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액션배우 장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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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이면서 인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듯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은데 배우 장동휘(張東暉, 1919~2005)도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왜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했던 이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는지…

하기야 『인천시사』에도 그의 이름 한 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랴. 앞서 소개한 여러 배우들도 모조리 누락되어 있다. 이들에 대해 인천사에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 인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게 하는 일이 아닐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인천 인물 하나를 더 찾아내 기록하고 시민들이 함께 마음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인천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야기가 옆으로 나갔다. 장동휘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나이 38세인 1957년으로 김소동(金蘇東)이 감독한 영화 「아리랑」에 첫 출연하면서였다. 그 후 그는 성격배우, 액션배우로서 19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박노식(朴魯植), 허장강(許長江), 황해(黃海), 독고성(獨孤星) 등과 함께 한국 액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영화배우로서 그의 행로는 분명하지 않다.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 있던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광복 후에는 악극단 <낙천지>의 멤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36년 고교를 졸업한 이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에 몸담으면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6ㆍ25때는 예술단으로 종군, 국군 위문 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인천의 유명한 장사’였다는 소문처럼 그는 건장한 체격과 독특한 마스크, 특유의 너털웃음, 상대를 압도하는 눈초리,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써 그만의 카리스마를 창출했다. 주로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에서 통쾌한 액션을 연기함으로써 남성미 물씬 풍기는 한국 최고의 액션 스타 1세대로 이름을 날렸다.

평생 단 한 번도 TV 출연을 하지 않은 것이나 나이트클럽 출연 자제 등 외고집 영화 인생을 산 장동휘. 그는 진정 선 굵은 영화인으로 세인의 가슴 속에 추억된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