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같이 꿈을 꿔야할 것 같아요.”
밴드<스탑크랙다운> 소모뚜 인터뷰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의 모습을 통해 이주노동자 현실을 바라본 영화 <안녕, 미누>가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두차례 상영되었다. 작년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희소식도 잠시, 영화 주인공이자 밴드의 리더인 미누 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애도의 글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8개월이 지난 시점에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안녕, 미누>의 상영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의 만감이 교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밴드의 베이스를 맡았던 소모뚜 씨에게 이번 영화제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소모뚜 씨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지만,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소모뚜 씨의 배려로 영화스크린 너머에 ‘스탑크랙다운’의 지나온 삶을 잠시나마 음미 해볼 수 있었다.
영화 <안녕, 미누>를 처음 보셨을 때 어떠셨는지요?
2018년 일산에서 하는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에서 미누형하고 멤버들과 함께 봤어요. 정말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미누형의 이야기를 지혜원 감독님께서 잘 전달해주시기도 했고요. 우리가 한국 땅에서 제일 소중했던 모습을 잘 담아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인생을 헛되지 않게 살았다는 만족감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어요. 15년 전 나의 모습들이니까요. 그리고 미누형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한국 땅에서 일하느라 고생했지만, 음악을 통해 이주민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요.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 이주민의 삶을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들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모뚜에게 미누형은 어떤 분이셨나요?
미누형은 영화보다 사실 더 멋진 사람이에요. 그것보다 훨씬 멋지죠. 제가 어렸을 때 음악 생활하면서 짜증을 잘 내더라도 형이 제 곁에서 잘 참아주었어요. 형도 바빴을 텐데 밴드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죠. 분위기 메이커로 잘 챙겨주었고요. 동생들에게 살뜰하게 먼저 안부를 묻는 따뜻한 형이었어요. 제가 큰아들이기 때문에 형을 원했었는데 미누형이 한국에서 큰형 역할을 했었죠. 그리고 다른 밴드 멤버들보다 미누형과 더 가까이 지냈었어요. 왜냐하면 좋아하는 음악도 같았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비슷했거든요.
이주 노동자 인권에 대해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활동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95년도에 한국에 왔고 새벽 1~2시까지 밤늦게 일하는데 야근 수당을 못 받았어요. 어렸을 때라서 야근수당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요. 젊고 힘이 세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려고 결심했지만, 내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고 착취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어요. 그래도, 대한민국은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알 수만 있다면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서 희망을 보았고요. 친구의 똑같은 아픔을 듣고 내 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투쟁하고 결국 이들도 나와 같은 대가를 받으면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죠. 게다가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함께해주는 한국인도 계시니까 점점 힘이 났죠. 미얀마 밴드 활동 할 때도 관심 있게 바라봐주셨고요.
그리고 농성장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길을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요. 음악이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어요. 왜냐하면 무대에 올라서서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거든요. 또, 우리 음악을 들으면서 춤추고 재밌어하는 한국인과 이주민을 보면 보람과 확신이 생겼고요. 음악을 통해서 다른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어요. 미누형과 둘이 생수통을 쳤던 퍼포먼스도 사람들에게 이주민에 대한 좋은 인식을 주고 공감하게 하려는 활동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함께 갈 수 있던 것 같아요.
과거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상황과 여건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 생각하는지요?
아마도요. 과거에는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받지 못해 노동부에 호소하면 산업연수생이라면서 착취를 당하거나 내쫓겼죠. 그런데 지금은 이주노동자를 인정하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도를 도입했으니 옛날보다는 법의 보호 아래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이주민들이 정보를 스스로 얻거나 선배들로부터 얻으면서 권리를 함께 찾아가고 있죠. 그러나 우리 음악의 가사처럼 여전히 월급을 받지 못한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다만, 옛날에는 대다수 이주민이 불법체류자라서 진정서를 안 냈는데, 지금은 합법적으로 일하는 이주민 수가 늘어나서 기관에 진정서를 내고 내 권리를 찾죠.
최근에는 3D 산업현장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이주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렇죠. 옛날에는 이주 노동자의 80%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숨어 사느라 다양하게 활동을 못 했어요. 우리처럼 겁 없는 친구들만 활동했죠. 현재 활동가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불법체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과거에 고통과 아픔을 받았던 사람들인 것 같아요. 지금은 옛날보다 다문화 가족도 많고 여성, 아동, 미디어등 분야에서 진정성 있게 활동하는 인심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어요.
요즘 소모뚜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요?
2009년도에 미누형이 강제로 쫓겨나면서 미누형이 맡고 있던 이주민대표방송을 2년 동안 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 이주민 노래협회 ‘몽땅’에서 활동하고 있었고요. 그러던 중에 남 밑에서 일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아서 15년 동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던 형님과 뚜라라는 친구와 같이 회사를 만들었죠. 협동조합의 형태로 회사를 설립하고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는 제 고국과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어요. 이런 취지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브더욱글로리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현재 ‘몽땅’ 활동도 같이 하시나요?
