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LEE Minha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소개
올해 한 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창작활동을 펼쳐나갈 2019년도 10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는 공모로 선정된 국내외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창작 역량 강화를 위해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발표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시각과 공연분야에서 활동하는 10기 입주 예술가의 창작과정과 작업세계를 공개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민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첨단예술표현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작가는 망각에 저항하면서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다움’이 상실되어가는 구조를 추적한다. 원시적인 매체와 신기술을 결합한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업은 모순이 점철된 형식과 육화된 텍스트를 특징으로 한다. 작가는 아이치 트리엔날레(Aichi Triennale, 2010), 고베 비엔날레(KOBE Biennale, 2013)를 비롯한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가리봉동 일대의 벌집을 주제로 한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갤러리 구루지, 2017)을 기획하였다. 작품 활동과 전시기획 외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아트레일 조성 프로젝트》(항동철길, 2015)와 같은 다수의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진행해왔다.

그을린 세계(The Scorched World)_소가죽, 불도장, 버티컬 플로터, 프로세싱_0.2m×14m×4m_2018/2019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가죽과 인두(버닝펜)라는 소재를 사용한 작업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소재나 매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작업하는 편이다. 주로 알려진 작업은 설치나 영상의 형식이지만 드로잉이나 사진작업도 있고 퍼포먼스를 하거나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원래 동양화를 전공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닥섬유를 이용한 설치작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신이 만들기를 더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렸을 적부터 가죽이라는 소재를 특별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08년 5월 광우병 촛불집회로 인해 촉발되었다. 광우병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다가 빠르고 효율적인 소고기 생산을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 동종 부산물을 사료에 섞어서 먹이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유전자가 변형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08년 12월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가자전쟁이 벌어졌는데, 뉴스 속보로 전송되는 화염에 휩싸인 불타는 도시의 이미지와 촛불로 뒤덮인 광장의 이미지를 보면서 일견 아무 관련이 없는 두 사건 속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가죽에 인두로 지질 때 발생하는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와 연기로 인한 (무언가의) 환기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많아서 홀로 조용히 무언가를 조사하는 사람이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으로 연결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한 가지 이슈에 매료되면 관련 서적, 영화, 자료 등을 살펴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수많은 고리 중에서 한가지 시각적 이미지를 낚아채서 작품화를 진행하는데, 자료를 찾으면서 동시에 작품의 재료 손질에 해당하는 바탕 작업을 병행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을린 세계(The Scorched World)_소가죽, 불도장, 버티컬 플로터, 프로세싱_0.2m×14m×4m_2018/2019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2017년 ‘아남네시스(Anamnesis)’ 프로젝트는 영상과 설치작품 <Immolation>으로 구성된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2008년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당시에는 실행할 여력이 안 되었다. 작가가 덮어쓴 가죽이 제2의 피부로 치환되어서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아로새긴다는 착상이었다. 가죽을 소재로 사용해 오면서 ‘한 꺼풀 벗기면 다 같은 피와 살’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왔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종으로 나눌 수 있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종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과 우리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해온다는 것을 부각하고 싶었다.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차별을 겪은 이야기를 공유해 달라고 모집했지만, 영상촬영 때문에 참가자 모집이 무척 힘들었다. 남자들의 경우 한이 맺힐 정도의 인상 깊은 이야기가 없을뿐더러, 수치를 감추고 싶어하는 남성사회의 문화가 작용하여 결국 한 명도 모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여성 참가자 5명으로 압축되었는데 차별의 위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맨 처음에 참가자들이 보여준 글은 신문기사나 고소장 같았다. 나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서 감정에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자’라고 제안을 했고 3~4회 걸쳐 그들을 만나면서 글을 추상적으로 함께 다듬어 나갔다. 그중에 한국인 혼혈인 이탈리아 국적의 코수 리디아 씨가 이상적인 미적 성취를 이뤘는데, 그녀의 글은 자신을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수천 개로 분열된 자아를 노래하는 한 편의 시로 완성되었다. 글이 완성된 후, 퍼포먼스 형식으로 영상을 촬영했는데, 직부감 컷이 꼭 필요해서 층고가 높은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을 대관해서 진행했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작품을 제작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구현 방식을 밀착시켜서 형식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노력하는 편이다. 현재로는 육화된 텍스트가 핵심 단어로 기능하는 것 같다.

