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의 낙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
1940년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인천공설운동장(현재의 도원동 숭의아레나) 야구장 매표소 창구 뒤쪽에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선지일체(鮮支一体)’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조직적인 활동이 어려워진 시점에서 돌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낙서가 나타났으니 일제 당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지일체’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일제의 기만적 선전 문구인 ‘내선일체(內鮮一体)’를 당시 중국을 가리키는 지나(支那)로 바꾸어 조선과 중국이 하나라는 의미였으니, 발견 직후 인천 경찰은 배후에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있는 걸로 판단했음직도 하다.
‘범인’ 수색에 골몰하던 때 단서는 의외로 쉽게 발견되었다. 매표소 전면 외벽에 앞의 조선독립만세와 같은 필체로 ‘대동상업 입장료(大東商業入場料)’라 쓴 또 다른 낙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대동상업학교(대동세무고등학교의 전신, 서울 종로구 계동 소재)와 관련된 사람이 썼다고 판단한 경찰은 현재의 중구 신흥동에 살며 대동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8세의 현명림(玄明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해 심문했다.
처음에는 낙서한 사실을 부인했으나, 인천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 인천중학교 습자 담당 교사들의 필적 감정 결과 동일 필체라는 게 밝혀져 나중에는 인정했다고 한다. 현명림은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8살 때 인천공립창영소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15세 때 대동상업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여 기차로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이었다.
일제 경찰의 보고문서에 따르면, 대동상업학교에 입학한 뒤에 포스터에 흥미를 가져 책이나 공책에 연필로 포스터 연습을 위한 낙서를 많이 했다고 한다. 낙서가 발견된 건 10월 28일이었지만 낙서한 날은 2주 이상 앞선 10월 12일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하교하여 3시 30분경 집에 왔다가 혼자 산책하러 나가 공설운동장까지 간 것이다. 야구장 입구에 도착해서 보니 알파벳으로 뭔가 낙서한 게 있어 그걸 보고 낙서 생각이 들어 먼저 매표소 앞쪽에 ‘대동상업 입장료’라 쓴 뒤, 안으로 들어가 ‘조선독립만세’와 ‘선지일체’라 썼는데, 조선이란 말을 우선 쓰고 났더니 다음 떠오르는 단어가 독립만세여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해 11월 19일 인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 등에게 보고한 문서와 이 문서를 받아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11월 22일 보고한 문서에는 현명림이 단순히 평소의 버릇대로 낙서한 것으로 평소 온순한 성격에 학업 성적도 늘 상위권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 배후 관계도 ‘전연’ 없으며, 그동안 사상 방면의 서적을 읽은 일도 ‘전연’ 없다는 식으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 반성의 의사가 분명하여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기록하며 결국 기소유예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붙여 보고했다. 실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었는지, 임대업을 하는 현명림의 부친 등 가족들이 구명에 힘써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천 경찰의 이런 의견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에 의해 묵살되고 기소되어 1941년 1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판결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4년이었다.
1940년 가을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선을 확대하며 조선 등 식민지에서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때였다. 당시 고등학생을 나이만으로 현재의 고등학생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경찰조차 사상 문제가 없고, 포스터 제작에 취미를 가진 온순한 학생의 우발적 행위라 판단한 사건이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건 일제 당국의 위기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편 그렇게 온순한 학생조차도 ‘조선’이란 단어 다음에 자연스럽게 ‘독립만세’를 제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염원이 충만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건 이후 현명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학교는 다시 다닐 수 있었을까? 4년이라는 긴 집행유예 기간에 자책하며 지냈을까? 의문이 든다.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식민지라는 시기를 만나 어떻게 어그러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자 식민지 인천의 한 청소년을 기억하게 하는 사례이다.
인천공설운동장 1947년 항공영상(인천광역시 지도포털 편집)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