처음에는 여기에 뚜라 혼자서 일하고 저는 몽땅 활동 하면서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주 노동자들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오거나 전화를 해서 도움의 손길을 구하죠. 나중에 그들이 이곳에 와서 다시 물건도 구매해주기도 하고 노동 상담을 요청하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회사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뚜라 혼자서는 회사경영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몽땅을 그만두고 여기 들어와서 일을 시작했어요. 여기는 미얀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 음식, 핸드폰, 미얀마 식품, 항공권, 숙소 등을 제공하고 있죠. 또 미얀마 복지센터라고 해서 미얀마 연합단체가 여기 있는데 거기서 제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에 처음 온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건가요?
우리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면서 찾아내야만 알 수 있었죠. 지금은 이미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길이 있기 때문에 여기 온 친구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자기가 어떤 길을 가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았던 삶을 통해 몇 가지 주의사항과 선택사항들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모뚜는 2013년도부터 부평구에 위치한 브더욱 글로리(Padauk Glory)라는 협동조합형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브더욱은 미얀마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으로 브더욱 글로리는 ‘꽃 그늘 아래에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호’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남아있는 멤버들과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의 재결성을 꿈꾸지 않나요?
미누형이 쫓겨나간 시점이 이미 밴드 활동의 막바지였어요. 그렇지만 우리 밴드를 없애려고 형을 잡아갔다는 괘씸한 생각에 우리 셋이서 밴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죠. 하지만 미누형이 있을 때처럼 밴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미누형이 노래하고 멘트를 하면 자기 파트만 잘하면 되고 공연하는 맛도 있었어요. 사명감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인드가 옛날만큼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스탑크랙다운이 우리를 위한 밴드인지, 아니면 이주민을 위한 밴드인지에 대한 거창한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미누형이 잡혀갔을 때도 스탑크랙다운은 이주민을 위한 밴드라서 활동을 이어왔고, 미누형이 멀리서 우리의 활동을 봐주고 응원해주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2집까지 발매했었나요?
단독으로는 2집까지 냈어요. 1집은 농성장에서 불렀던 <친구여 잘가시오>와 2집<Freedom>을 2007년에 발매했어요. 그리고 박노해 선생의 「노동의 새벽」을 유명가수들과 하나씩 맡아서 참여하게 되었죠. 저는 ‘손무덤’이라는 시를 작곡하게 되었고요.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 발매한 1집 <친구여 잘가시오>, 2집<Freedom>
출처 : Mnet
스탑크랙다운의 노래를 대부분 작곡 하셨잖아요.
작곡은 제가 했고 노랫말은 미누형과 같이 썼어요. 일과 공연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이 없었는데 2집은 내야겠다고 생각했었죠. 당시 벌어들였던 수익금을 개인이 쓰지 않고 대부분 앨범 작업과 활동비에 보탰어요. 일하는 내내 노래 만들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사장님 눈치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쪽지에 적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핸드폰에 녹음했죠. 집에 돌아와서는 기타 치면서 작곡하고, 새벽 2~3시에 미싱 파일로 멤버들에게 메일을 보냈고요. 그러면 멤버들이 자기 파트를 수정하고 저한테 다시 보내죠. 저도 다시 수정하고 완성해서 멤버들에게 확인받으면 그다음 날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바로 녹음했던 기억이 나요.
10년 전 인터뷰에서는 음악을 소통이라고 대답해주셨어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럼요. 음악 자체가 소통이에요. 우리가 말로 10분 이야기하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잖아요. 집중력도 떨어지고요.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아요. 음악은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저희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다행이고, 음악을 통해서 활동했던 것도 잘 선택한 일인 것 같아요.
관객들이 영화 <안녕, 미누>를 어떻게 보셨으면 좋겠나요?
제 감정을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많이 보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 땅에서 일만 하는 기계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한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다문화사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나름 함께 한몫하면서 같이 살아왔다는 것을 한국 분들이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서로 고마움을 느끼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주민도 각자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 오고 있지만, 한국도 이주민 없이 한국 사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거예요. 앞으로도 만날 일이 많을 텐데, 서로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모뚜님이 한국에서 원하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꿈이라는 것을 같이 이루어야 할 것 같아요. 옛날에는 혼자 꿈을 꾼 것 같아요. 이제는 꿈도 같이 꿔야 재밌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옛날에는 자신의 목표만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잖아요. 이곳에 정착해서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풍족하게 살고 싶고, 가족들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아요. 근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같이 꿈을 꾸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각자 길을 가면 서로 만나기가 어렵고 힘이 될 수 없어요. 한국에 오는 이주민의 꿈이 내 꿈과 전혀 다르지 않아요. 나도 그들도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같이 꾸고 싶어요.
미얀마복지센터를 설립한 이유도 그들과 같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예요. 내가 그들을 지원하고, 보호해주고, 내 삶의 경험을 나누면 때문에 이분들도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보답하죠. 그러면 어느새 제 꿈도 쟁취하는 거예요. 꿈을 같이 꾼다는 것은 이런 거죠.
인터뷰 진행 · 정리 /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 김가영