 자존심과 위엄은 짓밟혔고 선비와 유생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들까지 크게 반발했다.

….경무사(警務使) 허진(許璡)은 순검들과 함께 가위를 들고 길을 막고 있다가 사람만 만나면 달려들어 머리를 깎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인가를 침범하여 남자만 보면 마구 머리를 깎아 버리므로 깊이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머리를 깎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은 문밖을 나섰다가 상투를 잘리면 모두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 나갔다. 머리를 깎인 사람들은 모두 깨끗이 깎이지 않았는데, 단 상투를 잘린 사람은 긴 머리가 드리워져 그 모습이 장발승(長髮僧)과 같았다. 오직 부녀자들과 아이들만 머리를 깎이지 않았다. 이때 학부대신 이도재는 연호개정과 단발령(斷髮令)에 관한 상소를 한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매천야록』 제2권 고종 32년

단발령이 내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단발령은 흐지부지되며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순종황제가 즉위하며 또 다시 단발령이 내려졌다. 첫 번째 단발령처럼 강제하지 않았으며 종묘에 나아가 단발고유제(斷髮告由祭)를 드리며 조심스럽게 단발령이 내려졌다. 처음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와는 달리 단발이 위생과 편익이 있음을 백성들 스스로 몸소 느끼고 있었다. 자발적인 이발의 시대로 변하고 있었다. 또 이 시기부터 고종과 순종의 초상사진에 관를 벗고 이발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순종 즉위 직후 황제의 이발을 위해 내각회의에서 궁중에 이발소 설치를 건의하였고 이발소가 설치되었다. ‘홍경희’라는 사람은 21년 동안 융희황제의 이발사로 일을 했었다는 신문기록이이 확인되기도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7.8.18. 대한매일신보 1907.8.22. 매일신보 1926.5.9.

경성과 인천의 거리 곳곳에 이발소가 하나둘 생겨났다. 비싼 이발요금 탓에 관리나 신지식인들만이 드나드는 문턱이 높았던 곳이지만 이발은 서서히 일상이 되어갔다. 머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조선 사람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개화가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당시 머리를 깎은 사람만 보면 개화당 이라고 손가락질하였고 이발소는 개화당을 만드는 곳 ‘개화당제조소’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발소를 신문이나 TV에서 광고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초기 이발소는 손님을 끌기 위해 이발소 광고를 신문에 자주 실었다.

매일신보 1930.5.2. 황성신문 1905.10.24. 대한매일신보 1908.10.28.

이발소 신문광고에는 ‘첨군자’라 하여 ‘여러 점잖은 사람’이라는 손님을 높이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도 당시 이발소를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신지식인들이나 관료와 같은 지체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발소에 오는 손님을 높이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보인다. 신문에는 이발소 광고만큼 이발기계 판매 광고가 자주 등장했다. ‘가정용 최고급 이발기계’라는 광고카피 문구는 이발을 하는 남자라면 눈길이 가는 광고가 아니었을까 . 이발과 관련한 신문광고는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독기계신설‘,’이발졸업생 고빙‘이라는 글귀는 당시 이발소에서 소독이 중요한 일이었음을 시사하며 이발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

이발소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1911년 「이발영업취체규칙(理髮營業取締規則)」이라는 이발영업을 위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발영업을 전발(剪髮)과 결발(結髮)로 규정하였다. 초기 이발소는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상투를 틀어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발소는 ’이발(理髮)‘이라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용모를 단정히 하는 곳으로서 머리를 자르는 것 뿐 만 아니라 정돈된 상투를 틀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이발영업취체규칙」에는 특히 위생과 청결에 관한 내용으로 소독방법, 백의(白衣) 착용, 수건과 비누의 사용, 짧은 손톱 등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1923년 「이발영업취체규칙」에는 이발사 시험제도가 등장한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게 된다. 어깨너머로 배우던 이발 기술이 이때부터 시험을 통해 이발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시험과목은 해부, 생리, 위생 및 전염병 대의 소독방법 이발영업에 관한 법령이었다. 신체의 일부인 얼굴과 머리카락을 다루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마치 의학교재와 같은 인상을 준다. 당시 이발수험교재를 집필한 사람은 경기도경찰국 소속 위생과장 주방정계(周防正季)라는 의학박사라고 하니 어느 정도 의학교재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발사 시험을 위한 『이발위생독본』이라는 교재는 ’이발관마다 필비할 양서, 이발수험자의 지침‘이라는 광고문구로 판매되었다.

『이발위생독본』 광고, 1937년
(ⓒ 인천시립박물관)
『이발위생독본』
(ⓒ 서울남산도서관)
매일신보 1930.5.2.

전국을 시끌벅적하게 했던 단발령으로 인해 이발소가 생겼으며 이발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다. 초기 이발소에서는 상투를 튼 이발사가 이발을 해주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고 이발소라는 곳에 와서 상투를 깎고 엉엉 울고 가는 이들, 상투를 깎다 아버지가 좇아와서 반만 자르고 붙들려 가는 모습들이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할 초창기 이발소의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단발령의 충격은 잊어버리고 차츰 단발에 익숙해지며 스스로 이발소를 찾는 이발의 시대를 열었다.

김성이(金成怡, Kim Seong-yi),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