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신민 궁본진정(宮本眞政)과 조선사람 이상렬(李相烈)

일본제국신민 궁본진정(宮本眞政)과 조선사람 이상렬(李相烈)

김락기(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1941년 5월 19일 오후 4시 무렵, 현재의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부근에 있었던 인천부립도서관 앞 풀밭에서 한 학생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이날은 월요일이었으니,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은 셈이다. 이 학생의 이름은 궁본진정(宮本眞政)으로 1923년 10월 25일에 태어나 본적지인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에서 온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에 경성의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에 입학했다. 선린상업에 입학하고 경성부에서 하숙을 했는데, 1941년 4월에 인천부 화수정(花水町) 229번지에 있는 형 궁본무정(宮本武政)의 집으로 옮겨 통학했다고 한다.

일제 재판기록에는 “문학에 취미를 가져 늘 소설과 시집 등을 탐독하고 학업은 등한시하며 특히 ‘학교의 조회에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맹세를 외우는 것은 공염불이며 [일본 ’천황(天皇)‘과 ’황후(皇后)‘의] 사진봉안소에 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멋대로 판단하여 여러 번 학교를 결석하였는데”라고 하여 조선인으로서 상당한 정도의 정체성을 가졌고, 일본 식민통치의 허상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에 기록된 이름은 궁본진정이었으나 이상렬(李相烈)이라고 해야 비로소 이 학생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이유다.

평소처럼 그저 도서관 풀밭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났을 상황이 이날은 한 사람의 출현과 대화로 급변한다. 어떤 청년이 책을 읽고 있는 이상렬 곁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왜 월요일인데 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라고 물었고 “학교에 가면 매일 등교와 하교 때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사진봉안소에 절을 하여야 하는데 이는 우상숭배이므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림 1] 일제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 전경(화도진도서관 향토ㆍ개항문화자료관 갈무리)

다가온 청년을 믿고, 있는 그대로 말한 대가는 컸다. 1941년 9월 18일에 불경죄(不敬罪)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 혼란스런 점이 있다. 이상렬에게 다가가 잡담을 나누고, 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를 물었으며, 불경죄 사건의 증인이 되어 이상렬의 말을 재판장에게 전한 이가 다름 아닌 인천부 용운정(龍雲町)에 사는 26세 청년 오쾌근(吳快根)이었기 때문이다.

오쾌근이 누구인가? 1941년 3월 초부터 경정(京町) 196번지에 있는 찻집 ‘파로네’의 조선인 여종업원이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쓰는 것에 분개해 불쾌하다며 화를 냈다가 8월 27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다음 날인 8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942년 2월 28일 출소한 사람이다. 《인천역사통신》올 봄 호에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오쾌근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경찰 조사가 진행된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이상렬을 만나 바로 신고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별 생각없이 넘긴 일이었는데, 나중에 자기 행동으로 조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죄를 감면받고자 이상렬을 고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상렬의 재판에서 오쾌근이 증언한 것은 분명하므로, 이상렬의 처벌에는 오쾌근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상렬은 그냥 ‘몸이 썩 좋지 않아 경성까지 통학하기 어려워 학교에 이야기하고 쉬는 도중에 바람 쐴 겸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려 읽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을까? 오쾌근은 재판정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슨 불경스런 언사는 없었고, 그저 학교가 멀어 다니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다’는 정도로 둘러댈 수는 없었을까? 조선사람 사이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한 일제의 술수가 끼어들어 순진한 청년들을 얽어맨 것인지도 모른다.

18세로 소설과 시를 즐겨 읽던 문학청년 이상렬은 이렇게 궁본진정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을 받았다. 항소 등 다른 기록이 없어 실제 징역 1년을 살았는지, 감형이 되었는지 조차 불투명하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일제 식민통치는 조선사람의 이름은 바꿀 수 있었지만 조선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조선사람 스스로 이름은 내어주고, 마음은 지키는 방법으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것인지 모른다. 궁본진정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황국신민의 맹세 낭송과 일본 ‘천황’과 ‘황후’의 사진에 절하기를 거부한 이상렬이 그 증거다.

[그림 2] 이상렬(궁본진정) 재판기록(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