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에서 발굴된 특별한 유적

문학산(文鶴山),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를 품은 산
남산(南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문학산은 인천도호부 읍치(邑治)의 안산(案山 :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위치한 산을 의미)이자 인천을 상징하는 산이다. 지금도 시민의 휴식처가 되어 주는 문학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비고가 높아 인천 전역을 조망하기도 좋다. 아울러 문학산은 고대(古代)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비류백제의 도읍이라고 전하는 문학산성을 비롯해 백제 우물, 백제 사신이 중국으로 떠날 때 출항지로 알려진 능허대(凌虛臺), 선학동 일대의 백제토기산포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문학산은 전근대시기(前近代時期) 전설들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사모지고개에 얽힌 백제 사신의 이별 이야기, 술바위와 삼해주 설화, 갑옷바위와 배바위 이야기, 안관당과 인천부사 김민선 설화 등 문학산은 역사는 물론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능허대와 아암도
ⓒ화도진도서관
  학익동에서 바라본 문학산과 사모지 고개
ⓒ화도진도서관

 
문학산 기슭의 갑옷바위
ⓒ화도진도서관
  문학산 기슭의 갑옷바위
ⓒ화도진도서관

 

문학산에서 발견된 또 다른 인천 고대의 흔적
이토록 많은 역사의 흔적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문학산에서 몇 년 전 깜짝 놀랄 만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바로 문학산 제사유적이다. 유적을 확인한 미추홀구청은 바로 조사계획을 세우고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발굴조사단이 선정되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유적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이 유적에서는 가로세로 약 3.5m 내외의 제단(祭壇)과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시대 간돌화살촉, 통일신라시대 토제(土製) 잔(盞)과 완(碗 : 음식을 담던 낮은 높이의 용기),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 조각, 상감청자 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토제 잔 유물은 겹겹이 포개져 바위틈이나 제단 주변에 묻힌 상태였는데 이런 점은 제사 후 의도적으로 묻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학산의 제사유적에서는 어떤 제사가 이루어졌을까? 발굴조사단은 문학산 제사유적이 바다와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이런 추정이 나오게 된 이유는 사모지고개 설화와 유적의 입지 때문이다. 제사유적에서 약 150m 떨어진 사모지고개는 중국으로 떠나는 백제(百濟)의 사신(使臣)들이 능허대(凌虛臺)의 한나루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배웅 나온 가족들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아울러 유적이 위치한 곳은 바다가 조망되는 서쪽 능선이고 큰 바위에 기대어 제단이 만들어진 점도 이런 추정에 뒷받침하는 근거로 보았던 것이다.

 
문학산 제사유적 모습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제사유적에서 발견된 토제 잔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순화원년명(淳化元年銘) 기와 출토 모습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제사유적 주변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기와 조각 모습
ⓒ한국고고인류연구소

 

풀어야할 숙제, 제사유적의 성격
그렇게 문학산의 제사유적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가 이루어진 곳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제사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란거리가 있다. 문학산 제사 유적이 과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유적이었냐는 문제다. 서해안 일대의 전근대(前近代) 포구(浦口) 주변으로는 다수의 제사유적들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것이 부안의 죽막동 유적, 부안 격포리 유적, 흑산도 상라산 유적, 영암 월출산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 서해안 항로 상 기항지(寄港地)로서 해양교류와 관련이 깊다. 그리고 이들 유적에서는 항해의 안전을 위한 제사를 지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제사의 흔적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사를 지내고 의도적으로 파손해 묻은 여러 가지 유형의 토기(異形土器 :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형 토기)와 흙이나 쇠로 만든 모형 말이 공통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흙이나 쇠로 만든 말 즉 모형말 유물이다.
일반적으로 말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로서 제사 의례에 제물(祭物)로 사용되었는데, 바다를 낀 포구의 제장(祭場 : 제사를 치르던 곳)에서는 수신(水神)에게 바치는 제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말은 전근대시기에 중요한 이동수단이자 군사물자였다. 이 때문에 제사에 바치는 제물로 살아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모조마를 만들어 제사에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제사에 모조마를 사용하는 사례는 고대~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문학산의 제사유적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들을 볼 때 청동기시대~고려시대 전기까지 제사행위가 이루어졌지만, 바닷길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낼 때 표식적(標式的)으로 나타나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산 제사유적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현재로서는 정확한 제사유적의 조성 목적은 알 수는 없다. 다만, 인천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사유적이라는 점에서 볼 때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문학산 제사유적에 이어 계양산성에서도 제사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을 비교한다면 유적의 성격을 규명할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인천지역 역사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가 늘어났다.

부안 죽막동 유적 출토 모형 말
ⓒ한국학중앙연구원
월출산 유적 출토 모형 말
ⓒ목포대박물관

 

글/ 정민섭 연구원(인천역사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