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체의 소중한 본질을 위한 정동적 조각

수평적 세계를 껴안는 방법 ver 5. 정현
비주체의 소중한 본질을 위한 정동적 조각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2019년을 마무리하고 2020년의 시작을 여는 기획전시로 《수평적 세계를 껴안는 방법》이 12월 20일부터 2020년 5월 6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 중 인천 연고를 가진 중견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로 참여 작가 각자의 작품 세계관을 살펴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매월 2명씩 참여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글을 만나본다.

 

정현, <서 있는 사람>, Railroad ties, 300x75x25cm(7ea), 2015

비주체의 소중한 본질을 위한 정동적 조각

수출입을 위한 항구, 철길, 공항을 가진 인천에서 살다보면, 운전을 하다 혹은 길을 걷다 거대한 컨테이너나 산업재료를 가득 실은 트럭을 자주 만난다. 트럭이 지나갈 때 아주 미세하지만 땅바닥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고 트럭-기계에서 나오는 소리, 먼지와 경유 냄새 그리고 싣고 있는 재료들(원목, 고철 쓰레기, 수출용 차 등)의 형상, 냄새, 삐그덕 거리는 소리 등 비주체들이 뭉뚱그려 훅 들어온다. 대부분 안전을 위협받은 짧은 놀람이나 두려움으로 지나치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몸의 이곳저곳의 감각과 연결된 정서까지 섬세하게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에 깜짝 놀란다.

작가 정현의 폐침목 작업은 어린 시절 철길에서 일상적으로 느꼈던 이러한 기억에서 총체적인 감각과 정서를 담고 있다.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거친 폐침목의 흔적에서 ‘겪음의 깊이’와 정서를 발견한 작가는 낮고 보이지 않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가치를 드러내고 높이는 작업을 한다. 관람객은 첫 번째로 마주하는 메마르고 거친 시각적 형상이 주는 낯설고 어둡고 쓸쓸한 감정뿐 아니라, 경제적 쓸모를 다한 존재가 담고 있는 지난 시간 속 삶의 과정을 상상하고 사유한다. 겪음의 깊이를 가진 비주체들과 만나는 순간의 시공간은 예술을 문화적 향유와 취미로 만나는 일상적인 차원이 아닌, 여러 주체와 비주체의 시간과 공간이 복잡하게 횡단하는 차원을 요구한다.

정현, 인천아트플랫폼 전시 전경, Installation view at Incheon Art Platform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폐침목에선 본질을, 오래되어 어둡고 침침했던 청관에선 깊이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 접했던 은율 탈춤에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의식의 형성을 시작했고 밴댕이, 망둥이 같은 생선에선 제철 신선함이 주는 소중한 의미를 깨달았다. 이러한 4가지는 작가가 자란 지역의 장소성과 관계하지만, 작가는 ‘고향’으로써 지역적 소재와 역사성을 재현하거나, ‘마계’로써 지역의 부재와 결핍을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 속 주체로서의 인간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고 예술가로서 삶을 스스로 조직하는데 좀 더 집중했다.

폐침목, 청관, 은율탈춤, 생선이 가진 타자성을 생각해보니, 인간과 비인간, 장소와 비장소, 주체와 비주체, 자연과 문화, 사물과 생물 등 인간 중심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인간의 본질과 깊이에 집중해온 것은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인간의 본질이라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 태도에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간의 이해와 해석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위한 실천을 위한 것이다. 사물, 공간, 문화, 생물 등 인간과 자본에 의해 가려진 비주체들이 가진 소중한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과 과정을 함께 하는 장소성을 위한 시공간을 담은 작업인 것이다.

정현, <무제>, 462x84x94cm, Ascon, 2004
정현, <무제>, 650x150cm, Coal tar, oil bar on paper, 2017
정현, <무제>, 53×38.3cm(3점), Coal tar on paper, 2004

문화예술교육이나 생활문화에서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밝고 착한 감상과 체험의 매개로서의 예술의 역할과 의미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의 역할은 무겁고 어둡고 어렵고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린 시간과 다른 방향의 공간을 가진 작업들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작가의 설치 작업들은 오래고 깊은 비주체들의 정동적 조각이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사물의 드러내는 특유한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고, 사물 자체의 실질적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 ‘시간의 표현’으로서 실재적이다. 지역성과 장소성을 강조하는 공간 중심적 관점에서 시간성이라는 다른 축으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전회이다.

인간은 자라고 살아온 공간의 장소성에 깊이 관계하며 개인의 세계관과 감수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지역의 장소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재구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지역 예술 혹은 지역 작가라고 하는 말엔 물리적 공간으로서 지역 그리고 작업과 활동의 소재나 대상으로서의 장소성과 역사성으로 한정 하곤 한다. 작가 정현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의 지역성, 장소성, 역사성과 긴밀하게 관계하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인 다종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비주체가 담고 있는 복잡하고 섬세한 시간성으로 소중한 본질을 찾아가고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재구성하는 다른 지역성으로서 로컬리티를 발견한다.

글/ 채은영 (임시공간 디렉터)

정현 작가 인터뷰 작가 인터뷰 영상 바로가기

*정현(b.1961-, 인천출생)은 조각을 통해 재료가 가진 응축된 시간의 힘, 그 역사성을 드러내온 작가이다. 그는 철길의 침목(枕木), 아스팔트 콘크리트, 석탄, 등과 같은 산업폐기물을 재료로 얼굴이나 신체를 형상화하며 독특한 인간상을 구축해 왔다. <서 있는 사람>은 폐침목을 재료로 혹독한 현대 사회를 극복해 나가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나타낸 작품으로 인체의 모습은 거의 사라진 채 나무 원재료의 질긴 추상성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 또한 인간과 산업사회, 인간과 근대 문명의 치열한 대결과 화해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귀결된다. 아스콘으로 제작된 <무제>는 땅에 누운 인간의 형상, 공중에서 보았을 때는 산맥의 일부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도 재료, 즉 아스콘 자체가 조각이 되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드로잉 작업에서는 콜타르와 같은 재료가 강하게 부딪히며 드러나는 필과 획의 선적인 조형감이 재료 자체의 에너지로 현전한다. 오래되고 투박한 재료, 그 자체에 미적인 가치를 더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지나온 과거를 목도하는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사유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재료의 용도를 다한 재료의 물성이 드러내는 인간의 역사와 초월적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정현은 인천에서 출생해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국립미술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2년 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도쿄, 베이징, 프랑스 등을 무대로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04년 김종영 미술관 ‘오늘의 작가상’, 2009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 2017년 인천문화재단 ‘우현 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채은영은 통계학, 예술경영,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도시 공간에서 자본과 제도와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는 시각예술의 상상과 실천과 관심이 많은 리서치 기반 기획을 한다. 2016년부터 시각예술과 로컬리티, 생태 정치 관련 활동을 하는 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