아남네시스(Anamnesis)_영상 4K_20분 25초_2017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초등학생 때, 갑옷과 무기가 정리된 백과사전식 책에 끌렸었다. 나는 무기에서 고문 도구로 그리고 생체실험과 전쟁사로 이어지면서 홀로코스트와 조우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바로 세계사였다. 대체 이런 일들은 왜 벌어지는 것이며, 인류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는 걸까? 영향을 받은 책이 많아서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과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에게 존경을 표한다.
2010년 2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시리아를 중심으로 레바논, 요르단 등 인접국가 6곳을 리서치를 빌미로 돌아다녔다. 사실 <아남네시스> 작업에서 작가는 반군과 정부군이 함께 사는 마을을 상정하여 그곳에서 가죽 오브제를 짊어지며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작가는 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가죽 오브제에 직접 새겨 필사하는 로드다큐 형식의 영상으로 구상했었다. 언젠가 더 담대해지고 환경도 잘 갖춰진다면 꼭 실행해 보고 싶다. 촬영팀과 코디네이터, 통역사 등 대규모의 원정단을 꾸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전시지원금 같은 제도로는 실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이겠지만, 대규모 해외 로케이션에 걸맞은 지원금 제도가 현실적으로 없지 않은가. 사실, 세계지도 작업도 1964년 뉴욕 박람회의 상징인 유니스피어(Unisphere)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전체가 지름 120피트(36.576m)인 이것의 10분의 1 크기인 지름 3m의 구체로 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인터랙티브하게 구글링한 검색 내용에 맞춰서 좌표가 이동되는 것도 상상해봤다.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 누군가 제작비를 대준다면 바로 실현하게 할 자신도 있다.

 

상흔(Stigma)_5m×7m×2m_2019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학생 시절부터 예술가가 액티비스트의 역할도 가능한지 궁금했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다수 존재해왔고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지만, 실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움직이려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그래도 한 가지, ‘망각에 저항하는 도구’로써 예술의 역할은 있지 않나 하는 희망적인 생각이 있다. 인정받은 예술품의 특권이란 어딘가에 소장되어 보존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리고 후손들은 그 작업을 연구하고 교육할 것이고 말이다.
작년 고양 레지던시의 오픈스튜디오 때에도 관객 중에 한 분이 ‘질 것을 아는 싸움을 왜 계속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주셨다. 그건 바로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진흙탕 속에 발을 딛고 있으나 이상은 저 높은 곳을 향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분은 나에게 사회학이나 인류학을 전공해 보라고, 혹자는 정치가가 되어 보라고 조언해 준다. 내가 예술가를 선택한 것은 남겨질 작업이 ‘망각에 저항하는 도구’로 기능하기를 염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앞에 두고 관객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관객들도 내 작업의 배후에 있는 수많은 연결지점을 발견하면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내 작업이 예술로 인정받는 순간이란, 관객들이 관람 후에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제물(Immolation)_5명의 참가자들의 이야기
(우즈베키스탄, 터키, 중국, 이탈리아),
120개 국어로 된 다양한 종파의 기도문들, 철 프레임_400×150×280cm_2017
  제물(Immolation)_이탈리아어와
한국어 버전의 참가자 이야기
_돼지가죽에 실버 펜_48×113cm_2017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기회가 된다면 해외 레지던시를 더 경험해 보고 싶다. 2018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국제교환입주 프로그램을 통해 바우하우스 데사우(Dessau) 재단의 레지던시를 3개월간 경험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데사우라는 소도시에 있으면서도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확장의 가능성을 느꼈다. 특히 나의 관심사나 작업 주제들이 무거워서인지, 전시를 자주 하는 편이 못 된다. 그런데 내 작업이 가지고 있는 ‘차별-배제’, ‘인류-피부색’, ‘학살’, ‘성-속’, ‘육식’ 등의 키워드들은 오히려 유럽에서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나의 작업에 쉽게 만족을 못 하는 편이다. 나로서는 평생을 연구할 대주제를 설정하고 나아가고 있는데, 그 연구의 목표는 오픈해 놓은 셈이다. 거듭할수록 끝없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서 종종 방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나 희생자에 대한 애도에 중심을 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그 배후에 있는 구조를 알기 원하며, 그 구조가 드러나는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 그와 동시에 ‘그 구조가 드러난 작업’을 앞으로 10여 년 후에는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또한 ‘인간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드러나는 작업을 실현하고 싶다. 그 방법을 작업하면서 찾아 나가는 중이다. 이 방식은 수도자가 수행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목표를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지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다. 그 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탐구형 예술가로 기억해 주면 좋겠다.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A Concrete Box for Human Storage)_2-3합 장지에 콩댐, 인두 및 컷팅_480×330cm_2018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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